갑민가(甲民歌)-작자 미상
어져어져 저기 가는 저 사람아
네 행색 보아하니 군사 도망(軍士逃亡) 네로고나
허리 위로 볼작시면 베적삼이 깃만 남고
허리 아래 굽어보니 헌 잠방이* 노닥노닥
곱장할미 앞에 가고 전태발이* 뒤에 간다
십 리 길을 하루 가니 몇 리 가서 엎쳐지리
내 고을의 양반(兩班) 사람 타도타관(他道他官) 옮겨 살면
천(賤)히 되기 예사거든 본토(本土)* 군정(軍丁) 싫다 하고
자네 또한 도망하면 한 나라의 한 인심에
근본 숨겨 살려 한들 어데 간들 면할손가
차라리 네 살던 곳에 아무렇게 뿌리박아
칠팔월에 삼을 캐고 구시월에 돈피(獤皮)* 잡아
공채(公債) 신역(身役)* 갚은 후에 그 나머지 두었다가
함흥 북청 홍원 장사 돌아들어 몰래 팔 때
후한 값 받고 팔아 내어 살기 좋은 넓은 곳에
집과 논밭 다시 사고 살림 도구 장만하여
부모처자 보전하고 새 즐거움 누리려믄
어와 생원인지 초관(哨官)*인지
그대 말씀 그만두고 이내 말씀 들어 보소
이내 또한 갑민(甲民)이라 이 땅에서 생장하니 이때 일을 모를소냐
우리 조상 남중 양반(南中兩班) 진사 급제 계속하여
금장 옥패 빗기 차고 시종신(侍從臣)*을 다니다가
남의 시기 참소 입어 전가사변(全家徙邊)*한 후에
극변방(極邊方)인 이 땅에서 칠팔 대를 살아오니
조상 덕에 하는 일이 읍중(邑中) 구실 첫째로다
들어가면 좌수 별감 나가서는 풍헌 감관
유사(有司) 장의(掌儀) 채지 나면 체면 보아 사양터니
애슬프다 내 시절에 원수인(怨讐人)의 모해(謀害)로써
군사 강정(降定) 되단 말가 내 한 몸이 헐어나니
좌우 전후 많은 가족 차차 충군(充軍)* 되거고야
누대봉사(累代奉祀)* 이내 몸은 하릴없이 매어 있고
시름없는 친족들은 자취 없이 도망하고
여러 사람 모든 신역 내 한 몸에 모두 무니
한 몸 신역 삼 냥 오 전(三兩五錢) 돈피 두 장 의법(依法)*이라
열두 사람 없는 구실 합쳐 보면 사십육 냥(四十六兩)
해마다 맞춰 무니 석숭*인들 당할소냐
약간 농사 전폐하고 삼을 캐러 입산(入山)하여
허항령(虛項嶺) 보태산(寶泰山)을 돌고 돌아 찾아보니
인삼 싹은 전혀 없고 오가*잎이 날 속인다
하릴없이 헛되이 와서 팔구월 고추바람
안고 돌아 입산하여 돈피 산행(獤皮山行) 하려 하고
백두산 등에 지고 강 아래로 내려가서
싸리 꺾어 누대 치고 잎갈나무로 모닥불 놓고
하나님께 축수(祝手)하며 산신(山神)님께 발원(發願)하여
물채줄을 갖춰 꽂고 사망* 일기 원하되
내 정성이 부족한지 사망 기회 아니 붙네
빈손으로 돌아서니 삼지연(三池淵)이 잘 참이라
입동 지난 삼일 후에 일야설이 사뭇오니
다섯 자 깊이 이미 넘어 네 다섯 보를 못 옮기네
식량이 다하고 의복이 얇으니 앞에 근심을 다 떨치고
목숨을 살려 욕심 내어 지사위한(至死爲限) 길을 헤아려
인가가 있는 곳을 찾아오니 검천거리(劍川巨里) 눈에 보인다
첫 닭 울음소리 이윽하고 인가가 적적한 것이 아직 잠들어 있는 것 같네
집을 찾아 들어가니 혼비백산 반 주검이
아무 말 못하고 넘어지니 더운 구들 아랫목에
송장 같이 누웠다가 산란한 정신을 가라앉힌 후에
두 발 끝을 굽어보니 열 개의 발가락이 간 곳 없네
간신히 몸조리로 목숨을 부지하여 소에게 실려 돌아오니
팔십 되신 우리 노모 마중 나와 하시던 말씀
살아왔다 내 자식아 사망 없이 돌아온들
모든 신역 걱정할 소냐 논밭과 세간살림 모두 팔아
사십육냥 돈 가지고 파기소 찾아가니
중군파총 호령하되 우리사또 분부내에
각 초군의 모든 신역을 돈피 외에는 받지마라
관가의 명령이 이와 같이 매우 엄하니 할 수 없이 물러나는구나
돈 가지고 물러 나와 사정할 것을 지어서 하소연하니
번잡한소송이나판결에이르지말라하고군노장교파견하여
다급히 재촉하니
노부모의 원행치장(遠行治裝)
팔승 네 필 두었더니 팔 양돈을 빌어서 받고
팔아다가 채워내니 오십 냥이 남게 되겠구나
삼수각진 두루 돌아 이십 육 장 돈피 사니
십여일이 가까이 왔네 성화같은 관가분부
아내를 잡아 가두었네 불쌍하다 병든 아내는
감옥 안에 갇히어서 목을 매어 죽었단 말인가
내 집 문 앞 돌아드니 어미 불러 우는소리
구천에 사무치고 의지 없는 노부모는
불성인사 누웠으니 기절한 탓이로다
여러 신역 바친 후에 시체 찾아 장사지내고
사묘(祠廟) 모셔 땅에 묻고 애끓도록 통곡하니
무지미물(無知微物) 뭇 참새가 저도 또한 슬피 운다
변방 가운데 있는 우리 인생 나라의 백성 되어서
군사되기 싫다고 도망하면 화외민(化外民)이 되려나와
한몸의 여러 신역 물다가 할 새 없어
또 금년이 돌아오니 정할 곳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라
나라님께 아뢰자니 구중천문(九重天門) 멀어 있고
요순(堯舜) 같은 우리 성주(聖主) 일월(日月)같이 밝으신들
불점성화(不沾聖化) 이 극변(極邊)에 복분하(覆盆下)라 비췰소냐
그대 또한 내 말 듣소 타관 소식(他官消息) 들어 보게
북청 부사(北靑府使) 뉘실런고 성명(姓名)은 잠깐 잊었네
많은 군정 안보(安保)하고 백골 도망(白骨逃亡) 원통함 풀고
각대 초관(各隊哨官) 여러 신역 대소민호(大小民戶) 나눠 걷으니
많으면 닷 돈 푼수 적으면 서 돈이라
인읍(隣邑) 백성 이 말 듣고 남부여대(男負女戴) 모여드니
군정 허오(軍丁虛伍)* 없어지고 민호(民戶) 점점 늘어 간다
나도 또한 이 말 듣고 우리 고을 군정 신역
북청 일례(北靑一例) 하여지라 영문(營門) 의송(議送)* 정(呈)탄 말가
본읍(本邑) 맡겨 제사(題辭)* 맡아 본 관아에 부치온즉
불문시비(不門是非)올려매고형문(刑問)*한번맞았단말가
천신만고(千辛萬苦) 놓여나서 고향 생애 다 떨치고
이웃 친구 하직(下直) 없이 부로휴유(扶老携幼)* 한밤중에
후치령 길 비켜 두고 금창령(金昌嶺)을 허위 넘어
단천(端川) 땅을 바로 지나 성대산(聖大山)을 넘어서면
북청 땅이 긔 아닌가 거처호부(居處好否) 다 떨치고
모든 가속(家屬) 안보하고 신역 없는 군사 되세
내 곧 신역 이러하면 이친기묘(離親棄墓)* 하올소냐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나님께 비나이다
충군애민(忠君愛民) 북청 원님 우리 고을 빌이시면*
군정도탄(軍丁塗炭) 그려다가 임금님께 올리리라
그대 또한 내년 이때 처자 동생 거느리고
이 영로(嶺路)로 접어들 때 그때 내 말 깨치리라
내 심중에 있는 말씀 횡설수설하려 하면
내일 이때 다 지나도 반나마 모자라리
일모총총(日暮怱怱) 갈 길 머니 하직하고 가노매라
[해제]
이 작품은 창작 시기와 작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조선 영·정조 때(18세기) 성대중이 함경도 북청 부사로 있을 당시근처 갑산(甲山) 지역에 살았던 사람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갑산은 변방인 함경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곳으로, 조선 시대에 삼수와 더불어 유명한 귀양지 중 하나였다. 기온이 낮고 지형이 험준하여 경작지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의 사람들은 신역으로 인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몰락 양반이나 힘이 없는 민중은 족징(族徵)과 지방 관리의 학정 등으로 신역에 대한 부담이 더욱 커졌는데 이를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결국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 백성들의 삶을 힘겹게 하는 당대 사회의 모습을 작품 속 갑민의 삶의 모습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현실 비판적인 성격의 가사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갑민과 생원이라는 두 사람의 대화 형식을 통해 내용이 전개 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잠방이: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도록 짧게 만든 홑바지.
*전태발이: 다리를 저는 사람.
*본토: 본디의 고향.
*돈피: 담비 모피.
*신역: 나라에서 부과하는 군역과 부역.
*초관: 조선 시대에, 한 초(哨)를 거느리던 종구품 무관 벼슬.
*시종신: 임금 곁에서 문학으로 보필하던 벼슬아치.
*전가사변: 조선 시대에,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평안북도, 함경북도와 같은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하던 일.
*충군: 조선 시대에, 죄를 범한 자를 벌로서 군역에 복무하게 하던 제도. 대개 수군이나 국경을 수비하는 군졸에 충당함.
*누대봉사: 여러 대의 조상의 제사를 받듦.
*의법: 정해진 법.
*석숭: 중국 진나라 때의 부자 이름.
*오가: 두릅나뭇과의 활엽 관목.
*사망: 장사의 이(利)가 많이 남는 재수.
*군정 허오: 군적에 등록만 되어 있고 실제로는 없던 지방의 장정.
*의송: 조선 시대에, 백성이 고을 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관찰사에게 올리던 민원 서류.
*제사: 관부에서 백성이 제출한 소장(訴狀)이나 원서(願書)에 쓰던 관부의 판결이나 지령.
*형문: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던 형벌.
*부로휴유: 노인은 부축하고 어린이는 보살핌.
*이친기묘: 친족들과 이별하고 조상의 묘는 버림.
*빌이시면: ‘빌려주시면’으로 추정됨.
[주제]
부조리한 현실 비판
[구성]
•서사: 갑민을 본 생원의 말
•본사: 생원의 말에 대한 갑민의 대답
•결사: 갑민의 소원과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