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
제 1대 동명성제 본기
1.주몽의 출생과 성장
삼국사를 다룬 대표적 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명성제의 성은 고씨,이름은 주몽(또는 추모. 중해라고도 함)이며 해모수와 유화가 그의 부모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를 북부여의 시조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어머니 유화는 하백의 딸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 해모수에게는 부루라는 아들이 있었으므로 주몽과 부루는 이복형제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는 유화가 해모수의 두 번째 아내가 되며,주몽은 그의 서자라는 주장을 가능케 한다.
해모수와 유화의 만남에 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거의 동일한데,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하백의 맏딸인 유화가 두 명의 여동생과 함께 놀고 있는데,천제의 아들(곧 천자이므로 왕)이라고 자칭하는 해모수란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온다.그리고 그는 유화를 압록강(요하) 가에 있는 어떤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떠나버린다.
그 후 유화는 임신을 하게 되고,이 때문에 해모수와 관계한 사실이 탄로난다.
이에 유화의 부모는 그녀가 부모의 허락도 없이 남자와 관계를 가진 것을 질책하며 그녀를 우발수에 귀양 보내버린다.
유화를 임신케 한 해모수는 이 무렵 이미 늙은 몸이었다.
그에게는 해부루라는 아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금와라는 손자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의 손자인 금와 역시 장성하여 왕위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따라서 해모수가 유화를 취한 일은 유화가 북부여왕 해모수의 눈에 들어 수청을 강요당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가능케 한다.
어쨌든 아이를 밴 몸으로 집에서 쫓겨난 유화는 해모수를 찾기 위해 부여 왕궁으로 향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금와를 만나게 된다. 당시 금와는 동부여의 왕이었다.
그는 동부여를 세운 해부루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유화는 그에게 할머니뻘 되었다.
따라서 금와는 유화를 왕궁으로 데려와 보살피게 된다(유화가 금와의 할머니뻘 된다는 사실은 동명성제 14년인 서기전 24년에 유화가 죽자,금와가 태후의 예에 준하여 그녀의 장례식을 치르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동부여의 왕궁에 거처하게 된 유화는 얼마 뒤에 아이를 낳게 되는데,그 아이가 바로 주몽이다.
이때가 서기전 58년이다. 주몽은 어릴 때부터 활쏘기에 능했는데,'주몽'이라는 이름도 부여말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의미한다. 주몽이 활을 잘 쏘고 용맹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금와의 아들들에겐 위협적인 일이었다.
금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특히 왕위계승권자인 대소는 위협적인 인물인 주몽을 몹시 싫어하였고,
그 때문에 누차에 걸쳐 금와에게 주몽을 없애버릴 것을 간언한다.하지만 금와는 대서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는 주몽을 마구간에서 일하게 하여 되도록 대소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였다.
하지만 주몽이 자람에 따라 대소와 그를 따르는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다.
비록 서자라고는 하지만 국조인 해모수의 아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대소에겐 크나큰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대소가 주몽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주몽의 모친 유화는 아들을 도피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 간들 살지 못하겠느냐.여기서 더 이상 주저하다가는 해를 당하기 십상이니 차라리 멀리 떠나 큰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유화의 이 같은 당부를 받아들인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 세 친구와 함께 졸본 땅으로 건너간다('삼국사기'에 기록된 동명성제의 출생과 성장 이야기 참조).
주몽이 태어난 연대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서기전 58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는 서기전 48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서기전 37년의 나이를 고려해볼 때
'삼국유사'의 기록보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주몽이 나라를 세운 시기가 22세 때이고,'삼국유사'에 따르면 12세 때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12세의 어린 소년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2.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과 고구려의 개국
주몽이 대소의 위협을 피해 망명한 졸본부여는 일명 '구려국'이라고 하는 곳이었다.
구려국은 흔히 '고리'。'구리'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으며,부여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구려는 부여,한 등과 마찬가지로 고조선 말기에 형성된 국가로 볼 수 있다.
구려의 위치는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의 통화와 집안,자성강。장자강,요하 유역 일대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 등 일부 사서를 바탕으로 구려가 요동 지역에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비정하는 학자들도 있고, 또 당시의 요동과 현재의 요동이 같은 곳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어 구려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어쨌든 이 구려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주몽은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의 탈출 사실을 알게 된 대소는 병졸을 보내 추격전을 벌였으나 주몽을 잡지는 못했다.
사서에서는 주몽이 추격당하던 중에 엄호수라는 큰 강을 만나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이는 그를 신비로운 인물로 만들기 위한 극적 장치에 불과할 것이다.
대소의 군사들을 따돌린 주몽은 모둔곡이라는 계곡에서 3명의 동지를 만난다.
모둔곡에서 주몽이 만난 3명의 동지는 재사,무골,묵거 등이었다. 재사는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 무골은 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묵거는 수초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은 자신의 신분을 밝힌 후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종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 등의 성을 내리게 된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서는 주몽이 이때 만난 세 친구를 신하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했으며,
졸본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비류수 가에 포막을 짓고 살며 세력을 넓힌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단지 홀홀단신으로 이국 땅에 와서 세 사람의 신하와 더불어 나라를 세운다는 내용이 전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삼국사기'의 편자들은 참고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그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만난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었고,그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내용은 '백제 본기' 온조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3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 보냈다.그 후 얼마 안 되어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백제 본기'에서는 이 같은 내용을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주몽이 3명의 동지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다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즉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로 갔고, 졸본부여왕에게 자신이 해모수의 아들이자 동부여를 세운 해부루의
이복동생임을 밝혀 졸본부여의 부마가 되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서는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간 것이 아니라 동부여에서 졸본부여로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백제 본기'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참고적인 내용을 부기하고 있다.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해부루는 북부여왕이 아니라 동부여왕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둘째는 온조였다.
그들의 어머니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서한 건소 2년(서기전 37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한 후 도읍을 정하고,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 들어 그녀를 왕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대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처럼 여겼다. 그러나 주몽은 부여에서 낳았던 예씨의 아들 유류(또는 유리)가 오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그가 주몽의 뒤를 잇게 되었다.이때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께서 부여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하여 왔을 때,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내주어 나라의 기초를 세우는 위업을 도와주었으니, 어머니의 조력과 공로가 많았다.
그러나 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가 유류에게로 돌아갔으니 우리가 공연히 여기에 있으면서 쓸데없이 답답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어머님을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살 곳을 선택하여 별도로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그의 아우와 함께 무리를 이끌로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와서 살았다는 설도 있다.
이 이야기에서는 주몽에게 시집 온 졸본 여자가 이미 2명의 아이가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주몽이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졸본 여자 소서노의 경제력에 바탕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이 이야기대로라면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부마가 된 것이 아니라 졸본 지방 유력자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했으며,
그녀의 가문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다는 뜻이 된다.
이 이야기는 연노부 중심의 고구려가 계루부 중심으로 바뀐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 등 다섯 종족으로 이뤄져 있었으며,처음에는 연노부에서 왕을 배출했으나 차츰 힘이 미약해져 나중에는 계루부에서 왕이 나왔다고 씌어 있다.
이 기록과 소서노 이야기는 일맥상통한다.즉 졸본부여로 망명한 주몽이 계루부의 족장 연타취발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계루부의 세력 확장에 기여하고 마침내 연노부를 누르고 왕이 됨으로써 계루부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노부를 중심으로 한 졸본부여의 국호는 '구려'였는데,계루부를 일으킨 주몽이 왕위에 오른 후부터 '위대한','숭고한' 등의 뜻을 가진 고를 덧붙여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하면서 부족연맹체 성격이 강했던 구려는 중앙집권적 국가인 고구려로 재탄생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주몽에 의해 처음으로 개국된 나라가 아니라 적어도 고조선 말기부터 구려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어오다가 주몽에 의해서 좀더 발전된 모습으로 다시 일어섰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몽은 이렇게 고구려를 건국한 다음에 자신의 해씨 성을 버리고 고구려에서 고자를 따서 고씨 성을 취하게 된다.
고구려의 건국연대에 대해서는 '서기전 37년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권22 -고구려 본기-끝에 실린 사론에는 "고구려는 진나라,한나라 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있었다."
는 내용이 있는데,이는 고구려가 진나라 시대부터 이미 존재했다는 뜻이 된다.
또 보장왕 27년 2월 기사에는 "고씨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운 지 이제 900년이 된다."는 기록도 있다.
이 같은 두 기록에 따라 '고구려 900년설'이 대두하여 개국연대를 서기전 277년 또는 217년으로 보는 견해가 생겼다.
이 같은 견해에 바탕하여 일각에서는 김부식이 고구려의 역사를 고의로 왜곡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신라 호족 출신인 김부식이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해 고구려의 개국연대를 신라보다 뒤에 두었으며,
그러기 위해서 동명성제 이후 다섯 또는 여섯 황제에 대한 기사를 삭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을 증명할 뚜렷한 증거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다소 비약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이 기록들은 고구려의 역사에 '구려'의 역사를 합친 것으로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고구려는 구려의 역사 위에서 재탄생한 국가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역사를 구려의 개국 시점부터 계산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권13 유리명왕 31년 기록에 서한의 왕망이 고구려를 낮춰 부르며 '하구려',즉 '비천한 구려'라고 칭한 바 있는데,
이를 보아도 고구려의 역사는 구려를 빼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는 '위대한 구려'라는 뜻으로 이해되고,당연히 고구려의 역사에 구려의 역사를 포함시켰을 것이다.
고구려 900년설은 이 같은 설정을 바탕으로 했을 때 정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의 사서들은 고구려를 '고려'라고도 쓰고 있는데,이는 고려에 대한 영어식 표기인 Korea의 어원이다.
흔히 Korea라는 말이 왕건이 세운 고려에서 연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왕건이 세운 고려조차도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 그 명칭을 답습한 것이기 때문이다. '코리아'가 왕건이 세운 고려에 어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현재 한국의 영어식 국명인 Korea의 역사를 1천 년 이상 앞당기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이는 매우 중요한 지적이 될 것이다).
3.동명성제의 영토확장전쟁과 고구려의 성장
(서기전 58년~서기전 19년,재위기간:서기전 37년~서기전 19년,약 18년)
동명성제가 왕위에 오르면서 구려는 국호를 고구려로 개칭하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정책을
실시한다. 동명성제는 영토확장을 위해서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이 더 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개국된 서기전 37년에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을 고구려에 복속시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비류국왕인 송양을 찾아가 담판을 벌이기도 하였다. 동명성제가 비류국을 찾아가 송양과 담판을 벌이는 장면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향해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구석에 외따로 살았기 때문에 한번도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오늘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소.그러나 과인은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있소이다."
그러자 왕이 대답했다.
"나는 모처에 도읍을 정한 천제의 아들이오."
이에 송양이 다시 말했다.
"우리 가문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이 지낼 수 없소. 그대가 도읍을 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떠하겠소?"
송양의 이 말에 왕이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활쏘기로 기예를 겨루기로 하였다.
하지만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단지 동명성제 혼자 비류국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했을 것이다.
또한 활쏘기 경쟁을 했다는 것은 비류와 고구려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송양이 이듬해(서기전 36년) 6월에야 항복을 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류국과 고구려의 전쟁을 동명성제와 송양의 활쏘기 경쟁으로 미화시켜놓은 것은 나중에 제2대 유리명제가 송양의 딸을 황후로 맞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송양이 항복하자 동명성제는 비류국을 '옛땅을 회복하다'라는 뜻의 고구려어인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 왕으로 봉했다.
비류국을 정복한 동명성제는 서기전 34년 7월에 마침내 졸본성을 완성하여 국가의 위상을 한층 높이고 지속적으로 영토확장전쟁을 수행한다. 그래서 서기전 32년 10월에는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령하여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해인국을 정복했으며, 서기전 28년에는 부위염으로 하여금 북옥저를 치게 하여 멸망시킨다. 이렇게 하여 고구려는 명실공히 대국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으며 동북지역의 강국으로 성장해 있던 동부여와 대등한 입장이 되었다.
이처럼 영토확장을 통해 고구려를 대국으로 성장시키고 있던 동명성제는 서기전 24년 8월 동부여에서 날아온 비보를 접하게 된다. 동부여 궁궐에 남아 있던 모친 유화 부인이 사망한 것이다.
유화 부인이 사망하자 동부여왕 금와는 할머니뻘 되는 그녀의 장례를 태후의 예로 치른 후 그 사실을 고구려에 통보하였다.
이에 동명성제는 동부여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어머니 장례를 태후의 예로 거행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토산물을 보냈다. 이는 동부여왕 금와가 고구려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다. 하지만 금와가 죽고 그의 장자 대소가 왕위에 오르면 동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된다.
대소가 언제 왕위에 올랐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서기전 19년 4월에 동명성제의 첫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가 동부여에서 도망쳐 고구려로 온 것을 볼 때,이 무렵에 대소가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즉 금와가 죽고 동명성제에 대하여 악감정을 품고 있던 대소가 왕위를 이어받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했거나 아니면 대소의 즉위로 아내와 아들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동명성제가 사람을 시켜 그들을 고구려로 데려오도록 조처했을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어쩌면 동명성제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유리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시켜 그들을 부여에서 데려왔을 가능성도 있다.
유리가 고구려에 오자 동명성제는 그를 곧 태자로 삼았으며,5개월 뒤에 40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 이 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능은 졸본 근처의 용산에 마련되었으며 묘호는 동명성제,즉 '동방을 밝힌 성스러운 임금'이라 하였다.졸본의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능이 현재 어느 곳에 있는지도 단언할 수 없다(졸본의 위치에 관한 내용은 '첫 도읍지 졸본의 위치'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고구려의 개국조인 주몽과 나머지 임금들의 묘호에 '왕'이 아닌 '제'를 붙인다.묘호에 '왕'을 붙이는 것은 그 나라가 제후국임을 의미하고,'제'를 붙이는 것은 그 나라가 자주적인 종주국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시 강대국이었던 고구려조의 묘호에 제를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삼국유사'에서 '동명성제'라 표기하고 있고,제 6대 태조대에 칭제건원(제라 칭하고 연호를 정함)의 흔적이 있으며,'광개토제 능비문'에서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게다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땅을 차지한 요나라의 칭제건원과 요나라를 무너뜨린 금나라의 칭제건원 역시고구려의 칭제건원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이에 따라 비의 칭호도 '황후'로 표기한다.
물론 동명성제 때부터 고구려가 종주국으로 군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묘호는 후대를 기준으로 소급 적용되는 것이 관례이기에 동명성제부터 '제'로 표기하고,그의 아내들의 칭호도 황후로 표기한다.
'삼국사기'이후 줄곧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묘호를 '왕'으로 칭했는데,이는 '삼국사기'가 갖는 한계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임을 밝힌 바 있지만,한편으론 송과 금의 틈바구니에 끼인 약자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조의 묘호에 '제'를 붙이지 못하고 '왕'을 붙였다는 것이다.
만약 '삼국사기'의 고구려조 묘호에 '제'를 붙였다면 당연히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조의 묘호에도 '제'를 붙여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그럴 입장이 못 됐다.
고려는 송。거란 등과 조공외교를 하고 있었고,거란을 멸망시키고 힘을 팽창시키고 있던 금과도 그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가 고구려조의 묘호에 '제'를 쓰고,또 고구려를 계승한 자신들의 묘호에도 '제'를 쓴다면 심각한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묘호에 '제'를 붙인다는 것은 곧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으로 칭제건원의 의미이다.
고려가 칭제건원할 경우 심각한 외교적 어려움을 겪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위협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연호는 당시 동북아 사회의 외교관계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그 같은 외교관계의 틀 속에서 무역과 전쟁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 각국의 역사를 '고구려 본기','백제 본기','신라 본기'로 쓰고 있다.
당시 역사서 서술에서 황제국의 역사는 '본기'라 하고 제후국의 역사는 '세가'라 했던 점에 비춰볼 때 이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록 삼국의 묘호에 '제'를 붙이지는 못했지만 삼국의 역사서를 세가가 아닌 본기라고 칭함으로써 '삼국사기'편찬자들은 삼국이 제후국이 아닌 자주적인 종주국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조선 문종대에 완성된 '고려사'에서는 고려의 역사를 본기가 아닌 세가로 처리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는 확인된다.
하지만 고려의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고구려조의 묘호에 '제'를 붙이지는 못하고 '왕'을 붙였을 것이고,고구려보다 약자였던 신라와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신라와 백제의 묘호에 대해서는 각국의 본기에서 별도로 언급하도록 하겠다.아울러 참고로 고려조 제10대 정종,제11대 문종 등은 '제#임금 제#'대신 '제#억제할 제#'를 사용하여 '왕'이라는 호칭을 피하고 '제'를 칭한 사실이 있음을 밝혀둔다).
'삼국사기'는 편찬된 이후에 송나라에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고,또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금나라에도 보냈을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가 단순히 국내 보관용이 아니라 대외 홍보용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삼국사기'에 유난히 '조공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고려는 예로부터 외교관례를 잘 지켜온 국가임을 송이나 금에 강조하여 외교상의 대의 명분을 얻고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조공 기록이 많다 하여 지금껏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몰아가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는데,이는 근본적으로 당시의 외교관습을 전혀 모른 데서 비롯된 잘못된 판단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삼국사기'를 단순히 김부식 개인이 작성했다고 보는 시각도 문제이다.
'삼국사기'편찬에 있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김부식이 모든 자료를 모으고 기록한 것은 아니다.
김부식 이외에도 10명의 학자가 이 작업에 참여했으며,작업에 참여한 10명의 학자는 모두 국가의 관리들이었다.
말하자면 '삼국사기'는 국가적 차원의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 김부식 개인의 판단에 의해 편찬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내용을 김부식 개인의 사상으로 몰아가는 시각은 사라져야 한다.
4.동명성제의 가족들
제 1대 동명성제 가계도
해모수
북부여의 시조
│
├──────── 제 1대 동명성제
│ 。주몽,B.C.58년~B.C.19년
유화 。재위:B.C.37년~B.C.19년,약 18년
하백의 딸 。부인:2명 hl2tci
。자녀:3남
│
│
│ 1남
황후 예씨 ─── 제 2대 유리명제
│
│ 2남
│ 양자 ┌─ 비류
황후 연씨 ──┤
└─ 온조
동명성제는 부여 출신 황후 예씨와 졸본 출신 황후 연씨(소서노) 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이들에게서 3명의 아들을 얻었다. 예씨 소생으로는 유리명제가 있으며, 연씨 소생으로는 비류와 온조가 있다.여기에서는 이들 중 예씨와 연씨의 삶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한다(유리명제는 유리명제본기에서 언급하기로 하고,비류와 온조에 관한 내용은 '신삼국사기-백제 본기-''제 1대 온조'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황후 예씨(생몰년 미상)
제 1황후 예씨는 부여 여자로 동명성제가 동부여에 머무를 때 시집왔다.그녀가 언제 결혼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주몽이 동부여를 떠날 때 유리를 잉태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결혼시점이 주몽의 망명시기와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하던 시기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1년 전쯤인 서기전 38년경으로 볼 수 있다.따라서 주몽과 예씨의 결혼시기는 서기전 38년 또는 39년일 것이다. 주몽이 떠난 후에 그녀는 계속 동부여에 머물러 있었다.아마 이때 그녀는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과 함께 지냈을 것이다.그리고 주몽이 떠난 지 몇 개월 후 유리를 낳아 혼자 길렀으며,서기전 19년 5월에 유리와 함께 고구려로 와 황후가 되었다. 소생으로는 유리명제 1명뿐이며,능과 죽음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황후 연씨(서기전 66년~서기전 6년)
제 2황후 연씨는 구려국(졸본부여) 계루부 족장 연타취발의 둘째 딸로 이름은 소서노이며 서기전 66년에 태어났다.연타취발은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었다.그는 동부여를 탈출하여 자신을 찾아온 주몽을 대한 후,그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둘째 딸 소서노를 그에게 시집 보낸다.이때가 서기전 38년경으로 소서노의 나이 29세 때쯤의 일이다.
일설에는 그녀가 주몽에게 시집 오기 전에 우태라는 사람과 결혼하였다고 한다.그래서 그에게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며,우태가 죽은 후에 졸본에서 혼자 살다가 동부여에서 도망온 주몽을 만나 재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서노의 나이가 주몽보다 여덟 살이나 많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준다.즉 소서노가 서른이 다 되도록 시집을 가지 않고 있다가 21세의 주몽과 결혼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대개 10대 후반이면 남녀가 결혼을 하였다.그런데 부족장의 딸인 소서노가 서른이 가깝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소서노가 시집을 갔다가 남편과 사별하여 아이들을 키우며 혼자 살다가 주몽과 재혼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설에는 주몽이 서기전 58년 태생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에 태어났다는 말도 있는 것을 고려할 때,소서노가 서른이 넘어서 주몽과 결혼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주몽이 여덟 살이나 위인 여자와 결혼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아무런 기반도 없는 이국 땅에서 주몽이 연타취발의 사위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겠지만 부족장인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가 주몽보다 여덟 살이나 많고 아이도 둘씩이나 딸려 있는 경우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주몽은 지략과 무술을 겸비한 유능한 젊은이였기에 소서노와 연타취발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주몽은 자신의 야망을 펼치기 위해 정치。경제적 기반이 탄탄했던 소서노와 결혼하여 그녀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돌봤다는 뜻이다.
이를 증명하듯 주몽은 소서노와 결혼함으로써 계루부의 중요 인물로 부상한다.
그리고 이때 주몽은 능력을 발휘하여 계루부의 힘을 강화시킨다. 당시까지만 해도 구려의 정치는 연노부 중심으로 이뤄졌고,왕도 연노부에서 세웠다.
하지만 주몽에 의해 계루부가 막강해지면서 연노부는 밀려나고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다.주몽은 바로 계루부가 배출한 첫 번째 왕이었던 것이다.
연씨는 주몽이 이처럼 고구려를 개국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정치。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고구려 개국에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녀는주몽이 죽은 뒤에 고구려를 떠나야만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서기전 19년에 동부여에 살고 있던 주몽의 첫 부인 예씨와 원자 유류(유리)가 고구려에 오고,유류가 태자로 책봉되면서 연씨는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주몽이 죽자 자신의 족속들과 함께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쪽으로 떠난다. 남쪽으로 떠난 소서노 일행은 다시 두 파로 갈라진다.비류가 한 무리를 형성하여 미추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고,온조가 나머지 무리들과 함께 위례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소서노는 온조 일행과 함께 위례에 머무른다.그리고 그곳에서 13년을 더 살다가 서기전 6년에 6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5.'삼국사기'에 기록된 주몽의 출생과 성장 이야기
고구려를 개국한 동명성제에 개한 이야기는 한국과 중국의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한국측 기록은 '광개토제 능비문'을 비롯하여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세종실록'의 지리지 등에 실려 있으며,중국측 기록은 '위서'。'주서'。'양서' 등에 실려 있다(광개토제 능비의 정식 명식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광개토제 본기 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들 중 한국측 사료들의 편찬시기를 살펴보면 '광개토제 능비문'은 현재 남아 있는 건국 이야기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5세기 초엽에 작성된 것이며,'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때인 1145년 김부식의 주도하에 국가사업으로 편찬된 정사이다.또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때의 승려 일연이 13세기말에 쓴 역사서이고,'제왕운기'는 고려 충렬왕 때인 1287년 이승휴가 쓴
것이며,'세종실록'의 지리지는 조선 단종 때인 1453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에 있는 것이다.
한편 중국측 사료인 '위서'는 북위(316~535)의 역사로서 북제(550~577)의 위수가 554년에 편찬한 책이며,'주서'는 '북주서'또는 '후주서'라고도 하며 북주(557~581)의 역사로서 당나라 영호덕분(583~666)이 편찬한 책이다.또 '양서'는 중국 남조 시대의 국가인 양(502~557)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진나라 사람 요찰과 그 아들 요사렴이 636년경에 쓴 것이다.
이 밖에도 '수서','북사' 등에도 '위서','양서'의 내용과 비슷한 고구려 건국 이야기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사서들의 기록은 지명이 몇 개 다른 것을 제외하고는 그 내용이 대동소이한데,'삼국사기' 권 13 -고구려 본기- 동명성왕편의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다.이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주몽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싣는다.
시조 동명왕의 성은 고씨이고,이름은 주몽(추모 또는 중해)이다.
이 일에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늙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다.그는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그곳에 있던 큰 바위를 보고 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그래서 이상하게 여긴 왕이 사람들을 시켜 그 바위를 굴려보게 하였더니 개구리 모양을한 황금색의 어린애가 있었다.왕이 기뻐하여 "이는 바로 하늘이 내게 준 아이로다." 하고 말했다.그리고 그 아이를 데려와 금와라는 이름을 주고 길렀고,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국상 아란불이 말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울 것이니,너는 여기서 떠나라.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으로 삼을 만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아람불은 이렇게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였다.그 후 왕은 국호를 동부여라고 했다.그리고 그 옛 도읍지에는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금와가 왕위를 이었다.이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사연을 물었다.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 유화입니다.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그 길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금와가 그 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그녀에게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살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이로 인해 태기가 비치더니 다섯 되들이의 큰 알을 낳았다.
왕은 그 알을 가져다가 개와 돼지에게 주었다.하지만그 짐승들은 이를 먹지 않았다.그래서 다시 길가에 버렸더니 지나가던 소와 말이 피하며 밟지 않았다.이에 나중에는 들판에 갖다버렸더니 새들이 날개로 그것을 덮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왕은 마침내 그것을 쪼개려 하였다.하지만 깨뜨릴 수가 없었다.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미가 그것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그의 골격과 외모가 영특하였다.
그의 나이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부여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으며,그 사람됨이 용맹하므로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생길까 두렵습니다.그러니 청컨대 그를 없애 버리소서."
그러나 왕은 그의 청을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빨리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아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왕은 살진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다
하지만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더 많았다.
왕의 아들과 여러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계략을 몰래 알아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고 한다.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간들 살지 못하겠느냐.여기에서 주저하다가 해를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멀리 가서 큰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이에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에 이르렀다(엄호수는 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거기에서 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그래서 그들은 추격해 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염려하였다.그때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하백의 외손이다.지금 도망 중인데 뒤쫓는 자들이 추격해 오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그 덕분에 주몽 일행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아오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위서'에는 '보술수에 이르렀다' 고 기록되어 있다).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고 있었고,한 사람은 납의(장삼)를 입었으며,나머지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그들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이며 성과 이름은 무엇인가?"
삼베옷을 입은 사람은 '재사'라고 했으며,장삼을 입은 사람은 '무골'이라고 했고,수초로 옷을 만들어 입은 사람은 '묵거'라고 했다.하지만 성은 말하지 않았다.그래서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무골에게는 중실씨,묵거에게는 소실씨의 성을 지어주었다.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나는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자 합니다.그런데 때마침 세 분의 현인을 만났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소?"
주몽은 드디어 재능에 따라 그들에게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에 이르렀다('위서'에는 '홀승골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험준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였다.그러나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였으므로 비류수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또한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고 이를 따라 '고'를 성으로 삼았다.
일설에는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아들이 없던 그곳 왕이 주몽을 보자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그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주몽의 출생부터 즉위까지의 과정이다.이 내용 중 일부는 주몽을 신비화하기 위한 장치일 것이다.이를테면 알에서 태어 났다든지,또는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자라와 물고기들의 도움을 받는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하지만 나머지 내용들은 사실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사서들에 실린 내용도 이와 비슷한데,다만 '삼국유사'에서는 해모수와 해부루의 관계를 좀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삼국사기'에서는 해모수와 해부루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삼국유사'는 -북부여전-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한 선제 신작 3년 임술(서기전 59년) 4월 8일 천제가 5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홀승골성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를 왕이라 일컬으며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고 하였다.그는 자칭 이름을 해모수라고 하였으며,아들을 낳아 부루라고 하고 '해'씨로 성을 삼았다.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옮기게 되고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또 '삼국유사'는 -고구려전-에서 '단군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부루와 주몽이 이복형제일 것이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그리고 이 같은 주장은 금와 유화 부인을 태후의 예로 장사지낸 것이나 주몽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사실 등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6.첫 도읍지 '졸본'의 위치
고구려의 첫 도읍지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졸본'으로 기록하고 있고,'광개토제 능비문'에서는 '홀본','위서'에서는 '홀승골성'으로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이 세 지명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를 졸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삼국사기'는 동명성왕 4년(서기전 34년) 7월에 졸본성의 궁실과 성곽이 건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런데 주몽이 즉위하기 이전의 구려국을 졸본부여라고 했던 것을 보면 주몽이 도읍으로 정하기 이전에 이미 졸본은 구려의 수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때문에 주몽이 창건한 졸본성은 구려국 시대에 있던 성곽의 규모를 확장시킨 것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졸본 내에 주몽이 축성한 또 다른 궁성을 지칭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즉위 3년 만에야 비로소 졸본성을 완성한 것을 감안할 때 후자,즉 고구려의 첫 궁성인 졸본성은 주몽이 새롭게 축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다.따라서 동명성제 당시 졸본에는 구려국 시대의 궁성과 고구려 시대의 궁성이 함께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처럼 졸본성이 두 개였다고 할지라도 고구려의 첫 도읍지가 졸본에 건설된 것만은 분명하다.그러나 고구려가 첫 도읍지로 선정한 졸본의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졸본의 위치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그것은 대개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 번째는 오녀산성설이다.지금의 만주 환인 북쪽 환인분지 내 해발 약 800미터의 산지에 축성된 이 오녀산성은 남북 약 1,000미터,동서너비 약 300미터의 비교적 큰 규모의 성이고 부근에는 환인현 고력묘자촌의 적석총(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일명 돌무지무덤)을 비롯한 많은 고분군이 있다.하지만 이 고분군만으로 이곳을 졸본이라고 비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우선 졸본을 언급하면서 오녀산성이라는 이름을 언급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고,다음으로는 고고학을 바탕으로 한 유적지 중심의 사관은 고고학의 발전과 변화,그리고 다른 유적지의 출현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일회적이고 가변적인 추론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이 같은 방법에만 의존할 경우 역사의 현장은 수시로 옮겨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요동설로 '삼국유사'를 쓴 일연의 주장이다.그는 -고구려전-에서 "고구려는 졸본부여이다.더러는 졸본주가 지금의 화주(함남 영흥)또는 성주(평남 성천)라고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이다.졸본주는 요동 지역에 있다."고 쓰고 있다.
이는 다음의 '삼국사기'보장왕 4년 5월의 당태종에 의한 요동성 공략 기사 에서도 드러난다.
"이세적이 밤낮을 쉬지 않고 요동성을 공격한 지 12일째에 당나라 왕이 정병을 이끌로 합세하여 성을 수백 겹으로 둘러싸니 북과 고함 소리는 천지를 흔들었다.성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갑옷과 섬모(날카로운 창)가 있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요동성에 주몽의 사당이 있다고 했다.국조의 사당이 첫 도읍지에 있거나 궁성에 있었다면,요동성은 당시 궁성이 아니었으므로 첫 도읍지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하지만 이는 국조의 사당이 궁성 또는 첫 도읍지에만 있었다는 가정이 사실로 입증될 때만 성립될 수 있는 논리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 또 있다.그것은 요동성에 있던 "(주몽의) 사당에 쇠사슬갑옷과 섬모가 있었다."는 내용이다.이 쇠사슬갑옷과 섬모는 분명 주몽의 것이거나 아니면 주몽과 관련된 어떤 인물이 남긴 물건일 것이다.따라서 이 특별한 갑옷과 섬모는 단 하나 뿐일 것이고,그것은 가장 중요한 곳에 보관되어야 마땅하다.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곳이 요동성이었다면 요동성은 도대체 당시의 어떤 곳이었겠는가?
이 물음은 다시 요동이 처음으로 도읍한 곳,즉 졸본이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하지만 졸본이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이 옳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고려시대의 요동와 고구려 건국 당시의 요동의 위치가 같은 곳이라고 단정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동이란 요수의 동쪽을 일컫는다.하지만 고구려 당시의 요수가 현재의 요하(랴오허)였다는 주장과 현재의 난하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때문에 요동을 요하의 동쪽에 설정해야 할지,아니면 난하의 동쪽에 설정해야 할지 아직 불분명한 상태다.일반적으로 요하를 당시의 요수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난하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중국 전국 시대인 서기전 480년에서 서기전 222년 사이에 편찬된 '산해경'에는 "요수는 위고의 동쪽을 나와서 동남으로 발해에 흘러 들어가며 요양에 들어간다."고 씌어 있다.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을 '요수는 위고의 동쪽을 나와서 동남으로 흘러 요양을 지나 발해로 흘러들어간다.'고 고쳐야 옳다고 말한다.그리고 이렇게 고쳤을 경우 요수는 오늘날의 난하를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이렇게 될 경우 요동 지역은 오늘날의 난하 동쪽을 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이 주장은 다소 작위적인 면이 있다.말하자면 요수를 난하로 설정하기 위해 기록을 변형시켜 해석했다는 뜻이다.그래서 좀더 확실한 증거가 요구된다. 중국측이 말하는 요수가 난하였다는 것은 수나라의 양광이 고구려를 침입하기 위해 군사를 결집시킨 곳이 난하의 서쪽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다음은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22년 봄 2월,수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여름 4월,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하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영양왕 22년)
여기서 양광이 군사를 결집시킨 '탁군'은 지금의 북경이다.그리고 여기서 결집된 수나라 군사 113만 대군은 이듬해 정월에 양광의 출전명령에 따라 고구려로 진격한다.그 후 그들의 출정식은 약 40일간에 걸쳐 이뤄졌는데,그 기간 중에 양광의 군대는 요수에 이르렀다.양광이 탁군에서 출정식을 가진 것은 탁군이 고구려와 멀지 않은 곳에 일었기 때문일 것이다.탁군(북경)에서 동쪽으로 100여 리를 나아가면 난하가 나온다.하지만 요하는 탁군에서 적어도 1,300여 리를 가야 도착할 수 있다.때문에 양광이 탁군에서 군대를 결집시킨 것은 난하를 건너기 위함이라고 보아야 한다.말하자면 난하가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의 경계였다는 뜻이다.그리고 당시 그록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경계를 요수라고 기록하고 있기에 수나라가 건넌 요수는 난하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에 따라 중국측의 요수는 난하이고,중국의 요동이 난하 동쪽이라면 요동에 있었다는 졸본 역시 난하 동쪽에 비정해야 한다.즉 졸본이 요동에 있었다고 해서 꼭 현재의 요하 동쪽에만 한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삼국유사'는 현재의 요하를 고구려 당시에는 압록수라고 지칭했다고 쓰고 있는데 이 역시 난하가 요수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7.고구려 민족의 형성과 동명성제 시대의 주변 국가들
고구려의 형성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동명성제 시대의 고구려 주변 국가들의 면면을 파악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주몽의 고향이자 제 2대 유리명제의 고향이기도 한 부여,영토확장정책의 첫 번째 대상이었던 말갈,최초로 고구려에 복속된 비류,그리고 다음으로 복속된 해인과 북옥저 등은 고구려 초기의 영토 문제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성들이 어떤 민족들로 구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동이족에서 흘러나온 예맥족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국가들이다.따라서 이 국가들을 형성한 사람들을 알기 위해서는 동이와 예맥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이에 동이,예맥에 대해 언급하고 부여,말갈,비류,해인,옥저 등의 성립시기 및 위치와 영토에 대하여 간단하게 기술한다.
동이
'동이'라는 말은 초기에는 하나의 민족을 의미하기보다는 중국의 한족들이 자신들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해서 부른 명칭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그렇지만 동이는 단순히 한족들의 동쪽에 머무른다는 의미만 있지는 않았다.동이를 풀이하면 '동방의 이'족이란 뜻인데,'이'에 대하여 중국 최초의 문자학 서적으로 후한 때 허신이 편찬한 '설문해자'는 "큰 것을 따르고 활을 따르는 동방의 사람들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설명은 이족이 '큰 것을 숭상하고 활을 잘 다루는' 특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때문에 동이는 단순히 한족이 머므르던 곳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것을 지향하고 활을 잘 다루는 동방의 종족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활을 잘 다루었다는 사실은 이 같은 동이족의 특성와 무관하지 않다.즉 활을 아주 잘 다룬다는 것은 동이족의 왕이 될 자질을 갖추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활을 잘 쏘아 왕이 된 예는 비단 주몽에 한정되지 않는다.회수 유역의 서언왕이나 유궁(하나라 시대에 지금의 산동성에 있던 나라)의 예왕도 활을 잘 쏘아 왕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며,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활의 명인이었다.말하자면 동이족은 나라를 세우는 인물이 갖춰야 하는 덕목의 하나로 궁술을 꼽았던 것이다.
그러나 동이족은 단순히 궁술만을 내세우지는 않았다.'후한서' -동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방을 이라 한다.이는 곧 뿌리이며,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의 나라이자 죽지 않는 나라가 된 것이다."
이 기록은 '큰 것을 숭상하고 활을 잘 다룬다'는 '이'의 두 가지 특성 중에서 '큰 것을 숭상'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큰 것'이란 크고 원대한 자연과 우주의 이치를 말하며,곧 '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따라서 '이족'이란 '도를 숭상하고 활을 잘 다루는' 특성을 가진 종족이라는 뜻이 되며,'동이족'이라고 했을 때는 '도를 숭상하고 활을 잘 다루는 동방의 종족'을 일컫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동이족은 대개 견。우。방。황。백。적。현。풍。양이 등 9종으로 분류되는데,이들은 한족의 활동영역이 동쪽으로 확대되면서 점차 중원에서 밀려나와 중국의 동해(황해)안과 북방에 밀집된다.
한족에 의해 동쪽과 북쪽으로 밀려난 동이족은 한과 예맥으로 불리게 된다
.주로 발해만을 기점으로 황하의 동북 방향 쪽에 머무르던 사람들은 예맥을 형성했으며,중국의 동해(황해) 연안과 한반도 및 그 주변 지역,일본 열도등에 머무르던 사람들은 한을 형성하였던 것이다.그리고 고구려는 예맥이 중심이 되어 점차 한과 주변 부족들을 흡수하는 형태를 거쳐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예맥
예는 '예' 또는 '예'로 기록되어 있다.먼저 예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면 예라는 한자를 '벼농사를 지으면서 매해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이런 의미의 예가 '물을 좇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예(다음 예)로 바뀌게 되는데,이 또한 벼농사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즉 벼농사를 위해서는 물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예'와 '예'는 같은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맥은 대개 '맥' 또는 '맥'으로 기록되어 있다.여기서 맥은 신화적인 동물인 '맥'을 의미하거나 '북쪽'을 의미한다.맥은 불을 뿜는 동물이라고 전하고 있는데,이는 흡사 불을 잡아먹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연상케 한다.따라서 이 경우 '맥'은 '맥을 숭배하는 사람들' 또는 '맥이라는 동물을 연상케 하는 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또 맥을 단순히 북쪽을 가리키는 것이라 볼 경우,'맥'은 '북쪽에 사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북쪽에 사는 사람이 당시 맥족만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해석은 다소 무리가 따른다.
이런 의미의 예와 맥은 흔히 예맥으로 통칭된다.
예맥에 대해서는 예와 맥을 하나의 종족으로 보는 예。맥 동종설과 예와 맥을 따로 구분해서 이해하는 예。맥 이종설이 있다.동종설에서는 예는 민족을 지칭하는 것이고 맥은 국명이기 때문에 예맥이라 함은 '예족이 세운 맥국'이라고 주장하고,이종설에서는 예와 맥은 동이에서 나온 다른 부족인데 서기전 2세기를 전후하여 예맥으로 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견해들은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기록들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예와 맥에 관련된 사서의 기록들을 훑어보면 그들의 관계를 좀 더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예에 대하여 살펴보면 '후한서'-부여전-에서는 "부여국은 현도 북방 1천 리에 있으며, 남으로는 고구려와 더불어 있고,동으로는 읍루와 더불어 있으며, 서로는 선비와 접해 있고,영역이 2천 리이며,본래 예의 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예전-에서는 "예는 북으로는 고구려。옥저와 더불어 있고,남으로는 진한과 더불어 접해 있고,동쪽은 큰 바다이며,서쪽은 낙랑에 이른다."고 쓰고 있다.이 같은 기록은 예가 원래는 부여 지역을 비롯한 북방을 아우르는 큰 나라였으며,고구려 성립 이후에도 하나의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음으로 맥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고구려전-에서 "구려는 일명 맥이이다. 따로이 별종이 있어 소수 가에 의지하여 살아 소수맥으로 불린다."하였다. 이는 구려가 맥인이 세운 국가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서'-왕망전-의 고구려에 대한 기록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에 앞서 왕망이 고구려 병력을 동원하여 호를 치는 데 충당시키려 하자 고구려가 거부했다.군에서 강제로 하려 하자 모두 변방으로 도망갔다.이들이 범법의 도적으로 변하자 요서의 대윤 전담이 추격하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
주군이 돌아와 고구려의 후추를 탓하자 엄우가 상주하여 말하되 '맥인이 법을 어긴 것은 후추가 적극 나서서 말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다른 뜻이 있는 듯하니 주와 군에 명하여 장차 이들을 달래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지금 그들이 대죄를 지은 것이 겁이 나 반란을 일으켜 부여의 무리와 연합할까 두렵습니다.흉노도 아직 이기지 못한 상황에서 부여와 예맥이 다
시 일어나면 큰 걱정거리가 됩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망이 이를 무시하자 드디어 예맥이 배반하고 나섰다."
이 기록에서는 맥과 예맥을 같은 뜻으로 쓰고 있다. 즉 고구려인을 맥인 이라고도 부르고 예맥으로도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인을 예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는 고구려의 중심세력이 적어도 예인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말하자면 고구려는 맥인이 중심이 되어 세운 국가이지만 점차 예인들을 복속해나갔다는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와 맥은 처음부처 하나의 국가를 이룬 하나의 부족이라고 보기는 힘들다.하지만 고구려가 형성되기 이전인 춘추 시대의 책 '관자'에 '예맥'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또 부여가 성립되기 이전인 서기전 5세기에 대한 기록에서도 같은 명칭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예와 맥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맥으로 통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따라서 예인과 맥인은 비록 구분은 가능하지만 대개 하나로 묶어서 불러도 무방할 만큼 유사한 부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예와 맥이 같은 계통에서 출발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또한 예맥은 반드시 고구려만을 지칭한 것도 아니다.'후한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가 "원조 5년(서기 118년)에 다시 예맥과 함께 현도군을 침입하여 화려성을 공격했다. 건광 원년(121년) 가을엔 궁(제 6대 태조)이 마한, 예맥의 수천 기를 이끌로 현도군을 포위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가 예맥과 다른 독자적인 이름을 가졌음을 이미하는 것이다. 즉 맥인들이 중심이 되어 건국한 고구려는 한때 예맥으로 불리다가 성장하여 고구려라는 독자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도었던 것이고, 고구려 주변에 남아 있던 예와 맥은 여전히 예맥으로 통칭되다가 후에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의해 완전히 고구려에 복속되면서 그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부여
부여의 명칭이 최초로 보이는 곳은 '사기'의 -화식열전-인데,거기에는 "연나라는 오환과 부여에 인접해 있다."고 씌어 있다.그리고 그 이전의 일을 기록한 '사기'의 '흉노전'에는 "흉노의 좌측왕과 장수는 동방 쪽에 있으며, 상곡으로부터 더 나아가는 자는 예맥과 조선을 만나게 된다." 고 하여 당시에는 부여라는 나라가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를 볼 때 부여는 연나라 성립시기인 서기전 4세기를 전후하여 형성 되었으며,예맥족이 세운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부여는 본래 예의 땅이다."라는 '후한서'의 기록을 볼 때 부여는 예족의 땅을 차지한 것이므로 예족이 세운 국가는 아니다.따라서 부여를 세운 사람들은 맥족이라고 보아야 한다.
부여의 위치에 대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여는 장성 북쪽에 있다.현도와의 거리가 1천 리가 되는데,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해 있고,동쪽은 읍루와 연결되었으며,서쪽은 선비와 인접되어있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영역이 2천 리이고 호수는 8만이다."
이 기록에 의존할 때 부여의 위치는 만리장성의 위치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즉 만리장성이 요하 아래쪽까지 뻗어 있었다면 요하와 흑룡강 사이에 비정할 수 있고, 만리장성이 유수, 즉 난하를 걸쳐 있었다면 요서。요동지방을 기점으로 해서 북으로 송화강과 흑룡강까지 확대될 수 있다. 그리고 전자를 기준으로 할 때 부여의 중심지는 요하 중류와 송화강 유역이 될 것이고, 후자를 기준으로 하면 부여의 중심지는 요하를 기점으로 한 요서와 요동이 될 것이다.
한편 부여는 북부여와 동부여,졸본부여 등으로 구분되었다.'삼국유사'는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우고, 그의 아들 해부루가 동부여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졸본부여는 구려의 다른 이름으로 고구려의 전신이다.또한 북부여의 수도는 홀승골성이며, 동부여의 수도는 가섭원이고,졸본부여의 수도는 졸본이다. 하지만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부여는 서기전 4세기경에 성립되어 고구려 제 21대 문자명제에 의해 멸망당하는 서기 494년까지 약 800년 동안 지속되는 나라로서 그 영토 남으로는 발해만 연안과 요서。요동,북으로 흑룡강,서로는 대흥안령산맥, 동으로는 우수리 강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부여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은 고구려의 부여 복속과정에서 재차 언급될 것이다).
말갈
말갈이라는 명칭은 두 글자 모두 가죽 혁자가 부수인 점으로 미루어 가죽옷을 만들어 입는 부족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말갈은 이미 고구려 성립 이전부터 부락을 이루고 있었음을 '삼국사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수서'-말갈전-에는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말갈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며,읍락마다 추장이 있으나 서로 하나로 통일되지는 못했다.무릇 7종이 있으니 첫째는 속말부라 부르며 고구려에 접해 있고, 둘째는 백돌부로 속말의 북쪽에 있다. 셋째 안차골부는 백돌의 동북쪽에 있고, 넷째 불열부는 백돌의 동쪽에 있다. 다섯째는 호실부로 불열의 동쪽에 있고,여섯째는 흑수부로 안차골의 서북쪽에 있으며, 일곱째는 백산부로 속말의 동쪽에 있다. 정병은 3천이 넘지 않고,흑수부가 가장 강하다. 불열 이동 지역은 모두가 돌화살촉을 사용하며 옛 숙신의 후예이다."
이 글은 말갈이 고구려의 북쪽,즉 부여와 같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말갈이 부족은 이뤘으나 나라를 세우지는 못했다고 했으므로 이들은 부여의 일부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말갈은 부여국의 변방에 흩어져 살며 가죽옷을 해 입는 부족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여 사람들은 흰옷을 즐겨 입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말갈과 부여는 의복문화를 통하여 확연히 구분되었을 것이다.
주몽이 나라를 세울 때 가장 먼저 말갈 부락을 정리하였는데,이대 정리한 말갈 부락은 졸본부여, 즉 구려의 변방에 흩어져 살던 속말말갈과 백산말갈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당서'에서는 말갈을 '흑수말갈'과 '발해말갈' 두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는 흑수말갈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말갈은 고구려 멸망 이후에 남하하여 발해만 부근에 모여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만 부근에 모여 살던 발해말갈은 후에 고구려가 멸망한 다음에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비류
비류는 고구려에 최초로 복속된 국가이며,복속된 이후에는 다물도로 개칭된다.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 서기 37년에 비류를 침략하게 되는데, 이때 비류의 왕은 송양이었다. 즉 비류는 대대로 송씨가 다스리던 국가였다는 뜻이다.
비류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송양의 말에서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과인이 바닷가 한구석에 외따로 살았기 때문에 한번도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오늘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되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과인은 그대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있소이다."
이 말에 따르면 비류는 적어도 바닷가에 있는 국가이다. 또한 주몽이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고한 내용을 참고할 때 비류는 비류수라는 강 이름에서 따온 명칭일 것이다.
따라서 비류는 비류수 상류이면서 또한 바닷가에 있는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류수'라는 이름을 풀이해보면 '끓어 넘치듯이 흐르는 물'이 된다.그렇다면 바닷가에서 가까운 곳에서 발원하여 끓어 넘치듯이 세차게 흐르는 비류수는 지금의 어디인가?
'삼국사기'는 주몽이 망명하여 처음에는 비류수 가에 머물렀다고 했다. 이는 비류수가 졸본과 인접한 곳임을 증명한다. 또한 졸본이 난하와 요하 사이에 있었다면 비류수 역시 그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송양이 '바닷가 한구석에 외따로 살았기 때문에'라는 말을 한 것으로 봐서 비류수는 난하와 요하 사이에 있으면서 발해로 흘러드는 강이었다는 설정이 자능하다. 비류국은 바로 이 강 근처에 있던 국가였던 것이다.
해인
해인은 고구려에 의하여 두 번째로 복속된 국가이다.
동명성에는 서기전 32년 10월에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령하여 해인국을 정복하는데그 위치에 대해서는 '태백산 동남방 있는 해인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태백산의 위치만 확인하면 해인국의 위치는 저절로 밝혀진다. 태백산에 대해서는 흔히 세 가지 설이 있다.첫 번째는 백두산을 가리킨다는 설이고, 두 번째는 태산을 가리킨다는 설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두 산 이외의 어떤 산을 가리킨다는 설이다.
이 세 설 중에서 백두산설을 취할 경우 해인국은 백두산의 동남방,즉 함경북도 일대가 된다. 하지만 태산설을 취한다면 해인국은 현재 중국의 산동성 일대에 비정된다.
단순히 현재 지명에 근거한 이 두 가지 설에 비해 세 번째 설은 좀더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삼국사기'는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그 여자가 유화 부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또 해인국은 '태백산 동남방'에 있다 고 했다. 따라서 우발수와 해인국은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해인국은 우발수 근터에 형성된 국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해인국은 북부여와 동부여 사이에 위치한 나라로 북부여에 치우쳐 있었을 것이다. 당시 북부여는 송화강에서 흑룡강 상이에 비정될 수 있으므로 해인국도 그 사이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태백산은 소흥안령산맥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우발수는 송화강을 지칭하거나 그 지류 중 하나를 지칭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해인국은 송화강 주변의 합이빈(하얼빈)이나 대경 지역에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세 가지 가설 중에서 세 번째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북옥저
북옥저는 고구려에 의하여 세 번째로 복속된 국가이다.
옥저에 대하여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상고하건대 동명제 즉위 10년(서기전 28년)에는 북옥저를 멸망시켰으며, 온조왕 42년에는 남옥저의 20여 호가 신라로 귀순해 왔으며,도 혁거세 53년에는 동옥저가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고 하였은즉, 또 동옥저도 있는 것이다."
이 기록과 달리 '삼국사기'는 온조와 43년에 남옥저 사람들이 신라로 귀순한 것이 아니라 43명이 백제로 귀순한 것으로 쓰고 있는에, 이 내용이 더 옳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온조왕 43년이라는 것을 앞에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기록들에 따른다면 옥저는 북。동。남옥저 등으로 구분 될수 있다. 이 중 북옥저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 -동옥저전-에 잠시 언급된다 .
"또한 북옥저가 있는데,일명 치구루라 하며,남옥저에서 800여 리 떨어져 있다.그 습속은 모두 남옥저와 같다. 경계의 남쪽은 읍루와 접해 있다.읍루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는데, 북옥저는 이를 두려워하여 매년 여름에는 번번이 바위굴에 숨어 있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게 되면 읍락으로 내려와 산다."
이 기록은 북옥저가 남옥저와 800여 리 떨어져 있다고 쓰고 있는데,그렇다면 남옥저와 북옥저 사이에는 다른 나라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북옥저의 남쪽 경계가 읍루와 접해 있다고 했으므로 남옥저와 북옥저 사이에는 읍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읍루의 위치에 대하여 '후한서'는 "부여의 동북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동으로 큰 바다에 접하고 남으로 북옥저와 접하며,그 북쪽 끝닿는 곳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그런데 이 기록은 같은 책의 동옥저에 대한 기록과 모순되는 점이 있다.'후한서'는 동옥저의 위치에 대하여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으며, 동으로 큰 바다에 접하고 북쪽에 읍루와 부여, 그리고 남쪽은 예맥과 접해 있다." 고 쓰고 있다. 이는 읍루의 남쪽 경계가 북옥저가 아니라 동옥저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북옥저의 '남쪽 경계가 읍루와 접해 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읍루의 경계는 다음과 같이 설정될 수 있다.
'읍루는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으며,남으로는 동옥저와 접해 있고,서남으로는 부여,서북으로는 북옥저,동북으로는 끝닿는 곳을 알지 못한다.'
이 같은 설정을 바탕으로 할 때 북옥저의 위치는 흑룡강의 본류와 지류로 둘러싸이며,이는 지금의 하바로프스크 서북방에 위치한 콤소몰스크나아무레 일대에 해당한다.그리고 그 경계는 동남쪽과 북쪽은 읍루에 둘러싸이고, 서남쪽은 부여에 둘러싸인다.따라서 북옥저는 사방이 흑룡강의 본류와 지류로 둘러싸인 오각형 모양의 땅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읍루 사람들의 배를 통한 침입 때문에 여름에는 굴에 들어가 살고,겨울에 뱃길이 얼면 읍락으로 내려와 살았다는 기록을 정당화시킨다.북옥저를 현재 강단사학계의 주장대로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 일부 지역에 설정 한다면 읍루는 겨울에도 얼마든지 북옥저를 침입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동해와 그 이북 일부 지역까지는 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는 까닭이다.따라서 북옥저를 현재의 함경도 일대에 설정하는 것은 '후한서'의 기록들을 정당화시킬 수 없으므로 논리적인 모순을 안게 된다.
함경도 일대에 있던 옥저라는 국가는 동옥저를 의미하며,북옥저와 남옥저는 동옥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뜻이 된다(동옥저와 남옥저에 대해서는 동옥저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하는 제 6대 태조대에 가서 언급하기로 한다).
。동명성제 시대의 세계 약사。
동명성제 시대 중국은 서한의 제 11대 고종원제(서기전 49년~서기전 33년)와 제 12대 성제(서기전 33년~서기전 7년) 시대였다. 원제는 유교를 숭상한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원제 때에는 무제 때부터 국교로 지정된 유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원제를 이어 즉위한 성제는 처음에는 이상주의에 바탕한 정치를 펼쳤으나 후기에는 여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다.
이 당시 서한의 북쪽에는 흉노가 강한 세력을 형성하여 동。서로 갈라져 있었는데, 서한은 동흉노와 함께 서흉노를 공격하곤 하였다.
이 무렵 서양은 로마의 제정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브루투스의 배반으로 카이사르 시대가 종결되고 카이사르의 아들 옥타비아누스를 비롯하여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등에 의한 삼두정치가 실시되었다. 하지만 서기전 36년에 레피두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속되고, 다시 서기전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군에 의해 안토니우스군이 대패하여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때문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감행한다.
이에 로마 의회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내리게 되고, 이로붙 로마는 공화정 시대를 종결하고 황제가 군림하는 제정 시대를 맞이한다.
신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
제 2대 유리명제 본기
1.아비 없는 설움을 딛고 일어선 유류와 고구려 황실의 제위다툼
주몽의 원자 유류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그 기록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주몽은 졸본으로 망명하기 전에 부여 여자 예씨와 혼례를 올린 몸이었다. 그리고 졸본으로 망명할 당시 예씨는 임신 중이었다.하지만 모친 유화 부인에게서 금와의 맏아들 대소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듣고 오이 ,마리,협보 등의 친구들과 함께 졸본으로 몸을 피했다.
주몽이 떠난 뒤 예씨는 아들을 낳았다.그리고 이름을 유류(또는 유리라고도 전함)라고 지었다(유류가 태어난 해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략 주몽이 왕위에 오르기 한 해 전인 서기전 38년이나 이듬해인 서기전 37년 정도로 추정된다).
유류는 자라면서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모양이다. 소년으로 성장한 유류가 어느 날 참새를 잡으려다 실수하여 물 긷는 아낙의 물동이를 깨뜨린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아낙은 "아비 없이 자란 자식이라 돼먹지 못했다."고 꾸짖는다. 이 말을 들은 소년 유류는 집으로 돌아와 예씨에게 아버지에 대해서 캐묻는다.
이에 예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네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었다.하지만 나라에서는 아버지의 비상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남쪽 지방으로 도피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셨다. 네 아버지가 떠나실 때 내게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의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하고 말씀하셨다."
예씨에게서 이 말을 들은 유류는 그날부터 산을 헤매며 주몽이 남긴 유물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는 주변 산 어디에서도 칠각형의 돌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유류는 몹시 낙심하였다.그러나 그는 포기하지는 않았다.
낮이면 주변 산을 뒤지며 칠각형의 돌과 소나무를 찾아다녔다.하지만 항상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그날도 유류는 산을 헤매다가 몹시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마루에 털썩 앉았다.그런데 그 순간 유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바위 틈새에 끼인 금속성의 물건이 내는 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몇 번에 걸쳐 같은 동작으로 마루에 힘껏 앉아보았다. 그때마다 어디선가 그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같은 동작을 반복한 끝에 유류는 그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그소리는 바로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유류는 주춧돌을 면밀히 살펴보게 되었고, 그것이 칠각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러자 불현듯 아버지가 남긴 말이 떠올라 기둥 밑을 조사하였다.
과연 그곳에는 아버지가 남긴 징표가 있었다.부러진 칼 조각이었다. 주몽은 자신의 칼을 동강내어 징표로 삼고, 나중에 그 징표를 대조하여 아들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유류가 간신히 아버지의 유물을 찾아냈을 때는 이미 많은 세월이 흐른 뒤였다.할머니 유화도 이미 죽고 없었고, 음으로 양으로 예씨 모자를 보살펴주던 금와왕도 임종을 앞두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금와의 맏아들 대소가 동부여의 실직적인 왕으로 군림했다.
대소의 군림은 곧 예씨 모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류는 옥지。구추。도조 등의 친구들과 의논한 후 어머니 예씨와 함께 고구려로 탈출할 것을 다짐하고, 서기전 19년 4월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여 고구려 땅을 밟는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당시 중병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 주몽은 아내와 아들이 찾아 들자 매우 기뻐하였고, 유류를 태자에 봉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 조정은 두 파로 나뉘게 된다.주몽의 의중을 파악하고 유류의 태자 책봉에 찬성한 유류파와 유류의 태자 책봉을 반대하고 소서노의 아들들인 비류와 온조를 지지하고 있던 비류파로 갈라졌던 것이다.
유류파의 중심인물은 주몽과 함께 망명한 오이。마리。협보를 비롯하여 대표적인 무장세력인 부분노와 부위염, 고구려 토착세력인 탁리。사비。설지 등이었고, 비류파의 중심인물은 소서노의 지지기반인 계루부 출신의 관리들과 오간。마려 등의 중신들이었다.하지만 이들 두 파의 대립은 유류파의 승
리로 끝났다.고구려 개국 이후 계루부는 동명성제에 의해 거의 장악당한 사태였고,나머지 네 부족 역시 동명성제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명성제의 고향 친구들인 오이。마리。협보 등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유류파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류는 태자에 책봉되었고,비류파는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소서노와 그녀의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비롯하여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는 자신들이 머물 곳을 찾아 남쪽으로 떠났다. 남쪽으로 떠난 그들은 백제를 세우게 된다. 이때 졸본의 많은 백성들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이 때문에 민심이 이반되어 유류는 즉위 후에도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급기야 도성을 옮기기에 이른다.
비류파들이 떠난 뒤,유류는 동명성제 측근들의 보필을 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태자 책봉 5개월 뒤인 서기전 19년 9월에 동명성제가 생을 마감함에 따라 고구려 제 2대 황제에 올랐다. 그가 바로 유리명제이다.
2.유리명제의 정권장악 노력과 고구려의 격변
(?~서기 18년,재위기간:서기전 19년 9월~서기 18년 10월,36년 1개월)
주몽의 원자 유리명제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구려조정은 한 차례 정쟁을 치른다. 조정을 장악하려는 유리명제와 이를 저지하려는 개국공신들 사이에 팽팽한 힘싸움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유리명제는 동명성제의 맏아들로 동부여 출신의 황후 예씨 소생이며, 이름은 유류 또는 유리이고,동부여에서 서기전 38년 또는 서기전 37년경에 태어났다. 이후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 고구려에 망명하였고,서기전 19년 4월 태자에 책봉되었다가,그해 9월에 동명성제가 4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자 고구려 제 2대 황제에 즉위하였다.
제위에 오른 유리명제는 즉위 이듬해인 서기전 18년 7월에 다물후 송양의 첫째 딸을 황후로 맞아들여 지지기반을 닦는다.다물후 송양은 한때 비류국의 왕이었고, 고구려에 복속된 이후에는 동명성제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 된 인물이다. 그는 옛 비류국인 다물 자치지역을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외척으로 삼는 것은 유리명제에게 여러 모로 유리하게 작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송양의 딸은 시집 온 이듬해 10월에 사망하고 말았다.그러자 유리명제는 황후 송씨의 동생인 송양의 둘째 딸을 맞아들여 황후로 삼는다. 그리고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개국공신들과 혼인관계를 맺는다.
자기 세력이 없던 유리명제는 이와 같은 혼인관계를 통해 반대세력들을 무마시키며 점차 지지기반을 확대하였다. 하지만 정권확대를 위한 이같은 온건적 태도는 재위 11년인 서기전 9년의 선비족 토벌전쟁을 계기로 좀더 공격적으로 변한다.
유리명제는 지속적으로 고구려 변방으로 밀려들고 있던 선비족 토벌전쟁을 계기로 힘을 강화하여 조정을 장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선비족은 자주 요수를 넘어와 부여와 고구려 변방지역을 대상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그들은 형세가 유리하면 여지없이 밀고 들어와 노략질을 감행하고 전세가 불리하면 요서 지역의 험산지역으로 숨어버리는 일종의 게릴라 전술을 쓰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변방은 항상 불안에 휩싸여야 했다.
백성들의 불안감이 짙어지자 유리명제는 드디어 선비를 토벌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부분노에게 대군을 내주어 토벌작전을 감행한다.
토벌작전의 선봉장으로 나선 부분노는 동명성제와 함께 고구려의 영토 확장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동명성제 6년인 서기전 32년에 오이와 함께 태백산 동남방에 있던 해인국을 정벌한 장수도 바로 그였다. 그는 이 같은 많은 전쟁경험을 바탕으로 선비족을 응징할 전략을 세웠고,마침내 선비족의 항복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유리명제는 이 선비족 토벌전쟁에 직접 참가함으로써 군주로서의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그 같은 무력적 기반을 바탕으로 정권장악의 기회를 노리게 된다.
이 무렵 고구려와 동부여 사이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이는 대소가 동부여의 왕이 되면서 고구려를 적대시하고 고구려에 대한 침략전쟁을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소모전으로 내부적인 어려움을 겪던 대소는 유리명제 14년인 서기전 6년에 화친을 제의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이에 유리명제는 화친제의를 받아들여 태자인 맏아들 도절을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강경론자들의 반발과 도절의 반대로 고구려는 인질 교환제의에 응하지 못했다.
화친제의를 거절당한 대소는 그해 11월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범하였다. 하지만 폭설로 인하여 동사자가 많이 발생하는 바람에 동부여군은 제풀에 지쳐 퇴각하고 말았다.
대소는 퇴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고구려에 대한 침범을 자행했다.이 때문에 유리명제는 항상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고,급기야 다시금 대소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이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부여와의 전쟁을 두려워하던 유리명제가 대소의 화친제의를 받아 들이려 하자 강경론자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하지만 유리명제는 화친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강경론자인 탁리와 사비 등을 교시(교제에 쓸 돼지)사건을 일으켜 죽이기에 이른다.
유리명제는 교제(왕이 들판에 돼지를 바치며 천지신명께 드리는 제사)에 쓸 돼지를 놓아주고, 탁리와 사비로 하여금 그 도망간 돼지를 잡아오게 한다
.그런데 그들은 돼지를 잡자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칼로 다리의 힘줄을 잘라버렸다. 이에 우리명제는 교제에 쓸 돼지에 상처를 냈다는 이유로 그들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서기전 1년 경신년 8월에 일어난 이 '교시사건' 이후 유리명제는 갑자기 중병을 앓기 시작했다.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무당을 불렀더니,무당은 "탁리와 사비의 귀신이 화근이 되었다." 며 귀신들에게 사죄하라고 하였다. 이에 유리명제는 무당의 말대로 탁리와 사비의 귀신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병이 나았다.
그렇지만 유리명제에겐 또 다른 난국이 기다리고 있었다.이듬해인 서기 원년 1월에 태자 도절이 죽어버렸던 것이다. 그 동안 부여에 대하여 강경론을 내세우며 유리명제의 화친정책을 반대하고 있던 도절이 왜 죽었는지에 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유리명제가 병상에서 일어난 시점에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범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병상에서 일어난 유리명제는 교시사건으로 강경파의 힘이 약화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시금 동부여와 화친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에 태자 도절은 끝까지 화친을 반대하다가 죽었던 것이다. 죽음의 형태는 자살일 수도 있고, 유리명제의 명에 의한 타살일 수도 있다.어쨌든 그의 죽음 뒤에 유리명제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교시사건으로 탁리와 사비가 죽고,다시 태자마저 죽자 졸본성의 백성들은 불안에 떨게 되고,민심은 점차 유리명제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다.
유리명제는 이 같은 난국을 타개하고 전쟁의 위험에서도 벗어나기 위해 천도를 결심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교제에 쓸 돼지를 이용한다.
서기 원년 3월 유리명제는 돼지를 놓아주고 측근인 설지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는데, 이는 겉으로는 교시를 잡아오는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진짜 목적은 새로운 도읍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도읍지를 알아보러 떠난 설지는 얼마 뒤 궁궐로 되돌아왔다.그리고 국내의 위나암이 새 도읍지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고했다.설지의 보고를 받은 유리명제는 그해 9월에 몸소 국내에 가서 지세를 돌아본다. 그리고 위나암 에도성을 쌓게 하고, 도성이 완성되자 서기 3년 10월에 마침내 도읍을 위나암으로 옮겨갔다. 이로써 졸본성 시대는 종결되고,위나암성 시대가 도래하였다
.유리명제는 위나암으로의 천도를 통하여 부여의 전쟁위협에서 벗어나는 한편,정권장악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위나암으로 천도한 후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유리명제는 그해 12월에는 무려 닷새 동안이나 사냥을 즐기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변방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위나암에서 오랜만에 사생활을 즐기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개국공신인 대보, 협보 등은 유리명제에게 사냥을 그만두고 새 도읍지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유리명제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오히려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여 관가의 농원을 관리하게 하였다.선제 동명의 친구아지 개국공신인 협보를 한낱 관가의 농원지기로 보내버린 것은 귀양조치나 다름없었다.이 때문에 협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구려 땅을 벗어나 남한으로 떠나버린다(그 후 협보는 남한에서 다파라국을 세운다).
이처럼 위나암으로 옮겨간 이후의 유리명제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들마저 정적으로 간주되면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맏아들 도절이 죽은 후 둘째 아들 해명이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그는 천도 이후에도 졸본성에 남아 그곳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용감하였기에 황룡국왕이 찾아와 그의 용기를 시험하였다.
황룡왕은 해명에게 사신을 보내 단단한 활을 하나 선물하였다.그러자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꺾으면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강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위나암성에 알려지자 유리명제는 몹시 분개하였다.유리명제는 스스로의 힘을 자랑한 해명을 아버지를 능멸한 불효자로 규정하고 황룡왕에게 사람을 보내 해명을 죽여버리라고 했다.
해명이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는 말을 들은 유리명제는 필시 해명이 그 힘을 믿고 반역을 도모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민심이 이반되어 천도를 감행했는데,그 구도읍지에 머물고 있던 태자 해명은 오히려 민심을 안정 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유리명제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할 뿐 아니라 아들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다.그러던 터에 황룡왕의 활을 꺾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황룡왕의 사신이 유리명제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의 속국이었던 황룡국은 항상 독립의 기회를 엿보았을 것이고, 유리명제가 왕태자를 경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고의로 이 같은 일을 획책했을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막이 어찌 됐든 유리명제는 그 활사건으로 해명을 죽일 결심을 하게 되고해명을 죽이라는 부탁을 받은 황룡왕은 졸본으로 사신을 보내 태자를 초청한다. 이에 해명의 측근들은 초청에 응하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해명은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황룡왕을 만난다. 그러나 황룡왕은 해명의 기개를 높이 평가하여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다.
이처럼 황룡왕이 해명을 살려놓자 유리명제는 서기 9년 3월 졸본으로 사람을 보내 칼을 내주고,자결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해명은 순순히 명령에 복종하여 자살하였고,이로써 유리명제는 자신의 아들을 둘이나 죽인 잔혹한 임금이라는 백성들의 원성을 듣게 된다.
고구려에 이 같은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동부여의 대소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동부여를 섬기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협박을 가한다. 이에 유리명제는 동부여를 섬길 것을 맹세하는 답장을 보낸다.
그런데 그 무렵 부여에서는 내분이 일어난다.아마 대소와 그의 여섯 형제들이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고 있었던 모양이다.이 덕분에 고구려는 전열을 가다듬고 부여의 침입에 대비할 시간을 벌게 되었다.
그리고 서기 12년에 중원의 내분을 틈타 동호와 흉노가 대거 남하하고 한에 예속되어 있던 요서의 맥족이 봉기하였다.
이에 당황한 신의 왕망은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하지만 고구려가 원군요청을 거절하자 왕망은 요소 대윤 전담을 시켜 고구려를 치게 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에 밀린 한군은 대패하고,전담도 전사하고 말았다.
전담의 전사소식을 접한 왕망은 엄우를 시켜 다시금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이때 엄우의 계략에 말려든 고구려 장수 연비가 죽임을 당한다.
이때부터 유리명제는 한나라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고,이 틈을 노려 부여군이 고구려를 침입해 왔다.하지만 부여군은 태자 무휼이 이끌던 수비대의 전략에 말려 전멸하고 말았다.
고구려군이 이렇게 승전을 거듭하자 유리명제는 서기 14년 8월에 오이와 마리에게 군사 2만을 내주고 고구려 서쪽의 양맥을 치게 하여 아우르고,다시 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고구려현은 한의 동방정책을 담당하던 요서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에 고구려현을 차지한 것은 한의 동방정책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렇듯 만년에 과감한 영토확장전쟁에 몰두하던 유리명제는 서기 18년 4월에 넷째 아들 여진이 물에 빠져 죽는 불행한 사건을 경험한다.그리고 그해 7월에 병약한 몸을 이끌고 자신의 휴양처인 두곡에 행차하여 휴양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재위 36년 1개월 만인 그해 10월에 두곡의 이궁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대략 57세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능은 두곡 동원에 마련되었으며,묘호는 유리명제라 하였다.
3.유리명제의 가족들
제 2대 유리명제 가계도
제 1대 동명성제
│
├────── 제 2대 유리명제
│ 。유류.유리,생년미상~A.D.18년
황후 예씨 。재위:B.C.19년 9월~A.D.18년 10월,총 36년 1개월
。부인:4명 hl2tci
。자녀:6남 1녀
│
│ 1남
황후 송씨 ──────── 도절
송양의 장녀
│
│ ┌─ 해명
│ 5남 1녀 │
황후 송씨 ───────┼─ 무휼
송양의 차녀 │ 제 3대 대무신제
│ │
│ ├─ 여진
화희 │
│ ├─ 해색주
│ │ 제 4대 민중원제
치희 │
├─ 재사
│ 제 6대 태조의 아버지
│
└─1녀
유리명제는 황후 송씨를 비롯한 4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를 얻었다. 이 부인들 중 송양의 장녀 황후 송씨는 장남 도절을 낳은 듯하며,송양의 차녀 황후 송씨는 해명。대무신제。민중원제。여진。재사 등 5남 1녀를 낳은 것으로 판단된다.유리명제는 사서에 기록된 부인 이외에도 여러 명의 부인들을 거느렸을 것으로 판단되는 까닭에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자식들도 많을 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사서에 기록된 인물들에 한정하여 가족사를 정리한다.
이들 중에서 대무신제와 민중원제는 각 그 본기에서 다루도록 하고,이 밖에 이름이 기록된 나머지 가족들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송양의 장녀 황후 송씨(?~서기전 17년)
유리명제의 제 1황후 송씨는 유리명제 즉위 이듬해인 서기전 18년 7월 황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그녀는 비류 지역의 유력가 송양의 장녀이다.송양은 한때 비류강 근처에 있던 비류국의 왕이었으나,동명성제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비류국은 고구려에 복속된 뒤에 다물도로 개칭되었으므로, 그는 다물후에 봉작되어 다물도를 다스리고 있었다(또한 송양을 5부족 중 하나인 소노부의 부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유리명제가 즉위 후 다물후 송양의 딸을 황후로 맞아들인 것은 다소 정략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비록 아버지 주몽의 후광으로 개국공신들의 보필을 받고 있긴 했으나 실질적인 힘이 없던 유리명제는 송양의 딸을
아내로 취함으로써 다물도의 군사력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으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유리명제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여 황후로 입궁한 제 1황후 송씨는 생명이 길지 못했다. 그녀는 입궁한 지 1년 3개월 만인 서기전 17년 10월에 젊은 나이로 요절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망원인은 분명하지 않지만 사망시점이 결혼 1년 3개월 만인 점을 고려할 때 아이를 낳다 죽은 것으로 보이며, 이때 태어난 아이가 장남 도절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녀의 능과 시호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송양의 차녀 황후 송씨(생몰년 미상)
제 2황후 송씨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하지만 유리명제의 셋째 아들 대무신제의 어머니를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대무신제는 서기 4년(유리명제 23년)에 태어났고,황후 송씨는 그 20년 전인 서기전 17년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서기전 17년에 사망한 황후 송씨는 대무신제의 어머니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대무신제의 어머니는 누구인가?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그녀 역시 송양의 딸이라면 유리명제는 송양에게서 2명의 딸을 맞아들였다는 결론이 나온다.당시 풍속으로는 자매가 동시에 한 사람에게 시집 가는 일도 허다 했으므로 이 같은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고구려사를 기록한 사람들이나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이 이 두 사람의 송씨를 1명으로 처리한 듯하다.
따라서 유리명제의 제 1황후 송씨가 아닌 그녀의 여동생이자 대무신제의 어머니 송씨를 여기에서는 제 2황후 송씨로 기록한다.
제 2황후 송씨가 유리명제에게 시집 온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제 1황후 송씨와 함께 입궁했을 수도 있고, 그녀가 사망한 직후나 아니면 수년뒤에 입궁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둘째 아들 해명이 서기전 12년에 태어난 것을 감안할 때 적어도 제 1황후 송씨가 사망한 때로부터 4년이 지난 서기전 13년 이전에는 입궁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제 2황후 송씨의 입궁시기는 제 1황후 송씨의 사망 직후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입궁 후 그녀는 언니의 아들 도절을 키우며 해명,무휼(제 3대 대무신제),여진,해색주(제 4대 민중원제),재사(제 6대 태조의 아버지) 등 5남과 우씨의 아내가 된 1녀 등을 낳았다.
그녀가 언제 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능에 대한 기록도 없다.
화희(생몰년 미상)
제 1황후 송씨가 죽은 해인 서기전 17년 10월에 유리명제는 2명의 후궁을 맞아들인다. 화희는 그 중의 한 여자로 골천 출신이다.
이 무렵 유리명제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많은 유력자들과 혼인관계를 맺은 흔적이 보이는데, 화희는 그 유력자 중의 한 집안에서 시집온 여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행정단위는 대개 곡,천 등으로 부렸던 것을 감안할 때 골천은 그 자치구 중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5부족 중 골천의 유력자인 화희의 가문은 당시의 유력자들 중에서도 꽤나 힘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는 화희가 유리명제의 애첩인 치희를 내쫓아 버리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은 사실에서 확인된다.
유리명제는 화희 외에 한인 출신의 치희를 맞아들였는데,이 때문에 화희와 치희 간에 다툼이 잦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유리명제는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두 여자를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유리명제가 사냥을 떠난 사이에 화희와 치희 간에는 욕설이 오가는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말다툼 중에 화희는 치희는 향하여 다음과 같은 모욕적인 발언을 한다.
"네년은 한인의 집에 살던 비첩인 주제에 어찌 이토록 무례할 수 있느냐?" 이 말을 듣고 치희는 분통을 터뜨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유리명제는 말을 타고 치희를 뒤쫓아갔으나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리명제가 지었다는 詩가 '황조가'이다.
이렇듯 화희와 치희의 싸움장면을 근거로 할 때 화희는 분명 유력자 집안출신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화희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그녀가 자식을 낳았다는 기록도 없고,어떻게 죽었다는 기록도 없다.
치희(생몰년 미상)
치희는 제 1황후 송씨가 죽은 해인 서기전 17년 10월에 화희와 거의 동시에 입궁한 여자이다. 그녀는 한나라 사람의 딸로서 유리명제의 결혼정책과는 무관하게 입궁한 것으로 보인다.
화희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한나라 사람들을 무척 천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하긴 자기 나라를 떠난 망명인에게 좋은 대접을 했을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 사람들로부터 천한 대접을 받고 있던 한인의 딸이 후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그녀가 남달리 미색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미색으로 소문이 났고, 유리명제는 그 소문을
듣고 그녀를 후궁으로 취했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따라서 치희는 화희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리명제는 화희보다는 치희를 총애했던 모양이다.화희는 그 점을 참을 수 없어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어 내쫓아버렸을 것이다.
화희에게서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친정으로 돌아가버린 치희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를 뒤쫓아갔던 유리명제는 허탈한 마음으로 환궁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나무 밑에서 휴식을 하며 자신의 씁쓸하고 외로운 마음을 시로 읊었다.
翩翩黃鳥 (편편황조)펄펄 나는 저 꾀꼬리는
雌雄相依 (자웅상의)암수가 서로 노니는데
念我之獨 (염아지독)외로울 사 이내 몸은
誰其與歸 (수기여귀)뉘와 함께 돌아갈꼬.
흔히 '황조가'로 불리는 이 시가 치희에 대한 마지막 기록인 셈이다. 그 후 그녀가 돌아왔는지, 아니면 몇 명의 자식을 낳았는지, 또는 언제 죽었는지 등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도절(서기전 17년~서기 원년)
도절은 유리명제의 맏아들이며,제 1황후 송씨의 소생인 듯하다.그리고 그를 송씨의 소생으로 볼 때 서기전 17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 도절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서기전 6년 1월에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 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인질을 교환하자고 제의한 기록에서이다. 이때 도절은 이미 태자에 책봉되어 있었으나 12세의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부여가 인질을 교환하자고 하자 유리명제는 이를 승낙한다.유리명제는 당시 부여의 강성함을 겁내고 있었고한편으론 전쟁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부여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여 하루빨리 전쟁위협에서 벗어나고 싶
었던 것이다.
이 같은 유리명제의 생각에 따라 도절은 인질이 되어 부여로 떠나야 하는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도절은 부여로 떠나기를 두려워했다.또한 부여에 대한 강경론을 고수하는 신하들이 많아 유리명제는 부여와의 화친약조를 지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해 11월에 부여는 5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쳐들어온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폭설이 내려 부여 군사는 퇴각한다. 그렇지만 부여의 전쟁위협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유리명제는 어쨌든 부여와 화친을 맺어 전쟁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래서 지속적으로 화친의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때마다 강경론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강경론자의 대표자는 탁리와 사비였다.유리명제는 이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교시사건'을 일으킨다.
유리명제는 그들을 제거할 계략을 세우고 교제에 쓸 돼지를 놓아주고는 그들로 하여금 도망간 돼지를 잡아오게 하였다.이에 그들이 돼지를 잡아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의 힘줄을 잘라 가지고 오자 교제에 쓸 신성한 제물에 상처를 입혔다는 죄목을 씌워 그들을 죽여버렸다.
이렇게 해서 강경론자들을 누른 유리명제는 다시금 부여와의 화친을 서두른다.그런데 이번에는 18세의 청년으로 성장해 있던 도절이 강경한 자세로 유리명제의 화친정책에 제동을 건다. 그는 부여에 인질로 갈 경우 십중팔구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그러나 유리명제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도절은 서기 원년 1월 죽음을 택하게 된다.
이 죽음이 스스로가 택한 자살인지,아니면 유리명제의 명령에 의한 자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정황으로 봐서 스스로 자살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즉 아버지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고,부여에 인질로 갈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몰리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뜻이다. '도읍을 갈라놓았다'는 뜻의 '도절'이라는 그의 이름에서도 이 같은 자살의 흔적이 엿보인다.
해명(서기전 12년~서기 9년)
해명은 유리명제의 둘째 아들이며,제 2황후 송씨 소생으로 서기 4년 16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 그의 태자 책봉 한 해 전인 서기 3년에 유리명제는 도읍을 졸본에서 위나암으로 옮겼는데, 이때 해명은 졸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말하자면 고구려 조정은 당시 일종의 분조(특별한 상황에서 임금의 역할을 분리하는 것)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졸본에도 많은 수의 신하들이 남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해명은 힘이 세고 용맹이 넘치는 인물이었다.이 소문을 들은 황룡국의 왕이 해명을 시험하기 위해 튼튼한 활 하나를 선물로 보낸다. 그런데 해명은
황룡국 사신이 보는 앞에서 활을 힘껏 당겨 꺾어버렸다.
서기 8년 1월,해명의 나이 20세 때 일어난 이 사건은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온다. 해명이 황룡국왕의 선물인 활을 사신이 보는 앞에서 꺾어버렸다는 말을 들은 유리명제는 "해명은 자식으로서 효성이 없으니, 나를 위하여 그놈을 죽여주시오."하고 황룡국 왕에게 말한다.
유리명제는 자신에게 등 돌린 졸본의 민심 때문에 천도를 결심했는데,해명은 오히려 그곳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유리명제는 자신의 친아들인 해명을 시기하게 되었고,한편으론 해명이 반란을 도모할까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해명이 활을 부러뜨린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선물을 상대방이 보는 앞에서 부러뜨린 것은 가히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심하면 전쟁도 불사할 만한 외교상의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해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같은 행동을 저질렀다.
따라서 해명의 이 같은 행동을 전해들은 유리명제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아들을 죽일 만큼 대단한 일은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유리명제는 황룡왕에게 밀서를 내려 해명을 죽여버리라는 부탁을 한다. 이는 이미 그 사건이 있기 오래 전부터 유리명제가 해명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유리명제는 분조 형태를 더 오래 유지하다가는 자칫 해명에게 왕위를 찬탈당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리명제의 밀서를 받은 황룡왕은 활을 부러뜨린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가량 되었을 무렵인 서기 8년 3월에 졸본으로 사신을 보내 해명태자를 초청한다. 해명이 이 초청에 응하려고 하자 근신들이 강하게 만류하며 말했다.
"이웃 나라에서 이유 없이 갑자기 만나자고 하니,그 의도가 의심스럽습니다."
이에 해명이 대답했다.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황룡왕 따위가 감히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해명은 이 같은 결연한 마음으로 황룡국으로 떠났다.
해명을 만난 황룡왕은 처음엔 그를 죽이고자 했지만,고구려 조정과의 마찰을 우려한 탓인지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이듬해 3월 유리명제는 자신이 직접 해명에게 자살을 명령하게 된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이것이 자식 된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제 네게 칼을 내리노니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자결하도록 하라."
유리명제의 이 같은 자결명령을 받은 해명은 즉시 자결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근신 중 한 사람이 그를 말리며 말했다.
"폐하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는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그런데 지금 폐하의 사자가 한 번 와서 말한다 하여 자결한다면,폐하의 지시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자 해명은 그의 만류를 뿌리치며 말했다.
"지난 번에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냈기에,나는 그들이 우리를 업신여길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활을 잡아당겨 꺾음으로써 답한 것인데, 뜻밖에 마마께 견책을 당하게 되었소. 아바마마께서 불효의 명목으로 내게 칼을 내려 자결을 명하셨으니,어떻게 그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소?"
이 같은 말을 남기고 해명은 여진의 동원 벌판으로 가서 땅에 창을 꽂아놓고,말을 타고 힘껏 달려 그 창에 몸을 날려 자결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가 죽자 유리명제는 태자의 예로 동원에 장사토록 하고,그곳에 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해명이 창에 찔려 죽은 그곳을 '창원'이라고 하였다.
여진(?~서기 18년)
여진은 유리명제의 넷째 아들이다.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서기 18년 4월에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그가 익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유리명제는 슬퍼하며 사람들을 풀어 시체를 찾게 하였다. 하지만 시체는 한동안 발견되지 않다가,수일이 지나서야 비류수 사람 제수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그 후 여진은 왕골령에 묻혔으며,그의 시체를 찾은 제수에게는 금 10근과 밭 10경이 상으로 내려졌다.
이 여진의 죽음은 유리명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여진이 죽은 후 유리명제는 병상에 드러누웠고,그해 10월에 사망한다.
재사(생몰년 미상)
재사는 유리명제의 여섯째 아들로 제 6대 태조의 아버지이다.언제 태어났는지 또는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태조가 제위에 오르자 고추가(조선의 대원군이나 부원군에 해당함)에 올라 있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4.새로운 도읍지 위나암과 그 위치에 관한 가설들
유리명제는 서기 3년(우리명제 22년)에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의 위나암 으로 옮긴다.이때 유리명제가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의 위나암으로 옮긴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졸본은 구려의 옛 수도였기 때문에 구려 시대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다.그 래서 구려의 중심세력인 5부족의 힘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서노와 그의 아들들인 비류, 온조에 대한 지지세력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유리명제는 졸본 백성들의 민심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둘째,졸본은 변방이 가까워 적의 침입이 용이한 곳이었다. 특히 부여와 아주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항상 부여의 전쟁위협에 시달려야만했다.
셋째,졸본은 자기 손으로 큰아들 도절을 죽게 한 곳이었다.이 때문에 졸본의 민심이 유리왕을 등졌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유리명제는 졸본이 안정된 곳이 못 된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부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국내의 위나암으로 천도했다.
새로운 도읍지로 위나암을 택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설지의 보고 내용에서도 재확인된다.
"제가 돼지를 따라 국내 위나암에 갔는데, 그곳 자연이 준험하고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또한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 아니라 전쟁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설지의 이 같은 말을 들은 유리명제는 그해(서기 2년) 9월에 자신이 직접 위나암의 지세를 살피고 돌아온다. 그리고 설지의 말대로 새 도읍지로 적당 하다는 판단을 하고 천도를 서두른다.
이 이야기는 유리명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 졸본성은 변방에서 가까워 항상 불안한 데 비해 위나암성은 부여를 비롯한 중국의 여러 나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는 뜻이 된다.다시 말해서 졸본과 위나암은 거리상으로 비교적 먼 곳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위나암은 도대체 어디였을까? 졸본을 요동 지역으로 비정할 때 위나암은 요동에서 한반도 쪽으로 깊숙히 들어온 지역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흔히들 이 위나암성이 중국 길림성 집안현 지역에 있었을 것 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는 집안현에서 광개토제 능비를 비롯한 많은 고구려 유물과 능이 발견된 데 따른 것인 듯하다.
집안현에는 현재 고구려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진 집안현성(통구성)이 있는데, 평지에 건설된 이 성의 규모는 동쪽 벽이 554.5미터,서벽 664.6미터,남벽 751.5미터,북벽 715.2미터로 총 2,686미터에 달한다. 이 밖에도 집안현성 서북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총길이 6,951미터에 이르는 산성이 있다. 많은 학자들이 집안현성을 국내성이라고 하고 산성자산성으로 불리는 이 산성을 위나암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산성을 서기 209년에 제 10대 산상제가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게 되는 환도성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산성 안에는 궁궐터로 보이는 큰 집터
와 5개의 연못,샘,망대 등이 있다.
이 성에서 약 6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3개의 좁은 협곡지대를 막아 만든 관마장산성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작은 석성이 있는데,이를 대천초소라고 한다. 또 그 부근에는 망파령산성과 패왕조산 성이 있는데, 이성들은 집안현성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고 있다.
이처럼 집안에는 위나암성의 흔적으로 보이는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유물들만으로 무조건 그곳을 위나암성터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발상이다.일부 학자들은 집안이 고구려와 같은 대국의 수도가 들어설 곳이 못 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명제 37년에 물에 빠져 죽은 왕자 여진을 비류수 사람이 건졌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이들의 반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말하자면 위나암성은 비류수 근처에 있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 주장이 맞다면 위나암성은 다물도 근처여야 한다. 그러나 당시에 여진이 위나암성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위나암성을 비류수 근처에만 한정시키는 것도 다소 무리가 따르는 발상이다.
이 두 주장 이외에도 환인 지방의 오녀산성을 위나암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이 지역에서 산성터를 비롯한 고분군이 대거 발견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집안설과 마찬가지로 고고학에만 의존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오녀산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동명성제 본기 '첫 도읍지 졸본의 위치'편 참조).
이처럼 위나암성의 위치는 아직까지 확정되지 못했다.섣불리 그 위치를 확정하는 것보다는 많은 가설을 세우고 향후 이에 대한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접근방법이 될 것이다.
5.유리명제 시대의 주변 국가들
선비
유리명제 11년(서기전 9년) 고구려는 노략질을 일삼고 있던 선비를 정벌해 속국을 만든다.
선비는 원래 사르모론 강 유역에 분포해 있던 동호족의 지파로서 유목민이다. 이들은 요서 지역 및 대흥안령산맥,소흥안령산맥,요동 등 넓은 곳에 분포해 있었으며 유리명제 당시에는 나라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선비란 명칭은 최초로 '초사'-대초-에 보이는데 "가는 허리 빼어난 목덜미,마치 선비 같아라."하는 구절로 보아 어떤 민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학식이 뛰어나고 세상 이치에 밝아 그 품성이 고고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었다.
또 '후한서'-오환선비전-에는 "선비는 동호의 지파이다.따로이 선비산에 의지하여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선비라는 명칭이 선비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를 '초사'-대초-의 기록과 연결해보면 선비산은 도를 닦는 고고한 사람들이 사는 산을 일컫는 것이고,선비족은 그 산을 자신들의 출원지로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비'라는 명칭에는 민족적 자부심이 깃들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명칭을 표방하고 나선 선비족에 대한 기록은 주나라 초의 일들을 다루고 있는 '국어'-진어-에도 나타나고 있는데,거기에서는 "선비는 동이족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흔히 동호와 호맥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를 근거로 할 때 선비족이 동이족의 한 부류라고 말하는 것은 틀린 표현이 아닐 것이다.
유리명제 당시만 하더라도 선비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인구도 적었으며,힘도 하나로 결집되지 못했다. 하지만 서기 2세기가 되면 선비족의 힘은 강성해진다.이 시기의 선비족에는 흉노와 탁발,정령,오환,한족 등이 일부 포함되어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양맥
유리명제 33년(서기 14년)에 유리명제는 오이와 마리에게 명령하여 군사 2만으로 양맥을 치게 해 멸망시키고,진군하여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점령한다
.'삼국사기'는 이 고구려현을 현도군에 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멸망당한 양맥은 맥족이 세운 국가 중 하나일 것이다.그리고 양맥을 멸망시킨 후 진군하여 고구려현을 점령했다는 것은 양맥과 고구려현이 인접해 있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당시 고구려현은 비록 한에 속해 있었지만 그 백성들은 맥족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고구려가 양맥을 무너뜨릴 당시의 정세를 살펴보면,한을 무너뜨린 왕망이 고구려를 침입했다가 패배하고 그레 대한 보복으로 고구려 장수 연비를 꾀어내어 죽임으로써 고구려와 왕망의 신 사이에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양맥과 고구려현을 점령한 것은 왕망의 신을 치기 위한 전초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양맥과 고구려현은 한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한의 동방정책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에 고구려는 양맥과 고구려현을 점령하여 왕망의 동방정책 자체를 무력화시켰다.
당시 왕망의 세력은 그 영향력을 요서까지밖에 미치지 못했다.요동에는 고구려와 부여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요수를 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영토확장을 노리고 있던 한의 왕망이 요동의 지리에 밝은 고구려현의 맥족과 양맥을 앞세워 요동을 넘보기 시작했고, 고구려는 이 같은 한의 침략정책에 맞서 고구려현과 양맥을 점령해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양맥과 고구려현의 위치는 요수에 인접한 요서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고,그들이 요동의 지리에 밝았던 것으로 보아 요수를 쉽게 건널 수 있는 상류 쪽에 위치해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처럼 요수의 상류에 위치하던 고구려현이 현도군에 속했다는 것은 현도군 역시 요서 지역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황룡국
황룡국은 '삼국사기' 유리명왕 27년(서기 8년)과 28년(서기 9년)에 등장하는 나라 이름이다.이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유리명제의 둘째 아들 해명이 꺾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여 고구려 조정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던 사실을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황룡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동명성왕 3년(서기전 35년) 3월의 "황룡이 골령에서 나타났다."는 기사이다. 이때의 황룡을 황룡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본다면 황룡국은 서기전 35년에 처음으로 골령에 세워진 셈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 대하여 고구려가 응징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황룡국은 고구려에 예속된 자그마한 속국이었을 것이다. 황룡국왕이 유리명제의 청을 받는 입장이고,또 고구려의 태자에게 선물을 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도 이를 증명한다.더구나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고구려 태자 해명이 부러뜨린 것을 보아도 황룡국은 고구려에 비해 아주 약소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황룡국이 있던 골령은 해명이 머물던 졸본과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황룡국왕이 선물을 유리명제에게 바치지 않고 해명에게 바쳤다는 것은 해명이 머물던 졸본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졸본을 중심으로 영토확장에 힘을 기울이던 동명성왕 3년에 황룡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도 역시 이를 증명한다.
。유리명제 시대의 세계 약사。
유리명제 시대 중국은 전한 말기와 왕망의 신나라 시대에 해당한다.외척 왕망이 한의 정권을 장악하여 정사를 좌지우지하다가 결국 한을 멸망시키고 신을 세우는데,왕망은 동방과 북방으로 팽창정책을 감행하여 흉노를 격파 하는 등 성공을 거두는 듯하다가 내부적인 한계와 고구려의 반격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한편,서양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고,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하여 노예해방령을 선포한다.이 시기에 로마에는 게르만족이 밀려들어 로마의 변방을 압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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