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그 때에

실미도사건(實尾島事件)1971

Choi가이버 2022. 12. 14. 17:30

실미도사건(實尾島事件)1971

1971년 8월 23일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실미도(현 인천광역시 중구 실미도)에 위치한 대한민국 공군 684부대 북파공작원들이 부대원을 살해하고 부대를 이탈하여, 시외버스를 탈취해 청와대를 향해 돌진하다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본사 앞에서 자폭한 사건이다. 

당시에는 '8.23 난동사건'이라고 칭하였다.
1968년 1월 21일, 소위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진 1.21 사태가 일어났다. 

북한이 무장 게릴라를 보내 당시 국가원수였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그 복수(김일성 암살)를 계획하게 된다. 이를 위해 3군에 1개씩 이를 전담할 특수부대를 창설했고, 그 중 공군 산하에는 684부대가 창설되어 실미도에 비밀 훈련 기지를 마련하였다.
창설 당시 인원은 총 31명이었다. 

1968년 7월 훈련 중 사고로 1명이 사망했고 얼마 후 2명이 탈영을 시도하다 붙잡혀 처형당했다.(당시 처형 방식은 전 부대원 앞에서 몽둥이로 때려 집행하는 공개 처형이었다)

1970년 11월 3명이 탈영해서 인근 무의도로 건너갔다.

이들은 무의초등학교 숙직실에서 민간인 여성 2명을 강간하고 이 외에 학생 9명과 교사 1명까지 12명의 인질을 잡고 대치하다 전원 자결했다.

또 조장이 기간병을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조사 과정에서 이 자가 동료 훈련병들을 상습적으로 강간한 사실까지 밝혀져 결국 처형당했다.

이런 사건들 이후로 군은 병사들의 매춘을 허용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일부 병사들은 여성들에게 가족에게 전달할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으나 일이 끝난 후에는 공군 헌병들이 들이닥쳐 철저히 보안 조치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총 7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남게 된다.

1970년대 초부터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에 따라 남북 적십자 회담으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는 등 실제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김형욱에서 김계원, 이후락으로 바뀌었다. 

상황이 변하면서 암살 계획은 점차 뒤로 밀려나고 잊히게 되었다.왜냐하면 중정부장이 자주 바뀌면서 후임 부장들한테 실미도 부대에 대한 자료의 인수인계를 제대로 안 하고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실미도 부대에 대해 중정의 관리가 소홀해졌다. 그런 와중에 부대 예산 착복에 의해 이들에 대한 대우도 나빠졌다.

봉급이 끊기고, 음식 배급이 부실해져 굶주리고, 자원한 소대장 김방일 공군 중사 1명 외에는 특수전 출신 교관 및 조교들이 대부분 떠나고 이쪽과 별 관계 없는 기간원들이 들어오는 등 상황이 나빠지자 이들은 점차 불안해져갔다.

소설 실미도의 저자 백동호에 따르면 보안 유지를 위해 부대원들을 몰살시키자는 얘기도 나왔다는 것을 부대원들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불만 때문에 박정희를 만나 담판을 짓고자 부대원들이 기간병들을 죽이고 탈영하였다. 
결국 불만을 품은 이들은 1971년 8월 23일 반란을 일으켜 훈련을 담당하던 공군 교관들과 기간병력들을 살해, 섬을 장악한 후 탈주해 인천에 상륙했다. 

기간병력들 중 출장 나가있던 김방일 소대장과 병 5명 등 총 6명이 살아남았으며, 이들은 화장실이나 숲 속에 숨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어선에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684부대원 1명도 교전 중 사망했다. 김방일 소대장은 사건이 난 다음날 오전에 배를 타고 복귀하고 있었는데, 684부대원들이 탄 배가 이 배와 마주치며 지나갔지만 김방일 소대장은 알아채지 못해, 상륙하고 나서야 참상을 발견한다.

김방일 소대장이 부대 창설부터 유일하게 남아 부대원들을 보살폈다는 점 때문에 그를 해치기 싫은 부대원들이 일부러 그가 없는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실미도에 복귀한 김방일 소대장이 자기 관물대에서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고 적힌 쪽지를 발견했다고. 
영화 실미도에서는 이 일화를 각색해서 조돈일 중사가 부대해체를 막기 위해 공군본부로 출장을 간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서술하였다.

정확히는 박 중사가 684부대원을 정리하기 위해, 이를 반대하는 조 중사를 설득을 명목으로 공군본부로 보낸 것인데 이를 알고있던 684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이 일화를 각색해서 조돈일 중사가 부대해체를 막기 위해 공군본부로 출장을 간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서술하였다. 

정확히는 박 중사가 684부대원을 정리하기 위해, 이를 반대하는 조 중사를 설득을 명목으로 공군본부로 보낸 것인데 이를 알고있던 684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 제33보병사단(현 제17보병사단) 예하 해안 경계 부대의 저지선을 뚫고 인천과 수원 간을 운행하던 현대 R192 시외버스를 탈취하여 경인국도를 타고 부평, 소사, 영등포를 거쳐 청와대로 돌격하려 시도한다.
당시 동승했던 버스 운전사의 증언에 의하면 실미도 부대원들은 '정부에서 자신들을 섬에다 가두고 죽이려 했다'면서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박정희를 죽이겠다'고 말한다.

이들은 무장 공비로 간주되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의 현재의 유한양행 구 본사 건물 앞에서 당시 서울 지역 향토 사단이던 육군 제30보병사단 예하 병력 등 육군, 경찰 부대에 포위, 저지되었다.

당시 대방동에는 계룡대로 이전하기 전의 해군본부, 공군본부 등이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도 해군 및 공군회관, 공군항공안전단, 국군재정관리단 등 소수의 군사 시설이 남아있다.

잘 안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해군본부 역시 무장 공비가 본부 인근에서 농성 중이라는 보고를 듣고 비상이 걸려 주둔지 방어 전투 배치 명령이 떨어지고 실탄이 지급되는 등 난리가 났다.

여기서 684부대원들과 진압군은 치열한 총격전을 벌였는데, 갈수록 684부대원들이 불리해졌다.
결국 포위망을 돌파할 가능성이 없어지자, 부대원 대다수는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하였다. 하지만 그들 중 4명은 큰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회에 속한 야당의원들이 나섰다. 국회 진상 조사가 시작되면서 부대원 4명이 증인으로 출석한다. 야당 의원들이 "실미도에는 대체 왜 들어간 겁니까?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을 했습니까?"라고 말하며 자기들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비밀 사항이라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이 억울해서 국회까지 갔는데 이제 와서 묵비권을 행사한다.
그들이 갑자기 침묵을 한 이유는, 진상 조사를 앞두고 군 관계자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군 관계자가 찾아와서 부대원 4명에게 "이대로 가면 어차피 니네 사형당할 거야. 마지막 기회다, 같이 월남 가자. 그 대신 누가 묻더라도 보안상 절대 말할 수 없다고 해. 그래야 니들 모두 살 수 있어."라고 말해 국가가 약속해줬다. 그래서 부대원 4명이 모른다고 말했다. 근데 그 월남을 보내준다는 약속은 애초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다.
72년 1월 11일, 군법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70일 후인 72년 3월 20일 당시, 오류동의 공군 2325전대(현 도로명주소로는 오류로8가~바길 일대에 해당된다. 서울 구로구 오류동 147-22)현 평강제일교회 부지.에서 총살됐다. 

그리고 형식적인 장례 절차조차 거치지 못한 채 그들의 유해는 암매장되었고 지금도 유해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부대원 4명이 사형집행당하기전에 남긴 유언*
살아생전 국가에 대해 말도 못하고 죽어가는 게 아깝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집에 알리지 말아주십시오.

바다 한복판 섬에서 부모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만 3년 동안 외롭게 지내고, 김일성의 목을 베지 못하고 죽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애들 3남매가 제일 불쌍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애국가를 부르다.)
국가를 위해 싸우지 못하고, 국민에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게 억울합니다.

당시 정부는 처음에 무장공비라고 발표하다가, 하루만에 군 특수범이라고 말을 바꿨다. 하지만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이었던 육사 7기 예비역 육군 준장 이세규 장군이 그들의 정체가 정부 발표처럼 '군 특수범'이 아니라 공군 산하의 무장 특공대였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정부는 하는 수 없이 또 다시 말을 바꿔야 했다.

이 사실을 폭로한 이세규 의원은 유신 정권 이후 남산에 끌려가서 심한 고문을 받았다. 한편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공군 참모총장이었던 김두만이 경질되고 옥만호가 후임 총장에 올랐다.
대원들이 실미도에 4년 정도 수용되어 있었고, 처우에 불만을 품고 사건을 저지른 것까지는 당시에도 언론에 의해 밝혀졌지만, 정부의 통제로 인해 더 이상은 보도를 못하게 하고 빠르게 묻혔다. 

당시 정치권에서 진상 규명 요구를 통해 정치 문제화 되면서 암암리에 "북파 공작원들의 탈출 난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1987년 6월 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금기의 영역에서 벗어나 특수부대 난동 사건으로 자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사건 이후
1999년 실상을 파헤친 소설 실미도가 발간되고 2003년에는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개봉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004년, 이 사건 당시 살아남았다가 체포되어 군법 재판을 받고 사형 당한 공작원 4명의 신원이 알려졌다. 

한 예비역 공군 장교는 실미도 부대의 생존 기간병과 공군 정보 요원의 증언 등을 근거로 4명의 신원이 임*빈(충북 청주), 김*철(대전), 이*천(인천), 김*구(충북 옥천)라고 밝혔다. 
2017년 8월 23일 실미도 희생자들을 위한 합동 봉안식이 이루어졌다. 

유골함 20위와 위패 2위가 봉안소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군법 재판으로 인해 처형 뒤 암매장된 4명의 시신은 오리무중인 상태다. 

국방부에선 매장지와 시신을 찾기 위해 현장 목격자 등 제보자를 찾고 있다. 
2020년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처형된 공작원 4명의 유해가 대방동 인근에 암매장되었다는 전직 공군 법무관의 양심선언을 입수하고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684부대 창설 멤버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방일 소대장은 이후로도 공군에서 계속 복무했으며, 준위까지 진급하고 1990년 퇴역했다. 

이후 유일기업의 대표로 있다가 684부대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며, 영화 실미도도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실미도가 개봉한 지 2년 뒤인 2005년에 작고했다.
정부의 공식 발표와는 달리 실미도 사건 당시 훈련병 중 생존자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 중 한 명이 소설가 백동호로, 자신이 만났다고 주장하는 생존자를 주제로 쓴 소설이 바로 실미도다.

백동호의 소설에서는 강인찬을 포함해서 3명이 무리에서 이탈했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실제 생존한 병사는 전원 기간병들로 기독교 방송으로 잘 알려진 양동수를 포함해 6인이 유일하다
김방일 소대장은 백동호 작가의 주장을 반박, 실미도 훈련병은 다 죽었으며 그들의 신상을 자신이 다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생존설을 주장하는 백동호 작가와는 마찰을 빚으며 소설 쓰지 말라고 일갈했다. 

이에 백동호 작가는 자신이 아닌 척 김방일을 깎아내리는 댓글을 달았다고 하며, 김방일 소대장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추모하며 자신의 추태를 고백했다.
2021년 3월 18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의 2화에서 해당 사건을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