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계(花王誡)-薛聰(설총)
神文大王以仲夏之月(신문대왕이중하지월) : 신문대왕이 한여름에
處高明之室(처고명지실) : 높고 밝은 방에 있으면서
顧謂聰曰(고위총왈) : 설총을 돌아보아 말하기를
今日宿雨初歇(금일숙우초헐) : “오늘은 오래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개고
薰風微凉(훈풍미량) : 더운 바람이 조금 시원하니
雖有珍饌哀音(수유진찬애음) : 비록 맛있는 음식과 애절한 음악이 있다할지라도
不如高談善謔(부여고담선학) : 고상한 이야기와 재미있는 우스개로
以舒伊鬱(이서이울) :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만 못하리라.
吾子必有異聞(오자필유이문) : 그대는 반드시 색다른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니
盍爲我陳之(합위아진지) : 어찌 나를 위하여 들려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聰曰(총왈) : 설총이 말하기를
唯臣聞昔花王之始來也(유신문석화왕지시래야) :
“그렇습니다, 신이 들으니 옛날에 화왕이 처음 왔을 때
植之以香園(식지이향원) : 향기로운 꽃동산에 이를 심고
護之以翠幕(호지이취막) :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當三春而發艶(당삼춘이발염) : 봄날이 되어 요염하게 피어나
凌百花而獨出(릉백화이독출) :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於是自邇及遐(어시자이급하) :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艶艶之靈(염염지령) : 요염한 넋
夭夭之英(요요지영) : 어여쁜 꽃들이
無不奔走上謁(무불분주상알) : 빠짐없이 달려와서 뵈었는데
唯恐不及(유공불급) : 오직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忽有一佳人(홀유일가인) : 홀연히 한 미인이
朱顔玉齒(주안옥치) :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鮮粧靚服(선장정복) :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伶俜而來(령빙이래) : 간들간들 걸어 와서
綽約而前曰(작약이전왈) :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妾履雪白之沙汀(첩리설백지사정) :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對鏡淸之海(대경청지해) :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而沐春雨以去垢(이목춘우이거구) :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快淸風而自適(쾌청풍이자적) :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其名曰薔薇(기명왈장미) :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聞王之令德(문왕지령덕) :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期薦枕於香帷(기천침어향유) :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王其容我乎(왕기용아호) :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又有一丈夫(우유일장부) : 또 한 장부가
布衣韋帶(포의위대) : 베옷에 가죽 띠를 매고
戴白持杖(대백지장) : 허연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龍鍾而步(용종이보) : 힘없는 걸음으로
傴僂而來曰(구루이래왈) : 구부정하게 걸어와서 말했습니다.
僕在京城之外(복재경성지외) : “저는 서울 성밖의
居大道之旁 (居大道之旁 ) : 한길 가에 살고 있습니다.
下臨蒼茫之野景(하임창망지야경) : 아래로는 푸르고 넓은 들판의 경치를 내려다보고
上倚嵯峨之山色(상의차아지산색) : 위로는 우뚝 솟은 산의 빛에 의지하고 있는데
其名曰白頭翁(기명왈백두옹) : 이름은 ‘할미꽃’이라고 합니다.
竊謂(절위) : 가만히 생각건대
左右供給雖足膏粱以充腸(좌우공급수족고량이충장) :
‘비록 좌우의 공급이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茶酒以淸神(다주이청신) :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할지라도
巾衍儲藏(건연저장) : 상자 속에 가득 감추어두어도
須有良藥以補氣(수유양약이보기) : 반드시 좋은 약이 있어서 기운을 돋우고
惡石以蠲毒(오석이견독) : 극약으로 병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故曰(고왈) : 그러므로
雖有絲麻(수유사마) : 비록 생사와 삼베가 있다 해도
無棄菅蒯(무기관괴) : 왕골과 띠풀을 버리지 않아서
凡百君子(범백군자) : 모든 군자들은
無不代匱(무부대궤) : 결핍에 대비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오니
不識王亦有意乎(부식왕역유의호) :
왕께서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고 하니
或曰(혹왈) : 어떤 이가 말하기를
二者之來(이자지래) : “두 명이 왔는데
何取何捨(하취하사) : 어느 쪽을 취하고 어느 쪽을 버리시겠습니까?” 하니
花王曰(화왕왈) : 화왕이
丈夫之言(장부지언) : “장부의 말도
亦有道理(역유도리) : 또한 일리가 있지만
而佳人難得(이가인난득) : 어여쁜 여자는 얻기가 어려운 것이니
將如之何(장여지하) :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할까?“라고 말했습니다.
丈夫進而言曰(장부진이언왈) : 장부가 나아가서 말하기를
吾謂王聰明識理義(오위왕총명식리의) : “저는 대왕이 총명하여 사리를 잘 알 줄 알고
故來焉耳(고래언이) : 그래서 왔을 뿐인데
今則非也(금칙비야) : 지금 보니 그렇지 않군요.
凡爲君者(범위군자) : 무릇 임금이 된 사람치고
鮮不親近邪侫(선부친근사녕) : 간사한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疏遠正直(소원정직) :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
是以孟軻不遇以終身(시이맹가부우이종신) : 이 때문에 맹가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며
馮唐郞潛而皓首(풍당랑잠이호수) : 풍당은 낭서(郎署)에 잠기어 흰 머리가 되었습니다.
自古如此(자고여차) : 옛날부터 이러하였거늘
吾其柰何(오기내하) : ‘저인들 그것을 어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니
花王曰(화왕왈) : 화왕이
吾過矣吾過矣(오과의오과의) : ‘내가 잘못했노라, 내가 잘못했노라.’라고 했습니다.”
於是王愁然作色曰(어시왕수연작색왈) : 이에 왕이 서운한 듯이 안색을 바로 하며 말하기를
子之寓言誠有深志(자지우언성유심지) :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 있도다.
請書之以謂王者之戒(청서지이위왕자지계) : 기록해두어 왕의 경계로 삼게 하라.” 하고
遂擢聰以高秩(수탁총이고질) : 마침내 설총을 높은 관직에 발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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