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최씨.../역사.지명.유래

신삼국사기 고구려본기 3-4-5.

Choi가이버 2022. 10. 31. 07:03

신삼국사기 고구려본기 3                    

제 3대 대무신제 본기

1.신동 무휼의 성장

 유리명제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 도절은 유리명제와의 갈등으로 죽고,둘째 해명은 황룡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사건으로 유리명제의 명에 따라 자살하였다.이에 셋째 아들 무휼이 제위에 오르게 된다.
 무휼은 다물국왕 송양의 딸 송씨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하지만 유리명제의 첫 번째 황후였던 송양의 딸 송씨는 유리명제 3년(서기전 17년) 10월, 입궁 1년 3개월 만에 죽었다.따라서 무휼의 어머니 송씨는 서기전 18년(유리명제 2년) 7월에 유리명제에게 시집 온 송씨가 아니다.즉 무휼의 어머니 송씨는 송양의 또 다른 딸이라는 것이다('유리명제의 가족들'편 참조).
 이 때문에 여기에서는 무휼의 어머니 송씨를 송양의 차녀로 기록하고,유리명제의 제 2황후로 서술했다.그리고 무휼을 유리명제의 셋째 아들이자 제 2황후 송씨 소생으로 판단한 것이다.

 무휼은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던 모양이다.'삼국사기' 유리명왕 28년(서기 9년) 8월의 기사는 이러한 무휼의 총명함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을 8월,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화서 왕을 꾸짖으며 "우리 선왕이 그대의 선왕 동명왕과 서로 의좋게 지냈다.그런데 이제 우리 신하들을 이곳으로 도망하게 하여 유인하는 것은 백성을 늘려 나라를 강성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던가.나라에는 대국과 소국이 있고,사람에게는 아이와 어른이 있으니,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이 순리이듯이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 예법이다.이제 왕이 예절과 순리로써 우리를 섬기고자 한다면 하늘의 도움으로 나라의 운명이 영원히 보존될 것이나,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사직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다."하고 말했다.
 이에 왕은 자위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성과 군대가 약하므로 치욕을 참고 굴복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형세에 합치된다."고 하였다.그리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과인이 바다 한구석에 외따로 살아온 까닭에 미처 예의를 알지 못하였습니다.이제 대왕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어찌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회신하였다.
 이때,왕의 아들 무휼은 나이가 아직 어렸다.그는 왕이 부여에 회신을 한다 는 말을 듣고 자신이 직접 부여 사신을 찾아가 말했다."우리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 현명하고 재주가 많았다.그런데 대왕이 질투하고 모해하여 부왕에게 참소하는 바람에 말이나 기르는 직위를 부여받아 어려움을 당했다.이때문에 불안을 느껴 탈출하였던 것이다.이제 대왕이 전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오직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 나라를 멸시하고 있으니 사신은 돌아가서 대왕에게 '이곳에 알을 쌓아놓았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신하와 장수의 예로 섬길 것이요,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못하겠다.'고 전하라."하였다.
 부여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에게 그 뜻을 두루 물었다.그 뜻을 알아차린 한 노파가 "알을 쌓아놓는 자는 위태로울 것이요,쌓아놓은 알을 무너 뜨리지 않는 자는 안전할 것이라."고 하였다.노파의 말은 곧 왕은 자기의 위태로움은 알지 못하고 남이 와서 굴복하기를 강요하고 있으니,이는 위기를 피하여 자기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무휼은 이때 불과 6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그런데 어른들로 해석하기 힘든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다.이는 물론 무휼의 총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소 과장한 내용일 수도 있다.그렇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기록은 아닐 것이다.혹 누군가가 무휼에게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주고,무휼은 단지 전달만 했다고 하더라도 6세의 어린아이가 그 같은 내용을 말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렇게 6세 때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총명함을 드러내던 무휼은 불과 10세 되던 해인 유리명제 32년(서기 13년) 11월에 고구려를 침략한 부여군을 방어했다는 기록이 있다.이때 무휼은 적을 산골 깊숙히 끌어들여 골짜기에 적을 가두고 기습전을 펼치는 계책을 내놓았다고 한다.그리고 이듬해 11세 되던 해에는 태자에 책봉되어 유리명제를 대신해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고 한다.
 이 같은 기록을 증명하기라도 하듯,4년 뒤인 서기 18년 10월에 무휼은 유리명제의 뒤를 이어 15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올라 과감한 팽창정책을 감행하게 된다.


2.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대무신제의 팽창정책
 (서기 4년~44년,재위기간:서기 18년 10월~44년 10월,26년)

 한나라에서 왕망이 왕위를 찬탈한 이후 중원은 왕망군과 농민군의 전쟁에 휩싸인다.이에 따라 국제정세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고구려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에 나선다.하지만 후한의 성립으로 고구려의 대대적인 팽창정책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대무신제는 유리명제의 셋째 아들이며,다물국왕 송양의 차녀 제 2황후 송씨 소생이다.서기 4년에 태어났으며,이름은 무휼이다.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총명하였고,유리명제 33년(서기 14년) 정월에 11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었다.그리고 서기 18년 10월에 유리명제가 생을 마감함에 따라 고구려 제 3대 황제에 올랐다.
 대무신제가 제위할 무렵 왕망의 신나라에서는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부패한 정권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왕망 정권에 반기를 든 것이다.그 대표적인 예가 산동 지방의 번숭이 일으킨 '적미의 난'과 녹림산에서 왕광과 왕봉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녹림의 난'이었다('적미의 난'은 반란군이 적군을 식별하기 위해 눈썹을 붉게 물들이고 자신들을 적미병이라고 부른 데서 기인 하였다).
 이들 봉기세력은 국가존립의 토대가 되는 농민들이었고,이 같은 상황을 이용하여 한 왕조의 유씨 일가들은 한의 재건을 꿈꾸기에 이른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대무신제는 대대적인 팽창정책을 감행한다.대륙의 맹주였던 한나라의 붕괴와 한나라를 붕괴시킨 왕망 정권의 몰락은 곧 북방의 맹주를 자처하던 고구려와 부여에겐 영토확장의 기회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팽창정책의 속내를 먼저 드러낸 측은 부여였다.서기 20년(대무신제 3년)10월 부여왕 대소는 몸통이 두 개인데 머리는 하나뿐인 붉은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며 사신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
 대소는 사신을 통해 이 말을 전하면서 부여가 고구려를 합병하겠다는 암묵적인 선전포고를 한다.이에 대무신제는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이다.그런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구나."
 사신으로부터 이러한 해석을 전해 들은 대소는 후회를 거듭하였고,그런 가운데 대무신제는 부여 정벌을 준비하여 서기 21년 12월에 선제공격을 감행한다.정벌길에 오른 대무신제는 9척 장신 괴유를 장수로 맞아들였는데,이듬해 2월 그는 부여왕 대소의 목을 베게 된다.
 대소의 죽음은 부여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다준다.왕을 잃은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고,왕위다툼에서 밀려난 대소의 막내동생은 부여를 탈출하여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운다.또한 그해 7월에는 대소의 사촌동생이 백성 1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해 온다.
 이 무렵 중원에서는 한왕조의 후예인 유연과 유수 형제가 한의 재건을 맹세하고 신의 군대와 격돌하였다.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23년에 마침내 왕망을 제거하였고,2년 뒤인 서기 25년에 유연의 동생 유수가 한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그가 바로 동한(후한)의 광무제다.
 이처럼 중원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가운데 고구려는 안으로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바깥으로 꾸준히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서기 26년 10월에는 개마국을 복속시키고,같은 해 12월에는 구다국을 복속시켰다.이때 대무신제
는 자신이 직접 정벌전쟁에 나서 개마국왕을 죽이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팽창정책이 가속화되고 있을 무렵,유수는 한의 요동 태수를 앞세워 고구려를 침략한다.서기 28년 7월 한의 요동 태수가 100만의 군사를 이끌로 위나암을 향해 밀려들자,고구려 조정은 수비책을 세워 수성전에 돌입 하였다.하지만 한의 요동군은 위나암성을 에워싸고 장기전 태세를 갖췄고, 이에 당황한 고구려군은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이때 좌보로 있던 재상 을 두지는 적군이 암벽성인 위나암성 안에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수초로 싸서 적장에게 보낸다.그러자 적장은 성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내에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물러간다.
 이른바 을두지의 '잉어계책' 덕택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대무신제는 그 이후로도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낙랑을 정복한다.
 낙랑 정복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람은 대무신제의 둘째 아들 호동이었다
 .호동은 낙랑 정복을 위해 낙랑왕 최리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까지 철저하게 정복야욕을 숨기기도 하였다.그러나 호동은 낙랑 정복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그는 서기 32년에 대무신제의 첫째 황후가 꾸민 계략에 걸려 어머니를 간통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결국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그로부터 5년 후에 대무신제는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낙랑을 복속하게 된다.
 하지만 고구려의 낙랑 복속은 동한의 반발에 부딪힌다.동한은 낙랑 지역이 원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돌려줄 것을 주장한다.하지만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자 동한의 유수는 서기 44년에 바다를 통해 낙랑 지역에 병력을 투입하였고,이에 밀린 고구려는 결국 낙랑을 동한에 뺏기게 된다('삼국사기'는 이 사건 이후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하지만 이때의 살수는 한반도의 청천강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낙랑'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낙랑에 대한 한나라의 대대적인 침입이 있던 서기 44년 10월 대무신제는 향년 4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능은 대수촌 언덕에 마련되었으며,묘호는 대무신제라 하였다.

 

3.대무신제의 가족들

제 3대 대무신제 가계도

 제 2대 유리명제
     │            3남
     ├──────── 제 3대 대무신제
     │                        。무휼,4년~44년
 제 2황후 송씨                 。재위:18년 10월~44년 10월, 총 26년
                               。부인:2명 hl2tci
                               。자녀:2명

                                 │
                                 │      1남
                              제 1황후 ───── 해우
                              성씨불명            제 5대 모본제
                                 │
                                 │          1남
                              제 2황후 금씨 ─── 호동

 

 대무신제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다만 그에게 2명의 부인이 있었고,그 부인들로부터 각각 1명씩의 아들을 얻었다는 사실만 확인 될 뿐이다.
 대무신제의 제 1황후는 제 5대 모본제의 어머니이며,제 2황후는 갈사왕의 손녀 금씨로 호동왕자의 친모이다.이들 가족 중 모본제에 대해서는 모본제본기에서 다루기로 하고,여기에서는 제 1황후와 제 2황후 금씨,그리고 호동왕자에 관해 언급하도록 하겠다.

 제 1황후(생몰년 미상)
 대무신제의 제 1황후는 성씨도 확인되지 않을 뿐 아니라,그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도 거의 없다.다만 '삼국사기' 대무신왕 15년 11월 기사에 그녀에 대한 아주 짧은 언급이 있을 뿐이다.
 대무신제에게는 그녀 외에도 또 1명의 부인이 있었다.그녀는 갈사왕의 손녀 금씨이며,그녀의 소생이 호동왕자이다.호동은 대무신제의 총애를 받았고, 그 때문에 제 1황후는 대무신제가 그녀 소생인 해우를 태자로 봉하지 않고 호동을 태자로 세울까봐 몹시 염려하였다.
 고심 끝에 그녀는 계책을 하나 세웠다.호동이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고 거짓말을 꾸며댔던 것이다.하지만 대무신제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이에 그녀는 울면서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주장했다.
 황후의 결사적인 주장에 밀린 대무신제는 드디어 호동을 벌주려 하였다.그러자 이를 안 호동은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결해버렸다.
 제 1황후에 관련된 내용은 이처럼 호동의 기사에 한정되어 있다.제 5대 모본제의 모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출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모본제가 폭군인데다가 자신의 근신 두로에 의해 살해되기 때문일 것이다.

 제 2황후 금씨(생몰년 미상)
 제 2황후 금씨는 호동의 어머니이며,부여의 왕족 갈사왕의 손녀이다.
 제 2황후 금씨에 대한 기록 역시 호동왕자의 기사에 한정되어 있다.그녀의 성씨를 금씨라고 단정하는 것은 그녀가 갈사왕의 손녀라는 사실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갈사왕은 금와의 여섯째 아들이기에 금씨 성을 썼을 것이고,그 손녀 역시 금씨라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가 대무신제의 두번째 아내가 된 것은 정략적인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갈사부여를 개국한 갈사왕은 고구려의 배려 없이는 나라를 지탱할 수 없었고,따라서 조공의 형태를 띠며 고구려 황실과 혼인관계를 맺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호동(?~서기 32년)
 호동은 대무신제의 장남이며,제 2황후 금씨 소생이다('삼국사기'는 해우(모본제)를 장남으로 기록하고 있는데,이는 그가 적통이고 제위를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동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대무신왕 15년 4월과 11월 기사에 실려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름 4월,왕의 아들 호동이 옥저에서 유람하고 있었다.그때 낙랑왕 최리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만났다.그리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니구려.그대 북국 신왕의 아들이 아니오?"
 낙랑왕 최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그 후,호동이는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
 "당신이 국가의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숴버릴 수 있다면,나는 예를 갖춰 당신을 맞이할 것입니다.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을 맞아 들일 수가 없소이다."
 예로부터 낙랑에는 적병이 쳐들어오면 저절로 소리가 나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그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이를 부숴버리도록 한 것이었다.최리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의 입을 베어버린 후,이를 호동에게 알려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최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방비를 하지 않았고,우리 군사들이 소리 없이 성 밑까지 이르게 된 이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서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낙랑을 없애기 위해 청혼하고,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다음,그녀를 본국에 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했다는 설도 있다).
 겨울 11월,왕의 아들 호동이 자살하였다.호동은 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 손녀의 소생이었다.그는 얼굴이 곱상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이에 따라 이름도 '호동'이라고 하였다.
 첫째 왕비는 호동이 종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참소 하였다.
 "호동이 나를 무례하게 대하며,욕보이려 하였습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왕후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 미워하는 게요?"
 첫째 왕비는 왕이 자기를 믿지 않음을 알고,장차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했다.
 "청컨대 대왕께서 살펴보소서.만약 그런 일이 없으면,제가 죄를 받겠습니다."
 이렇게 되자 대왕은 호동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그에게 죄를 주려하였다.이 사실을 안 어떤 이가 호동에게 말했다.
 "그대는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
 호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그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부왕에게는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니,이를 어찌 효라 할 수 있게는가?"
 호동은 곧 칼을 품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이 기록이 호동왕자에 대한 낙랑공주의 애틋한 사랑,그리고 호동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전말이다.
 이 사건은 고구려가 낙랑국을 굴복시킨 이후 호동의 세력이 급성장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며,조정 일부에서는 호동을 태자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4.대무신제 시대의 전쟁들

 고구려의 부여 정벌전쟁

 대무신제는 제위하자마자 부여를 정복할 계획을 세운다.한의 내분으로 대륙의 정치질서가 문란해진 가운데 고구려는 대륙의 맹주로 성장하기 위하여 일차적으로 부여를 치기로 한 것이다.
 고구려의 이 같은 정벌계획에 빌미를 제공한 것은 부여왕 대소였다.대소는 대무신제에게 머리가 하나고 몸이 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는데,이는 부여가 고구려를 복속하겠다는 뜻이었다.이에 고구려는 대소의 행위를 선전포고로 해석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부여를 공격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출정한 것은 서기 21년 12월이었다.이 혹한의 겨울에 대무신제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로 부여를 향해 진군하여,이듬해 2월에 날이 풀리자 부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고구려가 부여의 남쪽 변방을 향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들은 대소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출전하였다.그리고 고구려군이 머물고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곧장 말을 내달렸다.하지만 그는 고구려군의 계략에 말려들고 말았다.
 고구려군은 진군하던 도중에 아주 넓은 개펄을 발견하자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개펄 주변에는 강이 흐르고 곧잘 짙은 안개가 끼곤 하였는데,대무신제는 그것을 이용하여 부여군을 무찌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무신제는 개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진을 치고 일부 병사들로 하여금 적이 관찰할 수 있는 자리에서 편안하게 쉬도록 하였다.그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적의 내습을 기다렸다.
 맞은편에 있던 부여군은 고구려군이 편안하게 앉아 쉬는 것을 보고,때를 놓치지 않고 기습을 감행하였다.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던 탓에 부여군은 땅바닥이 진흙투성이의 개펄이라는 사실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습을 감행한 부여군은 졸지에 진흙 수렁에 갇히고 말았다.전위부대인 기마병들은 말이 진흙에 빠져 허둥대는 바람에 어쩔 줄을 몰라했고,그들을 지휘하고 있던 대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구려군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돌진하였다.돌격대의 선봉장은 괴유였다.그는 부여를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한 장수였다.키가 9척에다 힘은 장사였고,무기를 다루는 솜씨도 대단했다.그리고 그의 칼날은 부여왕 대소의 목을 벴다.

 왕을 잃은 부여군은 한동안 허둥댔지만 곧 대열을 정비하고 고구려군을 압박해왔다.고구려군은 수적으로 아주 불리한 상태였다.그래서 어느 새 그들은 부여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하지만 부여군은 쉽사리 고구려군을 공격하지는 못했다.단지 겹겹이 고구려군을 둘러싸고 조금씩 조금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그들은 고구려군의 식량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식량이 고갈되면 스스로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부여군의 판단은 적중했다.시일이 지나면서 고구려군의 군량미는 고갈되었고,그 때문에 군사들은 굶주림에 허덕였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무신제는 두려움에 떨며 탈출로를 모색했다.그렇게 수일이 흘렀을 때 뜻밖에도 짙은 안개가 깔리기 시작했다.한치 앞도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그 짙은 안개는 7일 동안 계속 끼어 있었고,대무신제는 그 안개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고구려군은 안개 속에서 이른바 '허수아비작전'을 썼다.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병영 안팎에 세우고 옆에 병기를 꽂아두었는데,그것이 마치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처럼 보였기 때문에 부여군은 섣불리 쳐들어오지 못했다.
그떄 고구려군은 사잇길을 이용하여 밤낮으로 행군하였고,구사일생으로 위나암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퇴각하는 고구려군은 거의 빈손이었고,수일 동안 굶은 상태였다.가지고 있던 병기와 타고 있던 말,밥을 짓던 가마솥 등 짐이 되는 것은 모두 버리고 오로지 맨몸으로 안개 속을 빠져나와 꽁지가 빠져라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그렇게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여 도성으로 돌아온 대무신제는 경솔하게 부여를 공격한 것을 후회했다.그리고 전사자들의 집안을 직접 위로하고,부상당한 병사들을 문병하는 등 적극적인 수습책을 마련하여 가까스로 백성들의 원성을 누그러뜨렸다.
 고구려의 이 같은 타격 못지않게 부여의 피해도 막중했다.그들은 왕을 비롯하여 1만의 군사를 잃었으며,그 여파로 왕족들 사이에 왕위다툼이 벌어져 피비린내나는 정쟁이 벌어졌다.이 때문에 대소의 막내동생은 무리를 이끌고 부여를 빠져나가 압록강 근처에 갈사국을 세웠으며,대소의 사촌동생 중 하나는 1만여 명의 백성들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했다.
 이 같은 혼란으로 부여의 국력은 점차 약화되어,마침내 고구려에게 북방의 맹주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이다.

 

고。한의 위나암성싸움과 을두지의 '잉어계책'

 고구려가 팽창정책을 지속하는 가운데 이에 위기를 느낀 동한은 서기 28년 7월에 100만의 군사로 고구려를 침략한다.침략의 선봉장은 요동 태수였다.

 한군이 침략해 올 무렵 고구려는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재상 좌보와 우보를 중심으로 조정을 운영하고 있었다.이때 좌보에는 을두지,우보에는 송옥구가 임명되어 있었는데,한군의 침략에 대한 서로의 시각이 달랐다.
 우보 송옥구는 적에 대해 선제공격을 감행할 것을 주장하며 말했다.
 "신이 듣기로는 덕을 믿는 자는 창성하고,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 하였습니다.지금 중국에는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봉기하고 있는데,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키니 이는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필시 변방의 장수가 사욕을 채울 목적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한 것입나.이는 하늘의 이치에 위배되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우리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였다가 불시에 습격을 한다면 적을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좌보 을두지가 송옥구의 주장에 반대하며 나섰다.
 "수가 적은 편은 비록 한때 강했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수가 많은 편에게 잡히게 됩니다.신이 우리 군사와 한나라 군사의 수를 비교해보았는데,계략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는 있어도 힘으로는 불가합니다."
 이에 대무신제가 물었다.
 "계략으로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을두지가 대답했다.
 "지금 한나라 군사들은 원정을 와서 싸우기에 그 기세를 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폐하께서는 성문을 닫고 우리 군사를 정비하여,적군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나아가 공격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대무신제는 을두지의 의견을 따랐다.그런데 한군은 수십일 동안 위나암성을 둘러싼 채 포위를 풀지 않았다.이 때문에 오히려 고구려군이 지쳐버렸다.더군다나 성안에는 물이 고갈되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재무신제는 다시 신하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했다.
 "그들은 우리가 암석지대에 머물고 있으므로 성안에 샘이 없다고 판단한 듯 합니다.그래서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으면 우리가 곤경에 처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지요.그러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다가 수초로 싸고,술과 함께 한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을두지의 의견에 따라 대무신제는 수초로 싼 잉어와 술을 한나라 군영에 보냈다.그리고 그들의 위신을 세워주는 내용을 담은 편지도 함께 보냈다.이에 한의 요동 태수는 성안에 물이 있어 빠른 시간 내에 성을 점령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스스로 물러갔다.
 고구려는 을두지의 이른바 '잉어계책'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적을 격퇴하였던 것이다(고구려의 명신들 중에는 이 을두지를 비롯하여 유리명제대의 재상 을소와 그의 후손으로 고국천제대에 재상을 지내는 을파소 등이 있다.또 백제 온조왕대의 재상 중에도 을음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 역시 고구려 출신이다.이 을씨들은 아마도 고구려 5부족 중 한 종족을 이루는 귀족가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5.대무신제 시대의 주변 국가들

 갈사부여
 갈사부여는 서기 22년에 부여 금와왕의 여섯째 아들이 세운 국가이다.이해에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남아 있던 대소의 다섯 아우를 비롯한 왕족들간에 치열한 왕위다툼이 벌어진다.갈사부여를 세운 갈사왕은 이 왕위다툼에서 패배하여 몰래 군사를 이끌고 압록곡 근처로 피신한다.그리고 그곳에서 해두왕을 죽이고 갈사부여를 세우게 된다.
 갈사부여는 갈사수 근처에 세워졌는데,이 갈사수는 아마도 요하(당시 압록수)의 지류인 듯하다.또한 해두왕을 죽이고 갈사국을 세웠다는 것으로 봐서 바닷가에 인접해 있었던 것 같다.갈사왕이 죽인 해두왕은 '해두'라는 소국의 왕으로 판단되는데,이 해두라는 명칭이 곧 바닷가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바다에 머리를 내민 듯한 땅,즉 반도에 위치한 국가를 일컫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갈사부여의 위치는 요하와 발해가 만나는 발해만 연안의 어느 곳에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갈사부여는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모양이다.호동왕자의 친모이자 대무신제의 두 번째 황후인 금씨가 갈사왕의 손녀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말하자면 갈사부여는 고구려와 결혼관계를 맺어 안전을 보장 받은 것이다.
 하지만 갈사부여는 오래 가지 못한다.제 6대 태조 16년(서기 68년)에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항복함으로써 고구려에 복속되기 때문이다.

 

 개마
 대무신제 9년(서기 26년)에 고구려는 개마국을 정복하고 그 국왕을 죽인다
 .이때 고구려가 점령한 개마국은 아마도 '개마대산' 근처에 있던 국가였을 것이다.당시 소국들은 대개 지명을 따서 국명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개마대산에 대한 기록은 '후한서'-동옥저전-에 처음 나타난다.이 기록에서는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고 했다.그렇다면 동옥저를 함경도 일대에 설정했을 때 개마대산은 현재의 개마고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개마국은 개마고원에 있던 소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개마국의 점령은 곧 고구려가 처음으로 한반도에 진출했음을 뜻한다.그 이전의 어떤 기록에서도 고구려가 한반도로 진출할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구다
 개마국을 패망시킨 서기 26년에 고구려는 그 여세를 몰아 구다국을 정복한다.개마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다왕은 스스로 항복해버린 것이다.
 개마의 패망소식을 듣고 구다가 항복했다는 것은 구다 역시 개마 근처에 있던 소국이었다는 뜻이 된다.그리고 고구려가 개마를 거쳐 구다로 진군 했다는 것은 구다가 개마보다 더 남쪽 혹은 동쪽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낙랑
 낙랑은 대무신제 20년(서기 37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다.그런데 이 낙랑이라는 이름은 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실치했다는 한사군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다.
 낙라에 대한 기록은 '한서'에 처음으로 나타난다.한나라 무제가 위만조선을 무너뜨리고 조선 지역에 4개의 군을 설치했다는 다음의 기사가 그것이다 .
 "이로써 마침내 조선은 평정되어 진번,임둔,낙랑,현도 등 4개의 군이 되었다.참을 봉하여 홰청후를 삼고 한도를 추저후로 삼았으며,왕겹을 평주후로 삼고 장은 기후로 삼았다.최는 부친이 죽었고,자못 공로가 있었기에 저양후로 삼았다."
 여기서 각 지역의 후로 봉해진 5명은 모두 조선의 신하들이었다.한도와 참은 조선의 재상이었으며,왕겹은 장수였고,장은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 우거의 아들이기에 조선의 태자라고 볼 수 있다.그리고 마지막에 거론된 최는 조선의 재상이었던 노인의 아들이다.
 따라서 '한서'의 기록은 한이 멸망시킨 위만조선의 영역을 진번,임둔,낙랑현도 등 4개의 군으로 나누고 조선인으로서 자신들에게 협력한 사람들에게 그 지역을 나눠주어 자체적으로 통치하게 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이 같은 추론은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그 지역을 안동도호부라 하고 고구려의 마지막 황제 보장제를 조선군왕에 봉하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
 한으로부터 제후 봉작을 받은 사람들과 그 자손들이 대대로 봉작을 세습하며 낙랑군을 비롯한 각 지역을 다스렸다는 것이다.즉 한도와 참,왕겹,최 등에게는 진번,임둔,낙랑,현도 등을 다스리게 하고 위만조선의 태자인 장에게는 일정한 토지를 떼주고 생활을 보장해주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네 사람 중 누가 낙랑군을 통치하였을까?
 고구려에 의해 멸망할 당시 낙랑의 왕은 최리(두 '최' 모두 '높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라는 사람이었다.이는 낙랑군이 최씨 성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졌다는 뜻이 되고,최씨 성을 사용했을 법한 사람으로는 노인의 아들 최밖에 없다.즉 위만조선 멸망 후 낙랑군은 최에게 주어졌으면,그 자손들이 그 지역을 다스려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낙랑이라는 나라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선 낙랑이라는 이름에서 그 위치를 설정해볼 필요가 있겠다.
 '낙랑'이라는 말을 풀이해보면 '물결을 즐긴다'는 뜻이 된다.좀 더 구체적 으로 말하면 '파도를 즐긴다'는 뜻이다.이는 곧 낙랑이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에 위치했음을 의미한다.말하자면 낙랑은 바다를 끼고 있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낙랑이라는 이름이 처음 언급된 '한서'에는 한사군의 순서가 진번,임둔,낙랑,현도 순으로 되어 있다.이 배열은 아마도 한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가까운 순서에 의거했을 가능성이 높다.이 논리에 의지할 때 낙랑은 적어도 현도보다는 한나라에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설정이 가능하다.
 그러데 '후한서'의 -부여국전-에는 "부여국은 현도의 북쪽 1천 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다시 말해서 현도는 부여국의 남쪽 경계로부터 1천 리 남쪽에 있다는 뜻이 된다.또 '후한서'는 "(부여의) 남쪽은 고구려와 접한다."고 했다.따라서 현도는 고구려의 서남쪽에 있어야 한다.그러나 '후한서'- 동옥저전-에는 현도군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무제는 조선을 멸하고 옥저의 땅을 현도군으로 삼았다.후에 이맥들의 침략을 받게 되자 군을 고구려의 서북으로 옮기고,다시 옥저를 현으로 삼아 낙랑의 동부도위에 예속시켰다."
 이 기록에서는 현도가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갔다고 했다.이는 같은 책  '부여국전'의 "부여국은 현도의 북쪽 1천 리에 있고","부여의 남쪽은 고구려와 접한다."는 기록과 모순된다.또 이 기록에 바탕할 때 군의 위치가 상황에 따라 옮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는 '후한서'의 편자가 고구려의 땅을 한때 자신들이 지배했다는 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현도의 위치를 조작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게 한다.
 그리고 어떤 기록도 현도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주장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또한 낙랑이 현도보다 한의 장안에 더 가까이 있었다는 논리를 여기에 대입한다면 낙랑 역시 한반도 내에 있을 수 없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낙랑의 위치를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이 있다.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이에 따라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대무신왕 27년 9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낙랑 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태조 94년 8월)
 이 두 기록을 분석해보면 낙랑의 위치는 좀더 명확해진다.대무신제 27년(서기 44년) 9월에 한나라가 고구려로부터 뺏은 낙랑은 고구려가 대무신제 20년에 정복한 곳이다.그렇다면 낙랑은 한에 복속되었다는 뜻이고,그때로부터 102년 후인 제 6대 태조 94년(서기 146년) 8월 기사에 언급되는 낙랑 태수는 바로 한이 서기 44년에 정복한 낙랑 지역의 태수라고 보아야 한다.그런데 고구려군은 낙랑 태수의 부인을 한의 요동 서안평현에서 붙잡아왔다.
이는 서안평현에 낙랑 태수가 있었다는 뜻이 되고,낙랑 역시 한의 요동 서안평현에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요동은 난하 동쪽,요하(랴오허) 서쪽 지역을 의미하므로 낙랑은 난하와 요하 사이에 있으면서 난하 쪽으로 치우친 바닷가에 있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이러한 결론을 바탕으로 할 때 대무신왕 27년 기사에 나오는 '살수'는 현재 북한에 있는 청천강이 될수 없다.이 기록에서의 살수는 요하 주변에 있는 어떤 강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또한 이는 612년에 벌어지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청천강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려준다(살수에 관한 더 사제한 내용은 제 26대 영양제 본기에서 언급된다).
 하지만 한의 요수를 현재의 황하로 설정하는 학자들도 있다.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록은 '삼국사기' 제 5대 모본왕 2년의 기사이다.
 "2년 봄,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하였다.그러나 요동 태수 채용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이때 고구려가 점령한 북평。어양。상곡은 현재의 북경 근처이며,태원은 당을 세운 이연이 일어났던 곳으로 황하 조금 못미처에 있는 현재의 태원시 이다.그리고 이들 지역 중 북평을 제외하고는 모두 난하 서쪽에 있다.그런데 이곳을 고구려가 점령하자 한왕 유수는 요동 태수를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이는 곧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이 모두 당시 한나라의 요동에 속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그렇다면 요수는 바로 황하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단지 한나라가 고구려와의 화친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요동 태수를 앞세웠다는 사실만으로 황하를 요수로 설정하는 것은 비약적인 부분이 없지 않다.


。대무신제 시대의 세계 약사。
 대무신제 시대 중국은 왕망의 신이 망하고 동한이 들어선다.한의 재건을 부르짖으며 일어선 동한의 광무제는 주변의 약소국들을 병합하며 팽창정책에 돌입한다.이에 따라 동한과 선비,흉노,오환의 전쟁이 지속되다가 마침내 동한이 중원의 패권을 장악한다.
 이 무렵 유럽의 로마에서는 예수교가 일어나 선교활동을 시작하고 예수의 12제자가 각지에서 포교활동을 한다.그런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스테파노가 첫 순교를 하고 예수교에 입교한 바울이 아테네를 찾아가 포교를 시작한다.
이 무렵부터 '신약성서'가 형성된다.
 한편,이때 인도에서는 쿠샨 왕조가 흥기하여 간다라 문화가 형성된다.

 

신삼국사기 고구려본기 4   

 제 4대 민중원제 본기

 1.민중원제의 짧은 치세

     (?~서기 48년,재위기간:서기 44년 10월~48년 모월,약 4년)

 

 민중원제는 유리명제의 넷째 아들이자 유리명제의 제 2황후 송씨 소생이며,이름은 해색주이다.

 '삼국사기'는 그의 즉위에 대하여 "대무신왕의 아우이며,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아직 나이 어려 정사를 담당할 수 없었다.이에 따라 백성들이 해색주를 왕으로 세웠다."고 쓰고 있다.

 그의 개인 신상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하지만 대신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한 것을 보면 그가 대무신제의 동복아우라는 추론이 가능하다.따라서 그 역시 대무신제와 마찬가지로 유리명제의 제 2황후 송씨 소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민중원제가 제위에 오른 것은 대무신제가 생을 마감한 서기 44년 10월이었다.제위에 오른 그는 우선 그해 11월에 많은 죄수들을 사면하고,이듬해 3월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풂으로써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알렸다.

 그러나 서기 45년 5월에 동부 지역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백성들이 굶주리고,유랑민이 늘어나는 등 큰 어려움을 겪는다.이에 민중원제는 국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을을 구제한다.하지만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서기 46년 겨울에는 설상가상으로 위나암에 전혀 눈이 내리지 않아 백성들은 겨울가뭄에 시달린다.이 같은 국가적 어려움은 민중원제를 고통스럽게 하였고,고통을 이기지 못한 민중원제는 서기 47년에 병으로 드러눕는다.

 이렇게 어려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그해 10월에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해버렸다.이때 투항한 사람들은 아마도 한나라에서 멀지 않은 고구려 변방에 살고 있었던 듯하다.또한 먼저 낙랑으로 갔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낙랑과 근접한 지역이었을 것이므로 당시 고구려 변방이던 요서 지역의 주민들일 것이다.나라가 어려워지면서 고구려 조정은 이들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고,이 틈을 이용해 잠우락부의 대가 벼슬에 있던 대승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주민들고 함께 한나라에 투항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듯 국가의 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민중원제는 서기 48년 병이 악화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생전에 사냥을 하다가 민중원에 있는 석굴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유언한 적이 있었다.이에 따라 신하들은 그를 민중원의 석굴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민중원제라 하였다.

 

 제 4대 민중원제 가계도hl2tci

  제 2대 유리명제

      │           4남

      ├──────────── 제 4대 민중원제

      │                          。해색주,생년미상~48년

 제 2황후 송씨                    。재위:44년 10월~48년 모월,약 4년

                                  。부인:1명

                                  。자녀: ?

                                     │

                                     │

                                    황후

                                  성씨불명

 

 '삼국사기'는 민중원제의 가족들에 대해 전혀 언급한 바 없다.다만 그의 무덤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왕후와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는데,이 기록은 그에게 황후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하지만 그의 황후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물론 그의 가족들에 관한 기록도 전무하다.

 

2.고구려 묘호와 능 위치에 관한 짧은 논고

 민중원제의 묘호는 그의 능이 조성된 '민중원'에서 따온 것이다.'삼국사기'는 그의 묘호를 '민중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여기에서는 '민중원제'라고 고쳐서 기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구려 28조의 묘호 중에서 능의 위치를 그대로 묘호로 사용한 예는 총12번이다.그리고 민중원제는 그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민중원제 이외에도 능이 있는 지명을 그대로 묘호로 사용한 경우는 모본제(5대),고국천제(9대),산상제(10대),동천제(11대),중천제(12대),서천제(13대),봉상제(14대),미천제(15대),고국원제(16대),소수림제(17대),고국양제(18대) 등이다.즉 민중원제가 민중원에 묻힌 것처럼 모본제는 모본에,고국천제는 고국천에,산상제는 산상에,동천제는 동천에,중천제는 중천에,서천제는 서천에,봉상제는 봉상에,미천제는 미천에,고국원제는 고국원에,소수림제는 소수림에,고국양제는 고국양에 몯혔다는 것이다.

 이처럼 28제 중 12제의 묘호가 능이 있는 지명과 동일하다.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같은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중국의 어느 시대,어느 왕의 묘호에서도 이런 경우는 찾아볼 수 없으며,백제나 신라。왜 등 당시의 어느 나라에서도 이 같은 일은 없엇다.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능이 위치한 지명을 묘호로 삼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제 10대 산상왕 본기에는 "31년 여름 5월,왕이 죽었다.산상릉에 장례를 지내고,호를 산상왕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이는 능호와 묘호가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이것은 능이 있는 지명이 곧 능호로 사용됐고,그 능호가 다시 묘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말하자면 고구려 28제 중 12제가 묘호와 능호가 같은 것이다.

 동서양의 어느 역사책을 뒤져봐도 능호를 묘호로 사용한 경우는 고구려의 12제밖에 없다.이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고구려 시대 당시 동북아시아의 모든 국가는 삼황오제와 하은주 시대에 태평성세를 이룬 왕들의 정치를 모범으로 형성된 이른바 '왕도정치'이념을 구현하고 있었다.때문에 비록 형식적인 차이가 다소 있긴 했지만 당시의 모든 국가들에서 왕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동일했다.이는 왕을 세우는 것과 왕에 대한 예의가 동일했다는 뜻이다.

 왕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란 신하 된 자로서 왕에게 어떤 예를 갖추어야하는가에 대한 일반적 관례를 의미한다.이 관례에는 왕을 대하는 신하의 언어와 말투,왕과 왕족의 혼례,왕과 왕족의 상례,이미 죽은 왕에 대한 호칭 등이 당연히 포함되었다.그리고 그 상례를 대표하는 것은 능과 능호였으며,죽은 왕에 대한 호칭이 곧 묘호이다.이 묘호는 그 후손들이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는 공식적인 존칭어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따라서 묘호의 제정은 많은 논의와 특별한 절차를 거쳐서 이뤄졌다.

 이것이 왕도정치를 추구하던 당시 동북아시아권의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시행되던 왕에 대한 일반 관례였다.그리고 고구려도 역시 이 국가들 중 하나였다.따라서 고구려라고 해서 이 일반적인 관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유독 고구려에서만 능호가 곧 묘호로 기록된 사례들이 발견된다.그것도 무려 12번이나 반복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의문점을 풀어줄 열쇠는 단 하나뿐이다.그것은 바로 제 19대 광개토제의 비문이다.

 광개토제의 정식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이 명칭의 맨 앞 세 글자,즉 '국강상'은 그가 묻힌 곳의 지명이며 동시에 능호이다.그래서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국강상에 묻혀 있으며,땅의 경계를 넓게 열어 평안을 가져다준 좋고 위대한 왕.'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고구려 묘호 양식이다.이 광개토제의 묘호를 바탕으로 고구려 묘호를 분석해보면 우선 능의 위치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으로 치적,그리고 약칭할 수 있는 호칭,마지막으로 일반적인 관용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간략하게 기호로 표시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묘호 = 능 위치(또는 능호) + 치적 + 약칭 + 일반 관용어 이것을 광개토제의 묘호에 대입해보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국강상(능호) + 광개토경(치적) + 평안(약칭) + 호태왕(일반 관용어) 따라서 광개토제의 묘호를 약칭할 때는 '평안왕'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그 뒤에 붙는 '호태왕'은 어느 왕에게나 붙었을 법한 일반적인 관용어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분석에 바탕해볼 때 현재 '삼국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고구려 묘호는 잘못된 것이 대다수이다.특히 묘호의 맨 앞에 붙는 능호를 묘호로 착각하고 약칭 기술한 12제의 묘호는 완전히 엉터리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초가 된 '구삼국사'의 편자들은 고구려 묘호의 특징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들이 편한 대로 묘호의 앞머리만 따거나 또는 묘호의 일부분만을 따서 기록했던 것이다.아마 이것은 '구삼국사'를 편찬한 

신라인들의 무성의와 자료 부족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무성의한 편찬작업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고구려 28제의 묘호조차도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되었다.그 때문에 잘못 전달된 묘호를 그대로 사용하고,또 후대에도 그 묘호를 그대로 물려주어야만 하는 불행한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하지만 능이 조성된 곳의 지명을 알았다는 것은 능을 찾아낼 수 있는 단초를 얻은 것이므로 그저 안타까워하고 있을 일만은 아닌 듯하다.

 

신삼국사기 고구려본기 5                      

 제 5대 모본제 본기

 1.모본제의 폭정과 두로의 반정

        (?~서기 53년,재위기간:서기 48년 모월~53년 11월,약 5년)

 

 모본제는 대무신제의 차남으로 대무신제의 첫 번째 황후 소생이며,이름은 해우(또는 해애루라고도 전함)이다.서기 32년 1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서기 44년 10월에 대무신제가 생을 마감했음에도 그는 어린 탓으로 제위에 오르지 못했고,대신 숙부인 해색주(민중원제)가 제위에 올랐다.그리고 서기 48년에 민중원제가 죽자 그때서야 비로소 고구려 제 5대 황제에 즉위하였다.

 모본제의 즉위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그는 이미 태자 책봉 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모본제의 어린 시절을 추론해보면 다음과 같다.

 모본제의 어머니는 대무신제의 정비였다.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했다.그 때문에 대무신제는 후궁을 맞이하게 되었다.새로 입궐한 후궁은 갈사왕의 손녀 금씨였다.그녀는 입궐한 지 오래지 않아 아이를 낳았는데,아들이었다.그때까지 아들을 얻지 못했던 대무신제는 득남한 기쁨으로 아이의 이름을 '호동'이라고 짓는다.

 호동은 총명하고 뛰어난 아이였고,장성함에 따라 그의 뛰어남은 주변 국가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호동의 명성이 드높아지고 있을 때 뜻밖에도 제 1황후가 아이를 낳았다.대무신제는 그 아이의 이름을 해우라고 지었다('삼국사기'에서는 해우를 맏아들로 기록하고 있다.이는 그가 적통인데다 제위를 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우가 아직 어린아이로 있을 때 호동은 이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낙랑 정복을 꿈꾸고 있었다.이렇게 되자 자연히 호동은 차기 황젯감으로 지목되고,이에 따라 계승권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가 시작된다.

 암투가 벌어지는 가운데,제 1황후는 계승권을 확보하기 위해 호동을 궁지로 몰게 된다.말하자면 호동이 태자에 책봉되리라는 생각에 거만해져 어머니인 자신을 능멸하고 심지어는 욕보이려 한다는 말을 꾸며 호동을 벌줄 것을 간청했던 것이다.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간청이 받아들여지자 호동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살을 감행한다.

 이 사건은 서기 32년 11월에 발생하였다.그리고 바로 그 다음 달에 대무신제는 해우를 태자에 책봉한다.이때 해우의 나이는 기껏해야 한두 살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다.왜냐 하면 12년 뒤인 서기 44년에 대무신제가 죽었으나 그는 어리다는 이유로 제위에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다.대무신제가 15세에 제위에 오른 것을 감안하면 당시 해우는 15세도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이가 어린 탓으로 제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보면 그를 대신하여 섭정을 해줄 모후도 죽고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렇게 되자 어린 태자는 졸지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게 된다.

 정식으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면서도 제위에 오르지 못한 해우는 민중원제가 제위에 올라 있던 4년여 동안 누차에 걸쳐 죽음의 위기를 넘겼을 것이다.

해우는 민중원제에겐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이고,그래서 빌미만 있으면 여지 없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행히도 해우는 살아남았다.그리고 서기 48년에 민중원제가 죽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이때 해우의 나이는 기껏해야 17,8세 정도였을 것이다.

 제위에 오른 모본제의 성격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의 사람됨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나라일을 돌보지 않으니,백성들이 그를 원망하였다."

 이처럼 모본제는 그다지 덕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던 모양이다.하지만 즉위 때부터 그런 성격을 드러냈던 것은 아니었다.

 모본제는 즉위 이듬해인 서기 49년 2월에 대군은 도원하여 한의 북평,여양(현재 북경 근처),상곡,태원(현재 화북 지방의 태원으로 황하 동쪽 근거리에 있음) 등을 습격하여 빼앗는다.이 지역들은 한의 도성인 장안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므로 모본제는 즉위 초년에 벌써 요서 지역을 정벌하고, 황하의 동쪽을 모두 장악하였던 것이다.이에 당황한 동한의 유수는 요동 태수 채용을 고구려에 보내 화친을 제의한다.

 한의 화친제의를 받은 모본제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과 고구려 사이에는 한동안 평화가 지속된다.

 이 무렵 고구려는 몇 년에 걸쳐 이상기후로 어려움을 겪는다.즉위년에는 홍수가 나서 20개의 산이 무너지더니,그 이듬해에는 서리와 우박이 심해 농사를 망친다.이에 모본제는 국고를 열어 빈민들을 구제하고 유랑민을 안정 시킨다.

 하지만 이 같은 경제적 여러움은 정세의 불안으로 이어졌고,죽음의 위협속에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모본제는 역모를 두려워하며 모든 신하들과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 같은 행동을 '삼국사기'는 이럻게 기록하고 있다.

 "모본왕 4년,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으며,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만일 사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가차없이 죽였으며,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활을 쏘아댔다."

 이 짧은 기록은 그의 폭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잘 기술하고 있다.하지만 그의 폭정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모본제의 충직한 근신 중에 두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그는 모본 출신으로 모본제의 총애를 받았다.그러나 그는 항상 불안해하고 있었다.모본제는 자신이 아무리 총애하는 신하라 할지라도 한순간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죽여버렸기 때문이다.그 때문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는 두로에게 어떤 사람이 황제를 죽여버리라고 부추겼다.

 "대장부가 왜 우는가? 옛 사람의 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했다.이제 황제가 포악한 짓을 하여 사람을 죽이니,이는 백성의 원수다.그대는 백성의 원수인 황제 해우를 처단하라."

 이 말을 듣고 용기를 얻은 두로는 서기 53년 11월에 칼을 품고 모본제를 찾아갔다.그러자 모본제는 그를 정답게 맞아들여 앉혔다.그때 두로는 칼을 빼 모본제의 목을 찔러 죽였다.

 두로의 칼에 맞은 모본제는 즉사하였고,신하들은 유리명제의 여섯째 아들 재사에게서 태어난 궁을 새 황제로 앉혔다.

 모본제는 모본 언덕에 마련된 능에 묻혔으며,묘호를 모본제라 하였다.

 

 제 5대 모본제 가계도

 제 3대 대무신제

 

       │             차남

      ├───── 제 5대 모본제

      │                。해우.해애루,생년미상~53년

                        제 1황후          。재위:48년 모월~53년 11월,약 5년

                                                             。부인:1명(?)

                                                             。자녀:1남

                                                                   │

                                                                   │       1남

                                                                 황후 ───── 익

                                                                성씨불명 

 

 모본제의 가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다만 모본왕 원년인 서기 48년 10월에 "왕자 익을 태자로 세웠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봐서 그에게 황후와 자식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그 자세한 내막은 알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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