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충렬전(劉忠烈傳)-작자미상
권지하(券之上)
각설, 대명국 영종황제 즉위(卽位) 초(初)에 황실이 미약하고 법령(法令)이 불행(不幸)한 중에 남만(南蠻) 북적(北狄)과 서역(西域)이 강성하여 모반할 뜻을 둠에, 이런 고로 천자 남경에 있을 뜻이 없어 다른 데로 도읍을 옮기고저 하시더니, 이때 마침 창해국(蒼海國) 사신이 왔음에 성은 임이요 명은 경천이라 하는 사람이거늘, 천자 반겨 인견(引見)하시고 접대한 후에 도읍 옮김을 의논하시니 임경천이 주왈,
소신이 옥루(玉樓)에서 육대산천을 망기(望氣)하오니 금황지지(今皇之地)가 마땅하옵고 천하명산(天下名山)이 오악지중(五嶽之中)에 남악(南嶽) 형산(衡山)이 가장 신령한 산이요, 일국(一國) 주룡(主龍)이 되었고 창오산(蒼梧山) 구리봉은 변화하야 외청룡(外靑龍) 되었고 소상강(瀟湘江) 동정호(洞定湖)는 수세(水勢))가 광활하야 내청룡(內靑龍) 되어 있어 내수구(內水口)를 막았으니 제왕주가 장구할 것이요, 또한 소신이 수년 전에 본국에서 망기(望氣)하온즉 북두칠성 정기가 남경에 하강하고 삼태성 채색이 황성(皇城)에 비쳤으며 자미원(紫薇垣) 대장성이 남방에 떨어졌으니 미구(未久)에 신기한 영웅이 날 것이니 황상은 어찌 조그마한 일로 이러한 금성지지(金城之地)를 놓으시며, 선황제 마마 구방지지(舊邦之地)를 어찌 일조에 놓으시리까. 천자 이 말을 들으시고 마음이 쇄락(灑落)하여 도읍 옮기심을 파하시고 국사를 다스리니 시절이 태평하고 인심이 조안(粗安)하더라.
이때 조정에 한 신하 있으되 성은 유요 명은 심이니, 전일 선조황제 개국공신 유기(劉基)의 십삼대 손이요 전 병부상서 유현의 손자라, 세대명가(世代名家) 후예로 공후 작록이 떠나지 아니하더니 유심의 벼슬이 정언주부에 있는지라. 위인이 정직하고 성정이 민첩하며 일심이 충정하야 국록이 중중(重重)하니 가산이 요부(饒富)하고 작법(作法)이 화평하니 세상 공명은 일대에 제일이요, 인간 부귀는 만민이 청송하되 다만 슬하에 일점 혈육이 없이 매일로 한탄하여 일년일도(一年一度)에 선영(先塋) 제사 당하면 홀로 앉아 우는 말이,
슬프다! 나의 몸이 무슨 죄 있어 국록을 먹거니와 자식이 없으니 세상이 좋다 한들 좋은 줄 어찌 알며 부귀가 영화롭되 영화 된 줄 어찌 알리, 나 죽어 청산에 묻힌 백골 뉘라서 거두오며, 선영향화(先塋香火)를 뉘라서 주장하리. 하염없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지라.
이렇듯이 설워하니 부인 장씨는 이부상서 장윤의 장녀라. 주부 곁에 앉았다가 일심이 비감하야 왈,
상공의 무후(無後)함은 소첩의 박복함이라 첩의 죄를 논지컨데 벌써 버릴 것이로대 상공의 음덕으로 지금까지 부지하오니 부끄러운 말씀을 어찌 다 하오리까. 듣사오니 천하에 절승한 산이 남악 형산이라 하오니 수고를 생각지 말고 산신께 발원하여 정성이나 드려보사이다. 주부 이 말을 듣고 대왈,
하늘이 점지하사 팔자에 없었으니, 빌어 자식을 낳을진대 세상에 무자(無子)한 사람이 있으리요. 장부인이 여쭈오대,
대체를 생각하면 그 말씀도 당연하되 만고 성현 공부자(孔夫子)도 이구산(尼丘山)에 빌어 났고 정(鄭)나라 정자산도 우성산에 빌었으니 우리도 빌어 보사이다.
주부 이 말을 듣고 삼칠일 재계 정히 하고 소복을 정제하며 제물을 갖추고 축문을 별도로 지어 가지고 부인과 함께 남악산을 찾아가니, 산세 웅장하여 봉봉이 높은 곳에 청송(靑松)이 울울하여 태고시(太古時)를 띠어 있고, 강수는 잔잔하여 탄금성(彈琴聲)을 돋웠다. 칠천십이 봉은 구름 밖에 솟아 있고 층암 절벽상에 각색 백화 다 피었고, 소상강 아침 안개 동정호로 돌아 가고 창오산 저문 구름 호산대로 돌아들며 강수성을 바라보며, 수양가지 부여잡고 육칠 리를 들어가니 연화봉이 중계(中階)로다. 상대에 올라서서 사방을 살펴보니, 옛날 하우(夏禹)씨가 구년지수(九年之水) 다스리시고 층암절벽 파던 터가 어제 한 듯 완연하고 산천이 심히 엄숙한 곳에 천제당(天祭堂)을 높이 묻고 백마를 잡던 곳이 완연하였고, 추연(湫淵)을 돌아보니, 옛날 위 부인이 선동(仙童) 오륙 인을 거느리고 도학(導學)하던 일층단이 무너졌다.
일층단 별로 모아 노구밥을 정렬히 담아 놓고 부인은 단하에 궤좌(跪坐)하고 주부는 단상(壇上)에 궤좌하여 분향 후 축문을 내어 옥성으로 축수할 제 그 축문에 하였으되, 유세차(維歲次)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에 대명국 동성문 내에 거하는 유심은 형산 신령전에 비나이다. 오호라 대명 태조 창국공신지손(創國功臣之孫)이라 선대의 공덕으로 부귀를 겸전하고 일신이 무양하나 연광이 반이 넘도록 일점 혈육이 없었으니 사후 백골인들 뉘라서 엄토하며 선영행화를 뉘라서 봉사하리오. 인간에 죄인이요 지하에 악귀로다. 이러한 일을 생각하니 원한이 만심(慢心)이라 이러한 고로 더러운 정성을 신령전에 발원하오니 황천은 감동하와 자식 하나 점지하옵소서.
빌기를 다 함에 지성이면 감천이라 황천인들 무심할까. 단상의 오색 구름이 사면에 옹위하고 산중에 백발 신령이 일체(一切)히 하강하여 정결케 지은 제물 모두다 흠향한다. 길조(吉兆)가 여차(如此)하니 귀자(貴子)가 없을쏘냐.
빌기를 다한 후에 만심 고대하던 차에 일일은 한 꿈을 얻으니, 천상으로서 오운(五雲)이 영롱하고, 일원(一員) 선관(仙官)이 청룡(靑龍)을 타고 내려와 말하되,
나는 청룡을 차지한 선관이더니 익성(翼星)이 무도(無道)한 고로 상제께 아뢰되 익성을 치죄하야 다른 방으로 귀양을 보냈더니 익성이 이걸로 함심(含心)하야 백옥루 잔치시에 익성과 대전한 후로 상제전에 득죄하여 인간에 내치심에 갈 바를 모르더니 남악산 신령들이 부인 댁으로 지시하기로 왔사오니 부인은 애휼(愛恤)하옵소서. 하고 타고 온 청룡을 오운간(五雲間)에 방송하며 왈,
일후 풍진(風塵)중에 너를 다시 찾으리라.
하고 부인 품에 달려들거늘 노래 깨달으니 일장춘몽 황홀하다.
정신을 진정하야 주부를 청입(請入)하야 몽사를 설화(說話)한대 주부 즐거운 마음 비할 데 없어 부인을 위로하야 춘정(春情)을 부쳐두고 생남(生男)하기를 만심 고대하더니 과연 그 달부터 태기 있어 십 삭이 찬 연후에 옥동자를 탄생할 제, 방 안에 향취 있고 문 밖에 서기(瑞氣)가 뻗질러 생광(生光)은 만지(滿地)하고 서채(瑞彩)는 충천한 중에 일원(一員) 선녀 오운 중에 내려와 부인 앞에 궤좌하여 백옥상(白玉床)에 놓인 과실을 부인께 주며 하는 말이,
소녀는 천상 선녀이옵더니 금일 상제 분부하시되 자미원(紫薇垣) 장성(將星)이 남경 유심의 집에 환생(還生)하였으니 네 바삐 내려가 산모를 구완하고 유아를 잘 거두라 하시기로 백옥병의 향탕수(香湯水)를 부어 동자를 씻기시면 백병(百病)이 소멸하고 유리대(琉璃岱)에 있는 과실 산모가 잡수시면 명(明)이 장생불사(長生不死)하오리다.
부인이 그 말을 듣고 유리대에 있는 과실을 세 개를 모두 쥐니 선녀 여쭈오되,
이 과실 세 개 중에 한 개는 부인이 잡수시고 또 하나는 공자를 먹일 것이요, 또 한 개는 일후에 주부가 잡수실 것이니 다 각기 임자를 옥황상제께옵서 점지하신 과실을 다 어찌 잡수시리까. 향탕수에 부어 한 개를 잡순 후에 옥동자를 채금(彩衾)속에 뉘여 놓고 부인께 하직하고 오운 속에 싸이여 가니 반공에 어렸던 서기 떠나지 아니하더라.
부인이 선녀를 보낸 후에 일어 앉으니 정신이 상쾌하고 청수(淸秀)한 기운이 전일보다 배나 더하더라.
주부를 청입하야 아기를 보이며 선녀의 하던 말을 낱낱이 고하니 주부 공중을 향하야 옥황께 사례하고 아기를 살펴보니 웅장하고 기이하다. 천정(天庭)이 광활(廣闊)하고 지각(地角)이 방원(方圓)하야 초상 같은 두 눈썹은 강산 정기 쐬였고 명월 같은 앞가슴은 천지 조화 품었으며, 단산(丹山)의 봉(鳳)의 눈은 두 귀 밑을 돌아보고 칠성에 싸인 종학 융준용안(隆準龍顔) 번듯하다. 북두칠성 맑은 별은 두 팔뚝에 박혀 있고 뚜렷한 대장성이 앞가슴에 박혔으며, 삼태성 정신별이 배상(背上)에 떠 있는데, 주홍(朱紅)으로 새겼으되 대명국 대사마 대원수라 은은히 박혔으니 웅장하고 기이함은 만고에 제일이요 천추(千秋)에 하나로다.
주부 기운이 쇄락하야 부인을 돌아보아 왈,
이 아해 상(相)을 보니 천인적강(天人謫降)이 적실하고 만고 영웅 분명하며 전일 황상께옵서 도읍을 옮기고저 하야 창해국사신 임경천더러 물으시니 임경천이 아뢰기를 북두정기(北斗精氣)는 남경에 하강하고 자미원 대장성이 황성에 떨어졌으니 미구(未久)에 신기한 영웅이 나리라 하더니 이 아해가 적실하니 어찌 아니 즐거우리까. 오래지 아니하야 대장 절월(節鉞)을 요하(腰下)에 횡대(橫帶)하고 상장군(上將軍) 인수(印綬)를 금낭(錦囊)에 넌짓 넣고 부귀영화는 선영에 빛내고 맹기영풍(猛氣英風)은 사해에 진동할 제 뉘 아니 칭찬하리요 산신(山神)의 깊은 은덕 사후(死後)에도 난망(難忘)이요 백골인들 잊을쏘냐. 이름은 충렬이라 하고 자는 성학이라 하다.
세월이 여류(如流)하야 칠 세에 당함에 골격은 청수하고 총명에 발췌(拔萃)하야 필법(筆法)은 왕희지(王羲之)요, 문장은 이태백(李太白)이며 무예장략(武藝將略)은 손오(孫吳)에 지내더라. 천문(天文) 지리(地理)는 흉중(胸中)에 갈마두고 국가 흥망은 장중(掌中)에 매였으니 말 달리기와 용검지술(用劍之術)은 천신도 당치 못할네라.
오호라 시운이 불행하고 조물이 시기한지. 유 주부 세대 부귀 지극하더니 사람이 흥진비래(興盡悲來)가 미쳤으니 어찌 피할 가망이 있을쏘냐. 유 주부는 조참적소(遭讒謫所)하고 장 부인은 피화봉수적(避禍逢水賊)하다
각설, 이때에 조정에 두 신하 있으되 하나는 도총대장(都總大將) 정한담이요, 또 하나는 병부상서(兵部尙書) 최일귀라. 본대 천상익성(天上翼星)으로 자미원 대장성과 백옥루 잔치에서 대전(對戰)한 죄로 상제께 득죄하야 인간에 적강하여 대명국 황제의 신하 되었는지라. 본시 천상지인으로 지략이 유여하고 술법이 신묘한 중에 금산사 옥관도사를 데려다가 별당에 거처하고 술법을 배웠으니 만부부당지용(萬夫不當之勇)이 있고 백만군중(百萬軍中) 대장지재(大將之才)라, 벼슬이 일품이요 포악이 무쌍이라. 만민의 생사는 장중(掌中)에 매여 있고, 일국의 권세는 손 끝에 달렸으니, 초(楚) 회왕(懷王)의 항적(項籍)이요, 당(唐) 명황(明皇)의 안녹산(安祿山)이라. 일생 마음이 천자를 도모(圖謀)코자 하되 다만 정언(正言) 주부(注簿)의 직간(直諫)을 꺼려 하고 또한 퇴재상 강희주의 상소를 꺼려 중지한 지 오래더니 영종황제 즉위 초에 열국제왕(列國帝王)들이 각각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되 오직 토번(吐藩)과 가달이 강포(强暴)만 믿고 천자를 능멸히 하야 조공을 바치지 아니하거늘 한담과 일귀 두 사람이 이때를 타서 천자께 여쭈오대,
폐하 즉위하신 후에 덕피만민(德被萬民)하고 위진사해(威振四海)하며 일국제신이 다 조공을 바치되 오직 토번과 가달이 강포만 믿고 천명(天命)을 거스르니 신 등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남적(南賊)을 항복받아 충신으로 돌아오면 폐하의 위엄이 남방에 가득하고 소신의 공명은 후세에 전하리니 복원(伏願) 황상은 깊이 생각하옵소서. 천자 매일 남적이 강성함을 근심하더니 이 말을 듣고 대희(大喜)왈,
경의 마음대로 기병(起兵)하라. 하시니라.
이때, 유 주부 조회(朝會)하고 나오다가 이 말을 듣고 탑전(榻前)에 들어가 복지(伏地) 주(奏)왈,
듣사오니 폐하께옵서 남적을 치라 하시기로 기병하신단 말씀이 옳으니이까? 천자 왈,
한담의 말이 여차여차(如此如此)하기로 그런 일이 있노라. 주부 여쭈오대,
폐하 어찌 망령되게 허락하였습니까? 왕신은 미약하고 외적은 강성하니 이는 자는 범을 찌름 같고 드는 토끼를 놓침이라. 한낱 새알이 천근지중(千斤之重)을 견디리까? 가련한 백성 목숨 백리사장 고혼(孤魂)되면 근들 아니 적악(積惡)이오 복원 황상은 기병치 마옵소서. 천자 그 말을 들으시고 호의만단(狐擬萬端)하던 차에 한담과 일귀 일시에 합주(合奏)하되,
유심의 말을 듣사오니 살지무석(殺之無惜)이요 오국(誤國) 간신(奸臣) 동류(同類)로소이다. 대국을 저버리고 도적놈만 칭찬하야 개미 무리를 대국에 비하고 한낱 새알을 폐하에게 비하니 일대에 간신이요 만고에 역적이라. 신 등은 저어하건대 유심의 말이 가달을 못 치게 하니 가달과 동심하여 내응(內應)이 된 듯하니 유심을 선참(先斬)하고 가달을 치사이다. 천자 허락하다.
한림학사 왕공열이 유림 죽인단 말을 듣 복지(伏地) 주왈,
주부 유심은 선황제 개국공신 유기의 손이라, 위인이 정직하고 일심이 충전(忠全)하오니 남적을 치지 말잔 말이 사리 당연하옵거늘 그 말을 죄라 하와 충신을 죽이시면 태조황제 사당 안에 유 상공 배향(配享)하였으니 춘추로 행사(行祀)할 때에 무슨 면목으로 뵈오며 유심을 죽이면 직간한 신하 없사올 것이니 황상(皇上)은 생각하와 죄를 용서하옵소서. 천자 이 말을 듣고 한담을 돌아보니 한담이 여쭈오대,
유심을 죄하실진대 만사무석(萬死無惜)이오나 공신의 후예오니 죄목대로 다 못하오나 정배(定配)나 하사이다.
천자, 옳다. 하시고, 황성 밖에 원찬(遠竄)하라.
하시니 한담이 청령(廳令)하고 승상부 높이 앉아 유심을 잡아 내어 수죄(數罪)하는 말이,
너의 죄를 논지(論之)컨대 선참후계(先斬後啓) 당연하나 국은(國恩)이 망극하사 네 목숨을 살려 주니 일후는 그런 말을 말라. 하고 연북(燕北)으로 정배하야,
어서 바삐 발행하라. 만일 잔말하다가는 능지처참(陵遲處斬)하리라.
주부 이 말을 들음에 분심이 창천(漲天)하야 양구(良久)에 하는 말이,
내 무슨 죄 있건데 연북으로 간단 말가. 왕망(王莽)이 섭정(攝政)함에 한실(漢室)이 미약하고 동탁(董卓)이 장난하니 충신이 다 죽것다. 나 죽은 후에 내 눈을 빼어 동문에 높이 달아 가달국 적장 손에 네 머리 떨어지는 줄 완연히 보리라. 지하에 돌아가되 오자서(伍子胥)의 충혼(忠魂)이 부끄럽게 말라. 한담이 이 말을 듣고 분심이 창천하여 왈,
어명이 이러하니 무슨 발명(發明)한다?
하고 궐문에 들어가며 금부도사 재촉하여 유심을 채질하야 연북으로 가라 하는 소리 성화같이 재촉하니 유 주부 하릴없어 적소(謫所)로 가려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일가(一家)가 망극하야 곡성이 진동하더라.
주부 충렬의 손을 잡고 부인더러 하는 말이,
우리 연광이 반이 넘도록 일개 자녀 없었더니 황천이 감동하사 이 아들을 점지하야 봉황의 짝을 얻어 영화를 보렸더니 가운이 소체하고 조물이 시기하여 간신의 참소를 보아 만리 적소로 떠나가니 생사를 아지 못할지라. 어느 날 다시 볼까, 날 같은 인생은 조금도 생각 말고 이 자식 길러내어 후사를 받들게 하면 황천에 돌아가도 눈을 감고 갈 것이요 부인의 깊은 은덕 후세에 갚으리다. 하고 충렬을 붙들고 슬피 울며 하는 말이,
네 아비 무슨 죄로 만리 연경에 가단 말인가. 너를 두고 가는 설움 단산에 나는 봉황 알을 두고 가는 듯, 북해 흑룡이 여의주를 버리고 가는 듯, 통박(痛迫)하고 섧은 원정(怨情) 일구(一口)로 난설(難說)이라. 생각하니 기가 막혀 말할 길이 전혀 없고 일시나 잊자 하니 가슴에 맺힌 한이 죽은들 잊을쏘냐. 너의 아비 생각 말고 너의 모친을 모셔 무사히 지내며, 봄풀이 푸르거든 부자 상면한 줄 알고 있으라. 하며 방성통곡하며 죽도(竹刀)를 끌러 충렬을 채우면서,
구천(九泉)에 상봉한들 부자 신표(信標) 없을쏘냐. 이 칼을 잃지 말고 부디 간수하여 두라.
처자를 이별하고 행장을 바삐 차려 문 밖에 나오니 정신이 아득하여 한 번 걷고 두 번 걸어 열 걸음 백 걸음에 구곡간장 다 녹으며, 일편단심 다 녹겠다. 성중에 보는 사람 뉘 아니 낙루하며 강산 초목이 다 슬퍼한다.
동성문 나서면서 연경(燕京)을 바라보며 영거사(領車使)를 따라 갈 제, 삼 일을 행한 후에 청소령을 지나 옥해관을 당도하니 이때는 추팔월 망간(望間)이라. 한풍(寒風)은 소슬(簫瑟)하고 낙목(落木)은 소소(蕭蕭)한데 정전(庭前)에 국화꽃은 추구수심(秋九愁心) 돋우는데 객창(客窓) 한등(寒燈) 깊은 밤에 촛불로 벗을 삼아 객침 베고 누웠으니 타향의 가을 소리 손의 수심 다 녹인다. 공산(空山)에 우는 두견성은 귀촉도(歸蜀道) 불여귀(不如歸)를 일삼고 청천에 뜬 기러기는 한창(寒窓) 밖에 슬피 울 제, 행역(行役)이 곤한들 잠 잘 가망 전혀 없어 그 밤을 지낸 후에, 이튿날 길을 떠나 소상강을 바삐 건너 멱라수(汨羅水)를 다다르니 이 땅은 초희 황제 만고충신 굴삼려(屈三閭) 간신의 패를 보고 택반(澤畔)에 장사(葬死)하니 후인이 비감(悲感)하여 회사정을 높이 짓고 조문(弔文) 지었으되, 일월같이 빛난 충혼 만고에 빛나 있고 금석 같이 굳은 절개 천추에 밝았으니 이 땅에 지나는 사람 뉘 아니 감심하리.
이렇듯이 슬픈 일을 현판(懸板)에 붙였거늘 유 주부 글을 보니 충심이 직발(直發)하야 행장에 필묵(筆墨)을 내어 들고 회사정 동벽상(東壁上)에 대자로 쓰기를, 대명국 유심은 간신 정한담과 최일귀 참소를 만나 연경으로 적거(謫去)하더니 일월같이 밝은 마음 변백(辨白)할 길 전혀 없고 빙설(氷雪)같이 맑은 절개 뵈일 곳이 바이 없어 멱라수에 지내다가 굴삼려의 충혼 만나 물에 빠져 죽으니라.
쓰기를 다한 후에 물가에 내려가서 하늘께 축수하고 일성(一聲) 통곡에 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 만경창파 깊은 물에 훨썩 뛰어드니, 이때에 영거하던 사신이 이를 보고 전지도지(顚之倒之) 달려들어 손을 잡고 말려 왈,
충성은 천신도 알 것이라. 그대의 죄안(罪案)은 천자에게 매였으니, 명(命)을 받아 적소로 가옵다가 이곳에 죽사오면 나도 또한 죽을 것이요 그대 적소를 버리고 죽사오면 무죄함은 천하의 아는 바라. 천행(天幸)으로 천자 감심하사 쉬이 방송할 줄 모르고 죽어서 충혼이 될지라도 삶만 같을쏘냐. 한사하고 만류하여 백사장에 들어내니 유 주부 하릴없어 회사정을 지나 황주를 다다르니 서호(西湖)가 여기로다. 송나라 망국시(亡國時)에 일품 대신들이 국사를 돌보지 아니하고 풍악(風樂)만 일삼아 일일장취(日日長醉)하는 고로 서호의 고운 태도 서시(西施)에게 비하였으니 어찌 아니 망극하랴. 그 땅을 지나 이삼 삭(二三朔)만에 연경에 당한지라. 유 주부 자사에게 예사(禮射)한 대 자사 본 후에 주부를 인도하여 객실로 전송하니 주부 물러나와 적소로 들어가니, 이때는 동절(冬節)이라 연경은 본디 극한지지(極寒之地)라 삼장백설(三丈白雪) 쌓여 있고, 퇴락한 객실 방에 냉풍(冷風)은 소슬하고 백설을 분분(紛紛)하야 인적(人跡)이 끊어지니 불쌍하고 고상(苦狀)함은 측량치 못할네라.
각설, 이때에 정한담 최일귀가 유 주부룰 참소(讒訴)하야 적소로 보낸 후에 마음이 교만하야 별당으로 들어가 옥관도사를 보고 천자를 도모할 묘책을 물은대, 도사 문 밖에 나와 천기(天氣)를 자세히 보고 들어와 하는 말이,
요사이 밤마다 살피온즉 두려운 일이 황성에 있나이다. 한대 한담이 문왈,
두려운 일이라 하오니 무슨 일이 있나이까. 도사 왈,
천상에 삼태성이 황성에 비췄으되 그 중에 유심의 집에 비췄으니, 유심은 비록 연경에 갔으나 신기한 영웅이 황성 내에 살았으니 그대 도모할 일이 어려울 듯하노라. 한담이 이 말을 듣고 의당에 나와 도사 하던 말을 일귀더러 하니 일귀 대왈(對曰),
도사의 신기함은 천신에게 지내나니 신기한 영웅이 황성 내에 있다 하니 진실로 마음이 황공하여이다. 한담이 왈,
내 생각하니 유심이 연만(年晩)하되 자식이 없는 고로 수년 전에 형산(衡山)에 산제(山祭)하여 자식을 얻었다 하더니, 도사의 말씀이 황성에 있다 하니 의심하건대 유심의 아들인가 하노라. 일귀 왈,
적실히 그러하면 유심의 집을 함몰(陷沒)하여 후환이 없게 함이 옳을까 하노라. 한대 한담이, 옳다. 하고 그날 삼경에 가만히 숭상부에 나와 나졸 십여 명을 차출(差出)하여 유심의 집을 둘러싸고 화약 염초를 갖추어 그 집 사방에 묻어 놓고 화심(火心)에 불붙여 일시에 불을 놓으라고 약속을 정하니라.
이때에 장 부인이 유 주부를 이별하고 충렬을 데리고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더니 이날 밤 삼경에 홀연히 곤하여 침석(枕席)에 졸더니 어떠한 일 노인(一老人)이 홍선(紅扇) 일 병(一柄)을 가지고 와서 부인을 주며 왈,
이날 밤 삼경에 대변(大變)이 있을 것이니 이 부채를 가졌다가 화광(火光)이 일어나거든 부채를 흔들면서 후원 담장 밑에 은신(隱身)하였다가 충렬만 데리고 인적(人跡)이 그친 후에 남천(南天)을 바라보고 갓없이 도망하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옥황께서 주신 아들 화광중에 고혼(孤魂)이 되리라. 하고 문득 간데없거늘 놀라 깨어 보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충렬이 잠을 깊이 들어 있고 과연 홍선 한 자루 금침(衾枕) 위에 놓였거늘 부채를 손에 들고 충렬을 깨워 앉히고 경경불매(耿耿不寐)하던 차에, 삼경이 당함에 일진광풍(一陣狂風)이 일어나며 난데없는 천불이 사면으로 일어나니 웅장한 고루거각(高樓巨閣)이 홍로점설(紅爐點雪) 되어 있고 전후에 쌓인 세간 추풍낙엽(秋風落葉) 되었도다.
부인이 창황중에 충렬의 손을 잡고 홍선을 흔들면서 담장 밑에 은신하니 화광이 충천하고 회신만지(灰燼滿地)하니 구산(丘山)같이 쌓인 기물(器物) 화광에 소멸하였으니 어찌 아니 망극하랴.
사경이 당함에 인적이 고요하고 다만 중문 밖에 두 군사 지키거늘 문으로 못 가고 담장 밑에 배회하더니, 창난한 달빛속으로 두루 살펴보니 중중한 담장 안에 나갈 길이 없었으니, 다만 물 가는 수채 구멍이 보이거늘, 충렬의 옷을 잡고 그 구멍에다가 머리를 넣고 복지(伏地)하여 나올 제, 겹겹이 쌓인 담장 수채로 다 지나 중문 밖에 나섰으니 충렬이며 부인의 몸이 모진 돌에 긁히어서 백옥 같은 몸에 유혈(流血)이 낭자(狼藉)하고 월색(月色)같이 고운 얼굴 진흙 빛이 되었으니 불쌍하고 가련함은 천지(天地)도 슬퍼하고 강산(江山)도 비감(悲感)한다.
충렬을 앞에 안고 사잇길로 나오며 남천을 바라고 갓없이 도망할 제, 한곳에 다다르니, 옆에 큰 뫼가 있으되 높기는 만 장이나 하고 봉우리의 오색 구름 사면에 어리었거늘 자세히 보니 이 뫼는 천제(天祭)하던 남악형산(南嶽衡山)이라. 전일 보던 얼굴이 부인을 보고 반기는 듯, 뚜렷한 천제당(天祭堂)이 완연히 뵈이거늘, 부인이 비회(悲懷)를 금치 못하야 충렬을 붙들고 방성통곡(放聲痛哭)하는 말이,
너 이 뫼를 아난다? 칠 년 전에 이 산에 와서 산제하고 너를 낳았더니 이 지경이 되었으니 너의 부친은 어데 가고 이런 변을 모르는고. 이 산을 보니 네 부친 본 듯하다. 통곡하고 싶은 마음 어찌 다 측량하리. 충렬이 그 말 듣고 부인의 손을 잡고 울며 왈,
이 산에 산제하고 나를 낳았단 말인가? 적실히 그러하면 산신은 이러한 연유(緣由)를 알건마는 산신도 무정하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목이 매어 말을 못하거늘 충렬이 위로한대 이윽히 진정하야 충렬을 앞세우고 변양수를 건너 회수 가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서산에 걸려 있고 원촌(遠村)에 저녁 내 나고 청강(淸江)에 놀던 물새는 양류(楊柳) 속에 날아들고 청천에 뜬 가마귀 석운(夕雲)간에 울며 들 제, 해상(海上)을 바라보니 원표(遠標)에 가는 돛대 저문 안개 끼어 있고 강촌(江村)에 어적(漁笛) 소리 세우(細雨) 중에 흩날렸다.
슬픈 마음 진정하고 충렬의 손을 잡고 물가에 배회하되 건너갈 배 전혀 없어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마지아니하더라.
이때에, 정한담 최일귀 유심의 집에다가 불을 놓고 사이로 엿보더니 일진광풍에 화광이 일어나며 웅장한 고루거각에 일편 재물 없었으니,
그 안에 든 사람 씨도 없이 다 죽겠다.
하고 별당에 들어가 도사를 보고 다시 물어 가로되,
전일에 우리 등이 대사(大事)를 이루고자 하더니 선생의 말씀이, 영웅이 있다하고 근심하더니 이제도 그러한지 다시 망기(望氣) 하옵소서.
도사 밖에 나와 천기를 살펴보고 방으로 들어와 하는 말이,
이제는 삼태성이 황성을 떠나 변양 회수에 비췄으니 그 일이 수상한지라, 내 생각하니 유심의 가권(家眷)이 적소(謫所)를 찾으랴 하고 회수 가에 갔는가 싶으노라.
한담이 이 말을 듣고 안마음에 생각하되,
화광이 그렇게 엄장(嚴壯)하니 일정 소멸하여 죽었다 하였더니 일정 영웅이면 벗어남이 괴이치 아니하다.
하고 외당에 나와 날랜 군사 다섯 명을 속출하여 분부하되,
너희 등이 바삐 이 밤에 변양 회수 가에 가서 나의 전갈로 분부하되 금명일간(今明日間) 어떠한 여인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물을 건너려 하거던 즉시 결박하여 물에 넣으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회수의 사공과 너희 등을 낱낱이 죽이리라. 한대 나졸이 대경(大驚)하여 회수에 나는 듯이 달려오니 과연 물가에 인적이 있어 여인의 울음소리 들리거늘 사공을 불러내어 한담의 하던 말을 낱낱이 고하니 사공이 대경하여 대왈,
감히 대감의 영(令)을 죽사온들 피하리까.
하고 소선(小船) 일 척을 대이고 고대(苦待)하더라.
부인이 충렬을 데리고 건널 배 없어 물가에 주저하던 차에 난데없는 일 척 소선이 떠오며 부인을 청하거늘, 그 간계(奸計)를 모르고 충렬을 이끌고 배에 올라 중류(中流)에 당함에 일진광풍이 일어나며 양 돛대 선창에 자빠지고, 난데없는 적선(賊船)이 달려들어 부인을 잡아매고 무수한 적군들이 사면으로 달려들어 부인을 결박하여 적선에 추켜 달고 충렬을 물 가운데 내던지니 가련하다. 유 주부 천금귀자(千金貴子) 백사장(白沙場) 세우중(細雨中)에 무주고혼(無主孤魂) 되겠구나 만경창파(萬頃蒼波) 깊은 물에 풍랑이 일어나니 일점혈육(一點血肉) 충렬의 백골인들 찾을쏘냐 육신(肉身)인들 건질쏘냐. 월색은 창망(蒼茫)하고 수운(愁雲)은 적막하야 명명(冥冥)한 구름 속에 강신(江神)이 우는 소리 강산도 슬퍼하고 천신도 비감하거든 하물며 사람이야 일러 무엇하랴.
이때에 장 부인이 도적에게 결박하야 배 안에 거꾸러져 충렬을 찾은들 수중에 빠졌거든 대답할 수 있을쏘냐. 한 번 불러 대답 않고 두 번 불러 소리 없으니 천만 번을 넘부른들 소리 점점 없어지고 사면에 있는 것이 흉악한 도적놈이 또한 노를 바삐 저어 부인을 재촉하여 소리 말고 가자 하니 부인이 망극하여 물에 빠져 죽고자 한들 큼직한 배 닻줄로 연약한 가는 몸을 사면으로 얽었으니 빠질 길이 전혀 없고 결항(結項)하여 죽자 한들 섬섬한 수족(手足)을 빈틈없이 결박하였으니 결항할 길 전혀 없어 도적의 배에 실려 하릴없이 잡혀 가니 동방이 밝아오며 또 한곳에 배를 매고 부인을 잡아내어 마상에 앉히고 말을 채질하여 달려가니 세상에 불쌍한들 이에서 더할쏘냐.
이때에 회수 사공 마용이라 하는 놈이 삼자(三子)를 두었으되 다 용맹이 과인(過人)하고 검술이 신묘한지라, 장자 이름은 마철이요 일찍 상처(喪妻)하고 아직 취처(娶妻)치 못하였으니 마침 이때를 당하여 장 부인의 얼굴을 보고 월태(月態)는 감추었으나 화용(花容)은 늙지 않고 수색(愁色)이 만면(滿面)하야 골격이 수려하나 아직은 춘색(春色)이 그저 있는지라. 대체 장 부인이 충렬을 낳을 때에 옥황(玉皇)이 선녀로 하여금 천도(天桃) 한 개 먹였으니 연광(年光)은 반이나 춘색은 불변이라. 그런 고로 회수 사공 놈이 충렬을 물에 넣고 부인은 데려다가 아내를 삼고자 하여 이런 변을 짓더라.
이때에, 장 부인이 하릴없어 도적의 말에 실려 한곳에 다다르니 태산준령 암석을 의지하여 수삼가(數三家) 마을이 있는지라. 석경(石逕) 아래 밝은 날에 초옥(草屋) 속에 들어가니, 큰 굴방이 있으되 사변에 주석으로 싸고 출입하는 문은 철편으로 지어 달고 그 방에 부인을 가두오니 가련하다 장 부인이여! 팔자도 무쌍(無雙)하고 신세도 망칙하다. 수대(數代) 장 상서 규중 여자로 유씨에게 출가하여 연광이 반이 넘도록 무자녀(無子女)하다가 천행으로 자식 하나 두었더니 만리 연경에 가군(家君)잃고 천리 해상에 자식을 잃었으되 모진 목숨 죽지 못하고 도적놈에게 잡혀 와 이 지경이 되었도다. 분벽사창(粉壁紗窓) 어데 두고 도적놈의 토굴방에 앉았으며, 천금 같은 자식 잃고 만금 같은 가군 이별하고 나 혼자 살아나서 구천(九泉)에 돌아간들 유 주부를 어찌 보며, 인간에 살아 있은들 도적놈을 어찌 볼꼬, 무수히 통곡하니 기운이 진하여 토굴 속에 누웠더니, 비자(婢子) 한 년이 석반(夕飯)을 차려 왔거늘 기진하여 먹지 못하고 도로 보내니 또한 미음을 가지고 와서 먹기를 권하니 부인 안마음에 생각하되, 내 아들 충렬은 천신이 감동하고 신령이 도운 바라. 일후에 응당 귀히 될 것이니 내 이제 연경으로 가서 주부를 데리고 충렬을 볼진대 인제 죽으면 후회가 있으리라.
하고 강작(强作)하여 일어 앉아 미음을 마시니 비자 반겨 적장에게 고한대, 도적이 대희(大喜)하여 그날 밤에 토굴방에 들어가 예(禮)하고 앉으며 왈,
부인은 이러한 누지(陋地)에 와 나 같은 이를 섬기고저 하니 진실로 감격하오이다.
부인이 그 말을 들음에 분심이 탱천(撐天)하나 신세를 생각하니 연연 약질(弱質)이 함정에 든 범 같은 고로 하릴없어 거짓 답왈,
팔자 기박(奇薄)하여 수중에 죽게 되었더니 그대 나 같은 잔명(殘命)을 구완하여 백년동거(百年同居)하고자 하니 감격하온 말씀 어찌 다 측량하리요마는 다만 미안한 일이 있으니 금월 초삼일은 나의 부친 기일(忌日)이라 아무리 여자라도 부친의 제삿날 당하여 어찌 길례(吉禮)를 지내오며 또한 백년을 해로할진대 어찌 기일을 가리지 아니하리오.
도적이 그 말을 듣고 즐거운 마음 측량치 못하여 정답게 하는 말이,
진실로 그러할진대 장인의 제삿날에 사윈들 어찌 아니 정성을 하리요. 하고,
제물을 극진히 장만할 것이니 부디 염려 말고 안심하옵소서.
부인이 치사하고 조금도 의심치 아니하고 반겨하니 도적이 감사하여 단무타의(但無他意)하고 안으로 들어가며 비자를 보내어 부인을 모시라 하니, 비자 들어와 곁에 누워 잠을 깊이 들어 인적이 고요하거늘, 부인이 그날 밤 삼경에 도망하여 나오더니 방에 자는 비자년이 문득 잠을 깨어 만져 보니 부인이 간데없고 중문이 열렸거늘 부인을 부르며 쫓아오거늘 부인이 대경하여 거짓 앉아 뒤보는 체하고 비자를 꾸짖어 왈,
연일 고생하여 목이 마르기로 냉수를 많이 먹었더니 배가 불안하여 나와 뒤를 보거늘 네 이런 잔말을 하여 집안을 놀래느냐.
비자 무료하여 방으로 들어가고 부인도 속절없이 방으로 들어가 자더니, 그 밤을 지냄에 이튿날 적한(賊漢)이 부인의 말에 속아 노속(奴屬)을 데리고 제물을 장만하거늘 부인이 목욕하고 방으로 들어와 사면을 살펴보니 동벽상 위에 무엇이 놓였거늘 떼어 보니 기묘한 것이로다. 비목비석(非木非石)이요 비옥비금(非玉非金)이라 광채 찬란하여 일광을 가리우고 훈색(暈色)이 휘황하여 안채(眼彩)에 쏘이는 중의 천지조화(天地造化)를 모모이 갈마 있고 강산정기(江山精氣)는 복판마다 새겼으니 고금(古今)에 못보던 옥함(玉函)이라 용궁조화(龍宮造化) 아니면 천신(天神)의 수품(手品)이라 전면(前面)을 살펴보니 황금대자(黃金大字)로 뚜렷이 새겼으되, 대명국도원수(大明國都元首) 유충렬을 개탁(開坼)이라.
하였거늘 부인이 옥함 보고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마음에 생각하되,
세상에 동성(同姓) 동명(同名)이 또 있단 말가. 진실로 내 아들 충렬의 기물(器物)일진대 어찌 이곳에 있는고?
하며,
충렬아, 너의 옥함은 여기 있다마는 너는 어디 가고 너의 기물을 모르느냐.
옥함을 고쳐 싸서 그곳에 놓고 밤들기를 기다리더니, 밤이 당함에 적한이 재물을 많이 장만하야 부인의 방에 들여왔거늘 부인이 받아 차차로 진설(陳設)하였다가 자야반(子夜半)을 지냄에 제사를 파하고 음복(飮福)한 후에 각각 잠을 잘새, 적한이며 노속 등이며 종일토록 곤하기로 가권이 다 잠이 들었거늘 부인이 옥함을 내어 행장(行裝)에 깊이 싸 가지고 밖에 나와 북두칠성을 바라고 갓없이 도망할 제, 한 곳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밝으며 큰 길이 내닫거늘 행인더러 물은즉 영릉관 대로라 하거늘 주점에 들어가 조반을 걸식하고 종일토록 가되 몇 리를 온지 모를러라.
한곳에 당도하니 앞에 큰 물이 있고 또한 풍랑은 도천(到天)하며 창파(蒼波)는 만경(萬頃)이라 사고무인적(四顧無人跡)한데, 청산만 푸르러 있고 십 리 장강 빈 물가에 궂은 비는 무슨 일이고, 무심한 저 백구는 사람 보고 놀래는 듯 이리저리 날아갈 제, 슬픈 마음 긴 한숨에 피 같은 저 눈물 뚝뚝 떨어져 백사장에 나려지니 모래 위에 붉은 점이 만점도화(滿點桃花) 핀 듯하고 무정한 저 물새는 춘국(春國)인가 날아들고 유의(有意)한 청강성(淸江聲)은 속절없이 목맺히니 어찌 아니 한심하리.
부인이 종일토록 행역(行役)에 기운이 곤하여 인가를 찾아가 밤을 지내고저 하나 배 없어 물가에 주저하더니 이때에 서산에 일모(日暮)하고 한수(漢水)에 명생(冥生)하니 진퇴유곡이라 하릴없어 물가에 찾아가니 그 길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산곡(山谷) 사이로 연하여 있거늘 길을 잃지 아니하고 점점 들어가니 무인적막(無人寂寞)한데 다만 들리나니 두견 접동 울음소리와 슬픈 원숭이 소리뿐이로다. 청림(靑林)을 더위잡아 간수(澗水)를 밟아 가니 창망한 달빛속에 수간(數間) 초옥이 뵈이거늘 반겨 급히 들어가니 시문(柴門)에 개 짖으며 한 노구(老軀) 문 밖에 나오거늘, 노구 보고 예를 한대, 노구 답례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하니 부인이 들어가 앉으며 살펴보니 사면에 여복이 없고 남복만 걸려 있고 또한 곁에 방으로서 남정 소리 나거늘 심신이 불안하여 좌불안석(坐不安席)이라. 석반을 먹은 후에 노구할미 문 왈,
그대는 뉘집 부인이관대 어찌 혼자 이곳에 왔나이까?
부인이 대왈,
나는 본디 황성 사람으로 친정에 갔다가 해상에서 수적(水賊)을 만나 명을 도망하야 이곳에 왔나이다.
노구 이 말 듣고 곁방으로 들어가 자식더러 일러 왈,
저 여인의 말을 들으니 가장 고이하도다. 수일 전에 들으니 석장동 당질(堂姪)놈이 회수 사공하다가 금월(今月) 초(初)에 해상에서 한 부인을 얻어 백년 동거코자 한다더니 저 여인의 말을 들으니 수적을 만나 도망하여 왔다 하니 정녕코 당질놈이 얻은 계집이라. 바삐 이 밤 삼경에 석장동을 득달하야 마철을 보고 데려다가 이 계집 잃지 말라.
한대 노구 자식이 이 말을 듣고 급히 후원으로 들어가 말 한 필 내어 타고 바삐 채질하여 나서니 본디 이 말은 천리마라 순식간에 석장동에 당도하였는지라.
이때에, 장 부인이 행역이 곤하여 노구 방에 잠을 깊이 들었더니 비몽간(非夢間)에 한 노옹이 언연(偃然)히 들어와 부인 곁에 앉으며 왈,
금야(今夜)에 대변(大變)이 날 것이니 부인은 무슨 잠을 자시나이까? 급히 일어나 동산에 올라가 은신하였다가 변이 일어나거든 바삐 물가에 내려가면 일엽표주(一葉瓢舟) 물가에 있을 것이니 그 배를 타고 급히 환(患)을 면하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천금귀체(千金貴體)를 안보(安保)하기 어려울지라. 하고 간데없거늘 놀라 깨달으니 남가일몽이라. 급히 일어나 보니 노구도 간데 없거늘 행장을 옆에 끼고 동산에 올라가 은신하고 동정을 살펴보니 과연 남으로서 일성방포(一聲放砲) 소리 나며 화광이 충천한 중에 무수한 도적이 사면으로 에워싸고 한 도적이 함성 왈,
그 계집이 여기 있느냐?
하는 소리 산곡(山谷)이 진동하니 부인이 대경하여 지척을 분별치 못하고 전지도지(顚之倒之) 동산을 넘어 물가에 다다르니 사고무인적이 적막한데 난데없는 일엽표주 물에 매였으며, 배 가운데 일개 선녀(仙女) 선창(船艙) 밖에 나서며 부인을 재촉하여 배 안에 들라 하니, 부인이 창황중에 배에 올라 선녀를 보니, 머리 위에 옥련화(玉蓮花)를 꽂고 손에는 봉미선(鳳尾扇)을 들고 청의홍상(靑衣紅裳)에 백옥패(白玉佩)를 찼으니 진짓 선녀요 인간 사람 아니로다. 부인이 황송하야 국궁배례(鞠躬拜禮) 왈,
박명한 천첩을 이다지 구완하니 선녀의 깊은 은덕 어찌 다 갚으리까? 선녀 대왈,
소녀는 남해 용왕 장녀옵더니 금일에 부왕이 분부하시기를 대명국 유충렬의 모 장 부인이 금야에 도적의 변을 볼 것이니 네 바삐 가 구완하라 하시기로 왔사오니 부인의 명은 상제도 아는 바라 소녀 같은 계집이야 무슨 은혜 있다 하리까. 부인이 상제께 치하할 제 마지못하야 도적이 벌써 물가에 다다라 방포일성에 난데없는 화광은 강수가 끓는 듯하고 일 척 소선(小船)에 양 돛을 높이 달아 살같이 달려드니 부인이 탄 배에서 두어 발 남은지라 적선(賊船) 중 일원(一員) 도적이 창검을 높이 들고 선창을 두드리며 함성하는 말이,
네 이년 어디로 갈다? 천신이 아니거든 물 속으로 들어갈까. 가지말고 게 있거라. 나의 호통 한 소리에 나는 새라도 떨어지고 닫는 짐승도 못 가거든 요망한 계집이 어디로 가려 하는다? 이렇듯이 소리하니 배 가운데 있는 부인의 혼백이 있을쏘냐. 창황중에 돌아보니 도적의 배 선창으로 달려드니 부인이 하릴없이 통곡하며 하는 말이,
무지한 도적놈아 나는 남경 유 주부의 아낼러니 간신의 참소를 만나 이 지경이 되었은들 너의 아내 될 수 있느냐. 차라리 물에 빠져 청백고혼(淸白孤魂) 되리라.‘
도적이 이 말을 듣고 분심이 탱천하야 창검으로 냅다 칠 제, 부인의 탄 배 거의 잡게 되었더니 난데없는 광풍이 동남으로 일어나며 백사장에 쌓인 돌이 풍편(風便)에 흩날려 비온 듯이 떨어지니, 만경창파 깊은 물이 풍랑이 도도(滔滔)하여 벽력같이 내려지니 강산이 두렵거든 도적놈의 일엽주가 제 어이 견딜쏘냐. 풍랑 소리 천지가 진동하며 적선의 양 돛대가 부러져 물 가운데 내려지니 천하 항장사(項壯士)라도 해상에서 배를 타고 가자 한들 돛대가 없었으니 어디로 가리요. 적선은 하릴없어 빈 배만 둥둥 뜨고 부인의 일엽주는 용왕의 표주라 바람 분들 파선(破船)할쏘냐. 범범(汎汎) 중류(中流)에서 높이 떠 살같이 다라갈 제 그 배 앞은 고요하여 창파는 잔잔하고 월색은 은은한데 옥황이 분부하여 용왕이 주신 배거든 염려가 있을쏘냐.
순식간에 배를 언덕에 대이고 부인을 인도하여 암상에 내린 후, 부인이 정신을 진정하여 무수히 치사하고 행장을 간수하여 물가로 올라갈 제 기운이 진하여 촌보(寸步)를 못 갈러라.
종일토록 가다가 한곳에 다다르니 산천은 수려하고 지형은 단정하니 이 땅은 친덕산 할임동이라. 그곳을 당도함에 날이 또한 저물거든 부인이 노곤(勞困)하여 물가에 쉬어 앉아 잠깐 졸더니, 전일 현몽(現夢)하던 노옹이 부인을 깨워 왈,
부인은 악(惡)이 다 진(盡)하였으니 이 산곡으로 들어가면 자연 구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바삐 가라.
하거늘 놀래 깨어 보니 청산은 울울하고 시내는 잔잔한지라. 일어나 차차 들어갈 제, 백옥 같은 고운 수족으로 악한 산곡 길을 발 벗고 들어가니 모진 돌에 채이며, 모진 나무에도 채이며 열 발가락이 하나도 성한 데 없어 유혈이 낭자하고 일신이 흉측하니 세상이 귀찮은지라. 월태화용(月態花容) 고운 얼굴 수심(愁心)이 만면(滿面)하여 피골(皮骨)이 상련(相連)하여 살 마음이 전혀 없어 죽을 마음만 간절하다. 슬피 앉아 우는 말이,
만리 연경을 가자 하니 연경이 사만 오천육백 리라. 여자의 일신이 천산만수(千山萬水)를 어찌 가며, 몇 날이 못하여서 이러한 변을 당한대 연경으로 가다가 내 절개 훼절(毁節)하고 내 목숨 살 수 없겠다. 차라리 이곳에서 죽어 백골이나 고향으로 흘러 가거나 남은 혼백이라도 황성으로 다시 보리라. 행장을 끌러 옥함을 내어 놓고 비단수건으로 주홍 글자를 새겨 쓰되,
모년 모월 모일에 대명국 동성문 내에 사는 유충렬 모 장씨는 옥함을 내 아들 충렬에게 전하노라 죽은 혼백이라도 받아보라.
자자(字字)이 새겨 수건으로 옥함을 매어 물 속에 넣고 대성통곡(大聲痛哭)하며 치마를 무름쓰고 물에 빠져 죽으려 할 제, 산곡 사이로 어떠한 여인이 동이를 곁에 끼고 금간수에서 물을 긷다가 부인을 보고 급히 내려와 만류하여 암상에 앉히고 문왈,
부인은 무슨 일로 이러하신고? 내 집으로 가자.
하거늘 부인이 문득 노인이 현몽하던 말을 생각하고 따라가니 암상 석경 새에 수간모옥(數間茅屋)이 정묘한데 채운이 어리었으니 군자(君子) 사는 데요, 신선(神仙) 있는 곳이로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갈건야복(葛巾野服)은 벽상에 걸려 있고 만 권 서책은 안상(案上)에 놓였으니 부인의 마음이 반갑고 안정하여 고생하던 전후 말과 연경을 찾아 가다가 중로(中路)에서 봉변하던 말을 낱낱이 고한대, 주인도 낙루(落淚)하고 손도 슬피 우니 그 아니 가련한가.
원래 이 집은 대명국 성종황제 때에 벼슬하던 이인학의 아들 이 처사의 집이니 인학의 모친은 유 주부의 종숙모(從叔母)라 이별한 지 적년(積年)이라 처사는 마음이 청백하고 행실이 표치(標致)하여 벼슬로 있더니 하직하고 산중에 들어와 농업을 힘쓰며 학업을 일삼으니 심양강 오류촌(五柳村)에 도 처사(陶處士)의 행실이요, 부춘산(富春山) 칠리탄(七里灘) 엄자릉(嚴子陵)의 절개로다. 세상 공명은 장자방(張子房)이 벽곡(辟穀)하고 인간 부귀는 소 태부(疏太傅)가 산금(散金)하니 만고의 일인이요 일대의 하나이라. 뜻밖에 부인의 말을 듣고 대경하야 중당에 마저 예필(禮畢)후에 전후수말(前後首末)을 다 못하고 낙루하여 왈,
주부 처숙(妻叔)을 이별한 지 적년(積年)이라, 그다지 인사(人事) 변하여 이 지경이 될 줄 어찌 알리요.
서로 울며 마음을 위로하여 음식 거처를 편히 공양하니 부인의 일신은 무양(無恙)하나 다만 흉중에 맺힌 한이 종시 떠나지 아니하여 세월을 보내더라.
회사정에 행봉대인(幸逢大人)하고
옥문관에 적거노재상(謫居老宰相)하다
각설, 이때에 충렬은 모친을 잃고 물에 빠져 살길이 없었더니 문득 두 발이 닿거늘 자세히 보고 살피어보니 물 속에 큰 바위라. 그 위에 올라앉아 하늘을 우러러 어미를 찾더니 간데없고 사면을 돌아보니 청산은 은은하고 다만 들리느니 물소리뿐이로다. 강천에 낭자한 원숭이 소리 삼경에 슬피 우니 충렬이 통곡하며 섰더니, 이때에 남경 장사들이 재물을 많이 싣고 북경(北京)으로 떠나갈 제 회수에 배를 놓아 범범중류 내려가더니 처량한 울음소리 풍편에 들리거늘 선인 등이 고이하여 배를 바삐 저어 우는 곳을 찾아가니 과연 일 동자(一童子) 물에서 슬피 울거늘 급히 건져 주중(舟中)에 놓고 연고를 물은즉,
해상에서 수적을 만나 어미를 잃고 우나이다.
선인 등이 비감하여 물가에 내려놓고 갈 데로 가라 하며 배를 띄워 북경으로 행하더라.
충렬이 선인을 이별하고 정처없이 다니다가 촌촌이 걸식하며 곳곳이 차숙(借宿)할 제, 조동모서(朝東募西)하니 추풍낙엽이요, 거래무종적(去來無蹤迹)하니 청천(靑天)에 부운(浮雲)이라. 얼굴이 치폐(致斃)하고 행색이 가련하다. 흉중(胸中)에 대장성(大將星)은 때 속에 묻혀 있고, 배상(背上)에 삼태성(三台星)은 헌 옷 속에 묻혔으니 활달한 기남자(奇男子)가 도리어 걸인(乞人)이라. 담만 쌓던 부열(傅說)이도 무정(武丁)을 만나 있고, 밭만 갈던 이윤(伊尹)이도 은왕(殷王) 성탕(成湯) 만나 있고, 위수(渭水)에 여상(呂尙)이도 주 문왕(周文王) 만났건만 유수(流水)같이 가는 광음 훌훌히 흘러가니 충렬의 고운 연광 십사 세에 당한지라. 천지로 집을 삼고 사해에 밥을 부쳐 도로에 개걸(丐乞)타가 한곳에 다다르니 이 땅은 초국(楚國)이라. 영릉을 지나다가 장사(長沙)를 바라보고 한 물가에 다다르니 창망한 빈 물가에 슬픈 원숭이 소리로다. 백사장 세우중(細雨中)에 백구(白鷗)는 비거비래(飛去飛來)뿐이로다. 후면을 돌아보니 녹죽(綠竹) 창송(蒼松) 우거지고 적막한 옛 정자 풍랑 속에 보이거늘 그곳에 올라가니, 이 물은 멱라수(汨羅水)요 이 정자는 회사정이라 하는 정자라. 유 주부가 글을 쓰고 물에 빠져 죽고자 하던 곳이라. 마음이 절로 비감하여 정자에 올라가 사면을 살펴보니, 제일은 굴 삼려(屈三閭)의 행장(行狀)을 써 붙이고 그 밑에 만고 문장 풍월이며 행인(行人) 과객(過客) 노정기(路程記)를 사면에 붙였더라.
동벽상에 새로 두 줄 글이 있거늘 그 글을 보니 모년 모월 모일에 남경 유 주부는 간신의 폐를 보고 연경으로 적거하다가 멱라수에 빠져 죽노라 하였거늘 충렬이 그 글을 보고 정상(亭上)에 거꾸러져 방성통곡(放聲痛哭) 왈,
우리 부친이 연경으로 갔는 줄만 알았더니 이 물에 빠졌도다. 나 혼자 살아나서 세상에 무엇하리. 회수에 모친 잃고 멱라수에 부친 잃었으니 하면목(何面目)으로 세상을 살아날꼬. 나도 함께 빠지리라. 하고 물가에 내려가니 충렬이 울음소리 용궁(龍宮)에 사무쳤는지라. 천신이 무심할까.
이때에 영릉 땅에서 사는 강희주라 하는 재상이 있으되 소년 등과(登科)하야 승상 벼슬하더니 간신의 참소(讒訴)를 만나 퇴사(退仕)하야 고향에 돌아왔으나, 일단 충심이 국가를 잊지 못하야 매양 천자 오결(誤決)하는 일이 있으면 상소하여 구완하니 조정이 그 직간(直諫)을 꺼려하되 그 중에 정한담과 최일귀가 가장 미워하더니 마침 본부에 갔다가 회로(回路)에 우편 주점(酒店)에서 자더니 비몽간(非夢間)에 오색 구름이 멱라수에 어리었는데 청룡(靑龍)이 물 속에 빠지려 하며 하늘을 향하여 무수히 통곡하며 백사장에 배회(徘徊)하거늘 내념(內念)에 괴이하여 날새기를 기다리더니 계명성(鷄鳴聲)이 나며 날이 장차 밝거늘 멱라수에 바삐 오니 과연 어떠한 동자 물가에 앉아 울거늘 급히 달려들어 그 아이 손을 잡고 회사정에 올라와 자세히 물어 왈,
너는 어떠한 아이로서 어데로 가며 무슨 연고로 이곳에 와 우는가? 충렬이 울음을 그치고 대왈,
소자는 남경 동성문 내에 사는 정언주부 유공의 아들이옵더니 부친께옵서 간신의 참소를 만나 연경으로 적거하시다가 이 물에 빠져 죽은 종적이 회사정에 있는 고로 소자도 이 물에 빠져 죽고자 하옵니다. 강 승상이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大驚失色)하여 왈,
이것이 웬 말이냐. 근년에 노병(老病)으로 황성을 못 갔더니 그다지 인사 변하여 이런 변이 있단 말인가. 유 주부는 일국에 충신이라 동조(同朝)에 벼슬하다가 나는 연만(年晩)하기로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유 주부 이런 줄을 몽중에나 생각하였으랴. 의외(意外)라 왕사(往事)는 물론(勿論)하고 나를 따라가자. 하니 충렬이 왈,
대인은 소자를 생각하와 가자 하옵시나 소자는 천지간 불효자라 살아서 무엇하며 또한 모친이 변양 회수중에 죽삽고, 부친은 이 물가에 죽었사오니 소자 혼자 살 마음이 없나이다. 승상이 달래어 왈,
부모가 구몰(俱沒)한데 너조차 죽는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이 자식 낳아서 좋다 하는 것이 후사(後嗣)를 끊기지 아니함이라. 너조차 죽게 되면 유 주부 사당에 일점향화(一點香火) 있을쏘냐. 잔말말고 따라가자. 하시니 충렬이 하릴없어 강 승상을 따라가니 영릉땅 월계촌이라. 인가가 즐비한데 벽제(辟除) 소리 요란하고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반공에 솟았는데 수호(繡戶) 문창(紋窓)이 있고 주륜취개(朱輪翠蓋) 왕래한대 인물이 준수(俊秀)하더라.
승상이 충렬을 외당에 두고 안으로 들어가 부인 소씨더러 충렬의 말을 낱낱이 하니 소씨 이 말을 듣고 충렬을 청하여 손을 잡고 낙루하며 왈,
네가 동성문 내 사는 장 부인의 아들이냐? 부인이 연만토록 자식이 없음에 날과 같이 매일 한탄하더니 장 부인은 어찌하여 저러한 아들을 두었다가 영화를 다 못 보고 황천객이 되었으니 세상사 허망하다. 간신의 해를 입어 충신이 다 죽으니 나라인들 무사하랴. 다른 데 가지 말고 내 집에 있으라. 하시니 충렬이 배사(拜謝)하고 외당으로 나오니라.
이때 강 승상이 아들은 없고 다만 일녀(一女)를 두었는지라. 부인 소씨 여아를 낳을 적에 일원 선녀 오운(五雲)을 타고 내려와 소씨를 대하여 왈,
소녀는 옥황 선녀옵더니 연분(緣分)이 자미원 대장성과 한가지로 있다가 소녀를 강문(降門)에 보냄에 왔사오니 부인은 애휼하옵소서.
하거늘 부인이 혼미(昏迷)중에 여아를 탄생하니 용모 비범하고 거동이 단정하여 시서(詩書) 음률(音律)을 무불통지(無不通知)하니 여중군자(女中君子)요 총명(聰明) 지혜 무상이라. 부모 사랑하야 택서(擇婿)하기를 염려하더니 천행으로 충렬을 데려다가 외당(外堂)에 거처하고 자식같이 길러낼 제 충렬의 상(相)을 보니, 구불가언(口不可言)이로다. 부귀(富貴) 작록(爵祿)은 인간에 무쌍이요 영웅준걸(英雄俊傑)은 만고 제일이라. 승상이 대희하야 내당에 들어가 부인더러 혼사를 의논하니 부인 대희하여 왈,
내 마음도 충렬을 사랑하더니 승상의 말이 또한 그러할진대 불수다언(不數多言)하고 혼사를 지내옵소서.
승상이 밖에 나와 충렬의 손을 잡고,
네게 대사(大事)를 진탁(眞託)할 말이 있다. 노부(老父) 말년에 무남독녀(無男獨女)를 두었더니 금일로 볼진대 너의 천정(天定)이 적실하니 이제 백년고락(百年苦樂)을 네게 부치노라. 하신대 충렬이 궤좌하여 낙루하며 여쭈오되,
소자 같은 잔명을 구원하여 슬하에 두고자 하옵시니 감사무지(感謝無地)로되, 다만 통박(痛迫)하온 일이 흉중에 사무쳤나이다. 소자 박복하와 양친이 죽은 줄도 모르고 취처(娶妻)하오면 인간에 죄인이라 글로 한이로소이다. 승상이 그 말 듣고 비감하여 충렬의 손을 잡고 왈,
그도 일시 권도(權道)라. 너의 집 시조공(始祖公)도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장문(張門)이 취처하였다가 성군(聖君)을 만나 개국공신(開國功臣)되었으니 조금도 설워 말라. 하시고 즉시 택일하여 길례(吉禮)를 행하니 신랑 신부의 아름다운 것이 선인(仙人) 적강(謫降) 적실하다. 예를 파하고 방으로 들어가 사면을 살펴보니 빛나고 빛난 것이 일구난설(一口難說)이요. 일필난기(一筆難記)로다. 동방(洞房) 화촉 깊은 밤에 신랑 신부 평생 연분 맺었으니 그 사랑한 말은 어찌 다 측량하며 어찌 다 기록하리.
밤을 지낸 후에 이튿날 승상 양주(兩主)께 뵈온대 승상 부부 즐거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더라.
이러구러 세월이 여류(如流)하여 유생의 나이 십오 세라. 이때에 승상이 현서(賢婿)를 얻고 말년에 근심이 없으나 다만 유 주부 간신의 해를 보아 멱라수에 죽음을 생각하니 분심이 직발(直發)하여 나라에 글을 올려 유 주부를 설원(雪冤)코자 하여 즉시 황성을 가려 하거늘 유생이 만류(挽留)하여 왈,
대인의 말씀은 감격하오나 간신이 만조(滿朝)하와 국권(國權)을 아셨으니 천자 상소를 듣지 아니할까 하나이다.
승상이 불청(不聽)하고 급히 행장을 차려 황성에 올라가, 퇴재상 권공달의 집에 사처(私處)를 정하고 상소를 지어 승지(承旨)를 불러 천자께 올리라 하더라.
그 상소에 하였으되,
전승상(前丞相) 강희주는 근돈수백배(謹頓首百拜)하옵고 상소우폐하전(上疏于陛下前)하나이다. 황공하오나 충신은 국가지본심(國家之本心)이요, 간신을 물리치고 충신을 내세워 인정(仁政)을 행하시고 덕을 베푸사 창생(蒼生)을 살피시면 소신(小臣) 같은 병골(病骨)이라도 태고순풍(太古舜風) 다시 만나 청산백골(靑山白骨)이나 좋은 땅에 묻힐까 하였더니 간신의 말을 듣삽고 주부 유심을 연경으로 원찬(遠竄)하시니 선인(先人)의 하신 말씀 인군과 신하 보기를 초개(草芥)같이 하여 밖으로 충신의 입을 막고 간신의 악을 받아 국권(國權)을 앗았으니 어찌 아니 한심하오리까. 왕망(王莽)이 섭정(攝政)함에 왕실(王室)이 미약하고 회왕(懷王)이 위태함에 항적(項籍)이 죽였으니 복원(伏願) 황상은 깊이 생각하옵소서 신이 비록 죽는 날이라도 사은(思恩) 해(海) 같사오니 복원 황상은 충신 유심을 즉시 방송(放送)하와 폐하를 돕게 하옵소서. 주달하올 말씀 무궁하오나 황공하와 그치나이다.
하였거늘 천자 상소를 보시고 대로(大怒)하여 조정에 내리어 보라 하신대, 이때 정한담 최일귀, 강희주의 상소를 보고 대분(大忿)하여 즉시 궐내(闕內)에 들어가 여쭈오되,
퇴신(退臣) 강희주의 상소를 보오니 대역부도(大逆不道)라. 충신을 왕망에게 비하여 폐하를 죽인다 하오니 이놈을 역률(逆律)로 다스리어 능지처참(陵遲處斬)하옵고 일변 저의 삼족(三族)을 멸하여지이다. 천자 허락한대, 한담이 즉시 승상부에 나와 나졸을 재촉하여 강희주를 나입(拿入)하라 하니 나졸이 청령(廳令)하고 권공달의 집에 가 강희주를 철망으로 결박하여 잡아갈 제, 이때 강희주 삼족을 멸하라 하는 말을 듣고 유생이 또한 연좌(連坐)할까 하여 급히 편지를 만들어 집으로 보내고 철망에 싸이어 금부(禁府)로 들어갈 제, 백발이 소소(小少)하니 피눈물이 반반(斑斑)하여, 충신을 구완타가 장안 시상(市上)에 무주고혼(無主孤魂) 되단 말인가. 죽은 혼백이라도 용봉(龍逢) 비간(比干)을 벗하여 천추(千秋)에 영화(榮華) 될 것이요. 간신 정한담은 찬역(簒逆)하려 하고 충신을 무함(誣陷)하여 원혼(怨魂)이 되게 하니 살아도 부끄럽지 아니하랴. 무수히 호원(呼願)하고 금부로 들어가니, 이때 정한담이 승상부 높이 앉아 승상을 나입하여 계하(階下)에 꿇리고 수죄(數罪)하는 말이,
네 전일에 자칭 충신이라 하더니 충신도 역적이 된단 말인가?
승상이 눈을 부릅뜨고 한담을 보며 왈,
관숙(管叔) 채숙(蔡叔)이 주공(周公)더러 역적이라 아니하였느냐. 한대 양화(陽貨)가 공자(孔子)더러 소인(小人)이라 함이 어제들은 듯 하노라.
하니 한담이 대로하여 좌우 나졸을 재촉하여 수레 위에 높이 싣고 장안 시상에 나올 제, 이때에 천자 황태후(皇太后)는 강 승상의 고모(姑母)라, 승상 죽인단 말을 듣고 급히 천자께 들어가 낙루하여 왈,
들으니 강희주를 무슨 죄로 죽이느냐? 친정 골육이 다만 늙은 강희주뿐이라. 설사 죽일 죄가 있다 하여도 날로 보아 죽이지 말고 원방(遠方)에 유찬(流竄)하기를 바라노라. 천자 애연(哀然)하여 즉시 한담을 불러.
죽이지 말고 유심 일체(一體)로 옥문관에 원찬하라.
하시니 한담이 청명(聽命)하고 마지못하여 옥문관에 원찬하고, 강희주의 일족(一族)을 다 잡아다가 궁노비(宮奴碑)를 공입(貢入)하라 하고, 일변 나졸을 명초(命招)하여 영릉으로 간지라.
이때 유생이 강희주 승상이 황성 가신 후로 주야 염려하더니 뜻밖에 강 승상의 서간이 왔거늘 급히 개탁하니 하였으되,
오호(嗚呼)라 노부는 전생에 죄 중하야 슬하에 자식 없고 다만 일녀를 두었더니 천행으로 그대를만나 부귀영화를 보려 하고 여아(女兒)의 평생을 그대에게 부쳤더니 가운(家運)이 그러한지 조물(造物)이 시기한지 충신을 구완타가 만리 변방에 생사를 모르나니 이러한 변이 또 있느냐. 노부는 연만하여 풀 끝에 짐나고 여년(餘年)이 불원(不遠)하여 이제 죽어도 섧지 아니하거니와 여아의 일생을 생각하니 가련하고 불쌍한지라. 천생연분(天生緣分)으로 그대를 만나 신정(新情)이 미흡(未洽)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형용이 어찌 될지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하나 노부는 역률(逆律)로 잡히어 철망을 씌워 옥문관으로 원찬하고, 나의 일족은 잡아다가 궁비(宮婢) 속공(屬公)하라 하고 나졸이 내려가니 그대 급히 집을 떠나 환을 면하라. 만일 신정을 못 잊어 도망치 아니하면 우리 두 집의 일점혈육이 청춘고혼(靑春孤魂)이 될 것이니 부디 도망하였다가 일후에 귀히 되거든 내 자식을 찾아 버리지 말고 백년해로하여 나 죽은 날에 박주(薄酒) 일배(一杯)라도 향화(香火)를 피운 후에 술상은 일생 기르던 충렬의 손에 많이 흠향하고 가라 하면 구천의 여혼(餘魂)이라도 일배주(一杯酒)를 만반주육(滿盤酒肉)으로 먹고 청산에 썩은 뼈도 춘풍을 다시 만나 그 은혜를 갚으리라.
하였거늘 충렬이 보기를 다함에 낭자 방에 들어가 편지를 뵈이며,
전생에 명이 기박(奇薄)하여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천지로 집을 삼고 사해로 밥을 부쳐 부운(浮雲)같이 다니더니 천행으로 대인을 만나 낭자와 백년언약을 맺었더니 일 년이 다 못하여 이런 변이 있으니 어찌 아니 망극하리요. 입었던 고의(袴衣) 한삼(汗衫)을 벗어 글 두 귀를 써 주며,
타일에 보사이다.
낭자 이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유생의 옷을 잡고 방성대곡하여 왈,
노부(老父) 무슨 죄로 만리 호지(胡地)에 간다 하며, 청춘 소첩 무슨 죄로 박명한고, 날 같은 여자는 생각 말고 급히 환을 면하소서.
홍상(紅裳) 한 폭을 떼어 글 두 귀를 지어 주며,
급히 나가소서. 하거늘 유생이 글을 받아 금낭 속에 넌짓 넣고 곡성(哭聲)으로 해를 지내니라. 낭자 울며 왈,
가군이 이제 가면 어느 날 다시 보며 어명(御命)이 지중(至重)하여 궁비 속공하게 되면 황천에 가 다시 볼까 하나이다.
충렬이 슬피 울며 하직하고 가는 정이 해하성(垓下城) 추야월에 우미인(虞美人)을 이별한 듯하더라.
행장을 급히 차려 서천을 바라고 정처없이 가더니 신세를 생각함에 속절없는 눈물이 비오는 듯이 떨어지며 장장천지(長長天地) 길고 긴 길에 앞이 막혀 못 가겠다. 서천 구름을 바라보고 한없이 가더라.
소부인은 청수에 투사(投死)하고
강 낭자는 창가(娼家)에 수절(守節)하다
각설, 이때 부인과 낭자 유생을 이별하고 일가가 망극하여 울음소리 떠나지 아니하더라. 불과 사오 일에 금부도사 내려와 월계촌에 달려들어 소 부인과 낭자를 잡아내어 수레 위에 싣고 군사를 재촉하여 황성으로 올라가며 일변 집을 헐어 못을 파고 가니, 가련하다 강 승상이 세대로 있던 집을 일조에 못을 파니 집오리만 둥둥 떴다.
소씨와 낭자 속절없이 잡혀 올라갈 제 청수에 다다르니 일모서산(日暮西山)이라. 객실에 들어 잘 제, 이때 금부나졸 중에 장한이라 하는 군사 전일 강 승상 벼슬할 때에 장한의 부친이 승상부 서리(胥吏)로서 득죄하여 거의 죽게 되었더니 강 승상이 구하여 살린 고로 장한의 부자 그 은혜를 주야(晝夜) 생각하더니 이때를 당함에 불쌍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른 군사 모르게 슬피 울더니, 그날 밤 삼경에 다른 군사 다 잠을 깊이 들었거늘 가만히 부인 자는 방문 앞에 나가니, 이때 부인과 낭자 서로 붙들고 울며 잠을 아니 자거늘 문 밖에 기침하고 부인을 부른대, 부인이 놀래어 문을 열고 보니 장한이 복지(伏地)하여 가만히 여쭈오되, 소인은 금부 나장(羅將)이옵더니 전일 대감 벼슬할 때에 소인의 아비 나라에 득죄하여 죽게 되었삽더니 대감이 살리시기로 그 은혜 골수(骨髓)에 사무치어 갚기를 바라더니 이때를 당하여 소인이 어찌 무심하오리까. 바라옵건대 부인은 너무 염려 마옵소서. 이날 밤에 명을 도망하오시면 그 뒤는 소인이 당할 것이니 조금도 염려 마옵시고 도망하여 살기를 바라소서.
부인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풀리어 낭자를 데리고 장한을 따라 주점 밖에 나서니 밤이 이미 삼경이라 인적이 고요하거늘 동산을 넘어 십 리를 가니 청수에 이르러 장한이 하직하고 왈,
부인과 낭자는 이 물가에 빠져 죽은 표를 하고 가옵시면 후환이 없을 것이니 부디 살아나 후사를 보사이다.
하고 가거늘 이때 부인이 낭자의 신세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하여 이제 비록 도망하여 왔으나 청춘 여자를 데리고 어디로 가 살며 혹 살아난들 승상과 현서를 이별하고 살아서 무엇하리. 차라리 이 물에 빠져 죽으리라 하고, 낭자를 속여 뒤보는 체하고 급히 청수에 가 신을 벗어 물가에 놓고 청강녹수(淸江綠水) 깊은 물에 뛰어드니 가련하다 강 승상의 부인 백옥 같은 고운 몸이 어복(魚腹)중에 장사(葬事)하니 어찌 아니 가련하랴.
이때 낭자 모친을 기다리더니 종시 오지 아니하거늘 급히 나서 살펴보니 사면에 인적이 없는지라. 마음이 답답하여 모친을 부르며 청수 가에 나와 보니 모친이 신을 벗어 물가에 놓고 간데없거늘 발을 구르며 또한 신을 벗어 물가에 놓고 빠져 죽으려 하더니, 이때는 밤 오경이라 동방이 차차 밝아오며, 마침 영릉골 관비(官婢) 한 년이 외촌(外村)에 갔다가 회로(回路)에 청수 가에 다다르니 어떠한 여자 물가에서 통곡하며 물에 빠져 죽고자 하거늘 급히 쫓아와 낭자를 붙들어 물가에 앉히고 연고를 물은 후에 제 집으로 가자 하니 낭자 한사(限死)하고 죽으려 하거늘 관비 만단개유(萬端改諭)하여 데리고 와서 수양딸을 정한 후에 자색(姿色)과 태도를 살펴보니 천상선녀 같은지라. 이 고을 동리마다 수청(守廳)을 드렸으면 천금재산(千金財産)을 부러워하며 만량태수(萬兩太守)를 원할쏘냐. 만 가지로 달래어 다른 데로 못 가게 하더라.
각설, 이때에 유생이 장 승상의 집을 떠나서 서천을 바라보고 정처없이 가며 신세를 생각하니, 속절없고 하릴없다. 이제는 무가내하(無可奈何)로다. 산중에 들어가 삭발위승(削髮爲僧)하여 훗길이나 닦으리라 하고 청산(靑山)을 바라고 종일토록 가더니 한곳에 다다르니, 앞에 큰 산이 있으되 천봉만학(千峰萬壑)이 충천(衝天)한 중에 오색 구름이 구리봉에 떠 있고 각색 화초 만발한지라. 장차 신령한 산이라 하고 찾아 들어가니 경개(景槪) 절승(絶勝)하고, 풍경(風景)이 쇄락(灑落)하다. 산행(山行) 육칠 리에 들리나니 물소리 잔잔하고 보이나니 청산만 울울한대, 청림을 더우잡고 석양에 올라가니, 수양천만사(垂楊千萬絲)는 춘풍을 못 이기어 동구에 흐늘거려 늘어지며, 녹죽(綠竹) 청송(靑松)은 우거진 가지에 백조(白鳥) 춘정(春情) 다투었다. 층층한 화계(花溪) 상에는 앵무 공작 넘노는데, 창천(蒼天)에 걸린 폭포 층암절벽 치는 소리 한산사(寒山寺) 쇠북 소리 객선(客船)에 이르는 듯 반공(半空)에 솟은 암석, 청송 속에 있는 거동 산수(山水) 그림 팔간 병풍 둘렀는 듯, 산중에 있는 경개 어찌 다 기록하리.
춘풍이 언듯하며 경쇠 소리 들리거늘 차츰차츰 들어가니 오색구름 속에 단청(丹靑)하고 휘황한 고루거각이 즐비(櫛比)하여, 일주문(一柱門0을 바라보니 황금대자(黃金大字)로 서해 광덕산 백룡사라 뚜렷이 붙였거늘, 산문으로 들어가니 일원 대승(大僧)이 나오거늘 그 중의 거동을 보니, 소소한 두 눈썹은 두 눈을 덮어 있고, 백변(白邊)같이 뚜렷한 귀는 두 어깨에 늘어졌으니 청수(淸秀)한 골격과 은은한 정신은 범승이 아닐네라.
백팔염주, 육환장을 짚고 흑포장삼의 떨어진 송낙 쓰고 나오며, 유생을 보고 왈,
소승이 연만하기로 유 상공 오시는 행차에 동구 밖에 나가 맞지 못하니 소승의 무례함을 용사(容赦)하옵소서. 유생이 대경 왈,
천생(天生)에 팔자 기박하여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정처없이 다니다가 우연히 이곳에 와 대사를 만나오니, 그다지 관대(寬待)하시며 소생의 성을 어찌 아나이까? 노승이 답왈,
어제날 남악 형산 화선관이 소승의 절에 왔삽다가 소승더러 부탁하기를 명일 오시(午時)에 남경 동성문 내에 사는 유심의 아들 충렬이가 올 것이니 축객(逐客)말고 대접하라 하시기로 소승이 찾아 나옵더니 상공의 복색(服色)을 보오니 남경 사람인 고로 알았나이다. 유생이 그 말을 듣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여 노승을 따라 들어가니 제승(諸僧)들이 합장배례(合掌拜禮)하며 반겨하는지라. 노승의 방에 들어가 석반(夕飯)을 먹은 후에 그 밤을 편히 쉬니 이곳은 선경(仙境)이라. 세상을 모두 잊고 일신이 무양(無恙)한지라.
이 후로는 노승과 한가지로 병서(兵書)도 잠심(潛心)하고 불경도 학론(學論)하니라. 이때에 대명천지무과객(大明天地無過客)이요 광덕산중유발승(廣德山中有髮僧)이라, 본신이 천상(天上) 사람으로 생불을 만났으니 기이한 술법을 가르치고 천지 일월성신(日月星辰)이며 천하명산 신령들이 모두 다 합력(合力)하니 그 재주와 영민(英敏)함을 뉘라서 당하리요 주야로 공부하더라.
천자는 기병쌍궐하(起兵雙闕下)하고
간신은 투창적진중(投槍敵陣中)하다
각설, 이때에 남경 조신(朝臣) 중에 도총대장 정한담과 병부상서 최일귀, 일상 꺼리던 유심과 강희주를 만리 밖에 원찬하고, 조정 백관(百官)을 처결하여 천자를 도모(圖謀)코자 하여 신기한 병법과 둔갑장신지술(遁甲藏身之術)과 승천입지지책(昇天入地之策)과 변화위신지법(變化爲神之法)이며 악화두수지술(握火杜水之術)을 통달하게 배웠으니, 이놈도 본신이 천상 익성으로 인간 사람은 당할 이 없더라.
일국(一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 소장지변(蕭墻之變)이 있었으니 나라가 어찌 무사하랴.
이때는 영종황제 즉위 삼 년 춘정월이라. 국운(國運)이 불행하며 남흉노(南匈奴) 선우(單于)며 북적(北狄)과 동심(同心)하여 천자를 도모하려 하고 서천 삼십육 도 군장(郡長)과 남만(南蠻) 가달이며, 토번(吐藩) 오국이 합세하여 장사(壯士) 팔천여 원(八千餘員)과 정병(精兵) 오백만으로 주야 행군하여 진남관에 다달아 격서(檄書)를 남경에 보내고 진남관에 웅거한지라.
이때에 백성들이 난리를 보지 못하였다가 뜻밖에 난을 만나니 농상낙야(籠床落野)하여 산지사방(散之四方) 피난하니 적연(積燃)도 탕진(蕩盡)하고 창곡(倉穀)도 진갈(盡竭)한지라. 하늘이 정한 운수 그리 않고 어이하리.
이때 천자 정월 망일(望日)에 호산대에 올라 망월(望月)하고 환궁(還宮)하여 대연(大宴)을 배설(配設)하고 상하동락(上下同樂) 즐기더니, 뜻밖에 진남관 수문장(守門將)이 장계(狀啓)를 올렸거늘 급히 개탁하니 하였으되, 남적이 강성하여 오국과 합력하여 진남과 평사뜰 백리 내에 가득하옵고 백성을 노략하며 황성을 치랴 하오니 바삐 군병을 보내어 도적을 막으소서. 하였거늘 천자 대경하사 제신(諸臣)을 모아 의논할새 정한담과 최일귀 이 말을 듣고 대희하여 급히 별당에 들어가 도사를 보고 밖에 도적이 일어났단 말을 하고 대사를 부르니, 도사 문에 나서 천기를 살핀 후에, 시재시재(時哉時哉)로다. 신기한 영웅이 황성에 있는가 하였더니 이제 죽었으며, 때맞추어 도적이 일어났으니 이는 그대 천자(天子)할 수라. 급격물실(急擊勿失)하라. 하니 한담이 대희하야 일귀로 더불어 갑주(甲冑)를 갖추고 궐문으로 들어가는지라.
이때 천자 재신과 방적(防敵)할 꾀를 의논하더니 장안에 바람이 일어나며 일원대장(一員大將)이 계하(階下)에 복지주왈(伏地奏曰),
소장 등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한번 나가 남적을 함몰(陷沒)하여 황상의 근심을 덜고 소장의 공을 세워지이다.
하거늘 모두 보니 신장(身長)이 십여 척이요 면목이 웅장한데, 황금투구에 녹운포(綠雲袍)를 입은 것은 도총대장 정한담이요, 면상이 숯먹 같고 안채(眼彩)가 황홀하며 백금투구에 홍운포(紅雲袍)를 입은 것은 병부상서 최일귀라.
천자 대희하사 양장(兩將)의 손을 잡고 왈,
경 등의 충성 지략(智略)은 짐이 이미 아는지라 남적을 함몰하여 짐의 근심을 덜게 하라.
양장이 청령하고 각각 물러나와 정병 오천씩 거느려 행군하여 진남관에 유진(留陣)하고 그날 밤에 군사 한 명만 잠을 깨워 가만히 항서(降書)를 써 주며 또한 편지를 써서 적진(敵陣) 중에 보내고 회답을 기다리는지라.
그 군사 적진에 들어가 적장을 보고 항서를 올린 후에, 또 편지를 드리거늘 적장이 대희하여 즉시 개탁하니 하였으되,
남경 장사(壯士) 정한담 최일귀는 일장서간을 남진(南陳) 대장소(大將所)에 올리나이다. 우리 양인 등이 갈충(竭忠) 진심(盡心)하여 천자를 도와 국가에 유공(有功)하고 백성에게 덕이 있어 지성으로 봉공(奉公)하되 지기(知己)하는 인군을 못 만나 항시 앙앙(怏怏)한 마음이 있는지라 대장부 세상에 다시 어찌 남의 신하 오래 되리요. 남아유방백세(男兒流芳百世)할진대 역당유취만년(亦當遺臭萬年)이라 하였으니 이때를 당하여 어찌 묘계(妙計) 없으리요. 우리 양인을 선봉을 삼으시면 항복할 것이니 그대 뜻이 어떠하뇨? 회답을 보내라.
하였거늘 적장이 그 글을 보고 대희하여 왈,
우리 등이 남경으로 나올 때 도사 근심하기를 정한담 최일귀를 염려하더니 이제 저희 등이 먼저 항복코저 하니 이는 천우신조(天佑神助)함이라.
하고 즉시 회답을 써 준대, 군사 급히 본진으로 돌아와 답서를 올리거늘 떼어 보니 하였으되,
그대의 마음이 우리 마음 같은지라. 선봉을 원대로 맡길 것이니 금야에 반가히 보사이다.
하였거늘 정, 최 양장이 갑주를 갖추고 적진에 들어가는지라.
이 적에 중군장이 급히 황성에 올라가 전후수말을 천자에게 고한대, 천자 이 말을 듣고 용상(龍床) 밑에 떨어져 발을 구르며 정한담 최일귀 적장에게 항복하였으니 적진은 범이 날개를 얻은 듯하고 짐은 용이 물을 잃었으니 이제는 하릴없다. 성중에 있는 군사 낱낱이 총독(總督)하고 각도 각읍에 행관(行關)하여 군사와 군량을 준비하고 우승상 조정만으로 도성을 지키고 태자로 중군(中軍)을 정하시고 상(上)이 친히 후군(後軍)이 되어 행군을 재촉하니 군사 십여 만이요 장수 백여 원이라.
행군고(行軍鼓)를 재촉할 제, 전일 길주자사 갔던 이행이 원문(轅門)밖에 복지 주왈,
소신이 재주 없사오나 이때를 당하여 신자 도리에 어찌 사직(社稷)을 돕지 아니하오리까? 소신으로 선봉을 정하옵소서.
천자 대희하사 즉시 이행으로 선봉을 삼아 도적을 막을새, 이때 정한담 최일귀 적진에 항복하여 한담이 선봉이 되고 일귀는 중군대장이 되어 급히 황성을 지쳐 들어오며 의기양양하고 호령이 엄숙한데 기치(旗幟) 창검(槍劍)은 팔공산 나무같이 벌려 있고, 투구 갑옷은 한천(寒天)에 일광같이 안채가 쐬이는 듯, 금고함성(金鼓喊聲)은 천지 진동하고 목탁 나팔은 강산이 뒤눕는 듯, 순식간에 들어와 금산성 백리 뜰에 빈틈없이 벌려 서서 내외음양진(內外陰陽陳)을 치고 도사 진중에 망기(望氣)하며 싸움을 재촉하니, 적진 중에서 방포일성(放砲一聲)에 한 장수 내달아 외며 왈,
명진 중에 천극한 적수(敵手) 있거든 바삐 나와 대적(對敵)하라.‘
하니 명진 중에서 응포(應砲)하고 좌익장(左翼將) 주선우 응성(應聲)하고 다려들어 싸울새, 양진 군사 처음으로 구경하니 항오(行伍)를 차리지 못하여 승부(勝負)를 구경하더니 수합이 못하여 극한의 칼이 번듯하며 주선우 머리 마하(馬下)에 떨어지니, 명진 중으로 좌익장 죽음을 보고 또 한 장수 내달아 원문 밖에 고성(高聲) 왈,
극한근 가지 말고 최상정의 칼을 받으라.
하니 극한이 달려들어 함성이 그치고 그 칼이 번듯하며 최상정의 머리 떨어지니, 명진 중에서 우익장 죽음을 보고 왕공열이 응성하고 달려들어 극한과 싸울새 일 합이 못하야 거의 죽게 되었더니, 명진 중에서 팔대장군이 일시에 달려들어 왕공열을 구완하더니, 적진 중에서 명진 팔장이 나옴을 보고 한진이 극한과 합력하여 팔장으로 더불어 싸우더니, 한진은 서편을 치고 극한은 동을 치니 촉처(觸處)에 죽는 군사 그 수를 모를네라. 삼 합이 못하여 극한의 창검 끝에 팔장이 다 죽으니, 이때 태자(太子) 중군에 있다가 팔장 죽음을 보고 불승분심(不勝忿心)하여 말을 타고 진문 밖에 나서며 외워 왈,
무도한 남적놈아, 천명을 거역하니 죄사무석(罪死無惜)이로다. 너의 진중에 정한담 최일귀 머리를 베어 명진 중에 보내는 자 있으면 옥새(玉璽)를 전하리라. 하고 극한을 맞아 싸우더니, 선봉장 이황이 이 말을 듣고 달려오며,
태자는 아직 분을 참으소서. 소장이 잡으리다.
하고 나는 듯이 들어가 좌수의 칼을 들고 극한의 머리를 베이고, 장창을 들고 한진의 머리를 베어, 두 손에 갈라들고 좌우로 충돌하여 본진으로 돌아오니 적진 중에서 한담이 장막 밖에 나서며 청사마를 채쳐 구척장검(九尺長劍)을 높이 들고 바로 명진을 대칼에 함몰코자 하니, 이때에 먼저 남적 선봉으로 왔던 정문걸이 내달아 한담을 불러 왈,
대장은 분을 참으소서. 소장이 이황을 잡으리다.
하고 번창출마하여 싸우더니 일 합이 못하여 문걸의 칼이 진중에 빛나며 이황의 머리 마하에 내려지는지라. 문걸이 칼끝에 꿰어 들고 본진으로 행하다가 도로여 명진 선봉을 지쳐 들어오며, 명진은 불쌍한 인생을 죽이지 말고 바삐 항복하라.
하며 순식간에 선봉을 다 베이고 달려들어 중군으로 들어오거늘, 태자 중군을 지키다가 당치 못할 줄 알고 후군과 천자를 모시고 금산성으로 도망한지라.
이때에 문걸이 명진 장사를 씨도 없이 다 죽이고 명제(明帝)를 찾은즉 도망하고 없는지라. 군장 복색을 모두 다 탈취하고 본진으로 돌아오며, 정한담이 바로 달려들어가니 천자 망극하여 옥새를 땅에 놓고 앙천 통곡 왈,
짐이 불명(不明)하여 선황제 사백 년 왕업을 일조에 정한담에게 잃게 되니 이는 양호유환(養虎遺患)이라. 뉘를 원망하리요 모두 다 짐의 불찰(不察)이라. 황천에 돌아간들 선황제를 어찌 보며 인간에 살았은들 되놈에게 무릎을 어찌 꿇랴. 하며 금산성이 떠나가게 통곡이 진동하더라.
수문장이 보하되,
해남 절도사 군병을 거느려 왔나이다.
천자 대희하여 바삐 입시(入侍)하라 한대, 절도사 군사 십만 병을 거느려 성중에 들어가 천자께 뵈이거늘,
즉시 절도사로 선봉을 삼아 도적을 막으라.
하니 절도사 청령하고 성하(城下)에 유진(留陣)하였더니, 이때 한담이 도성으로 들어가 용상에 높이 앉아 백관을 호령하니 만조백관(滿朝百官)이 일조에 항복하더라. 만성인민(滿城人民)이 도적의 밥이 되어 물끓듯하더라.
이 날 한담이 삼군을 재촉하여 금산성을 쳐 파하고 옥새를 앗고자하여 성하에 다다르니 명진 군사 길을 막거늘 정문걸이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명진을 지쳐 좌우로 충돌하니 일신이 검광 되어 닫는 앞에 장졸의 머리 추풍낙엽이요 호전주퇴(壺顚酒頹)같더라. 순식간에 죽이고 산성 문 밖에 달려들어 성문을 두드리며, 명제(明帝)야, 옥새를 드리라!
하는 소리 금산성이 무너지며 강산이 뒤넘는 듯하니 성중에 있는 군사 혼백이 없었으니 그 아니 가련한가.
천자와 조정만이 황황급급하여 북문을 열고 도망하여 암석간에 은신하였더니, 이때 태자 황후와 태후를 모시고 도망하랴 하더니 문걸이 성중에 들어와 천자를 찾다가 도망하고 없음에 황후 태자를 잡아 본진으로 보내고 돌아오니, 정한담이 황후를 결박하여 진 앞에 꿇리고 천자 간 곳을 가르치라 한대, 황후 망극하여 대답지 아니하거늘, 좌우군사 창검을 갈라 들고 옥체를 겨누면서 바른대로 가르치라 하니 황후 황망중에 대답하되, 이 몸은 계집이라 성중에 묻혀 있다가 불의에 난을 당하여 천자는 밖에 있는 고로 생사존망(生死存亡)을 모르노라.
한담이 분노하여 황후 태자를 진중에 두어 주려 죽게 하고 용상에 높이 앉아 천자의 일을 행하며 군사를 호령하되,
명제를 사로잡는 자 있으면 천금상(千金賞)에 만호후(萬戶侯)를 봉하리라.
하니 군사 청령하고 각 진으로 돌아오니라.
이때 천자 금산성에 도망하여 조정만으로 더불어 산곡 사이에 은신하고 있더니 황태후 적진에 잡혀가 죽이려 하는 말을 듣고 통곡하여 암하(岩下)에 내려져 죽고자 하거늘 조정만이 붙들어 구완하여 천자를 업고 명서원으로 도망하여 갈 제, 천자께 여쭈오대,
남경이 진탕하였으니 도적 정한담 잡기는 새로이 정문걸 잡을 장수 없으니 이제 산동육국에 청병(請兵)하여 싸우다가 사불여의(事不如意)하거든 옥새를 가지고 소신과 함께 용동수에 빠져 죽사이다. 천자 옳이 여겨 조서(詔書)를 써 산동육국에 주야로 가 구원병을 청하니, 이때 육국왕이 이 말을 듣고 각각 군사 십만 명과 장수 천여 원을 조발하여 급히 남경 명성원으로 보내니라.
이때 육국에 합세하여 호산대 너른 뜰에 빈틈없이 행군하여 들어오니 천자 대희하여 군중에 들어가 위로하고 적진형세와 수차 패함을 낱낱이 말하고 적응으로 선봉을 삼고 조정만을 중군을 삼아 황성으로 들어올 제 그 웅장한 거동은 추상 같은지라. 백사장 백 리에 군사 늘어서서 들어오니 남경이 비록 진탕하였으나 무서운 것이 천자의 기굴러라. 금산성하에 유진하고 싸움을 돋우니 이때 정문걸이 선봉에 있다가 청병이 옴을 보고 필마단창으로 나오거늘 한담이 문걸을 불러 왈,
적병이 저다지 엄장한데 장군은 어찌 경솔히 가려 하오. 문걸이 답왈,
폐하, 어찌 소장의 재주를 수히 알으시나이까? 장편 군졸(長遍軍卒) 사십만과 백기(白騎)를 한 칼에 다 죽였으니 남경이 비록 육국에 청병하여 억만 병이 왔거니와 소장의 한 칼끝에 죽는 구경 앉아서 보옵소서.
한담이 대희하여 장대에 높이 앉아 싸움을 구경할새, 문걸이 창검을 좌우에 갈라 잡고 마상에 높이 앉아 나는 듯이 들어가며 호통일성에,
명제야, 옥새를 가져 왔느냐? 너를 잡으려 하였더니 이제 왔음에 진소위(眞所謂) 춘치자명(春雉自鳴)이라 바삐 항복하여 잔명을 보존하라.
하고 억만군중에 무인지경같이 횡행하여 동장(東將)을 치는 듯 남장(南將)을 베이고, 북장(北將)을 베이는 듯 서장(西將)이 쓰러지니, 죽는 군사 여산(如山)하고 유혈(流血)이 성천(成川) 되었도다. 서초패왕(西楚覇王)이 강동 건너 함곡관을 부수는 듯, 상산(常山) 조자룡(趙子龍)이 산양수 건너 삼국 청병 지치는 듯, 문걸이 닫는 곳마다 싸울 군사 없었으니 그 아니 망극할까. 이때 천자 조정만과 옥새를 갖고 용동수에 빠지고자 하나 또한 도망할 길이 없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하더라.
백룡사에 득갑주창검(得甲冑槍劍)하고
송림촌에 득천사마(得天賜馬)하다
각설, 이때 유충렬이 서해 광덕산 백룡사에 있어 노승과 한가지로 지음(知音)이 되어 세월을 보내더니, 이때는 부흥 십삼 년 추칠 월 망간이라. 한풍(寒風)은 소소(蕭蕭)하고 낙목(落木)은 분분(紛紛)한데 고향을 생각하며 신세를 생각할 제 월경야삼경(月經夜三更)에 홀로 앉아 비감하더니, 노승이 일어나 밖에 갔다 들어오며 충렬을 불러 왈,
상공이 금일 천문(天文)을 보았나이까?
충렬이 놀래어 급히 나와 보니 천자의 자미성(紫微星)이 떨어져 명성원에 잠겨 있고, 남경에 살기(殺氣) 가득하였거늘 방으로 들어와 한숨 짓고 낙루(落淚)하니 노승이 왈,
남경에 병난(兵亂)은 났거니와 산중에 피난하는 사람이 무슨 근심이 있으리까? 충렬이 울며 왈,
소생은 남경 세록지신(世祿之臣)이라 국변(國變)이 이러하니 어찌 근심이 없으리요마는 적수단신(赤手單身)이 만리 밖에 있사오니 한탄한들 어찌하리오. 노승이 웃고 벽장을 열고 옥함을 내어 놓으며 왈,
옥함은 용궁조화(龍宮造化)거니와 옥함 짬맨 수건은 어떠한 사람의 수건인지 자세히 보라.
유생이 의심하여 옥함을 살펴보니,
남경 도원수 유충렬은 개탁이라.
금자로 새겨 있고 짬맨 수건을 끌러 보니,
모년 모월 모일에 남경 동성문 내에 사는 충렬의 모친 장 부인은 내 아들 충렬에게 부치노라.
하였거늘 충렬이 수건과 옥함을 붙들고 방성통곡하거늘 노승이 위로 왈,
소승이 수년 전에 절 중창(重刱) 화주(化主)로 변양 회수에 다다르니 기이한 오색 구름이 수건에 덮였거늘 바삐 가서 보니 옥함이 물가에 놓였거늘 임자를 주려 하고 갖다가 간수하였더니 금일로 볼진대 상공의 전쟁기계(戰爭機械)가 옥함 속에 있는가 하나이다.
대체 이 옥함은 회수 사공 마철이가 물 속에 잠수질하다가 큰 거북이 옥함을 지고 나오거늘 마철이 거북을 죽이고 옥함을 가져다가 제 집에 두었던 전일 장 부인이 도적에게 잡히어 석장동 마철의 집에 가서 옥함을 갖다가 수건에 글을 쓰고 회수에 넣었더니 백룡사 부처중이 가져다가 이 날 충렬을 주었는지라.
이때 충렬이 옥함을 안고 왈,
이것이 일정 충렬의 기물(器物)일진대 옥함이 열릴지라.
하고 위짝을 열어 놓으니 빈틈없이 들었거늘 보니, 갑주 한 벌과 장검 하나, 책 한 권이 들었거늘 투구를 보니 비금비옥(非金非玉)이라 광채 찬란하여 안채(眼彩)를 쏘이는 중에 속을 살펴보니, 금자로 일광주라 새겨 있고, 갑옷을 보니 용궁조화 적실하다. 무엇으로 만들 줄 모를너라. 옷깃 밑에 금자로 새겨 있고, 장검은 놓였으되 두미(頭尾)가 없는지라 신화경을 펴 놓고 칼 쓰는 법을 보니, 갑주를 입은 후에 신화경 일편을 보고 천상 대장성을 세 번 보게되면 사린 칼이 절로 퍼져 변화무궁할지라.
하였거늘 즉시 시험하니 십척장검이 번듯하며 사람을 놀래거늘, 한가운데 대장성이 샛별같이 박혀 있고 금자로 새기기를 장성검이라 하였거늘, 모두 다 행장에 간수하고 노승더러 왈,
천행으로 대사를 만나 갑주와 창검은 얻었거니와 용마(龍馬) 없었으니 장군이 무용지지(無容之地)라. 한대 노승이 답왈,
옥황께옵서 장군을 대명국에 보낼 제, 사해용왕이 모를쏜가. 수년 전에 소승이 서역에 가올 제, 백룡암에 다다르니 어미 잃은 망아지 누웠거늘 그 말을 데려왔으나, 산승(山僧)에게 부당(不當)이라 송임촌 동 장자에게 맡기고 왔으니 그 곳을 찾아가 그 말을 얻은 후에 중로에 지체 말고 급히 황성에 득달하와 지금 천자의 목숨이 경각(頃刻)에 있사오니 급히 가서 구원하라.
한대 유생이 이 말을 듣고 송임촌을 바삐 찾아가 동 장자를 만난 후에 말을 구경하자 하니, 이때 천사마 제 임자를 만났으니 벽력 같은 소리하며 백여 장 토굴을 넘어 뛰어나와서 충렬에게 달려들어 옷도 물며 몸도 대어 보니 웅장한 거동은 일필(一筆)로 난기(難記)로다. 심산(深山) 맹호(猛虎) 냅다 선 듯, 북해 흑룡(北海黑龍)이 벽공(碧空)에 오르는 듯, 강산정기는 안채에 갈마 있고 비룡조화(飛龍造化)는 네 굽에 번듯한데, 턱 밑에 일점 용인의 새겼으되 사송 천사마라 하였거늘 유생이 대희하여 장자더러 말을 사자 하니 장자 웃어 왈,
수년 전에 백룡사 부처중이 이 말을 맡기며 왈
이 말을 길러내어 임자를 찾아주라 하기로 맡아 길렀더니 이 말이 장성함에 잡을 길이 없어 토굴에 가두었으나 천만 인이 구경하되 하나도 가까이 못 가더니 오늘날 그대를 보고 제 스스로 찾아오니 부처중이 이르던 임자 그대로 적실하니 하늘이 주신 보배니 어찌 판단 말인가, 물각유주(物各有主)오니 가져가옵소서. 한대 유생이 대희하여 안장을 갖추어 동 장자를 하직하고 송임촌을 지나 광덕산을 행하여 노승에게 치하하고 적년(積年) 정회를 하직할 제 제사중(諸寺衆)의 제승(諸僧)들의 별회지담(別懷之談)을 어찌 다 설화하고 기록하리.
하직하고 그 말 위에 높이 앉아 남경을 바라보며 구름을 가리켜 말 더러 경계 왈,
하늘은 나를 내시고 용왕은 너를 낼 제 그 뜻이 모두 다 남경을 돕게 함이라. 이제 남적이 황성에 강성하여 천자의 목숨이 경각에 있다 하니 대장부 급한 마음 일 각(一刻)이 여삼추(如三秋)라. 너는 힘을 다하여 남경을 순식(瞬息)에 득달하라.
그 말이 그 말을 듣고 청천을 바라보며 벽력 같은 소리하고 백운(白雲)을 헤쳐 나는 듯이 들어가니, 사람은 천신(天神)이요 말은 비룡(飛龍)이라. 남경을 바람같이 달려오니 금산성 너른 뜰에 살기가 충천하고 황성 문안에 곡성이 진동하더라.
이때 천자 중군 조정만으로 더불어 옥새를 가지고 도망하여 용동수에 빠져 죽고자 하되 적진을 벗어날 길이 없어 황황망극(遑遑罔極)하던 차에 문득 북편으로 천병만마(千兵萬馬) 들어오며 천자를 부르거늘 천자 대명군사 오는가 반겨 바래더니, 남적과 동심하야 마용이 진공이라 하는 도사를 데리고 천자를 치려 하여 억만 군병을 총독하여 일시에 들어오니 이때에 정한담이 천자 되어 백관을 거느리고 최일귀는 대장 되어 삼군을 경계할 제, 또한 북적이 합세하여 그 형세 웅장함이 만고에 으뜸이라.
선봉장 정문걸이 의기양양하여 명진 육국청병을 한 칼에 다 무찌르고 선봉을 헤쳐 진중에 들어와,
명제야 항복하라! 내 한 칼에 육국청병 다 죽어 있고 또한 북정이 합세하였으니 네 어이 당할쏘냐. 바삐 나와 항복하여 너의 모자를 찾아가라. 하고 지쳐 들어오니 이제 천자 하릴없어 옥새를 목에 걸고 항서(降書)를 손에 들고 항복하려 하고 나올 적에 중군 조정만과 명진에 남은 군사 어찌 아니 한심하고 슬프리요. 천자의 울음소리 명성원이 떠나가게 방성통곡하며 항복하러 나오더라.
권지하(券之下)
각설, 이때 유충렬이 금산성하에서 망기(望氣)하다가 형세 위급함을 보고 일광주 용인갑에 장성검을 높이 들고 천사마를 채질하여 바삐 중군소에 들어가 조정만을 보고 성명을 올려 싸우기를 청한대, 중군이 바삐 나와 손을 잡고 울며 왈,
그대 충성은 지극하나 지금 황상(皇上)이 항복하려 하시고 또한 적진 형세 저러하니 그대 청춘이 전장백골(戰場白骨) 될 것이니 원통하고 망극하다.
충렬이 불승분기(不勝忿氣)하여 진문(陣門) 밖에 나서면서 벽력같이 소리하여 적장(敵將)을 불러 왈,
이봐, 역적 정한담아! 남경 동성문 내에 사는 유충렬을 아는다 모르는다. 바삐 나와 목을 드리라.
하는 소리 양진이 뒤놀며 천지 강산이 진동하니, 문걸이 대경하여 돌아보니 일광투구에 안채 쏘이고 용인갑은 혼신을 감추고 천사마는 비룡되어 운무(雲霧)중에 싸여, 공중에 소리만 나고 제 눈에는 보이지 아니하니 창검만 높이 들고 주저주저 하던 차에 벽력 같은 소리 끝에 장성검이 번듯하며 정문걸의 머리 공중에 베어 들고 중군으로 달려드니, 조정만이 엎더지며 문 밖에 급히 나와 손을 잡고 들어갈 제, 이때 천자는 옥새를 목에 걸고 항서를 손에 들고 진문 밖에 나오다가 뜻밖에 호통 소리 나며 일원대장이 문걸의 머리를 베어 들고 중군으로 들어가거늘, 대경(大驚) 대희(大喜)하여 중군을 급히 불러 왈,
적장 베이던 장수 성명이 뉘냐. 바삐 입시(入侍)하라.
충렬이 말에서 내려 천자전에 복지(伏地)한대 천자 급히 문왈,
그대는 뉘신지 죽을 사람을 살리는가?
충렬이 저의 부친과 강희주 죽음을 절분히 여겨 통곡하며 여쭈오대,
소장은 동성문 내 거(居)하던 정언주부 유심의 아들 충렬이옵더니 주류개걸하여 만리 밖에 있삽다가 아비 원수 갚으려고 여기 잠깐 왔삽거니와, 폐하 정한담에게 곤핍(困乏)하심은 몽중(夢中)이로소이다. 전일에 정한담을 충신이라 하시더니 충신도 역적 되나이까? 그놈의 말을 듣고 충신을 원찬하여 다 죽이고 이런 환을 만나시니 천지 아득하고 일월이 무광(無光)하옵니다. 슬피 통곡하며 머리를 땅에 두드리니 산천초목도 슬퍼하며 만진중(滿陳中)이 낙루 아니할 이 없더라.
천자 이 말을 들으시고 후회막급(後悔莫及) 할말없어 우두커니 앉았더니, 태자 적진에 잡혀 갔다가 본진에서 문걸 베임을 보고 탈신(脫身) 도주(逃走) 급히 와서 충렬의 손을 붙들고 왈,
경이 이게 웬말인가. 옛날 주 성왕(周成王)도 관채(管蔡)의 말을 듣고 주공(周公)을 의심더니 회과자책(悔過自責)하여 성군(聖君)이 되었으니 충신이 다 죽기는 막비천운(莫非天運)이라 그런 말을 하지 말고 진충갈력(盡忠竭力)하여 황상을 도우시면 태산 같은 그 공로는 천하를 반분(半分)하고 하해 같은 그 은혜는 풀을 맺어 갚으리라.
충렬이 울음을 그치고 태자 상(相)을 보니 천자 기상(氣像) 적실하고 일대성군(一代聖君) 될 듯하여 투구 벗어 땅에 놓고 천자전에 사죄(謝罪) 왈,
소장이 아비 죽음을 한탄(恨歎)하여 분심이 있는 고로 격절(激切)한 말씀을 폐하전에 아뢰었으니 죄사무석(罪死無惜)이라. 소장이 죽사온들 폐하를 돕지 아니하오리까? 천자 충렬의 말을 듣고 친히 계하(階下)에 내려와서 투구를 씌우면서 손을 잡고 하는 말이,
과인(寡人)은 보지 말고 그대 선조 창건하던 일을 생각하여 나라를 도와주면 태자 하던 말대로 그대 공을 갚으리라.
충렬이 청명하고 물러나와 장대(將臺)에 높이 앉아 군사를 총독하니 피병장졸(疲兵將卒)이 불과 일이백 명이라. 천자 삼층단에 높이 앉아 하늘께 제사하고 인검(印劍)을 끌러내어 충렬을 주신 후에 대장 사명기(司命旗)에 친필로 쓰시기를 대명국(大明國) 대사마(大司馬) 도원수(都元帥) 유충렬 이라 뚜렷이 써 내주니 원수 사은하고 진법을 시험할 제, 장사일자진(長蛇一字陳)을 쳐 두미(頭尾)를 상합(相合)케 하고 군중에 호령하되,
남북적병이 비록 억만 병이라도 내 혼자 당하려니와 너희 등은 항오(行伍)를 잃지 말라.
약속할 제, 이 적에 적진 중에서 문걸 죽음을 보고 일진이 진동하여 서로 나와 싸우려 할새 삼군대장 최일귀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녹포운갑에 백금투구를 쓰고 장창대검을 좌우에 갈라 들고 적제마를 채질하여 나는 듯이 달려들며 외여 왈,
적장 유충렬아, 네 아직 미거하여 남북강병 억만 군을 능멸히 생각하니 바삐 나와 죽어 보라.
원수 장대에 있다가 최일귀란 말을 듣고 바삐 나와 응성(應聲)하되,
정한담은 어디 가고 너만 어찌 나왔느냐. 너희 두 놈의 간을 내어 우리 부모 영위전(靈位前)에 재배(再拜)하고 드리리라.
함성하고 달려들어 장성검이 번듯하며 일귀 가진 장창대검이 편편파쇄(片片破碎) 부서지니, 최일귀 대경하여 철퇴로 치자 한들 원수 일신이 보이지 아니하니 치자 한들 어이하리, 적진 중에서 옥관도사 싸움을 구경타가 대경하여 급히 쟁(錚)을 쳐 거두오니, 일귀 겨우 본진에 돌아와 정신을 잃었는지라.
이때 북적 선봉 마룡은 천하에 명장이라, 충렬을 잡지 못하고 돌아옴을 분히 여겨 진문을 헤쳐 왈,
대장은 어찌 조그마한 아이를 살려두고 오니이까? 소장이 잡아 오리이다.
하며 나는 듯이 들어올 제, 북적 진중에서 또한 도사 진진이 나와 마룡의 말머리를 잡고 왈,
대장은 가지 마옵소서. 적장의 갑주창검을 보니 용궁의 조화라. 수년 전에 대장성이 남경에 떨어지더니, 이제 검술을 보니 북두성 대장성이 칼 빛을 응하며, 일광주 용인갑은 일신을 가리었으니 사람은 천신이오 말은 비룡이라 뉘 능히 당하리요. 마룡이 분노하여 도사를 꾸짖어 왈,
대장부 앞에 요망한 도사놈이 무슨 잔말을 하느냐. 바삐 물러서라.
진진이 생각하되 미구(未久)에 대환(大患)이 있을지라 진중에 들지 말고 소로(小路)로 도망하여 싸움을 구경터라.
이때에 마룡이 좌수에 삼천 근 철퇴를 들고 우수에 창검을 들고 호통을 지르며 나와 원수를 맞아 싸우더니, 일광주에 쏘이어 두 눈이 캄캄하여 정신이 없는지라, 운무중에 소리나며 검광이 빛나며 원수를 치려 하니 장성검이 번듯하여 마룡의 손을 치니, 철퇴 든 팔이 마저 땅에 떨어지니 마룡이 대경하여 우수에 잡은 칼로 공중에 솟아 번개를 냅다 치니 구척장검 길고 긴 칼이 낱낱이 파쇄하여 빈 자루만 남은지라. 제 아무리 명장인들 적수(赤手)로 당할쏘냐. 본진으로 도망코자할 즈음에 벽력 같은 소리 진동하며 장성검이 번듯하며 마룡의 머리 안개 속에 내려지니 목은 질러 본진에 던지고 몸은 적진에 던지며 왈,
이봐 정한담아. 바삐 나와 죽기를 재촉하라. 네놈도 이같이 죽이리라.
하며 좌우로 횡행하되 공중에 소리만 나고 일신은 아니 보이니 적진이 대경하여 혼불부신(魂不附身)하더라.
한담이 대로하여 용상을 치며 왈,
억만 군중에 충렬이 잡을 자 없느냐?
형사마 비껴 타고 십척장검 빼어 들며 진문 밖에 썩 나서니 최일귀 응성하고 나와 왈,
대장은 아직 참으소서. 소장이 당하리다.
하며 나는 듯이 들어가며 외여 왈,
적장 유충렬은 이제 미결한 싸움을 결단하자.
원수 응성하고 천사마상 번뜻 올라 좌수의 신화경은 신장을 호령하고 우수의 장성검은 일월을 희롱하는지라. 적진을 바라보고 나는 듯이 들어가 혼신이 일광되어 가는 줄을 모를네라. 일귀를 맞아 싸워 반 합이 못하여서 장성검이 번듯하며 일귀의 머리를 베어 칼 끝에 꿰어 들고 본진으로 돌아와서 천자전에 바쳐 왈,
이것이 최일귀 머리 적실하오니까?
천자 일귀의 목을 보고 대분(大忿)하사 도마 위에 올려놓고 점점이 오리면서 원수를 치사 왈,
짐이 불명하여 이놈의 말을 듣고 경의 부친을 문외출송(門外出送)하였더니 이놈이 나를 속여 만리 연경에 보냈으니 이제는 설치(雪恥)하고 경의 은혜 논지(論之)컨대 할부봉양(割膚奉養) 부족이라. 백골이 진토(塵土) 되어도 그 은혜를 다 갚으리. 황태후는 어디 가고 이놈 고기 맛볼 줄을 모르는가.
원수의 손을 잡고 백 번이나 치사하니 원수 더욱 감축하여 고두사례(叩頭謝禮)하고 군중으로 물러나오니 중군 조정만이 즐거움을 측량치 못하여 대하(臺下)에 내려 백배치사하며 즐기더라.
이때 한담이 일귀 죽음을 보고 분심이 충장(充壯)하여 벽력 같은 소리를 천둥같이 지르고 장창대검 다잡아 쥐고 전장 오백 보를 솟아 뛰어서며 육정육갑(六丁六甲)을 베풀어 좌우 신장 옹위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하여 변화를 부쳐 두고 호통을 크게 질러 원수를 불러 왈,
충렬아 가지 말고 네 목을 바삐 납상(納賞)하라.
원수 한담이 나옴을 보고 대희하여 응성하고 나올 제 천자 원수를 당부 왈,
한담은 일귀 마룡의 유(類) 아니라 천신의 법을 배워 만부부당지력(萬夫不當之力)이 있고 변화불측(變化不測)하니 각별히 조심하라.
원수 크게 웃고 진전(陳前)에 나서 한담을 망견(望見)하니, 신장이 십여 척이요 면목이 웅장하며, 황금투구의 녹포운갑에 조화를 붙였는데 천상 익성정신을 흉중에 갈무었으니 일대명장(一代名將)이요 역적 될 만한지라, 원수 기운을 가다듬고 신화경을 잠깐 펴 익성정신을 쇠진(衰盡)케 하고 장성검을 다시 닦아 성채(星彩) 찬란케 하고 변화의 은신(隱身)하고 호통을 크게 하며 한담을 불러 왈,
네놈은 명나라 정종옥의 자식 정한담이 아니냐. 세대로 명나라 녹을 먹고 그 인군을 섬기다가 무엇이 부족하여 충신을 다 죽이고 부모국을 치려 하니 비단 천하 사람뿐 아니라 지하 귀신들도 너를 잡아 황제전에 드리고자 할 것이니 너 같은 만고역적(萬古逆賊)이 살기를 바랄쏘냐. 네놈을 생금(生擒)하여 전후죄목을 물은 후에 너의 살을 포육(脯肉)을 떠서 종묘(宗廟)에 제사하고 그 남은 고기는 받아다가 우리 부친 충혼당(忠魂堂)에 석전제(夕奠祭)를 지내리라. 바삐 나와 나를 보라.
한담이 분노하여 응성출마(應聲出馬) 나오거늘 원수 한담을 맞아 싸울새 칼로 치게 되면 반 합에 죽을 것이로되 살리고 잡고자 하여 장성검 높이 들어 한담을 치렸더니 한담은 간데없고 편편채운(翩翩彩雲)이 일어나며 원수의 장성검의 검광(劍光)이 없어지고 펴 있던 칼이 도로 사리거늘 원수 대경하여 급히 물러와 신화경을 바삐 펴 일편을 외인 후에 장성검을 세 번 치며 풍백(風伯)을 바삐 불러 채운을 쓸어 버리고 안순풍이지조화를 부쳐 적진을 살펴보니 한담이 변신하여 채운에 싸이어 십여 척 장검 번뜩이며 원수를 따르거늘, 원수 그제야 깨닫고 왈,
한담은 천신이라 산 채로 잡으려 하다가는 도리어 환을 당하리라.
하고 싸우러 나갈 제, 진전에 안개 자욱하며 장성검 번개 되어 공중에 빛나며 한담을 치랴 하되 한담의 몸에는 종시 칼이 가직이 가들 못 하거늘 적진을 향하여 뒤로 들어 진중을 헤칠 듯하니 한담이 원수를 따라 잡으려 하고 급히 회마차의 번개 언듯하며 한담의 탄 말이 땅에 거꾸러지거늘 급히 칼을 들어 한담의 목을 치니 목은 맞지 아니하고 투구만 깨어지니 적진에서 한담의 투구 깨어짐을 보고 대경하여 급히 쟁을 쳐 거두움에 한담이 기운이 쇠진하여 거의 죽게 되었더니 쟁을 쳐 거둠에 본진에 돌아와 정신을 놓고 기운을 수습지 못하거늘 좌우 구하니 겨우 정신을 차려 앉으며 왈,
선생은 어찌 알고 소장을 불렀나이까?
도사 왈,
적장의 칼끝이 장군의 투구 깨어지기로 만분 위태하여 불렀노라.
한담이 대경하여 머리를 만져 보니 투구 없는지라 더욱 놀래 왈,
적장은 일정 천신이요 사람은 아니로다. 십 년을 공부하여 사람은 커니와 귀신도 측량치 못하는 법이 많았더니 마룡과 최일귀 죽음을 조심하여 십 년 배운 법을 오늘날 모두 다 베풀어 적장을 잡으려 하더니 잡기는 새로이 기운을 쇠진하여 거의 죽게 되었더니 천행으로 선생의 힘을 입어 목숨이 살았으나 천만 가지로 생각하되 힘으로는 잡을 수 없으니 선생은 깊이 생각하옵소서.
도사 이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여 이윽히 생각하다가 군중에 전령(傳令)하여 진문을 굳이 닫고 한담을 불러 왈,
적장을 잡으려 할진대 인력(人力)으로는 잡지 못할 것이니 군장기계를 모아 여차여차(如此如此)하였다가 적장을 유인하여 진중에 들게 되면 제 비록 천신이라도 피할 길이 없으리라.
한담이 대희하여 도사의 말대로 약속을 정제(定制)하고 수일을 지낸 후에 갑주를 갖추고 진문에 나서며 원수를 불러 왈,
네 한갖 혈기만 믿고 우리를 대적하니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로다. 빨리 나와 자웅(雌雄)을 결단하라.
이때에 원수 의기양양하여 진전에 횡행타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응성출마하여 일 합이 못하여 거의 잡게 되었더니 적진이 또한 쟁을 쳐 거두거늘 승승축부(勝勝逐赴)하여 바로 적진 선봉을 헤쳐 달려들 제 장대에서 북소리 나며 난데없는 안개 사면에 가득하고 적장이 간데 없고 음풍(陰風)이 소소(蕭蕭)하며, 한설(寒雪)이 분분(紛紛)한데 지척을 모를러라. 가련하다 유충렬이 적장 꾀에 빠져 함정에 들었으니 명재경각(命在頃刻)이라. 원수 대경하여 신화경을 펴 놓고 둔갑장신하여 일신을 감추고 안순법을 베풀어 진중을 살펴보니 토굴을 깊이 파고 그 가운데 장창검극(長槍劍戟)은 삼대같이 벌였으며 사해신장(四海神將)이 나열하여 독한 안개, 모진 사석(沙石) 사면으로 뿌리면서 함성 소리 크게 질러,
항복하라!
하는 소리 천지 진동하는지라. 원수 그제야 간계(奸計)에 빠진 줄 알고 신화경을 다시 펴 육정육갑을 베풀어 신장을 호령하여 풍백(風伯)을 바삐 불러 운무(雲霧)를 쓸어 버리니, 명랑한 청천백일(靑天白日) 일광주를 희롱하고 장성검은 번개 되어 적진 중에 요란할 제, 적진을 살펴보니 무수한 군졸이며 진중에 모든 복병 둘러싸서 백만 겹을 에웠는데, 장대에서 북을 치며, 군사를 재촉커늘, 원수 분노하여 일광주를 다시 만져 용인갑을 다스리고 천사마를 채질하여 좌우진중(左右陣中) 호통하며 좌충우돌(左衝右突) 회행할 제 호통 소리 지나는 곳에 번갯불이 일어나며 번갯불 일어나는 곳에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진동하니 군사 장수 넋을 잃고 모든 장수 귀가 먹고 눈이 어두워 제 군사를 제 모른다. 서로 밟혀 분주할 제, 변화 좋은 장성검은 동천(東天)에 번듯하며 호적(胡敵)이 쓰러지고 서천(西天)에 번듯하여 전후 군사 다 죽으니 추풍낙엽 볼 만하며, 무릉도원(武陵桃源) 홍유수(紅流水)는 흐르나니 핏물이라. 선봉 중군 다 헤치고 적진 장대 달려드니 정한담이 칼을 들고 대상에 섰거늘 호통 소리 크게 하고 장성검을 높이 들어 대칼에 베어 들고 후군에 달려드니, 이때 황후 태후 적진에 잡혀 가서 토굴 속에서 소리하여 하는 말이,
저기 가는 저 장수는 행여 명나라 장수거든 우리 고부(姑婦) 살려 주소.
원수 분기 등등하여 적진에 횡행타가 슬픈 소리 나며, 천사마 그 곳을 행하거늘, 급히 가 보고 말에서 내려 왈,
소장은 동성문 내 거하던 유 주부 아들 충렬이옵더니 아비 원수 갚으려고 불원천리(不遠千里) 달려와서 정문걸을 한 칼에 베이고 그 후에 최일귀 마룡을 잡고 한담의 목을 베러 이곳에 왔사오니 소장과 함께 본진으로 가사이다.
황후 태후 이 말을 듣고 토굴 밖에 나와 원수의 손을 잡고 치사하여 왈,
그대 일정 유 주부의 아들인가. 어디 가 장성하여 저런 명장 되었는가? 그대 부친은 어디 있느뇨? 장군의 힘을 입어 우리 고부 살려내어 소소백발 이내 몸이 천자 아들 다시 보고, 연연홍안(연연홍안(姸姸紅顔)) 내 며느리 황제 낭군 다시 보게 하니 그 공로 그 은혜는 태산이 무너져서 평지가 되어도 잊을 수 없고 천지가 변하여 벽해(碧海)가 될지라도 잊을 가망 전혀 없네, 머리를 베어 신을 삼고 혀를 빼어 창을 받아 백 년 삼만 육천 일에 날마다 이고서도 그 공로를 다 갚을가 본진에 돌아가서 내 아들 어서 보세.
원수 배사하고 황태후를 바삐 모셔 본진에 돌아와 정한담의 목을 내어 천자전에 바치려고 칼 끝에 빼어 보니 참놈은 간데없고 허수아비 목을 베어 왔는지라. 원수 분노하여 다시 싸움을 돋우더라.
이때 천자 양진 싸움을 구경터니 원수 적진에 달려들며 사면에 안개 가득하고 적진 복병이 벌 일듯하여 빈틈없이 둘러싸고 고각함성은 천지 진동하고 원수의 검광이 뵈이지 아니하거늘 천자 대경실색하여 발을 구르며 땅에 엎더져 통곡 왈,
이제는 죽었구나. 천행으로 충렬을 얻었더니 이제는 죽었으니 불칙한 내 팔자 살아 무엇하리, 신령하신 황천후토(黃泉后土)는 이런 경상(景狀)을 살피사 유충렬을 살려 주소서.
이렇듯이 슬피 울더니 뜻밖에 적진 중에 안개 없어지며 벽력 같은 소리나며 장성검 번개 되어 적진 억만 병을 순식간에 쓰러져 무인지경 되었는데 일원대장이 진문 밖에 나서며 황후 태후를 모시고 본진으로 돌아오거늘, 천자와 태자 버선발로 달려들어 천자는 원수 손을 잡고, 태자는 태후의 손을 잡고 한데 어우러져 즐거운 마음 측량 없어, 울음 절반, 웃음 절반 두 가지로 섞이어서, 천자는 옥새를 목에 걸고 항서는 손에 들고 항복하러 나오다가 뜻밖에 충렬을 얻어 살아난 말씀을 하고 황태후는 적진에 잡혀가 토굴 속에 갇히었다가 뜻밖에 원수 만나 살아 온 말씀을 하고 군사들도 즐거워 치하 분분하더라.
이때 정한담이 도사의 꾀를 듣고 적장을 유인하여 함정에 넣었더니 죽기는 고사하고 삼군 억만 병을 한 칼에 무찌르고 장대에 달려들어 한담의 혼백 붙인 위인을 베이고 후군을 지치다가 황태후를 데려가는 양을 보고 넋을 잃어 도사에게 들어가 여쭈오되,
충렬은 일정 천신이라. 이제는 백계무책(百計無策)이오니 선생은 어찌하오리까?
도사 대경망극하여 아무리 할 줄을 모르다가 한 꾀를 생각하고 한담을 불러 왈,
적장 유충렬은 거거년전(去去年前)에 연경으로 귀양간 유심의 아들이라 하니 이제 급히 군사를 재촉하여 유심을 잡아다가 진중에 가두고 죽이려 하면 제 아무리 충신이나 인군만 생각하고 제 아비를 생각지 아니하랴.
한담이 이 말을 듣고 대희하여 군중에게 전령하되 날랜 군사 십여 명을 조발(調拔)하여 유 주부를 빨리 나입(拿入)하라 분부하니라.
각설, 이때 유 주부가 북방 극한지지(極寒之地)에 누년(累年) 고생함에 위인이 보잘것없고, 남경에 난리났단 말을 듣고 주야 근심하며, 행여 천자 죽을까 염려하여 동지장야(冬至長夜) 길고 긴 밤에 촉불만 돋워 켜고 축수 왈,
명천(明天)이 감동하사 우리 천자 살릴진대, 내 아들 충렬이 살았거든 남경을 구원하고 제 아비 원수를 갚게 하소서.
이렇듯이 정성을 드리더니 뜻밖에 한 떼 군사 달려들어 유 주부를 잡어내어 수레 위에 높이 싣고 불원천리 재촉커늘 유 주부 정신없어 인사를 놓았다가 겨우 인사를 차려 생각하되, 이제는 하릴없이 죽는도다. 우리 천자 승천하셨으면 날 잡아오라기 만무하다. 일정 정한담이 역적 되어 천자를 죽이고 나도 또한 죽이려고 이 지경이 되었구나. 청천일월도 무심하고 형산신령도 못 믿겠다. 내 아들 충렬이도 정녕 죽었구나. 살았으면 어디 가서 아비 원수 못 갚는가. 이렇듯이 슬피 울 제 군사들도 낙루하더라.
여러 날 만에 적진중에 득달하니 이때 정한담이 용상에 높이 앉아 곤룡포(袞龍袍)를 정히 입고 백관이 시위(侍衛)하여 유심을 잡아다가 계하에 엎지르고 달래어 하는 말이,
그대 마음이 하 고집이기로 만리 연경에 수년을 고생하니 내 마음이 불안한지라. 이제는 짐이 천자 되어 백관을 거느렸더니 그대 아들이 아직 미거(未擧)하여 천위(天威)를 모르고 죽은 명제(明帝)를 살리려고 우리 군사를 침노하니 죄상을 논지컨대 진작 죽일 것이로대 그대를 생각하여 아직 살려 두었더니 종시 항복지 아니하기로 그대를 데려다가 자식에게 편지나 하여 부자 함께 만나 나를 도우면 고관대작(高官大爵)은 원대로 할 것이니 부디 사양치 말라.
유 주부 이 말을 듣고 분심이 탱장(撑腸)하여 눈을 부릅뜨고 쪽골쳐 앉으며 왈,
네 이놈 정한담아, 천지도 무섭잖고 일월도 두렵지 아니하냐. 나는 자식도 없고, 자식이 설혹 있은들 우리 천자를 모시고 너 같은 역적 놈을 죽이려 하는데 그 아비 무슨 일로 성군을 저버리고 역적을 도우라 하며, 내 자식은 새로이 광대한 천지간이 삼척동자도 네 고기를 먹고자 하느니, 하물며 내 아들을 옥황이 점지하사 남경을 도우라 하였으니 만고역적 너 같은 놈을 섬길 듯하냐.
이렇듯이 공책(恐責)하며 노기등등(怒氣騰騰)하거늘, 한담이 대로하여 유심을 잡아내어 군중에 베이라 하니 곁에 있던 군사 벌떼같이 달려들어 검극(劍戟)을 번득이며 유 주부를 잡아내니, 도사 한담을 말려 왈,
그대 어찌 경선(輕先)히 아는다? 유심의 상을 보니 당대 왕후 기상이니 천명이 완연커늘 그리할 가망 있을쏘냐. 만일 죽였다가는 대환이 목전(目前)에 있을 것이니 분심을 참으소서.
한담이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생전 돌아보지 못할 데로 다시 귀양 보내고 거짓 유심의 편지를 만들어 무사로 하여금 명진 중에 쏘아 원수를 보게 하니 이때 원수 장대에 앉았다가 난데없는 살 하나가 진중에 내려지거늘, 급히 주워다가 살을 보니 살 끝에 편지 한 장 달렸거늘 끄러 보니 그 편지 하였으되, 연경에 적거한 유 주부는 뷸효자 충렬에게 일장서간(一張書簡) 부치나니 급히 받아 떼어 보라.
오호라! 너의 부모 연광이 반이 넘어 일점혈육 없었더니 남악산에 산제하고 너를 늦게야 낳아 영화를 보렸더니 나의 팔자 기박하여 천자께 득죄하고 만리 연경에 귀양가서 사생이 관두(關頭)하되 아비를 찾지 아니하는구나. 부모를 상봉함은 천륜(天倫)에 당연커늘 너의 몸만 장성하여 망한 나라 섬기려고 새나라를 침노하니 새 천자 네 아비를 잡아다가 너같이 몹쓸 자식 두었다 하시고 도마 위에 올려놓고 죽이려 하니 이 아니 망극하냐. 세상 사람이 자식 낳으면 좋다 하는 말이 자식의 힘을 입어 영화를 보는 고로 생남(生男)하면 좋다 하는데 나는 무슨 죄로 영화 보기는 새로이 소소백발 파리한 목에 창검이 웬일이며, 피골상연 늙은 수족 수레소를 어이하리, 네가 일정 나의 자식이거든 급히 항복하여 우리 부자 상봉하여 만종록(萬鍾祿)을 먹게 하라. 만일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면 죽은 혼이라도 자식이라 아니 하고 모진 귀신 되어 네 몸을 해하리라. 할말이 무궁하되 명재경각(命在頃刻)하여 황황하기로 그치노라.
하였더라.
원수 이 편지를 보고 정신이 아득하여 흉중이 막혀 인사를 모르더니 겨우 진정하여 천자께 들어가 그 편지를 드리며,
이 글을 보옵소서, 폐하 전일에 소신 아비의 필적을 보았을 것이니 이게 정녕 아비의 필적이오니까?
천자와 태자 그 편지를 다 본 후에 박장대소(拍掌大笑)하며 원수를 위로 왈,
그대의 부친이 죽은 지 오랜지라 혼백이 살았더래도 글씨를 보니 전후 불견(不見) 필적이라. 설령 살았을지라도 이런 말을 어이 할까. 장군은 염려 말고 정한담을 사로잡아 그 곡절을 물어 보면 내 말이 옳다 하리라.
원수 물러나와 생각하되 전일 강 승상을 만날 때에 멱라수 회사정에 부친이 빠져 죽은 표적을 붙였으니 부친이 죽기는 적실한지라 이제 어찌 적진에 들어가 편지를 부쳤으리오. 그러나 나의 마음 심란(心亂)하다. 적진을 쳐 파하고 한담을 사로잡아 이 일을 해득(解得)하리라 하고 일광주를 다시 씻고 황룡수(黃龍鬚)를 거스르고 봉의 눈을 부릅뜨며, 용인갑을 졸라 입고 대장검을 높이 들며 신화경을 손에 들고 천사마를 바삐 몰아 전진에 나서며 한담을 크게 불러 왈,
네 이놈 간사한 꾀를 내어 나를 항복코저 하거니와 내 어찌 모를쏘냐. 바삐 나와 죽어 보라.
한담이 황겁하여 도성에 들어가고 선봉을 머무르며 군문을 굳이 닫고 나지 아니하거늘, 원수 승승축부하여 적진에 달려들어 장성검 번듯하며 적진 선봉 씨가 없이 다 죽이고 도성문에 달려드니 사대문이 닫혔거늘 호통 소리 한마디에 장성검을 번득이며 철편으로 문을 치니, 문이 편편파쇄하여 동시월 설한풍(雪寒風)에 백설같이 흩날리더라. 순식간에 달려들어 궐문 밖에 진친 군사 대칼에 무찌르고 정한담을 바삐 찾아 궐문 안에 들어갈새, 이때 한담이 원수 도성에 든단 말을 듣고 황황급급 북문으로 도망하여 도사를 데리고 호산대에 높이 올라 피난하는지라.
원수 도성에 들어 한담의 가권을 잡고 또 저의 삼족(三族)을 다 잡아 본진으로 보내고 만조백관을 호령하여 옥연(玉輦)을 갖추어 본진에 돌아가 천자를 모셔 환궁하고 한담의 가솔(家率)을 낱낱이 문죄 후에 씨 없이 베이고 조정만을 신칙하여 본진을 지키우고, 원수는 전일 살던 집터를 가 보니, 웅장한 고루거각 빈 터만 남았더라. 슬픈 마음 진정하고 궐문을 향하여 돌아서니 부모 생각 측량 없어 나가는 길이 캄캄하여 참을 길이 없는지라. 갑주 벗어 땅에 놓고 가슴을 두드리며 대성통곡하는 말이,
옛날에 기자도 나라가 망한 후에 옛터를 지나다가 궁실이 무너져서 쑥대밭이 됨을 보고 맥수가(麥秀歌)를 슬피 지어 고정(故情)을 생각하더니, 이제 유충렬은 물 가운데 부모 잃고 도로에 개걸타가 이내 몸이 장성하여 살던 터를 다시 보니 장부 한숨 절로 난다. 우리 부모는 어디 가시고 이런 줄을 모르시는가. 상전벽해(桑田碧海) 한단 말을 곧이 아니 들었더니 이 내일을 생각하니 백 년 인생 초로(草露)같고 만세 광음 유수(流水)로다. 부귀영화 본다 하고 부디 사람 경(輕)히 말고 제 복 있어 잘 산다고 일가친척 괄세 마소. 고진감래(苦盡甘來) 흥진비래(興盡悲來)는 고금(古今)에 상사(常事)로세. 양지(陽地)가 음지(陰地) 되고 음지가 양지 되는 줄을 그 뉘라서 알아보리, 권세 좋다 귀하다고 천만 년을 믿지 마소.
이렇듯이 낙루하고 도성에 돌아오니 만조백관 시위(侍衛) 중에 충신은 다 죽고 남아 있는 자는 정한담의 동류(同類)라. 낱낱이 잡아내어 죄지경중(罪之輕重)하여 장안시에 처참하고 정한담을 찾으려고 군중에 전령하여 찾으니라.
이때 정한담이 호산대에서 도사더러 의논할새, 도사 한 꾀를 생각하여 왈,
이제 백계무책(百計無策)이라. 여간 남은 군사로 패문(牌文) 지어 남만과 서번과 호국에 보내어 패전한 말을 하고 구원병을 청하여 한번 싸운 후에 사불여의(事不如意)하면 목숨만 도망하여 후일을 봄이 어떠하뇨.
한담이 대희하여 패문을 지어 급히 오국에 보내니라. 이때 오국 군왕이 각기 장수를 보내어 승전하기를 주야 기다리더니 뜻밖에 패군한 소식이 왔거늘 각각 분노하여 서천 삼십육 도 군장이며 가달 토번왕과 호국대왕이 정병 팔십만과 용장 천여 원이며 신기한 도사를 좌우에 앉히고 진세를 살피며 각각 군왕 등은 중군이 되어 천하명장을 간택하여 선봉을 정한 후에 행군을 재촉하여 달려드니 그 거동 웅장함은 일구난설(一口難說)이라.
이때 정한담이 청병 옴을 보고 기운이 펄쩍하여 성명을 바삐 적어 군중에 통지하고 도사와 함께 호왕께 헌신하고 전후수말(前後首末)을 낱낱이 아뢰니 호왕 등이 이 말을 듣고 정문걸이며 마룡이 죽었단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여 접전할 마음이 없으나 한갖 분심을 못 이기어 정한담과 동심하여 호산대에 진을 치고 격서를 남경으로 보내니라.
이때 원수는 도성에 들고 조정만은 금산성하에 유진하였더니 뜻밖에 조정만이 장계를 올리거늘 급히 개탁하여 보니 하였으되,
오국군왕들이 패군한단 말을 듣고 각각 중군이 되어 오는 중에 정한담과 옥관도사 합력하여 격서를 보내었으니 원수는 급히 와 방적(防敵)하소서.
하였거늘 원수 듣고 크게 웃어 왈,
정문걸 마룡은 천하 명장이라도 내 칼 끝에 죽었거든 하물며 오국병호야 비록 승천입지(昇天立地)하는 놈이 선봉이 되었으나 한갓 장성검의 피만 묻힐 따름이라 황상은 염려 마옵시고 소장의 칼 끝에 적장의 머리 떨어지는 구경이나 하옵소서.
즉시 갑주를 갖추고 본전에 돌아와 군사를 신칙하여 항오를 각별이 단속하고 적진에 글을 보내 싸움을 도울 제, 이때 정한담이 오국군왕전에 한 꾀를 드려 왈,
도사의 재주는 소장이 십 년을 공부하여 변화무궁하오니 구척장검 칼머리에 강산도 무너지고 하해도 뒤놉더니, 명진 도원수 유충렬은 천신이요 사람은 아니라, 이제 대왕이 억만 병을 거느려 왔으나 충렬 잡기는 새로이 접전할 장수 없사오니 만일 싸우다가는 우리 군사 씨가 없고 대왕의 중한 목숨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니 오늘밤 삼경에 군사를 갈라 금산성을 치게 되면 제 응당 구할 차로 올 것이니, 그때를 타 소장은 도성에 들어가 천자를 항복받고 옥새를 앗았으면 제 비록 천신인들 제 인군 죽었는데 무슨 면목으로 싸우리까. 그 꾀 마땅하오니 대왕의 처분은 어떠하시니까?
호왕이 대희하여 한담으로 대장 삼고 천극한으로 선봉을 삼고 약속을 정제할 제, 제군 중에 기치를 둘러 도성으로 갈 듯이 하니 원수 산하에 있다가 적세를 탐지하고 도성에 들어오니라.
이 밤 삼경에 한담이 선봉장 극한을 불러 군사 십만 명을 주어 금산성을 치라 하니 극한이 청명하고 금산성에 달려들어 호통일성에 십만 명을 나열하여 군문을 바삐 해쳐 군중에 들어 좌우를 충돌하며 군사를 짓쳐 들어가니 불의에 환을 만나 황황급급한지라.
원수 도성에서 적세를 탐지하더니 한 군사 보하되,
지금 도적이 금산성에 들어 군사를 다 죽이고 중군장을 찾아 횡행하니 원수는 급히 와 구원하소서.
원수 대경하여 금산성 십 리 뜰에 나는 듯이 달려들어 벽력같이 소리하며 적진을 헤쳐 중군에 들어가 조정만을 구원하여 장대에 앉히고 필마단창으로 성화같이 달려들어 장성검 지낸 곳의 천극한의 머리를 베이고 천사마 닫는 곳에 십만 군병이 팔공산 초목이 구시월 만난 듯이 순식간에 없어지니 원수 본진에 돌아와 칼끝을 보니 정한담은 어디 가고 전후 불견 되놈이라.
이때 한담이 원수를 치우고 정병만 가리어 급히 도성에 드니 성중에 군사 없고 천자는 원수의 힘만 믿고 잠을 깊이 들었다가 뜻밖에 천병만마 성문을 깨치고 궐내에 들어가 함성하는 말이,
이봐 명제야 어디로 갈다? 팔랑개비라 비상천(飛上天)하며 두더지라 땅으로 들다? 네놈의 옥새 앗으려고 하더니 이제는 어디로 갈다? 바삐 나와 항복하라. 하는 소리 궁궐이 무너지며 혼백이 상천하는지라. 명제 넋을 잃고 용상에 떨어져 옥새를 품에 품고 말 한 필 잡아 타고 엎더지며 자빠지며 북문으로 도망하여 변수 가에 다다르니 한담이 궐내에 달려들어 천자를 찾은즉 간데없고 황후 태후 태자 도망하여 나오거늘 호령하고 달려들어 황후를 잡아 궐문에 나와 호왕에게 맡기고 북문에 나서니, 이때 천자 변수 가에 도망커늘 한담이 대희하여 천둥 같은 소리하고 순식간에 달려들어 구척장검 번듯하여 천자의 앉힌 말이 백사장에 거꾸러지거늘, 천자를 잡아내어 마하(馬下)에 엎지르고 서리 같은 칼로 통천관(通千冠)을 깨던지며 호통하는 말이,
이봐 들어라. 하늘이 날 같은 영웅을 내실 제는 남경에 천자시킴이라. 네 어찌 천자를 바랄쏘냐. 네 한 놈 잡으려고 십 년을 공부하여 변화무궁하니 네 어찌 순종치 아니하고 조그마한 충렬을 얻어 내 군사를 침노하니 너의 죄를 논지컨대 이제 바삐 죽일 것이로되, 옥새를 드리고 항서를 써 올리면 죽이지 아니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네놈의 노모처자를 한 칼에 죽이리라. 천자 하릴없어 하는 말이,
항서를 쓰자 한들 지필(紙筆)이 없다.
하시니 한담이 분노하여 창검을 번득이며 왈,
용포(龍袍)를 떼고 손가락을 깨어 항서를 쓰지 못할까.
천자 용포를 떼고 손가락을 깨물려 하니 차마 못할 즈음에 황천인들 무심하리.
이때 원수 금성산에 적진 십만 명을 한 칼에 무찌르고 바로 호산대에 득달하여 적진 정병을 씨 없이 함몰코자 행하더니 뜻밖에 월색이 희미하여 난데없는 빗방울이 원수 면상(面上)에 내려지거늘 원수 고이하여 말을 잠깐 머무르고 천기를 살펴보니 도성에 살기 가득하고 천자의 자미성이 떨어져 변수 가에 비췄거늘 대경하여 발을 구르며 왈,
이게 웬 변이냐.
갑주 창검 갖추고 천사마상 바삐 올라 산호편을 높이 들어 말석을 채질하며 말더러 정설(叮說) 왈,
천사마야, 너의 용맹 두었다가 이런 때에 아니 쓰고 어디 쓰리요. 지금 천자 도적에게 잡히어 명재경각이라 순식간에 득달하여 천자를 구원하라.
천사마는 본디 천상에서 타고 온 비룡(飛龍)이라 채질을 아니하고 정설만 하되 제 가는 대로 두어도 순식간에 몇천 리를 갈 줄 모르는데 하물며 제 임자 급한 말로 정설하고 산호채로 채질하니 어찌 아니 급히 갈까. 눈 한 번 깜짝이면 황성 밖에 얼른 지나 변수 가에 다다르니, 이때 천자는 백사장에 엎더지고 한담은 칼을 들고 천자를 치려거늘, 원수 이때를 당함에 평생 있는 기력과 일생에 지른 호통을 진력하여 다 지르니, 천사마도 평생 용맹 이때에 다 부리니, 변화 좋은 장성검도 삼십삼천(三十三天) 어린 조화 이때에 다 부리고, 원수 닫는 앞에 귀신인들 아니 울며 강산도 무너지고 하해도 뒤눕는 듯 혼백인들 아니 울리요. 혼신(渾身)이 불빛 되어 벽력같이 소리하며 왈,
이놈 정한담아, 우리 천자 해치 말고 나의 칼을 네 받으라.
하는 소리에 나는 짐승도 떨어지고 강신(江神) 하백(河伯) 넋을 잃어 용납지 못하거든 정한담의 혼백인들 아니 가며 간담이 성할쏘냐. 호통 소리 지내는 곳에 두 눈이 캄캄하고 두 귀가 먹먹하여 탔던 말둘러 타고 도망하여 가려다가 형산마 거꾸러져 백사장에 떨어지니 창검을 갈라 들고 원수를 바우거늘 구만 청천 구름 속에 번개칼이 언뜻하며 한담의 두 팔목이 마하에 내려지며 장성검 언뜻하며 한담의 장창대검 부숴지니 원수 달려들어 한담의 목을 산 채로 잡아 들고 말에서 내려 천자 앞에 복지하니, 이때 천자 백사장에 엎더져서 반생반사(半生半死) 기절하여 누웠거늘 원수 붙잡아 앉히고 정신을 진정한 후에 복지 주왈,
소장이 도적을 함몰하고 한담을 사로잡아 말에 달고 왔나이다.
천자 황망주에 원수란 말을 듣고 벌떡 일어앉아 보니, 원수 복지 하였거늘 달려들어 목을 안고,
네가 일정 충렬이냐. 정한담은 어디 가고 네가 어찌 예 왔느냐. 나는 죽게 되었더니 네가 와서 살리도다.
원수 전후수말을 아뢴 후에 한담의 머리를 풀어 손에 감아 들고 도성에 들어오니 이때 오국군왕이 성중에 들었다가 한담이 사로잡혔단 말을 듣고 황겁하여 도성에 들어 성중보화(城中寶貨) 일등미색(一等美色)을 탈취하고 황후와 태후 태자를 사로잡아 수레 위에 높이 싣고 본국으로 돌아가고 없는니라.
천자 원수 붙들고 대성통곡 왈,
이 몸이 하늘께 득죄하여 나라가 망케 되었다가 충신 그대를 얻어 회복되게 되었으나 부모 처자를 되놈에게 보내고 나 혼자 살아 무엇하리. 천하를 그대에게 전하나니 그리 알라. 과인은 이제 죽어 혼백이나 호국에 들어가 모친을 만나 보면 구천에 들어가도 여한(餘恨)이 없으리라. 하고 궐내(闕內) 백화담에 빠져 죽고저 하거늘 원수 붙들어 용상에 앉히고 여짜오대,
소신이 충성이 부족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나 이때를 당하여 신자(臣者) 도리에 호국을 그저 두오리까. 소신이 재주 없사오나 호국에 들어가 호종(胡種)을 함몰하고 황태후를 편히 모셔 돌아오리다. 천자 원수 손을 잡고 낙루하며 부탁하되,
경이 충성을 다하여 호국을 쳐 멸하고 과인의 노모와 처자를 다시 보게 하면 살을 베어도 아깝지 아니하리요.
원수 배사하고 나와 정한담을 끌러 계하에 엎지르고 좌우 나졸 호령하여 온갖 형벌 갖추고 전후죄목(前後罪目)을 낱낱이 물어 왈,
이놈 들으라. 네 자칭 신황제라 하고 날더러 천의(天意)를 모른다하더니 어찌 두 팔이 없어 내게 잡혀 왔느냐?
한담이 참괴무언(慙愧無言)이라.
네 자칭 십 년 공부하여 천자를 도모(圖謀)한다 하더니 어떠한 놈에게 공부하여 역적이 되었느냐?
한담이 여쭈오되,
소인이 불행하여 도사놈의 말을 듣고 이 지경이 되었으니 아뢸 말씀 없나이다.
도사놈이 어디 갔는고?
소인이 변수 가에 갔을 때에 호국에 들어갔을 듯하나이다.
원수 왈,
네놈은 날과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라 진작 죽일 것이로되 내 부친의 존망(存亡)을 알고자 하느니 바른대로 아뢰라.
한담이 다시 여쭈오대,
소인이 죄 중(重)하야 도사의 말을 듣고 정언주부를 무함(誣陷)하여 연경의 귀양 갔삽더니 수일 전에 다시 잡아다가 항복을 받고저 하되 종시 말을 듣지 아니하는 고로 다시 호국 포판이라 하는데로 귀양 갔사오니 그간 생사는 모르나이다. 원수 이 말을 듣고 통곡 왈,
강희주는 죽었느냐 살았느냐?
한담이 여쭈오되,
강 승상도 무함하여 옥문관으로 귀양하고, 그 집 가솔을 다 잡아 오더니 중로(中路)에 야간도주(夜間逃走)하여 영릉땅 청수에 빠져 죽었다 하더이다. 원수 모친이 회수에 봉변한 일이 한담의 소위(所爲)인 줄 모르고 강 낭자 죽은 일만 절분(切忿)하여 한담을 대칼에 베이고자 하되 부친을 만난 후에 죽이리라 하고 삼목(三木)을 갖추어 결박하여 전옥에 가두고 갑주 장검을 갖추어 천자께 하직하고 나오려 하니 천자 계하(階下)에 내려 손을 잡고 낙루 왈,
짐의 수족(手足)을 만리 타국에 보내고 마음이 어떠할꼬. 부디 충성을 다하여 모친과 자식을 살려 수히 돌아오소, 만일 그간에 환이 있으면 뉘로 하여 살아날까. 십 리 밖에 전송하며 만 번 당부하니 원수 청명(聽命)하고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만리 타국에 들어갈 제, 이때 호왕이 들어가며 후환이 있을까 하여 각도 각관(各道各關)에 행관(行關)하여 호국 들어오는 길에 인가를 없애고 물마다 배를 없애어 인적을 통치 못하게 하였는지라, 원수 전장에 고생하며 음식을 전폐한 날이 많은 중에 부친의 소식을 알고저 하여 침식이 불안하던 차에 호국 수만 리를 주점 없이 지내오니 기운이 반감하였는지라. 행역이 노곤하여 유주에 득달하여 자사를 잡아내어 문죄(問罪) 왈,
네 이놈 세대로 국록지신(國祿之臣)으로 국가 불안하되 네 몸만 생각하고 국사를 돌보지 아니하며, 또한 정한담의 말을 듣고 유 주부를 네 골에 귀양하였다 하더니 어디 계시뇨? 자사 황겁하여 사죄 왈,
소인도 국록지신으로 어찌 무심하리까마는 호병이 남경에 가는 길에 소인 고을에 달려들어 군사와 양식을 탈취하고 소인을 죽이려 하기로 소인이 도망하여 목숨만 살아났으나 본디 재주 없고 적수단신(赤手單身)이라 할 바를 몰라 다만 국가 어찌된 줄을 모르더니 수일 전에 소식을 들어본즉 호병이 승전하여 황후 태후 태자를 사로잡아 가노라 하기 황황망극하던 차에 장군이 와 계시니 황송하오나 성명은 뉘시며 무슨 일로 유 주부를 찾나이까? 원수 비감하여 왈,
나는 이 고을 적거하신 유 주부의 아들이러니 부모 원수 갚으려고 적진에 들어가 천자를 구완하고 정한담 최일귀를 한칼에 베이고 오국정병을 일시에 무찌르고 천자를 모셔 환궁하였더니 뜻밖에 오국왕이 들어와 나를 속여 도성을 엄살하고 황후를 사로잡아 갔는 고로 북적을 함몰하고 황후를 모셔오려고 가는 길에 들렀노라.
자사 이 말을 듣고 계하에 내려 백배 치사하고 주육을 많이 내어 대접하고 십 리 밖에 전송하니라.
원수 유주를 떠나 호국에 다다르니 풍설(風雪)은 분분하고 도로는 험악하여 인적이 없는지라.
각설, 이때 호왕이 십만 병을 거느려 남경에 갔다가 한담이 사로잡혔단 말을 듣고 도성에 들어가 황후 태후 태자를 사로잡고 성중 보화와 일등미색을 탈취하여 본국으로 돌아와 승전곡(勝戰曲)을 울리며 잔치를 배설하고 수일 즐긴 후에 황후 태후 태자를 잡어내어 계하에 엎지르고 나졸이 좌우에 늘어서서 검극을 벌렸는데 호왕이 인검으로 난간을 치며 태자를 호령하여 왈,
네 이놈, 전일은 네 아비 힘을 믿고 범람(氾濫)히 동궁이라 하였거니와 이제는 과인이 하늘께 명을 받아 천자를 항복받고 네 조모(祖母)를 사로잡아 왔으니 만승천자(萬乘天子)가 나밖에 또 있느냐. 네 바삐 항복하여 나를 도우면 죽이지 아니하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너의 모자(母子)를 북해상(北海上)에 던지리라.
이렇듯이 호령하니 군사의 엄장함은 염왕국(閻王國)이 가까운 듯, 호왕의 엄한 위풍 단산맹호 장을 치는 듯, 황후 태후 정신이 아득하여 삼 인이 서로 목을 안고 계하에 엎더져서 아무리 할 줄 모르더니, 이때의 태자의 년(年)이 십삼 세라. 호왕을 호령하여 하는 말이,
네 이놈 역적놈아, 한갓 강포만 믿고 외람히 남경을 침노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나 언감생심(焉敢生心)에 황제를 질욕(叱辱)하며 나를 항복받아 네 신하를 삼을쏘냐. 군신지분의(君臣之分義)를 논지컨대 황제는 만민지부(萬民之父)요, 황후는 만민지모(萬民之母)라. 너는 만고역적(萬古逆賊)놈이라. 하니 호왕이 분노하여 나졸을 재촉하니, 일시에 달려들어 황후 태후 태자를 잡아내어 온갖 형벌을 다 갖추고 수레 위에 높이 싣고 동문대 도상에 나올 적에 기치검극(旗幟劍戟)을 삼대같이 세웠는대, 총융대장 높이 앉아 자객(刺客)을 상급(賞給)하고 검술을 희롱할 제, 황후 태후 태자 수레에서 내려 황후는 태후의 목을 안고 태자는 황후의 목을 안고 삼 인이 한 몸 되어 백사장 너른 들에 엎더져 땅을 허비며 방성통곡하는 말이,
전생에 무슨 죄로 백발노구 홍안소부(紅顔少婦) 어린 손자 앞세우고 되놈에게 잡혀 와서 한 칼 끝에 다 죽으니 북방천리 멀고 먼 길에 무주고혼(無主孤魂) 된단 말가. 피골상연(皮骨相連) 이내 몸은 되놈에게 자식 잃고 청춘소부 내 며느리 되놈에게 낭군 잃고 혈혈단신(孑孑單身) 내 손자 되놈에게 아비 잃어 만리호국(萬里胡國) 험한 땅에 뉘 보려고 예 왔다가 세 몸이 한 몸 되어 자객 손에 죽게 되니 천만 년을 지내 간들 이런 변을 다시 볼까. 광대한 천지간에 흉악하고 불칙한 게 우리 셋의 팔자로세. 도적에게 황성 잃고 우리 아들 정한담을 피하여 북문으로 도망터니 죽었는가 살았는가 혼백이나 둥둥 떠서 늙은 어미 죽는 줄을 귀신이나 알련마는 창망한 구름 속에 사람 소리뿐이로다. 유충렬은 어디 가고 날 살릴 줄 모르는가. 한심하다. 형산신령 인선(仁善)한 내 아들을 남경에 점지하여 용상(龍床) 위에 앉힐 적에 그 어미는 무슨 죄로 이 지경이 되게 하며, 만고영웅(萬古英雄) 유충렬은 대명국에 점지할 제 어떤 인군(人君) 섬기려고 나의 손자 죽는 줄을 모르느냐. 비나이다. 비나이다. 형산 신령 대명국 황성에 급히 가 우리 유 원수를 찾아 내 말을 전하되 대명국 황태후, 불쌍한 며느리와 어린 손자 목 안고 기치창검 나열하며 백포장(白布帳) 장막 안에 자객이 벌렸는데 세 몸을 한데 놓고 금일 오시(午時)만 지내면 무죄한 세 목숨이 창검 끝에 달렸으니 한때 속히 전해 주오.
이렇듯이 통곡하니 피 같은 저 눈물은 소상강 저문 비가 반죽(斑竹)에 뿌리는 듯, 가련하다 만승황후 시년(是年)이 이십팔 세라 옥빈홍안(玉鬢紅顔) 고운 얼굴 월태화용 귀한 몸이 여러 날 잠 못 자고 굶었으니 형용이 초췌한 중에 호왕이 잡아낼 제 흉악한 군사놈이 억지로 끌어내니 유혈이 만면(滿面)하고 의상(衣裳)이 남루(襤褸)하니 청천에 밝은 달이 흑운(黑雲) 속에 잠겼는 듯, 녹수(綠水)의 홍연화(紅蓮花)가 흑비를 머금은 듯 가련하고 슬픈 경상 차마 보지 못할너라.
이때에 총융대장(摠戎大將) 군사를 재촉하여 죄인을 잡아다가 깃대 밑에 엎지르고 자객을 호령하여,
일시에 처참하라!
하니 자객들이 청명하고 홍포(紅袍) 남대(藍帶) 허리에 띠고 비수검(匕首劍)을 번뜩이며 좌우에 갈라서서,
행형(行刑)한다!
고함 소리 청천에 진동하니 천지 어찌 무심할까.
이때 유 원수 호국지경에 득달하여 상남뜰에 바삐 가니 호국 선우대가 구름 속에 보이거늘 창강(蒼江) 백설(白雪) 갈대 밑에 천사마를 물 먹이고 강수(江水) 쥐어 낯 씻더니 사고무인(四顧無人) 적막한데 난데없는 일엽표주 강상에 떠오더니 일원선녀 선창 밖에 나와서 원수에게 예하고 금낭을 끌러 과실을 두 개 주며 왈,
행역이 곤고(困苦)하오니 이 과실 한 개를 자시고 한 개는 두었다가 일후에 쓰려니와 지금 황후 태후 태자 호국에 잡혀 가서 동문대 도상에 온갖 형벌 갖추오고 자객을 재촉하여 검술을 희롱하니 황후의 귀한 명이 경각에 있는지라 어찌 급함을 모르고 바삐 가지 아니하나이까? 두어 말 이르더니 범범중유 가는지라. 원수 대경하여 그 과실 한 개 먹고 천기를 살펴보니 태자의 장성이 떨어질 듯하고 자미성이 칼 끝에 달렸거늘 대경하여 황룡수를 거스르고 봉의 눈을 부릅뜨고 일광주 용인갑을 단단히 졸라매고 장성검을 펴 들고 천사마를 채질하여 나는 듯이 들어가니 동문 밖 십 리 사장에 군사 가득하였거늘 말다리를 급히 열어 조총을 잠깐 내어 대한고를 한 번 놓으니 우레 같은 함성 소리 청천백일 진동한 듯, 호왕을 불러 외는 말이,
여봐라 호왕놈아, 황후 태후 해치 말라!
이때 자객이 비수를 번뜩이며 태자 목을 치려할 제 난데없는 벽력 소리 청천에 떨어지며 일원대장이 제비같이 들어오니 일진이 황겁하여 주저주저하던 차에 천사마 눈 한 번 깜짝이며 동문대도상에 장성검이 불빛 되어 십 리 사장 너른 뜰에 오마대로 싸인 군사 씨 없이 다 베이고 성중에 달려들어 궐문을 깨치고 문 안에 만조백관 대칼에 무찌르고 용상을 쳐부수며 호왕의 머리 풀어 손에 감아 쥐고 동문대로에 급히 오니 이때 황후 태후 태자 자객의 검광 끝에 혼백이 흩어져서 기절하여 엎더졌는지라 원수 급히 달려들어 태자를 붙들어 앉히고 황후 태후를 흔들어 앉히니 한식경이 지난 후에 겨우 인사를 차리거늘 원수 복지하여 여쭈오대, 정신을 차리옵소서. 대명국 도원수 유충렬이 호왕을 사로잡고 자객과 군사를 한칼에 다 죽이고 이곳에 왔나이다.
태자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황후의 목을 안고,
남경 유충렬이 왔네. 정신을 진정하여 충렬을 다시보소.
이렇듯이 부르짖으니 황후 태후 기절하였다가 유충렬이 왔단 말을 듣고 가슴을 두드리며 벌떡 일어앉아 사면을 바라보니 군사는 하나도 없고 일원대장이 앞에 복지하였거늘 다시 여쭈오대,
소장은 남경 유충렬이옵더니 호왕을 사로잡아 이곳에 왔나이다.
황후 이 말을 듣고 칵 달려들어 손을 잡고 하는 말이,
그대 일정 유원수냐. 종천강(從天降)하며 종지출(從地出)한가? 북방 호지 수만 리를 어찌 알고 왔는가? 그대 은덕 갚을진대 백골난망이라 어찌 다 갚으리오. 태자도 만단치사(萬端致辭)하고 천자 존위(尊位)를 바삐 물은대 원수 여쭈오되,
소장이 도적에게 속아 금산성에 들어가온즉 적장 천극한이 십만 명을 거느려 왔거늘 한칼에 다 베이고 급히 돌아오다가 천기를 보온즉 황상이 변수에 죽게 되었거늘 급히 달려가니 황상은 백사장에 엎더지고 정한담은 칼을 들어 황상을 치려 하거늘 소장이 달려들어 정한담을 사로잡아 전옥에 가두고 황상은 편히 모셔 환궁하신 후에 소장은 대비(大妃) 대군(大君)을 모신 후에 아비를 찾으려 하고 왔나이다. 삼 인이 백배 치사 왈,
북망산에 있는 부모 회생하여 다시 본들 이에 더 반가우며 강동에 떠난 형제 야중에 만나본들 이도곤 더할쏘냐. 이제 돌아가 우리 천자와 원수로 더불어 결의형제하여 만세 유전토록 떠나 살지 아니하며 천하를 반분하여 동락태평(同樂太平)할까 하노라.
태자 호왕 잡아옴을 보고 원수의 칼을 뺏어 갖고 호왕을 엎지르고 왈,
네 이놈아, 왕후를 질욕(叱辱)하며 나를 항복받아 네 신하를 삼고자 하더니 청천 일월이 밝았거든 언감생심(焉敢生心)인들 하늘을 욕할소냐.
분심을 참지 못하여 장성검을 높이 들어 호왕의 머리를 베어 칼 끝에 꿰어 들고 호왕의 간을 내어 낱낱이 씹은 후에 성중에 들어가 약간 남은 군사 다 죽이고 그 중에 군사 오 명을 잡어내어 준마(駿馬) 세 필을 구하여 교자를 갖추어 황후 태자를 모시고 호국 옥새와 지도서(地圖書)를 가지고 행군할새, 도로장을 불러 왈 포판을 묻고 길을 재촉하며 부친을 생각하여 눈물이 비오듯하니 슬픈 마음 억제치 못하여 방성통곡 우는 말이, 천자는 나 같은 신하를 두었다가 만리 호국에 죽게 된 부모를 다시 만나 보거니와 나는 포판에 있는 부친 죽었는가 살았는가. 회사정에 모친 잃고 만리 북방에 부친 잃고 영릉 천수에 아내 잃었으니 살아서 무엇하며 죽어도 아깝잖고 도리어 악귀가 될지라 포판을 어서 가면 우리 부친의 생사를 알아볼까. 하며 슬피 우니, 태후와 태자 원수의 손을 잡고 만단 위로하여 길을 재촉터니 여러 날 만에 포판을 득달한대, 이 땅은 북해상 무인지지(無人之地)라 사무인적(四無人跡)하고 다만 들리느니 해상 풍랑 소리 사람의 간장을 격동하고 소슬한풍(蕭瑟寒風) 원숭이는 슬피 울어 객의 수심을 돕는구나. 귀신이 난잡한데 유 주부의 혈혈단신 살 가망이 전혀 없다.
이때 유 주부 도적에 가 잡혀 갔다가 항복지 아니한다 하고 피골상연한 몸에 형장을 많이 맞고 북해상 무인지에 음식이 없었으니 기갈(飢渴)을 어이하리 미구(未久)에 운명(殞命)하게 되었더니, 이때 원수 순식간에 달려들어 보니 토굴을 깊이 파고 험한 수목으로 사면을 둘러 싸고 짚자리 한 닢 위에 문 밖에 수직한 군사 한 명만 두어 삼순구식(三旬九食)으로 구먹밥을 주는지라.
이 거동을 보고 엎더지며, 투구 벗어 땅에 놓고 사면 수목을 헤치고 토굴문 밖에 복지하여 여쭈오되,
대명국 남경 동성문 내 사는 충렬은 도적을 잡아 평난하고 황후 태후 태자를 모셔 이리 왔나이다.
이때 유 주부 기운이 쇠진하여 인사를 버리고 잠을 깊이 들었더니 몽중에 얼풋이 들으니 충렬이란 말을 들음에 천리 밖에서 나는 듯하여 꿈을 깨어 앉으며 왈,
네가 귀신이냐 사람이냐?
충렬이 살아왔나이다.
주부 귀신인가 의심하여 충렬이 찾아오기는 천만 의사 밖이라 진언을 외우며 왈,
내 아들 충렬은 회수에 죽었으니 네가 일정 혼신이냐. 혼백이라도 반갑고 반갑다.
충렬이 울며 왈,
소자 회수에 죽게 되었더니 천행으로 살아나서 도적을 함몰하고 천자를 모셔 환궁하옵고 지금 호국에 가 황후 태후 태자를 모셔 문 밖에 왔나이다.
유 주부 이 말을 듣고,
이게 웬 말이냐.
토굴을 두드리며,
네가 일정 충렬이냐. 충렬이 적실커든 십 년 전에 연경으로 귀양 올 적에 주던 죽장도(竹粧刀) 어디 보자.
원수 옷을 급히 벗고 한삼(汗衫)에 차인 죽도를 끌러내어,
두 손에 받들어 올리나이다.
주부 이 말을 듣고 토굴문에 엎드려서 손을 내어 받아 보니 소상반죽 다섯 마디 황강죽루를 화침(火針)으로 새겼으니 구천에 돌아간들 부자 신표(信標) 모를쏘냐. 벌떡 일어 앉어 왈,
이게 웬말이냐, 충렬이 왔구나! 죽도는 보았으나 내 아들 충렬은 가슴에 대장성이 박히고 등에는 삼태성이 있느니라.
원수 옷을 벗어 땅에 놓고 주부 곁에 앉으니, 주부 가슴과 등을 살펴보니 샛별 같은 삼태성과 대장성이 뚜렷이 박혔는데 금자로 대명국 도원수라 번듯하게 새겼거늘 왈칵 뛰어 달려들어 충렬의 목을 안고 왈,
어디 갔다 이제 오냐. 하늘로 떨어졌느냐, 땅으로 솟았느냐. 우리 천자 살아 계시며, 너의 모친 어떠하며 만고역적 정한담이 우리집에 불을 놓아 너의 모자 죽이려 한다더니 어찌 살아나서 저다지 장성하였느냐. 네가 일정 충렬이냐. 네가 일정 성학이냐. 죽도 보고 표적 보니 충렬일시 분명하되 정한담의 화환(禍患) 만나 회수중에 죽었거든 만경창해 너른 물에 칠세동(七歲童)이 어찌 살아 부자상봉하단 말인가.
이렇듯이 상곡(傷哭)하다가 기절하니 원수 대경하여 행장을 급히 끌러 선녀 주던 실과를 내어 주부를 먹인 후에, 수족을 만져 정신을 회생케 하니 식경이 지내어 일어 앉으며 정신을 수습하니 난데없는 맑은 기운이 청천일월 같은지라. 충렬의 손을 잡고 왈, 네 무슨 약을 얻어 이렇듯 나를 구하느냐?
이때, 황후 태후 주부 회생함을 보고 급히 들어가 주부의 손을 잡고 왈,
어찌 저리 귀한 아들을 두어 만리타국에 그대와 우리를 살려내어 이곳에 서로 만나 보게 하는고.
주부 복지 주왈(奏曰),
이게 다 황상의 덕택이로소이다.
이때, 원수 황후 태후 태자를 모시고 호국을 떠나 양자강을 건너갈제, 남경이 장차 사만 오천육백 리라 황주에 달려들어 요기(療飢)하고 나올 제, 멱라수 회사정에 부친 글을 떼버리고 황성에 들어올 제, 이때 천자 원수를 만리타국에 보내고 주야 한탄하며 천행으로 황후 태후 태자를 찾아올까 하여 축수하더니 뜻밖에 유 원수 장계를 올렸거늘 급히 개탁하여 보니, 도원수 유충렬은 호국에 들어가 호적을 함몰하고 황후 태후 태자를 모시고 오는 길에 포판에 가 주부를 살려내어 함께 본국으로 들어오나이다.
하였거늘 천자 대희하사 십 리 밖에 나와 영접할 제 황후 태후 달려들어 일변 반기며 일변 슬피 우니 그 정상은 차마 보지 못할네라.
태자 복지하여 여쭈오되 호국에 들어가 호왕에게 견패(見敗)하고 동문대도상에 거의 죽게 되었더니 천행으로 원수를 만나 살아난 말을 아뢰며, 포판에 들어가 주부 살려온 말씀을 낱낱이 주달하니, 천자 이 말을 듣고 충렬의 등을 만지며 왈,
옛날 삼국시절에 유․관․장(劉關張) 삼 인이 도원결의(桃園結義) 하였더니 과인(寡人)도 경으로 더불어 결의형제하리라.
하고 백번 치사하시니, 이때 주부 복지 주왈,
소신은 연경에 귀양갔던 유심이옵더니 자식의 힘을 입어 잔명을 살아나서 폐하를 다시 뵈오니 만행이오나 폐하 이렇듯 국사(國事)에 곤고(困苦)하시되 소신의 충성이 부족하여 호국에 갇히었삽기로 고도치 못하오니 죄사무석이로소이다. 천자 유 주부란 말을 듣고 버선발로 뛰어내려 주부의 손을 잡고 왈,
이게 웬 말인가! 회사정에 죽은 줄만 알았더니 어찌하여 살아온가? 과인이 불명하여 역적놈의 말을 듣고 무죄한 우리 주부를 만리 연경에 보내었으니 뉘를 원망할까 모두 다 과인이 불명한 탓이로세. 그대의 얼굴을 보니 죄 중한 이내 몸이 무슨 면목으로 사죄할까. 그대에게 한 공덕을 갚을진대 살을 베어 봉양하고 천하를 반분한들 어찌 다 갚을까.
이렇듯이 치사하고 도성에 들어오니 이때 장안 만민(萬民)이며, 중군 조정만이며 군사 일시에 들어와 원수전에 낱낱이 배사하고 남녀노소 없이 원수의 말을 잡고 뉘 아니 송덕하며 뉘 아니 축수할쏜가.
또 한 백발노인이 죽장을 잡고 떨어진 감투를 쓰고 어린아이 앞세우고 동편 골목에 나오면서 술 한잔 받아 들고 안주는 낙엽에 싸서 손자에게 들리고 기염기염 기어나와 원수전에 백배 치사하며 만만세를 불러 왈,
소인이 동성문 내 사옵더니 삼대 독신으로 소인에게 미쳐 삼자일녀(三子一女)를 낳아 놓고 귀히 길러 제 몸이 장성터니 만고역적 정한담이 도성을 쳐 파하고 용상에 높이 앉아 자칭(自稱) 천자하고 생민(生民)을 도탄할 제, 소인의 자식 둘을 군사에 충수(充數)하여 전장(戰場)에 싸우다가 자식 하나를 죽였더니 옥황이 남경을 도우사 장군님을 남경에 점지하여 도적을 치려 하고 진중에 달려들어 적장 정문걸을 반 합에 베어 들고 천자를 구완하시거늘 소인의 끝에 자식을 성중에 두었다가는 정한담에게 죽일 듯하여 중군 조정만에게 야간 도망하여 장군님 진중에 보내고 북두칠성전에 일 년 삼백육십 일에 밤마다 축수하며, 우리나라 장수님이 승전(勝戰)하게 하옵소서.
이렇듯이 축수하옵더니 장군님이 힘을 입어 명진 군사는 하나도 상치 않고 왔기로 소인의 끝에 자식이 살아나서 이 손자를 두었으니 이놈은 장군님 자식과 다름이 없는지라. 이제는 소인이 죽어도 백골(白骨) 엄토(掩土)할 자식이 있고 선영향화(先塋香火) 받들 손자 있사오니 이는 모두 다 장군님의 덕이옴에 소인이 죽을 날이 머지 아니하온지라. 다만 술 한잔을 장군님전에 올리나니 만세무량(萬歲無量)하옵소서. 이제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을까 하여 손자를 이끌고 왔나이다. 이때 원수며 주부와 황후 태후 태자며 제장이 이 말을 듣고 일심이 비감하여 낙루(落淚)하며 왈,
이는 모두 다 노인의 축수한 공이요, 천자의 은덕이라. 나 같은 사람이야 무슨 공이라 하리요. 돌아가 편히 살라.
노인이 드리는 술을 받아 천자에게 드리고 행군을 재촉하니 천자 노인의 말을 듣고 조정만을 바삐 불러,
그 노인의 아들 이름을 알아 입시하라.
하시니 이때 한 군사 떨어진 전립(戰笠) 쓰고 환도(環刀) 하나 손에 들고 원수 앞에 복지하였거늘 성명을 물은 후에 칭찬하고 천국문 호위장을 삼아 백종록(百鍾祿)을 부쳐 늙은 아비를 섬기라 하고 말을 재촉하여 도성에 들어 궐 내에 들어가니 약간 있는 충신들이 고두백배(叩頭百拜) 치사하고 물러나니 삼군이 원수를 송덕하더라.
이때 천자와 원수며 황후 태후 일석(一席)에 앉아 달야(達夜)토록 전후 고생하던 말을 설화하고, 이튿날 전옥관을 불러 한담을 잡아다가 구정뜰에 엎지르고 유 주부 천자 곁에 앉아 나졸을 호령하여 온갖 형벌 갖추고 수죄(數罪) 왈,
네 이놈 정한담아, 전상(殿上)을 치어다보라. 나를 아느냐 모르느냐. 네 자칭 천자라 하더니 만승천자(萬乘天子)도 두 팔이 없느냐. 조그마한 유심의 아래 복지하기는 무슨 일인고. 네 죄를 아느냐? 한담이 복지 주왈,
소신의 털을 빼어 죄를 논지하여도 털이 모자라오니 죽여 주옵소서.
주부 대로(大怒) 왈,
죄목이 열 가지니 자세히 들으라. 네놈이 천상에 익성으로 명국에 적강(謫降)하여 용맹이 절인(絶人)함에 도사를 데려다가 놓고 항상 천자를 도모코저 하니 만고에 큰 죄 하나이요, 조정에 직신(直臣)을 꺼려 무죄한 신하를 무함하여 나를 연경에 귀양보내니 죄 둘이요, 도사놈의 말을 듣고 신기한 영웅이 황성에 있다 함에 내 자식을 죽이려고 내 집에 불을 놓았다가, 살아 회수에 당함에 군사를 보내어 나의 자식을 결박하여 물 속에 던져 죽이려 한 것이 죄 셋이요, 퇴재상 강희주를 역적으로 몰아 옥문관에 보내었으니 죄 넷이요, 강 승상의 가솔을 잡아다가 중로에 죽인 것이 죄 다섯이요, 황후 태후 태자를 사로잡아 진중에 가두어 주려 죽게 함이 죄 여섯이요, 충신을 다 죽이고 천자를 속여 도적을 막으려 하다가 도적에게 항복함이 죄 일곱이요, 자칭 천자라 하여 생민을 도탄하고 충신을 잡아 항복받고저 함이 죄 여덟이요, 호국에 청병하여 황후 태후 태자를 호왕에게 보내고 장안 미색(美色) 보화를 모두 다 탈취하여 남적에게 보낸 것이 죄 아홉이요, 천자를 번수 가에 죽이려 함이 죄 열 가지라. 세상에 인신(人臣)이 되어 만고에 없는 열 죄목을 가졌으니 이러하고 살기를 바랄쏘냐. 우리 황상께옵서 이렇듯이 상한 일과 대비 대군께옵서 여러 번 죽을 뻔한 일과 만성 인민이며 육국 군사 죽은 일과 강 승상 유 주부 타국에 죽게 된 일과 천하 진동하여 종묘사직이 위태하고 백성들이 황겁하여 산지사방(散之四方)에 도망하니 이게 도시 네 놈의 소위(所爲) 아니냐? 한담이 아무 말도 못하고 묵묵부답(黙黙不答)이라. 나졸을 재촉하여,
한담의 목을 장안시에 베이라!
하니 나졸이 달려들어 한담의 목을 매어 수레 위에 높이 싣고 장안 대도상(大道上)에 재촉하여 나오며 외여 왈,
이봐 백성들아, 만고역적 정한담을 오늘날로 베이려 가니 백성들도 구경하라.
하며 소리하고 나올 적에 성중 성외 백성들이 한담 죽이러 간단 말을 듣고 남녀노소 상하 없이 그놈의 간을 내어 먹고저 하여 동편 사람은 서편을 부르고 남촌 사람은 북촌 사람을 불러 서로 찾아 골목 골목이 빈틈없이 나오며, 이봐 벗님네야, 가세 가세 어서 가세. 만고역적 정한담을 우리 원수 장군님이 사로잡아 두 팔 끊고 전후 죄목 물은 후에 백성들을 뵈이려고 장안시에 베인다니 바삐 바삐 어서 가서 그놈의 살을 베어 부모 잃은 사람은 부모 원수 갚아 주고 자식 잃은 사람은 자식 원수 갚아 주세.
백발노구 손자 업고 홍안소부 자식 품고 전후 좌우 나열하여 어떤 사람은 달려들어 한담을 호령하고 어떠한 여인들은 한담의 상투 잡고 신짝 벗어 양 귀 밑을 찰딱찰딱 치며, 네 이놈 정한담아, 너 아니면 내 가장(家長)이 죽었으며, 내 자식이 죽을쏘냐. 덕택이 하해 같은 우리 원수 네놈 목을 진중에 베었더면 네놈 고기를 맛보지 못할 것을, 백성들을 뵈이려고 산 채로 잡아 내어 오늘 날 베인 고로 네 고기를 나누어다가 우리 가장 혼백이나 여한없이 갚으리라.
수레소를 재촉하여 사지를 나눠 놓으니 장안 만민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점점이 오려 놓고 간도 내어 씹어 보고 살도 베어 먹어 보며 유 원수의 높은 덕을 뉘 아니 칭송하리.
각도 각관에 회시(回示)하고 최일귀 정한담의 삼족(三族)을 다 멸하고, 천자 삼층단에 올라 천제(天祭)하고 주부 유심의 직첩(職牒)을 돋우어 금자광록태부(金紫光祿太夫) 대승상(大丞相) 연국공(燕國公)에 연왕(燕王)을 봉(封)하시고 옥새, 용포(龍袍)에 통천관(通天冠)을 상급하시고 만종록을 주시고, 원수로 대사마(大司馬) 대장군 겸 승상 위국공을 봉하여 만종록을 점지하시고 도원결의하여 충무후를 봉하시고, 그 남은 장수와 군사를 차례로 벼슬을 주어 상사(賞賜)하시니 모두 즐기는 소리 태평천지(太平天地) 요지일월(堯之日月) 순지건곤(舜之乾坤)에 강구동요(康衢童謠) 즐기는 듯, 천자를 축수하며 원수를 송덕하는 소리 천지 진동하더라.
연왕 부자 천자 은덕을 축사(祝謝)하니 천자 위로 왈,
그대의 숙소를 우선 정하여 약간 공(功)을 쓰거니와 그 은혜를 갚을진대 살을 깎아 봉양하고 천만 번이라도 승상의 공은 갚을 길이 없다.
원수 복지 주왈,
천은(天恩)이 망극하와 부자(父子)는 만났거니와 모친은 어디 가고 이런 줄을 모르는가. 옥문관에 적거한 강 승상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련하다. 강 낭자는 청수풍에 죽었으니 어디 가서 만나 볼까. 낭자의 부탁한 대로 옥문관을 찾아가서 강 승상의 뼈나 거둬다가 묻어 주고 회수에 모친을 제사하고 청수에 지내오며 강 낭자의 혼백이나 위로하고 다른 데 취처(娶妻)하여 부인에게 영화를 뵈일까 하나이다. 한대 상(上)이 이 말씀을 들으시고 비감하여 태후 전에 그 말씀을 고하니 태후는 강 승상의 고모라 이 말을 듣고 슬피 낙루하시며 원수를 입시하여 손을 잡고 울며 왈,
강 승상은 나의 조카라 지금까지 살았는지, 그대의 힘을 입어 내 몸은 살았으나 친정 일가는 그 하나뿐이라. 살았거든 데려오고 죽었거든 백골이나 줏어 오소. 원수 주왈,
그 사위 되었나이다.
태후 듣고 대희하여,
이게 웬 말인가. 만고영웅 유충렬이 충신인 줄만 알았더니 나의 손녀서(孫女婿)가 되었구나. 어서 가서 생사를 알고 그대의 모친과 나의 손녀를 위로하여 제사하고 급히 돌아오게 하소.
원수 천자와 부왕께 하직하고 대군을 거느려 바로 서번국을 행하여 양관을 넘어 서평관을 득달하여 격서를 바삐 써서 서번국에 보내고 행군을 재촉하여 들어가니, 서천 삼십육 도 군장들이 충렬의 재주를 알고 황겁하여 금은보화를 많이 싣고 옥새와 지도서(地圖書)를 손에 들고 항서(降書)를 써 원수전에 바치고 인끈을 목에 걸고 낱낱이 항복하거늘, 원수 장대에 높이 앉아 군왕을 잡아내어 일일이 수죄하고 항서 삼십육 장을 연폭(連幅)하여 장계를 급히 써서 남경으로 보낸후에, 번왕을 불러 옥문관 소식을 묻고 즉시 행군하여 옥문관을 찾아갈 제, 슬픈 마음 진정하고 성중에 달려들어 수문장(守門將)을 불러 천자의 공문을 뵈이며,
적거한 강 승상이 어디 있느냐?
수문장이 여쭈오되,
강 승상이 성중에 있삽더니 십여 일 전에 남적이 달려들어 강 승상을 잡아내어 호국으로 갔나이다.
원수 이 말을 듣고 분심이 새로 나서 노기(怒氣) 등등하여 군사를 옥문관에 두고 수문장에게 신칙(申飭)하여,
군사를 착실히 호군(犒軍)하여 나 돌아오기를 기다리라.
하고 필마단검으로 남천을 바라보고 구름을 헤쳐 나는 듯이 달려 들어갈 제, 호국지경(胡國地境)에 다다르니 분기 더욱 탱천(撐天)하여 격서를 보내니라.
이때 가달왕이 남경에서 데려간 일등미색 좌우에 앉히고 갖은 풍악으로 날마다 즐기더니 데려간 도사 마음이 산란하여 천기를 살펴보니 남경 도원수 지경에 들어오거늘 대경하여 왕께 고(告)하대,
남경 도원수 지경에 들면 어찌 하리요.
문무제신(文武諸臣)을 모아 방적(防敵)을 의논할새, 장하에 삼원대장이 백금투구에 흑운포를 입고 삼천 근 철퇴를 들고 구척장검을 좌우에 들고 계하에 복지 주왈,
소장 삼형제는 번약 석장동 사는 마철 등이옵더니 남경 유충렬이 들어온단 말을 듣고 불원천리(不遠千里) 왔사오니 소장을 선봉을 주시면 충렬의 목을 베어 오리이다. 모두 보니 신장이 십 척이요 기골(氣骨)이 엄장한지라. 가달왕이 대희하여 마철로 선봉을 삼고, 마응으로 중군을 삼고 마학으로 후군을 삼아 정병 팔십만을 조발하여 석대산하에 유진(留陣)하고 도사와 문무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 구경하더라.
이때 강 승상이 되놈에게 잡혀 가서 험악이 극심하되 종시 항복지 아니하고 질욕(叱辱)을 무수히 하니 호왕이 대로하여 미구에 죽이려 하더니 뜻밖에 유 원수 들어옴에 죽이지 못하고 전옥(典獄)에 가두고 주려 죽게 하는지라.
호왕이 남경에서 데려간 계집 하나가 되놈에게 종시 훼절(毁節)치 아니하고 일생 강 승상을 붙들고 떠나지 아니하고 불피풍우(不避風雨)하고 밤바다 축원하여 왈,
우리나라 유 원수 어서 와서 남적을 함몰하고 본국 사람을 살려내어 부모 얼굴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이렇듯이 축수하더니 뜻밖에 강 승상을 옥중에 가두니 한가지로 따라가서 주야 한탄하는지라.
이때 원수 필마단창으로 호국에 달려드니 석대산하에 천병만마(千兵萬馬) 유진하였으며 검술을 희롱하고 의기양양하거늘 원수 순식간에 달려들어 적진을 바라보며 벽력같은 소리를 천둥같이 지르며,
네 이놈 가달왕아, 강 승상을 헤치지 말라!
하며 적진 선봉을 헤쳐 가니 대장 마철이 응성출마하여 원수를 맞아 싸워 반 합이 못하여 철퇴 맞어 부서지며 창검 맞아 떨어지는지라. 마응 마학이 제 형이 당치 못할 줄 알고 일시에 달려들어 좌우로 쫓아오며 달려드나 일광주 용인갑은 천신의 수적(手跡)이요, 용궁의 조화라, 살 한 개 범하며 철환(鐵丸) 하나 맞을쏜가. 장성검 번개 되어 동천에 번듯하며 마철의 머리를 베이고 남천에 번듯하며 마응을 베이고 중앙에 번듯 마학의 머리를 베어 들고 적진 백만 대병을 순식간에 함몰하고 천사마를 재촉하여 석대산하에 다다르니 호왕과 도사 대경하여 도망하되, 천사마 닫는 앞에 나는 제비도 가지 못하거든 하물며 사람이야 어찌 가리요. 경각에 달려들어 호왕을 치니 통천관이 깨어지고 상투마저 없는지라. 호왕이 여쭈오대,
이는 내 죄 아니라. 모두 다 옥관도사의 죄로소이다.
원수 분한 중에 옥관도사란 말을 듣고 왈,
도사는 어디에 있느냐?
호왕이 일어 앉아 가르치거늘 도사를 잡아내어 전후 죄목을 물은 후에,
너를 이곳에 죽여 분을 풀 것이로되 남경으로 잡아다가 천자와 우리 부친전에 바쳐 죽이리라.
하며 두 손목을 끊고 두 발을 끊어 수레에 싣고 성중에 들어가 호왕을 수죄하고 강 승상을 물은즉,
옥중에 가두었다.
하거늘 옥문을 깨치고 승상을 부르니 승상과 조 낭자 호왕이 죽이려고 찾는가 대경하여 기절하는지라, 원수 바삐 들어가 승상전에 여쭈오대,
정신을 진정하옵소서, 소자는 회사정에 만나던 유충렬이옵더니 대명국 도원수 되어 남적을 함몰하고 호왕을 잡고 도사를 사로잡아 이곳에 왔나이다.
승상이 혼몽중에 충렬이란 말을 듣고 벌떡 일어 앉아 보니 과연 충렬이 분명하다. 왈칵 달려들어 손을 잡고 통곡하며 하는 말이야 어찌 다 측량할까. 조 낭자 곁에 앉았다가 원수란 말을 듣고 앞에 달려들어 왈,
장군님이 어찌 알고 와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어 고국 산천 다시 보고 부모 동생 다시 보게 하니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천자님도 살아 계십니까?
원수 대답하고 승상전에 여쭈오대, 집을 떠나 백룡사 부처를 만나 전장 기계 얻은 후에 남적을 함몰하고 오는 말씀을 낱낱이 고하니 승상이 대희하여 칭찬불이(稱讚不已)하더라.
원수 조 낭자 전후수말을 물은 후에 치사하고 함께 궐문에 들어가 격서를 써서 토번국에 보내니 번왕이 원수 온단 말을 듣고 황겁하여 항서 쓰고 채단을 갖추어 사신을 부려 가달로 보내거늘 사신을 수죄하고 달왕의 항서와 번왕의 항서와 도사를 사로잡아 보내는 연유를 천자께 장계하고 전일 가달왕이 남경에서 데려간 미색들을 낱낱이 찾아, 본국으로 가자.
하니 이때 미색들이 고국을 생각하고 부모를 생각하여 주야 한탄하더니 원수를 만남에 전지도지(顚之倒之)하여 나오며 전후 좌우 나열하여 원수전에 백배치사하고 승상을 모시고 원수를 따라올 제, 준마 삼백 필에 낱낱이 다 태우고 조 낭자는 옥교를 타고 강 승상 곁에 앉아 행군을 재촉하여 돌아올 제, 여러 날 만에 회수에 다다르니 소연한심(蕭然寒心) 절로 난다. 전(前) 듣던 풍랑 소리 사람의 간장 다 녹이고 전에 보던 좌우 청산 장부 한심 돋우운다.
원수 모친을 생각하여 백사장에 내려앉아 가슴을 두드리며 세세원정(細細原情) 기록하여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하려 하고 번양 회수 들어갈 제, 남만 오국에서 받은 금은 채단이며, 옥문관에 두고 갔던 군사며, 데려오는 미색들이며, 강 승상은 멀리 모셔 조 낭자는 옥교타고 오마대로 행군하여 번양성중 들어오니 그 영화 그 거동은 옛날 소진(蘇秦)이 육국 정승인을 차고 거기치중(車騎輜重) 나열하여 낙양성중 들어가는 듯, 당나라 곽분양(郭分陽)이 양경을 회복하고 분양 땅에 왕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듯, 각 도에 백성들은 전후에 옹위하고 열읍(列邑) 수령(守令)들은 좌우에 나열하여 권마성(勸馬聲)하는 소리 반공에 높이 뜨고, 좌기초(坐起哨)하는 소리 원근에 진동한다.
객사에 좌기(坐起)하고 번양 태수 바삐 불러 천금을 내어 주며 제물을 장만할 제, 온갖 어육(魚肉) 갖추고 온갖 채소 등대(等待)하여 각 읍 관장 시위하고 갖은 제물 봉진(封進)할 제, 백사장(白沙場) 십리 뜰에 백포청장(白布靑帳) 둘러치고 원수는 백의(白衣)입고 백건(白巾) 백대(白帶)에 흰갓 쓰고 축문 일장 슬피 지어 회수 가에 나오니, 이때 조 낭자는 목욕재계 정히 하고 소복(素服)으로 단장하여 향로(香爐) 들고 원수를 배행(陪行)하여 물가에 나올 제, 고금이 다를쏘냐. 남경 도원수 회수에 빠져 죽은 모친을 위하여 제사한단 말을 듣고 남녀노소 없이 원수 공덕을 치사하며 그 얼굴을 보려 하고 쌍쌍작반(雙雙作伴)하여 회수 가 십 리 들에 빈틈없이 둘러서서 구경할 제, 원수 제소(祭所)에 들어와 삼층단 높이 무어 단상에 제물을 진설(陳設)하고 조 낭자는 향로 들어 단상에 올려놓고 낭자가 집사(執事)되어 분향(焚香)하고 나오니 원수 통곡하고 궤좌하여 독축(讀祝)하니, 그 축문에 하였으되, 유세차(維歲次) 부경 십칠 년 갑자 이 월 갑인삭(甲寅朔) 이십팔 일 신사(辛巳)에 남경 동성문 내서 사는 불효자 충렬은 모친 장씨전에 예를 갖추어 지전(紙錢)으로 해상고혼(海上孤魂)을 위로하오니 혼백이나 받으소서. 오호(嗚呼)라! 우리 부모 연광(年光)이 반이 넘어 일점혈육(一點血肉)이 없었기로 복중에 설운 마음 남악산에 정성드려 천행으로 충렬을 낳아 놓고 애지중지(愛之重之) 키워 내여 영화를 보렸더니 간신의 해를 보아 부친이 만리 연경에 간후에 모친만 모시고 있다가 피화(避禍)하여 달아날 제 이 물가에 다다르니 난데없는 해상수적(海上水賊) 사면으로 달려들어 우리 모친 결박하여 풍랑중에 내쳐 놓으니, 모친님은 간데없고 천행으로 모진 목숨 충렬이만 살아나서 모친 주시던 옥함을 얻어 전장 기계 갖추어서 도적을 함몰하고 정한담과 최일귀를 베인 후에 천자를 구완하고 만리 연경에 적거하신 부친님을 모셔다가 천은을 입어 연왕이 되어 만종록을 받게 하고 남적을 소멸한 후에 강 승상을 살려내어 이 길로 오옵더니 모친을 생각하여 이곳에 왔사오나 모친은 어디가고 충렬을 모르는가, 호국에 갔던 부친은 살아왔네. 옥문관 갔던 강 승상도 살아오고 호국에 잡혀 갔던 고국 사람들도 살아오고 황후 태후 중한 옥체 번국에 잡혀 갔다 충렬이가 살려 왔네. 모친은 어디 가고 살아올 줄 모르는가. 이번에 부친님이 소자를 보내실 제 부탁하기를 번양 땅에 가 네 어머님을 찾아오라 하시더니 만경창파 깊은 물에 백골인들 찾으리까. 모친님이 옥함을 주실 제 수건에 쓴 글씨를 가져왔으니 혼백이나 와서 충렬을 만져 보시오. 충렬은 명나라 대사마 도원수 겸 승상 위국공이 되고 부친님은 금자광록대부 겸 대승상 연국공의 연왕이 되었으니 이 같은 영화를 어디 가고 모르는가. 우리 집에 불을 놓은 정한담을 사로잡아 전옥에 가두었다가 부친을 모신 후에 부친 앞에 엎지르고 전후 죄목을 물은 후에 그놈의 간을 내어 모친님전에 제사하였더니 그런 줄을 알았는가. 충렬이 귀히 된 줄 혼령은 알련마는 언제 다시 만나 볼까. 세상에 귀한 영화나 같은 이 없건마는 피 같은 이내 눈물 어찌하여 솟아난가. 모친님을 편히 모셔 연만하여 돌아가면 이다지 통박할까. 만리 연경에 가장(家長) 잃고 무변대해(無邊大海)에 자식 잃고 도적에게 결박하여 수중고혼(水中孤魂) 되었으니 천만 세를 지나간들 모친같이 통박(痛迫)할까. 혼령이 나오셨거든 이렇듯이 만반진수(滿盤珍羞)를 흠향하고 돌아와서 후생에 다시 만나 세세상봉(世世相逢) 모자 되어 다하지 못한 자모지정(子母之情)을 다시 풀까 바라나이다. 하올 말씀 무궁하오나 눈물이 흘러 옷이 젖고 흉중이 답답하여 그만 그치나이다. 상향(尙饗).
하며 우는 소리 용궁(龍宮)에 사모치고 산천이 함루(含淚)하니, 용신(龍神)도 낙루(落淚)하고 산신령도 비감(悲感)한다. 이때 백포장 내외간(內外間)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원수의 축문 외우며 우는 소리를 들으니 철석간장(鐵石肝腸) 아니거든 누가 아니 낙루하며 초목금수(草木禽獸) 아니어든 어느 누가 아니 울리요. 좌우 방백(方伯) 수령(守令)들은 뿌리느니 눈물이요, 각 읍 군수 현령들은 서로 보고 슬피우니 그 중에 환과고독(鰥寡孤獨) 설운 사람은 방성통곡하는 소리 강천이 창망하여 일월이 무광하고 운무(雲霧) 자욱하여 천지 나직하다.
제(祭)를 파한 후에 온갖 음식을 많이 싸서 해상에 드리치고 성중에 들어와 군사를 호군하고 길을 떠나갈새 각 읍에 선문(先文) 놓고 금릉성중에 득달하여 숙소하고 군사를 쉬는지라.
각설, 이때 장 부인이 활인동 이 처사 집에 있어 세월을 보내더니 일일은 남경에 난리났단 말을 듣고 탄식 왈,
하릴없다. 이제는 주부 속절없이 죽겠다. 우리 충렬이 살았으면 평난(平亂)하고 부모를 찾으련만 죽기가 적실하다.
방성통곡하더니, 마침 이 처사 번양에 갔다가 대명국 도원수 유충렬이 회수에서 제사하는 말을 듣고 백성 총중(叢中)에 함께 구경하다가 원수 축문 외는 소리를 듣고 대경대희하여 급히 집에 돌아와 장 부인더러 왈,
세상에 기이하고 의심난 일이 있는다. 마침 오늘날 번양에 갔삽다가 오압더니 남대로(南大路)서 천병만마 들어오며 회수 가에 둔취(屯聚)하였거늘 물은즉 남경 도원수 유충렬이 모친을 위하여 회수에 제사한다 하기로 백성과 함께 구경하더니 원수 소의(素衣) 소관(素冠)으로 제물을 진설하고 독촉하며 통곡하는 소리를 들은즉 적실히 부인의 아들이라 부인이 항상 하시던 말씀을 낱낱이 하더이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머리를 허부며 땅을 두드리며 왈,
이게 웬 말이냐. 원수의 하던 말을 다시 하라.
이 처사 대왈,
전후수말이 약차약차(若此若此)하더이다.
부인이 이 말을 듣고 왈칵 냅다 서며 왈,
어서 가세, 내 아들 충렬이 살아왔네. 옥함을 받았단 말이 웬 말인가.
통곡하며 가고자 하거늘 처사 만류 왈,
적실히 그러할진대 내가 먼저 그 진위(眞僞)를 알고 오리이다. 하고 나서거늘,
원수 나이는 얼마나 하며 저의 외가는 뉘집이라 하던가?
대왈,
나이는 이십이요, 외가는 이부상서 장윤이라 하더이다.
부인 왈,
적실히 그러하구나, 내 아들 아니면 어찌 나의 부친 존휘를 알랴. 바삐 가서 알아 오소.
이 처사 전지도지 바삐 가서 금릉성중 달려들어 군사를 불러 통자(通字)하되,
만수산 활인동 사는 이 처사 원수전에 뵈와지라 하나이다.
원수, 들라. 하니 이 처사 들어가 배사하고 앉은 후에 공덕을 칭송하니 원수 사양하되,
막비(莫非) 천자의 덕이라 무슨 공이 있사오며, 무슨 허물이 있어 누지(陋地)에 욕임(欲臨)하시나이까?
처사 왈
적실히 알고저 하는 일이 있어 왔사오니, 어제날 회수 가에 상공 독축하는 말씀이 정녕 그러하오니까?
원수 이 말을 들음에 마음이 자연 비감하여 슬피 낙루(落淚) 왈,
귀인은 어찌 묻나이까. 적실히 그러하오이다.
적실히 그러할진대 만고의 드문 일이라. 유 주부를 모셔왔다 하니 유 주부는 나의 처숙(妻叔)이라. 전일에 그런 말씀 하더니까.
원수 대경 왈,
선인(先人)의 존호를 부르기 미안하나 전일 한림학사 이인학과 어찌되나이까?
처사 왈,
나의 부친이로소이다. 원수 이 말을 듣고 처사의 손을 잡고 왈,
존형을 이곳에 와서 만나 볼 줄 몽중이나 생각하오리까?
처사도 그제야 단무타의(但無他意)라 원수를 붙들고 비감하여 왈,
모친을 지척에 두고 어찌 찾을 줄을 모르는가?
원수 이 말을 듣고 정신이 아득하여 겨우 진정하며 처사를 붙들고 왈,
이게 웬 말인가, 나의 모친 장 부인이 이 근처에 있단 말이 어인 말인가.
처사 원수를 위로하여 정신을 차린 후에 왈,
이런 일이 천만고에 또 있을까. 나를 따라 가면 모친을 만나리라.
원수 마음이 건공(乾空)에 떠서 처사를 따라갈 제 전지도지 하여 순식간에 처사 집을 당도하니, 처사 급히 들어가며 장 부인을 불러 왈,
처숙모 어디 가 계신가. 충렬이 데려왔나이다.
이때 부인이 처사를 보내고 소식을 알아 올까 만심 고대하던 차에 뜻밖에 충렬이 데려왔단 말을 듣고 대경실색하여 기절한지라. 충렬이 달려들어 문 앞에 복지하니 처사 구완하여 정신을 차린 후에 부인이 여광여취(如狂如醉)하여 하는 말이,
네가 귀신이냐 내 아들 충렬이냐. 내 아들 충렬은 회수에 일정 죽었거든 어찌 살아 육신이 온가. 내 아들 충렬은 등에 삼태성이 표적으로 박혔느니라.
원수 급히 옷을 벗고 곁에 앉으니 과연 삼태성이 뚜렷이 박혀 있고 금자로 새긴 것이 어제 본 듯 완연하니 서로 붙들고 방성통곡하는 정이 만리 호국에 부친 만날 때와 배나 더한지라. 뜻밖에 모자상봉(母子相逢)하였으니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 고금(古今)이 다를쏘냐. 죽은 부모 다시 만나 영화 보게 되었으니 반갑고 슬픈 정은 일구난설(一口難說)이라. 부인이 말하면 충렬이 울고 충렬이 말하면 부인이 우니 청천일월이 무광하고 산천초목도 슬퍼하는 듯하다.
이때 강 승상이며 조 낭자 이 말을 듣고 옥교를 갖추어 활인동에 들어올 제, 언비천리(言飛千里)라 회수에 제사하던 유충렬이 활인동 이 처사 집에서 모친을 만났다 하니 각 읍 관장과 구경하는 사람 금릉성중에 들어 서로 보고 칭찬하는 말이,
이런 말은 만고에 처음이라. 어떤 부인은 팔자가 좋아 저런 아들 두었는고.
하며 구경하더라.
이때 강 승상이 옥교를 가지고 활인동에 들어가 부인전에 예하고 부인을 모셔 성중에 들어올 제 구경하는 여인들이 옥교를 잡고 부인전에 백배 치하하고 송덕하는 소리 산신령도 춤을 추고 강산도 우즐기니 하물며 사람이야 무언할까. 부인이 낱낱이 위로하고 성중에 들어와 수일 즐기더니 길을 떠남에 이 처사 가권을 모두 다 거느리고 황성에 올라갈 제, 활인동 어구에 삼장 석비(石碑)를 세워 전후수말을 기록하고 서천 삼십육 도 사신이며 남만 오국 금은 채단 만여 필을 앞세우고 남경 인물이며 군사 좌우에 나열하고 각도 각과 방백 수령 전후에 옹위한데 구경하는 사람조차 백 리에 연속하니 낭자한 거동은 천고에 처음이라.
원수 모친과 승상을 모시고 길을 떠나 영릉을 바라보고 행군하여 올라갈 제 일희일비(一喜一悲) 슬픈 마음 소연한심 절로 난다. 수중에 죽은 부모 다시 만나 보나, 강 낭자는 어디 가서 만나 볼까. 모친 보고 승상 보니 남궁가북궁수(南宮歌北宮愁)라. 모친은 옥교중에 희색이 만면하여 천근 근심 때를 벗어 있고, 승상은 수레 위에 일희일비 슬픈 마음 처자를 생각하여 수심이 만면하더라.
영릉으로 들어올 제 이때는 춘삼월이라 천지기운이 배합(配合)하여 만산(滿山)의 홍록(紅綠)들은 일년일도(一年一度) 다시 만나 백초춘경(百草春景) 다툴 제, 연자(燕子)는 남남(喃喃) 인가(人家)를 찾아 들고 호접(蝴蝶)은 편편(片片) 화간(花間)에 날아들제 나무 나무 성림(成林)하고 가지가지 봄빛이라. 태평성대 만난 백성 청춘소년 홍안미색(紅顔美色) 쌍쌍이 작반하고 삼삼오오(三三五五) 답청(踏靑)네는 이화(李花) 도화(桃花) 꺾어 들고 행산곡 돌아들어 화전(花煎)하며 즐겨할 제 춘심(春心)을 못 이기어 쌍쌍 대무(對舞)하며 노래하며 유 원수를 송덕하니 그 노래 즐겁도다.
천운(天運)이 순환(循環)하여 대명(大明)이 밝았으니 만고에 어진 영웅 뉘 집에 났단 말가. 동성문 다리 안에 유 상공의 집이로다. 역적이 때 모르고 뽕나무 활을 매니 원수의 가진 칼이 사해에 밝았도다. 승전곡(勝戰曲) 한 소리에 함몰도적하여 천하가 태평하니 호국에 죽은 군친(君親) 고향에 살아오고 여염(閭閻)에 있는 처자 부모 함께 동락(同樂)하니, 우리 인군 덕이 높아 일도춘광호시절(一到春光好時節)에 백화(白花) 만발 피었으니 화전하는 백성들이 뉘 아니 송덕하리. 우리 유 원수 부모 만나 다남다녀(多男多女)하옵소서.
이렇듯이 즐겨 하니 원수는 강 낭자를 생각하여 영릉성중에 들어오니 이 땅은 승상의 고토(故土)라. 슬픈 마음을 어찌 다 측량하리요. 객사에 숙소하고 월계촌 소식을 알고자 하여 사오 일을 유련(留連)하는지라.
각설, 이때 강 낭자 목숨을 도망하여 청수 가에 오다가 모친은 청수에 빠져 죽고 영릉고을 관비에게 잡혀와 머무나 천비(賤婢)하는 행사가 고금에 다를쏘냐. 낭자를 만단 개유(開諭)하여 태수의 수청을 드리고저 하여 수양딸을 삼은 후에 무수히 훼절코자 한들 빙설 같은 맑은 절개 일시를 변하며 일월같이 밝은 마음 궁곤(窮困)타고 변할쏘냐. 이 꾀로 모피(謀避)하고 저 꾀로 모피하니 관장(官長)에게 욕도 보고 관비에게 매도 많이 맞으니 가련한 그 정상은 차마 보지 못할네라.
이때에 관비 딸 하나가 있으되 제 몸은 미천하나 마음은 어질어 매일 강 낭자를 불쌍히 여겨 그 절개를 칭찬하여 제 모(母)를 만류하고 낭자를 구완하며 매양 몸을 바꾸어 제가 수청하고 낭자는 구완하여 살리는지라.
이때, 유 원수 동헌(東軒)에 좌기하고 사오 일 유련할 제 관비 생각하되,
원수는 호걸이요 낭자는 미색이라. 이런 때를 당하여 수청을 드렸으면 원수의 혹(惑)한 마음 천만 냥(千萬兩)을 아낄쏘냐.
급히 들어가 행수(行首) 현신(現身)하고 이날 밤에 낭자를 보내고저 하더니 제의 딸 연심이 또 이 기미를 알고 낭자더러 왈,
금야에 변을 당할 것이니 그대 생각하여 사양치 말고 들어가면 내가 중로에 있다가 대(代)로 들어갈 것이니 그리 알고 있으라.
과연 그날 밤에 관비 낭자를 데리고,
구경가자. 하며 동헌으로 가거늘 낭자 웃으며 왈,
이제는 염려 말고 나가라. 원수의 수청이야 사양을 어찌하리요.
관비 대희하여 왈,
네 몸이 과히 높으다. 이 고을 관장은 무수히 지나되 종시 허락지 아니하더니 남경 대사마 도원수 겸 위국공의 수청은 사양치 아니하니 인물이 잘나고도 볼 것이다. 마음도 높으고 소원도 높도다. 우리도 소년시절에 월계촌 강 승상이 하남 절도사로 와 계실 제 일등미색 삼백여 명 중에 나 혼자 수청들어 금은보화를 많이 받았더니 세월이 원수로다. 하며 이렇듯이 비양하고 나가는지라.
이때 연심이 제 어미 나감을 보고 낭자를 내보내고 제가 들어가니 원수 등촉을 밝히고 낭자를 생각하여 금낭을 끌러 낭자의 글을 볼 제 일자일체(一字一涕)하니 슬픈 한심 절로 난다.
삼경야월(三更夜月)은 꽃가지에 비추는 듯, 공산(空山) 두견 울지말라. 너는 뉘를 생각하여 장부 간장 다 녹이냐, 낭자는 어디 가고 속절없는 글 두 귀만 금낭 속에 들었느냐. 여관한등독불면(旅館寒燈獨不眠)하니 객심하사(客心何事)로 전처연(轉凄然)은 날로 두고 이름이라. 일락장사추색원(日落長沙秋色遠)하니 부지하처조상군(不知何處弔湘君)은 낭자 볼 길 없음이라. 옛날 사마장경(司馬長卿)은 초년(初年)에 곤궁타가 문장(文章) 부귀(富貴) 겸전(兼全)하여 고향에 돌아오니 그 아내 탁문군(卓文君)이 문 밖에 바삐 나와 손을 잡고 들어가고 낙양 땅에 소진(蘇秦)이는 현순백결(懸鶉百結) 몸이 되어 곤곤(困困)히 지내더니 육국정승인(六國政丞印)을 차고 고향에 돌아오니 그 아내 전지도지 나와 인도하여 들어가되, 대명국 유충렬은 초년에 부모 잃고 십생구사(十生九死) 살아나서 도원수(都元帥) 대승상(大丞相)에 만리타국에 승전하고 죽은 부모 살려내어 고향에 돌아온들 청수에 죽은 낭자 어찌 와서 맞아가며 소소백발 강 승상을 무엇이라 위로할까. 이렇듯이 한탄하고 그 밤을 지내는지라.
이때 낭자 연심을 대로 보내고 침실에 돌아와 원수를 생각하야 자탄(自歎)하고 잠 못 들어 생각하되,
원수의 성명을 들으니 나의 낭군과 동성동명(同姓同名)이라, 낭군이 적실하게 되면 응당 월계촌에 들어가 우리 집 소식을 물으련만 월계촌을 아니 가니 답답하고 원통하다. 연심이 어서 나오면 진위를 알아보리라. 하고 낭군이 주던 글을 보며 자자(字字)이 낙루하며,
구천에 만나자고 말씀이 있었더니 모진 목숨 살아나고 낭군은 죽었도다. 살기 곧 살았으면 대명국 도원수를 나의 낭군밖에 할 이 없건마는 몰라 보니 답답하다. 이튿날 연심이 나오다가 제 어미를 만나니 관비 그 기미를 알고 대로하여 원수전에 아뢰고 낭자와 연심을 죽이고자 하여 급히 들어가 문안(問安)하고 여쭈오되, 소인의 딸이 얼굴이 절색이요 태도 있는 고로 상공전에 수청을 보냈더니 제 몸은 피하고 다른 년이 대로 들어 갔사오니 두 년을 치죄(治罪) 하옵소서. 원수 대로하여,
대로 온 년을 나입(拿入)하라!
연심이 잡혀 들어 계하에 복지하니 원수 문왈,
너는 무슨 욕심으로 대신을 잘 다니느냐, 죽을 데도 대로 갈까?
연심이 여쭈오되,
소녀 비록 천비오나 일생에 수절(守節)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옵더니 수년 전에 어미 외촌(外村)에 갔다가 어떠한 여자를 데려다가 수양딸을 삼아 동네마다 수청을 드리고자 하되, 그 여자 굳은 절개 청천에 일월 같고 삼동(三冬)에 촛불같이 변할 길이 없는 고로 소녀 매양 구제하옵더니 마침내 상공이 행차하옵심에 그 여자를 구완하여 대로 왔사오니 죄를 주옵소서. 원수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절로 비감하여 의심이 나는지라, 다시 왈,
그 여자의 성명이 무엇이며 절개 있다 하니 뉘 집 여자냐?
연심이 대왈,
그 여자 소녀와 사오 년을 동거하되 종시 성명을 모른다 하고 뉘 집이란 말을 아니 하더이다.
원수 고이 여겨 왈,
적실히 그러할진대 바삐 입시하라.
이때 낭자 연심이 잡혀 갔단 말을 듣고 신세를 자탄하더니 뜻밖에 관비 십여 명이 나와 잡아다가 계하에 복지하니 원수 창문을 열고 낭자의 상을 보니 숙면(熟面)인 듯하고 심신이 비감하여 자세히 보니 의상은 남루(襤褸)하나 기생(妓生)되기 생심 밖이요 천인 자식 아깝도다. 원수 소리를 나직이 하여 낭자더러 왈, 거동을 보니 천인 자식이 아니요. 여자의 말을 들었거니와 수절을 한다 하니 뉘 집 자손이며 낭자는 누구건대 청춘 소년의 수절을 하며 무슨 일로 저리 되어 관비 양여자가 되었는지 진정을 은휘(隱諱)치 말고 날더러 이르면 알 일이 있으리라. 말을 자상히 하라. 하니 이때 낭자 계하에 복지하여 원수의 말을 들음에 낭군과 이별할 때 하직하고 가던 말이 두 귀에 쟁쟁하여 일분도 다름이 없는지라. 낭자 전일은 도망하여 왔기로 성명 거주를 속였더니 마음이 자연 비감하여 진정으로 여쭈오되,
소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골 월계촌 사는 강 승상의 무남독녀(無男獨女)옵더니 부친이 만리 연경에 귀양간 유 주부를 위하여 상소하였더니 만고역적 정한담이 충신을 모함하여 승상을 옥문관에 귀양하고 소녀의 모녀를 잡아 궁비 속공하려 하고 금부도사 와 잡아갈 제, 청수에 야간도주하여 모친은 물에 빠져 죽고 소녀도 죽으려 하더니 영릉관비 외촌에 갔다 오는 길에 데리고 제 집에 와 험악이 무수하되 연심의 힘을 입어 이때까지 살았으나 오늘은 이 말을 원수전에 고하고 하릴없이 자결코저 하나이다.
원수 이 말을 듣고 당에 뛰어 내려서며,
이게 웬 말인가.
영릉 태수 바삐 불러 강 승상을 오시라 하니라.
이때 강 승상이 처자를 생각하여 잠을 못 자니, 몸이 곤하여 졸더니 뜻밖에 원수 오시란 말에 놀래어 들어오니 원수 왈,
이게 강 낭자 아니오니까. 강 낭자 살아왔나이다.
승상이 이 말을 듣더니 정신이 아득하여 천지가 캄캄한지라. 원수 이별할 때 내어 주던 표를 내어 놓고 상고(相考)하니 일호(一毫)도 의심이 없는지라. 승상이 낭자의 목을 안고 궁글며 왈,
내 딸 경화야, 청수에 죽었다더니 혼백이 살아왔냐. 꿈이냐 생시냐. 너의 낭군 유충렬이 왔으니 소식 듣고 찾아왔냐. 우리 집이 소(沼)가 되어 양류청청(楊柳靑靑) 푸른 가지 빈 터만 남았으니 슬픈 마음 어찌 다 진정하리.
원수 낭자를 보고 하는 말이며 세세정담(細細情談)을 어찌 다 기록할까.
이때 장 부인이 내동헌(內東軒)에 있다가 이 기별을 듣고 급히 나와 보니 낭자 고부지례(姑婦之禮)로 문안하고 살아난 말씀을 자상(仔詳)히 하니 장 부인이 손을 잡고 왈,
세상 사람이 고생이 많다 하나 우리 고부 같을쏘냐.
이때 낭자 데려간 관비 혼백이 상천(上天)하고 간장이 녹는 듯, 원수 동헌에 높이 앉아 관비를 잡아들여 수죄 왈,
너를 죽일 것이로되, 너 같은 천기(賤妓)년이 사람을 알아볼쏘냐. 청수에 가 낭자 구한 일로 방송하나니 덕인 줄 알라.
연심을 불러 무수히 치사하고 보내려 하니 낭자 곁에 앉았다가 왈,
연심은 날과 백년은인이니 일시 치사뿐 아니라 평생을 한가지 지내고저 하니 황성으로 데려가사이다.
원수 그 말을 옳이 여겨 연심을 불러,
부인을 착실히 모시라.
연심이 황공하여 하더라.
원수 전후 사연을 낱낱이 기록하여 나라에 장계하고 길을 떠나올새 장 부인이 금덩을 타고 강 낭자와 조 낭자는 옥교를 타고 좌우로 모시고 강 승상은 수레 타고 오국 사신이 모셨는데, 원수는 일광주 용인갑에 장성검을 높이 들고 대완마상 높이 앉아 오마대로 행군하여 완완히 나오니 그 거동과 그 영화는 천고에 처음이라.
게양역을 지내어 청수 가에 다다르니 소 부인 죽던 곳이라. 원수 승상을 위하여 영릉 태수 바삐 불러 제물을 장만하여 승상을 주인 삼고 조 낭자는 집사 되어 원수는 축관(祝官)되고 독축하며 통곡하는 말이 회수에 모친 제사할 때와 다름이 없더라.
제를 파한 후에 행군하여 나올 제 이때 천자와 황태후며 연왕과 조정에서 충렬을 가달국에 보내고 주야 생각하며 장 부인을 찾아오는가 하여 일야(日夜) 한탄하더니 뜻밖에 원수의 장계를 보고 즐거운 마음 측량 없으며 장안 백성들이 이 말을 듣고 각각 자식을 보려 하고 다투어 나오더라.
천자와 태후와 연왕이 백 리 밖에 나와 맞을 새 원수의 위엄을 보니 서천 삼십육 도며 남만 오국이며 금은 예단과 일등미색들이 차례로 말을 타고 오국 사신이 선봉되어 낭자하게 들어오고 그 가운데 금덩 옥교 떠오는데 강 낭자는 좌편이요 조 낭자는 우편이라. 좌우 청정(靑旌) 고였는데 금수단(錦繡緞) 양산(陽傘) 대는 반공에 솟았도다.
강 승상이 수레 위에 높이 앉아 오며 군사 전후에 나열하고 그 뒤에 따르는 이 십장홍모(十杖紅氈) 사명기(司命旗)는 한가운데 세워 오고 용전(龍旜) 봉기(鳳旗) 대장기(大將旗)며 기치창검(旗幟槍劍) 삼천 병마 전후에 작대(作隊)하고 승전고(勝戰鼓)와 행군고(行軍鼓)는 원근산천에 진동하며, 도원수는 일광주 용인갑에 장성검 높이 들고 천사마 비껴 타고 황룡수(黃龍鬚)를 거스리고 봉의 눈을 반만 떠서 군사를 재촉하니 웅장한 거동은 일대 장관(壯觀)이요 천추에 표문(表聞)이라.
이때 장안 만민이 남적에게 잡혀 갔던 며느리며 딸이며 동생들이 본국에 돌아온단 말을 듣고 호산대 십 리 뜰에 빈틈없이 마주 나와 각각 만나 옥수(玉手) 나삼(羅衫) 부여잡고 그리던 그 정곡(情曲) 못내 즐겨 하여 울음소리 웃음소리 반공에 뒤섞이어 호산대가 떠나갈 듯 원수를 치사하고 장 부인을 치사하는 소리 낭자하여 요란하고, 금산성하 다다르니 천자와 황태후 옥연(玉輦)에 바삐 내려 장막 밖에 나서니 원수 갑주를 갖추고 군례(軍禮)로 현신하니 천자와 태후 원수의 손을 잡고 못내 치사 왈,
과인의 수족을 만리타국에 보내고 주야 염려하더니 이렇듯이 무사히 돌아오니 즐거운 마음 어찌 다 칭찬하며 회수에 죽은 모친 데려온다 하니 만고에 없는 일이며 옥문관에 강 승상과 청수에 죽은 강 낭자를 살려오니 천추에 드문 일이라. 그대의 은혜는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 그 말이야 어찌 다 하리오.
황태후 원수를 치사한 후에 강 승상을 부르시니 승상이 바삐 들어와 복지하니, 천자 내려와 승상의 손을 잡고 위로 왈,
과인이 불명하여 역적의 말을 듣고 충신을 원방에 보냈으니 무슨 면목으로 경을 대면하리오. 그러하나 왕사(往事)는 물론(勿論)하오.
이때 황태후 승상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야 어찌 다 성언(成言)하리.
이때 연왕이 다른 사처(私處)에 있다가 장 부인이 금덩을 타고 옴을 보고 마음이 건공에 떠서 충렬이 나오기를 고대하더니 원수 천자께 물러나와 부왕전에 복지 주왈,
불효자 충렬이 남적을 소멸하고 오는 길에 회수에 와 제사하옵다가 천행으로 모친 만나 왔나이다.
연왕이 반가움을 측량치 못하여 왈,
너의 모친이 어디 오느냐?
이때 장 부인이 모장(毛帳) 밖에 있다가 주부의 말소리를 듣고 반가운 마음 어떻다 할 수 없어 여광여취(如狂如醉) 들어가니 연왕이 부인을 붙들고 왈, 그대 일정 장 상서의 따님인가. 멀고 먼 황천길에 죽은 사람도 살아오는 법이 있는가. 회수 창파 만경중에 백골이 되었을 제 어떤 사람이 살려 왔나. 뉘 집 자손이 모셔왔나. 충렬아 네가 일정 살려 왔나. 북방 천리 만리 호국에 잡혀 죽게 된 유 주부와 만경창파 회수중에 십 년 전에 잃은 장씨 다시 만다 즐길 줄과 칠 세 자식 환란중에 잃었더니 다시 만나 영화 볼 줄 몽중이나 생각할까.
장 부인이 석장동 마철의 집에 잡혀갔던 말이며, 옥함을 가지고 야간 도망하여 노구 집에서 환(患) 만나던 말이며, 옥함을 물에 놓고 죽으려 하다가 활인동 이 처사의 집에 살아난 말을 낱낱이 설화하며 즐기니 그 정곡은 측량치 못할네라.
원수 곁에 앉았다가 왈,
소자 가달국에 갔을 제 적진 선봉이 마철의 삼형제라 한칼에 베어 원수를 갚았나이다.
연왕과 부인이 못내 즐기더라.
천자를 모시고 성중에 들어올 새 자식 만나 치하하는 소리며, 만조제신(滿朝諸臣) 하례(賀禮)하는 말을 어찌 다 기록하리.
이때 황후 태후 강 낭자를 입시하여 전후 왕사를 낱낱이 물을 제 부인이 고생한 말을 낱낱이 하고 서로 울며 장 부인이 치사하기를 마지 아니하더라.
이때 원수가 천자와 부왕을 모셔 황극전에 전좌하시고 오국사신 예를 받아 문목수죄(問目數罪)한 연후에 옥관도사를 잡아들여 계하에 엎지르고 수죄 왈,
간사한 도사놈아, 네 천지조화지술(天地造化之術)을 배워 정한담을 가르쳐 신기한 영웅이 황성 내에 있는 줄은 알고 광덕산에 살아 나서 너 죽일 줄을 모르느냐. 네 전일 정한담더라 하기를 천재일시(千載一時)라 급격물실(急擊勿失)하라더니 어찌 조그마한 유충렬을 못 잡아서 너희 놈들이 먼저 다 죽느냐? 도사 여쭈오되,
패군지장(敗軍之將)은 불가이어용(不可而語勇)이라 하니, 차막비천명(此莫非天命)이라 무슨 말씀 하오리까마는 소인이 신기한 술법을 배워 전장에 나올 제 사해신장(四海神將)이며, 대명국(大明國) 강산신령(江山神靈)과 천귀만신(千鬼萬神)과 이매망량 어두귀면지졸(魚頭鬼面之卒)과 천지개벽(天地開闢) 후에 신장 귀졸을 모두 다 불러내어 지위간에 넣어 두고 승천입지(昇天入地)하며 성산성해(成山成海)하며 변화무궁터니 그 중에 유독 서해 광덕산 백룡사에 있는 노승과 남해 형산 화선관이 소인 영(令)을 쫓지 아니하기로 고이 알었삽더니 전일 원수 접전하시는 법을 보오니 갑주 창검도 천신의 조화거니와 백룡사 노승은 원수 우편에 옹위하고 남악 형산 화선관은 좌편에 시위하였으니 소인인들 어찌하오리까. 주판지세(走坂之勢)로 이리될 줄을 알았으나 죽사온들 무슨 한이 있사오리까. 원수 마음에 그놈의 재주를 탄복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장안시에 처참한 후에 오국사신을 각각 돌아 보내고 황성 동문 밖 인가(人家)를 다 헐어 별궁을 지은 후에 직첩을 돋울새, 산동 육국에서 들어오는 결총(結總)은 모두 다 연왕에게 부치고 원수로 남평 여원 양국 옥새를 주어 남만 오국을 차지하여 녹을 부쳤으되 대사마 대장군 겸 승상 인수(印綬)를 주어 국중만사(國中萬事)를 모두 다 맡겨 슬하에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장 부인으로 정열부인(貞烈夫人) 겸 동궁야후(東宮耶后) 연국왕후를 봉하여 경양궁에 거처하게 하고 강 승상으로 달왕 직첩을 주어 빈시자위(賓師之位)에 있게 하고 강 부인으로 하여금 정숙부인 겸 동궁후 언성왕후를 봉하여 시녀 삼백에 강 승상의 위장 삼아 봉황궁에 거처하고 활인동 이 처사로 간의태부(諫議太夫) 도훈관(都訓官)에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겸하여 육조(六曹)를 다스리게 하고 영릉 관비 연심으로 남평왕의 후궁을 봉하여 인성왕후 직첩을 주어 봉황궁에 강 부인을 모시고 그 남은 제장은 차례로 벼슬을 돋우니라.
이때 남국에 잡혀 가 강 승상을 부모같이 섬기던 여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술 한잔 받아 들고 원수전에 자례(自禮)하던 노인의 딸이라. 그 노인을 불러 상면한 후에 조 낭자로 남평왕의 우부인을 봉하고 그 오래비로 총융대장(總戎大將)을 삼아 그 아비를 봉양하게 하니 상하(上下) 인민(人民)이 송덕(頌德)하는 소리 천지 진동하니 그 아니 태평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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