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그 때에

6·25 전쟁전야 (1948년~1953년)

Choi가이버 2022. 10. 31. 07:09

6.25 전쟁전야 (1948년~1953년)

 

1945년 8월 한국이 분단되기 전까지는 한국전쟁(6.25전쟁)은 생각 할 수도 없었습니다. 
특별한 반론과 항변이 많긴 하지만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내전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온다는 진리를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 미국 : 아무 생각없이 갈라놓고 식민지 정부를 재건 (+그 기구에 봉직한 한국인)
* 소련 : 한국이 지녀온 통합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주의 건설" 하기로 결정

북한의 침략에 대한 최초 암시는 하지장군이 워싱턴에 '공역이 임박했을지도 모른다'고 알린 1946년 봄 이었으나, 미국과 소련은 자국의 군대가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이 있는 한 군사행동을 지지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시발점 소련군은 이미 철수했고, 미군은 철수중이었으며, 중국공산당이 승리한 1949년 초 이후로 잡을 수 있습니다.

 

●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살펴보면..
1947년 초부터 김일성은 조선인 '의용군'(수만명)을 급파하여 마오쩌뚱과 함께 싸우게 하고, 기존의 조선인 부대를 사단 규모로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훗날 1950년 10월 중공군의 한국전쟁에 투입의 선례가 됩니다.
김책(1903~1951)의 지휘 아래 1947년 4월 만주로 이동하였으며, 그 무렵 만주에 있는 중국 공산당 병력의 15~50%가 한국인(북한)이었으며 이들은 중국공산군(Chinese Communist Forces / CCF) 또는 '중국공산군계 한국인'으로 불리었습니다.
중국내 한국인 군대의 시초는 1941년에 창설된 '조선의용군'입니다. 중국 국민당이 전후 보복 와중에 만주지역 한국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학대하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공산당으로 끌어들여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7년 5월 한반도 북부는 병사들의 숙박지로 이용되었으며, 흥남의 폭약공장의 생산물 등은 중국으로 선적 되었고. 중국에서 싸운 한국인 부대는 1948년 1만여명, 1949년 4~5만명, 1950년 가을에 4~5만여명이 북한으로 흘러 갔습니다. 
1948년 4월 조선인민군 간부진은 80%이상이 소련파가 아닌 중국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중국내전의 베테랑(방호산, 왕자인, 홍림, 노철용)들로 구성되었습니다.
1949년 여름에 남한의 도발(옹진반도 전투)에 북한이 침략으로 응수하지 않은 이유는 훗날 한국전쟁의 침공 타격이 된 병사들, 즉 정예군이 아직도 중국에서 전투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남한에서의 유격전
남한에서 조직적인 유격전 시작은 1,000여명 이상의 '여수반란군'이 지리산으로 도주하여 산중에 있던 유격대 및 산사람들과 합류한 1948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 *여수·순천 10.19 사건 / 1948년 10월 19일 ~ 1948년 10월 27일)
1949년 미국 CIA에 따르면 남한 유격대의 총인원은 적게는 3,500명, 많게는 6,000명으로 추정 하였는데, 대다수는 몽둥이와 죽창을 가지고 다녔으며, 일부는 일제나 미제 소총으로 무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식량 및 보급품을 마을로 부터 징발이나 기부 또는 쌀의 도둑질로 충당하였습니다. 
미국 군사고문단의 고문관들은 이들의 전반적인 전략은 북한이 장악하고, (현 황해남도) 해주시를 통해 전달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좌익활동의 중심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이유로는 '풍족한 미곡'이 생산되는 도(道) 였기에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일본이 심하게 착취한 곳이었기에 미군정 초기 몇년동안 공산당에서 지도하는 전국농민조합총연맹(全國農民組合總聯盟)이 빨리 조직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습니다.
전라남도에서는 도내 유격전으로 난민이 10만명 발생되었는데, 그 중 대다수는 유격대의 원조를 막기 위하여 남한측에서 마을을 소개(疏開)하여 주민을 분산시키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경상북도에서도 지역주민과 경찰 사이에 상당한 강감정이 존재하였습니다.
유격대들은 좌익가족에 대한 기록이 경찰서에서 보관되어 있었기에 경찰에 대한 증오심이 널리 퍼져 있었고, 소부대 단위로 이동하며 공작을 했다. 그래서 극도의 잔인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뉴욕타임즈 월터 설리번(Walter sullivan / 1918~1996) 은 남한은 빈부격차가 대단히 심하여 빈농이나 중농은 극한의 생존을 영위하고 있었으며, 자기가 경작하는 토지를 소요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대다수가 소작인이었고, 지주는 소작생산물의 30%를 차지, 그 밖의 징수금(세금 및 기부금 등) 이 연간 수확량의 48~70%에 달했다고 합니다.
1949년 봄 이승만은 일본군 출신 대령인 정일권(1917 ~1994)을 급파하여 3,000명 의 토벌군을 지휘하여, 홍순석(?~1949 /여수 14연대 반란 주동자 중 한명임)을 죽이는 등 대승을 거두었지만, 유격대 병력은 계속 커지고 있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유격대는 북한이 원조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습니다. 
강원도와 경상북도 북부 해안쪽은 북한이 유격대에게 무기와 물자를 원조했지만, 전라도와 경상도 유격대는 거의 100% 지역에서 충원되었다. 이들이 사용하던 무기도 소련제가 아닌 일제와 미제무기들 이었다. '도덕적인 원조'외에 북한으로 부터 받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1949년 7월 미군은 철수했지만, 실제로는 떠나지 않았다. 
제임스 하우스먼(James Hausman / 1918~1996) 은 여수반란을 진압하였으며, 로버츠(William L. Roberts) 장군 또한 유격대를 전면적으로 사살하는 등(6,000여명 사살 주장) 등 미군 또한 간여(참견)하여 1950년 봄에 이르러 남한 빨치산을 명백하게 패배시켰습니다.
결국 1950년 5~6월 유격대 활동은 현저히 감소하여 15~30명 단위의 소규모 무리 활동으로 축소 되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무찔렀다는 낙관된 보고는 잘못된 결론이었습니다.

■   1949년 38도선상의 전투
1950년 6월에 발발한 전쟁은 1949년의 유격전과 9개월에 걸친 38도선 부근 전투에 뒤이은 것으로 한반도 갈등의 내전적 기원을 파악하는데 필수부가결하였습니다.
이승만은 1949년 6월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편성하고, 8월말에는 10만명에 달할 정도로 군대를 급속히 확장시켰습니다. 
또한 중국 국민당과 함께 투쟁한 인물을 배제하고, 일본군 복무자를 군에 끌어들입니다. (서북파 백선엽, 백인엽, 양국진, 김법석, 관북(또는 동북)파 정일권 등) 그렇게 한 주된 이유는 이승만 자신에게 전적으로 신세를 졌고, 공산주의를 협오할 뿐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킬 염려가 없다고 생각되는 군인들을 자기 주위에 포진시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1949년 5월 4일 개성에서 남한측의 개전(공격)으로 나흘간 전투가 시작되는데, 이때 6개 보병중대 등을 투입하였습니다. 
1사단 사령관인 김석원이 이끄는 병력은 38도선을 넘어서 송악산 부근을 공격하였습니다.
1949년 6월 마지막 일요일 새벽에는 옹진반도에서 호림유격대가 38도선을 넘어 침투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김석원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북한과 남한은 "언제라도 대규모 전투를 벌일 수 있다" 라고 브리핑 한다.
1949년 8월 4일 38도선 이북의 은파산을 점령하고 있던 18연대소속 2개 중대가 북한의 공격으로 전멸하는 일이 발생한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철원방면 북쪽공격을 감행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로버츠(William L. Roberts) 장군의 충고에 따라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제한된 증강군을 옹진에 보내는 조치로 마무리 합니다.
당시 이승만은 장제스와 정삼회담을 하고 있었기에, 후에 보고를 받고 철원 공격 반대결정을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로버츠 장군은 남한측 지휘관들에게 만약 북을 공격하면 주한미군사고문단을 철수 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김일성 또한 이승만과 개념이 아주 비슷했기에 1949년 8월 전투에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즉, 막다른 지역인 옹진을 공략하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개성을 장악 한 후, 추이를 지켜보는 작전을 통해 공격받기 쉬운 평양을 안전하게 방어하고, 잘 풀릴 경우, 곧장 서울을 공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1950년 6월 25일 ~ 27일 사이에 한국군 제2사단(강원도 양구)과 제7사단(강원도 화천)이 무너지는 것이 의미심장함을 깨닫게 합니다.
김일성은 8월 12일 옹진공략 구성을 평양주재 소련대사 슈티코프(Terenti Shtykov, 1907~1964)에게 처음으로 이야기 하면서 옹진반도 해주 같은 지역을 점령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옹진이나 철원을 공격할 경우, 소련이 도와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남한이 공격을 유발하지 않아 안달이 나고 있었습니다.
평양주재 소련인들은 전면적인 내전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공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최후의 비책으로 마오쩌뚱의 원조를 기대하게 됩니다.
1949년 8월 23일 남한은 해군 초계정 몇척을 대동강 상류쪽 몽금포로 보내어 북한 35~45톤급 배 4척을 침몰 시켰습니다. 인천항에서는 북의 반격에 대비하였으나, 실제 반격은 없었습니다. 
로버츠 장군은 남북 모두 38도선에서 서로 자극을 주고받으며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1949년 38도선상에서의 전투가 잠잠해 진후, 이승만과 김일성 양자는 모두 상대편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위해 강대국들의 지지를 구했다. 양쪽 모두 1950년 여름이 1949년 여름 처럼 시작되리라고 예상했으며, 이번만큼은 영원히 요절내기를 원했습니다.
이승만은 워싱턴으로 부터 '남한이 도발하지 않았는데도 공격 받았을 경우에만 미국의 원조를 받게 될 것' 이라는 메세지를 받습니다. 
김일성은 연 2%이자의 2.2억 루블 차관을 포함하여 스탈인의 외견상 동의와 마오쩌뚱에게 직접적인 지원을 얻어내며 이승만보다는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   전쟁전야
1950년에 이르러 남한은 미국으로 부터 연간 1억달러 이상의 원조를 받고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무상원조형식이었다. 군대, 경제, 철도, 공항, 광산, 공장 등을 가동시키면서 수백만까지는 안되더라도 수천명의 한국인들에게는 꿈의 나라인것으로 인식시킨다.
내전의 기운 사이에서 유엔한국위원회는 철수를 하진 못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북한 측보다는 남한측의 공격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하였다.
북한으로 침공하고자 하는 이승만 자신의 유혹과 군수뇌부들은 선수를 쳐서 38선을 넘자고 계속 압력을 넣고 있었다. 
1950년 봄, 주한미군군사고문단은 38도선 지역의 지휘관들중 지나치게 공격적인 장교들을 제거하려고 애썼다.
유엔한국위원단 군사감시관들은 1950년 5월에야 한국을 도착하여 그 중 2명이 1950년 6월 9일 ~ 23일 사이, 약 9일간 38도선 시찰을 마쳤다. 
그들은 6월 21일 ~ 23일 오전까지 옹진반도에 있었는데, 일요일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1950년 5월 30일)가 실시 되고, 북한과 평화통일을 바라는 다수의 중도파와 온건좌파가 대거 국회에 진출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주었다.
1950년 6월 18일에 서울을 방문한 미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oster Dulles, 1888 ~ 1959)에게 이승만은 북한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직접적인 방위보장을 요구하였다.
북진통일은 며칠만에 성공할거라면서 전면전을 초래할지라도 북진할 것이라는 이승만은 델러스와의 회담을 통해 군사동맹을 성사시키길 바랬지만, 미국의 지원에 대한 형식적인 재보장만 얻게 된다.
반면 타이완의 중국국민당은 이승만과 공모할 용의가 있었는데,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들은 중국내전의 마지막 전투(중국의 타이완 침공)가 1950년 5~6월 또는 9~10월에 있을것이라고 예측하였고, 타이완 미국영사는 6월15일~ 7월 사이에 공산당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였다.
매카서(이 책에서는 맥아더 장군을 매카서 라고 기제)는 델러스의 한국방문을 계기로 극동정책이 바뀌길 바랬다. (타이완 방어)
1950년 5월 장제스 국민당은 하이난섬 방어에 실패하게 되고, 미국의 비밀 장교들은 쿠데타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 또한 미국은 타이완을 방어하지 않겠다는 최종결정을 세웠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미국은 북한과 중국영공을 침하하여 정보수집 비행을 하는 등 요란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고 나른하고 인적이 끊긴 1950년 6월의 마지막 주말이 밝아왔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인디펜던스에 있는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자신의 쌘디스프링 농장에 있었으며, 딘 러스크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차관보는 뉴욕에 있었고, 조지캐넌 미 정책기획국 고문은 전화 한통 없이 여름별장으로 사라졌다.
폴 니츠 미 국무부의 정책기획 책임자는 연어낚시를 갔으며, 워렌 로빈슨 오스틴 유엔주재 미국대사 마져도 제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