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그날에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놀이터였다(1945~1955)

Choi가이버 2022. 10. 31. 07:07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놀이터였다(1945~1955). 

미 국무차관보 존D. 히카슨의 폭로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사전 시나리오에 의해 계획된 전쟁이었다.
해방 직후 박헌영((북한정권에서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1955년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됨))과 그의 직계인 이강국. 임화(작가) 등 남로당의 일부 핵심간부들이, 주한 미군방첩대(CIC) 요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새로히 밝혀졌다. 
이같은 사실은 저명한 재미 사학자 방선주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정병준 박사가 미 정부측에 비밀해제를 요구, 공개된 " 미 육군 정보국 " 문서파일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던 ‘베어드 조사보고서’ 에서 새로이 드러났다.
지금까지 남한정부에선 박헌영이 6.25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총살 당했다고 주장했다. 즉 박헌영 일파가 취조당할때 고문등으로 미국의 첩자짓을 한걸로 허위로 자백하고 이슬의 형장으로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북한측의 주장이 사실인걸로 밝혀진 것이다.
1956년 미 육군 정보국 비밀자료에 따르면 이강국(초대 북한 외무성 부상)등은 CIA의 비밀조직인 JACK(한국공동활동위원회. Joint Activities Commision,Korea)에 의해 고용됐던 것으로 나와 있다. 즉, 김일성 정권에 의해 ‘미제 스파이’ 혐의로 53년 처형된 이강국은 실제로 미 첩보기관의 끄나풀 이었던 것으로 드러난 거다.
이와 같이 미국은 남로당원들을 탄압하고 일부는 포섭하여 간첩으로 월북시켜 북한 수뇌부에 들여 보내는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을 정복하기 위한 치밀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
1946년 5월 미군정은 당시 조선공산당을 제거하기 위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만들어냈다. 미군정은 자신들이 조작한 이 사건으로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고 이를 구실로 정당 활동의 자유를 빼앗고 배후로 지목하여 소련대사관도 폐쇄하였다. 
또 신문을 비롯한 정기 간행물을 허가제로 바꾸어 좌익계열의 간행물들을 폐간케 하고 좌익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와 같이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일제의 치욕스런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좌익들도 핍박을 무릅쓰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선봉에 섰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목숨 걸고 싸웠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은 독립을 방해하는 미군정이 실시하려는 단독선거 및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전국적인 규모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가한 단선단정 반대 대중 운동이었다.
이후에도 우리민족의 염원과 배치되는 미군정의 통치가 계속되었다.
1947년 친일잔재청산을 위하여 남조선 과도입법의회는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법안에 미군정은 인준을 거부하였다.
‘반민족적 친일청산’이 시대정신이었던 해방 직후에 미군정은 친일경찰, 친일관료, 친일정치인들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대신 그들은 미군정에 충성을 받치게 되었다.
미군정은 절대다수 우리국민의 기대를 철저히 짓밟고 전범 일제와 협력한, 친일 매국노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더러운 관계 를 맺게 된것이다.
미군은 친일세력들이, 한국국민의 배척을 받고 있어서 자신들이 보호하지 않으면 설 땅이 없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친일파를 고용하면 충견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들을 기용한 것이다.
또 친일세력이 한국민중과 원수지간이므로 한국국민들을 억압해서 길들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미군은 항일애국지사들이 ‘똥’ 이라고 부르는 친일 앞잡이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미국의 분단정책을 반대하고 항거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죽이도록 하였다.

​●  그렇다.. 미군은 해방자로서 조선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일제는 침략자로 들어왔다. 그러나 미국은 침략자에 더해서  살인자 였다. 일본을 대신해서 미국 자신이 우리나라를 다스릴 목적이었다.  왜??  믿기지 않는가??
즉, 미국의 목적은 우리에게 나라를 되찾아주어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지 않고 자신들의 지배권역을 대륙으로 넓히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한반도의 일본 식민지를 물려받아 자신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일제 식민지 시절에 지배세력이었던 친일세력을 기용하였다.
미군정이 친일세력을 기용하면 공을 세워 통치자인 자신들로부터 확고한 지위를 부여받아 배척 받고 있는 매국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항복한 후, 중국에서 비겁하게도 장개석은 미국의 지원 하에 국공 정전협정을 파기하고 160만 정규군을 동원하여 1946년 6월 해방구(解放區: 공산당 통치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장개석은 공산당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우월한 병력, 월등한 재정기반, 거기에 미국의 막대한 군사지원까지 받았음에도 결국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모택동에게 패하고 말았다. 미국은 장개석을 이용하여 만주를 통치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됬다.
그러나 미국은 결코 만주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만주 괴뢰국 건설을 주도한 "기시 노부스케"는 패전 이후 에이급 전범으로 구속됐으나 유일하게 풀려났다
그의 ‘옥중일기’에는 ‘케넌 설계도’와 일치하는 한반도 재 지배 구상이 담겨 있다.
케넌이라는 사람이 작성한 이 ‘설계도’는 그가 본부장으로 있던 국무부 정책기획본부 제13호 파일상자에 감춰져 있다가 1985년에 비밀이 해제되어 세상에 공개 되었다.
케넌 설계도란 소련에 대한 봉쇄 정책의 입안자로 이름을 날린 2005년에 101살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외교관 "조지 케넌(George Kennan)" 이 세운 계획으로서 한반도와 만주를 지배했던 일본에게 이 지역을 통치하도록 재 위임한다는 내용이다.
일본이 만주와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는데 미국이 욕심을 내어 1905년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대한 봉쇄를 실시하여 일본의 숨통을 조였고 수렁에 빠진 일본은 미국의 예상대로 진주만공격을 감행 하여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가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돌아가서 만주와 한반도를 일본에게 통치를 위임하고 미국은 그러한 일본본토를 직접 통치한다는 계획이 바로  케넌 설계도이다.
이 케넌 설계도를 실행하기 위해서 미국은 대륙지배의 경력을 가진 핵심 인사를 확보하는 게 필요 하였다,
진주만 기습공격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 이하 일곱 명의 A 급 전범이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것이 1948년12월23일이었는데, 똑같이 에이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기시 노부스케는 처음부터 기소조차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조 등이 처형된 다음날 자유의 몸으로 옥문을 빠져나와 당시 요시다 내각 관방장관으로 있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일본 총리)의 관저로 직행했다.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괴뢰 만주국을 창건한 것이 32년이었는데, 일본 상공성의 유능한 관료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의 산업차장으로 발탁되어 부임한 것은 그 4년 뒤인 36년이었다. 당시 소련은 10월 혁명 후 철강·시멘트·기계공업 등의 분야에서 경제력 내지 전쟁수행 능력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전시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임무를 띠고 부임한 것이 기시 노부스케 였다. 
기시 노부스케는 닛산콘체른의 사장 아유카와 기스케를 만주로 불러들여 ‘만주 중공업개발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당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 총재로 있던 마쓰오카 요스케와 손잡고, ‘만주 3스케 로 불리던 작업팀을 구성하여, 단시일 내에 경제발전을 위해 상당한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가 상공성 차관으로 귀임한 것이 36년이었으므로 그의 만주시대는 그리 길었던 것은 아니나, 만주는 ‘내 작품’이었노라 고까지 호언할 정도로 그가 올린 성과는 자부심을 가질 만 하였다.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만주에 이르는 일본의 구식민지를 일본의 재 지배에 맡겨야 한다는 ‘케넌 설계도’의 시각에서 본다면, 기시 노부스케는 미국으로서는 참으로 안성맞춤의 인물이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의 요원이, 패전 후 옥중의 기시 노부스케와 빈번한 접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기록에도 남아 있는 사실인데, 기시 노부스케는 벌써 그때부터 미국이 자기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과 무죄석방 뒤 미국과 조국 일본을 위해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임무가 무엇인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의 다음과 같은 ‘옥중일기’는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냉전(Cold War)은 조만간 열전(Hot War)으로 변할 것인데, 비록 일본이 이번 전쟁에서 고배를 마셨다고는 하나 동양에서 으뜸가는 소질을 지닌 민족으로서 우리는 모름지기 스스로가 맡아야 할 세계사적 임무가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식견과 포부, 용기와 결단력을 겸비한 지도자는 누구일까, 그 출현이 기다려진다.(1947년 9월20일)》
이 글의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런 능력을 겸비한 인물은 바로 "기시 노부스케"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글도 남겨 놓았다.
《‘동아시아 전체의 적화를 몰고 올 중국 공산군의 제패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달러와 무기원조로만 장개석을 돕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미국은 미국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모택동을 제압 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미국 자신의 군대라는 것은 주변국인 일본의 의용군 편성도 타당하다.(1948년 11월 4일)  》
미국이 A 급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에 대해서 사면한 것은 케넌 설계도를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의 항복을 받고도 일본 영토였던 만주를 차지하지 못한 상실감을 갖고 있던 미국에게는 기시노부스케는 케넌 설계도를 현실화 시킬 인물이었다.
미국에게 한국은 만주를 회복하는 디딤돌에 불과한 영역이었고 종착지가 아니었다.
미국은 한국국민과 좋은 유대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가 있었지만 미국은 단지 한국만을 지배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더 나아가 중국대륙 그리고 세계제패의 원대한 야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강한 충성도를 갖고 있는 친일파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더구나 친일파들은 중국대륙을 지배한 경험 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친일세력을 기용하였다.
1931년 9월 18일에 일본이 중국의 동북지방을 군사적으로 침략하고 이 지역을 ‘만주국’이라 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만주국은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에 세웠던 나라인데 자주권을 갖지 못하였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만주괴뢰국 이라고 부른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전역을 침략하였다.
1937년 12월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하여 시민 수십만을 살육하였다. 
그 뒤 우한[武漢]을 공략하고 광둥[廣東]에서 산시[山西]에 이르는 남북 10개 성(省)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거하였다.
이렇게 일본이 팽창해 가고 있으므로 미국의 세계제패의 구상과 상치되었다.
따라서 1938년 미국의 루즈벨트는 비행기와 항공모함 부품, 고옥탄가의 항공 연료, 고철, 그리고 공작 기계들의 일본수출을 제한하는 대일경제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하여 경제압박을 가하였다.
그리고 1941년 7월26 루즈벨트는 미국 내의 모든 일본인의 자산을 동결시켰고 일본으로의 석유수송을 차단하였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營圈)이란 일본을 중심으로 함께 번영할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과 범위를 가리키는 말로서 당시 일본이 아시아 대륙에 대한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내건 정치 표어이다.
이 구호대로 동아시아를 일본이 차지하면 미국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미국의 목표는 세계제패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하나님을 믿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양심적인 국가인데 세계제패를 목표로 하는 나라라는 소리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미국의 역사를 알면 누구나 수긍하게 된다.

​● 사실  미국의 역사는 살육의 역사 정복의 역사입니다.
미국인들이 인디언을 살육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위해 다음과 같이 정당성을 확립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의 피가 흐르는 미국인들은 '자신들이야 말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존재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들을 통해서 세계를 개종시키고 문명화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미국은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며 쫓아냈고 멕시코로 부터 캘리포니아, 텍사스, 유타 등 서부 지역을 강탈해 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들을 통해서 세계를 개종시키고 문명화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으로 미국은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며 쫓아냈고 멕시코로 부터 캘리포니아, 텍사스, 유타 등 서부 지역을 강탈해 버렸다.
1837년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존 어설리반은 자신의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미국은 세계를 미국의 민주주의로 문명화시키기 위해 계속 팽창되어져야 하는 “명백한 운명”을 갖고 있는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주장은 1898년 미서전쟁 (미국과 스페인간의 전쟁) 뿐 아니라 앞으로 미국 외교를 이해하는 데 가장 근본적인 사상적 밑받침이 되었다. 미국의 정치제도, 종교, 인종 등의 우월감은 그들의 종교적 선교 개념과 어울려 거의 모든 경우에 미국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윌슨 대통령은 “세계민주주의의 안전을 위하여” 라는 이유를 들어 참전하였고, 2차 대전에도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같은 이유를 들어 참전하였다. 이런 “명백한 운명” 주의에는 숨길 수 없는 군수산업에 의한 경제적 이익과 인종 차별적 편견이 사려있음을 알아야 한다.
1915년 미국의 불황에 접어드는 듯  했으나 서방의 군수품 주문으로 군수산업이 활기를 띠고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번영을 누리기 시작 했는데 독일의 잠수함 작전으로 군수품 수송에 차질을 빚자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였습니다.
민주주의와는 상관없이 군산복합체의 결정에 의한 것입니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유와 미국이 여기에 뛰어든 이유는 모두 자국의 경제적 이익 때문이지 민주주의 운운 하는 것은 수식어에 불과한 것입니다.
민족주의가 일어난 것도 경제적 배경이 상이하기 때문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승전국들은 패전국의 식민지를 나눠 가졌다. 그 후 패전국이 식민지를 되찾기 위한 2차 세계대전이 뒤를 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원인은 미국의 경제공황(대공황)에서 시작합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와는 달리 자본주의 자유경쟁 체제에서는 주기적으로 호경기, 불경기, 그리고 대공황이 주기적으로 나타납니다.
자유민주 체제에서의 대공황이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뜻합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엄청나게 경제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생산은 많아지지만 소비는 크게 늘어나지 못합니다.
만들어내는 상품은 많고 사는 사람들은 많이 없으니 남는 물건이 많아 창고에 쌓이게 됩니다. 재고량이 많아지자 기업. 공장 같은 곳은 망하고 기업이 망하고 문을 닫으면 직장을 잃은 실업자가 증가하고 실업자 증가로 개인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또 소비가 감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부도, 실업자증가, 소비감소, 기업부도 ...가 반복되어 살기가 어렵던 중 미국의 주식가격이 폭락하는 사건을 시작으로 미국은 경제 대공황에 이르고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은 세계로 확산되어갑니다.
각 나라들은 경제대공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정책을 펼치고 미국은 뉴딜정책을 펼칩니다.
뉴딜정책이란, 생산 활동은 억제하고 실업자 규제를 위한 대규모 공공사업 입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경제공황을 극복하기위해 식민지를 수탈하게 됩니다. 식민지에 물건을 파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진국이 아닌 가난한 나라에서는 식민지를 만들 수도 없죠. 방법이 없으니 사회가 불안해져갑니다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이럴 때 사람들은 누군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도와줬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게 되죠.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독일에 구원자 히틀러가 나타났고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후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고자 전쟁을 벌입니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입니다,
한마디로 1,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입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국내에서의 자유경쟁을 끝내고 세계로 포식자의 손을 뻗치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최종단계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에는 승리 했지만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국가와 소련은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반면 미국은 전쟁을 치렀으나 자국의 산업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아 경제적 여력을 갖고 있었다. 이 여력을 이용하여 식민지를 독식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식민지들을 독립시킨다는 명목으로 경제적 지원과 함께 미국은 자국의 식민지(미화해서 말하면 자유세계)에 포함시켰다.
소련은 유럽의 나라들과는 달리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수도에 까지 깊숙이 침략한 독일을 물리치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미국의 신생독립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맞서 혁명으로 산업화를 이룩한 소련도 승전국의 지위를 주장하면서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화 하였다.
미국은 식민지나 지배권역의 확대를 꾀하면서도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고 속임수를 쓰는 나라입니다.
1898년 4월 20일 미 의회는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고 동시에 전쟁에서 승리해도 쿠바를 병합하지 않겠다는 결의안도 채택했다.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 뛰어든 것은 남미로의 영토팽창에 있었다. 미국은 전쟁에 승리한 후에 쿠바를 보호령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명백한 약속위반이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은 쿠바의 철도, 광산, 사탕수수 회사를 접수해 버렸고, 미국의 산업은 남미 대륙의 경제를 침식해 들어갔다. 그중 미국의 연합 과일 회사는 남미 국가들의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까지 조정하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멕시코의 경우, 미국은 멕시코 자산의 43%, 석유시장의 50%를 독점해버렸다. 전쟁의 이유가 경제적인 문제였다는 점이다.
미국이 이라크 침략 목적은 자유세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라크 내에 친미 정권을 세우고 석유를 독점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의 석유를 통해서 OPEC 산유국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불과 10주에 불과한 '빛나는 소 전쟁(splendid, little war)'이었다. 이 전쟁에서 미군 전사자는 450명에 불과했다.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5200명의 미군이 죽었다. 원인은 말라리아와 황열병이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는 4년 동안 필리핀 독립군과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보았다.
이라크와의 전쟁도 일방적인 승리였다. 미군 전사자가 불과 130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라크 게릴라들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매주 3∼6명꼴로 미군이 전사하고 있다. 벌써 이라크 전 때보다 더 많은 미군이 전사하였다. 미군의 희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는 미군과 함께하는 동맹국들의 희생도 발생하게 될 것이다.
100년 동안 미국의 폭력성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횟수가 더 많아 졌다. 구소련의 몰락으로 견제 세력이 없어진 지금, 세계는 자칭 경찰국가에 의해서 더 많은 지구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은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죄의식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자신들은 세계의 모든 종족들을 개화시켜 관리할 책무가 있다는 논리를 확립 했습니다. 그래서 세계 정복이 그들의 의무가 됐습니다.
이승만은 일제 때부터 조선독립의 운명을 미국의 외교노선에 맡기자고 한 외세의존형의 인간으로서 독립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미국은 식민지 건설을 위해 일제 패망 전부터 이러한 이승만을 길러왔다. 
이승만은 항일투쟁을 목표로 민족의 단결을 위해 활동한 사람이 아니다.
정반대로, 해외에 있던 항일 독립단체들을 미국의 조정에 따라 파괴하고 와해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안중근 같은 항일애국투사를 테러리스트나 살인범으로 부른 사람(이승만)을 미국은 독립투사로 위장하여 초대 대통령으로 앉혔다.
우리민족은 나라의 분열을 원치 않았다. 분열에 앞장선 이승만 정권을 원치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의 희망에 의해 국민이 탄생시킨 정권이 아니고 미국이 한국인의 소망을 짓밟고 반대하는 민중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친일파들을 규합해 강제로 세운 정권 즉,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참여가 배제된 채 세워진 정권으로서 우리의 자주적인 정권이 아닌 오직, 미국의 대륙지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권이며 미국의 보호가 없으면 하루아침에 국민들에 의해 무너질 괴뢰 정권이었다.
이승만이 국가안보를 이유로 반공법을 만들었는데 우리의 국가가 어디에 있는가? 국가안보 보다는 국민들로부터 이승만의 안전을 보호 할 괴뢰 안보라 해야 맞는 말이 될 거다.
미국은 해방 후 김구 등 민족지도자 암살, 민중항쟁 탄압 등 미군정이 저지른 죄악을 조선인끼리 다툼으로 수습하여 자신들의 소행을 감추려고 이승만 괴뢰가 필요 하였다.
미군은 한국전쟁 포로들에게 고문과 생체실험을 행하고 북으로 가서 서방의 민간조사단에게 폭로할까 두려워 불법적으로 교환에 응하지 않고 석방해 버렸다
그리고는 허깨비 이승만에게 책임을 돌렸다. 포로들은 미군이 관리하는데 미군의 지시를 받는 이승만 괴뢰가 석방 하였다고 둘러댔습니다.
이렇게 포로교환 하기 전에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하고서 이제 와서 남한의 친일친미 기생세력들은 북한에 있는 포로를 석방하라고 지껄입니다.
미군이 남한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한국인 허수아비가 필요한 이유는 이와 같이 비난 받는 일은 허수아비에게 책임이 있다는 소리를 해서 자신의 소행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입니다.
미국은 팽창주의 야욕으로 일제 패망 전부터 한국 땅에 자신의 괴뢰정부를 세우기 위해 이승만을 관리하고 길러 왔습니다.
한반도 북부는 김일성의 독립 투쟁이 활발한 지역이었으므로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 남쪽에 이승만 괴뢰를 세웠습니다.
한반도 남쪽만 차지함으로써 소련, 중국 대륙과 좀 띄어서 국경이 정해지므로 은밀하게 대륙침공 전쟁 준비를 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이와 같이 미국은 우선 반도 남쪽을 지배권역에 넣고 다음엔 이를 발판으로 대륙으로의 더 큰 팽창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6·25전쟁의 원인은 그 보다 앞선 지구상에서 미국이 참전한 전쟁은 작은 전쟁에 있었고 작은 전쟁의 원인은, 미국의 태생적 본능인 팽창주의를 실행하게 해주는 도구일 뿐이다.
미국은 1866년 8월 함선 ≪셔먼≫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침략의 첫 발을 들여 놓은 때에 벌써 평양에 까지 침입하여 인민들의 재물을 강탈하고 부녀자들을 능욕하였으며 대포와 총을 마구 쏘아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그 후 미국은 ≪챠이나≫호, ≪쉐난도아≫호 등 함선들을 연이어 침입시켜 우리나라를 정복해 보려고 날뛰면서 온갖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다.
20세기 초부터 미국은 일제의 조선강점을 적극 지지하여 미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탄압하였고 장지연과 전명운 등 항일독립투사들을 처형하였다. 미국의 외교관 ‘스티븐스’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였다.
1948년 2월 5일에 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에 발생한 2.7 사건은 1948년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만의 단독 총선을 앞두고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여 일어났다.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을 실시하는 유엔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남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양군 동시 철수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 인민에게 맡기라.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동아일보의 사주)등 친일 반동파를 타도하라.
경상남도 밀양군에서는 2월 7일 이른 아침에 농민들이 지서 두 곳을 습격하여 경찰이 발포로 맞서면서 10여 명이 사살되고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합천군에서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농민들이 지서를 공격하여 역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와 유사한 충돌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나 2월 20일까지 2주 동안 진행되었다. 전체 참가 인원은 약 200만 명이며,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00여 명, 투옥된 사람은 8,500 명 정도로 추산된다.
1948년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둔 2월 9일 백범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 고함.〉라는 제목으로 단선단정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전 국민이 단선단정을 반대하였다.
이렇게 전 국민의 반대 속에서 탄생된 정권이 대한민국 이승만 친일파 정권이었다.
1948년 창군 당시의 군 수뇌부 인맥은 대부분 일본군·관동군 출신이었고  미군정에 고용됐던 친일세력들이 그대로 정권 상층부에 자리잡고 있어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였다.
악랄하게 굴었던 일제 앞잡이들이 해방후에도 그대로 경찰 조직에 기용되어 치안을 맡아 애국적 인사들을 탄압하였고 반정부 기운도 여전하였다.
미군정이 관동군 출신을 한국군의 구성의 주도세력으로 삼았던 것은 일제 때 만주에서 중국 인민군과의 전투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대륙을 회복을 위해 그들의 경험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미 군정청의 자금에 의해 운영되는 친일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배출한 단체)의 폭력에 시달리던 제주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 총선을 반대하여 일어난 1948년의 제주도 4.3 항쟁과, 제주항쟁을 진압하란 명령에 불복해서 일어난 여수·순천의 반란, 그리고 뒤이은 야산 유격대 등으로 남한의 민중들은 저항했다.
독립을 방해하고 다시 식민지노예로 삼으려는 외세와 친일매국노 치하에서 노예 가 되느니 자유인 으로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자 미군정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탄압하기 위해 박진경연대장, 최경록연대장, 송요찬연대장, 함병선연대장 등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지휘관을 임명했다.
친일세력들은 한국 민중들의 배척의 대상이 되어 불안전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 미군정은 그들 친일세력에게 진압을 맡겼다.
친일 세력들에게 진압을 맡기면 공을 세워 한국을 통치하고 있는 자신들로부터 확고한 지위를 부여받아 불안전한 매국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일본을 대신해서 자신이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일본이 하던 방식대로 친일세력을 기용하였다.
미국은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의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식민지 노예로 만들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괴뢰정부가 친일파가 아닌 지도자나 관료는 소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기용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승만은 온 국민이 반대해서 그의 명령에 따를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친일파들도 미군의 지시를 따르지, 허깨비 지시에 귀 기울이겠습니까? 
해방 후 김구 등의 민족 지도자를 수없이 죽인 사람은 허수아비 이승만이 아니고 미군 이었습니다.
이렇게 민족 지도자는 미 군정청이나 정부에서 기용하기는커녕 수없이 살해 했는데 소수였기 때문에 친일파들을 기용 했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해방직후 조선의 전 지역에서 조직된 각급 인민위원회들은 일본군대와 경찰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자치를 실시하여 사회의 안정을 보장하고 있었다.
일본은 항복하여 패망한 후에 자국으로 안전하게 귀국하기를 원하여 조선에 있는 민족지도자에게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치안을 담당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그들에게 치안을 맡겼다.
따라서 미국이나 소련 두 제국주의자들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조선을 점령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을 돕기 위해 왔다면 미군은 이런 우리의 자치 기구를 지지하고 도움을 줘야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해산시키고 친일세력으로 치안을 담당케 하였다.
미군정은 제주 4.3 이 발생 했을 때 평화적인 사태해결을 위해 협상했던 김익렬 연대장 등 일본군 출신이 아닌 장성은 교체시켰습니다.
군정장관 딘 소장은 제주에서 군정 당국 수뇌회의를 주재하고 떠나 면서 (5월6일). 전격적으로 제9연대장을 교체 하였다
그 동안 협상을 추진해 온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그 후임에 박진경을 발령한 것이다. 
박진경은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복무하면서 독립운동을 탄압한 인물이다.
미군은 제주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박진경을 진압군 지휘관으로 교체하였다.
이렇게 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 중령은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 학살했으며, 딘 장군은 이 학살을 보고받고 ‘성공한 작전’으로 평가하고 그를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이로서 제주도민 4만 명이 희생되고 살아남은 사람도 부모형제를 잃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1948년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자 국군은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토벌에 돌입했으며 작전 중 산간마을을 소개하였다. 빨치산을 토벌하던 제3연대 제2대대 소속 1개 소대는 산청군 시천면 덕산국민학교에 주둔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49년 7월 18일 빨치산의 공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제2대대장의 인솔하에 출동한 국군은 신천리 인근 마을에 불을 지르고 강변과 신천국민학교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사살, 척살의 방법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제2대대 주둔지인 덕산국민학교와 제3연대 정보과 군인들이 본부를 차려놓은 농회창고에서 마을 사람들을 연행하여 취조한 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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