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3월 26일 대구직할시(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5명
(우철원(禹喆元): 1979년생. 초교 6학년. 조호연(趙浩衍): 1980년생. 초교 5학년. 김영규(金榮奎): 1981년생. 초교 4학년. 박찬인(朴燦印): 1982년생. 초교 3학년. 김종식(金鐘植): 1983년생. 초교 3학년) 의 국민학생들이 도롱뇽알을 주우러 인근 와룡산에 올라가서 동반 실종되었다가 실종된 지 11년 6개월이 지난 2002년 9월 26일에 백골로 발견된 사건이며 이 사건은 5명을 한꺼번에 살해한 범행 수법, 윤곽조차 잡지 못한 용의자, 불확실한 살해 동기, 의문점이 많은 미제사건이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마을 사람들이 모두 훤히 아는 인근 산이었다는 것과 흔적이나 범인의 정체, 살해 수법 등 모든 것이 수수께끼와 같고 5명이나 되는 초등학교 3~6학년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을 전부 살해하고 암매장하는 식의 사건은 국내외 막론하고 비슷한 유형의 사례조차 찾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더 의혹이 들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hl2tci
정식 사건명은 대구 성서초등학교 학생 실종 사건이었는데 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채집하려고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되었는데
도롱뇽이 개구리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나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 혹은 대표적으로 개구리 소년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 당일 5명의 아이들이 가는 길에 만난 친구에게는 탄두를 주우러 간다 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와룡산에 있었던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에서 흘린 탄피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도 있다.
2002년 9월 26일에 아이들의 시신들이 발견되면서 대구 성서초등학교 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변경되었다.
1991년 3월 26일은 지방자치제가 다시 시행된 이후 최초로 전국 기초자치단체 의원을 뽑는 지방선거일 임시공휴일이었다.
아침 8시 무렵 성서국민학교(現 대구성서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5명과 김태룡 군. 총 6명의 어린이들이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조 군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놀라' 라는 핀잔을 들은 아이들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인근의 와룡산으로 향했다.
6명 가운데 김태룡 군은 같이 따라가려다가 '위험하니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을 떠올렸고 아침밥도 먹을 겸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조호연 군의 형 조무연 군(당시 중학교 1학년)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라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9시쯤,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면서 시내에 나가 파출부 일을 하던 김순남아주머니는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려고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 쪽으로 올라가는 5명의 아이들을 지나쳤다.
*그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 등의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한다.
*우철원 군과 같은 반 학생이었던 김경열 군과 이태석 군(1979년생)이 "12시쯤 아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봤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점심 먹기 직전 우철원 군이 아이들과 산 쪽으로 가길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와룡산 기슭에 살던 김이수 아주머니는 "14시 무렵에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봤다"고 증언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함승훈 군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사건 당일 개구리 소년들과 비슷한 시간대에 와룡산에 갔는데 "골짜기 쪽에서 다급하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이후 유골이 발견된 2002년에 대학생이 된 함승훈은 다시 이 방송의 인터뷰에 응했는데 "당시 비명소리가 들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절대 잊지 못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와룡산에서 5명의 아이들이 피살된 게 분명하지만 당시 경찰은 이 주장을 거의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김종식의 아버지 김철규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함승훈의 인터뷰를 계속 되뇌며 아들 걱정만 했다고 한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아파트에서 살던 그는 이날 다른 무리의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가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11시 30분쯤 무렵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소리를 두 차례 들었는데 훗날 함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고 밝혔다.
*김종식 군의 어머니 허도선 씨와 김영규 군의 어머니 최경희 씨는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가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면 야단이나 쳐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점심 때가 훨씬 지나서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들은 18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19시 50분에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였다.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1991년 3월 26일 서구 중리동에 위치했던 가축 도살장(現 퀸스로드 쇼핑몰) 인근 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들이 버스를 같이 타는 걸 목격했다는 여성의 제보가 있었으나 묵살되었다고 한다.
사건 초기 경찰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하고 앵벌이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엉뚱한 수사 방향을 정하였다.
5명 아이들이 모두 집안 사정이 부유하진 않았어도 별다른 문제 없이 화목했기 때문에 가출할 만한 사유가 없었으며 실종된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이던 우철원 군이 13세, 나머지 3명은 10~12살이라 10대 초반밖에 안되고, 막내인 김종식 군은 10살도 안된 9살로 집단 가출이란 엄청난 일을 벌이기엔 나이가 너무 어린 아이들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늦추는 계기가 되었다.
남은 유력한 가능성은 유괴 아니면 가출인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일단 유괴범으로부터 오는 협박 전화가 없었을뿐더러 애초에 돈을 노린 유괴면 한명을 납치하지, 5명이나 납치하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만약 개인이 아니라 앵벌이 조직의 짓이라면 굳이 외딴 마을에 찾아와 아이 5명을 납치할 가능성도 낮았다.
번잡한 도시라면 아이 1명이 갑자기 사라져도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이 얼마 살지 않던 시골 마을에서는 순식간에 마을 전체가 난리가 나기 때문이다.
당시 시골에는 '골목대장'의 말을 부모님의 말보다 더 듣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초등학교 6학년 '형님'의 말이라면 아이들이 이끌려 갈 수도 있기에 호기심에 타지에 놀러갔다가 범죄에 연루된 게 아니냐는 추측에 의거해 초기 수사 방향이 정해졌고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정체불명 살인마가 일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추측에는 누구도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았다.
이 사건이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5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군과 경찰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초반에는 와룡산 서남쪽과 연못만 수색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가 7월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산하에 수사본부가 차려져 총 25개조에 1조당 25명으로 구성됐고 이곡동 성서파출소 옆 건물에 둥지를 틀었다.
10월 24일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을 겸하면서 대구지역 군경 수천명이 탐침봉까지 들고 와룡산 전체를 뒤졌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1996년 해체 전까지 5년 간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산악수색 48차와 일제 검문검색 43차 외에 복지시설 및 종교단체 1천여개소, 가정집 11,000세대를 각각 수색했고 성서초 졸업생 1,800명과 공단 노동자 19,000여명에게도 수소문해 제보만 570여건이나 됐지만 전부 허사였다.
경북 구미에선 목격 제보가 들어왔고 부산에서 앵벌이로 커피를 팔거나 새우잡이배에 납치됐다는 등의 제보도 나왔으나 찾지 못했으며 허위제보도 잇따랐는데 "아이들은 내가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 OO로 찾아와라" 같은 장난전화가 빗발쳤고 실종 어린이들 중 한 명이라는 장난전화를 하면서 부모를 놀리는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신이상 증세를 앓던 어린이가 "내가 개구리 소년"이라고 주장하고 떼를 쓰며 난동을 부리거나 부모가 자녀에게 장난전화를 시키기도 하는 등 부모와 조사하던 경찰들을 허탈하게 하여 수사에 혼선이 생겼다.
아이들이 혹시 마을 인근 저수지에 빠져 죽었을 가능성도 있어서 경찰들이 양수기를 동원해 저수지의 물을 죄다 빼내 보기도 했고,
전국에서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도 조사했으며 외딴 섬이나 무인도에 아이들이 납치되었다는 유언비어도 퍼져서 경찰들이 그런 섬들까지 다 찾아다니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다했다.
다섯 아버지들은 직접 트럭을 한 대 마련해 전국을 헤매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다녔다.
다행히 어떻게든 이 사건의 해결을 바라는 전 국민의 강력한 지지 덕분에 많은 기업들도 개구리 소년들을 찾기 위해 전력을 다해 도움을 주었다.
전화카드, 담배갑, 인기 만화책, 비디오테이프, 우유, 과자 등 갖가지 상품 포장에 개구리 소년과 관련된 광고가 인쇄되었다.
특히 영남의 향토기업이나 다름없는 포항제철은 대구지방경찰청에 현상금 1,000만원을 기탁해 가며 전단 80,000장을 임직원과 고객들에게 뿌렸고 한진그룹도 대한항공과 한진고속 승객 및 임직원, 고객들을 상대로 100만장을 뿌렸다.
럭키도 수퍼타이 등 전 제품에 실종자들의 사진을 붙이고 수퍼타이 CF '미아찾기 캠페인'을 통해 홍보했으며 국민신용카드도 1991년 11~12월까지 대금청구명세서를 담을 우편봉투에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를 실었다.
또 대구 연고 프로야구단 삼성 라이온즈 역시 '개구리 소년을 부모의 품으로'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 걸고 소년들을 찾기 위한 노력을 보탰다.
부산택시조합도 1992년 달력에 사진을 실었다.
제일제당, 기아자동차(現 기아), 남양산업, 남양알로에, 대도제약 등 여러 기업이 사보에 사진 및 명단을 실어주었다.
또 방송에서도 MBC 《생방송 여론광장》- '얘들아, 어디있니?' 편(1991년 5월 4일 방영분)을 비롯해 SBS 《그것이 알고싶다》(1993년 3월 21일 방영분), KBS1의 《사건 25시》(1993년 6월 26일 방영분) 등에서 심층 분석하기도 했다.
창작물로도 노래,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1992년 11월 개봉), 동화책《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이기창 저, 대교출판)》등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1970년대에 남파 간첩을 훈련시키는 교관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북한 공작원이 남한 고교생 등을 납치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 공작원의 납치설, UFO 납치설까지도 떠돌았다.
인류가 아니라 어느 별의 외계인이라서 외계인이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 심지어 "나병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면서 경찰이 나환자촌까지 가서 수색하려다 한센인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심리학자와 심령술사, 역술인들 역시 이 대열에 동참하면서 경주 왕릉 매장설, 김종식 군 자택 매장설, 고속도로 교각 매장설 등 온갖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이러한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찾지 못했고 결국 영구 미제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돌며 자식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 부모들의 눈물겨운 노력도 허사가 되어 갔다.
1993년 1월에 실종자 부모들이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를 냈지만 9월에는 결국 직접 수색을 포기했다.
1995년에 경찰은 컴퓨터로 만들어진 아이들이 자란 후의 얼굴을 예상한 가상 몽타주를 실은 전단을 20,000여장이나 뿌렸지만,
끝내 1996년에는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관련 업무를 달서경찰서 수사전담반으로 넘김에 따라 경찰서장이 본부장을 맡고 수사인력도 총 10명으로 줄었다.
1997년 8월에는 40대 여성이 법정에서 자신이 개구리 소년을 유인 후 암매장했다고 밝혔지만 허위 진술로 밝혀졌다.
사건 발생 약 10년 후인 2001년 7월에 전남 신안군 지도면 증도의 한 염전에서도 제보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급파됐으나 허위로 판명났고 그해 10월 22일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슬픔을 술로 달래며 살던 게 화근이 되어 간암으로 사망해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건 이후 다른 부모들과 함께 아이들을 찾으러 다니던 모습과 1993년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 인터뷰에 응했던 모습을 보면 본래 그는 매우 건장한 체격이었다.
젊었을 때 유도를 해서 매우 건강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간암에 걸려 죽을 정도로 폭음을 했으니 아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게 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알 수 있다.
유골 발굴 전인 2002년 9월 한 남성이 "아이들이 묻힌 곳을 알고 있다"라며 거짓 제보를 했는데 하필 유골 발견 전날에 들어온 제보였다.
경찰은 이 남성의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수배했는데 이 남성은 10여년 전 권투해서 돈을 벌겠다며 집을 나갔다가 머리를 다쳐 정신이상 상태였으며 서울역과 명동성당 등지를 전전하던 노숙자였다. (기자협회보, 연합뉴스)
당시의 어수선한 시국을 반전시키기 위해 노태우 정부가 강경대와 김기설 사건 등 아이들을 죽여 암매장한 공작 사건이라고도 했다
세간의 관심이 거의 사라졌던 2002년 9월 26일,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시민 오우근씨에 의해 와룡산 기슭에서 실종자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실종으로부터 11년 6개월 만이었다.
이곳은 사건 당시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 부지였으며 50사단은 이미 1994년에 북구로 이전했다.
실종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불미골을 중심으로 수색하였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여 벌어진 실책이다.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이 있어서 탄피가 많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랐다는 제보도 잇따르면서 일각에서는 유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되었다.
발굴 이틀 후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다시 구성해 의욕을 보이는 듯했으나 경찰들은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성급한 수사를 해 빈축을 샀다.
대구달서경찰서는 시신 발견 신고를 받고 출동한다.
경찰은 현장보존도 하지 않고 과학수사대도 부르지 않은 채 곡괭이 등을 이용해 땅을 파헤쳐서 현장을 훼손시켰고
부검도, 현장감식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파헤쳐낸 유골만 봤으면서도 "타살 흔적은 거의 없는 거 같다." "조난을 당했고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이다"라고 주장해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여기서 경찰은 사건 현장을 잘못 건드려서 크게 훼손시킨 것으로 드러났고 보도된 영상을 보면 의경들이 삽질을 하고 형사들이 유골을 함부로 마대에 정리해 담아놨다.
이를 본 서울대학교 법의학과의 이윤성 교수가 할 말을 잃었을 정도. 시신 중 감식반의 현장 감식을 받은 시신은 단 1구뿐이라 했고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여러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가장 유력한 범행도구는 용접 후 슬래그를 깨거나 긁어내는 데 사용하는 용접망치, 일명 깡깡이 망치다.
2003년에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했다.
2005년 11월 28일에 유족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촉구했지만
2006년 3월 26일 결국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며
2015년엔 내사마저 종결됐기에 이제는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처벌할 수 없다.
공소시효를 무시하고 수사가 가능한 경우도 존재하긴 하지만 범인에 대한 더 이상의 단서가 없어서 현재까지도 범인 또는 범인을 아는 사람이 자수하지 않는 이상 잡힐 가능성조차 안 보이며 설령 다른 사건으로 인해 이미 수감되었는데 그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져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중매체에서
1991년 11월에 이기창 작가가 이 사건을 다룬 어린이 추리소설 《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
1992년 11월 28일에 조금환 감독이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해 개봉.
2003년에 발매된 MC 스나이퍼 2집 사건을 다룬 곡 《개구리 소년 (개구리 소년의 유가족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2005년에 김가원 前 교수 소설 《아이들은 산에 가지 않았다.》
● 왜 유골이 늦게 발견되었나?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많은 군인과 경찰, 그 밖에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총 동원되어 연간 30만명이 와룡산을 수색했는데 장장 11년 6개월이 지나고서야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와룡산은 높이 300m 정도의 야산에 불과하고 산이 가파른 것도 아니라 완만한 산인 데다 정상까지 올라가보면 그리 높지도 않고 동네 주민들이 산책 코스로 올라가는 수준밖에 안 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다른 장소에서 피살된 아이들이 나중에 잠잠해지자 와룡산에 암매장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법의학자들이나 범죄심리학자들의 분석은 "아이들이 살해되고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매장되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와룡산은 야산이지만 아이들이 놀러갔다고 알려진 서남쪽의 '불미골'이 아니라 당시 존재하던 저수지에서 반대쪽 능선을 지난 '새방골'에서 발견되었고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지점은 와룡산에서도 골이 가장 깊고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의 분석에 따르면 1990년대 초를 기준으로 한국의 야산들 대부분이 녹화사업 전이라 민둥산에 가까웠고 와룡산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인근은 군 사격 훈련장이 있기 때문에 성인들도 발길이 뜸하였고 그만큼 수풀이 우거진 지점이었고 비가 내리면 실개천 같은 게 형성되는 지점이기도 했다고 한다.
11년이 지나서야 유골이 발견된 이유에 대해선 사건 당일 저녁에 비가 내린 탓에 아이들의 흔적이 모두 빗물에 씻겨 내려간 탓이라는 지적이 있다.
그리고 발견 당시 쉽게 눈에 띈 것은 그 해 여름 폭우로 살짝 덮인 흙 등이 씻겨 내려갔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살고 있던 지점에서 산 반대편까지 간 것에 대해 아이들의 부모들은 "왜 아이들이 그곳까지 갔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역시 탄피 등을 주우러 갔거나, 범인이 일부러 아이들에게 "탄피 등이 많은 곳을 알려주겠다"고 유인했거나 아니면 정말 다짜고짜 아이들을 외진 곳까지 끌고 갔을 것 등등의 분석이 나왔다.
당시 사건을 조사하던 김재산 국민일보 기자에 따르면 경찰은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던 불미골을 중심으로 수색했는데 정작 유골이 발견된 것은 새방골이었다.
아이들이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오판한 것이 수많은 인력과 돈을 낭비하게 만든 것은 물론, 아이들까지 늦게 발견하게 하는 데 일조한 셈이다.
아무튼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와룡산에 대한 수색은 의외로 그리 철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여론에서도 살인이 아니라 실종, 납치, 유괴 등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당시는 살인 사건이라고 해 봐야 원한 혹은 치정과 연관된 사건이 대다수였던 데다 아이들을 범죄에 이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유괴였기 때문이다.
위에서 상술한 바대로 부모들의 성화를 못 견뎌 가출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앞서의 증언들처럼 와룡산에서 어린이들이 살해당한 후 암매장당할 가능성은 제기되지 않았고 암매장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범인이 1명이었다면 2~3명의 아이는 손으로 붙잡는다고 해도 다른 2~3명은 달아나거나 돌을 던지며 반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범행 당시의 정황을 추측하기 어렵다.
●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실험을 통해서 '어른 1명이 5명의 아이를 붙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추측했다.
게다가 이 5명은 깡통이나 작대기 등을 들고 산과 들을 매일같이 뛰어다녀서 운동 신경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다.
살해된 아이들 중에는 달리기 육상대회에 나갈 정도로 달리기가 빠른 아이도 있었으며 태권도를 익힌 아이들도 있었다.
또 초등학생들이라곤 하지만 저학년이 아니라 최소 3~6학년생들이고 와룡산을 안방마냥 드나들던 운동신경을 지닌 남학생들인지라 어린이라고 하지만 한두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을 어른 한 명이 모두 다 통제하기는 쉽지 않다.
2011년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 3대 영구 미제 사건 특집에서는 범죄심리학자 박지선 교수의 말을 통해 '아무리 상대가 어린아이라고 해도 5명이나 되면 범죄자의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위축되는 면이 생긴다'는 분석과 범인이 1명이었다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산에 오르거나 일시적으로 한두 명이 떨어져서 놀던 차에 아이들 중 일부를 먼저 발견하였고 순차적으로 살해하였을 가능성도 제시하였다고 한다.
도룡뇽 알을 채집하겠다며 나갔다고 했으니 장소에 도착해 각각에 한 구역을 맡기고 그곳을 찾아보라고 했을 것이고 자연히 자신들에게 맡겨진 구역을 탐색하다가 이들 중 한 명이 우연찮게 범인에게 발견되어 희생된 후 희생자의 행방이 궁금해 찾던 다른 아이가 발견되어 같은 방식으로 희생됐을 가능성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이들 중 가장 힘이 세고 나이가 많은 맏형인 우철원 군은 두개골에 찍힌 상흔만 무려 25군데나 발견됐는데 이는 다른 소년들보다 범인에게 더 맹렬히 저항하다가 본보기로 크게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럼에도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두개골에 찍힌 'ㄷ'자 모양의 상흔들이 흐트러짐 없이 반복적이고 규칙적이며 이는 소년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생긴 외상흔이라고 한다.
가장 막내인 김종식 군의 왼팔이 골절된 것은 범인이 소년들을 뒤에서 붙잡고 오른손으로 흉기를 내려쳤다는 가정 하에 왼팔을 먼저 들어서 막은 것으로 보아 범인은 오른손잡이이며 소년들의 좌측 두개골에 나타난 상흔들만 봐도 우측에서 위아래로 강하게 내려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규 군의 옷소매와 단추는 찢어져 있었으며 강한 물리적 압력에 의한 것으로 매듭 역시 도망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기 위해 묶은 것으로 보인다.
다른 소년들과는 달리 박찬인 군과 조호연 군에게는 특별한 외상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소년들이 차례로 희생된 후 가장 마지막에 남아서 교살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다만 이 같은 의문은 인간이 '공포심에 얼어붙는 동물'이라는 점을 간과했는데, 실제로 성인이라도 눈 앞에서 잔혹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하면 그대로 얼어붙어 저항하거나 도망칠 생각을 못하는 경우가 많은 사건사고를 통해 관찰된다.
당장 최근만 해도 시민을 지켜야 하는 경찰이 테이저건과 실탄으로 무장하고도 흉기난동을 목도하고 겁에 질려 경찰로서 해야하는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채 도주한 사건이 있었으니, 고작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공포에 질려 공황상태에 빠져 달아날 생각도 못했음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것이 알고싶다》를 비롯한 시사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그 외에도 해당 사건에 관심을 기울이는 수많은 이들이 의외로 눈여겨보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어찌저찌 아이들을 살해했다고 쳐도 도대체 어느 세월에 어떻게 매장했냐는 것이다.
이후 이루어진 대대적인 수색작업에 탄로나지 않을 정도로 깊게,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닌 다섯 명이나 매장할 만큼 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채종민을 비롯한 법의학자들은 여러 정황 증거로 보아 아이들이 희생된 직후에 매장된 것으로 추측했다.
결국 이 부분은 이 사건이 후술할 프로파일러들의 의견처럼 '계획성과 우발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는 부분에 힘을 실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일단 아무나 살해하고 매장할 목적으로 삽을 비롯한 도구를 들고 산에 갔으며 그 희생양은 5명의 아이들이었다는 것. 아이들을 살해하고 나서 바로 매장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려면 아무래도 미리 삽을 들고 산에 오르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1993년 3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분에서 이 사건을 심층적으로 다룬 바 있는데 당시 성서국민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함승훈의 인터뷰가 눈길을 끌었다.
사이코패스란 말도 대중적으로 통용되지 않던 때 개념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인식되지 못했던 당시 이유 없이 5명의 어린아이를 죽인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가출 혹은 불량배 집단에게 앵벌이 같은 노동력 갈취 목적으로 납치당했다고 추정하는 게 상식적이었다.
이 사건이 전국적인 화제로 떠오르는 바람에 장난이나 오인 신고 등이 빗발친 탓에 엉뚱한 방향으로 경찰력이 분산되기도 했으나 장난전화들도 유괴범인 척 하거나 실종자 본인인 척 하는 게 대부분이었지 아이들을 죽였다는 것은 입에 담지 않았을 정도다.
사건 이후 몇 개월, 심지어 몇 년이 지나도록 실종 혹은 납치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이 개구리 소년들의 귀가를 기다렸다는 점은 한 번에 다수의 어린이들을 아무 이유 없이 죽인다는 개념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방증한다.
1명이나 2명의 어린이라면 부모나 가족 관련 원한을 동기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실종이나 납치가 흔했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은 탓에 더더욱 그랬을 가능성이 크기도 하다.
그런데 위의 함승훈의 인터뷰는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와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한다.
함승훈은 점심 먹기 전이라는 이유로 11시 반 정도에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했으나 12시쯤 우철원과 같은 반 친구인 김경열과 이태석이 서로 만났다는 증언이 있고 2시쯤 동네 주민인 김이수가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는 상반되는 증언이라도 누군가는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교차검증을 해야 했지만 그 시기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
이 비명이 본드 흡입시 증상 중 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것이 아니라 가해자들이 산에서 본드를 흡입하고 비명을 지른 것이라는 가설도 나왔다.
당시 방송은 아이들의 유골에 드러난 타살 흔적을 바탕으로 살해 도구를 분석하는 데 주력했다.
여러 공구들을 토대로 실험해 본 결과 가장 유력한 살해 도구로 추정되는 것은 용접 후 생기는 찌꺼기를 끊거나 때려서 제거하는 데 쓰이는 용접 망치로, 흔히 깡깡 망치라고 불리는 것이다.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도구지만 공사 현장이나 공장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공구라고 한다. 전기 용접 후에 용접 부위 위에 산화된 철산화물 같은 슬래그 덩어리가 생기는데 현장에서는 이 망치로 때려서 떼어낸다.
용접망치의 뾰족한 부분으로 때리면 정사각형이 자국이 생기지만 실제 상처는 직사각형이다.
하지만 상처의 형태가 정사각형이 아닌 직사각형임은 가격의 각도가 90도 각도가 아닌 현상의 원인일 수 있으며 이는 범인과 아이들의 키 차이를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다.
용접망치는 규격보다는 기능에 주력하는 공구이다 보니 직접 만드는 일도 많고, 실제로 현장에는 공장제 용접망치 뿐만 아니라 작업자들이 만든 수제 용접망치도 흔하다.
이 소년들이 살해된 시점에 대해 법의학자 채종민은 "초등학생 때는 이미 영구치가 자란 성인들과는 달리 6개월 단위로 치아 발육이 달라지는데,
이 점을 토대로 미루어볼 때, 개구리 소년은 1991년 3월 26일에 실종된 후 아무리 길게 잡아봤자 6개월 이내에 살해되었을 것"으로 주장했다.
그리고 두개골 하나는 돌에 눌려 납작하게 변형되어 있었는데 당시 부검에 참여했던 채종민 법의학자는 "뼈도 70~80%는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이 있어야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아직 뼈가 건조되기 전에 돌에 눌렸음을 뜻하는 것으로, 아이들이 살해된 직후에 매장되었을 것이란 걸 말해준다.
미국의 법의곤충학자 데이비드 포크너도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서 나온 구더기 껍데기를 통해 "소년들이 살해된 직후에 곧바로 매장되었다"고 말했다.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는 성체 파리가 이미 날아간 흔적이 있는데 이는 2가지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시신이 매우 얕게 매장되어 있어서 성체 파리가 날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고 2번째는 파리 한 세대가 발생한 후에 매장되었을 가능성을 말한다.
전자라면 시신이 살해된 직후에 곧바로 매장되었다는 걸 말하고 후자라면 시신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매장되었다는 걸 말해 준다.
그런데 알에서 구더기가 깨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8~14시간이라고 하며 파리 한 세대가 발생했다면 번데기가 많이 보여야 하는데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선 번데기의 수가 적었다.
이는 곧 파리 1마리에서 구더기들이 만들어졌고 시신이 매우 얕게 매장되어서 성체 파리가 다 날아가버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시신에 곤충이 접근하는 것을 막을 것이 없다면 24시간 내에 곤충이 시신에다 알을 낳는다고 한다.
근데 조호연 군의 두개골에서 구더기가 부화한 흔적이 있고 구더기가 부화하는 데는 알을 낳고 8~14시간 이내라고 하니 이는 곧 구더기가 부화하기 전에 매장되었다는 뜻이다.
채종민 박사의 소견과 데이비드 포크너 박사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결국 소년들은 살해당하고 짧게는 8시간 이내에 길게는 14시간 이내에 매장되었다는 걸 말해 준다.
그래야 뼈의 물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돌에 두개골이 눌려 두개골이 납작하게 변형이 일어날 수 있고 두개골에 깠던 파리의 알이 부화해 구더기가 생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장은 성체 파리가 날아가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얕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두 학자들의 주장으로 미루어 볼 때 실종된 1991년 3월 26일 바로 그날에 살해당했고 같은 날 바로 매장되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한 경찰대학 박지선 심리학과 교수는 "이 사건은 계획성과 우발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계획성을 나타내 주는 증거는 일반적으로는 잘 쓰지 않는 흉기를 사용했다는 점이고 우발성을 나타내주는 증거는 타깃을 소년들로 정한 것이란 점이다.
사실 아무리 범인이 성인이고 상대는 어린이들이라도 1명이서 5명을 상대로 살인을 저지를 때는 성인 범죄자라도 심리적으로 위축되는 면을 보인다고 한다.
굳이 남학생이 아니라 초등학교 고학년 여학생 5명이라도 대낮에 밖에서 살해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상식적으로 1명이 한꺼번에 5명을 붙잡아두기에는 어렵다는 점을 볼 때 범인이 한꺼번에 5명의 어린이를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순차적으로 죽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아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약간 떨어져 있었을 때 먼저 1~2명을 죽이는 모습을 보여 공포심을 안겨주었고 겁에 질려 있는 아이들을 무차별로 구타해 제압한 다음 죽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조호연 군의 두개골과 박찬인 군의 두개골에서 구타를 당했다는 소견이 나왔고 김종식 군의 왼팔 뼈가 골절된 것으로 보아, 왼팔을 들어 범인의 공격을 방어하려다가 발생한 흔적(방어흔)이라는 소견이 나왔다.
또 김영규 군의 상의가 심하게 찢어진 것으로 보아 범인에게 우악스럽게 잡혀 찢어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아이들이 흩어져 있어 한 명씩 순서대로 죽여 버린 거라면 한 명의 아이도 도망치지 못한 채 5명의 일행 모두 한꺼번에 암매장된 사실도 이상할 수 있다.
특히 김종식 군만 해도 공격을 왼팔로 막다 왼팔이 골절될 정도였는데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엄청난 통증으로 인해 큰 비명을 질렀을 테니 야산에 쩌렁쩌렁하게 메아리쳤을 텐데 단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기는 쉽지 않다.
또 범인 입장에서도 몇몇의 아이들이 더 있다는 것이 파악된다면 일부는 도망쳐서 부모님에게 실종 구역을 말할 위험이 있기에 빨리 현장을 벗어나야지
태연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이들의 시체들을 한곳으로 다 모아 와 한곳에 암매장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5명의 아이들을 위협해서 어딘가로 끌고가 더 이상의 일행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살해 후 암매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범인의 수는 많은 이들이 다수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1명이라고 분석했다.
복수의 범인이라면 피해자 중 1~2명은 순종적인 경향을 보이는데 그런 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데서 1명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1명의 범인이 와룡산에 올라온 아이들을 보고 처음엔 5명이나 되는 줄 모르고 먼저 앞에 있던 1~2명의 아이를 죽였는데 알고 봤더니 일행이 몇 명 더 있었고 입막음을 위해 나머지 아이들도 뒤쫓아가 모조리 살해했다는 분석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범죄심리학자 에릭 힉키는 "처음엔 두개골에 찍힌 상처가 여러 가지 형태라는 점을 미루어 범인이 복수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다시 한번 두개골의 형태를 살펴본 결과 범인은 역시 1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가 범인을 1명으로 결론내린 이유는 유골에 나타난 잔혹성 때문이었다.
극도의 잔혹성을 드러내는 범죄자 2명 이상이 짝을 이루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물론 찰스 잉 & 레너드 레이크의 경우처럼 잔혹한 살인마 2명이 의기투합해 짝패가 된 경우도 있었고 맨슨 패밀리처럼 순종적인 조력자가 있는 경우는 좀 더 있다.
때문에 혹 5명의 소년을 제압하는 데 조력자가 있었을지는 몰라도 직접적으로 흉기를 휘두른 인물은 2명이 아니라 1명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정신이상자의 소행이라면 증거가 꽤 많이 남았을 것이고 시체를 매장하는 일도 거의 없다고 한다.
에릭 힉키 박사는 "범인은 생각보다 시체가 늦게 발견되어서 놀랐을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고,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또 "아이들의 옷처리나 묶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살해 경험이 이 사건 이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미리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매장을 얕게 했던 것도, 단지 시간을 벌기 위함에 불과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힉키 교수는 이 사건은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사건이며, (적어도 직접 실행한)범인의 수는 1명이고, (만약 체포되지 않았다면) 다시 살인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매우 위험한 인물로, 아마 (설령 체포되었더라도 이 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미제사건이기 때문에 범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단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들은 다른 사건으로도 잡히지 않았다지만 이미 전과자이거나 간혹 다른 사건으로 붙잡혀 이미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경우도 역시 많다.
일례로 안양 환전소 여직원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일련의 연쇄살인의 주범인 최세용의 사례도 있으며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서 "나의 경험에 비추어, 이 사건의 범인은 아마 죽었거나, 오래전에 다른 사건으로 이미 교도소에 수감되어 복역 중일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고 범인이 2019년 9월 18일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실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힉키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범인은 이 사건 때문에 검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지선 교수 역시 "범인과 개구리 소년 5명은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돈을 노린 범죄라고 하기엔 진짜 범인은 단 한 번도 돈을 요구한 바 없었고 원한에 의한 소행이라기엔 한 자리에서 5명이나 되는 소년들을 모조리 죽인 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이 새방골에서도 가장 골이 깊고 수풀이 우거진 곳이라는 점과 가시덤불이 많고 인근에 군부대 사격장이 있어서 사람들의 출입이 뜸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마을에 살던 소년들이 탄피를 모으러 자주 오르락거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현지 사정과 지리에 매우 밝은 인물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소년들을 살해한 이유는 단지 살인 그 자체를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즉 현재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가설이라고 볼 수 있다.
● 결국 이 방송에서 개구리 소년 사건의 범인과 흉기에 대해 내린 분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실행범의 수는 1명이거나 그나마 직접 살해가 아닌 협력만 해 준 사람 1, 2명 포함일 가능성이 높으며 와룡산 일대의 지리와 사정에 매우 밝은 사람이었고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꺼번에 5명의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죽인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5명의 아이들을 살해했고 그때 사용한 흉기는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자주 쓰이는 용접 망치일 가능성이 높으며 결정적으로 살인에 능숙한 사람이라 다른 살인 사건으로 체포되었거나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났던 1991년 당시에는 묻지마 살인이나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없었거나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기에 수사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추었고 그래서 해결할 방법이 없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한국에서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대중적으로 인식되고 (그것에 대한)연구 활성화가 재대로 되기 시작한 계기는 2000년대 중후반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의 등장부터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초로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단순히 살인을 즐기려고 무고한 어린이 5명을 죽인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못 할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을 납치해서 앵벌이를 시키는 등의 사건이 많았다.
물론 전문적인 납치범이 아니라 불량배 등이 아이들을 집에서 먼 곳에 데려가거나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감시하여 억류하는 수준의 유괴, 가출한 아이들이나 가정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주된 피해자였다.
때문에 개구리 소년 찾기 캠페인이 벌어질 때도 "각종 역, 터미널, 지하철 승강장 등에서 앵벌이하는 아이들을 유심히 봐달라"고 하던 수준이었다.
다만 이 가설 역시 다른 쾌락살인마의 사례와 비교해도 매우 이질적이라는 한계가 존재한다.
사이코패스란 전문적인 용어가 나오기 이전 혹은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 이미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처럼 쾌락이 목적인 살인도 많았기에 단순히 '살인을 즐길 수 있다는' 개념을 몰라서 수사에 대한 초점을 잘못 맞춘 것은 아니었다.
이춘재, 유영철, 강호순 등의 쾌락살인마들은 본능에 충실한 자들이다 보니 성적인 욕구도 반영되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이 특징인지라 그런 사이코패스들의 사례를 살펴봐도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사건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게다가 당시엔 일단 시체가 발견된 상태도 아니었으니 쾌락살인마가 아이들을 몽땅 다 죽이고 암매장했을 것이라는 발상은 뜬금없었고 당시 기승을 부리던 앵벌이 조직의 유괴나 가출이 그럴듯해 보였으니 그쪽으로 수사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한국에서 2023년까지의 제대로 밝혀진 쾌락살인 사례를 살펴봐도 아직까지는 초등학교 고학년 남성을 대상으로 쾌락을 위해 한꺼번에 몰살시키고 암매장하는 방식은 비슷한 사건조차 찾아볼 수 없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유영철, 강호순 등도 여성들을 한꺼번에 몰살시키고 암매장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들은 먹이감을 물색하며 사냥하듯 한 명 한 명 유인해 계획적으로 살인하는 방식이었고 그게 '쾌락살인'의 방식에도 부합한다.
자신의 공간에서 편안하게 즐기면서 살인할 수 있으니까. 사방으로 도망칠 구멍이 열려있는 뒷산에서 대낮에 빠른 시골 남학생 5명을 여유롭게 살인하기에는 쉽지 않기에 쾌락살인으로 적합한 장소도, 대상도 아니다. 실제 이 아이들의 살해 방식도 마구잡이 살인이었지, 딱히 음미하면서 살해한 듯한 여유는 없어 보였다.
사이코패스가 어린이 여러 명을 한꺼번에 죽인 살인이라고 하면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던 정성현이 있으나 역시 자기 집으로 유인해서 살인하는 방식이었고 초등학교 저학년 여학생이 대상이었고 그것도 2명뿐이었으며 이조차도 살인이 목적,즉 쾌락살인이 아니라 원래 접근한 목적은 성폭행이었고 저지른 이후 입막음을 위해 살해한 거였기 때문에 역시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 5명에 뒷산이라는 장소였던 이 사건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국내외 막론하고 다른 어린이 연쇄살인사건 역시 한 번에 한명 따로 죽이는 게 대부분이었지 5명 이상을 한꺼번에 죽이는 사건은 매우 드물다.
쾌락살인마들을 보면 그냥 아무렇게나 막 죽이는 것은 아니고 나름의 패턴이 발견된다.
이들은 순수하게 살인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쾌락'이 목적인지라 자신이 쾌락을 느끼는 살인방식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이춘재는 변태적인 살인 방식을 보였고 유영철은 살인용 망치를 특수제작해서 그것을 애용했으며 강호순은 목을 졸라 죽이면서 쾌감을 느끼는 스타일인지라 이런 살인 패턴을 보고 연쇄살인인지 아닌지의 단서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일부러 추적을 피하기 위해 블러핑으로 다르게 죽이기도 하지만 이 아이들의 살해 방식은 일반적인 쾌락살인과도 거리가 있다.
곧 제일 나이가 많고 리더격인 우철원 군은 두개골에 상흔만 25군데 발견된 반면 박찬인 군과 조호연 군은 특별한 외상흔적이 없이 교살로 추정되는 등 살인방식이 중구난방이었던지라 딱히 살인을 하며 쾌감을 느꼈다는 증거는 없다.
약한 친구들에겐 손쉽게 목을 졸라 죽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범인 입장에서 가장 힘이 센 우철원군은 머리를 집중적으로 타격했고 좀 약한 친구들은 그냥 목을 졸라 죽이는 등 아이들에게 맞춰 가장 효율적인 살인을 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가설들처럼 이 가설 역시 한계는 존재한다.
다만 더 설득력이 떨어지거나 확실히 아니라는 정황이 보이는 다른 가설들에 비하면 그나마 가능성이 높아서 가장 유력한 가설로 취급받는 것이다.
실종 당시부터 과거 남한 고등학생이 납북된 사례를 들어 제기된 설이고 유해 발굴 이후에도 줄곧 북한 남파 간첩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일각, 특히 일부 밀덕을 중심으로 고개를 들고 있다.
시대를 감안하면 북한이 연루되어 있지 않았을까하는 의심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을 수 있었다.
실제로 1970년대 말에 고등학생들이 바닷가에 놀러갔다가 납북되어 수십년이 지난 후에 북한에서 가정까지 꾸린 경우가 확인된 적도 있고 사건 발생 불과 5년 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6년 후 발생한 화성 해안초소 K-2 소총 사취 사건의 범인도 남파 간첩설이 매우 유력하다.
또 간첩의 소행임이 확실하고 범인들의 월북을 막지 못한 이한영 암살 사건이 발생한 것 역시 1990년대의 일이었다.
이런 류의 사건사고가 잊을 만하면 발생했기에 이 사건의 범인을 남파 간첩으로 지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범인의 배후를 북한으로 추정할 만한 근거가 없지는 않다.
와룡산 근처에 안기부가 있었고 사건이 난 곳은 군부대 바로 근처라 군대의 동태를 살피러 온 남파간첩을 보낼 만한 당위성도 충분했고, 어쩌다 피해자들에게 정체가 노출되어 모두 죽여 처리했다는 것이 가설의 핵심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혼자서 튼튼한 국민학생 다섯을 제압한 무력이나 살인에 망설임이 없고 매듭처리가 능숙한 것도 설명되고
근처에 바로 깊이 묻지 않고 대략 묻은 것도 월북할 것이니 들켜도 상관이 없다.
더군다나 동네가 좁아서 서로 다 아는 사람인 것도 감안했을 것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아저씨가 본인들이 놀던 산에서 수상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며 아이들이 간첩이라고는 의심하지 않고 그냥 이상한 아저씨라고 생각했을지라도 간첩 입장에서는 그래 봤자 월북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죽여서 일말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 낫다.
밀덕 일각에서 간첩설을 미는 또다른 이유는 살해 도구가 당시 대한민국에 공식적으로 수입된 적 없는 소련제 트렌치 나이프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2011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범행 도구를 추정할 때도 대한민국에 유통되는 도구를 중심으로 지목했기에 당연히 정식 유통된 적이 없는 소련제 트렌치 나이프는 용의선상에 오르지도 않았고 일명 '똥망치'로 불리는 용접도구가 유력 도구로 떠오르자 많은 시청자들의 관심도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실제로 당시 선거일이 휴일임을 이용해 당일 출근하지 않은 공장 노동자가 범인일 것이라는 설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다소 다른 각도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몇몇 밀덕들의 주장이 바로 이것이다.
미제 사건에 대하여 고찰하는 인터넷 방송인 김원 역시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국내에 수입된 적 없는 소련제 트렌치 나이프라는 점을 수시로 강조하면서 남파 간첩 살인설을 주장했다.
유골이 발견된 곳 인근(200m)에서 움막이 발견됐는데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움막의 형태가 아닌 지하 토굴 형태의 움막으로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2~3년간 박모씨가 묵었던 곳이라고 한다.
유골 발견 직후 사건과 관련성이 의심되었으나 이후 조사 결과 움막에 깔린 장판이 1999년에 생산된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물품이 유골 발견 2~3년 전 것들임이 밝혀지면서 사건과의 직접적 연관성은 적을 것으로 판단되었다고 한다.
당시 남파간첩설에 경찰이나 대중이 관심이 없었던 데는 와룡산에서 전원 살해당해 암매장당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기에 실종에 비중을 두었던 면이 크다.
실제 제보 전화 중에 유괴범을 자칭하는 전화는 물론, 실종아동 본인들을 사칭하는 전화가 무수히 걸려왔기에 그런 쪽으로 경찰과 여론의 방향이 쏠렸다.
경찰과 가족들에게 매일같이 정체불명의 아이들에게 전화가 와서 "엄마! 나야!!"라고 울부짖는 통에 간첩설은 뜬금이 없었기에 적어도 당시에는 껴들 여지가 없었다.
지금도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의 남학생 5명이 갑자기 사라졌다면 일시에 살해당했다고는 선뜻 생각하기 쉽지 않고 대개 가출이나 유괴에 비중을 둘 것이다.
하물며 당시에도 일단 경찰이고 가족들이고 아이들이 살아 있다고는 추측했기에 언론과 경찰에서는 아이들을 목격하면 제보해 달라는 홍보를 엄청 했다.
하지만 만약 당시 사건 초기에 전모가 밝혀졌다면 남파간첩설도 쉬이 배제할 순 없었을 것이다.
유괴라면 당시 기승을 부리던 앵벌이 조직이 좀 더 유력했기에 그쪽으로 수사가 진행되었고 개구리 소년들이 앵벌이하는 걸 봤다는 목격담도 적지 않았다.
간첩설은 굳이 간첩들이 별다른 이용가치도 없는 시골 아이들을, 그것도 눈에 띄지 말아야 하는 간첩이 무려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들을 5명이나 데리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설득력이 다소 떨어지기에
당시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대신 앵벌이 조직이 연루되었다는 등의 설이 많이 돌았다.
하지만 먼 훗날 유괴가 아닌 당일 살인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이젠 앵벌이 조직의 소행보다는 차라리 간첩설이 더욱 그럴듯해진 것이다.
일단 외딴 시골의 와룡산에 드나들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동네 주민으로 제한적인데 당최 용의자가 전혀 특정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살해수법이 우발적 살인이라기보다는 마치 들켜서는 안 될 사람들이 들킨 것마냥 아이들 전원 살해에 전문적인 매듭과 암매장 수법 등 워낙 전문적인지라 전문 살인병기로 훈련받은 간첩이 아니냐는 추측이 마냥 허황된 추측이라곤 할 수 없다.
전혀 근거가 없지 않은 것이, 이 사건 5년 후 표종욱 일병 실종사건이 일어났다.
표 일병은 숙영을 위해 싸리나무를 모으던 도중 하필이면 무장공비들과 마주치는 바람에 잔인하게 살해된 뒤 암매장되어 탈영으로 처리되었다.
헌병대 군탈체포조는 표 일병의 집에 가서 "아들 숨겨놓은 거 알고 있으니 빨리 내놓으라"며 행패까지 부렸다고 한다.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것은 이 공비가 북한으로 무사히 도망치지 못하고 사망하는 바람에 수첩에서 표종욱 일병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고
공비의 유류품에서 표 일병의 시계가 확인된 후였다.
간첩이 현역 군인조차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죽이고 감쪽같이 암매장할 수 있다면 초등학생 다섯 명도 살해하고 암매장할 가능성은 있다.
범행 도구로 군인들이 쓰는 총기나 단검이 아닌 일상에서 보기 어렵지 않은 둔기와 목줄을 사용한 것도 무장공비의 소행으로 지목될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사건 발생 장소가 동네 우범지역이었다곤 하지만 목격담처럼 그냥 아이들을 좀 괴롭히는 수준에 불과했다.
만약 정말 본드에 취한 불량청소년들이 초등학생 5명을 한꺼번에 살해할 수준의 우범지역이었다면 이전에도 비슷한 실종, 살해 사건이 일어났어야 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없었다.
즉, 불량 청소년들의 비행이 선을 넘지는 않았으며 브라질 갱단처럼 실종, 살인이 밥먹듯 일어나는 곳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만약 동네 노는 형, 누나들이 죽였다면 우발적으로 때리거나 장난치며 놀다가 의도치 않게, 또는 동네 노는 누나들일 경우 아이들을 상대로 강제추행이나 강간 혹은 강간 시도 등 성적인 행동을 하다가
이 과정에서 한 아이가 죽게 되자 당황하여 모든 아이들을 죽인 뒤 마치 제3의 범인이 따로 있는 것처럼 꾸몄을 개연성도 있으나
부검상 전문적인 도구로 살인하고 매듭과 암매장 등을 동원하는 등 일개 철없는 중고딩 양아치들이 했다고 보긴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불량 청소년의 소행보다는 살인 경험이 많은 사이코패스의 소행으로 꼽았다.
범행 현장 분석 결과 깔끔하고 심지어 옷에 피조차 묻어 있지 않을 정도였다. 불량 청소년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당시 불량 청소년들이 싸움질을 일삼고 아이들 돈을 뺏고 괴롭히긴 했어도 대놓고 살인을 하진 않았다는 것쯤은 아니까 아이 몇 대 때렸는데 우발적으로 아이가 죽자 당황하여 은폐하기 위해 다 죽인 것 아니냐는 식으로 추론한다.
헌데 본드에 취한 학생이 제정신이 아닌지라 아이가 죽을 정도로 마구 때렸다면 출혈이 생길 법도 한데 옷에 혈흔이 없었다.
보통 취객들의 우발적인 폭행이나 살인 현장을 보면 피투성이인 것을 떠올려 보자. 헌데 이 사건의 범행 현장은 깔끔했기에 전문가들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라며 이전에도 유사한 범죄가 많았을 것이라고 추론했고 우발적인 범행과는 선을 그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사이코패스설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와룡산 지리를 잘 아는 사이코패스라면 동네 주민으로 추정되나 용의자로 특정된 마을 주민이 없었다.
물론 범죄자들의 이웃이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는 식의 인터뷰를 하는 것은 드물지 않으니 혹시 모를 일이다.
강호순도 마을 주민들에겐 착한 이웃이었다.
그런 '이중인격자'들은 사이코패스를 포함하여 정상적인 지능의 소유자로서 항상 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에 의심을 안 받기 위해 용의주도한 특징을 보인다.
헌데 서로 한 다리 건너 아는 좁은 마을에서 무려 아이 5명을 한꺼번에 죽이고 암매장하면 마을 주민들 전원이 용의선상에 올라 강도 높게 수사받고 본인도 추적당할 위험이 높음에도 상관없이 저질렀을 정도면 용의주도한 사이코패스라고 하기엔 이상한 면이 있고 차라리 충동 조절을 못 하는 피에 굶주린 정신병자의 소행에 가깝다.
하지만 정신병자들은 굳이 또 용의주도하게 암매장하지도 않으며 다른 마을 주민들에게도 이런 짓을 할 가능성이 높으나 사건 전후로 딱히 그런 일은 없었기에 정신병자라고 하기에도 이상한 부분이 있다.
반면 간첩설은 아이들을 살해할 동기와 암매장할 동기를 그럴듯하게 설명해 준다.
다만 이 가설 역시 한계는 명확하다.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사회 분위기상 간첩몰이가 암암리에 남아 있었고 납북설도 당시부터 존재했음에도 이랬다는 것은 당시 수사기관이나 정부 수반도 남파간첩설에는 무게를 두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1990년대 초반은 간첩 문제가 사회의 주요 이슈 중 하나였을 만큼 선명한 문제 중 하나였고 설령 암매장을 몰랐더라도 납북 가능성까지 아예 배제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철원군의 유골에서 발견된 수많은 자상 역시 문제가 된다.
보여선 안 될 것을 숨기기 위해 간첩이 아이들을 살해했다면 치명적인 일격으로 빠르게 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그럴 능력도 있을 것인데 왜 굳이 아이의 머리를 흉기로 수없이 내리쳤어야 했냐는 것이다.
마침 간첩이 그런 쾌락살인마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가정하기에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특수간첩으로 육성되는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고 보기 어렵다.
모든 범죄에는 절대적인 법칙이란 게 없고 날이 갈수록 진화하거나 융합되기도 하며 '전례 없는 사건'도 흔하게 일어나니 사이코패스의 소행이 아니라는 확언은 불가능하다.
과학수사는 통계를 바탕으로 하기에 전례가 많은 쪽으로 수사방향을 정하지만 100% 확률이란 없고 언제나 예외는 있으므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둘 필요가 있다.
물론 대한민국 영토인 이상 간첩이 어디든 다닐 확률은 존재하고 특히 와룡산은 인근에 안기부도 있었고 군부대도 존재할 정도로 전략적 가치가 있었던 곳이니만큼
간첩이 전혀 관심 없을 만한 곳도 아니기에 와룡산에서 간첩 활동이 절대 없었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와룡산에 간첩이 출몰하여 발견된 전례가 없고 딱히 간첩이 죽였다는 증거가 없다면 이론적으로 가능하지 않겠냐는 설일 뿐이다.
유골 발견 직후부터 경찰이 역설(力說)한 주장으로 조난 후 저체온증으로 인한 변사설이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이 사건을 추적해 온 김재산 국민일보 기자와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김영규 전 대구경찰청 강력과장은 타살이 아니라 조난 후 저체온증으로 인한 변사일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가능한 한 조난설에 가능성을 두자면 산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간 상황에서 갑자기 큰 비바람을 만났다면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여지도 없지는 않다.
더군다나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계곡 방면으로, 근처의 풀숲에 숨어서 비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도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러나 타살의 정황이 너무나 명백하기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1993년 3월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한 한 경찰도 "와룡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야산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곳에서 조난당할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주장을 번복해서 아이들의 조난을 주장하던 것에 대해 와룡산 기슭에 컨테이너를 두고 살던 할머니는 "(길을) 잃어버리긴, 갓난쟁이도 아니고 국민학교 5학년, 6학년씩이나 된 애들이 뭘 그래(길을 잃어)? 그건(동네 뒷산에서 조난당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일축했으며 김영규 군의 아버지 김현도 또한 "바로 뒤에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고, 밤이 되면 그때나 지금이나 주변 마을 불빛이 환합니다. 이런데 무슨 조난을 당해요?"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이 2002년에 유골에 대한 미스테리를 방영할 때 실종된 소년들과 같은 연령대의 남자 아이들들을 모아 어두워진 후에 와룡산에서 마을로 내려가도록 실험했는데 아이들은 무서워하는 기색은커녕 긴장하는 기색조차 없이 마을로 대단히 쉽게 돌아왔다.
물론 아이들이 실종된 1991년 당시 인근은 전형적인 농촌이었던 반면 이 방송을 찍은 2002년에는 주택가 및 아파트가 유골 발견 지점 인근까지 확대됐다는 걸 감안해야 하겠지만 개구리 소년들과는 달리 이들은 대구에 거주하지 않으며 대구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아이들로 지리에 어두운 아이들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거기다 1991년에도 유골 발견 지점 인근 500m 근방에 수십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 있었고 좀 더 바깥으로는 당시로서는 구마고속도로로 불렸던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지선이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바로 앞에 있는 불빛을 보고도 마을로 못 내려왔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당시 농촌이었던 이 동네의 아이들은 동네 뒷산 정도는 놀이터나 다름없을 정도로 산으로 자주 놀러 다녔다.
게다가 한 아이의 옷소매가 뒤로 묶인 상태였고 이 매듭의 형태나 강도가 잘 풀리지 않도록 잘 묶인 형태로, 보통 사람들이나 아이들이 아닌 전문가들이 쓰는 형태였기 때문에 이것을 타살의 근거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다수의 법의학자들은 아이의 두개골이 돌에 눌려 변형되어 있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아이들이 사망한 직후 매장되었음을 주장했다.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면 산사태라도 나지 않는 이상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매장될 리가 없으며 이 역시 남이 살해하고 바로 땅에 묻었다는 근거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아이들이 추위에 떨다가 옷으로 덮으려고 했다는 증거, 매듭의 모양은 저체온증에 이성을 잃으면 설명되지 않는 이런저런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려 유족들의 화만 더 돋구었다.
이에 유족들과 '전국 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전미찾모)'이 2005년에 국가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2006년 11월 9일에 기각당했고(선고 2005가합69514, 서울중앙지방법원, 법률신문)
이에 유족 등이 항소했으나 2007년 10월 25일에 서울고등법원 측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후속 기사) 이후 대법원도 심리불속행 판결을 내렸다.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의 말에 따르면 저체온사는 지형지물이나 위치만 보고 내릴 수 있는 진단이 아니며 돌로 상흔을 낼 수 있는 돌은 중력이 강한 돌이여야 하며 골절선이 여러 개 나타나야 하는데 유골에는 강력한 둔기로 인해 움푹 들어간 상흔만 있기에 이것은 명확히 생전 손상이고 이러한 생전 손상을 저체온사라고 가정한다면 저체온증 진단기준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가설은 법의학자들이나 유족들, 심지어 호사가들에게조차 당시부터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 사실상 거짓말이나 다름없이 치부되어왔으나 2022년 3월에 김재산 기자의 책이 돌연 출간되자 재차 조명되었으며 김재산 기자는 그간의 주장을 다시 정리-종합하여 저체온사에 확신을 가지고 사건을 과학적으로 재수사할 것을 요구했다.
2022년 5월 17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탐정 손수호' 코너에서 《개구리 소년, 왜 아이들은 산에 갔을까》를 다뤘다. 한 기자가 추적기를 담은 책을 냈는데 대구경찰청 김영규 전 총경이 책에 인터뷰한 내용도 담겨 있다.
살해 동기와 살해 도구가 없었는데 탄두 136개가 우유곽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용돈을 위해 탄두를 주웠던 것으로 보이며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앞서 서술하였듯 가능성이 거의 없는 설로 치부되고 있으며 법의학자들의 소견을 따르면 타살의 정황이 너무나 명백하다.
당시 이 주장을 한 사람들 모두 자신들의 주장을 굽힐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한때 인터넷에서 많이 돌아다녔던 설. 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곳에서 400m 떨어진 곳에는 50사단 사격장이 있었으며
2002년 대구시의 한 구두닦이방에서 30대로 보이는 한 손님이 "군 복무 중 갑자기 튀어나온 소년 5명을 오발하여 1명이 즉사, 1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5명 전부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죽이고 은폐했다."는 말을 들은 구두닦이방 주인이 이를 제보한 바 있다.
해당 설을 지지하는 이들은 개구리 소년들의 유해가 당시 사격장 근처에 묻혀있었다는 점과 시신이 매듭 묶기 전문가에 의해 매듭 묶기가 되어 있었다는 점, 상식적으로 범인 1명이 아이 5명을 동시에 제압하기 힘들다는 점을 들어 이 설에 비중을 뒀다.
실종 소년들의 부모들도 군부대 관련 사고에 가능성을 뒀다.
MC스나이퍼의 곡 중에도 이 부분을 언급하는 가사가 있기 때문에 한때 대단히 유명해졌으며 아직도 이 설을 기정사실로 믿는 이들이 많다.
이는 그간 제시된 수많은 가설 중에서도 현실성이 가장 떨어지며 특히 군대의 행정업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바로 논파할 수 있는 허술한 가설이다.
일단 50사단에서는 "소년들이 실종된 당일은 임시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사격 일정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대해 당시 주임원사가 진술한 바 있다.
폐쇄적인 군 특성상 병사들 입단속을 철저히 시켜서 사건을 묻어 버릴 가능성은 있지만 아무리 군대가 말 많은 조직이라지만 어느 정도는 여느 관료집단이나 다름없고
특히 사격장 같은 민감한 시설은 굉장히 엄격한 절차대로 운영된다.
사격 일정이 생기면 화기 담당 부서가 사격을 위한 환경 정비를 하고 사격일정이 없는 날도 총기 관리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이며 사격 일정은 상부에 필히 보고해야 하는데 사격을 강행한다는 것은 있기 힘든 일이다.
병사들은 둘째치고 간부들은 애초에 주말 당직이나 크루근무가 아니면 공휴일에는 출근하지 않는다.
군에서 행정업무를 조금이라도 해 보면 사격훈련이라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작업인지 바로 알 수 있다.
총 한 번 쏘기 위해 공문이 마구 날아다니고 수없이 많은 물품들을 반출하게 되며 사격 이후에는 탄피를 세고 잔여 실탄 실셈/봉인, 총기관리 등 간부가 개입하여 마무리지어야 할 일들이 많다.
특히 탄약 불출 허가는 군단장이 내린다.
즉, 군단장까지 가는 그 보고 라인에 있는 모든 간부들이 사격훈련 일정의 존재를 알 수밖에 없다.
수많은 전역자들의 경험대로 사격은 아무리 하루짜리 훈련이라도 저런 복잡한 절차와 관리인원이 필요하며 따라서 군은 공휴일에 사격일정을 잡는 일이 없다.
총 한 번 쏘는 데 관여하는 관계자들과 병사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과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큰 사회적 이슈가 된 다수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살인 사건에 죄다 오랫동안 함구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리고 총 소리라는 것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게다가 사격 전 필히 인근 주민이나 기타 부서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방송을 하므로 함승훈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명소리가 묻혔으면 묻혔지 총소리를 못 들을 수가 없다.
장난감 BB탄 총을 퓩퓩 쏘는 소리나 영화 등의 창작물에서 총을 쏠 때 나오는 퉁퉁 정도의 소리와는 달리 실제 소총의 실탄 격발음은 엄청나게 크고 화약 냄새도 굉장히 진하다.
실제로 들어 보면 알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탕탕 소리가 절대 아니다.
괜히 군에서 사격 전 귀마개를 필히 착용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귀마개를 껴도 총성을 가까이서 들으면 게임이나 드라마에서나 들을 법한 삐- 하는 이명이 들린다.
사격이 있는 날이면 저 멀리 있는 사격장으로부터 훈련소 내 일과 공간까지도 큰 총소리가 울린다.
군대에서 소음기를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음기를 장착하더라도 소리가 그다지 작아지지 않는다.
영화처럼 푸슉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절대로 아니고 평소 소리에서 약간 작아지는 정도에 불과하다.
만약 사격이 실시되었으면 이 큰 소리에 동네 주민/주변인물 등이 절대 모를 리가 없었음에도 그 누구도 이런 소리를 들었다거나 하는 언급이 없었다.
위의 두 상황을 차치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애들이 사격장에 난입했을 가능성이 없다.
군 부대는 원칙적으로 아무나 들여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민간인은 면회, 방송 촬영 등의 적법한 사유가 아니면 멋대로 영내에 들어올 수 없다.
상식적으로 아이들이 부대 진입을 시도했다면 바로 군인 아저씨들에게 저지당했을 것이며 정문을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영내 장교나 부사관의 자녀를 사칭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 당연히 윗선에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며, 그렇게 들어왔다고 가정해도 사격장까지 가는데 제지가 없었을 수가 없다.
사격장은 총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훈련시 조교들이 항시 대기를 하기 때문에 설령 사격훈련을 받는 군인이라도 자기 순번이 아니면 함부로 사격장에 들어갈 수 없다.
오발론을 사실이라고 보고 이를 대입해 보면 어찌저찌 영내에 들어온 다섯 아이들이 화지대까지 뛰쳐들어가 조교의 통제를 따돌리고 한창 시끄럽게 총을 쏘고 있었을 사격장까지 난입해 사망했다는 매우 해괴한 그림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쯤 되면 외려 군 부대가 이를 은폐할 게 아니라 해당 부대 헌병중대 내리갈굼과 함께 사건을 공론화해도 이상할 게 없을 지경이다.
현실성이 있는 시나리오는 사격장 근처에 접근했다가 재수없게 피탄되는 것이다.
당시 아이들이 와룡산에 탄피를 주우러 다녔다는 증언들은 매우 많이 나왔고 특히 아래 단락의 증언처럼 예비군 사격장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탄피는 탄자와 달리 사격장에서 사로 근처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탄피를 주울 수 있다는 건 사로 근처까지 접근이 가능했다는 의미가 된다.
꼭 사로 내부가 아니더라도 근처를 지나가다가 재수없게 유탄에 맞을 수 있으며 아무리 사격 전 경고방송을 하고 적기를 올려도 소통 부재로 훈련장 근처를 지나가다가 총에 맞는 사고는 지금도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전방의 소위 메이커 사단 복무자들의 경험과는 달리 많은 부대들이 사격장을 부대 주둔지 내부가 아닌 부대 외부 시설로 두고 있으며
이런 시설들은 녹슨 철조망 정도로 둘러쳐지고 상주하는 경계병력도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후방 향토 부대일수록 이런 경향은 더 심하고 제50보병사단은 향토방위사단이다.
1980년대 말~90년대 초에는 더욱 관리가 부실했다.
진짜 오발사고가 났더라도 군이 이걸 쥐도새도 모르게 묻어 버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발설 지지자들은 사태를 묻기 위해 군이 나머지도 모두 살해한 뒤 매장했고 공범이 된 모두가 당시 군 부대의 권위에 위압되어 이 사건에 대해 함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아무리 욕을 퍼먹는 쌍팔년도 군대라도 이런 짓을 하지는 않는다.
본적으로 군사 작전 지역에서 오인 사격으로 인한 사망 사고는 해당 부대가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
작전구역에 돌아다니는 신원미상자가 민간인인지, 민간인인 척 하는 남파공작원인지 초병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책임자들은 쉬쉬하고 싶겠지만 민간인이 연루되었으면 군사정권 시절이라도 못 숨기며 그나마 할 수 있는 조치가 언론통제로 전국으로 소식이 퍼지는 것을 억제하면서 뒤에서는 유가족을 반협박으로 회유하는 정도일 것이다.
정말로 5명을 다 죽였다고 치더라도 군이 은폐 계획을 세웠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처리할 수 없다.
절대로 발견되지 않을 장소인 영내의 험지 구역 등 민간인은 출입조차 불가하면서도 군 관계자조차도 잘 가지 않는 곳으로 옮겨 군대의 특기인 삽질로 깊숙하게 파묻었을 가능성이 높다.
혹시 발견되더라도 의복 등으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도록 유류품을 영내에서 소각해 버리는 것 또한 일도 아니다.
그러나 묻혀있는 곳은 사건 현장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았고 깊게 묻히지도 않았으며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류품은 그대로 같이 있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상흔을 두고 총격으로 인한 관통상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이, 총알의 위력은 생각보다 매우 강력하다.
사격훈련이니 권총이 아닌 소총으로 군용탄인 5.56×45mm NATO을 쐈을 것인데 맨몸으로 이걸 맞으면 총알이 관통하면서 그 충격으로 신체를 아주 헤집어 놓기 때문에 내부가 너덜너덜해진다.
성인도 이럴진대 그 대상이 아무리 씩씩한 어린이라도 뼈가 아주 박살난다.
따라서 사격장 오발 사망설은 결국 현실성이 너무 떨어지기에 신뢰성이 낮다.
1996년 1월에는 "실종된 김종식의 아버지인 김철규가 아이들을 모두 토막살해한 후 그 집에 암매장했다"는 한국과학기술원 소속의 자칭 범죄 심리학자인 김가원의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면서 집안 곳곳을 파내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경찰은 그때까지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가원의 주장에 따라 김 씨의 집 바닥을 파헤쳤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김 씨의 집에서는 아이들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가 막힌 일에 당사자인 김철규 씨가 ''사람을 두 번 죽여도 분수가 있지..." 하고 분노하자 김가원은 "증거가 안 나왔는데 더 할 말이 없죠..."라며 기자들의 추궁을 피하면서 자리를 떴다.
2021년 9월 9일자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 시즌 2에서 피해자 친척들과 당시 사건을 수사한 관계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런 교사의 존재는 들어 본 적도 없고 수사망에도 올라온 바가 없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지나친 체벌로 교사가 해임된 사례는 먼 훗날 2010년의 오장풍 사건이 최초인데 사건이 발생한 지 무려 19년이나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언급한 문제의 교사 관련한 내용은 오보인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직접 사건을 수사한 이들과 피해자의 유족들이 폭력교사의 존재를 부정함으로 '교사 범인설' 또한 오래가지 않아 부정되었다.
당시 아이들을 찾기 위해 약 30만명의 사람들과 많은 시간이 동원되어 대대적인 수색을 펼쳤지만 실종된 아이들의 흔적조차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북한 간첩에게 강제로 납북을 당하여 북한에 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실종 이후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26일 대구 와룡산 중턱에서 실종된 아이들 전원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분명하게 부정되었다.
사건 발생 후 국가안전기획부 직원들이 유가족들에게 접근해 발굴 현장에도 따라다니는 등 집중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2022년 6월 1일, 네이트판에 올라온 '나는 개구리소년 사건의 흉기를 알고 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버니어 캘리퍼스가 흉기라고 주장했으며 다수의 청소년 불량배가 범인이라고 주장하였다.
해당 글이 인터넷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다시 야산 불량배에 의한 살인설도 부각되었다.
해당 글에서는 버니어 캘리퍼스를 소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 당시 와룡산 인근 공업고등학교에서 본드 흡입을 위해 야산에 오르던 불량학생들이라고 주장하였다.
버니어 캘리퍼스는 중등교육 과정 기술·가정 과목에서 한 번쯤 얼굴을 비추기 때문에 대중들이 이름은 몰라도 생긴 건 대강 알고 있는 공구이긴 하지만
일개 학생들이 버니어 캘리퍼스 같은 전문 공구를 들고 다닐 만한 학교라면 실업계 고등학교밖에 없기 때문이다.
1991년 개교한 대구성서공업고등학교라는 추측이 있는데 이 학교는 1991년에 개교해 1994년 1회 졸업식을 열었다.
이후 전자공업에 특화된 학교로 변경하고자 이름을 대구전자공업고등학교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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