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派獨) 광부·간호사
1960~1970년대 보릿고개 시기에 멀고 먼 타지에 가서 어려운 노동조건하에 외화를 벌어 고국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서사가 지배적이다.
그들이 본인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고, 봉급의 대부분을 고국에 있는 가족에게 매달 송금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몇 년 전 크게 흥행에 성공한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도 ‘파독 광부’로서 겪은 고난과 희생의 서사를 잘 대변하고 있다.
이들만큼 극적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성공 신화와 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그룹이 많지 않기에,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세간의 큰 관심에 비해, 파독 광부에 대한 본격적인 생애사 연구는 거의 없는 편이다. 이에 필자(이유재 튀빙겐대학교 한국학교수)는 독일에 남아 있는 파독 광부 10명에 대한 구술사를 진행한 바 있다.
그들이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본인의 삶은 어떠했을까?
파독 광부의 대다수는 당시 한국에서 처해 있었던 빈곤과 기회의 결핍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돌파구로서 이주를 선택했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은 농촌에서 더 이상 미래를 찾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절대적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수단도 쉽게 찾지 못했다.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가정 형편 때문에 출세의 길로 원만하게 들어서기란 쉽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이나 부자간의 갈등 등으로 인해 어려운 환경에 처하기도 했고, 이런 환경으로 인해 가족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다수의 청년들에게는 군복무가 인생에서 최초로 가족과 단절되는 경험이었다. 동시에 당시 베트남 파병은 하나의 돌파구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베트남 파병은 첫 해외 돈벌이의 경험이었다.
파독 광부들 중에서도 군복무 시기 베트남 파병을 신청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편이다.
파독 광부 중 상당수의 사람들이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문 광고나 친구의 추천으로 파독 광부 프로그램을 선택하는데, 이들은 이미 마음에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군대 제대 후에도 환경이 변한 사례는 거의 없었고, 베트남에서 벌어온 돈을 종자돈으로 활용할 수 있는 사례도 지극히 드물었다.
왜냐하면 아버지나 가족이 이미 그들의 돈을 다른 곳에 다 써버린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경제 개발을 위한 원조 및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파견된 광부, 간호요원 및 기능공을 뜻한다. 한국 정부의 협정에 의한 것 이외에도 민간 알선을 통해 서독으로 파견된 소수의 간호사가 있었다고 한다.
파견 시기와 파견인원은 출처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현재 정부의 공식적인 집계인 2008년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는 1963~1977년 사이 광부 7,936명, 간호요원 11,057명 및 기능공 931명 등 총 18,899명으로 밝히고 있으나, 1963년 이전 주로 민간 알선을 통해 파견된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의 파견은 포함되지 않는다.
1960년대 한국은 이전까지 주로 미국에서 무상원조를 받아오던 상황에서 미국이 서구 경제 회복과 자국 국제수지 악화에 따라 기존의 무상원조를 줄이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다른 서방 국가에 대해서도 경제 지원의 유치를 시도하게 된다.
이는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기 이전부터 진행된 것으로, 서독은 1961년 3월 기술원조협정 체결을 시작으로 정부 차원의 협력이 시작되었으며, 1961년 12월 '한․독 정부간의 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공공과 상업차관 합계 1억 5천만 마르크(당시 환율로 3,700만 달러 상당)의 유상원조를 제공하였다.
한편 한국은 인구 급증으로 인한 실업난에도 처해 있었으며, 전후 부흥에 의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서독의 수요와 맞는 상황이었다.
5.16 군사정변 이전에는 대한석탄공사가 지멘스와 광부 송출 각서를 맺었다가 쿠데타로 흐지부지된 바도 있다.
그러나 서독 광산업계가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면서 1962년 기업별로 인력 유치 의사를 밝히며 서독 정부를 압박하고 1963년 5월에 공식적으로 서독 노동부 차원의 유치 의사가 전달되면서 1963년 12월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한․독 정부 간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광부와 달리 간호인력(간호사, 간호보조원)은 1963년에 정부가 파견하기 이전인 1950년대부터 이미 민간에서 파견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서독의 고도성장으로 간호 인력이 부족하자 마인츠 대학교 병원에 재직하던 이수길 박사를 비롯한 한국계 의사들이나 독일 종교인들의 주선으로 1950년대부터 간호사 송출이 시작되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오히려 주독대사관이 가뜩이나 광부들이 대거 들어온 통에 관리가 어렵다고 간호사 파송을 반대할 정도로 미온적이었으나 1966년 광부 송출을 전담하던 한국해외개발공사가 이수길과 업무 계약을 맺었고 1969년에는 독일병원협회와 협정을 맺어 파송이 진행되었다.
다만 1972년을 정점으로 간호인력 파송은 감소하는데, 이는 간호인력 상당수가 계약기간을 어기고 이탈하여 미국, 캐나다 등지로 이주하는 문제가 있었고 또한 서독으로 파견된 인력은 곧 한국의 의료 공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후 1973년 서독 정부가 외국인 노동력 도입 중지 방침을 내림에 따라 유예를 거쳐 간호 인력은 1976년, 광부는 1977년 파송이 종료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서독이 차관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한국 측의 지급보증이 불가능하여 파독 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잡는 방식으로 해결했다는 통념이 있는데, 이하의 근거를 볼 때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서독 정부의 대한 차관은 1961년 의정서에 의한 1억 5천만 마르크와 1964년 차관협정에 의한 1억 5,900만 마르크가 있는데(이 중 정부 차관은 각각 7,500만, 5,400만 마르크) 광부 파독 협상은 1963년에 있었다.
정부의 간호사 파견은 1966년부터이며, 서독 정부와의 협정에 의한 파견은 1969년이다.
물론 양 조약문에 광부 임금을 담보로 잡는 문항은 없으며, 1964년(재정)과 1967년(상업) 차관협정에는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은행의 지불보증만이 명기되어 있다.
광부 파독 협정에 규정된 인원은 1969년 개정 전까지 총인원 1천명인데, 이들의 임금은 서독의 차관을 보증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이다.
1966년 기준 파독 광부의 평균 임금은 600마르크 수준인데, 1천명이 10년치 임금을 다 모아도 7,200만 마르크밖에 되지 않는다.
광부 임금을 담보로 잡을 절차가 정해져 있지 않다. 당시 협상 실무를 맡았던 백영훈 중앙대학교 교수(당시 직함)의 회고에서는 광부의 월급 1달분을 코메르츠방크에 예치한 것을 담보로 취급했다고 하는데, 파독 근로자의 임금으로는 상업차관은 제쳐두고 정부 재정차관만 충당하려 해도 20년분은 모아야 한다.
또한 회고에서는 광부 5천명, 간호사 2천명을 언급하고 있는데, 실제 협정으로 합의하고 파견한 근로자에 비해 매우 많은 수이다.
아마도 협상 과정에서 아이디어로서 제시된 적은 있을 수 있으나, 실제 담보 기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실제로는 파독 근로자의 월급이 코메르츠방크에 예치는커녕 거쳐가지도 않았다.
당시 상업차관(서독 정부의 보증 형식)의 실무를 담당한 독일재건은행(KfW)은, 공식 서한에서 "한국 차관 사업이 파독 근로자 사업과 무관하다"고 밝히고 있다.
파견 조건으로 3년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없고, 적금과 함께 1달 봉급의 일정액은 반드시 송금해야 한다는 계약조건을 달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불확실하다.
조사에 의하면 송금을 전혀 안 하는 경우도 많이 존재했다. ( 과거사정리위원회 '파독 광부/간호사의 한국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조사 자료(2008. 8. 5) ) 물론 파독 노동자들이 간 것이 정부 주도이든 아니든 간에 경제발전에 어느정도 기여한 것은 확실하다.
「파독광부 30년사」에 따르면, 1963년에서 1979년까지 독일에서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작업 중에 사망한 광부가 27명, 자살한 광부가 4명, 자살한 간호사가 19명이었다.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정해본 교수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1967년 당시 서독 파견 간호사들이 보내온 송금액을 한국 상품수출액의 35.9%, 무역외수입의 30.6%를 차지했다"면서, "이들이야말로 한국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게 도운 일등공신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상기 과거사정리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1965~1967년 3년간 서독 근로자의 송금액은 총수출 대비 1.6~1.9%로 정해본의 발언과는 격차가 크다. 이는 정해본이 전체 본국 송금액과 혼동했거나 혹은 다른 기사에서 정해본의 발언이 잘못 인용된 것이다.
그 당시 파독 간호사로 재직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기본 간호(대변 치우고 식사수발 등)가 주요 업무였다고 하며 무시와 차별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한다.
파독 가서 당장 IV 꽂고 각종 처치 업무를 담당했던 것이 아니었다. 광부 역시도 지하 1,000m가 넘는 석탄광산 막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더구나 이렇게 중노동을 한 사람들의 절대다수가 광부가 아니라 고졸, 현재의 대졸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었고 심지어 대학까지 나온 인텔리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런 지원자들은 선발 심사전형에서 떨어질까 싶어 일부러 손에 연탄 가루를 묻히는 등 험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영화 <국제시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며 떼를 쓴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더했다.
왜 이렇게 고학력자들이 많았냐면 정부에서 정한 자격 요건부터 중졸 이상으로 제한했고,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소위 빽있는 사람들이 유리했다.
당연히 빽이 있는 사람들이 좋은 학력을 가질 확률도 높았다. 이렇게 온 인텔리 출신 광부들은 일은 서툴렀을지언정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오히려 실제 광부 출신들보다 독일 생활에 잘 적응했고, 광부 일이 끝난 뒤 타 직업으로 전직하여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대 환자를 포기하지 않고 악바리 같은 집념을 보여주면서 독일에 남게 된 한국 간호사도 있다.
또한 이들의 노고로 지금도 한국 간호사, 한국 간호조무사 자격이 있으면 독일에서 해외취업하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계약기간 이후에는 대다수 간호사들이 계약을 연장하고 독일에서 살게 되었다.
광부들 가운데 60% 가량도 독일에 남아(이들의 1/3은 뒷날 미국으로 이민), 유럽 한인사회의 중심을 이루었다.
1960년대는 합법적인 이민이 시작된 때였기 때문에, 이 기회에 독일 및 타 국가로 이민하는 인구가 늘던 시기였다.
한편 독일 사회의 파독 근로자들 대접은 모범적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어느 나라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대접은 시궁창이기 쉬운데, 독일에서 근로한 한국인 광부나 간호사들은 해외생활에서 오는 향수병이나 은근한 차별 외엔 큰 핍박을 받지 않았다.
더구나 한국인들은 범죄나 부정에 연루되는 일도 적었기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크게 배척받을 까닭도 없었다.
당시 국가주의, 전체주의, 집단주의적 사상이 훨씬 강할 때라 자기들의 잘못이 곧 한국 전체의 잘못으로 평가받는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에 이들로써는 처신을 잘해야 했다.
휴일 외출할 때도 타 국가 노동자들은 평소 입던대로 후줄근한 차림으로 외출을 나갔지만 한국인 노동자들은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갈 정도였으니.
파독 광부들은 광부 일을 할 때 들었던 '글뤽 아우프(glück auf)'라는 말을 자신들의 모토로 쓰고 있으며, 이 인사말에서 이름을 따온 '글뤽아우프 복지회'라는 단체도 있다.
독일 광부들의 전통적인 인사말로, 광산에서 일할 때 사고가 생기지 않고 무사히 작업을 마치길 바라는 뜻의 인사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살아서 만납시다'로 번역되었다.
파독 근로자 중 노후는 고국에서 보내고 싶어 독일인 배우자와 함께 귀국한 분도 많은데, 이분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 남해독일마을이다.
파독역사전시관도 이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40여 채가 넘으며 이 중 절반은 민박업을 겸하고 있다. 남해군청이 땅을 분양할 때 반드시 파독 근로자이거나 그들의 가족일 것, 독일식으로 집을 지을 것, 민박업 외에는 불가 등 엄격하게 기준을 만들었기 때문에 동네가 무척 깔끔한 편이다.
독일주택 외에도 독일식 광장도 있고 독일 관련 행사도 열려서 독일 문화 체험을 할 수 있다.
초기 에피소드로 1964년 박정희 대통령 서독 공식 방문 당시 파독 노동자 위문 건이 있다.
나라 사정으로 외국 순방 한번 하기 어려운 대통령과 타지에 취업 나온 노동자의 만남인 만큼 감동이 없지 않겠으나, 2000년대 들어와 개발독재 향수 정서가 부각되면서 많이 부풀려져(박정희와 독일 대통령이 함께 울면서 광부들을 껴안았다든가) 유포되고 있다.
한편 근로자 파독이 박정희 재임기 경제개발의 아이콘과 같이 부각되는 것과 상반되게 독일 근무 후 현지 정착하지 않고 귀국한 노동자들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심지어 간호사들이 몸을 팔고 다닌다는 등의 헛소문이 돌아 명예가 실추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파독 광부 위문시 약속한 재취업 주선 등의 건의사항이 묵살된 것은 물론이고, 현지 사망자의 유해를 형편없이 처리하고 심리 상담 등 관리가 소홀하여 자살자가 나오기에 이른다.
2020년 파독 근로자의 예우를 목적으로 한 "파독 광부ㆍ간호사ㆍ간호조무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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