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정변(구테타)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이 일으킨 정변이다. 이 정변으로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고, 박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등장하였다.
당시 국군에는 이승만 정권 때부터 군의 부정부패와 비리, 승진가도 중단에 불만을 품고 4.19 혁명 이후 정군 운동을 벌여 미국과 충돌했던 일군의 장교 세력들이 있었다. 육군소장 박정희와 1961년 2월 강제 예편당한 김종필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은 이로 인해 1961년 5월 말 강제 예편이 예정되었고, 이에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하게 된다.
정변 세력들은 예비사단 병력과 포병단, 해병대와 육군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비롯 대구시, 부산시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이들은 주한미군과 주한미국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 성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통수권자 대통령 윤보선을 회유함으로써 국무총리 장면을 사퇴시키고 봉기 60여시간 끝에 제2공화국을 무너뜨려 행정부,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온다.
이튿날 아침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였으며,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불법화하고 언론 사전 검열을 실시함은 물론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시킨 뒤 2년 반 가량 군정을 실시했다.
예전에는 이 사건이 군사혁명(보수계 세력), 군사반란(진보계 세력), 군사정변을 비롯한 여러 이름으로 통했다. 5.16 주체세력이 정권을 잡고서부터 6.10 민주 항쟁 이전까지는 5.16 군사혁명으로, 민주화 후로는 5.16 군사정변이 공식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2. 배경
2.1. 끊임없는 정치 불안
1960년의 4.19 혁명으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상황에서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야 했지만 부통령 장면은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기 위해 4월 23일 이미 사퇴한 상황이었고, 그 다음 대행 순서는 외무부 장관이 1순위였기 때문에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것이다.
허정 내각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개혁 정책을 펼치고자 했으나, 허정 내각이 스스로 내걸었던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한다는 슬로건과 같이 개혁을 급격하고 신속하게 추진하기 보다는 점진적이고 완만하게 추진하였고,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하야와 국무위원들의 일괄 사직으로 발생한 정부 공백 상태를 해소하고 개헌과 총선거를 치르기 위해 임시적으로 구성된 과도정부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허정 내각은 정치 개혁보다는 혼란 수습에 주력하였다.
1960년 6월에 국회는 의원내각제로 정부형태를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내각제는 이승만정부에 대항해 온 민주당(1955년)이 처음부터 고수해 온 당론이었다. 민주당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정치를 비판해왔는데 4.19는 민주당에게 이들이 주장해 온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개헌 후 국회는 스스로 해산했고, 새 헌법에 따른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의석 233석 중 175석을 차지함으로써 전체 의석의 75%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는 세력이 비슷한 구파와 신파가 서로 대립하였고, 그들은 무소속 당선자를 자기 정파에 영입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해 8월 국회는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격인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는데, 이는 의원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실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신파가 합심한 결과였다. 실권은 국무총리가 갖고 있었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3표 차이로 인준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신파의 지도자 격인 장면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였고 국회에서 단 2표 차이로 인준된다.
구파는 신파와 내각 구성에 있어서 협상을 진행했으나 결국 결렬되었고, 장면 총리는 국무위원들을 신파 일색으로 구성하였다. 두 당파는 서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였고, 구파는 별도 교섭단체를 결성하였다가 끝내 신민당으로 분당하며 완전히 갈라졌다.
2공화국은 10개월 동안 무려 세 차례나 개각을 거듭하였고, 교체 사유는 비리나 정책실패가 아니라 신파와 구파 간 균형 맞추기였다. 당시 장면정부 각료들의 평균임기는 2개월. 이러니 정책이 제대로 연속성을 가지고 굴러갈 수가 없었고, 국무위원들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계파간 밥그릇 다툼으로 장관들이 바뀌는 모습을 국민들이 좋게 볼 리도 없었다. 게다가 윤보선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만 머물려 하지 않았다. 헌법은 대통령이 정당에 속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민주당 내에 남아있는 구파나 신민당의 이해를 대변하였고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의된 이 애매한 규정은 대통령과 총리가 사사건건 대립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각료자리를 둘러싼 2공화국의 국정운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훗날 5.16이 성공하는 주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발언 등을 종합해보면 어느 정도의 혼란은 지속되고 있었음은 사실로 보인다. 일단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이승만 대통령 하야 - 개헌 - 총선거 - 장면정권 수립이라는 엄청난 일들이 1960년 한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벌어졌으며, 독재 정권이 무너졌는데 세상이 조용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2.2. 급작스러운 민주주의 회복에 의한 사회 혼란
4.19혁명으로 인한 제1공화국의 붕괴 이후 10여 년 동안 억눌려 온 요구들을 쏟아내는 데모도 연일 끊이지 않았다. 장면정부 10개월동안 가두데모는 총 2,000여건, 데모에 참가한 100만여 명에 달하였다. 매일 평균 7~8건의 데모가 발생한 셈이다. 국민학생들은 교사의 전근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고, 경찰은 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시위를 하였으며, 육군훈련소의 훈련병들은 장교가 하대를 한다며 시위를 하였다. 심지어 시위를 그만하라는 시위까지 발생하였다. 이것을 부추긴 것은 당시 급격히 불어난 언론들이었다. 제1공화국 붕괴 후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창간되어 일간지는 기존의 41개에서 60년 12월 말까지 390개로 증가하고 주간지, 월간지, 통신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탄생한 언론들은 혼란스러운 사회상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 정부나 권력기관을 비난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정부는 언론규제법을 시행하려다 실패하였다.
장면은 안보와 치안의 핵심세력인 군과 경찰을 숙청과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다. 장면은 선거 공약으로 군 병력 10만 명 감축안을 내놓았고, 집권 후 감군 정책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30,000여 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 잦은 군 지도부 개편으로 1년도 안 되는 재임 기간 동안 국방부장관이 세 번, 육군참모총장이 네 번이나 바뀌는 등 파행을 거듭했다.일제 식민경찰에 복무한 경력이 있던 경찰관들은 4·19를 계기로 숙청의 칼날을 맞았다. 경찰서장 81명을 포함하여 경찰관 17,000명이 해직됐고, 전체 경찰관의 80%를 근무지를 변경시켰다. 민주당 정권 9개월 동안 경찰업무를 관장하는 내무장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 중 네 명은 각각 한 달 간씩 재직했다. 경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민주당 집권기간 중 범죄가 두 배로 늘었지만 범인 검거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90%에서 65%로 낮아졌다. 경찰력이 허약해진 틈을 타고 깡패와 조직폭력배가 활개를 쳤으나 장면 정부는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186p
장면이 정권을 장악한 지 몇 달 후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3.7%만이 장면을 지지할 정도로 민심이 이반됐다. 미국 정부는 장면의 리더십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앞의 책 190~191p
1961년 3월 초에는 「팔리 보고서」가 등장했다. 팔리 보고서는 “장면 정부가 4월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며, 이 사태를 방치할 경우 한국에서는 공산혁명이나 그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김일영, 『건국과 부국』, 기파랑, 2012, 307p
2.3. 전후 군부 내 인사적체
6·25 발발 당시 95,000명 규모였던 한국군은 6·25를 치르며 휴전 당시에는 49만 2,000명으로 그리고 당시에는 70만으로 급팽창한다. 이 와중에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들로부터 새로운 군사지식과 과학기술을 습득했으며, 고급 지휘관들을 선발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
이런 식으로 미군식 선진 행정 시스템을 겪은 그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행정업무 방식을 가진 당대 정치인이나 공직자들에게 강한 불만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육군 장교들의 사정을 보자면, 6.25 전쟁 이후 조직이 비대해지고 그 결과 인사적체가 발생하면서 승진이 막혀버린 육사 8기생 등 중견 장교들의 불만이 극심했다. 즉, 그 앞 기수들까지는 육군의 비대화 과정에서 대령 이상으로 빠르게 진급했으나, 8기부터 확장에 제동이 걸리며 진급이 적체되어 대령을 못 단 중령들이 대량으로 발생했다. 가령, 당시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은 20대에 사단장, 30대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불과 3살 연하의 김종필은 만년 중령 신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만을 기다릴 수 없었던 장면 정부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재원의 일부를 국군을 감축하여 조달하려 했다. 당연히 장교들 입장에서는 정부의 정책에 더 극심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퇴역한 군인에게 직장 자리 봐주거나 우대하던 시절도 아니었으니까.
이 시기의 군인들은 당시 사회상에 비하여 비교적 우수한 시스템에서 커리어를 쌓았지만 대접 자체는 매우 박해서 군인 월급으로는 일가족이 건사하기도 어려웠다. 이 때문에 부정부패, 물자 횡령과 뇌물이 성행했다. 여기에 의외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백선엽-정일권-이형근 군사 파벌의 독식 및 경쟁이라는 막장스러운 상황도 한몫 단단히 했다.
2.4. 박정희 개인의 상황
박정희는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백선엽이나 원용덕과 같은 육군 원로들의 옹호와 남로당 간부들에 대한 정보 제공으로 사형은 면하고 예편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민간인 신분으로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으로 재직했다. 1950년 6월 23일경 박정희는 북쪽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뭔가 이상하다고 상부에 보고했으나 묵살되었고 그 결과가...
그래서 사상전향을 인정받아 전시에 장교로 복직하여 군인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나 승진을 거듭하며 군맥을 쌓을 수 있었다.
사실 6.25 직전 박정희는 숙군 연루자로 군부에서 언제 잘려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이화여대생이었던 내연녀 이현란과의 문제로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결혼 생활도 파탄이 났다. 당시 박정희 주변 인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매일마다 술이나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기 일쑤였고, 월급은 술집 외상값 갚기도 바빴다고 한다. 다시 말해 완전 폐인 상태. 이런 상황이었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살다갔을 팔자였다.
6.25 전쟁 때 박정희는 포병 소령 계급을 달고 군인으로 복직되었다. 그 후 군 생활을 이어가면서 준장, 소장으로 차례로 진급하였다. 진급 자체는 그다지 순조롭지 않았는데 미국 측은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을 문제 삼았고 준장, 소장 진급 때마다 태클이 들어왔으나 백선엽 장군 등의 적극적인 변호로 무사히 진급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 6군단 부군단장, 군수기지사령관,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정변 당시에는 제2야전군사령부(현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군 생활 동안 박정희는 정권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다. 그것은 박정희의 기질 때문이었다.
첫째,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 전력이 있었다. 둘째,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당시 이승만이 국회를 장악하기 위해 4개 소대 병력을 육본에 요청했는데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 장군은 대통령 면전에서 병력파병을 거부한다. 이때 육군본부 제2작전참모부장이였던 포병대령 박정희는 "육군장병들에게 고함"이라는 훈령(217호)을 기초하여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고 현재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터지자, 박정희는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을 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 포항에 주둔한 대한민국 해병대 제1사단장인 해병소장 김동하 장군과 공모하여 5월 8일에 쿠데타를 진행하기로 꾸몄지만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이 역시 종이 위의 구상에 그쳤다.
하지만 박정희는 1960년 5월 2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장군을 위시로 한 수뇌부에 3.15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김종필 중령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생 중령들의 연판장이 돌아 수뇌부 불신을 천명하자 박정희에게 이를 갈면서 그를 박살 내려던 송요찬은 실각했고 군 수뇌부는 붕괴했다.
어쨌든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인 기질은 육본으로 하여금 그를 경계하게 했고 박정희가 정변 등의 소리를 하고 다니자 아예 그를 좌천 또는 예편시킬 구체적인 입안을 하게 된다. 특히 과거 좌익에 가담했던 경력까지 문제 삼아서, 결국 육본 작전참모부장에서 2군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즉, 박정희는 대외적으로는 4.19 혁명 이후의 사회 불안 때문에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부득이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고 해명했다. 부패한 정권으로 인한 민초들의 고통은 이승만 정권 이후 장면 내각에서도 지속되었으며, 특히 50년대에는 군부대 특히 육군 부대의 보급물자 유출이 심해 겨울만 되면 동사자가 속출했다. 박정희가 맡은 사단은 동사자가 '적어서' 상부의 표창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청년 시절부터 야망은 있었던 듯하다. 제자나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교사 시절 문경의 하숙집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초상화를 떡 하니 붙여 놓고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만주로 가서 만주국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 만주에서도 민족차별은 있었지만, 동양의 서부라 불릴 정도로 혼란한 곳이라 나름대로 기회를 잡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인이 된 후에도 나폴레옹이나 터키의 케말 파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했다고한다.
박정희는 또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 갔을 때 일본 황도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소령으로 복직한 후 2.26 사건을 거론하며 가까운 장교들에게 "우리도 이런 식의 군사혁명을 해 보자" 등의 이야기를 종종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친구인 소설가 이병주에게 "우리도 2.26 사건의 우국 장교들처럼 한번 일어나야 하지 않겠냐"라는 이야기를 대놓고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 역사를 읽으면서 메이지 유신처럼 군인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3. 과정-자세한 내용은 5.16 군사정변/과정 문서를 참고
4. 결과 및 반응-자세한 내용은 5.16 군사정변/반응 문서를 참고
5. 평가-자세한 내용은 5.16 군사정변/평가 문서를 참고
6. 군사혁명위원회
군사혁명위원 5.16 주요세력,
위원장:중장 장도영
부위원장:소장 박정희
전방사령관:중장 이한림
후방사령관:중장 최경록
경기지구:소장 서종철
충청지구:소장 김계원
전라지구:소장 김익렬
경북강원지구:소장 박기병
경남지구:소장 박현수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전 소장은 영등포 제6군관구사령부를 제1지휘소로 삼고, 서울 동부의 제6군단 포병단, 서울 서부의 제30사단, 서울 남부의 제33사단 그리고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관할 밖에 있는 해병대 제2여단 병력을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동원해서 대한민국 육군본부를 장악하고, 곧바로 총리의 집무실이 위치한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에 특수부대(GDT)를 투입하여 장면 전 총리 체포 작전을 실시하는 동시에 KBS 라디오방송국, 국방부, 중앙전화국, 서울시청 등 주요 시설을 손에 넣은 뒤 새벽 5시경 KBS 라디오방송국을 통해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의 명의로 군사혁명위원회 설치를 발표한다. 5.16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국무총리 장면이 호텔 맞은편의 주한미국대사관, 안국동 미국대사관 숙소을 거쳐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으로 피신하고, 여러 각료 또한 은신함으로써 작전이 실패하고 계엄령 승인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박정희는 5월 16일 9시를 기하여 효력을 갖는 포고령 세 개를 군사혁명위원회 이름으로 내놓고 장면에게 피신을 권한 후 체포 당한 국방장관 현석호와 연금 당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데리고 해군참모총장 이성호, 공군참모총장 김신, 해병대사령관 김성은과 함께 오전 9시경 청와대로 향해 대통령 윤보선에게 계엄령 추인 및 쿠데타 지지를 요구하게 된다.
이후로 공포된 포고령은 다음과 같다.
포고 제1호는 군사정권에 대한 민간의 반항을 탄압하고 사회를 통제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채 출국을 시도한 사람, 직장을 이탈했거나 유언비어를 날조 또는 유포한 사람, 옥외집회를 했다고 여겨진 사람, 저녁 7시부터 새벽 5시 사이에 집 밖에 있는 사람은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되어 처벌되도록 하였다. 또한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까지도 계엄군에게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고, 역시 어길 경우 영장 없이 체포된다.
포고 제2호는 이른바 금융동결령으로 전국의 금융을 즉각 동결하고 추후 지시에 따르도록 하였다.
포고 제3호는 출국 시도를 원천봉쇄하는 데 목적을 두고 하고 있다. 국제선의 운항과 외국 선박의 입출항 자체는 제한하지 않되 모두 군의 검열을 받도록 하였고 국내선 운항과 국내 선박은 모두 중지하여 추후 지시를 따르도록 하였다. 당시 김포국제공항은 5월 16일 폐쇄되었다가 이튿날 개장되어 17일 13시 10분 폐쇄 후 최초의 운항이 이루어졌다. 포고 제3호는 몇 차례 개정되다가 1961년 7월 8일에 폐기되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국내 선박 중 중국 내 연안어선, 정기객선 및 무연탄수송선에 한하여 운행을 허락한다.
2. 취항 선박은 출어전과 입항 후 해지구계엄사령부에 신고하고 검사를 받아야 한다.
포고 제4호는 군사정변 발발 후 행정, 입법, 사법 등에 관해 최초로 언급한 포고령으로 5월 16일 오후 5시를 넘어 뒤늦게 발표되었으며 총 여섯 개 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따르면 군사혁명위원회는 1961년 5월 16일 오전 7시를 기하여 장면 정권으로부터 정권을 모두 인수하여 국가기구를 모두 집행하고 장면을 포함한 내각 인사 모두를 체포한다. 한편, 참의원, 민의원 및 지방의회 등 입법기관은 단기 4294년(서기 1961년) 5월 16일 오후 8시를 기하여 모두 해산되고 정당을 포함해 사회단체 등의 모든 정치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포고 제5호는 제2호에 관련한 첫째 지시로서 예금 인출을 일일 1회 최대 10만환, 월 최대 50만환으로 제한해 허가하는 금융 동결 완화 조치다.
포고 제6호 전국의 물가를 1961년 5월 16일 현재 수준에서 동결하고 매점매석 행위를 하는 자는 가차 없이 처벌해 버리겠다는 물가억제령이다.
포고 제7호는 각 지구의 계엄사무소장이 관내 외국군과 대공사관의 식량과 재산을 보호하라는 명이다.
포고 제8호는 제2호에 대한 두 번째 지시로서 군사비 관련 금융 동결을 모두 해제하는 것이다.
포고 제10호는 제1호 이외에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체포, 구금, 수색에 관하여 법원의 영장 없이 이를 집행할 수 있고 또한 군사재판에서 관장한다는 내용이다.
포고 제11호는 사법부와 검찰은 지시에 따르라는 내용이다.
포고 제12호는 장면 내각이 추진하고 있는 국토건설사업은 민족적 과업이므로 계획, 소요 자금 등은 모두 예정대로 집행할 것이며 관련 종사자들의 신분은 보장할 테니 일에 충실하라는 내용이다.
포고 제14호는 제2호에 대한 개정 및 제5호 폐지령으로 예금 인출은 월 천만원 이하로 변경하고, 외국과 관련된 거래, 인건비, 건당 5백만 원 이하 사업비에 관련된 재정 지출에 대한 동결만 해체하겠다는 것이다.
이어 15호는 더 상세하게 금융 동결을 완화하였다. 제16호는 제3호에 대한 완화조치다.
7. 여담
수도권 북쪽의 경기도 김포시 최전방을 경계, 방어하는 임무를 지닌 해병대 제1여단병력 1,500명을 쿠데타를 위해 서울로 빼돌리고 전방쪽을 비워둔 건, 북한의 남침을 야기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이렇게 전방 부대를 빼돌려 쿠데타에 동원하는 행위는 이후 12.12 군사반란 때 제9보병사단 29연대에 의해 다시 일어난다.
박정희가 한강다리를 건널 때 이미 술에 취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정희에게 이것저것 보고를 하러 간 전속부관의 말에 따르면 이미 그의 몸에서 술 냄새가 상당히 풍겼다고 한다.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제3공화국 5.16 군사정변 관련 에피소드를 보면, 박정희 외 1명이 쿠테타가 실패했다고 스스로 자포자기하여 대포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고, 정변 지휘부들은 박정희가 안 보인다며 당황하다가 술에 취한 듯한 박정희를 부하들이 찾아서 데려오는 대목이 있다. 하지만, 5.16 정변 당일 정명환을 필두로 한 진압군을 박정희가 직접 말로 돌아가게 만들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술을 한두 잔 했을 수는 있어도 몇몇 증언처럼 정말 자포자기 상태로 술에 만취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단순히 한두 잔 정도는 아니고 술 냄새가 풍길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더라도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닌 게, 박정희는 술이 상당히 셌다. 훗날 박정희는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만난 자리에서 육영수 여사와 태국 외무장관이 기겁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셔서 좌중의 불안한 시선을 받았지만,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연설까지 마친 일화가 있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명백히 박정희가 쿠데타 당시 술에 취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당시 김종필은 박정희 근처에 없었기 때문에 근거로는 의미가 없다. 해당 시점에서 김종필은 이미 이전에 강제전역 당한 민간인이었기 때문에, 병력도 무기도 직급도 없어서 쿠데타 당시 박정희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대신 혁명공약 인쇄한다고 인쇄공들 재촉하고 있었으며, 이건 김종필 스스로 인정한 내용이다.
차지철과 전두환은 이 쿠데타에 대위 계급으로 가담했으며 둘 다 말년 대위 상태였는데 쿠데타가 성공하는 바람에 소령은 거의 생략하다시피할 정도로 짧게 진급한 후 바로 중령으로 진급했다. 차지철은 그렇게 중령으로 제대한 후 국회의원이 된 반면 전두환은 계속 군대에 남아 소장까지 진급한 이후 박정희의 이 짓과 똑같은 짓을 저질러 박정희와 똑같이 권좌에 오르게 된다.
훗날 박정희의 심복이자,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는 5.16 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다. 당시 김재규는 준장 계급으로 국방부 총무과장을 맡고 있었는데, 5.16 정변 직후 반혁명 분자로 몰렸으나 박정희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김재규는 군대의 정치 중립을 매우 강조한 이종찬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고 그 영향을 받아서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구의 아들 김신이 정변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고 정변에 참여했다.
이 사건 발생 3일 전인 1961년 5월 13일에 재보궐선거가 열렸는데 이때 당선된 의원들은 취임한 지 12시간 만에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 자격이 박탈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그중엔 4번의 좌절 끝에 강원도 인제군에서 당선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대중이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악연이다.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의 정치깡패들과 그들의 조력자였던 곽영주 등의 친 자유당 경찰 세력은 복역 중 5.16 정변 소식을 듣고, "아싸! 민주정권이 물러났으니 이제는 다시 우리 세상이다!" 하며 좋아서 쾌재를 부르며 날뛰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불과 4일 후에 자신들이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서울 시내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래는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게 끌려 다니며 공개적으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치깡패 두목 이정재를 포함한 동대문파의 화랑동지회. 결국, 갑종장교 출신에 대학 나온 인재라고 살려준 유지광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된다. 자세한 내용은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그리고 혁명재판 문서를 참고.
본래 5.16을 미화하는 측에서 구국의 결단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링크 과정은 쿠데타지만, 결과를 보면 혁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하지만 당시 용어의 사용이 일종의 밈화 되면서 구국의 결단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확대되었고, 굳이 5.16이 아니더라도 특정 정치적 이슈에 대한 정치인의 판단이 엇갈리는 결정을 구국의 결단으로 표현하는 용례가 늘어나고 있다. 링크
대표적 보수 논객인 전원책 변호사도 썰전에서 5.16은 쿠데타라고 명확하게 말했다. 심지어 자기 군 복무 시절에 터진 12.12 군사반란 당시엔 '군인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논문을 쓰며 군인 신분임에도 12.12는 쿠데타라고 대놓고 말했다가 치도곤을 치를 뻔하기도 했다고. 사실 보수 인사 중에서도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들은 5.16을 쿠데타라고 비교적 쉽사리 인정하는 반면, 권위주의 보수 계열에선 쿠데타나 군사정변이란 표현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물론 후술된 김현웅 법무부장관 말처럼 교과서에는 군사정변이라고 기술되어있다.
묘하게도 51년 7개월 후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51.55%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MBC 드라마 왕초에서는 마지막 회에 악역들이 일제히 몰락하는 사건으로 비춰진다. 이 정변을 통해 적폐를 척결한다는 모습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그려졌다. 김춘삼과 아는 사이였던 어리버리한 중대장은 혁명재판부의 검찰로 출세했다고 좋아라 한다. 나중에 케이블에서 재방송을 할 때는 서울 시내에 진입한 계엄군이 친일반민족행위자 경찰들과 이정재 등을 잡아가는 장면을 삭제해서 방영했다.
8. 관련 문서
8.1. 쿠데타 세력
강상욱. 구자춘. 길재호. 김동하
김신 - 김구 선생의 아들이자 대한민국 공군 창설 멤버인 공군의 원로로, 5·16을 지지했다. 더구나 이쪽도 이승만에게 품은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김용순. 김윤근. 김인화. 김재규. 김재춘. 김정덕. 김제민. 김종필. 김진위. 김형욱. 류승원. 문성태 문재준. 박기석. 박원빈. 박임항. 박정희. 박종규. 박치옥. 백태하. 석정선. 신윤창. 오정근. 오치성. 유원식. 윤보선. 윤필용. 이광선. 이낙선. 이석제. 이영근. 이주일. 장경순. 장도영.
전두환. - 당시 육군 대위로 서울대 문리대에 ROTC 교관으로 파견 나가 있다가 5·16 정변을 맞았다. 5월 17일 아침 그는 육군본부로 찾아가 정변의 주역인 박정희 소장과 면담을 청하고, 5·16 정변의 주체가 젊은 장교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던 박정희임을 안 뒤 육사 생도들의 5·16 정변 지지 시가행진을 제안했다. 5월 18일 아침 전두환의 설득을 받은 육사 생도 800여 명이 동대문에서 시청 앞 광장까지 벌인 시가행진은 그때까지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일부 국민과 외국인들의 시각을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대가로 박정희는 전두환에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유했으나, 그는 군인으로 남겠다며 거절했다.
정래혁. 정명환.
정봉욱. - 당시 1군 사령부의 포병부 소속이었으나, 쿠데타 발발 후 곧바로 기갑부대를 끌고와 1군 사령부 cp실로 포구를 겨냥하여 배치시켜 이한림 장군을 압박하였다. 본디 한국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중좌였으나 평소 김일성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으로 귀순한 뒤 조선인민군의 진지 위치를 알려줘서 기습작전을 감행해 승리에 일조했다.
한국전쟁 후에는 1966년에 대한민국 육군 제7보병사단의 사단장과 육군훈련소장, 육군3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7사단장 시절 조선인민군 시절 후배 장교들이 조선인민군 사단장으로 재직해 있었는데, 야간에 북한군 병력이 비무장지대로 침투하자 포격으로 격퇴하고, 직접 GP를 찾아 후배들을 향해 확성기를 틀어놓고 “□사단장 ○○○, 연대장 XXX, 이 간나새끼들 나 알지? 너그들 한번만 더 그렇게 놀면 대갈통 날려버리갔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세웅. 정세윤. 정오경. 조남철.
차규헌. - 나중에 12·12 군사반란에도 직접 참여하면서 전두환과 함께 2관왕을 달성한다. 게다가 차규헌은 육사 8기생.
차지철. - 공수특전단 대위 신분으로 가담해 쿠데타가 성공하자 중령으로 특진 후 제대하고 이후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뛰어든다.
채명신. 최용관. 최주종. 한웅진. 홍종철.
8.2. 정부 인사
대한민국 제2공화국
윤보선. 장면. 이한림. 최경록. 강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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