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 (1979년 10월 26일)
정의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 경 서울 종로구 궁정동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를 살해한 사건. 개설십이륙사건·십이륙정변·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 등으로 불린다.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는 몰락했다.
역사적 배경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18년간 권좌에 있으면서 1인 집권의 권위주의를 계속 강화하여 나아갔다.
특히 헌정 질서를 파괴하면서 1972년 10월에 등장한 유신체제는 억압적인 비민주적 정치를 심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70년대 후반으로 넘어 오면서 그 동안의 정치·경제적 모순들이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중화학공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로 상황이 악화되어 있었다.
중화학공업화의 추진은 이 부문에로의 중복, 과잉 투자로 인한 효율성 상실과 소비재 품목 품귀라는 이중의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는 곧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었는데, 1979년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한국경제의 고성장 전략 추진과정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18.3%에 달하였다.
고도성장으로 1인 장기집권의 정당성을 보상받으려 하였지만 독재와 인플레이션 등으로 인해 민심은 체제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한 수출주도형 공업화에 의한 고도성장 전략은 노동자와 농민의 상대적 희생을 전제로 한 것 이었는데 경제 위기의 심화 과정에서 이들 계층의 소외감도 점차 심화됨으로써 그들의 생존권 요구도 거세어졌다.
대외적으로는 1977년에 출범한 미국의 카터(Carter, J.) 행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미군철수라는 카드를 이용해 한국의 인권상황을 개선하려 하였으나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거부해 한·미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또한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하여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시도하면서 미국을 자극하였다.
이에 박동선(朴東宣) 사건까지 겹쳐 한·미관계는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야세력과 야당은 반 독재 민주화 운동과 민중의 생존권 투쟁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1972년 유신체제 출범부터 긴급조치와 계엄, 재야인사의 구속 등이 계속되었으나 민주화의 방향을 거스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특히 1978년과 1979년은 정치·경제적 모순이 정치적 위기로 연결된 시기였다.
경과1978년 동일방직사건과 함평고구마수매사건 등의 생존권 투쟁은 민주화 운동의 수준을 급격히 고양시킨 사건이었다.
그 해 12월 12일의 제10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32.8%의 득표율을 올려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 31.7%를 앞지르게 되었는데 이는 민심의 이반(離反)주 01) 현상이 표출된 사례인 것이다.
이에 집권여당은 위기감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극단적인 강경 대응 이외에 여타의 대응책을 찾지 못하였다.
1979년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오원춘 사건은 유신정권과 가톨릭 세력의 정면충돌을 야기시켰다.
1979년 8월의 YH사태는 이전의 노동소요가 절정에 이른 사건이었다.
YH무역은 소규모 수출 업체로서 사장이 체불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국으로 도피한 상태였다.
YH노조의 여공들은 자신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당시 김영삼(金泳三) 총재하에서 유신정권에 대한 강경 투쟁을 전개하던 신민당사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경찰은 8월 11일 여공들을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당사내로 진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여공 김경숙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해 사망하였다.
이에 대해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사인은 경찰의 과잉진압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YH사태는 소규모의 비체제적인 노사갈등에 불과하였으나 정권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되는 상황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야당을 비롯한 전 민주화운동세력과 유신정권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김영삼은 유신철폐의 선명한 기치를 내걸어 중도통합론을 표방한 이철승(李哲承)을 1979년 5월의 전당대회에서 누르고 신민당의 새로운 대표로 등장하였었다.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였고, 외신기자클럽 회견에서 통일을 위해 김일성(金日成)을 만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정부는 이에 김영삼의 축출을 기도하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신민당 대의원 2명이 전당대회 당시 투표권이 없음을 선언하였고, 김영삼의 정적인 이철승계의 인물들이 전당대회 결과의 무효를 제소해 법원은 김영삼의 총재직 박탈을 결정하였다.
국회는 더 나아가 김영삼의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지 회견 내용이 국가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10월 4일 그의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하였다.
결국 정부는 야당까지도 제도권 정치의 틀 밖으로 내모는 형국을 초래하였다.
그 동안 쌓였던 국민의 불만이 김영삼 출축을 계기로 폭발하였다.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창원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것이 유신체제의 종말을 초래하였던 부마항쟁으로서 이 지역은
김영삼 총재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10월 15일의 시위는 부산대학교의 학생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주동자들이 연행됨으로써 확산되지 못하였으며, 본격적인 시위는 16일부터 이루어졌다. 16일 교내에서 집회를 가진 부산대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였고, 이에 동아대·고려신대, 고등학생, 전문대생 등의 학생에다가 일반시민까지 가세하였다.
3,000여 명의 시위대는 게릴라식으로 경찰과 충돌하였고 자정에 이르도록 격렬한 시위를 계속하였다.
17일에는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려졌으나,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다.
시민들의 호응 속에서 시위군중은 경찰서·파출소·세무서·동사무소·신문사·방송국 등에 투석하였다.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16일부터 17일 이틀 동안 경찰차량 6대가 전소되고 12대가 파손되었으며, 21개 파출소가 파손 또는 방화되었다.
18일 자정에는 부산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공수부대 등의 군병력이 투입되어 시위군중을 진압하였다.
18일에는 경남·마산 일원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경남대에 무기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오후 6시경부터 시작된 시위는 곧 2,000명의 시위군중을 이루어 공화당사를 공격하고 파출소·신문사·방송국·법원·검찰청·동사무소 등에 피해를 입혔다.
19일 밤에도 마산·창원 지역에 이러한 사태가 계속되자 20일 마산·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한 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던 부마항쟁은 강경진압에 의해 일단 해결되었으나 그 대응 방식을 둘러싼 집권층 내부의 갈등을 야기시켜 10·26사태를 발생시켰다.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은 부마항쟁에 관한 강경진압을 주장하였으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고 양인은 서로 경쟁적인 입장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의 입장을 수용해 강경진압을 채택하자 차지철의 견제로 진퇴위기에 몰린 김재규가 10월 26일 만찬 도중에 박정희와 차지철을 살해하였다.
김재규는 군 후배인 차지철의 월권과 자신에 대한 무시, 그리고 그에 대한 대통령의 편애를 견딜 수 없었다.
그날도 박정희는 부마항쟁의 책임을 중앙정보부의 정보 부재에 돌렸으며, 차지철도 중앙정보부의 무능함을 지적하였다.
의의와 평가10·26사태 직후 최규하(崔圭夏) 과도정부는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 하였으며 10월 말 군부 고위층은 유신헌법의 폐기를 결정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무너졌으며,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수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10·26사건을 사전에 알지 못하였다고 주장했다.
10·26사태는 유신체제를 무너트린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김재규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민주화를 위한 의거’는 아니었다.
이전부터 민주화를 지속적으로 주장했던 것이 아니었던 김재규가 의거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서둘러 만들어 낸 사후 명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김재규와 그 하수인들인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하기는 하였지만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었으며 차지철과의 개인감정이 표출된 우발적인 범행으로 볼 수 있다.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鄭昇和)와 사전 모의는 하지 않았으며 단지 ‘거사 후 연대’를 시도하기 위해 10·26 당일에 궁정동 안가의 별실에 초대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승화는 연대를 거부해 쿠데타로 진행되지는 못하였으며, 결국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집권하는 빌미를 만들어 주었다.
10·26사태로 민주화가 되기보다는 권위주의 통치가 연장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시해는 박정희의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김재규의 명분론에 설득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가 시해하였다는 것도 동양적인 유교 윤리에 벗어나는 것이었다.
후속 정권도 이러한 역사적 선례를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김재규 일당은 사형되고 10·26사태에 대한 법적 심판은 일단락되었다.
법적 심판은 그렇다하더라도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 있다.
10·26사태의 마무리 과정에서 12·12사태가 일어나는 등 민주화가 지체되기도 하였지만 10·26사태 자체는 민주화를 요구하였던 부마항쟁으로 촉발되었고 보다 장기적으로는 유신체제의 붕괴와 군부독재 종식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차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0·26사태(十二六事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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