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蔚珍三陟武裝共匪侵透事件)1968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3일에 걸쳐 울진·삼척 지구 연안을 통하여 북한측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
11월 4일 14시 30분, 간첩대책본부는 군 당국에 빗발치는 주민들의 신고를 수렴. 강원 정선·영월·삼척 지구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군경과 예비군을 동원해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 포위망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소탕작전에 돌입한 것을 일컫는다. 이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남한 사회에 주요하고 큰 영향(반공질서의 강화)을 끼치게 되었다.
북한이 다수의 무장공비를 침투시킨 이유는 북한은 이런 강력하고 무자비한 무력도발을 통하여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이하의 항목은 그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빨치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행위 자체가 무지하게 의미 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빨치산의 괴멸과정을 통해 남한 내에 친북 무장세력을 심는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얻었을 텐데도 마치 일단 지르고 보자는 식 소위 맨땅의 헤딩 격의 무모한 짓이었다.
1960년대 당시 국군의 종합적인 군사력 자체는 북한군에 비해 밀렸으나 국군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전방에 18개 사단과 45만 명의 대병력 그리고 충분한 보급차량을 배치하고 있었고, 당시 미군들도 이들 전력으로 충분히 북한군을 저지해 서울을 사수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북한군이 실질적으로 남침에 동원 가능한 전력은 6~9개의 기갑-기계화전력 뿐이었으며 비록 전차의 수량면에서 국군을 앞선다 하더라도 요새화된 최전방 지역과 그에 걸맞게 대병력을 밀집시킨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장기전이 아니면 불가능했고, 그 동안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북한은 침투능력을 극대화시켜 남한 내에 제 2의 전선을 만들어 국군의 전력을 분산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김일성은 1968년 9월 9일, 북한 정권 창건 20주년 기념식에서 “남한 혁명은 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며, 이 주권 쟁취 방법은 무력만이 있을 뿐” 이라고 발언하였다.
이 발언은 1968년 1월 21일에 있었던 김신조 일당 청와대 기습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고 난 이후의 발언이기 때문에 더욱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68년 전후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중지하는 동시에 파리평화협정을 진전시킴으로써 베트남 전쟁을 마무리해 가고 있었다. 동서 대결의 분위기가 완화되어 가던 추세 속에서 북한은 중공과 소련의 군사 원조를 지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다시 한 번 부각시키고자 했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로 접어들면서 남한과 북한과의 경제 격차는 이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경제 격차가 자꾸 벌어지게 되면 그들이 기도하는 '적화통일'은 사실상 요원한 일이 되기 때문에 이같은 사태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 사건에서 경제 혼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위조지폐를 나누어주었다.
다소 고루한 설명일 수도 있겠으나 남한에서 반정부 민중 봉기를 일으킬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침투하였다.
위의 항목과 일부 중첩되긴 하지만, 북한의 김일성 본인이 바로 젊은 시절 게릴라로 항일 사회주의 활동 경력을 시작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김일성은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게릴라 투쟁만이 옳은 방식의 투쟁 으로 여기고 통일의 제1방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마침 쿠바 혁명이란 게릴라 침투 혁명 성공사례가 있었다는 것도 고려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평화통일을 외치는 집단은 북한에서 일종의 요식을 위한 단체로만 남고, 실제로는 김일성의 빨치산 혁명전술로 인해 북한은 끊임없이 무장공비를 내려보낸 것이다.
1968년 초 1.21 사태때는 육상침투가 성공하여 청와대까지 진군이 가능했으나, 이후 경계가 강화되어 7~9월동안 300명에 달하는 침투병력이 서부전선 전면에서 침투에 실패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다면으로 침투를 시도하여서, 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서산산과 서부전선에도 동시에 침투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대한민국 언론에서 무장공비라는 단어 자체를 검색해도, 다른 해에는 매우 드물게 나오다가 1968년에 갑작스럽게 피크를 찍고, 1971년까지 순조롭게 감소하다가 사라진다.
이 단어는 이후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다시 사용되게 된다.
당시 대한민국 신문을 보면 이 정도 공비가 파견되었음에도 신문의 1면을 미국 대통령 선거 동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정세 격변기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968년 11월 2일 밤 북한 유격대가 남한에 활동 거점을 구축하기 위하여 울진과 삼척으로 침투하였다.
이때 울진·삼척 지구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3일 동안 네 차례에 걸쳐 각 30명씩 특수정을 이용, 해안에 상륙했다.
침투지점이 무장 유격대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예하의 124군 소속이었다.
이들은 1968.10.30~11.2 사흘 동안 120명의 북한 유격대는 8개조로 나눈 후, 야음을 틈타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고포 해안에 상륙하여 울진군·삼척군·봉화군·명주군·정선군 등지로 침투하였다.
이들이 상륙한 곳에 있던 해안초소 근무인원은 총 6명이었다. 그러나 이를 사전에 발견 차단하거나 상부로 보고해야 할 해안 초소 분대장은 말년병장의 전역을 축하한다면서 4명이 술집으로 가버렸고, 남은 인원 2명이 보초를 섰어야 했으나, 일병 한 명은 2~3달 고참이란 핑계로 내무실에서 자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이었던 문*림 일병은 그들이 상륙하는 걸 발견했으나, 겁에 질려 도주해버렸다.
그 후 문 일병은 분대장한테 보고를 했으나 횡설수설했고, 그들은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어서 박격포 몇 발을 바다쪽으로 발사한 후, 상륙하려던 적을 격퇴했다고 허위보고했다.
첫 보도된 사례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위조지폐를 나누어 주고, 남로당 가입서를 작성하며, 도망치려던 주민을 살해하였다. 폭발물을 가지고 있어 산업시설 파괴의 목적도 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들은 남한측의 군복·신사복·노동복 혹은 일반 와이셔츠나 면 바지 같은 평상복 등 갖가지 옷차림으로 위장하였고, 기관단총과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이후 주민들을 집합시킨 다음 북한 책자와 전단을 나누어 주면서 북한의 발전상을 선전하는 한편, 정치 사상 교육을 실시하여 인민유격대 및 조선로동당에 가입할 것을 강요하였다.
또한 그들은 주민들이 겁에 질려 머뭇거리며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자, 위협하기 위해서 전혀 무장하지 못하고 대항력도 지니지 못한 민간인을 향하여 대검으로 찌르거나 심지어는 늦게 도착한 주민을 돌로 머리를 쳐 무참히 살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민간인을 함부로 대하는 북한군의 이러한 행위는 게릴라 전술 중 하나인 게릴라 양성에 대한 지식이 없다고 할 수준이다.
이때 이 마을을 방문한 장성읍에 거주하는 전*두 씨가 대검에 찔려 죽었다.
삼척군 하장면의 산간마을에서는 80세 노인, 52세의 며느리, 15세의 손자 등 일가족 일원 중 세 사람이 난자당해 살해당했다.
또 무장공비들은 추수를 하던 주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사격을 가해 사망자와 부상자를 일으키는 한편 주민들에게 불온 책자와 위조지폐를 나눠주고 군부대나 경찰에 신고하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편지나 소포들을 배달하던 집배원을 납치해 살해하고 약탈한 우편물을 모두 불태운건 덤.
공비들에 의한 약탈사건도 보고되었는데, 경북 영주군에서는 일가족을 안방에 묶어놓고 외양간의 소를 끌고 가고 장롱 안에 있던 옷들을 빼서 달아나는 한편, 강원도 평창에서는 가장을 제외한 일가족을 대검과 돌멩이로 잔혹하게 살해하고 소와 닭을 빼앗았으며 절간을 습격해 승려들을 감금하고 시주받은 현금과 식량을 약탈해 달아나기도 했다.
이때 연고없이 절에서 지내면서 스님들의 식사를 지어주는 노인을 단검으로 살해했으며 등산객을 인질로 납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연락이 제한된 상황에서 릴레이 방식으로 연락을 취하여 군 당국에 신고하게 되고, 11월 4일 14시 30분, 상황을 보고받은 대간첩대책본부는 강원 정선·영월·삼척 지구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군경과 예비군을 동원해 공비들의 퇴로를 차단, 포위망을 구축하고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했다.
대간첩 대책본부의 지휘 아래 군과 향토 예비군은 동부 산악 지대의 험준한 지형과 나쁜 기상 조건에도 불구하고, 무장공비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망을 형성, 강력한 화력을 이용하여 전면적인 소탕 작전을 벌였다.
당시의 11월 16일까지 벌어진 소탕작전에 의하여 북측 무장공비 31명이 사살당하였고, 2명이 생포되었으며, 적의 장비 중 PPS-43 기관단총 3정, 권총 1정, 실탄 다수, TNT 3개, 수류탄 20발, 비상식량 200개, 카메라 1대를 노획하였다.
또한 68년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 작전에서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함으로써 침투한 120명을 모두 소탕했다.
한국은 군경 38명 전사, 민간인 23명이 사망했고 12월 28일까지 대대적으로 진행된 소탕 작전에서 공비 113명이 사살되고 7명이 생포되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 피살 직전의 이승복이 한 발언.
소탕 사건 와중, 무장공비의 일단이 군경과 예비군에 의해 포위되어 쫓기면서 이승복 어린이 살해 사건을 일으켰다.
1968년 12월 9일 오후 7시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계방산 중턱의 이*우(당시 35세)씨 집에 북한 무장공비 5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한 후 아군의 추격을 받고 도주하던 공비 120명 중 일부였다.
이*우씨는 집을 비웠고 부인 주*하(당시 33세)씨와 승권(호적명 이*관·15세), 승복(9세), 승수(7세), 승자(여·4세) 등 어린 4남매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공비들은 아이들에게 “너는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 고 물었고,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이승복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비들은 승복이의 멱살을 잡아 입을 벌린 후 대검으로 입을 찢어 살해했다.
공비들은 승수와 승자도 벽에 던져 살해했고, 주씨는 대검에 수차례 찔려 숨졌다.
승권도 가슴을 관통당하는 등 36군데 상처를 입었지만 살아남아 공비들이 도주한 후 이웃집으로 피신했다.
승권은 병원으로 후송되기 전 이웃에게 “승복이가 ‘공산당이 싫어요’ 라고 하니까 공비들이 입을 찢어 죽였다” 고 전했다.
다만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나중에 조선일보가 이야기를 지어내어 허위사실을 퍼뜨렸다고 비판한 언론인 2명을 조선일보 측이 명예훼손으로 형사 고소하는 일도 벌어졌다.
1968년 초 공비가 청와대를 기습한 1.21 사태로부터,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에 이어 통일혁명당 사건을 거쳐 1968년 말의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사건로 이어지는 일련의 북한의 대남 적대 행위는 한국 정부와 국민의 반공 태세를 한층 공고히 다지게 하였다.
즉 반공이 국시가 되는 것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강하게 끼쳤다.
굳이 순기능과 역기능을 나누어 이야기해본다면, 순기능으로서는 이렇게 당하게 되어 대간첩작전 체계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던 반면, 역기능으로서는 소위 빨갱이에 관한 증오와 공포(레드 컴플렉스 항목 참조)가 사회 일반으로 퍼지게 되었다.
이 시점은 6.25 휴전으로부터 15년이 되는 해로 구 일본제국의 중화학, 발전설비 등 군수산업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북한의 경제력을 앞지르던 시기였다.
이후 한국 정부는 제3세계 외교전을 수행하여 북한을 고립시키는데에도 노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은 이 사건이 한반도의 긴장을 초래하고 유엔의 평화통일 노력을 방해하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유엔총회에 특별 보고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교전 지역이 동해안 일대와 강원도 및 경상북도 태백산맥 일대로 광범위한 편이다.
언론에서는 보도통제로 구체적인 지명은 나오지 않으나, 양양, 평창(이승복 사건), 영주, 인제 등에서 일어났으며, 을종사태 포고 지역도 울진, 영양, 봉화등을 포함해 매우 넓었던 것을 감안하면 교전 지역이 거의 수십 km에 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잘 알려져 있지지 않으나 7~8월에 100명, 9월에는 300여 명의 북한군이 교전 중 전사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긴장이 심한 한해였다.
허사도(목포시 유달동에 있던 섬(許沙島)), 서산 등 다른 지역에서도 산발적 교전이 있었다.
1.21 사태 이후로 신설된 예비군 및 전투경찰대도 투입되었으며, 특히 전투경찰대는 파월장병출신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침투 시기가 늦어, 지원이 거의 없던 무장공비에게는 태백산맥의 겨울도 반갑지 않은 상대였을 것이다.
특히 투입된지 얼마 안된 시점에 갑작스레 추위가 찾아와, 11월 10일에에 서울이 영하 9도로 떨어져 동사자가 발생하고, 작전지역에서도 100cm 이상의 눈이 쌓이는 상황이었다.
침투 1달 뒤인 12월 7일에는 투항자가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문책도 있었는데, 경계 자체를 포기한 문*림, 김*수 일병은 사형. 책임자인 소대장 둘은 각각 10년, 15년. 중대장 둘은 각각 7년, 10년. 대대장 둘은 각각 2년, 3년씩 선고받았다.
허위보고를 한 김*출 하사는 3년. 같이 술을 마신 병사들은 각각 2년씩 선고받았다.
다만 분위기가 좀 가라앉고 항소심에서는 형량이 크게 줄어 사건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병사들은 무죄를 받았고, 문*림과 김*수 또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지금은 모두 출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한 공비들은 '적군'이 아니라 '행려사망자'로 분류되어 사망한 면사무소에서 자체적으로 매장했다.
이승복이 사망한 평창군 진부면의 경우 12명의 공비가 사살되었는데 해당 면사무소에서 12구의 시신을 매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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