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개정 2007.1.24>
1.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7년 제주 4.3사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일제의 패망 이후 반란을 일으킨 남조선로동당의 인민유격대와 국군·경찰이 충돌하였고, 그 이후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극우 무장 단체의 백색 테러를, 북한의 남침 위협을 이유로 이승만 정부와 미 군정이 묵인하였다.
토벌 기간 동안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마을을 장악하고, 밤에는 인민 유격대와 좌익 세력들이 점령하기를 반복했다.
밤에는 인민 유격대나 좌익들이 나타나서 마을 주민들이 괴뢰군과 괴뢰 경찰에 붙어먹었다며 인민재판을 열어서 죽이고,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나타나 의심스러운 징후가 보인다면서 민간인을 처형했다.
제주도는 이미 일제에게 가혹한 수탈을 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결7호 작전이 시행되어 섬 전체가 초토화될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었다.
1945년 이후부터 7.27 정전협정 이전까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제주도는 사상 최악의 지속적인근에 시달렸다.
그야말로 제주도 역사상 최악의 상황이었다고 봐도 무방했을 때,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다.
그 날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무장대를 조직, 경찰서 기습을 감행하는 등 반란을 일으켰고, 이 일은 훗날 제주 4·3 사건이라고 불린다.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여순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일단 반란을 일으킨 남로당계 공산주의자들과 반란 진압을 명목 삼아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한 서북청년단 등 극우 폭력단체가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이라 볼 수 있으며, 정치극단주의에 휩싸여 공권력의 대민 범죄를 방조, 묵인, 조장한 이승만 정부, 제1공화국의 책임 역시 결코 가볍지 않다.
미군정 역시 해방정국의 혼란상이 있었다지만 제주도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진영 논리에 근거한 편파적인 판단을 내려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각 정치 집단들이 대부분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 조장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책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2. 발단
2.1. 1947년 3.1 발포 사건과 이후
3.1 대시위
<<1947년 미군정은 제주도에서의 3·1절 기념식이 좌익의 주도로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 촉구와 조직의 정비를 목표로 열리게 됐음을 알게 되었다.
1947년 2월 28일 미군정은 집회만 허가하고 행렬은 허가치 않았는데, 좌익이 행렬까지 허가하라고 하자 부득이 집회까지 허가취소 하였다. 그리고 집회장소도 제주서비행장으로 하라고 하였다.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 좌익이 동원한 남로당,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주주의청년동맹, 부녀동맹, 인민위원회에서 동원한 17,000명의 군중과 기타군중 8,000명 등 총 3만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경찰은 제주 경찰 330명과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 100명 등 430명으로 주변 경비 활동을 하였다.
3.1절 기념식을 마친 3만여 군중은 가두 시위에 들어갔는데, 이때에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작은 소란이 발생하였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3만여 군중들이 몰려들어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대해 미군정 당국은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짓고 3.1절 기념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가 열려 25,000~30,000여 명의 주민이 모였다.
이날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던 관덕정을 지나가고, 200명 정도의 군중이 시위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도중 사건이 하나 터졌다.
오후 2시 45분경, 기마경관 소속의 임영관(任永官) 경위가 시위를 막기 위해 군중들을 헤치다가 제북교에서 관덕정으로 들어서는 길 모퉁이를 돌려 할 때, 고빗길에서 서성대던 어린이가 타던 말의 발굽에 채였는데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버린 것이다.
분노한 군중들이 경찰을 비난하며 몰려들었고, 기마경찰은 황급히 도망쳤다.
군중들은 도망가는 기마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다.
돌팔매질과 더불어 거리가 난장판이 되기 시작하자, 경찰서에 있던 경찰들은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 알고 응원경찰들과 함께 관덕정 주변의 사람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 일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사망한 6명의 사망자의 신원은 다음과 같다.(거주지는 사건 당시 지명으로 한다.)
송덕윤 나이:49세, 직업:농부, 거주지:제주읍 도남리(현 제주시 이도2동)
김태진 나이:38세, 직업:농부, 거주지:제주읍 도남리
양무봉 나이:49세, 직업:농부, 거주지:제주읍 오라3리(현 제주시 오라동)
오문수 나이:34세, 직업:농부, 거주지:제주읍 아라리(현 제주시 아라동)
허두용 나이:15세, 직업:학생, 거주지:제주읍 오라1리(현 제주시 오라동)
- 사망자 중 최연소자. 사망 당시 시위대의 집결 장소였던 제주북국민학교에 5학년으로 재학 중이었다.
박재옥 나이:21세, 거주지:제주읍 도두리(현 제주시 도두동) - 사망자 중 유일한 여성. 사망 당시 젖먹이를 안고 있었다.
경찰에게 돌을 던진 건 잘못이긴 하지만, 이에 대응한 경찰의 발포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 날 시위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고,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망자 6명 중 5명이 등 뒤에서 총을 맞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사망자들이 시위와 관련이 없으며, 경찰의 발포가 과잉 대응이었음을 보여준다.
미군 정보보고서도 이들의 발포를 비이성적이라 규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경찰은 관덕정 앞에서의 발포가 치안을 위한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3월 1일의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려 했다는 미확인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흘렸다.
3월 1일 저녁부터 제주도에 통행금지령이 선포되었고, 다시 수백 명의 응원경찰이 육지로부터 파견됐다. 여기에 3월 1일의 시위와 관련하여 여러 명이 경찰에 끌려가자, 제주도의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2.2. 총파업에서 4.3 전야까지
한편 이 발포사건으로 격앙된 민심은, 남조선로동당에게는 좋은 기회로 다가왔다.
남조선로동당은 제주도 내의 좌파 세력을 이끌면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다.
대다수의 도민들은 여기에 호응했다.
거기에 3.1 발포사건의 진상을 아는 우익 세력들도 우려를 나타내며, 점차 경찰을 향해 광범위한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3월 10일부터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회사, 학교 등에서 공무원, 심지어는 미 군정청 통역단까지 파업에 참여하였다.
노동자, 학생들은 일제히 파업했고, 이는 13일까지 제주도 전역으로 퍼졌다.
파업 참여자들은 3.1 발포사건에 대한 사과와, 발포자 및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주장했다. 심지어 제주도 출신의 경찰들도 파업에 참여하여 직장을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총파업은 이후의 이념적인 무장봉기나 국가권력 주도의 학살이 연상되기 어려운, 민중항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총파업에 참여한 직장과 사람들은 166개 기관, 41,211명이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인 미군정은 철저히 이런 요구 조건을 무시해버렸다.
미군 보고서는 총파업의 원인이 3.1 발포사건에 대한 분노와 남조선로동당의 선동에 있다고 봤지만, 제주도는 인구의 70%가 좌파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파분자의 거점이라며, 제주도민 모두를 좌파로 몰아갔다.
미군정은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저항세력을 모두 좌파로 매도하고 탄압해 총파업을 와해 시키려고만 했다.
곧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되고, 그 자리는 육지에서 온 서북청년회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을 비롯하여 응원경찰들을 제주도로 파견을 보내, 조병옥의 지휘 하에 경찰은 파업 본부를 습격하고 파업 참여자들을 잡아가며,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탄압 때문에 3월 말부터는 총파업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탄압은 계속되었다.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한동안 이어졌고, 검거된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47년 3.1 발포사건 이후부터 1948년 4월 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들을 수용하기에 제주도의 감옥은 너무 좁았고, 때문에 미군 감찰반의 보고에 따르면 약 3평 정도의 방에 35명이 갇혀 있을 지경이었다.
수용자들의 상태가 최악이었던 것처럼, 감옥에 갇히지 않은 사람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는 제주도민들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유해진 제주도지사의 부임이다.
1947년도에 도지사로 부임한 유해진 지사는 미군정에게도 극우파로 규정된 인물로서, 도민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정치적 반대파만 탄압하고자 하였다.
유 지사는 "일반 대중을 극좌 단체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극우 단체의 힘을 빌렸다"고 대놓고 발언하며 탄압 정책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미군정 관계자들조차 불만을 토로할 지경이었다.
군정장관 베로스 중령은 "그(유해진)는 자신의 편과 가까운 단체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단체의 회합도 금지했다. 이와 같은 유 지사의 행보는 본인(군정장관)은 물론 도민들을 당혹케 했다. 제주도 우익테러 행위는 증가했고, 지사는 이런 행위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사가 부임한 이래 공직에서 해임되고 있다"며 제주도에 조성된 탄압적 상황을 꼬집었다.
제주도를 감찰하던 미군정 넬슨 중령은 "유 지사가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 이념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왔고... 경찰은 수없이 테러 활동을 자행했다" 며 유해진 지사가 문제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미군정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는데, 탄압 정책에 동원되어 입도한 서북청년회원들은 극우테러 활동은 물론, 태극기와 이승만 사진을 강매하거나, 주민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여러 만행을 저질렀다.
서북청년단의 이같은 폭력행위는 사상적 요인도 있었지만 경제적 요인과도 결부되었는데, 그들에게는 정규 봉급이 없었기 때문에 자금 모금을 위해 테러에 의존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같은 우익 진영과도 갈등하였는데, 서청 세력은 4.3 사건 진행과정에서, 5.10 총선거에 소극적이었다는 이유로 족청 단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집단으로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족청 단원 집단 사살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빨갱이(좌파)라는 지목은 순전히 탄압 주체의 자의적 독단에 의한 것이었다.
실제로 1948년 1월 CIC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의 지식인층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으며, 좌익 인사들도 이렇다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고, 좌익 인사로 불리는 이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익을 위시한 이들의 빨갱이 공포 선동이 테러의 일차적 요인이었다.
애초에 제주도 좌익의 전통적인 관심사는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가난의 해결이었다.
이와 같은 극단적 탄압 국면이 심화되면서 점차 제주도민과 경찰 사이의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찰에 끌려간 20대 젊은이 3명이 잇달아 사망한 것이다.
경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망한 이들은 모두 고문으로 죽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이 때문에 1948년 남한을 방문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회의에서 프랑스 대표가 고문치사 사건을 언급하며 질문을 했으며, 국제적인 관심이 있던 덕분인지 관련 경찰들은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형벌을 내렸다고 죽은 사람이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날을 기점으로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경찰의 폭력행위는 3.1절 발포사건 이후 경찰력이 육지발 응원경찰 위주로 교체되면서 본격화 되었는데, 응원경찰의 취조는 매질부터 시작했다는 증언이 속출하는 등, 경찰의 강압에 대한 도민사회의 불만은 고조되어갔다.
육지에서 온 토벌대는 제주어를 알아듣지 못해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일제는 앞서 1945년 패망했지만 아직 3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표준 일본어는 다들 학교에서 배워놓은 상태였으므로 이런 게 가능했는데, 이들이 당시 일본어로 소통한 것은 제주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이민족이라는 인식을 가진 것이고, 이러한 인식이 대량학살의 촉발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3. 전개
(중략)
4. 결과
제주 4.3 사건 민간인 피해자 조사 결과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 사망자 중 10955명(78.1%)가 토벌대에 의해, 1764명(12.6%)가 무장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 대부분의 사망자는 대토벌작전이 벌어졌던 1948년 말부터 1949년 초까지의 기간에 발생했다.
4.3 피해자 통계
이 사건으로 인한 총 희생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최대 제주도민 8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추정치는 3만 명에서 최대 8만 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일가족 전체가 몰살 당하거나 학살 도중 육지로 도피, 살아남았어도 트라우마로 인해 신고조차 하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현재까지 유해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에따라 희생자 수는 아직까지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유해 발굴이 되었어도, 신고한 사람 대부분이 70~80대를 넘긴 고령이거나 이미 사망한 경우도 허다해서, 유해가 발굴되었어도 신원이 파악되지 못해 피해자로 등록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친척 몇 다리만 건너면 4.3사건 희생자라는 뜻인데, 실제로 오늘날도 제주도에 가 보면 촌락별로 제사가 거의 비슷한 날 치러지는 걸 보면, 당시에 제주도민들이 얼마나 학살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수적으로만 따져도 인구가 적은 도서 지역에서 만 단위 이상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제주도에 인구학적인 영향(최대 1/8 추산 학살을 피한 주민의 일본으로 이주 등)을 줄 정도. 무엇보다도 4.3은 4월 3일 전후가 중심이 된 사건이 아니었고, 4.3이란 명명에는 이 헬게이트의 원인을 무장대의 봉기에 귀인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고, 실제 사건의 단초는 위에서도 서술하였듯이 3.1절 발포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4.3 사건에서 가장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할 부분인 민간인 학살은 1948년 11월부터 본격 실시된 초토화작전 때문이었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일부 내용 중 주인공이 어느 하루에 동네 집집마다 다같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아해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 소설의 소재가 된 북촌리 학살은 1949년 1월에 발생하였다.
즉 토벌대가 전도를 돌아다니며 순차적으로 학살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각 촌락별로 학살이 발생한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지, 제주도 전체가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다.
브루스 커밍스는 제주 평화포럼에서 1949년 제주도민 사망자가 6만명 발생한 것으로 당시 임관호 제주도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했다는 전문가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일본으로 피난을 떠난 제주도민들이 상당수 있었다.
뭍으로 건너온 피난민들의 대부분은 영도 쪽에 정착해서 살았다.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부산의 중심가가 아닌 영도구 남항동에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며, 영도에는 여전히 많은 제주 출신 해녀가 활동하고 있다.
덤으로 제주도민회관도 영도구에 있다. 공교롭게도 영도도 부산 안의 섬이다.
일본으로의 피난은 밀항으로 일단 자료로 확인된 일본행 밀항자는 281명이다.
자료로 확인된 숫자만 저 정도고, 여러 가지 밀항 루트로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은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참혹한 살육에는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무거운 책임이 있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봉기 자체가 이전부터 이어진 당국의 탄압 조치로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무리 미국 입장에서 제주도는 냉전 상황에서 군사 요충지 및 임시 거점으로 쓰일, 공산화되면 안되는 곳으로 보일 수도 있더라도, 미군정은 결코 그 요충지와 그곳에 사는 주민들을 좋게 대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들을 탄압하던 일제에 협력했던 기존 관료들을 그대로 쓰고, 복시환을 비롯한 밀항선을 통해 자원을 자신들의 주머니으로 빼돌리는 모리(謀利)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의 항의에, 경찰이 총부리를 겨누어 일부 주민을 진짜로 죽이자,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좌파 탄압이라는 이념하에 폭력의 소용돌이를 더 크게 키웠다.
결정적으로 경비대가 이 폭력의 소용돌이를 수습하려 무장대와 맺은 4.28 협정이 정체불명의 세력의 훼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군정은 김익렬의 진상 보고를 무시하였다.
실제로 피해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초토화작전으로 생긴 것이었다.
또한 제주도민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이북 출신 극우단체 등을 토벌작전에 끌어들이면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해당하도록 방관한 것도 결정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 점이다.
게다가 정부는 제주 4.3의 영향으로 발발한 여순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자행 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제주도에서의 학살을 계속해서 진행하였다.
한편 남로당 제주도당은 제주 도민을 선동하여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간 주체이다.
삼일절 발포사건 이후 경찰의 도민 탄압과 극우단체들의 폭력행위를 핑계삼아 자신들이 권력을 쟁취하고자 선동과 무장봉기를 통해 대안 없이 일을 크게 벌리면서도, 이후 상황이 악화되자 '등산(입산)' 하면 혁명적, 부등산은 비겁 행위'라며 제주도민들에게 입산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들과 북한이 연결되면서 제주도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해진 반면, 남로당 지도부 6인(김달삼, 강규찬, 안세훈, 고진희, 문등용, 이정숙)은 도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구실로 떠나버렸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무장대 역시 조금이라도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상대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남로당의 행위는 내란에 해당되며, 이념적 색채가 옅었던 도민들의 평화적인 권리요구 시위를 미군정 전복을 겨냥한 무장봉기로 뒤바꿔놓으면서 결국 대규모 유혈사태의 빌미를 제공한 셈이니 비판받아 마땅하다.
결론적으로 당시 기회를 이용한 남로당의 빌미 제공, 그 빌미를 이용해 섬 인구의 10%를 도륙한 미군정과 우익 단체의 잔혹행위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5. 인물
※ 학살 및 폭력행위에 관여한 경우 ★ 표시
5.1. 남로당 제주도당/인민유격대
김달삼 ★
이덕구 ★
김의봉 ★
안세훈
강규찬
5.2. 군경토벌대
김상겸: 육군 대령. 러시아 제국군 및 폴란드군 출신으로, 1947년 임관하여 초대 5여단(현 5사단) 여단장으로 복무했다. 제주도 경비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이었다. 부임 8일차에 여순반란 사건이 벌어지자 그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고, 그 후임으로 부사령관이었던 송요찬 9연대장이 사령관 직에 대신 임명되었다. 경비사령관 직책을 수행한 기간이 고작 8일뿐이기에, 그가 학살에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불명확하다.
송요찬 ★
함병선 ★
유해진 ★: 서북청년단 출신으로, 제주도지사로 부임해 학살에 깊이 관여했다.
조병옥 ★
탁성록 ★
김종원 ★
김창룡 ★
최덕신 ★
김익렬: 당시 9연대장. 경찰의 무분별한 진압에 회의를 느끼고, 김달삼과 직접 담판을 지어 동족상잔 상황을 멈추고 귀순 상황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학살에 적극 가담한 일부 경찰들과,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같은 우익 단체들의 귀순 방해 공작(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유재흥: 한라산으로 도주한 제주도민을 "피난민" 으로 규정, 이들이 산에서 안전하게 내려와 귀가할 수 있도록 하는 선무공작, 유화책을 펼쳤다. 이 유화책 덕분에 무사히 귀가한 도민의 수는 제주도 전체 인구의 20%(약 20,000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문형순: 당시 성산포경찰서, 모슬포 경찰서장을 역임. 예비 검속으로 체포된 사람들에 대한 총살을 거부하고 모두 석방했다. 이때 일명 '자수사건'도 벌어졌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군경이 주민들에게 '자수'를 강요해놓고 정작 자수한 주민들을 '적색분자 혐의가 있다'며 학살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자수를 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라는 생각에 제대로 자수하거나 군경에게 협조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군경에게 협조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하는 일을 하던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이 문형순에게 '자수하는 주민들은 죄가 없으니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문형순은 이를 받아들였다. 주민들이 자수하러 경찰서에 오자,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주민들을 처벌할(= 학살할) 준비를 하였으나, 문형순은 이들을 내쫒고, 이후 주민들의 자술서를 읽고는 '시시하다. 아무런 내용도 없다'며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노력으로 그가 관할하던 지역은 제주도에서 가장 적은 8명의 사상자만이 발생했다. 하지만 이때 미운 털이 박혔는지, 1953년에 경찰에서 퇴직한 뒤 쌀 배급소, 극장 직원 등의 일을 하다가, 1966년 병사했다. 문형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나온 제주 지역언론 기사 이를 소재로 한 역사 만화 상편/하편
김두찬 ★: 제5대 해병대사령관. 4.3사건 당시 정보참모 신분(당시 중령)으로 위의 문형순에게 총살 지시 공문을 발송하는 등 당시 자행된 예비검속 학살을 주도한 실질적인 명령자이다.
6. 사건 이후
6.1. 관련자의 이후 동향
4.3과 관련된 사람들 대부분은 4.19혁명을 기점으로 많이 축출당하거나 사망했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좌파 측 사건의 주동자인 김달삼은, 협상이 결렬되자 북한으로 도망갔다가, 6.25 전쟁 때 무장공비 지휘관으로 강원도 쪽을 헤집다 정선군에서 처형당해 죽었다.
김달삼이 북한으로 향한 후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자리를 넘겨 받은 이덕구는,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집중사격을 받고 사살됐다.
유격대가 무너져가고 도민들의 희생이 누적되는 가운데 투쟁을 중단하고 대피 생활을 지시했던 유격대 사령관 송원병, 조직부책 백창원, 군사부책 고승옥은, 이에 반발한 대원들 손에 죽었다.
우익 측 인물 중 강경 진압을 지시한 조병옥은 4.19 혁명 전 병으로 사망, 탁성록은 언제 죽었는지 모르나, 학살을 저지른 데다가 마약쟁이라 오래 못 살았을 것이고, 김창룡은 이승만 정권 밑에서 충실하게 개 역할을 하다가 1958년에 프래깅당하고, 김종원 역시 4.19 혁명 이후 병으로 사망한다.
미군정 치하에서 제주지사를 역임하며 서북청년단을 제주도 내 공직에 앉혀 불씨를 만든 유해진은, 인민군에게 붙잡혀 전주형무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최덕신, 송요찬 정도가 예외적인 경우로 최덕신은 박정희 정부 때까지 잘 있다가 중간에 내쳐지고 1986년에 월북하여 1989년까지 살다가 죽었으며 송요찬은 정군운동으로 강제 예편되기는 했지만 5.16 군사반란 이후 국방장관, 외무장관을 역임하였고 인천제철 사장을 지냈으며 죽기 몇달 전인~ 1980년에는 국정자문위윈회 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이렇게 4.3 관련자들은 최덕신을 제외하곤 이승만 정권 중 사망하거나,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쫒겨났지만, 그중 아무도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미 죽은 사람은 처벌할 수 없었고, 반공에 의해 4.3 사건이 부정되면서, 그나마 살아있는 사람 마저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끝내 처벌받은 무장대 측 인물 역시, 민간인 학살이 이유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이유에서 처벌 받았을 뿐이었다. 한편 학살을 방조하고 묵인한 미군정 역시 사죄나 반성이 없이 본국으로 복귀했다.
6.2. 피해자들의 후유증
4.3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를 들어보면, 이념과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
총살은 기본으로, 무장대는 자신들의 "혁명"에 비협조적인 사람이나 경찰과 군인의 가족들을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고, 군경은 연좌제를 적용한다며 친인척이나 면식이 있는 사람들을 공개처형 했으며,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육지 출신 군경이 직접 죽이지 않고 제주 사람들으로 구성된 민보단을 이용해 사람들을 한라산에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였으며,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피신한 사람들을 '사냥'하였고, 이들이 추위에 못 버텨 하산해 투항하자(일명 '귀순자'들) 격리 수용하다가 한국전쟁의 발발로 예비검속이라는 이름 하에 이들을 학살하는 일도 있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을 모아두고 돌팔매질을 하게 린치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비학동산이라는 곳에서는 임산부를 나체로 팽나무에 매달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들의 잔인함에 대한 증언 중에는, 당시 폐허가 된 마을에서는 땅을 조금만 파도 시체가 마치 젓갈(멸치젓. 제주 말로 '멜젯') 담근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는 증언, 정방폭포나 천지연 폭포 등 제주 폭포 상당수는 '민간인'을 과녁으로 쓰는 서청이나 군대의 '사격장'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심지어 일본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영아 살해' 마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수습하고 진압하려 한 14연대는, 남로당 성향을 지닌 부대원 일부에 의해 제주도 파견을 거부하고 경찰과 행정 기관들을 상대로 보복성의 성격을 가진 여순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이 모든 학살은 1940년대, 1950년대의 섬에서 벌어졌다.
지금에서야 항해, 비행 기술이 발달해 더이상 섬도 단절된 기분이 들지 않고 마치 한반도와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만,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제주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배가 몇 척 없을 정도로, 제주도는 거의 단절된 섬 수준이었다.
그 시대에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몇 사람만 거치면 4촌 아래 혈족일 수준으로 외부 사람의 유입이 적을 텐데, 그곳에서 연좌제를 적용하여 잔인한 학살을 한 것이다.
4.3 사건 기간 동안 가족과 지인 등 가까운 주변인들도 쉽게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계속 반복되자, 마을에 남아있으면 누구든 빨갱이로 몰려서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과 억울함에 휩싸여서,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걸 증명함과 동시에 민간에서 억울한 피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 많은 제주도 청소년들이 일찌감치 국군에 자원 입대했는데,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군대가 해병대였기 때문에 자연히 해병대로 입대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 제주도 청년들은 한국전쟁 동안 거제도 탈환작전,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여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의 안타까운 장면이다.
비슷한 예로, 2차 대전 당시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유럽전선에서 싸운 것도, "우린 쪽발이가 아니라 너희들과 같은 미국인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미국인들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였다. 같은 이유로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에서 코사크와 유태인들이 스탈린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에 입대하여 용맹히 싸웠고, 현대 러시아의 체첸인들도 보스토크 대대 등에 입대하여 싸우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4.3 사건기간의 후반기 때 당시 제주지역 계엄군을 맡고 있던 해병대도 소규모로 나마 양민학살에 가담했었다는 것이다.
당시는 일반 주민들이 정보도 얻기 힘들고 워낙 정신 없던 아수라장일 때라서 제주도민을 학살한게 정확히 어느 부대/조직들인지 일일이 알려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해병대라는 부대에 대해 특별히 반감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전의 토벌대가 이미 죽일만한 사람들은 다 죽였기 때문에 해병대가 계엄임무를 맡은 시점에서는 이전과 같이 마구잡이로 죽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 후 제주도에서 해병대 입대자가 많았고, 무엇보다 제주도내 예비군 훈련을 해병대에서 담당해 왔기 때문에, 현재도 제주도내에서의 해병대에 대해 특별한 반감 정서가 있는건 아니다.
사실 현재의 제주도민들도 구체적으로 어느 부대가 학살을 저질렀는지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예를 들어 경찰이 그랬다는 건 많이들 안다고 해서 오늘날의 경찰을 싫어할 리가 없는 것처럼, 해병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해병대도 양민 학살에 참여했다는 것은 해병대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해병대측은 제주도 계엄임무 수행시절을 미화해왔고, 2019년에는 예비검속 학살에 책임이 큰 당시 정보참모 김두찬 의 이름을 따 김두찬관이라는 건물을 교육훈련단에 개관하여 흑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행히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4.3 사건 후기에서 정부는 계엄령을 폐지하고 산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에게 귀순을 권유하였는데, 6.25 전쟁 중 예비 검속으로 이때 귀순한 사람들 다수가 학살당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송악산 기슭의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일어난 학살 등이 있다.
현재 그 희생자들의 무덤이 백조일손지묘란 이름으로 사계리에 조성되어 있다.
게다가 귀순한 사람들 말고도 무고한 사람들 다수가 모함이나 잘못된 정보에 의해 희생되었다.
마을 유지들한테 밉보였던 이들, 아니면 그 사람들의 일가친척 등이 학살 당한 경우가 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 중 가족이 사건에 연루되어 가족에게 전과 기록이 남은 사람은 민주화 이전까지 만 해도 연좌제를 적용받아 공무원, ROTC나 부사관, 교사 등 공직에 진출하거나, 사관학교 등 각종 입학시험과 취직, 승진에 불이익을 받았고, 심지어 해외로 출국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는 본인이 아무리 반공주의자라고 해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올가미였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지대하여, 제주도민의 보통 제주 밖을 일컫는 육지(한반도 측) 사람들에 대한 인식마저 극도로 악화되어, 1990년대까지(!) 육지에서 제주로 시집오거나 장가온 사람들은 괜히 그런 이미지를 덧씌워받아 고생한 일이 많았다.
21세기인 지금도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과 대화하다 그쪽 화제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시며, 심하면 아예 대화를 끊으실 정도이다.
바로 눈 앞에서 가족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걸 본 입장에서는 절대로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무덤덤하게 꺼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제주도에서 이 슬픈 역사 때문에 육지사람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육지 측에서는 제주도 출신을 공산주의자의 자손 취급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6.3. 문화적, 종교적 영향
한편 제주어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다.
사건 당시 제주어를 쓰는 사람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게 제주인인 척을 안 하려고 억지로 제주어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고, 사건 이후에도 (현재는 사라졌지만) 제주도에서 제주어는 훈육의 대상이었다.
수업 중 제주어를 사용한 교사는 장학관에게 지적을 받았고, 제주어를 사용하는 학생은 수업 중에는 반드시 표준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는 사례도 있었다.
게다가 6.25 전쟁 이후 육지 학생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투리는 촌스럽다'라는 인식까지 퍼져, 현재 언어 사용인구가 약 5,000~10,000명까지 줄어들었으며, 이는 현 제주도 인구의 1/60수준이다.
그래서 현재 유네스코에 의해 소멸 위기의 언어 가운데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critically endangered language)'에 등록될 정도로 소멸 위기 상태이다.
다행히 현재 제주어는 보존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이자 언어로 자리 잡았으며, 제주특별자치도 교육청에선 거주민들에게, 특히 학생들에게 제주어를 배우고 사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일례로 제주의 초등학교들에서는 '제주어 연극 대회'가 열린다.
실제 제주어 대본을 가지고 연극을 한다.
또한 이 사건은 제주도에서 기독교 전체에 대한 인기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미 신축민란을 계기로 천주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상태였다.
여기에 더해 이 4.3 사건 당시 학살을 주도한 서북청년회는 보수 개신교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고, 이는 당연히 개신교에 대한 반감으로도 이어졌다.
이 때문에 21세기 현대에도 제주도 기독교 신자의 비율은 개신교와 가톨릭을 통틀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그리고 개신교의 비중이 가톨릭보다도 더 낮다.
6.4. 정치적 영향
4.3 사건은 제주 지역의 정치 성향이 '육지'에 있는 당과 상관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자유당과 민주당 모두 우익정당으로서 4.3 사건에 관여한 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한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으로 인해 축출되고, 조병옥이 몸담궜던 민주당이 세운 제2공화국 정권도 5.16 군사정변으로 축출되어 어느 당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게 되었기에, 제주도의 선거 양상은 당보다는 지연에 기반한 인물을 중시하고, (일명 제주도 에서 가장 지지율이 높은 당, '궨당'.) 제주도 출신 중 중앙 정계에 영향력 있는 인물을 배출하고 싶어하게 되었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제주도는 박정희의 득표율이 가장 높았던 지역이었다.
민주당의 후신이었던 민정당 윤보선이 민주공화당 박정희를 상대로 남로당 전력을 들어 매카시즘 공격을 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4.3 사건의 악몽이 남아있는 제주도 사람들이 70%에 가까운 투표를 던져준 것. 그래서 한동안 제주도는 대선과 총선 모두 민주공화당이 승리하였다.
현재는 전체적으로는 4.3 사건의 진상규명을 도와준 적이 많은 민주당계 정당의 성적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 계열 성향의 무소속 후보(우근민)가 당선되었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과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모든 선거구를 싹쓸이해갔으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3개 선거구에서 모두 당선되었다.
사실 제주도는 고향을 떠나 육지로 가는 사람들도 있고, 육지에서 이주하면서 4.3 사건과 연관이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애초에 제주도로 이주 하는 사람들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젊은 세대가 많다.
문재인 대통령 또한 4.3 사건 추모식에 직접 참석해 진상규명과 사과를 약속하는 등 민주당 정권이 4.3 사건을 챙기는 것이 계속되면서 제주도의 성향도 차츰 민주당계 정당에 기울고 있다.
20대 총선에 이어 2020년 21대 총선까지 민주당계 정당이 국회의원을 독차지한 것. 그렇다고 보수정당의 성적이 나쁜 것도 아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와 원희룡이 각각 승리하였다.
새누리당 후보들이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4.3 사건, 지연 등이었는데, 박 후보는 4.3 해결과 국가추도일 지정을 공약했으며, 원 후보의 경우는 본인이 고향인 제주도에서 먼치킨 급의 좋은 이미지(학력고사 및 사법시험 수석, 보수 정당 내 소장파 등)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주 출신을 중앙 정계에 고위 정치인으로 진출시키고 싶은 것이 보수정당의 당선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현오봉 전 의원의 경우 공화당의장을 역임했고, 19대 총선 당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도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에서 6선을 거두었으며,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친박계 측근으로 박근혜 정부 당시 비서실장에 유력시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데, 보수정당이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이라고 추앙하자, 제주도의 노년층 표심도 돌아서면서, 19대 대선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보수정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세탁하면서 개인기로 제주도지사 재선에 성공한 원희룡을 제외하면, 보수정당의 득표율이 대거 폭락하고 민주당에 거의 텃밭 수준의 몰표를 주었다.
이건 사드 배치 논란으로 중국의 보복에 경제적 타격을 입은 것도 있다.
원희룡 이전에 신구범, 김태환도 보수정당 출신 도지사로 선출된 바가 있다.
다만 둘 다 민주당계에 잠시 몸담은 바가 있지만. 그리고 원희룡도 제주도지사직을 중도 사퇴하고 국힘 대선 경선에 참가 하고 윤석열 지원 유세를 돌면서 도정 공백이 생기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20대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에 거의 호남 다음 수준의 몰표를 주었다.
때문에 역대 대선에서 처음으로 대선 후보 적중에 실패했다.
이제 제주도에서 지지를 얻을 만한 보수 인사가 없기 때문에 경합지역이 아니라 민주당 텃밭에 가까워졌다.
6.5. 민주화(6월 항쟁) 이후에도 계속된 부정
민주화 이후에도 4.3 사건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다.
노태우 정부까지만 해도 정도가 비교적 약해졌을 뿐이지, 경찰에서는 학살 피해자들의 유족들을 단순한 안부인사나 행정상의 가정방문 등을 명분으로 주기적으로 감시하고 방문/소환조사를 하였으며,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는 중에도 다른 면에서는 이런 탄압이 존재하였다.
문민정부와 역사바로세우기가 끝난 김대중 정부까지도 주민들은 진상규명과 경찰의 감시/연행/연좌제 중단, 피해보상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냈다.
아래 항목인 '문화에서의 4.3 사건'에 적혀있듯이 1990년 KBS1 <역사탐험> 불방사태, 1997년 <레드헌트> 사태처럼 다큐멘터리와 관련자들이 탄압받은 적이 있으며, 이는 참여정부 직전까지 계속 되었다.
참여정부 이후 다시 돌아온 보수정부 시대에는 다시 묻으려고 했다.
이명박 정부 시기, 원세훈 국정원장 시절인 2009년에 어처구니 없게도 최고의 대공(對共) 전문가도 탄압을 받은 일이 있다.
윤 모 단장은 지난 2009년 5월 감찰실 직원과 점심을 먹다가 "제주 4.3 진압은 정부 쪽에서 심하게 한 측면이 있다"는 말을 했다. 감찰실은 윤 단장의 발언을 '좌파적 발언'이라고 몰았고, 윤 단장은 대기발령 끝에 해임당했다.
정작 미군 G-2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제주도민들 중 80% 이상은 토벌대에게 죽었다.
윤모 단장이 한 말은 좌우파를 떠나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기발령 끝에 해임 처분을 받은 것이다.
2014년에 새로 바뀌는 역사 교과서에서는 실리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았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사 교과서에 기재되었다.
마침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인 이영조 가 2010년 11월 5일 미국 세인트루
이스에서 벌어진 국제학술회의에서 '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 폭동(communist-led rebellion)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빚게 되었다.
사실 관계만 논하자면 4.3사건의 발단부터가 남로당 문제와 거리가 멀고, 이를 진압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의 희생을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더욱 논란이 된 것이다.
2014년에 박근혜 정부의 공약에 따라 4.3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공약을 안 본 거 같은) 자칭 우파 단체가 반발하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까지 언급했다.
또한 제주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박원순 서울시장이 만든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좌파폭도들을 감싸고 이승만 대통령을 학살자로 만드는 등 왜곡되었다며 박원순 시장의 사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대한민국 예비역 영관장교 연합회"라는 어버이연합과 비슷한 시기에 반짝하고 나타난 극우단체가 제주 4.3사건 때 일어났던 군의 학살을 극구 부정하고, 군이 오히려 정당한 대처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5년 12월에 행정자치부는 보수단체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희생자 재조사를 시도하려 했으나 유관단체들의 반발로 2016년 2월에 보류됐다.
2020년 4월에는 미래한국당의 7번 비례대표 후보 정경희 영산대 교수가 4.3 사건을 두고 좌파의 폭동으로 지칭한 것이 드러나 4.3 사건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이 반발하는 성명을 냈다. 관련기사
6.6. 부족한 인지도
2017년 이후에도 제주 4.3 사건은 다른 대한민국의 민간인 학살사건인 보도연맹 학살사건, 5.18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지도가 적고, 공교육 과정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교과서만 해도 국사 과목 시절 국정교과서에는 4.3 사건이 날개로 아주 짧게 나온 것으로도 모자라, 반공논리를 내세운 서술이 눈에 띌 정도였다.
그나마 제7차 교육과정 내 한국사 검정교과서에서는 비상교과서 기준으로 서술도 좀 중립적으로 바뀌었고, 탐구활동으로 관련 자료를 더 추가했다.
〈제주4·3 인지도 및 인식조사〉 에 따르면, 응답자 중 68.1%는 4.3사건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다" 고 답하긴 했지만, 4.3사건에 관심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은 16.2%에 그친 반면, 관심이 없다고 응답한 사람들의 비율은 50.2%에 달했다.
이는 99%가 관심을 보인 5.18 광주민주화운동, 75.7%가 관심을 보인 노근리 학살 사건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수치이다.
4.3사건에 대해 인지도가 낮기 때문인지 각 지역구에서는 4.3 학살을 주도했던 군경 출신 인물들의 기념사업을 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여전히 제주도 이외의 지역에서 4.3사건의 인지도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예시로 제주도로 경찰병력을 증원한 조병옥 당시 경무국장의 흉상 건립 방안이 서울 강북구에서 논의되다가 4.3단체들의 항의로 취소되었고 송요찬 당시 제9연대장의 선양사업이 충남 청양군에서 실시하려다 역시 4.3관련단체의 항의로 철회되었다.
심지어는 비교적 최근인 2019년에는 경북 포항 해병대교육훈련단 복합교육센터 명칭을 예비검속 학살 명령권자인 김두찬 당시 중령의 이름을 따 '김두찬관'으로 명명하였다가 4.3단체의 항의 및 국방부의 시정조치로 현재 이름을 충성관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남로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4월 3일 이전에는, 제주 4.3 사건이 민중항쟁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걸 선뜻 떠올리는 국민은 연령과 지역을 막론하고 드물다.
4.19 혁명,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 다른 대한민국의 민중항쟁도 유명세에 비하면 놀랍도록 전문가에 의한 학술적 연구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실정인데, 4.3에 대해서는 제주지역 언론, 시민단체, 향토사학자들이 아니고서는 거의 관심을 가져 오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4.3에 대해서 남아있는 자료의 수는 결코 적지 않지만, 대다수의 논자들이 이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않는 것도 문제다.
십수년 전 제민일보사에서 출간한 '4.3은 말한다' 같은 연구서만 해도 두꺼운 책이 5권이나 됐지만, 현재 절판되어 굳이 보려면 큰맘먹고 서초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가야 한다.
7. 진상규명운동과 추모 및 사과
7.1. 1980년대 ~ 1990년대
민주화 이후, 4.3 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추모와 진상 규명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1989년 4월 3일,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제주에서 '41주기 4.3추모제'를 지냈다. 같은 날, '제주신문'에서 '4.3의 증언'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0년 6월 '제주도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를 조직하여 1991년 4월 3일에 유족들을 비롯한 제주도민의 주도로 위령제를 진행하였다.
제주도의회 역시 1993년에 '4.3특별위원회'를 설치해 피해 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1994년을 기점으로 위령제를 유족회와 제주도의회 공동 주도의 합동위령제로 지내게 되었다.
비록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는 이런 움직임조차 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민주화가 된 이상 탄압이 진상 규명의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언론도 4.3에 대한 보도에 나섰다. 제주지역의 신문들이 앞장섰는데, 특히 『제민일보』가 1989년부터 연재한 <4.3은 말한다>는 1999년까지 10년 동안 5,000여 명 이상의 사람들의 증언과 한국과 미국의 관련 자료들을 통해 500회가 넘는 기사를 내는 성과를 내었다.
그리하여 제민일보는 1993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했으며, 연재기사 대부분이 동명의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한편 일부 연구자와 저자를 통하여 4.3을 진보적 시각에서 다룬 책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정치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우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대에는 역사 바로세우기와 맞물려 "공인된 단체에서 진상규명 작업을 할 경우 정부에서 모든 협조를 하겠다"는 정부 입장이 표명되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제주도의회에 의해 '4.3피해신고실'이 설립되었다. 1996년 3월에는 신구범 당시 제주도지사가 정부에 제주 4.3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고, 11월에는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가 국회 4.3특별위원회 구성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 대선후보 역시 제주 4.3 사건의 진상 규명 및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당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진상 규명에 힘을 쏟았다.
질문: 한국과 미국정부는 1948년 제주 4·3사태에 대한 진상을 서로 언제 공개할 방침입니까?
대통령의 답: 제주 문제가 국회에 청원되어 있습니다. 정부로서는 과거의 억울한 문제에 대해서는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 문제는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해서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1998년 11월 23일 CNN 회견 중]
특히 15대 국회의 회기와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1999년에는 제주 4.3 사건의 문제 해결을 21세기로 미룰 수 없다는 구호 아래 4.3도민연대, 제주종교인협의회, 4.3범국민위원회 등이 4.3특별법 제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응하여 4.3특별법안을 발표하고 제출한 국회의원 113명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새정치국민회의 측은 위원회 설립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특별법 제정에 소극적 이었지만, 시민들의 거센 반발으로 인해 선회하여 특별법 제정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렇게 1999년 12월 1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해 2000년에 시행되었다.
비록 특별법이 처음 제정되었을 때부터 세세한 내용까지 살피는 완벽한 법안이었던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2000년대 이후 진상 규명 논의는 더욱 활발해졌다.
게다가 2000년대 들어와서는 공산폭동이라는 단어가 사문화되었다. 금기가 많이 없어진것이다.
7.2. 2000년대 ~ 2010년대
사과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정부는 참여정부였다.
2003년 10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사건 55년 만에 최초로 국가원수로서 사과를 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사건에 대한 공식 사과를 했다.
2006년 4월 3일 4.3사건 58주기 위령제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과거사 정리 약속을 포함한 추도사를 하여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사과하였다.
위령제 당시 김태환 제주지사와 4.3 사건 유족 대표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반면 참여정부 이후 들어선 보수정권 측은 사과와 진상규명을 하는 데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그나마 2014년에 박근혜 정부에서 '4.3희생자 추념일'을 처음으로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며 진상 규명을 하겠단 태도로 표를 받아갔지만, 9년 동안 대통령(이명박, 박근혜)의 참석이나 특별한 언급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국가정보원 소속 간첩전문가인 윤 모 단장이 2009년에 점심 식사 중 4.3 사건의 토벌대 책임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대기발령을 당하고, 2015년 박근혜정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로 나온 한국사 국정교과서에서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기술이 기존 교과서보다 축소·후퇴한다든지, 4.3위원회를 폐지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한다던지, 희생자들을 재조사하려고 시도하는 등 제주 4.3 사건을 묻으려 한 정황도 있었다.
4.3사건 70주년을 앞둔 2017년 4월 8일에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하였고, 10월 17일에는 제주 4.3 관련 유관단체들은 서울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학살 당시부터 침묵해 온 미국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고자 '제주4.3에 대한 미국과 UN의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개시 하였다.
2018년 4월 2일에 제주도 교육청과 대만의 가오슝시교육청은 4.3사건과 2.28 사건에 대한 교류협약을 체결했다. 같은 날,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주 4.3 사건 70주년 추념식을 앞두고 교황청 국무원총리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 명의로 보낸 메시지를 통해 이 행사가 치유와 화해를 증진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교황이 4·3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위로 메시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8년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이 70주년 4·3희생자추념식에 참석하였다.
문 대통령은 12년 만에 4.3 추모행사에 참석하는 대통령으로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다시 한 번 사과하고,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하였다.
2019년 1월 17일, 제주지방법원은 불법군사재판에 의해 수감된 4·3 생존 군사재판 수형인 18명을 재심 끝에 공소기각 판결을 내려 사실상 무죄를 인정하였다.
제주4.3평화상 세 번째 수상자로 제주4·3 진상규명 운동을 주도한 현기영이 선정됐다. 그리고 베트남의 인권운동가 2명과 함께 4.3평화상을 수상했다.
국방부은 71년 만에 처음으로 유감을 표명했고, 경찰청장도 4·3사건 추념식에 참석해 4·3사건 당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것을 사죄했다.
7.2.1. 노무현 대통령 위령제 추도사 전문
추도사 전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제주도민과 4.3 유가족 여러분,
우리는 오늘, 58년 전 남북분단과 냉전이 불러온 불행한 역사 속에서 무고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저는 먼저, 깊은 애도의 마음으로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오랜 세월 말로 다 할 수 없는 억울함을 가슴에 감추고 고통을 견디어 오신 유가족 여러분께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무력충돌과 진압의 과정에서 국가권력이 불법하게 행사 되었던 잘못에 대해 제주도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제주도민과 유가족 여러분,
2년 반 전, 저는 4.3사건 진상조사 결과를 보고 받고,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하여 여러분께 사과 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보내주신 박수와 눈물을 저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정부는 그동안 희생자 명예회복과 추모사업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지난달에도 2,800여명을 4.3사건 희생자로 추가 인정했고, 이곳 4.3평화공원 조성을 적극 지원하고 있습니다. 유해와 유적지를 발굴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이제 4.3사건위원회가 건의한 정부의 사과와 명예회복, 추모사업 등은 나름대로 많은 진전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국민적 공감대를 넓혀가면서 가능한 부분부터 점진적으로 풀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4.3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무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나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야 합니다.
특히 국가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국가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고,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합니다.
또한 용서와 화해를 말하기 전에 억울하게 고통받은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입니다.
그랬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확보되고 상생과 통합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과거사 정리 작업이 미래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사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의 걸림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벌하고, 무엇을 빼앗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분명하게 밝히고, 억울한 누명과 맺힌 한을 풀어주고,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짐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통해 통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하나하나 매듭지어갈 때, 그 매듭은 미래를 향해 내딛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제주도는 대한민국의 보배입니다.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인이 사랑하는 평화의 섬, 번영의 섬으로
힘차게 도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주도가 반드시 해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도민 여러분은 폐허를 딛고 아름다운 섬을 재건해냈고, 어느 지역보다 높은 자치역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민 스스로 결의해서 항상 중앙정부가 기대하는 이상의 높은 성과를 이루어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앞장서 나아가는 만큼 정부도 열심히 성원하고 힘껏 밀어드리겠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풍요롭고 활력 넘치는 제주를 만들어 나갑시다.
이 평화의 섬을 통해 한국과 동북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합시다.
그리고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행사를 지켜보면서 엄청난 고통과 분노가 시간이 흐르면서 돌이켜 볼 수 있는 역사가 되고, 역사의 마당에서 진행되는 공연을 보면서 수십년이 흐르면 이게 제주도의 새로운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 모든 국민들에게 분노와 불신과 증오가 아닌, 사랑과 믿음, 화해를 가리켜주는 그런 중요한 상징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됐습니다. 함께 노력합시다.
다시 한번 4.3 영령들을 추모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7.2.2. 문재인 대통령 4.3희생자 추념일 추념사 전문
추도사 전문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제주도민 여러분,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4.3을 잊지 않았고 여러분과 함께 아파한 분들이 있어, 오늘 우리는 침묵의 세월을 딛고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4.3의 통한과 고통, 진실을 알려온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제주도민들께 대통령으로서 깊은 위로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
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이 전개 되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고, 마을 주민 전체가 학살당한 곳도 있습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1, 30,000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념이 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은 학살터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한꺼번에 가족을 잃고도 ‘폭도의 가족’이란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숨죽이며 살아야 했습니다.
고통은 연좌제로 대물림되기도 했습니다.
군인이 되고, 공무원이 되어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식들의 열망을 제주의 부모들은 스스로 꺾어야만 했습니다.
4.3은 제주의 모든 곳에 서려있는 고통이었지만, 제주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을 지워야만 하는 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할 세월동안 제주도민들의 마음속에서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4.3을 역사의 자리에 바로 세우기 위한 눈물어린 노력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1960년 4월 27일 관덕정 광장에서, “잊어라, 가만히 있어라” 강요하는 불의한 권력에 맞서 제주의 청년학생들이 일어섰습니다.
제주의 중고등학생 1,500명이 3.15 부정선거 규탄과 함께 4.3의 진실을 외쳤습니다.
그해, 4월의 봄은 얼마 못가 5.16 군부세력에 의해 꺾였지만, 진실을 알리려는 용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4.3 단체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던 4.3을 끊임없이 불러냈습니다.
제주4.3연구소, 제주4.3도민연대, 제주민예총 등 많은 단체들이 4.3을 보듬었습니다.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되었던 시절, 4.3의 고통을 작품에 새겨 넣어 망각에서 우리를 일깨워준 분들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던 예술인들의 노력은 4.3이 단지 과거의 불행한 사건이 아니라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4.3의 진실을 기억하고 드러내는 일이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길을 열어가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주도민과 함께 오래도록 4.3의 아픔을 기억하고 알려준 분들이 있었기에 4.3은 깨어났습니다.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의 승리가 진실로 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2000년, 김대중 정부는 4.3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고, 4.3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4.3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위령제에 참석해 희생자와 유족, 제주도민께 사과했습니다.
저는 오늘 그 토대 위에서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함께,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나가겠습니다.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
4.3의 완전한 해결이야말로 제주도민과 국민 모두가 바라는 화해와 통합, 평화와 인권의 확고한 밑받침이 될 것입니다.
제주도민 여러분, 국민 여러분,
지금 제주는 그 모든 아픔을 딛고 평화와 생명의 땅으로 부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4.3 영령들 앞에서 평화와 상생은 이념이 아닌, 오직 진실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좌와 우의 극렬한 대립이 참혹한 역사의 비극을 낳았지만 4.3 희생자들과 제주도민들은 이념이 만든 불신과 증오를 뛰어 넘었습니다.
고 오창기님은 4.3 당시 군경에게 총상을 입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3기’로 자원입대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습니다.
아내와 부모, 장모와 처제를 모두 잃었던 고 김태생님은 애국의 혈서를 쓰고 군대에 지원했습니다.
4.3에서 ‘빨갱이’로 몰렸던 청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지켰습니다.
이념은 단지 학살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용서로 이념이 만든 비극을 이겨냈습니다.
제주 하귀리에는 호국영령비와 4.3희생자 위령비를 한자리에 모아 위령단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비를 세웠습니다.
2013년에는 가장 갈등이 컸던 4.3유족회와 제주경우회가 조건 없는 화해를 선언했습니다.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들께 호소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대한민국엔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증오와 적대의 언어가 넘쳐납니다.
이제 우리는 아픈 역사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한 역사를 직시하는 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만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도 4.3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낡은 이념의 틀에 생각을 가두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보수와 정의로운 진보가 ‘정의’로 경쟁해야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공정한 보수와 공정한 진보가 ‘공정’으로 평가받는 시대여야 합니다.
정의롭지 않고 공정하지 않다면, 보수든 진보든, 어떤 깃발이든 국민을 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곳에서 이념이 드리웠던 적대의 그늘을 걷어내고 인간의 존엄함을 꽃피울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 나갑시다.
그것이 오늘 제주의 오름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국민 여러분,
4.3의 진상규명은 지역을 넘어 불행한 과거를 반성하고 인류의 보편가치를 되찾는 일입니다.
4.3의 명예회복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으로 나가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제주는 깊은 상흔 속에서도 지난 70년간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외쳐왔습니다.
이제 그 가치는 한반도의 평화와 공존으로 이어지고, 인류 전체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로 전해질 것 입니다.
항구적인 평화와 인권을 향한 4.3의 열망은 결코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대통령인 제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무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추념식이 4.3영령들과 희생자들에게 위안이 되고, 우리 국민들에겐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국민의 힘 태영호 최고의원 발언 및 주장-언론보도
제주 4·3을 두고 “김일성 일가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킨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기존 주장을 이어가며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실상 사과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3일 밝혔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날 제주 4·3 추념사에서 ‘4·3 희생자 추모는 국가의 당연한 의무’라고 강조했지만, 태 최고위원은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 뒤 기자들과 만나 이른바 ‘김일성 지령설’과 관련해 ‘제주도민에게 사과할 생각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어떤 점을 사과해야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제 발언의 취지를 (제주 4·3) 유족이나 피해자단체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며 “(앞선 발언은) 그분들의 아픔을 치유해주려고 한 발언이었다”고 덧붙였다. 앞서 태 최고위원은 지난 2월13일 제주에서 열린 합동연설회에서 “4·3사건은 명백히 김(일성)씨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제주 4·3은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으로, 이날을 ‘국가추념일’로 격상한 것은 박근혜 정부 때다. 윤석열 대통령도 이날 제주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제75주년 제주 4·3 추념식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신 읽은 추념사를 통해 “무고한 4·3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유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은 자유와 인권을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의무”라며 “정부는 4·3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읽은 추념사를 통해 “무고한 4·3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그 유가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일은 자유와 인권을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당연한 의무”라며 “정부는 4·3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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