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遺事(삼국유사)
古朝鮮(고조선) 王儉朝鮮(단군왕검)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 無葉山, 亦云: 白岳, 在白州地. 或云: 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堯同時.
《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산해경》에는 무엽산이라 하고 또는 백악이라 하니 백주 땅에 있다. 혹은 개성 동쪽에 있다고도 하니 지금의 백악궁이 그것이다]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이름하니, 요 임금과 같은 시기이다」라고 하였다.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 今妙香山.]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고기》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제석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이 있었으니, 자주 하늘 아래 세계에 뜻을 두고 인간의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 태백을 굽어보니 인간에게 널리 이익을 줄만하기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보내 그 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곧 태백이니 지금의 묘향산이다.]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그 곳을 『신시』라 일컬으니 이가 곧 환웅 천왕이다.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遣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풍백과 우사 그리고 운사에게 곡식과 생명 그리고 질병과 형벌 및 선악을 맡게하고 무릇 인간 세계의 360여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머물며 다스려 교화하였다. 이 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거처하며 항상 신인인 환웅에게 기도하며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였다. 이 때 신인께서 영험한 쑥 한 타래와 마늘(달래) 스무개를 주며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않으면 곧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 먹으며 21일 동안 삼갔다.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호랑이는 능히 삼가지 못하였기에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熊女者, 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 壇君王儉. 以唐堯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웅녀는 더불어 혼인할 자가 없기에 매번 신단수 아래에서 어린애 가지기를 기원하였다. 환웅께서 이에 짐짓 변화하여 그와 혼인하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그는 당요 즉위 50년인 경인년[당요 즉위 원년은 무진년이므로 50년은 정사년으로 경인년이 아니니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이름하여 궁[‘방’이라고도 함]홀산이라고도 하고 또 금미달이라고도 하여 1천5백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책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돌아와 아사달에 은거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향년 1천9백8세였다」라 하였다.
古朝鮮(王儉朝鮮)
魏書云。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亦云白岳。在白州地。或云在開城東。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與高同時。古記云。昔有桓因(謂帝釋也)庶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乃授天符印三箇。遣往理之。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神壇樹下。謂之神市。是謂桓雄天王也。將風伯雨師雲師。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常祈于神雄。願化爲人。時神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爾輩食之。不見日光百日。便得人形。熊虎得而食之。忌三七日。熊得女身。虎不能忌。而不得人身。熊女者無與爲婚。故每於壇樹下呪願有孕。雄乃假化而婚之。孕生子。號曰壇君王儉。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則五十年丁巳。非庚寅也。疑其未實)都平壤城(今西京)始稱朝鮮。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又名弓(一作方)忽山。又今彌達。御國一千五百年。周虎王卽位己卯封箕子於朝鮮。壇君乃移於藏唐京。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壽一千九百八歲。
「위서(魏書)에서 말한다.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었다.그는 아사달(阿斯達)[경전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땅에 있다.혹은 또 개성(開城)동쪽에 있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그것이다.]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불렀다.요임금(堯:원문의 高는 고려 정종의 이름'堯'를 기휘하여 쓴 代字)과 더불어 같은 시기였다.」
고기(古記)에서 말한다. 「 옛날에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장남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들을 가리킴)인 환웅이 항상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버지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보내 인간세계를 다스리도록 했다. 이에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서 여기를 신시(神市)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명(命)·병(病)·형(刑)·선(善)·악(惡) 등 무릇 인간의 360가지 일을 맡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 같은 굴속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한번은 환웅이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1자루와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했다. 곰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근신하여 3·7일(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호랑이는 이것을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으므로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왕검이다. 왕검이 당고(唐高:중국 3황 5제 중의 堯를 말함. 당시 고려의 제3대 왕인 정조의 이름이 요인 까닭에 이를 피하여 뜻이 같은 高자를 대신 쓴 것임) 즉위 50년 뒤인 경인년(庚寅年:당고의 즉위년은 무진년으로 50년뒤면 정사년이므로 경인년이란 표현은 아마 틀린 듯함)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이어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의 아사달(阿斯達)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弓忽山:弓자 대신 方자를 쓰기도 함)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했다. 단군은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주(周)의 호왕(虎王:주의 무왕을 말함. 고려 2대 혜종의 이름이 武이기 때문에 이를 피한 것임)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자신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였다.」
단군신화의 해석
〈단군신화〉는 우리 역사상 등장한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에 관한 것인 만큼 오늘날에는 민족 전체의 국조신화로 여겨지고 있으며 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신화란 원래 당시의 현실 속에서 고대인이 경험한 것을 객관화시켜 형성된 관념이 간접적으로 표현된 사회적 의식형태의 하나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전하는 신화는 과거의 어떤 특정한 시점에서 완전한 형태로 정착된 것은 아니다. 역사발전과정을 거치는 동안 신화도 오랜 세월 변천을 거듭하여 내용의 일부가 소멸하기도 하고 첨가되기도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때문에 학자들 사이에는 신화의 내용을 허구로 인식하여 〈단군신화〉와 관련된 고조선의 존재조차도 부정하는 견해로부터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믿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다양하다. 〈단군신화〉에 대한 연구를 관점의 차이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볼 수 있다.
〈단군신화〉의 생성과정과 주인공에 관한 학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의 관점에서 이를 이해하는 견해이다. 중앙아시아로부터 한반도와 일본 등을 포함하는 지역에 사상 중심의 신앙과 사회조직을 가지는 종족들이 백산(白山)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종족적 관계는 여하튼 간에 이 문화가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가 바로 단군과 부루(夫婁)라고 본다. 둘째, 이 신화가 삼신(三神)사상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는 태양신화와 토테미즘 두 계통의 신화가 섞여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신화를 달리하는 두 종족이 정치·사회적으로 통합되면서 두 종족의 시조신화가 융합된 것으로 이해했다. 셋째, 천신족(天神族)인 환웅이 지신족(地神族)인 고마족의 여성과 혼인하여 단군이 출생했다는 것을 설화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이라는 호칭은 무군(巫君), 즉 제주(祭主)의 의미가 많고, 왕검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군장(君長)의 의의가 강하다고 보아 종교적 기능과 정치적 기능이 명칭상에서 구분된다고 파악하고 있다. 넷째, 신화 또는 토테미즘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태도를 벗어나 우리 민족 태고의 의식을 보여주는 사실로 파악하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단군신화〉의 농경관계 기사를 곡물재배민족의 제의(祭儀)로 파악하고 환웅과 웅녀를 쌍분체제(雙分體制 dual organization)로 간주하여 곰과 범이 한 굴에서 살았다는 내용을 일광금기(日光禁忌)와 탈피(脫皮)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했다. 다섯째, 단군신화에 나타난 곰숭배사상에 주목하여 이 신화내용을 동북아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살고 있던 고아시아족(Paleo Asiatic)과 연결시키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논거로 고아시아족의 시조설화에 곰숭배사상이 포함되어 있고 자신들은 곰의 자손이라고 믿고 있었던 점, 최고의 샤먼을 뜻하는 텡그리(tengri)와 단군이 어원상으로 관련이 있다는 점, 텡그리의 기능과 관련된 세계목(世界木:고대신화에서 하늘과의 통로로 여겨진 신성한 나무) 관념이 신단수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민족의 개국신화로 정착되는 과정에 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원래 고조선의 한 종족신화였던 〈단군신화〉가 대몽항쟁(對蒙抗爭) 등 민족의 단합이 요구되는 시대에 전체 민족의 신화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서는 단군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편찬시기가 대몽항쟁기였던 점, 〈제왕운기〉에서 구월산(九月山)을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아사달산으로 보고 거기에 사당이 존재한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이 무렵부터 단군신화가 민족 전체의 신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 평양에 사당을 지어 단군을 모신 뒤로는 명실상부한 국조(國祖)로 추앙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단군신화〉가 처음부터 우리민족의 건국사화(建國史話)로 인식되었다고 보고 있다. 즉 고조선은 이미 BC 12세기 이전에 북경 근처의 롼허 강[河]서쪽 경계로 하여 동북부는 헤이룽 강[黑龍江] 밖까지 이르는 만주일대와 한반도 전지역을 영토로 하는 동아시아의 대국으로 실재하고 있던 국가이므로 〈단군신화〉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며 따라서 단군은 그뒤 줄곧 개국시조로 인식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신화에 담겨진 역사적 현실과 그 시기 및 사실성 여부에 관해서도 다양한 논의가 있다. 첫째, 〈단군신화〉가 시대적 변화를 계기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즉 1단계에서는 씨족사회에서의 단순한 씨족토템이 생겼고, 2단계에서는 군사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수장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했으며, 3단계에서는 계급국가 형성 뒤 고조선 국왕으로서의 단군이 등장한 것으로 보았다. 둘째, 사회경제사적 관점에서 고대국가의 성립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에서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풍백·우사·운사·선·악·곡·형 등 360가지 인간사 등의 단어들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여 〈단군신화〉에 나타난 사회가 부권(父權) 중심의 농경사회 내에서 계급분화가 이루어지고 지배자가 등장한 청동기시대 초기라고 보았다. 또한 곰과 호랑이, 환웅과 웅녀의 결혼 등의 내용을 통하여 토템을 믿는 몇 개의 종족이 결합하여 부족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셋째, 〈단군신화〉가 포용하고 있는 역사의 시대를 고고학적인 연대와 관련하여 신석기시대의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 지역과 관련되며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담당자가 고아시아족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단군신화〉의 시대적 성격이 신석기문화와 연결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넷째, 〈단군신화〉를 4단계의 역사적 발전단계가 압축된 것으로 보아 무리사회 단계인 환인시대, 부락사회 단계인 환웅시대, 부락연맹체사회 단계인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 국가사회 단계인 단군시대로 보아 한민족의 역사적 체험, 즉 인류사회의 보편적 발전과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에 따르면, 각 시대를 고고학 자료와 연결시켜 환인시대는 1만 년 이전의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시대, 환웅시대는 1만 년 전 전후부터 6,000여 년 전까지의 전기신석기시대, 환웅과 웅녀의 결혼시대는 6,300~4,300여 년 전(BC 2300경)의 후기신석기시대, 고조선시대는 BC 2300년경부터 BC 2세기말까지로 보아 신화의 내용 대부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와 함께 랴오닝[遼寧] 지역의 풍하문화(豊下文化:夏家店下層文化)가 청동기문화로서 단군의 개국연대와 연결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단군신화〉를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언급한 견해도 제기되었다. 즉 문헌에 보이는 자료를 토대로 산둥 성[山東省]에 있는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 내의 화상석(畵像石)의 그림과 〈단군신화〉의 내용이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이의 전파가 종족 이동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했다. 최근에는 이 견해의 바탕이 되는 무씨사당의 화상석이 단군신화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밖에 단군과 관련된 문헌 중 도가(道家) 계통의 역사서인 〈규원사화 揆園史話〉·〈환단고기 桓檀古記〉 등을 제시하여 단군조선의 역사가 47대의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실사(實史)였음을 강조한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이 역사서가 한말과 일제하에 만들어진 위서(僞書)라는 비판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해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한 점이 많다. 어쨌든 〈단군신화〉는 우리 민족이 수난을 당하고 위기에 처할 때마다 민족의 단합을 요구하는 구심체 역할을 해왔고 계속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유지할 것이다.
한편 일제강점기의 민족의식의 고양과 관련하여 단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종교로 발전한 것이 대종교(大倧敎)이다. 대종교는 1909년(융희 3) 나철(羅喆)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대종교에서 단군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행사이던 개천절(開天節)을 8·15해방 후 정부가 정식으로 국경일로 지정했다. 1945년 대한민국정부 수립과 동시에 법령으로 공포되어 사용되던 단기(檀紀)는 고려말 우왕(禑王)의 사부였던 백문보(白文寶)가 사용한 예에서 처음 보인다. 요즘의 단기는 조선시대의 사서 〈동국통감 東國通鑑〉에서 고조선의 건국을 요 즉위 25년 무진년으로 본 것에 근거하여, 단군 원년을 BC 2333년으로 정한 것이다. 5·16군사정변으로 군사정부가 집권한 뒤인 1962년 1월 1일부터 단기 사용을 중지시키고 공식적으로는 서기(西紀)만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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