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李春在連鎖殺人事件)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李春在連鎖殺人事件)은 1986년 9월 15일부터 1991년 4월 3일까지 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 여성 10여 명이 강간, 살해된 사건이다.
모방범죄로 판단되었던 8차 사건을 제외하고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채로 이 사건들의 공소시효는 범행 당시의 형사소송법 규정(제 249조)에 따라 범행 후 15년이 지난 2001년 9월 14일 ~ 2006년 4월 2일 사이에 모두 만료되었다.
그러나 2019년에 무기수로 복역 중인 이춘재가 DNA 검사결과 살인자로 특정되었고 화성 연쇄 살인 14건 모두의 진범이라고 자백하였다.
2019년 12월 17일 이전 까지는 지역명을 따서 화성 연쇄 살인 사건(華城連鎖殺人事件)으로 불리다가 2019년 12월 17일 이후 경찰이 화성지역 주민들과 화성시의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현재 이름으로 사건명이 최종 변경되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 사건이자 개구리 소년 실종·살인 사건, 이형호 유괴 살인 사건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영구 미제 사건이었다.
다만 나머지 둘과는 다르게 지금의 과학기술이었으면 벌써 잡혔을 정도로 증거가 많이 남아 있었던 허술한 사건으로, 1980년대에 과학수사가 있었다면 피해자가 많이 발생하지 않았을 안타까운 사건이다.
2019년 9월 18일에 DNA 대조로 유력 용의자 이춘재가 특정되었고, 2019년 10월 1일 조사에서 이춘재가 30여 년 만에 화성 연쇄 살인사건 범행을 자백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 중 제일 인지도가 높은 화성 연쇄 살인사건은 결국 과학수사의 발전으로 미제 사건의 틀에서 벗어났다.
영구 미제 사건으로 생각되던 장기 미제 사건들이 해결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지만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국내 미제 사건 중 가장 악명 높은 연쇄살인사건으로, 수십 년에 걸친 노력 끝에 범인이 특정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범죄사 교과서에 길이 남을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소위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포함된 사건들은 공소시효가 2006년 4월 2일부로 모두 만료되었다.
또한 이춘재가 추가로 자백한 사건까지 처벌받지 않은 살인 14건과 성범죄·강도 등 9건에 대한 공소 시효가 2020년 12월 28일부로 모두 만료되어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되었다. 이로써 이춘재의 처벌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범인 이춘재는 이미 청주 처제 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기에 가석방을 차단하여 사회에 못 나오게 영구히 격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발단: 화성 태안읍 연쇄 강간 사건
1986년 1월 이춘재가 군대에서 전역한 직후 동년 2월 8일부터 7월 사이에 화성 태안읍 일대에서 발생한, 알려진 것만 7건에 이르는 연쇄강간 사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유사성으로 인해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연관이 되어있지 않나 분석하기도 했다. 두 사건의 유사성이다.
범행수법의 유사성: 강간사건의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속옷, 스타킹 등으로 결박당하고 얼굴에 씌워지기도 했는데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그 수법이 유사하다.
범행현장의 유사성: 7건의 강간사건의 현장들은 화성 연쇄살인사건 중 5차, 9차, 10차 사건의 현장 인근이었다.
범인상의 유사성: 피해자들은 일관적으로 범인이 165에서 167 사이의 키에 마른체형의 20대 남성이라고 증언하였는데,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목격된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인상착의와 유사하다.
범행시기의 연결성: 연쇄강간사건은 1986년 2월에서 7월까지의 시기에 발생했는데,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 이춘재가 군에서 제대한 시기가 1986년 1월이며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1차 사건이 발생한 시기는 1986년 9월이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1차 사건과의 연결점: 1차사건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이 사건이 최초의 살인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데 현장에서 피해자와 범인이 몸싸움을 벌인 흔적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렇기에 성범죄만 저지르다가 우연히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1,2차), 그 이후 미수에 그친 범죄가 일어난 후(86.11.30) 이 사건에서 했던 것처럼 납치 → 결박 → 강간한 후 살인을 저질렀을 확률이 높다.
경찰은 화성사건을 재조사하면서 이 연쇄강간사건과 이춘재의 연관성도 들여다보는 걸로 알려졌다.
이후 이춘재가 14건의 살인사건 외에도 총 30여 건의 성범죄 사건을 자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사건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생겼다.
이후 동년 9월 15일에 발생한 화성 연쇄살인 사건 첫 번째 살인사건이 강간을 하려다 우발적으로 살인에 이른 것으로, 이 범행과 연결된다.
범행: 10건의 연쇄살인 사건
7차 사건 이후 당시 버스 기사와 안내양의 증언에 따라 처음으로 몽타주가 작성되었다. 당시 한 20대 남성이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손을 흔들어 버스에 탔으며,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바지 무릎 아래부분과 신발이 흠뻑 젖어있어 수상해보였다고 증언했다. 버스 기사는 이 남자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후 범행 현장에서 400m를 이동한 흔적이 발견됐고 그 흔적이 끝나는 장소가 당시 남성이 버스에 올라탄 장소와 동일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은 당시 마을에서 버스를 탄 사람이 없다는 점, 옷이 젖어있다는 것은 농수로나 풀밭을 헤치고 나왔다는 증거라고 보고, 이 남성을 유력 용의자로 판단하고 몽타주를 만들게 되었다.
우측 소지의 봉숭아물은 사실 피해자의 혈흔이라고 한다.
이후 MBC 실화탐사대에서 처음으로 얼굴이 공개되었는데, 위의 비교사진만 놓고 봤을 때는 비교적 유사한 얼굴이다. 수감돼있던 부산교도소에서도 이춘재의 얼굴이 몽타주와 닮았다며 혹시 화성 연쇄살인범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용의자의 친모 역시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들과 많이 닮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춘재의 모친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이 몽타주를 처음 보는 것은 물론 당시 마을 어디에도 이런 수배전단이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없으며, 마을에 경찰이 왔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자신의 집에는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한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이춘재는 과거 경찰조사를 3번이나 받은 적이 있어 의문이 되는 부분이다.
이후 경찰은 안내양 엄모 씨를 상대로 법최면 조사를 실시했고, 당시와 비슷한 증언을 얻어냈다. 경찰을 이를 통해 새로 몽타주를 그릴 계획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같은 목격자였던 버스기사 강 씨는 몇년 전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1986년에 관할 파출소장들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1차~4차까지 사건이 발생하는 동안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이 당시에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사고들이 터졌을때라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던 측면도 있었기도 했고 무엇보다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때라 상당히 민감해져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로 사건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장을 빨리 태워버리는 등 초동조치 기본이 지켜지지 않았고 이것이 사건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분위기가 흉흉해지며 범인을 잡기 위해 들끓었던 것은 6차 사건 정도였다고 한다. 5차까지만 하더라도 경찰은 피해자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수사했다고. 지금이라면 같은 지역에서 비슷한 수법으로 2~3명만 살해되더라도 연쇄살인임을 확신하겠지만, 당시에는 연쇄살인이라는 개념 자체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이다. 또한 수사 기법이 발달하지 않았고 해당 지역 자체가 상당히 낙후되어 치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강간살인은 그렇게 드문 범죄가 아닌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민심이 들끓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자 정부에서는 빨리 사건을 해결하라면서 경찰을 닦달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경찰수뇌부가 직접 대규모 수사본부를 설치하였다. 연인원 205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고, 21,000여 명의 용의자들이 수사를 받는 등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인력이 동원되었지만 서로 조율된 계획배치가 아니라 중구난방식 인원투입으로 비효율을 초래하였으며 수사 기법은 기껏해야 피해자들의 주변 인물이나 뒷사정을 캐보는 등의 탐문 수사뿐,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수사는 전무했다. 당시는 살인 사건 수사라고 하면 그런 방식이 대부분이던 시절이었다.
DNA 감식이나 머리카락 채취 같은 과학 수사는 세계적으로도 화성 사건이 처음 발생한 1986년에서야 영국 레스터대학교 알렉 제프리(Alec Jeffrey’s) 교수의 DNA 신원확인기법을 첫 시도된 이후 1980년대 후반에 제대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당시 국내에는 이런 수사 시스템이 전무했기에 증거를 많이 수집하고도 미제 사건으로 남고 말았다.
이 사건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는 각색된 부분이 많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모든 걸 처리하는 범인으로 나오지만, 범인도 사람이었던 만큼 실제 사건에서는 피우다 버린 담배 꽁초나 6가닥의 머리카락 등 상당한 증거를 남겼다.
오히려 현장의 용의주도하지 못한 흔적, 타깃을 위협할 때 욕설을 자주 사용하는 등 저속하고 낮은 어휘력 등을 감안하면 범인은 지능이나 학력이 그다지 높지 않은 평범한 일반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역시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대부분의 증거들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발견되어 알아볼 수 없게 변질된 경우가 많았고, 빗물에 씻겨 내려간 것도 많았다. 게다가 증거를 과학적으로 분석할 인력도, 장비도, 노하우도 부족했다.
영화에서는 비가 오는 날에만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실제로 비가 오는 날에 발생한 사건은 2건 정도라고. 겨우겨우 채취한 정액도 일치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등 수사는 난항을 거듭했다.
당시 국내에는 DNA 검사를 할 시설이 없어 정액 샘플을 일본에 보냈는데, DNA 패턴을 기록해 두지 않고 용의자의 샘플이 보내질 때마다 새로 검사를 한 탓에 몇 번 하고 나니 샘플이 없어졌다.
당시 수사는 인권침해 같은 것은 따질 형편도 아니었던지라,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수원~화성 지역 25세~35세 남성의 사진을 모두 보여주며 범인을 찾아보게 하는 무식한 방법까지 사용했으나, 이들 중 범인을 지목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은 목격자들의 기억이 흐릿해진 것 또는 수사 과정 자체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범죄자로 간주되었다가 풀려나는 웃지못할일들도 많았다. 주민 등록은 다른 지역으로 되어있고 화성에서 범죄를 저질렀을 뿐이라 수사망을 빠져 나갔을 가능성도 있으며, 실제로 경찰이 예측했던 25~35세보다 더 어리거나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범인은 20대 중후반~30대 초반으로 예상됐지만, 그보다 더 어린 나이인데 목소리가 저음이라 목격자들에게 실제 나이보다 높게 느껴졌을 수 있다.
이 사건은 한국에 제대로 된 과학수사 시스템이 자리 잡는 데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범인은 잡지 못했고, 결국 마지막 사건 공소시효가 2006년경에 만료되었다. 2000년 8월 8일 이후 살인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전면 백지화되긴 했으나 이 사건은 소급 적용하지 않는다.
공소시효 만료 직전인 2006년 검찰내부 통신망에 "피의자를 성명불상자로 기소하자"라는 의견이 올라왔었다고 한다. 이성윤 부부장검사가 이런 제안을 했는데 피의자를 성명불상자로 재판에 넘기면 재판부가 소송조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결할 때까지 15년을 더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고. 김욱준 현 순천지청장도 용의자의 DNA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동종전과자와 DNA를 대조하면 진범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 의견에 찬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특정되지 않은 피고인을 기소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일이고 법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내리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무의미해진다는 검찰 내부의 반대로 결국 이 제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화성사건의 유력용의자가 나타난 이후 김욱준 지청장은 지금이라도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로 피고인을 특정하는 현행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DNA 등의 생체정보로 피고인을 특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2019년 9월 18일 진범으로 추정되는 용의자가 확인되었다.
원래 9월 19일 오전 9시 30분에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자체 브리핑에서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채널A가 방송상으로 특종보도를 했고, 이후 다른 언론사들도 일제히 보도하면서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채널A가 엠바고를 어기고 하루 일찍 보도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KBS 박대기 기자의 트윗에 따르면 보도에 엠바고는 없었다고 한다. 2019년 7월 15일 새로 개발된 잔사 DNA 증폭 및 복원 기술로 사건 현장에 남겨진 증거품에서 새로운 DNA를 뽑아내었고 그걸 토대로 교도소 수감자들의 DNA 데이터 베이스와 대조하던 중 일치 판정이 떴다.
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56)는 1994년 청주 처제 살인사건으로 이듬해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이상 부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무기징역수다.
그간 경찰은 지난 2년간 들어온 수십 건의 첩보를 바탕으로 7월 이춘재를 특정하고, 두 달간 진범인지 여부를 조사해왔다고 한다.
SBS의 추가 취재에 의하면 경찰이 국과수에 의뢰한 9차(1990년)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가 이춘재의 것으로 확인되자 경찰이 추가로 감정을 의뢰했고 5차(1987년), 7차(1988년)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도 이춘재의 것과 일치한다는 결과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경찰은 9월 19일에 2, 3, 4차 사건의 증거물도 국과수에 의뢰했다.
이번 국과수 분석에서 사용된 9차 사건에서 확보된 용의자의 DNA는 순수하게 한 사람의 DNA이며, 분석 결과 해당 DNA의 혈액형이 O형으로 나와 강필원 과장이 경기남부지방청에 문의한 결과 용의자 이춘재 역시 O형이라는 답변이 왔다고 밝혔다.
이번에 용의자를 특정하게 된 DNA 정보를 통한 동일인물 판정 방법은 이론적으로 지구상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신뢰도라고도 말했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는 이제야 용의자를 특정하게 된 건 수형자 DNA 데이터베이스가 2010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그 이전에는 DNA 대조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더욱이 표창원 의원에 따르면 2010년대 초 기술로도 DNA 검출이 불가능해 10년대 말에 와서야 검출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국과수는 2019년 9월 19일, 경찰로부터 4차 사건 증거물 20여 점을 넘겨받았는데 피해자의 옷가지와 손수건, 메모지 등이라고 한다. 증거물의 갯수가 많기 때문에 이전 증거물 조사에 걸린 1~2주보다 시간이 더 걸려서 결과가 도출되는 데에는 수주가 걸릴 것이라고 한다.
경찰은 지난 7월부터 10차 사건 증거물부터 순차적으로 의뢰를 했는데 6차 사건 증거물은 의뢰하지 않아서 6차 사건 증거물이 훼손되거나 소실된 게 아닌가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경찰은 일단 수사 중인 사항이기 때문에 나중에 밝히겠다는 입장이다.
2019년 10월 1일 경찰 등에 따르면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이 사건 수사본부는 최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부터 4차 사건의 증거물에서도 이 씨의 DNA가 검출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 사실이 밝혀진 것이 이춘재가 자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춘재는 사건 당시 23세~28세였으며 사건 당시 화성군에서 살았음에도 수사대상에서 빠진 이유가 미스테리인데, 혈액형의 차이 때문이었을 거란 추측이 나오고 있다.
경찰이 본 범인의 혈액형은 B형이었는데 처제 강간살인사건에서 이춘재의 혈액형은 O형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경찰 발표에 따르면 이춘재는 당시에 3번이나 경찰 조사를 받았으나 모두 풀려났다고 한다.
처음 조사를 받은 것은 6차 사건 이후인 1987년으로 탐문과 행적조사 등을 통해 이춘재를 용의자로 지목해 수사지휘부에 불렀으나, 혈액형과 발자국이 달랐기 때문에 수사 선상에서 제외됐다고 한다.
또한 8차 사건과 10차 사건 이후에도 2번이나 추가 조사를 실시했으나 끝까지 혐의점을 찾지 못해 결국 풀려났다고 한다.
이후 경찰은 당시 가장 핵심 목격자 2명을 대상으로 최면 조사를 실시했는데 둘 다 이춘재의 사진을 보고 범인으로 지목했다.
한 명은 7차 사건 당시 버스에 탄 용의자를 보고 버스 기사와 함께 몽타주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 버스 안내양 엄 씨, 다른 한 명은 9차 사건의 피해자가 사망하기 전 한 양복입은 남성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했던 41살 전 씨다.
다른 목격자들도 나왔는데, 9월 27일에는 3차 사건 당시 범인과 마주친 것 같다는 목격자가 나왔다. 당시 화성에 살고 있던 제보자는 한밤 중에 공용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어떤 남성이 따라들어왔고, 제보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도망갔다고 한다.
제보자는 자신이 당시 장발에 여성 스웨터를 입고 있어 여성으로 오해한 것 같다고 하며, 그 사람의 얼굴이 이춘재와 비슷해보였다고 이야기했다.
JTBC 뉴스룸의 2019년 9월 30일 보도에 의하면 1984년 여름무렵에 수원 세류동에서 당시 9살 초등학생이었던 A씨가 이춘재를 닮은 남자에게서 흉기로 위협을 당했다는 증언을 했다고 한다.
당시 A씨는 집 앞 골목에서 놀고 있었는데 칼을 든 남성이 갑자기 달려들었고 어른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하니 풀어줬다는 것이다. 이후 A씨는 화성연쇄살인사건 몽타주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자신을 위협한 남성이 몽타주와 닮았다는 것. 당시 A씨 기억속 남자와 몽타주속 남성의 유일한 차이점은 짧은 머리였다고 한다.
물론 30년도 전의 일이라 기억의 정확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이 증언을 가볍게 무시하기 힘든 것이 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다. 여고생이 살해된 화서역 인근,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하던 여고생이 잔혹하게 살해된 오목천동, 그리고 이 사건이 일어난 세류동은 모두 수원역을 중심으로 한 반경안에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이춘재는 용의자 특정 이후 이어진 8차 조사까지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으나, 2019년 10월 1일 처음으로 범행 내용을 자백했다. "화성살인 포함 14건, 모두 내가 저질렀다" 초기 발표는 모방범죄인 8차 사건을 제외한 모든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으며, 이외에도 5건의 추가범죄에 대해서도 자백했다.' 라고 되었으나, 실제로는 8차 사건을 포함해서 모든 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했으며, 그럼에도 경찰이 임의로 '8차 사건을 제외하고 자백'했다고 발표한 것에는 경찰의 모종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보인다.
경찰은 이춘재가 특정된 18일 이후 매일같이 대면조사를 진행했다. 전국에서 선정한 베테랑 프로파일러 6명 등 총 9명을 동원해 9차례 조사를 실시하면서 심리적 방어감을 허무는 동시에, DNA 등의 증거물로 계속 압박수사를 진행했다.
이 때 동원된 프로파일러 중에서는 연쇄살인마 강호순에게 자백은 물론 여죄까지 끌어내는 큰 공헌을 세웠던 공은경 경위, 정남규 사건 당시 고도의 프로파일링 기술로 자백을 이끌어낸 권일용 프로파일러 등이 있었다고 한다. 프로파일링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또하나의 예시가 나온 셈이다.
이전에 저지른 사건들로 체포됐을 때도 마지막까지 범행을 부인했던 이춘재가 자백한 것은 이러한 압박수사에 더불어, 계속 나오는 증거들 때문에 더이상 주장해봤자 가석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판단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바로 하루 전에 최면 수사에서 핵심 목격자 2명이 모두 이춘재를 범인으로 지목했으며, 무엇보다 4차 사건에서도 DNA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결정타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와 내가 한 짓이 드러날 줄 알았다”는 말을 내뱉었으며 경찰이 DNA 분석 결과를 알려주자 “DNA 증거가 나왔다니 할 수 없네요”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10월 2일 있었던 경찰 브리핑에 의하면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과 강간미수 사건에 대해 자백을 받았다고 한다.
경찰은 이춘재의 추가 범행 주장이 사실인지 사실관계 및 여죄 여부를 면밀히 따져보겠다고 밝혔다.
범행에 대한 검증과정이 끝나면 그동안 33년을 끌어온 이 미제사건이 마무리될 뿐만 아니라, 그동안 화성과 수원 및 청주지역에서 발생한 수많은 미제 사건들 역시 해결될 가능성이 높다.
단, 사실관계 확인은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일단 사건수만 해도 최소 40개 이상인 데다가 거의 대부분이 30년도 넘은 일이라 이춘재 본인도 많이 가물가물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일부 사건의 경우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지 그림을 직접 그려주면서 설명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미제로 끝난 사건과 이춘재의 주장을 일일이 대조해보아야 하는데 피해자가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경우 사건 자료 자체가 없으니 대조 역시 불가능하다.
이춘재가 자신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사건들은 1986년~1991년 사이 일어난 기존 화성 연쇄살인 사건 9건, 같은 시기에 화성에서 저지른 추가범행 3건, 1993년 4월 이사온 후부터 처제 살인건으로 잡힌 1994년 1월 이전 사이에 청주에서의 2건의 추가범행이며, 30건의 추가 범죄에 대해서는 사실관계 확인 후 공개하겠다고 경찰은 밝혔다.
이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1992년을 제외하고는 86년부터 94년까지 7년 동안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도 강도예비 사건으로 수감된 시기(89년 9월 ~ 90년 2월)나 결혼 후 청주로 이사온 시기(91년 7월 ~ 93년 4월)를 제외하면 몇 달에 한 번 꼴로 범죄를 저지른 것에 가깝다.
이춘재 연쇄살인의 8차 살인 사건은 1988년에 용의자가 잡혀 유죄로 처벌받았는데, 2019년 이춘재가 해당 사건의 진범이 과거 처벌받은 용의자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자백해 진범에 대한 논란이 생기었고, 재심 결과 8차 사건의 용의자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현재까지 이춘재의 DNA가 발견된 사건은 10개 사건 중 총 5개 사건으로 3차, 4차, 5차, 7차, 9차 사건이다. 자백의 신빙성 역시 이춘재가 일부 사건의 경우 그림을 직접 그려주며 설명하거나 사건 당시의 집 내부 구조나 정황을 정확하게 진술하고 있고, 심지어는 진범만이 알 수 있는 정보 등을 증언했기 때문에 이춘재의 자백이 사실이며 진범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경찰은 10월 15일 이춘재를 피의자로 정식 입건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의 진위 확인이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10차 사건의 경우 이춘재의 DNA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6차 사건은 당시 폭우가 내려 현장 증거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거나 훼손되었다.
1차 사건 역시 남아있는 증거물이 없다. 이 때문에 경찰은 감정을 의뢰하지 못했다.
또한 이춘재가 새로 자백했다는 4건의 살인사건도 남아 있는 증거물이 별다른 게 없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자백에도 불구하고 미제 사건이 되어버릴 가능성 역시 있다고 한다.
특히 현재 무고 논란이 있는 8차 사건도 이미 다른 범인을 잡아 유죄 판결이 나버렸기 때문에 당시 증거물들이 기록 보존기한 만료로 죄다 폐기되었다고 한다.
남아있는 건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토끼풀과 8차 사건과 비슷한 수법으로 이뤄진 범죄 현장의 증거물인 창호지 정도인데, 경찰도 의미있는 증거물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다만 당시 범인으로 잡혔던 윤씨의 재심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이미 이춘재가 범인만 알 수 있는 사실을 증언했기 때문에 재심 요건을 만족할 것 같고 지금 속도로 사실 관계가 확인된다면 빠르면 올해 안에도 재심 청구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10월 24일 경찰이 8차와 10차 사건에서 이춘재의 DNA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두 사건 모두 모방범죄를 의심받던 사건이라 해결이 더 힘들어졌다. 10차 사건의 경우 재조사까지 진행했으나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경찰에서 공식적으로 신상공개를 하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살인사건의 범죄자로서 그 당시 신상정보가 이미 공개된 상태였다.
위의 정보는 처음으로 이춘재의 얼굴을 공개한 MBC 실화탐사대에서 나온 고등학교 졸업사진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 '화성연쇄살인사건 2부' 예고편에 군복을 입은 사진이 공개되었다.
이춘재의 사건 당시 거주지는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현 화성시 진안동)로 직장 생활과 결혼도 화성에서 했으며, 주소를 몇차례 옮긴 적은 있으나 모두 당시 화성군 내였고 1993년 4월 청주로 이사하기 전까지는 계속 화성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시 이춘재가 다니던 공장은 집에서 5km 거리에 있었으며 단순 공장업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확인 결과 1차, 2차, 3차, 6차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모두 당시 이춘재의 통근길로 추정되는 경로와 일치한다고 한다.
이춘재의 DNA가 확인된 5차, 7차, 9차 범행 장소와도 멀지 않으며, 특히 9차 장소는 당시 이춘재의 집에서 불과 2km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청주 처제 살인사건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이춘재는 평소에는 조용하고 내성적이나 한번 터지면 매우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고 하며, 아내를 하혈할 정도로 폭행한 것은 물론 2살배기 아들까지 멍이 들 정도로 때렸다고 한다. 또한 심각한 성도착증이 있었고 아내를 강간한 적도 있었다고 아내가 경찰에게 울면서 호소했다고 한다.
반면 친가족들에게는 잘 해준 것으로 보이며 과거 동네 주민들의 평판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생은 형이 조용한 성격이었으며 포악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했다고 밝혔으며, 친어머니 역시 처제 살인사건은 우발적으로 저지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며, 화성 연쇄살인사건에서 이춘재의 DNA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큰 충격을 받고 인터뷰 도중에 가슴을 계속 치며 흐느끼고 피해자들에게 사과의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이춘재 부모형제가 거주했던 진안동 주민들도 부모형제들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는데 주민들 대부분이 믿기지 않아 하고 있다고 한다.
수감된 이후 역시 20년간 단 한 건의 문제행동도 보이지 않아 1급 모범수로 분류되었으며,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교도소 관계자들이 "조용하고 말없는 대표적인 모범수였다."라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지 않았더라면 이미 가석방이 됐을 것"이라 전했다.
09년과 10년에는 교도관을 보조해 다른 수형자들을 관리하는 반장직까지 맡았을 정도였다고. 다만 오히려 사회보다 교도소에 더 잘 적응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철저히 동성끼리만 생활하니 연쇄살인에서 드러나는 이성에 대한 가학성이 발현될 리 없고, 폭력적인 위계질서에 익숙한 성격이기 때문에 위계가 확실한 교도소에서 모범수가 되었으리란 분석이다.
마지막 사건인 1991년 4월 3일부터 처제를 살인한 1994년 1월 13일 사이인 약 3년간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이유는 1991년 7월경에 이춘재가 결혼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JTBC가 이춘재의 당시 인척을 만나 취재한 결과로도 이춘재가 1991년 7월에 화성에서 결혼식을 올렸다는 게 확인되었다. 이후 1992년에 아들을 출산했고 1993년 청주로 이사했으며 1994년 1월에 처제를 강간하고 살해했다.
이 경우 아내와 아직 갓난아기인 아들을 상습폭행한 것도 살인을 일시적으로 멈췄으나 폭력적인 성향을 억누르지 못하여 가족에게 그 화를 풀었으며, 결국 처제 살인사건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교도소 측은 용의자 특정 이후 혼란을 우려해 이춘재를 독방으로 옮겼으나 이춘재는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춘재는 2006년부터 면회가 가능해졌는데, 매년 2~3차례 남동생과 어머니가 자주 면회를 오거나 영치금을 넣어줬다고 한다. 또한 이춘재의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넓은 농지들이 화성시 재개발로 인해 땅값이 엄청 올라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판 것들을 모두 합치면 현재 가치로 최소 100억 원 정도 됐을 거라고.
진범이 자백한 시점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이춘재에 대한 처벌이다. 용의자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진다고 해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연쇄살인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용의자가 이미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기 때문에 가석방 신청을 모두 불허하는 방법으로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둘 수는 있다.
참고로 무기징역은 20년 이상 복역하면 가석방 신청 요건이 된다.
만약 진범이라면 가석방을 해줄 경우 피해자 유족의 반발 등을 비롯해 비난 여론이 거세질 게 분명하기에 가능성은 매우 낮은 편. 또한 가석방 심사요건 중에 재범의 위험성도 대상이다.
연쇄살인범인 이상 재범의 위험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가석방 부적격 결정 사유가 된다. 그리고 경북북부제2교도소(슈퍼맥스급 교도소나 경북북부제2교도소에 준하는 다른 교도소로 이감될 수도 있는데, 처벌은 할 수 없지만 상위 등급의 다른 교도소로 이감시키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춘재가 교도소에서 추가로 잘못한 것은 없었고 공소시효가 지난 살인사건을 명분으로 처우를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1년 가량 수원구치소에서 조사를 한 뒤, 최종 결과를 발표하고 나서는 다시 부산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그래도 이춘재의 안전보장을 명분으로 독방에서 다른 재소자들과 접촉도 못하고 평생 혼자 복역하게 되었으니 나름 처벌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프로파일러 서울디지털대 배상훈 교수는 한국 수사 시스템의 허술함 때문에 진작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범인을 못 잡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이미 이춘재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는 2011년에 추출되어 보관되어 있었으나, 경찰 측에서 이걸 미제 사건들과 대조해보지 않아서 8년이나 늦게 특정이 되었기 때문....
실제 이 때 왜 대조가 안되었는지 따져서 책임질 사람들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처제 살인사건 당시 이춘재를 붙잡았을 때 조사할 기회가 있었으나 이 역시 놓쳤다.
용의자가 특정된 9월 19일 OCN에서 편성된 곡성을 살인의 추억으로 변경하는 공지를 올렸으며, YES24에서는 살인의 추억 블루레이 20% 할인 행사를 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심각한 살인사건을 너무 대놓고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피해자 유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반면, 영화는 당시에도 인정됐듯이 잘 만든 내용에 유가족들도 우호적이었고, 영화 편성을 통해 사건에 더 관심 가지게 되면 좋은 거 아니냐는 옹호 의견 역시 나오고 있다. 이후 OCN 측은 사회적 환기를 위한 편성이라고 해명했고 YES24 측은 특가 문구를 내렸다.
명모군(당시 16세) : 수원 여고생 강간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고문, 폭행 등의 결과로 뇌사로 인한 사망. 당시 형사들은 구타는 없었고 현장 검증 과정에서 중요 증거품인 시계를 찾으러 갔다가 수갑을 찬 채 도주하다 울퉁불퉁 얼어붙은 땅을 굴러서 일어난 사고라 주장한다.
이제 그 두 분의 공통된 특징은 결국 화성연쇄살인사건 범행현장 주변에서 사시는 분들이고 주변에서 생활하는 분이고 또 남자이고 또 대부분의 다른 용의자도 마찬가지지만 이 시대의 전형적인 서민들입니다. 그러니까 중소기업 다니거나 무직자이거나 취약계층인 것이고요. 따라서 이분들이 이런 연쇄살인 범인으로 지목되기 쉬웠고, 지목돼서 수사를 받을 때 논리적으로나 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기 자신의 방어를 제때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조건은 아마 다른 용의자들도 대부분 다 비슷할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경찰이 좀 더 인권수사, 과학수사 쪽에 초점을 맞춰서 했더라면 그래도 그렇지 않았을 텐데 대부분 당시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무게와 중압감, 진범을 잡아야 된다 이런 것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수사 방식이 바로 불러다 일단 자백을 강요하고 자백할 때까지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고 이런 것들이 대부분 그렇게 수사가 진행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박모씨(당시 29세): 당시 경찰은 화성 지역에서 강간미수 혐의로 붙잡힌 박아무개(29살)씨를 화성사건의 범인으로 지목했다. 박씨는 화성 2차와 7차 사건의 용의자로 몰렸고, 경찰서 소속 목사(경목) 앞에서 자백한 내용이 녹화돼 그대로 방송 등으로 보도됐다.
김 변호사는 “박씨의 변론을 맡았을 때 뭔가 이상했다”고 말했다. “화성사건의 범행 수법과 일시, 장소는 또렷하게 자백하면서도 자기 아들이 불과 일주일 전에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접견 도중 박씨는 그에게 “위압적인 경찰의 태도에 겁이 나 거짓 자백을 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경찰은 박씨를 일주일 동안 붙잡아놓고 화성사건의 사진첩을 반복해 보여주며 범행 현장 등의 정황들을 외우게 한 뒤 거짓 자백을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박씨는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김모씨(당시 41세): 4차(1986년 12월 14일)와 5차(1987년 1월 10일)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김아무개(당시 41살)씨. 1993년 경찰은 김씨를 상대로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한 뒤 여의치 않자 풀어줬다.
김씨는 1995년 김칠준 변호사의 도움으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이겼다.
그러나 ‘화성연쇄살인사건 용의자’란 멍에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1997년 고문 후유증과 우울증 등을 호소하다 스스로 생을 내려놓고 말았다. 김칠준 변호사는 “당시 경찰이 미국에 사는 한 심령술사의 제보만 믿고 화성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김씨에 대한 강압수사를 해 벌어진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김씨의 가족은 이후에도 “김씨가 화성사건 범인이다” “진범인 것을 숨기려고 아내가 남편을 독살했다”는 헛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위의 영상을 보면 소문을 퍼뜨린 것은 김모씨를 범인으로 몰고간 심령술사가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고 그곳에서 퍼뜨린 것이다. 가족들은 명예훼손으로 민사 형사 소송을 하여 승소하였으나 해당 심령술사는 미국에 거주하기 때문에 실제 형은 집행할 수 없었다.
김모군(당시 19세): 1990년 9차 사건에서 용의자로 몰린 김모군은 처음에는 자신의 범행이라고 진술했다가 현장검증 때 가족의 설득으로 돌연 형사가 무서워서 거짓 자백을 했다고 털어놓으며 현장검증을 거부했으며, 결국 1997년 암으로 요절하였다.
윤성여 씨(당시 22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윤씨는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한 것이라며 줄곧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 해오다가 지난 2008년 모범수로 가석방되었는데, 이춘재가 8차사건도 자신의 짓이라고 자백하자 바로 재심을 신청했다.
경찰도 이춘재가 8차사건의 범인이라 인정했기 때문에 무죄판결은 기정사실이고 재심을 맡은 재판부 역시 이례적으로 공판도 하기 전에 미리 잘못된 재판에 대해 사과했다. 현재 재심은 피고인의 억울함을 명확히 입증하고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문 경찰과 감정서를 조작한 국과수 등을 탈탈 털고 있다. 드디어 32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9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3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던 차 씨(38)는 1990년 3월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병점역 철길에서 달리는 새마을호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1991년 4월에는 10차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조사받던 장 씨(32)가 아파트 4층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다.
용의자들 뿐만 아니라 당시 수사에 참여한 경찰들 가운데서도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는데 8차 사건 무마와 누명씌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특진한 최 순경은 10여년간 부귀영화를 누리며 평안히 살다가 1999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수사본부 관계자 중에서도 최 모 치안감, 장 모 수사과장, 송 모 서장 등 많은 사람들이 수사 일선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되어 과도한 스트레스로 병을 얻어 숨지거나 자살을 선택했다.
위와 같이 사건 용의자들과 수사 담당자들 상당수가 이상하게 죽어 가자 이른바 '화성 괴담'이라는 말도 생겨났는데, 이러한 무고인들의 누명과 이후의 안타까운 행적, 수사 관계자의 급사는 오늘날에도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가 크다.
아직까지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법 감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무시하고 멍석말이처럼 순간순간 치미는 분노의 화살을 특정인에게 돌리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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