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그 때에

지리산 토벌작전(1950-1956년)

Choi가이버 2022. 10. 31. 18:27

●   지리산 토벌 

○   지리산
1948년 10월 26일 여수를 탈환한 전투사령부는 국군 토벌대에게 쫓겨 지리산에 들어간 김지회 부대를 총력으로 추토할 준비를 하였다. 그 계획은 남원-구례-화개장-하동-진주-거창-함양의 선에 포위망을 구성하고, 타격부대로 지리산맥을 소토함과 아울러 사산할 반군을 포위환으로 포착하는 데 있었다.
지리산맥은 소백산맥 남쪽 끝에 있는 큰 산 덩어리로서 주봉은 1915미터의 지리산이다. 한국의 3영산 중 하나이며 명소 고찰이 많다. 
구례 북쪽 화엄사가 그 대표이다. 천고에 도끼질을 하지 않은 원시림으로 덮여 게릴라의 근거지로는 한국에 이 이상인 산은 달리 없다. 그 넓이는 동서 50킬로미터, 남북 30여 킬로미터에 이른다.
여수 탈환전이 막을 내릴 무렵 제3연대는 남원, 제4연대는 구례, 제1연대는 화개장-하동, 제6연대는 거창에 각각 주력 또는 일부가 주둔하고 부근을 경비하면서 외관선 구성에 힘썼다.
신상철 중령이 지휘하는 제15연연대는 화개장-하동의 섬진강 선에 전개하여 백운산과 지리산을 차단하면서 반군의 탐지에 힘쓰는 중, 10월 21일 옥곡의 전투 이래 행방불명이었던 제15연대장 최남근 중령과 제1중대장 조시형 소위가 하개장에 나타났다.
그들이 반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현장은 많은 사병들이 목격했던 터라 모름지기 총살 당하였을 것으로 여겼는데, 무사히 귀환하였기 때문에 광주로 호송하여 사정을 청취하였다.
최 중령의 석명은 “결코 반군에 합류한 것이 아니다. 부대 지휘의 수단을 잃었고, 포위되어 저항의 수단도 없었기 때문에 반군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젯밤 비바람으로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서 탈출하였다” 는 것이다. 이 석명은 조시형 소위의 진술과 일치하였다.
의심이 풀린 최 중령은 11월 12일부로 제4여단(청주, 유재흥 대령) 참모장에 보임되었다. 영전이었다.
하지만 방첩과에서 그 진술 조사를 깊이 연구하고, 당시를 목격하였던 장병의 증언과 비교해 볼 때 이상한 점이 있었고, 이적행위도 없지 않았다. 때문에 육군본부에서 출두를 명하자 최남근 중령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총사령부는 즉시 전국에 비상수배를 하여 대전에서 최 중령을 체포하였다. 군법회의에 부쳐진 최남근 중령은 체념하고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김지회부대와 합류하였을 때 김지회를 죽일 수도 있었으나 같은 말씨, 같은 표정, 같은 함경도 출신이었기 때문에 인간적 양심에서 그를 죽일 수 없었다.
반군에서 탈출한 것은 어제까지 전우였던 국군과 골육상잔의 전투를 하는 데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상관과 동료와 부하들에게 괴로움을 끼칠 수 없었다.
“김지회의 아내가 묵인(묵인(默認))하는 가운데 탈출하였으나, 두 겹, 세 겹의 경계선을 돌파(돌파(突破))하느라고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국군을 배반한 반역자이다. 때문에 서울에 출두하면 군법회의에 부쳐지고, 다시 김지회에 관하여 증언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면 반란군에게도 배반하는 것이 되어 이중 배반자가 된다. 때문에 출두 명령을 받게 되자 군인 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살 생각으로 도피하였다”.
최남근 중령은 1949년 5월 26일, 수원(수원(水原)) 산자락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최남근에 관하여 <한국전쟁사>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그는 두뇌가 명석(명(明)?)하고 인간성이 풍부하였다. 때문에 상관과 동료들은 그를 신뢰하였고 부하들은 심복(심복(心服))하였다. 이것을 기화(기화(奇貨))로 한 그는 각 연대를 전전(제6, 제8, 제15연대장 역임)하면서, 좌익세력을 부식(부식(扶植))하는 데 전심전력(전심전력(全心全力))을 기울였다. 그러나 제15연대 창설에 임명되고서는 복심 부하가 없기 때문에 세포 부식을 할 수 없게 되었던 듯하다.
마산(마산(馬山))에서 출동함에 즈음하여 그는 정황 설명도 하지 않았고, 훈시하지도 않았으며, 중대에 실탄도 분배하지 않았다. 그가 실탄을 배분한 것은 하동(하동(河東))에서 광양(광양(光陽))으로 향하기 직전 중대장의 항의를 받고 나서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동은 그가 지휘하의 대대를 반군에게 합류시키려 하는 의도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반군과 접촉하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각 중대는 적극적으로 교전(교전(交戰))하였다. 거기서 그는 자기의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에 의심을 품은 부하가 그를 사살(사살(射殺))할 것이라는 위험을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차량(차량(車輛)) 회수를 구실로 삼아, 스스로 반군과 합류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조시형 소위는 연대장을 보좌하는 입장에서 불행하게 포로가 된 거이 밝혀졌기 때문에 아무 혐의 없이 원대(원대(原隊))에 복귀하였다. 그는 후에 소장으로 누진(누진(累進))하였고, 1963년에는 무임소장관을, 후에 농림부장관에 임명되었다.

○ 호남지구 전투사령부
1948년 10월 27일에 여수 탈환이 이루어지고, 최남근 중령과 조시형 중위의 보고로 반군 주력이 지리산 일대에 잠입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반군토벌 전투사령부는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로 개칭되고 본격적인 추적 토벌을 개시하였다. 순천을 탈회하고 1주일 후였다.
백인엽 소령의 제12연대는 12월 28일에 구례에 집결하여, 다음날 29일부터 지리산의 소탕 토벌을 시작하였다. 21일의 순천 공격 이래 항상 주공을 맡은 쉴새 없는 공격이었다.
그 때 비로소 SCR 300 (통달거리 30킬로미터의 휴대 무선기) 이 교부되어 부대의 사기는 높았다. 상대가 가지지 못한 새 장비는 사기의 원천이다.
백인엽 소령은 주력을 이끌고 우선 명찰 화엄사 (구례 북북동 6lf로) 에 참예하여 반군 소탕을 기원하였다. 그리고 승려를 안내역으로 세우고 노고단 (1507 고지) 의 소탕 토벌을 개시하여, 제2대대 (김희준 대위) 와 제3대대 (이우성 대위)를 병렬로 봉봉 곡곡을 훑으며 노고단을 향하여 공격하였다.
공격부대는 곧 반군의 일부와 접촉하였으나 워낙 심산유곡인지라 준엄한 지형과 울창한 원시림 때문에 공격하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다.
다음날 30일과 다음 다음날 31일에 산 속을 뒤졌으나 반군은 급속히 분산하였는지 발자취도 찾지 못하였다. 토벌대는 건빵을 먹으며, 동상 환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작전을 하루 더 연기하여 수색을 계속하였으나 성과가 없었다.
11월 1일, 백인엽 부대는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지휘하는 연대 주력(제1대대, 허암 대위와 하사관 교육대 기간과 교체하여 군산에 귀환하였다.
그보다 앞서 10월 30일, 총사령부는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를 북부와 남부지역으로 양분하여, 북부지구 사령관에 제2여단장 원용덕 대령을, 남부지구 전투사령관에 김백일 대령을 임명하였다.
제12연대장이면서 군산에 잔류를 명 받고 비육지탄 하던 백인기 중령은 각 일부로 구례역과 파도리(구례 동남 6킬로)를 경비하게 하고, 주력은 구례에 집결하여 활발한 수색 공격을 개시하였다. 자갈까지 뒤졌으나 반군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11월 3일 밤, 파도리에 배치되었던 제12연대 하사관교육대(김두열 소위 이하 100여인)가 김지회 부대의 기습을 받아 김두열 소위 이하 약 90인이 포로가 되어 지리산 깊숙이 끌려갔다. 
요행히 탈출한 성찬호 상사 이하 10여 인이 급보하였기 때문에 백인기 연대장은 1개 중대로 추격하게 하였으나 행방이 묘연하였다.
성 상사의 보고에 따르면 부락민들이 구군 주둔을 환영하여 술상을 차렸다. 거기서 경계심이 느슨해져 보초가 적의 접근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진심 어린 환영이 아니라 반군과 내통한 책략이었을 것이다.
제2대대는 다음날 4일 미명에 다시 출동하여 화엄사 부근을 소탕 토벌하여 유기 사체 8을 얻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반군 주력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그 날(11월 4일) 남원에 사령부를 설치한 북부지구 전투사령관 원용덕 대령은 예속관계의 변경을 빌미로 지휘관 회동을 개최하기 위하여 각 부대장을 남원에 참집하게 하였다.
명령 전달은 경찰 전화로 행해졌고, 제12연대장 백인기 중령에게는 구례경찰서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당시 무선은 휴대용 단거리 무선뿐이었다. 때문에 부대간의 연락은 전면적으로 경찰 전화에 의존하였다.
백인기 중령은 헌병 1개 분대를 경호로 스리-쿼터에 태우고 구례를 출발하였다. 1530(15시 30분)이었다. 서시천 천곡도를 북상하면 바로 남원이다. 행정은 30킬로 미만이어서 한 시간이면 남원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1700이 되어도 백 중령은 남원에 도착하지 않았다. 남원에서 구례에 조회해보니 이미 도착했을 것이라고 하였다.
소동은 커졌다. 우선 1개 대대가 구례에서 연대장의 진로를 따라 남원에 향하였으나 날도 저물고 이상이 없었다. 수색대는 빈 손으로 남원에 도착하였다. 또다시 제2대대장 김희준 대위는 화엄사 부근에서 정보를 수집하였으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11월 5일 0100에는 백인기 연대장은 행방불명인 것으로 단정하고, 날이 새면 다시 수색하기로 하였다. 또는 백인기 중령은 반군에 합류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날 11월 5일 0400, 제2대대는 동원된 경찰대와 함께 남원으로 향하였다. 제5중대(김한주 중위)가 첨병중대였으나, 선두 차량에는 연대 작전주임이, 제2 차량에는 대대장 김희준 대위가 승차하였다.
제5중대 선두 차가 산마을 굴곡부에 이르자 전혀 뜻밖에 부락과 서쪽 고지에서 십자화가 쏟아졌다. 저항할 틈도 없이 제5중대 거의 전원이 작전주임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둘째 차량에 승차하였던 김희준 대대장만 팔에 관통상을 입으며 필사로 포복하여 후퇴한 결과 대대 주력에 의하여 구출되었다.
대대 주력은 박격포의 지원 아래 공격하여 1개 중대로 예측되는 반군을 격퇴하였으나, 반군은 제5중대의 포로 70-80명을 끌고 산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반군 진지에는 3의 시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 일전으로 대대가 받은 손해는 심히 컸다. 전사 43-50인, 부상자 약 50인에 이르고, 그 외에 제5중대 70-80인이 반군에게 연행된 것이다.
후에 안 사실로는, 반란군은 구례의 군대가 반드시 연대장 수색을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1개 중대로 매복하여 기다렸다. 1개 대대가 북상하여 왔기 때문에 가까이 유인하여 기습하였다고 한다.
오후, 부근을 수색한 결과 자결한 백인기 연대장의 유체가 농가에 안치되어 있었다. 부근 주민의 말과 후에 귀환한 헌병의 보고를 종합하면 백인기 중령이 자결한 때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4일 1600 무렵 백 중령 일행이 산동지서에 접근하자 갑자기 집중사격을 받았다. 놀란 운전병이 급정차 하였다. 차에서 퉁긴 백 연대장은 헌병들을 질책하며 차를 방패 삼아 권총으로 응전하였으나, 우선 헌병 분대장이 권총을 강에 떨어뜨렸다고 핑계하며 도주하였다. 백 중령은 부근 산에서 구원을 기다리려 하였으나 헌병들은 연대장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결국 6인이 사살당하고 몇 명이 탈출에 성공하였다.
혼자 남은 백인기 중령은 권총을 속사하면서 후퇴하였다. 반란군 약 1개 소대가 추격하였다.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백 중령은 부근 농가에 들어가 자기의 신분을 밝힌 후에 내 시체를 보관하였다가 내일 국군이 오면 인도해 주기 바란다하고 유언한 후 부근 대나무 숲에 들어가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농가의 증언에 따르면 백인기 중령의 자결은 1700 무렵이었다고 한다. 백 중령이 자결한 죽림은 습격 받은 지점에서 150미터가량의 거리라고 하였다. 반란군은 백 중령을 추격하여 자결한 유체를 확인하고는 안 됐다 하며 물러났다 하고 알려주었다. 또한 후에 붙잡힌 반란군 중 한 사람은 생포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위협 사격을 가하였다 하고 진술하였다.
백인기 중령 일행을 반란군이 매복하여 기다린 것은 산동지서를 점령한 반란군이 경찰 전화를 도청한 결과였다.

○ 구례전투
백인기 중령은 향년 25세였다. 학도 출진하여 일본방공학교에서 복무하고,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3월 말에 소위에 임관되었다.
1948년 5월에 군산에서 창설된 제12연대장에 발령, 6개월 후 반란군을 토벌 소탕하다가 순직한 것이다.
이리하여 반란군의 기세가 오르고 국군의 사기가 침체되기 시작할 때에 형세를 역전하는 전투가 발생하였다.
백인기 연대장의 소식이 불명해진 11월 4일 밤,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은 다시 연대장 대리에 임직되어 구례에 급행하였다.
그는 5일의 연대장 수색작전에서 뜻하지 않은 상처를 입은 제2대대 정비에 힘쓰면서 연대장의 복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에 11월 7일, 지난 3일 밤에 반란군에게 끌려갔던 하사관교육대의 김두열 소위 이하 약 90인이 돌아왔다.
조사한 결과 그들은 짐꾼으로 무기와 약탈물을 운반하는 일을 하며 사흘 동안 지리산 속을 방황하다가, 느닷없이 김지회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공상주의 운동에 종사하라고 하며 한 사람당 400원의 여비 지급을 받고 석방되었다.
는 김지회가 그들을 석방한 이유를 무조건 사살하기보다는 감화시켜 동지로 삼는 편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여 짐꾼으로 부렸으나, 감시 병력이 필요하여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석방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백인엽 연대장은 한밤중까지 한 사람 한 사람 조사하였으나, 반역의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다음 기회에 공을 세워 오명을 씻도록 하라고 훈시한 후 예비대에 돌렸다.
그 날 밤은 맑게 갠 가을 하늘에 명월이 빛나고, 벌레 소리가 가을이 깊었음을 느끼게 하는 고요한 밤이었다. 8일 0400, 반란군은 연대 주력을 공격하였다. 우선 학교 뒷산에 배치된 1개 중대를 공격하고, 국민학교를 향하여 돌진하였다.
백인엽 연대장은 미리 원형으로 배치한 81밀리 박격포대(8문)를 질타하여 적의 화광을 향하여 지역 사격을 가하였다. 이윽고 날이 새면서 사탄은 적확하게 적에게 적중하였다. 반란군은 혼란해지기 시작하였다.
백인엽 소령은 역습을 개시하였다. 특히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던 김두열 소위 이하 하사관교육대원에게 오명을 씻을 기회는 지금이다 하고 돌격을 명하였다. 김 소위 이하는 하나로 뭉쳐 돌격하여 적선을 돌파하였다.
반란군은 0500 무렵 분산하기 시작하여 20여 인의 포로와 30여 인의 사상자 및 수백 정에 이르는 화기 탄약을 유기하고 괴주하였다. 연대는 백인기 연대장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그 때의 포로는 구례 전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김지회는 제12연대를 섬멸하여 국군 전대의 내응을 촉구하기 위하여 주도한 계획 아래 기습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무기가 소화기뿐이었기 때문에 효과를 올리지 못하는 중 치열한 박격포의 탄막을 입고 사기가 떨어져 혼란에 빠졌다. 가기를 돌격 당하였기 때문에 전투에 질 수밖에 없었다
구례의 전투에 관하여 백인엽 소령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연대장 백인기 중령이 반란군의 매복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에 다음날 구례에 급행하여 연대의 지휘를 하였다.
여러 사정을 들어본 결과 구례면 면장의 백부가 공산당의 보스이며, 때문에 주민은 반란군에게 호의를 가지든가 적어도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국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분자는 적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반란군 주력을 분쇄하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반란군은 치안 유지를 위하여 분산 경비중인 국군 부대를 각각 격파하는 전술을 취하고 있으며 점점 세력을 확대하여 3개 대대 이상이 되었다. 더구나 반란군에게는 경비 책임은 없기 때문에 그 주력은 비교적 안정되게 행동하고 있으며 이합집산이 가능하다.
그에 대하여 우리 연대는 1개 대대 반에 지나지 않고, 더구나 경비상 활동에 지장을 받는다. 때문에 이제까지의 공격형 토벌로는 승산이 없고 도리어 기습을 받을 염려가 크다. 더구나 주민은 반란군에게 호의적이기 때문에 정보력에서도 반란군이 우세하다. 따라서 우선 철저한 전과를 올려서 주민의 신뢰감을 회복하고 협력을 얻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하고 생각하였다.
거기서 큰 전과를 얻은 반란군은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토벌 방침을 180도 전환하여 적의 공격을 기다리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반란군은 60밀리 박격포뿐이지만, 아군은 여순반란 때 지급 받은 81밀리 박격포 8문을 가지고 있다.
반군이 공격해 오는 경우 이 81밀리 박격포로 제압하고 숨쉴 틈을 주지 않고 반격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1개 중대는 구례역(구례 남 4킬로) 경비에 파견해야 하였으나 다른 전력을 연대 본부가 위치란 구례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원형 진지에 배치였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봉성산(185미터)에는 이동호 중위의 중대를 배치하고, 81밀리 박격포 8문을 교정에 나란히 하여 주위를 사격할 수 있게 하였다
11월 8일 새벽 04:00, 연대장실 전등을 향하여 반란군의 일제사격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구례역으로 통하는 행길과 서시천을 따른 두 방향에서 각각 1개 대대가량의 병력이 일제히 공격해왔다. 적을 맞아 중대장 송호림 대위의 박격포는 반란군의 불빛이 보이는 방향을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적은 동요하였다.
백 연대장은 각 중대에게 앞의 적을 향하여 돌격 하고 명하고, 옆에 있는 김두열 소위 이하에게 적의 후방으로 돌격하라 하고 명하였다. 김두열 소위는 반란 군의 포로가 되었던 치욕을 씻는 것은 이때라고 생각하였는지 함성을 올리며 돌격하였다.
날이 새면서 화엄사까지 적을 추격하여 많은 적을 사살하고 수백 정의 무기와 포로 20명을 노획하였다. 반란군 도주하면서 두 가마 분의 지폐와 고급 핸드백을 버리고 갔다. 핸드백은 김지회의 아내 조경순의 것이었다. 후에 포로가 된 조경순의 자백에 따르면 그 때 김지회는 등에 부상을 입었고, 그 상처가 후에 사살된 김지회를 식별하는 물증이 되었다.
연대가 전투에 승리하고 반란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자 주민의 태도가 하루 아침에 변하였다. 백인엽 소령은 정부에 청하여 난민에게 쌀을 배급하며, 반란군을 토벌하여 멸해야만 참 평화가 온다. 토벌에 협력하기 바란다 하였다.
그 이후 반란군의 정보을 얻었다. 전투에 진 반란군은 주민에게 버림 받은 것이다.
구례 전투 1주간 후 11월 15일, 백인엽은 중령에 특진하였고, 11월 20일에는 창설하는 제17연대 초대 연대장에 발탁되었다. 이 제17연대는 옹진반도에 배치되어 적을 상대로 싸우게 된다.

○ 낮은 대한민국, 밤은 인민공화국
1948년 11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반란군의 출몰하는 지역이 확대되었다. 이제까지 구례 주변에 한정되었던 관공서의 습격, 방화와 약탈, 살인과 납치 등 습격 지역은 곡성, 남원, 무주, 장수, 거창, 함양, 산청, 진주, 하동 그리고 광양 일대로 확장된 것이다.
주민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한국 치하인지 반란군의 치하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낮은 대한민국이지만 밤은 인민공화국이다” 하고 말한 것은 이 때의 일이었다. 낮은 국군이 토벌과 순찰을 위하여 오기 때문에 태극기를 게양하지만, 밤은 게릴라가 배회하기 때문에 인민공화국 국기를 게양하여 약탈 등의 난을 피하여야만 하였다.
1948년 겨울, 게릴라의 거점은 지리산 일대, 백운산, 웅석봉, 둔철산, 정수산, 감악산, 달궁, 장안산, 덕유산, 천마산, 칠봉, 삼도봉을 잇는 남부 소백산맥 일대에 걸쳐 분산하여 설정되었다. 그리고 김지회는 항상 그 아내를 대동하고 있었다. 주민은 게릴라의 보복이 두려워서 모른다, 알지 못한다 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윽고 겨울이 되자 게릴라의 활동이 뜸해졌다. 모든 수목이 낙엽 지어 백설이 산들을 덮으면 게릴라는 활동하기 어렵게 된다. 발자취가 남아 숨을 수 없기 때문이다. 1949년 정월은 평온하게 지나갔다.
봄이 와서 눈이 녹을때가 되면 게릴라들은 꿈틀,법석거리기 시작 한다. 육군본부는 지리산 토벌부대를 다음과 같이 개편하였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 (남원)
사령관…정일권 준장(전 참모부장)
제3연대 (남원) 제3대대…(한웅진 대위)
제5연대 (부산)의 1개 대대
제9연대 (서울)의 1개 대대
제19연대 (대전)의 1개 대대
제1독립 (유격) 대대   …(김용주 소령)
                (계 5개 대대)

호남지구 전투사령부 (광주) 사령관…제5여단장 원용덕 준장
제20연대 (광주)의 3개 대대
제15연대 (여수)의 1개대대
제3연대 (남원)의 1개 대대
             (계 5개 대대)

즉 이제까지의 작전 지역이 횡적이었던 것을 게릴라의 움직임에 따라 종적으로 변경하고, 거기에 기동타격부대를 증가시켜 정일권 준장을 기용한 것이다. 이른바 1949년 봄의기운이 녹아들기 시작할때 토벌을 행했다.
1949년 3월 1일에 지휘권을 발동한 정일권 준장은 작전참모 공국진 대위, 정보참모 이유성 대위 (전 제12연대 제3대대장), 군수참모 이종민 대위 (1기생, 후에 준장), 인사참모 이극성 대위 (3기생, 후의 준장) 등의 보좌를 받으며 제1차 작전을 개시하였다.
제1차 작전은 남원, 구례, 화개장, 하동, 진주, 산청 등에 분산 배치한 각 대대에게 지역을 할당하여 1주일간에 걸쳐 지리산을 훑는 작전이었다. 우리의 노림수는 추위를 피하여 또는 식량 조달을 위하여 하산하는 반란군을 지리산으로 다시 몰아 넣는 작전이었다.
각 대대는 1주간에 걸쳐 소탕 토벌하며, 각 곳에서 전투를 벌이며 반란군을 산으로 몰았다.
제2차 작전은 3월 11일부터 시작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각 고지마다 병력을 순차로 집중 이동하면서 철저하게 소탕 토벌하였다. 지리산에 더 머물 수 없게 된 반란군은 지리산을 버리고 거창, 안의 지역으로 분산해 갔다.
제3차 작전은 3월 16일부터 개시되어, 토벌대대는 거창, 함양, 하동 등에 토벌 거점을 이동시키면서 반란군을 찾았다.
거창에 거점을 설치한 것은 제3연대 제3대대 (한웅진 대위 (2기생. 후에 소장) 였다. 대대는 매일 산청, 안의, 위천 방면에 중대를 파견하고, 때로는 전력으로 출동하여 반란군을 탐지하였다. 다른 대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각 대대도 한결같이 특기할 만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공국진 작전참모는 그 원인을 이렇게 말하였다.
“지리산 주변은 대개가 가난한 농가이기 때문에 해방 직후의 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 주도)의 전성기에 주민 대부분이 공산주의화 되었다. 계몽운동은 용이하지 않았고 시간이 필요하였다.
반란군의 포착이 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주민들은 게릴라를 자기 집에 숨겨 두면서 모르오, 알지 못하오, 하고 부인하였다. 때문에 아무리 산 속을 탐색해도 반란에 가담자들을 찾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 하는 말과 같이 반란군의 행동이 포착되었다. 1949년 3월 21일, 약 500명의 반군이 지리산에서 덕유산(거창 서북)에 이동 도중, 그 일부가 거창군 북상면(北上面) 황점마을에서 머물었고, 23일에는 목재 반출을 위하여 산에 올라온 트럭 2대를 강탈하였다.

○ 괘관산 전투
3월 24일 06:00 무렵 태극기를 꽂은 트럭2량이 60여 인의 장병을 태우고 황점 북쪽에서 북상지서를 향하여 왔다. 북상지서 주재원은 7인이었다. 그러나 국군이 간 기억이 없는 덕유산에서 국군이 출현한 것과 거동에 이상한 점이 있어서 정차를 명하였다. 트럭은 난사하면서 초고속으로 달려 위천지서 앞에 정거하여, 지서장을 납치하고 지서에 불을 지른 후 도주하였다.
한웅진 대위가 황점을 향하여 급히 추격한 결과 북상지서에서 8킬로가량 들어간 산 속에 고장 난 트럭이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반란군이 약탈한 물품을 달구지에 옮겨 싣고 운반 중이었다. 10여 인을 사살하고 여러 명을 포로로 하여 심문한 결과 “김지회, 홍순석의 일당 500인이 덕유산에 들어가 있다” 하였다. 마침내 김지회, 홍순석의 발자취를 포착하였다. 
김지회, 홍순석의 은신처를 찾은 지리산 지구 전투사령부는 3월 28일 밤에 분산하였던 각 대대와 경찰부대를 산청과 함양에 집결시키고, 20일 밤에 덕유산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30일 새벽에 일제히 포위망을 압축하였으나 반란군은 교전(교전 7시간 후 교묘하게 포위망을 뚫고 지리산을 향하여 탈출하였다.
한편 덕유산 공격 전날 밤, 3월 29일 밤에 반란군이 안의 북쪽에 나타났다는 주민의 신고를 받은 한웅진 대위는 그들을 추적하여 도주 중인 반란군 90여 인을 사살하였다. 반란군은 괘관산에 들어갔다.
연일연야의 토벌로 지칠 대로 지쳤을 때에 공국진 대위가 달려와, “주력은 괘관산을 포위한다. 귀 대대는 즉시 함양에 전진하여 괘관산에서 지리산으로 도주하는 반란군을 포착하라” 하는 사령부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전투사령부는 반란군이 지리산에 옮겨갈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피곤에 지칠 대로 지친 한 대위는 불평을 쏟았다. “왜 우리 대대에만 임무를 주는가? 김지회를 추격하여 지난 14일 동안 불면불휴의 연속 작전으로 심신이 아울러 꼼짝 할 수 없다. 지금 출동은 불가능하다”.
공 대위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이봐! 귀 대대를 내가 미워하여 명령하는 것으로 아는가? 실은 귀 대대가 지리산의 상황과 지형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야”.
공 대위와 한 대위는 일군에서 함께 복무하였고, 같은 육사 2기생이기 때문에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한 대위는 흥분하여 권총을 빼 들고 “쓸데없는 말 하지 마!” 하고 버럭 소리질렀다.
“명령 위반, 항명은 총살이다”.
“좋아, 그보다 먼저 내가 자네를 살해하마. 동기생이기에 참았더니 총살이라고?”
“마음대로 해!”
그러나 잠시 후 흥분을 가라 앉히고 운봉 방면으로 급진하여 국도를 따라 차단막을 구성하였다.
이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이다. 이 말다툼이 김지회를 사살하고 그 아내를 포로로 잡은 원동력이 되었다.
훗날 공국진 장군은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가 전투의 절정이었다. 모두 피곤하였다. 24일에 한웅진이 홍순석 일당의 발자취를 포착한 이래로 사령부도 부대도 불면불휴였다. 이번에 놓치면 이제까지의 수고가 물거품이 된다. 그 때가 게릴라와 끈기 내기가 되었다. 나뭇잎이 낙엽 지면 수색도 포착도 불가능해진다.
“24일부터 시작한 이 단계에서의 작전은 사령부의 이동이 595킬로(일일 평균 46킬로), 가장 기동성이 뛰어난 대대는 785킬로(일일 평균 64킬로. 단, 3분의 1이 차량 행군이며 그 외는 도보가 된다. 그러나 극도로 기장한 그 당시에는 반란군을 찾아 그렇게 먼 거리를 추격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서 추격을 느슨하게 하면 패배한다, 하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괘관산에서 포착하지 못하면 토로아미타불이다 하는 일념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가격한 말이 튀어나왔고, 한웅진도 피곤한 나머지 울컥했다고 생각한다”.
토벌군 주력은 괘관산 외곽지대에 전진하여 4월 4일부터 압축을 시작하였다. 괘관산 북쪽 천전동에 반도 약 100인이 숙영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박격포의 집중 사격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기총으로는 효과가 없는 골짜기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5일, 괘관산을 완전히 포위한 토벌군은 질서 있게 공격하여 반란군 주력을 포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반란군의 부대 행동은 그것으로 종말을 고한 것이다. 공국진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역시 괘관산이 승패를 판가름하는 절정이었다 반란군은 부대 조직을 잃고 뿔뿔이 흩어져 지리산에 들어갔다. 한웅진의 덫에 걸리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그들이 확실히 지리산에 들어간 것을 포착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토벌군은 잠시도 쉴새 없이 다시 지리산을 포위하였다. 목표는 김지회와 홍순석이었다”.

○ 김지회, 홍순석의 최후
한웅진 대대는 본부를 지리산 서북 산자락 입석리. 운봉 동남 8킬로)에 설치하고 일대를 수색하였다. 대대의 정보계 하사관은 김갑순 상사였다. 그는 주민과 협조하는 데 뛰어나, 이제까지도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여 대대가 전과를 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김갑순 상사는 사병 2명을 데리고 지리산 속 산내면 반선리 마을에 잠입하였다. 반선리는 입석리에서 서남 6킬로, 20여 호의 작고 가난한 산속에 있는 집이였으나, 과부가 경영하는 선술집이 있었다. 김 상사는 몰래 선술집에 들어가 여주인에게 화장품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반란군이 왔던 적이 있나?” 하고 물었다. “이따금 온다” 하고 대답하였다. “만일 그들이 오면 술도 밥도 주라. 될 수 있으면 숙박하게 하면 좋겠다. 두둑하게 사례하겠다”. 과부는 그러마 하고 약속하였다. 김 상사는 미남이었다고 한다.
4월 9일 03:00시 무렵 반선리 청년단장이 숨차게 달려와 “지금 30여 명의 반란군이 주막에 와서 술과 담배를 달라고 한다” 하고 급보 하였다.
한웅진 대위는 60여 명을 트럭과 스리-커터에 태우고 6킬로 되는 산길을 급행으로 달려 반선리에 도착하였다. 반란군은 자동차 소리를 듣고 도망쳤다. 그러나 다행히 새벽달이 흐릿하게나마 비쳤기 때문에 자동차 위에서 맹사격을 퍼부었다. 반란군 7명을 포로로 잡고 17명을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포로 중에는 반란군의 문화부장이 있었다. 그는 7구의 시체 중 토끼가죽 옷을 입고 ‘홍순석’의 인감을 가지고 있는 시체가 홍순석 당사자라고 증언하였다. 또한 정치부장과 후방부장의 시체도 있었다. 김지회 부부도 함께였다고 하였으나, 그들 부부의 시체는 없었다. 김지회 부부는 운좋게 도망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반선리 뒤 손 속 오지에 덕동리)라는 산마을이 있다. 덕동리는 만복대 동편 산자락이며 남강의 수원이다. 그 산골에 duk를 포함한 여러 명의 반란군이 들어와 있다는 주민 신고가 있었다.
김갑순 상사는 두 명의 사병과 경찰관 2명을 데리고 달궁에 잠복하여 어려움 없이 부인 한 명을 체포하였다. 그 부인이 김지회의 아내 조경순이었다. 제주도 출신 간호사이며 당시 20세였다.
조경순에게 김지회의 행방을 추궁하였으나, 반선리의 기습으로 헤어지게 되었고, 실은 자기도 김지회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근방을 샅샅이 뒤졌으나 김지회의 행방은 묘연 하였다.
김갑순 상사는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어 반선리 부락민(마을사람)에게 “혹시 까마귀가 모여 있는 것이 없는갚 하고 물었다. 부락민은 ‘정자에 까마귀가 많다고 하였다.
부근 일대를 수색한 결과 현장에서 600미터가량 떨어진 산 속에 썩은 시체가 있었다. 용모로 알아볼 수 없이 썩었고, 평상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신분도 계급도 알 수 없었다.
남원에 수용되어 있는 김지회의 아내 조경순에게 김지회의 신체상 특징을 물은 결과 구례 전투에서 등에 총상을 입었다고 하였다. 그 시체 등에 총상 자국이 있었다. 시체를 남원에 운반하여 조경순에게 대면시킨 결과 그녀는 울면서 김지회가 틀림없다고 증언하였다.
이리하여 반란군 수뇌부는 토멸 되었다. 여순반란(1948.4.3)이 일어난 지 6개월이 지난 때이다. 김지회와 홍순석의 목은 비공개로 높은 지위의 관계 인사에게만 전시되었다.
후일담이지만 반선리 주막집은 누구인가에게 습격을 받고, 주인인 과부는 차마 말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반란군 잔당의 소행으로 추측된다.
게릴라 지역이 된 구역의 일반 주민은 많든 적든 아군이든 적군이든 틈에 끼어 희생을 강제당하였던 바, 김지회 일당이 반 년 동안이나 포착되지 않은 것은 주민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며, 끝내 명운이 다한 것은 주민에게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토벌 후에 정일권 사령관 이하 토벌군 수뇌가 참석한 좌담회 기사(<한국전쟁사>(1) 483-484쪽)에 따르면 지리산에서 덕유산에 걸친 이른바 게릴라 지대는 완전히 게릴라의 온상이었다 한다.
이 지역은 이른바 문명에서 동떨어진 대지의 고도 구역이였다. 산간의 빈농과 화전민 마을은 예대로의 너와집과 토벽이며, 산에 눌려 찌부러질 듯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지구위원회에 의하여 주민의 9할이 적화되었고, 구례면 등에는 5000명을 세는 세모조직이 있었으며, 입으로 하는 선전으로는 계명이 턱도 없었다고 한다.
예컨대 북조선의 인민공화국 국기는 알지만, 한국의 태극기는 알지 못하고, 이승만 대통령의 이름을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때문에 경찰도 들어갈 수 없었고, 일종의 치외법권적인 지역이 되어 있었다.
정일원 사령관에 따르면, “정부와 국군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지고 게릴라가 소탕 토벌됨에 따라서 그 사상의 공허함과 게릴라가 원인이 화의 참상에 정나미가 떨어져 귀순자가 점차 증가하였다. 뜨거워지는 것도 빠르지만 차가워지는 것도 빠르다. 4월 중순까지 약 40퍼센트의 반도가 귀순하고, 민간인 2-3000명이 자수하였다”는 것이다.
제3연대 제3대대는 반군 본부를 섬멸한 공에 의하여 한웅진 대위 이하 전 장병이 일계급 특별 진급의 영예가 주어졌다. 특히 포착의 실마리를 만든 김갑순 상사에게는 100만 원의 상금과 훈장이 수여되었다.

○ 추기(가을)토벌
1949년 4월 18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정일권 준장은 그 임무를 완수하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에 복귀하고, 지구사령관은 제3연대(남원)장 함준호 대령이 인계하여 잔당의 무리를 쫒아가서 제거함에 힘쓰게 되었다. 김지회, 홍순석이 제거되었는데도 반군의 잔당은 북조선의 지원과 지도를 받아 계속하여 준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뭇잎이 우거진 여름철의 게릴라 토벌은 어려웠다. 게릴라는 습격, 교통, 통신선의 파괴 등 자취를 감추지 않고 도발을 계속하였다.
거기서 푸른 나뭇잎 그늘에 낙엽 진 1949년 가을, 9월 28일에 김백일 대령이 전투사령관에 기용되고 철저하게 모조리 제거하게 되었다. 이른바 1949년의 가을의 토벌이었다.
이 토벌에서 공비는 거의 소탕 토벌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편성된 대열을 짜고 행동하는 게릴라는 모습을 감추었고, 4-5인조 가량의 강도로 변화하였다.
이에 1950년 1월 15일,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를 해체하고 2월 5일에는 호남 일대에 선포한 계엄령을 해제하였다. 여순반란이 일어난 지 거의 1년 3개월 후의 일이다. 주민은 이제 밤에도 통행할 수 있게 되었고, 집회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게릴라에게 괴롭힘을 받거나 토벌군에게 협력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는 1960년 6월 하순, 호남과 경남 일대에 남아 있던 게릴라는 이현상을 두목으로 하는 약 200명으로 추정 되었다.

○ 총괄
국군창단과 거의 동시에 한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세상을 몹시 놀라게 하고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빠지게 한 여수, 순천 사건은 약 반 년 후에 괴수(魁首) 김지회, 홍순석 드으이 사살에 의하여 일단락을 고하였다. 그 여파는 그 후 수년 계속되었던 바 그것은 북조선에서의 지원과 원조에 따른 경우가 많았다.
반란의 동기에 관하여는 1954년 3월에 발간된 육군본부 군사과 편찬의 <공비토벌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좌익 음모사건과 관련하여 체포되었기 때문에 지 상사 등은 언젠가는 자기들도 숙청 대상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반란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디” (14-14쪽).
즉, 지 상사 등의 폭발설이며 단독행위설이다. 그러나 1967년 간행 <한국전쟁사> (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결론적으로는, 반란의 수모자는 인사계 하사관 지창수 상상며, 김지회와 홍순석은 반란 후의 지휘관이었다.
“그들은 일찍부터 군내에서 결연히 일어나 계획하였고, 제주도 출동의 기회를 이용하여 반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반란은 남로당 특별공작 책임자이며 군부 적화공작의 최고 책임자이며, 한국 전국에 걸친 폭동과 군부 반란의 지도 총책임자였던 이재복의 지령에 따른 것임은 명백하다.
“이재복은 평양신학교 출신이며 1949년 1월 19일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결과론이지만 여순반란이 이재복의 전국적 반란과 폭동계획의 일환이었다고 단안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것은 다음 표(表)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순반란 후에 때때로 일어난 반란과 인민유격대 등의 침투는 시간적으로 맥락이 닿지 않고, 또한 낱낱의 반란 등도 소규모이며, 더구나 숙청을 두려워한 자포자기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여순반란 발발……1948년 10월 19일.
여수 탈회(奪回)……10월 27일.
대구 제1차 반란……11월 2일.
구례 전투>게릴라화……11월 8일.
북조선 유격대 1차 침투 (180명)……11월 14일.
대구 제2차 반란……12월 6일.
대구 제3차 반란 (도망)……1949년 1월 30일.
김지회, 홍순석 등 사살……4월 9일
개성 송악산 5.4전투……5월 4일.
표, 강대대의 월북……5월 5일.
북조선 유격대 제2차 침투 (400명)……6월 1일.

다음에 언급하게 될 숙청에서 좌익 수괴로 숙청된 김종석, 조병건과의 관련도 미상이며, 이 기간에 좌익이 지도하는 파업도 대폭동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이상하다.
때문에 이재복이 전국적인 반란의 일환으로서 지창수 상사에게 봉기할 것을 지령했다 하면, 실로 서툰 계획이었다.
그러나 여수의 반란 발발에 즈음하여 민간인 수십 명이 대내에 들어와 무장하였다는 것, 여수여자중학교의 송욱 교장이 이 반란에 참가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이재복의 지령설을 뒷받침하며, 지 상사 등의 단독폭발설을 부정한다. 그러나 연쇄반응적으로 발생한 다른 관련사건은 이재복 지령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여순반란의 동기는 아직 진상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묻힐지 모른다.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폭발은 한국전쟁에 대한 예고며 각성을 주었다는 점에서 한국에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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