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언사답(萬言詞答)-안도환
이보시오, 손님네야, 서러운 말 그만하오.
미친 사람의 말이라도 성인이 가리시니
시골말이 무식하나 내 말씀 들어 보소.
하늘과 땅과 인간 세상의 큰 기틀에 신분의 높고 낮음을 생각하니,
하루 한 때 근심 없이 다 즐거운 이 누가 있을꼬?
하늘에도 변화 있어 일식과 월식이 되고
바다에도 밀물과 썰물이 있어 조수와 석수가 있사오니,
춘하추동 사계절의 춥고 덥고 따뜻하고 서늘함이 돌아가니,
부귀인들 풀칠하여 몸에 붙여 두었으며
공명인들 끈을 달아 옆에 채워 있겠는가?
손님 팔자 좋다 한들 한결같이 다 좋으며
번성하고 화려하다가 고생한들 저런 고생을 항상 할까?
화려한 차림새의 높은 벼슬아치와 귀한 자손의 귀공자도
외딴 섬에서의 고생 다 지내고 임금의 은덕 입어 올라갔으니,
이 고생 다 겪은 이 손님뿐이 아니로세.
그토록 서러워하며 저토록 애를 썩여
귀양살이 애쓰나니 시원스럽게 죽어 모르려고 하는가?
바다에 빠져 죽으려는가? 굶어 죽으려는가?
목을 베어 죽으려는가? 독극물을 먹고 죽으려는가?
서러운 사람 다 죽으면 조선 사람 반이 되고
귀양 가서 다 죽으면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나무와 풀이 우거진 데 두견 슬피 우는 곳에
만고의 영웅이 묻힌 묘가 몇몇인 줄 모르니,
서러워 죽은 무덤 없고 애써 죽은 시체 없네.
손님 얼굴 보아 하니 몹시도 야위었으니
종이 붙인 배롱인가? 두 눈 박은 수숫대인가?
십오 리의 장승인가? 열나흗 날의 제웅인가?
실성한 광인인가? 혼이 나간 병자인가?
검은 눈 희게 뜨고 북녘만 바라볼 때
밭 가운데 허수아비가 새 날리는 모양이라.
일부러 죽지 않아도 병이 깊게 들었으니,
이 병 저 병 온갖 병 중에 그리워하는 상사가 첫 번째 병이니라.
천 리 타향 외롭다 하되 한술 물을 누가 떠 주며,
화타와 편작이 다시 살아 온들 손님의 병은 어쩔 수 없네.
매우 넓게 뜬 혼백이 망해대를 지나갈 때
죽은 이는 좋다 하나 산 부모를 어이할꼬?
(자식의 죽음을) 너무나 슬퍼하니 불효가 얼마나 막대한가?
동생 하나 있으나 아직 어리니 부모 봉양 누가 할꼬?
생전 불효 뉘우치며 죽어서 불효마저 할까?
규중의 예쁘고 젊은 아내 그녀인들 아니 가련한가?
평생 자기 한 몸의 좋고 나쁨이 손님에게 달려 있으니,
하루아침에 이별하고 적적한 빈방에 혼자 있어
지금 아직 살아 있다면 행여 다시 만나 볼까?
아침까지 반겨 듣고 저녁 등화를 위로 삼아
어린 아들 쓰다듬으며 눈물 흘려 하는 말이,
네 아버지 언제 올꼬? 오시거든 절하여라.
맺힌 근심 태우던 간장 한 치 한 치 다 썩는다.
의복과 버선을 지어 놓고 그것들을 착용할 수 있을지를 보려하고
하루에도 세 번씩 나가 기다리며 바라보는 눈이 뚫어지게 되었다가,
명정과 운불삽 앞세우고 검은 관 올라가면
바라던 것 끊어지고 일생을 아주 마치려니,
깊은 원한에 슬픈 울음이 높은 하늘 구름 사이에 사무치니
유명을 달리한 다른 혼백인들 좋은 마음 있을 것인가?
그때에야 뉘우친들 죽은 혼백 다시 살아날까?
염라왕께 사정을 하소연하고 인간 세상으로 설령 환생한들
부모 어찌 알아보며 아내의 박복한 팔자 어쩔 수 없네.
만사를 생각하니 죽음과 삶이 가리어서
죽은 후에 편하다 말고 살아서 고생 잠깐 하소.
장수가 인간 오복의 으뜸임을 손님은 모르시나?
하늘은 낮은 곳의 이야기를 들어주니 너무 애달아 하지 마소.
모든 사람이 성인이 아니니 진선진미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쉽겠는가?
지난날은 간하여 돌이킬 수 없지만 미래는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음이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한 후에 하늘의 명을 기다리소.
하늘이 낮은 곳의 이야기를 들어주니 사람이 겪는 곤란과 재액이 오래 갈까?
대 끝에서 삼 년이니 잠깐 조금 기다리소.
어야! 손님네야, 다시 내 말 들어 보소.
저도 이도 다 버리고 임금의 은혜마저 잊었는가?
좋은 물고기를 낚아다가 먹게 됨도 천은이요,
나무를 베어 따뜻하게 자는 것도 천은이요,
청풍 부는 북창에 누웠을 때 한가함도 천은이요,
넓은 바다에 바람이 불 때 장관을 이룸도 천은이요,
나아가도 천은이요, 물러가도 천은이오.
손님이 한 번 죽으면 큰 죄가 둘이로세.
부모를 잊었으니 불효도 되려니와
천은을 잊었으니 불충이 아닌가?
한 죄도 (용서받기) 어렵거든 두 가지 죄를 다 지었으니
아무리 혼백인들 무엇이 되려고 하시오?
풀에 가 의지하여 섭귀가 되시려나?
물에 가 의지하여 수귀가 되시려나?
흙에 가 의지하여 토귀가 되시려나?
나무에 가 의지하여 목귀가 되시려나?
여기저기 의지하여 뜬 귀신이 되시려나?
이 길 저 길 시름없이 잡귀가 되시려나?
이렇게 저렇게 빌어먹어 걸귀가 되시려나?
아무것도 못 먹어서 아귀가 되시려나?
아무도 없는 빈산 궂은비에 우는 귀신 되시려나?
아아, 손님네야, 마음을 고쳐먹어
죽겠다는 말 다시 말고 살아 할 일 생각하소.
손님 풀려 가오실 때 서울 구경 나도 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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