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
1946년 10월에 발발한 10월 인민항쟁을 계기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1947년 1월 중도 좌익세력의 주도로 친일파 처리를 위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조사하는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46년 실시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로 친일파로 지목되는 상당수가 입법의원으로 당선되자 이들의 의원자격 및 향후 선거에서 입후보자격을 박탈하고 10월 인민항쟁에서 나타난 민중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하여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법률'의 초안이 1947년 3월 13일 상정되었다.
당시, 초안은 일제 하의 독립운동을 참여한 관선의원을 중심으로 마련되었으며 내용은 민족 정통성을 갖추기 위해 친일파를 배제하고 처벌의 모든 조항에 최저형을 규정한 이상주의(以上主義))를 채택함과 동시에 반민족행위가 무거운 민족반역자는 국회 동의 없이는 형기를 경감할 수 없도록 하는 등의 처벌규정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초안은 친일파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규정하였다는 비판과 친일파 처벌에 반대하는 정치세력, 입법의원 내에 친일 경력이 있는 의원들의 반대로 4월 22일에 수정안이 상정되었다.
수정안은 부일협력자에는 없던 체형과 재산형이 추가되었지만 친일파의 범위를 모든 일제의 관공리를 당연범으로 하였던 것과는 달리 칙임관 이상에 대해서만 당연범으로 다루었고 초안에는 없던 공소시효를 두어 적용범위가 축소되었다.
또한, 모든 처벌규정에 최저형의 규정이 없는 이하주의(以下主義)가 채택되고 재판관의 판단에 따라 형을 경감하거나 면제할 수 있는 가감례 규정을 두었다.
처벌 규정이 약화된 수정안에 대해서도 전범자와 왕공작을 받은 자 및 의의 처벌 규정을 삭제하자는 친일계열의 민선의원 측의 주장과 '이하주의' 채택과 '가감례' 규정 삽입을 비판하는 중도좌파계열의 관선의원 들의 대립으로 재수정하기로 가결하고 5월 5일 재수정안이 상정되었다.
친일파 처리에 미온적인 재수정의원 들에 의해 상정된 재수정안에서는 공소시효가 1년으로 단축되고 전범과 왕공작을 받은 자 및 계승자의 처벌 규정이 삭제되어 처벌 규정 강화를 주장했던 관선의원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재수정안 반대파 의원 5인이 새로 선정되어 법안을 재작성하여 1947년 7월 2일 최종안이 제정되었다.
최종안은 친일파 숙청에 있어 민족반역자도 선택범 규정을 둔 재수정안과 달리 모두 당연범으로 규정하였고 관리에 대한 선택범도 직위로 구분하여 친일파 처벌에 대한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1948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설치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단을 위한 예비조사를 담당했던 위원회를 창설하여 1949년에 해산했다.(약칭:반민특위) 사무실은 초기엔 서울 세종로 중앙청 205호에 잡다가 얼마 안가 명동의 상공부 특허국 청사로 옮겼다.
구성은 크게 조사위원과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가 있었다. 조사위원 10명으로 구성되고 지역에 조사 지부를 설치한다. 중앙에는 사무국장 1명, 조사관, 서기, 사무원 각각 15명을 두었(다고 한)다.
지방에는 조사관, 서기, 사무원 3명을 두었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을 포함한 9명으로 구성되었다.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고등법원 판사 이상 법관 또는 변호사 6명, 사회 인사 5명으로 총 16명 구성되었다. 이들은 국회에서 선출했다.
조직 배경
광복 후 한반도에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특히 군정기 및 대한민국 사회에선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 군정 시기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1948년 7월 17일일 공포된 제헌 헌법 제101조에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정 근거를 두었고, 1948년 8월 16일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상정한 후 9월 1일에 통과시켰지만, 친일 인사들은 친일파 처단이 공산당의 날조라고 주장하는 전단을 뿌려 국회를 압박했다.
이에 정부는 국회 측이 공포 거부 시 다른 법을 만들까봐 동월 22일에 할 수 없이 제정시켰다.
이때 처벌받은 사람들을 보면 한일합방에 서명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사형은 없고, 무기징역 이하로만 처벌했다. 참고로 딱 한번 사형판결을 받았으나, 한국전쟁 발발 직전 풀려난다.
결론적으론 모두 풀려나 실제로 처벌된 사람은 없다.
그리고 공포일인 8월 16일부터 공소시효 1년이 있었다. 단, 해외로 도피하면 안 된다.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전문은 국가법령정보센터 자료를 참조]
제1조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 及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제2조 일본 정부로부터 爵(작)을 수여한 자 또는 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제3조 일본 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 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제4조 좌의 각 호의 일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
1. 襲爵(습작)한 자
2. 중추원 부의장, 고문 또는 參議(참의)되었던 자
3. 勅任官(칙임관) 이상의 관리되었던 자
4.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5. 독립을 방해할 목적으로 조직된 중앙단체의 수뇌간부되었던 자
6. 군·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7. 국내에서 대규모인 군수공업을 책임 경영한 자
8. 도·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정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적 죄악이 현저한 자
9. 관공리되었던 자로서 그 직위를 악용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10. 일본 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 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11. 종교·사회·문화·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악질적인 반민족적 언론 저작 及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
12. 개인으로서 가장 악질적인 행위로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본사: 재산몰수의 한계는?
△정홍거: 그것은 헌법공포일로부터의 재산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즉 친일행위로 말미암아 얻은 재산의 양도는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본사:이미 소모된 재산은?
△노일환:추징해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정홍거: 부동산 같으면 추징할 수 있겠지만 동산 같은 것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몰수한다 하더라도 실정으로는 해당자의 생활의 한계 이하의 것도 있을 것이니까요.
△김상돈: 현금을 가졌다가 소모한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나 부동산은 열 다리 아니라 백 다리를 넘었어도 다 알 수 있는 것이고 현금으로 가지고 있다가 고의로 소모해 버리든지 한 자에 대해서는 형을 무겁게 한다든지 하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노일환: 생활비 문제는 엄격히 말하면 자기가 살아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정도의 것만을 용인할 것이지, 생활비란 이름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은익할 여유까지 용인하는 것은 아닌 줄로 압니다.
△본사: 몇 다리씩 넘어간 재산의 몰수로 말미암아 제3자가 피해를 본다면 ……
△노일환: 일례를 들면 만주나 중국 등지에서 있던 사람 같으면 알 수 없다 하겠지만 그네들의 재산을 사는 사람이라면 악질적으로 양도한 것인지 아닌지 다 알 수 있는 것으로 고등계 형사라든지, 일제에 아부해서 모은 재산 같은 것은 몇 다리를 넘어간 것이라도 그러한 재산을 산 국민은 마땅히 피해를 받아야 할 것이다.
△본사:가령 朴興植이 일인으로부터 받은 돈을 興韓財團 같은 명의로 유지하고 있다면?
△정홍거: 흥한재단은 이사제도로서 박흥식이 이사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노일환: 그것은 역시 헌법을 공포한 날부터 기산하게 될 것입니다.
△본사: 반민법 제4조 중에 악질적이라는 말이 많은데 이의 한계는?
△김상돈: 일례로 曺秉相을 들면, 일본놈이 목을 매어 끌어서 할 수 없이 경방단장을 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 자는 자진해서 나갔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목을 끌어당긴 경방단장이란 말이예요. 이러한 것은 당연히 악질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제의 관공리가 허다하겠지만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없이 사무만을 본 사람은 악질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노일환: 경방단장을 하고 싶어도 못한 사람의 실례는 내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가 경찰의 주의를 받고 있는데 하도 시달리니까 경방단장을 지원해보았으나 아무리 해도 시켜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가만이 보니까 面경방단장은 그 관할 주재소 수석과 비밀을 통하고 있고 郡경방단장은 경찰서장과 완전히 비밀을 통하고 있는 사실이었는데 이것은 가장 악질적으로 민중을 억압하는 데 그들과 비밀을 통할 수 있는 인물을 그 자리에 골랐던 것입니다.
△본사: 항간에서는 국회의원 중 해당자가 있다는 말이 있는데 ……
△김상돈: 반민법을 묵살시키고 유야무야 즉 기형화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국회의원 중에도 해당자가 있다느니 …… 그것은 盧의원이 당하고 계신 일이지만 …… 하고 반민법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서 모략과 협박을 해 가지고 반민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리려는 계획에 모모가 참모총장격이 되어 가지고 어떠한 暗流를 만들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였습니다. 방금 그들은 속속 체포되고 있는데 이러한 무리 중에는 일제 경찰도 끼어 있었습니다.
해외도피자가 많아지자, 김상돈은 정상참작에 대한 담화도 발표했다. 여기서 나오는 일본에서 전쟁협력자를 공직에서 추방한다는 것은 GHQ의 공직추방령을 의미하는 것 같다.
공무원과 교육자는 봐주기로 결론내렸다.
활동과 와해
법이 공포된 다음 날, 친일 인사들은 정부의 비호 하에 '반공구국궐기대회'를 열어 방해공작을 했으나, 반민특위는 예정대로 구성됐다. 1949년 1월 5일 반민특위는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차리고 8일 박흥식을 체포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기에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무력화시키려고 애썼으며 결국 이루게 된다.
이승만은 담화를 통하여 견제하기 시작했는데, 그 요지는 반민특위가 삼권분립의 원칙에 위반되며 안보상황이 위급한 때 경찰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법원장이면서 반민특위특별재판부장였던 김병로는 반민특위활동이 불법이 아니라는 담화를 발표하고 정부의 협조를 촉구하였으며 국회역시 반민특위의 김상덕 위원장과 김상돈 부위원장을 불러 의견을 묻고 대통령담화의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계속 비협조로 일관하다 2월 24일 반민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반민법 법률개정안을 제2회 39차 본회의에 상정하였다. 결과는 부결되었으며, 특위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반민특위는 국권피탈에 협력한 자,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탄압한 자, 작위를 받은 자,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자를 징역에 처하도록 하는 반민족행위 처벌법(반민법)을 1948년 9월에 국회에서 통과시킨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친일파를 처단하자고 하는 놈은 빨갱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반민특위를 직접적, 간접적으로 방해하였다.
대표적으로, 노덕술 등은 백민태를 통해 반민특위 및 정부요인의 암살을 계획했으나, 백민태가 자수함으로써 미수에 그쳤다.(반민특위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사건)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다섯 차례나 발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을 저지하려 하였다.
북한이 대한민국 제헌국회에 침투할 목적으로 북한의 공작원 정재한이 공작을 벌이다가, 암호를 발견하게 되어 1949년 5월에 국회 프락치 사건을 발생하자, 이문원 의원 등 소장파 의원 3명을 구속했다.
이에 국회는 세 의원의 석방동의안으로 맞섰지만, 6월 초부터 친일 인사들도 민중대회를 열며 국회를 습격했다.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30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윤기병 서울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관 80여 명이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했다. 이들은 특위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친일파 관련 조사서류와 집기들을 강탈했다.
그 날의 오후에는 서울특별시청의 경찰국에서 사찰과에 속한 440명의 경찰관들이 반민특위 간부 교체, 특별경찰대 해산, 경찰의 신분보장 등을 요구하면서 집단사표를 제출했다.
국회는 6월 9일 책임자 처벌과 반민특위 원상 복귀를 정부에 요구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6월 11일 반민특위 활동으로 민심이 소요되어 부득이하게 특경대를 해산했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국회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반발해 위원장이었던 김상덕은 사퇴하고 이후 반민특위 활동은 급속도로 위축됐다. 그렇게 공석이 된 자리에 법무부 장관 이인을 위원장으로 앉히고, 사퇴한 위원들 자리에는 친일파 청산을 반대해온 인사들로 채워 그들로 하여금 내부에서 반민특위를 무력화하여 해체시키는 일을 맡겼다.
결국, 반민특위는 이인 장관이 결정적으로 해체시킨거나 다름없는 셈이다. 한술 더 떠 이승만 본인도 외신기자들에게 자신이 반민특위 습격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위와 같은 직접적인 6.6 반민특위 습격 사건으로 반민특위의 실제적인 활동은 중단되었었으며 반민특위의 폐기법안을 통과시키게 함으로써 민족반역자에 대한 처벌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1949년 9월 반민법 개정안이 통과됨으로써 임기가 축소된 반민특위는 그해 10월 특별검찰부, 특별재판부와 함께 해체되었다. 이 기능은 대법원과 대검찰청으로 이관되었다.
성과
반민특위의 목표는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등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처벌이었다.
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체포된 인사들은 노덕술, 최운하 등의 경찰 간부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톨스토이라고 불렸던 춘원 이광수, '레디메이드 인생'으로 유명한 채만식, 육당 최남선 등 문화계 인사, 종교계 인사인 최린 등이 구속되었으며, 그 외에도 수는 적었지만 친일파를 구속하는 등 약간의 성과는 있었으나 처벌에는 실패한다.
결국 집행유예 5인, 실형 7인, 공민권정지 18인 등 겨우 30인만이 제재를 받았고, 실형의 선고를 받은 7인도 이듬해 봄까지 재심청구 등의 방법으로 모두 풀려나 친일파의 숙청작업은 실패하고 말았다.
상당수 많은 체포자들은 자기 변명 내지는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다"를 내세우기도 했지만 당시 병중이었던 이광수의 재판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사형을 요구했던 최린과 같은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납북된 다른 반민특위 인사들에 비해 대접이 나았다고 한다. 다른 반민특위 출신들은 맞아 죽거나 수용소로 끌려간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문 의혹이 있었지만, 피의자 이광수(우리가 아는 그 춘원 이광수)는 고문이 전혀 없었다고 부인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김덕기 한 사람이지만, 항소를 했고 6.25전에 풀려난다. 하지만 6.25 때 서울에 남아 있던 덕분에 북한군에게 끌려가서 그동안의 악행을 따져서 4주 동안 맨날 두들겨 맞았고 인민재판장에 끌려갈 땐 이미 정신이 나가있었다.
그러고는 죽창에 찔려 황천길 익스프레스를 타고 말았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독립투사인 정이형 씨의 딸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전에 정릉 근처의 산에 갔다가 추락사했다.
주요 대상
일제 치하에서 일본 본국 또는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 경찰(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 일본 제국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 등 일본군과 협력하였던 자.
일제 치하 때 반일(反日) 및 항일(抗日)을 하였던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 또는 그 가족 등에게 위해를 가하였던 자.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를 일본제국 경찰(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 헌병 등 일본군에게 발고 또는 신고하여 위해를 가하였던 자.
일본제국 경찰(고등경찰과 특별고등경찰), 헌병을 포함한 일본군 등에 몸담으며 일제 찬양을 하였던 자.
일제로부터 상금 또는 사례금 등을 받으며 살아왔던 자.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들의 자금을 일본군 및 일본 경찰 등에게 빼돌렸던 자.
일본 본국 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작위 등을 받았던 자.
일제의 사주를 받으며 무고한 조선 양민에게 위해를 가했던 자.
일제의 사주를 받으며 조선 양민에게 일제 찬양을 강요하였던 자.
한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어를 강요적으로 쓰라고 위해한 자.
애국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고 기미가요 등을 부르라고 위해한 자.
일제 찬양이 담긴 음악 및 가곡 등을 작곡한 자.
일제 찬양을 주장하는 서적이나 문서 등을 서술하거나 작성한 자.
3.1 운동 및 6.10 만세 운동 당시 일본 경찰, 일본군과 협력해서 탄압 및 방해를 가했던 자.
조선이름을 일본이름으로 변경하라고 창씨개명을 강요하거나 뇌물 등으로 유도한 자.
학병, 강제징용, 정신대 입대를 강요하거나 강제로 입대시켰던 자.
그 외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일제와 협력했던 자.
면제 대상
일제 치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나라에 헌신하며 전사(戰死) 또는 순국한 사람 또는 그 가족.
일제의 뇌물청탁을 거절하였던 사람.
일제의 작위수여에 거절하였던 사람.
조선 양민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강조하며 민족성을 인도한 사람.
조선 독립군에 참전했거나 참전 경력이 있던 사람.
반일 및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
애국운동 및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 및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서 투옥된 사람.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들을 도와주었던 사람.
국산품을 적극적으로 애용하였던 사람.
3.1 운동 및 6.10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사람.
봉오동 전투 및 청산리 대첩 참전경력이 있는 사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몸담았거나 임정에서 일했던 사람 또는 임정요인을 보좌 및 보호하였던 사람.
독립군 및 독립군 부대에 자원으로 입대했거나 몸담았던 사람.
한글 편찬사업 등에 참여하였던 사람.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조선이름을 그대로 유지했던 사람.
그 외 반일 및 애국,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사람.
평가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이는 친일세력이 그 후에도 한국 사회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줬다고 평가된다. 때문에 뒤늦게나마 당시 인물들의 친일 행적을 밝혀 내야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애로 사항이 배로 꽃피게 되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증거 확보가 어려워 정말로 친일인명사전에 실려야 할 악질적인 인물들의 행각은 묻혀 버렸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남이 싸놓은 똥을 너무 오랫동안 치우지 않고 방치하다 보니,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이는 자연히 선정 기준의 형평성 논란으로 이어지니 제때 친일 청산을 안 한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예컨대 독립 투사를 잡아들여 온 행위와 군국주의 가요를 부른 대중 가수를 비교한다면 당연히 전자의 죄가 훨씬 크다.
하지만 애초에 잡아들여 처벌을 받았어야 할 거물급들은 자신의 증거를 열심히 인멸해 명단 수록을 피한 반면, 당시에도 반민특위의 관심 밖이었던 대중 가수들의 친일 가요는 우연찮게 레코드라는 물증이 남아 사료(史料)로서 명단에 실리게 된다면, 진짜 크게 욕 먹어야 할 사람들은 미꾸라지마냥 운 좋게 빠져나가게 되므로 피라미급들이 역사 기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커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후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무조건 쉴드를 치자니, 그런 핑계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진다는 게 문제다. 게다가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자발성 여부 확인도 쉽지 않다.
친일파 청산에 관하여는 진보, 보수 진영의 평가가 극단적으로 다르다. 보수 진영은 국가 건설 등의 이유로 청산에 소극적이고, 진보 진영은 친일파 재산환수, 진상규명 등을 외친다.
당시 입법권과 사법권을 동시에 행사했다는 반민특경대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그러나 반민특위 하의 특별조사위원회는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조사와 그 내용을 특별검찰부로 보내는 역할만을 담당하였고, 기소와 재판 등 사법적 내용은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하에서 이루어졌다. 특경대는 특별조사위원의 조사를 보조하기 위한 조직이었지 사법권까지 행사하는 조직은 아니었다.
특경대의 권력 남용에 대해서 논란이 된 것은 앞에서 지적된 노덕술의 체포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경찰의 대부분이 피의자 내지는 피의자의 계열이었기 때문에 체포에 관한 경찰의 업무를 특경대가 침해했다는 논리는 그때부터 있었고 이것은 노덕술 체포로 가시화 되고 있다.
사회, 문화적으로 어떤 공로가 있어도 친일파로서 활동한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면죄부가 주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위에서 언급한 최남선이나, 윤치호 등을 들 수 있다.
참고로 반민특위 친일파 명단에 기초자료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김승학의 친일파 명단 원고에도 그들의 이름이 나온다. 김승학의 명단에는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동아일보 사장 김성수, 보성전문학교 교수 여운홍, 공산주의 이론가 김오성과 인정식, 대한민국 국무총리 장면, 소설가 이광수 등 당시 사회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이 포함되어있다.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시국강연이나 내선일체, 창씨개명에 동조하는 논문 등을 기고하는 활동을 했었다. 민족이라는 가치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잘못된 역사는 그에 따른 재평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참고로 가짜조사관이 한두 번이나 돌아다닌 게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말썽도 있었는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부정회계도 있었다. 권한이 강했는데 김상돈의 경우 지프차를 운전하다가 어린이를 치어죽이고도 과실치사로 처리해버렸다.
치어죽였을 뿐 아니라, 멋대로 매장하거나,허위문서를 작성했다. 특경대는 반민특위 외에도 대간첩 특경대도 있었다.
반민행위자들의 서적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실패로 인해 이승만은 본인이 독립운동가 출신이고 이후에도 반일 성향을 매우 뚜렷하게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세력과 결탁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아예 이승만 본인이 친일 성향이라는 친일몰이까지 당하기도 했다.
친일파의 비겁한 변명
일부 우익진영이 친일파 청산을 반대하는 근거는, 당시 "처벌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 처벌한다"라는 주장과 "광복 후에 인재풀이 '친일' 안 한 사람 중에 있었나? 고등교육 받은 사람은 전부 친일파들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닌 게, 민족말살기로 접어들면서 한국어(조선어) 교육까지 금지되고 한국인(식민지 조선인)들은 써먹기 쉬우라고 초등교육 외에는 잘 시켜주지도 않고, 일반인들은 학교 갈 돈은 커녕 먹고 살기도 어렵던 시기에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건 운 좋게도 조상이 조선 시대 양반이라 남겨준 돈이 많았던가, 일제 체제 하에서 일본인들과 부대 끼며 그만한 지위를 만들었던가 둘 중 하나다. 그리고 전자라면 몰라도 후자 쪽은 진짜 친일파랑 선을 긋기가 참 애매했다.
그리고 행정 안정화를 이유로 이런 인사 정책을 감행했다면 적어도 뽑힌 인사들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직무를 수행하게끔 통제하여야 했으나 그러지도 않았고, 그 결과 친일파들이 매국노 짓해서 벌어들인 돈을 유지한 것은 물론이고, 정부에 뿌리를 박고 온갖 종류의 부정부패를 저지르는데도 제지할 수단이 마땅치 않은 사태에까지 치닫게 되었다. 참고로 이건 식민지배 시대에서 독립한 수많은 독립국들의 가장 대표적인 국가막장루트였다. 농담이 아니라 구 열강들이 배상금이나 독립지원금이랍시고 주는 돈이 국가 발전이 아니라 부패한 놈들 주머니에 들어가면서 독재자와 그 측근들은 호화저택에서 수영장까지 짓고 지내는데, 옆에서는 국민들이 굶어죽어나가고 있던 나라가 한둘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해, 행정상 필요하다는 이유를 대며 친일파를 등용해놓고는, 그들을 통제하기는 커녕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다니게 내버려둬서 이승만 정부의 부패상을 만들어낸 거다.
거기다 독립운동가 250명을 때려잡았던 일제 관동군 밀정 출신 이종형 같은 악질 친일파들은 반민특위가 결성되자 '망민법'이라고 대차게 까고 '반공집회'를 열면서 자신들이 '반공투사이자, 애국자'라는 등 정신승리질하면서 다녔다. 특히 이종형은 '반민 특위 조사관들 중에도 친일 경력자들이 있다'라는 등 유언비어들을 퍼뜨려 여론조작하는 등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승만이 한민당과 사이가 벌어져서 갈라진 시기, 즉 이승만의 친위 세력(주로 족청 계열)이 뒷날 1952년 자유당을 결성하고 자유당의 반대 세력이 민주당(한민당▷민국당▷민주당)을 결성한 후에 이승만은 지속적으로 민주당(1955년)은 친일 세력이 집권한 정당이므로 민족정기를 위해서 찍어주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유당이나 민주당이나 둘다 독립운동가 출신과 친일파 출신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자유당이나 군과 경찰 내의 일제 경력자들의 일제 부역 행위에 대해선 함구하는 자세를 보여왔다.
그 외에 반민특위가 돈을 뜯으려고 했다든가, 죄 없는 사람에게도 적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의 근거는 친일파 재산 몰수와 이들이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것. 친일파 재산 몰수야 반민법에 따른 것이고 보석으로 풀려난 거는 당시 친일파들이 가지고 있던 경찰 빽으로 풀려난 건데 그걸 돈 뜯으려고 만들었다는 것의 근거로 활용한다. 실로 훌륭한 인과의 역전이자 정신승리. 의외의 사실로 황옥의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행위를 하였는데 반성하였는지 이 반민특위에 참여가 가능했다.
그 외
반민특위가 입주했던 상공부 특허국 청사는 해산 후, 1963년 국민은행 창립으로 본점이 됐다가 1969년경 신관 건축으로 철거되었다. 1999년부터 민족문제연구소가 빌딩 1층 화단에 반민특위 사무실 터임을 알리는 푯돌(표지석)을 제막했다. 원래는 정문 방향에 세우려 했지만 관계당국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을 의식하며 대로변에 세우지 말아달라고 하자 유치장 구역 터에 세운 것이다. 건물이 리모델링되면서 지하주차장 등지에 두 차례 이전됐고, 2017년에 해당 부지가 마스턴투자운용 및 미국 안젤로 고든 등에 팔려 호텔이 신축되면서 용산구 청파동2가에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존됐다가 대문에 세워졌다.(한겨레 서울&, 노컷뉴스, 프레시안) 과거 열린우리당 시절 김희선의원, 신기남 의원등이 친일파 청산을 부르짖을 때(친일 재산 환수, 진상 규명 등), 이에 반대하는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에서 폭로하여 정작 그들의 부친이 친일파라는 논란이 벌어졌다.
다시 말해 친일파 처벌을 논하는 전통이 반민특위 해산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차라리 반민특위가 존속되면서 공정하게 논쟁했으면 벌어지지 않을 후유증이 이후에도 벌어진 셈이다.
반백 년이 흘러…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시간이 흐른 뒤, 이완용의 후손이 시가 30억 원 가량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소송((2005.03.07 KBS뉴스: 친일파단체인 일진회 총재였던 송병준의 후손이 지난 2002년 자신의 땅이라며 반환소송을 제기. 이 땅은 지난 1996년부터 인천시민들이 미군기지 이전운동을 벌인 끝에 2008년까지 이전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낸 곳. 지난해에는 충정공 민영환의 후손들이 이 땅은 원래 충정공의 땅이었다며 시민들에게 돌려줄 것을 약속."민명기(충정골 민영화의 종손): 1907년, 1908년 당시에 황성신문하고 대한매일신보라는 데서 그 사건을, 송병준이 민영환 선생의 땅을 갈취해간 사건.제기된 친일파 후손들의 재산반환소송은 모두 31건. 그런데 종결된 25건 가운데 절반 가량이 친일파 후손들의 승리로 끝.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서울 북아현동 일대. 시가 30억원 가량의 이 땅은 지난 1997년 이완용의 후손이 반환소송 끝에 되찾다.
경기도 오산시의 한 국유도로를 포함한 700여 평의 땅도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이근호의 후손이 소송제기 되찾는 사건이 발생,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 이에 따라 2004년,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친일행위, 반민족행위에 대한 대가로 부당하게 획득한 재산에 대해 국고로 환수하는 것을 목표로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대표적인 소급입법금지의 예외인데 그 근거로는, 이 법으로 보호되는 공익이 사익보다 크다는 점과 소급입법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일제 부역의 대가로 받은 재산은 법적으로 보호해주는 것도 공익에 어긋나고 대한민국이 이런 법을 만들 게 뻔하다는 걸 국민들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로 "저놈 조상이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재산을 싹 빼앗아서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나눠주자!" 뭐 이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즉, 어떤 친일파의 후손이 제 아무리 재산이 많다 한들, 그것이 친일행위의 대가성으로 받은 재산이라는 근거가 없는 이상 친일재산조사위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친일행위의 대가성으로 받은 재산에 나중에 재산을 불렸더라도 추가된 재산은 몰수하지 않는다. 즉, 이 위원회는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얻지 못할 것을 얻은 사례에 한해서만 조사했던 것. 마찬가지 맥락에서 개인이 열심히 노력하여 축적한 재산 역시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한다.
둘째로, "당신 재산은 친일의 대가성으로 받은 거니까 무조건 토해내시오" 도 아니라는 것이다. 조사 결과 정말로 친일행위의 대가로 받은 재산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이 사실을 소유주에게 통지함과 함께 이의신청 및 행정소송을 할 기회를 보장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기각, 반영 등의 결론이 나오면 다시 해당인에게 재통지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를 위해 친일재산조사위는 행정부 외에도 사법부 및 숱한 유관기관들의 협조와 전문인력 파견을 받아서 진행했던 상당한 대규모 프로젝트가 되었다.
친일재산조사위는 한계점도 명확했는데, 불과 4년 동안만 유지되었으며 따라서 친일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그것도 정권이 바뀌면서 뒷심이 많이 빠지기도 했다. 또한, 위에서 설명했듯 행정소송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준 결과, 당사자들의 빗발치는 소송 때문에 정상적인 조사업무가 매우 지장을 받았다고 한다. 시간적으로 대략 6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소유관계도 불명확해진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한계점. 제3자에게 팔렸을 경우에는 제3자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판매자에게 판매대금을 요구하는 부당이익반환청구소송을 했다고 한다. 그나마 이것도 21세기의 현대화된 전산 시스템과 디지털화된 가계도 추적, 토지조사, 소유권변동 여부 확인 등의 행정적 첨단기술의 뒷받침이 있었기에 이만큼의 소득이라도 거둘 수 있었던 것.[17] 그러나 그 덕분에 여의도 면적의 1.3배에 달하는 토지(당시 감정시가 2,373억 원)가 국가에 귀속되었다. 또한 일본인 소유로 되어 있었던 토지(당시 공시지가 455억 원) 또한 확인되어 국가에 귀속되었다. 온전하지는 못하지만 이를 통해 나라와 민족을 팔아서 개인의 영달을 꾀했던 사람들을 국가가 잊지 않고 그들에게 책임을 물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친일재산 환수에 대해서는 친일청산 반대론자들도 의외로 반대 여론이 크지 않았다.
이완용 같은 자를 쉴드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2011년 3월 31일. 헌법재판소는 역사적인 결정을 한다. 바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약칭 「친일재산환수법」)1)의 친일 재산 환수 규정에 대해 합헌 결정을 한 것이다. 이 결정은 대한민국의 기원이 3·1운동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으며, 제헌헌법이 국회에 부여한 반민족행위자 처벌 특별법 제정 권한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밝힌 매우 뜻깊은 결정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최악의 친일파로 꼽는 이완용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서고,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이자 정부 전권위원으로서 일본과 한일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한 공로로 백작의 지위뿐 아니라 일제로부터 많은 재산을 하사받는다.
이를 통해 이완용은 당대 조선 최대의 부호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사망하기 전 해인 1925년, 조선총독부 조사에 의하면 이완용의 재산은 3백만 원, 요즘 시세로 환산하면 5백억 원가량으로 추산되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부자는 일제로부터 자작을 하사받은 민영휘로 재산가액이 6천만 원에 달했다. 물론 이는 밝혀진 재산만 집계한 것이므로 감춰지거나 다른 사람 명의로 된 것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이들 친일파의 후손들이 국유 또는 다른 사람 명의로 등기되어 있는 토지에 대한 반환소송을 법원에 제기하기 시작했다.
1997년 서울고등법원은 이완용 후손의 토지반환소송에 대해서 “반민족행위자나 그의 후손이라고 하여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 재산권을 박탈하거나 법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한다. 이 판결로 이완용의 후손은 당시 시가 30억 원 상당의 토지를 반환 받았다.
그러나 이 판결 이후 국민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다. 친일반민족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법원이 보호해 주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그러한 재산은 국가가 환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국민뿐 아니라 사법부 내에서도 비판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우리 법률상으로는 친일재산을 환수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또, 설령 그런 법을 만든다 하더라도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13조 2항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국회는 친일재산 환수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지자 2006년 「친일재산환수법」을 제정하였다.
헌법재판소는 이 법률의 약칭을 ‘친일재산귀속법’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친일재산환수법’으로 부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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