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전사들의 북유럽 신화여행(2) -강응천-
3. 신과 거인의 대결
로키, 세상을 파멸로 이끌 세 아이를 낳다
로키가 마침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아스가르드에 시긴이라는 조강지처가 있었다.
그런데도 꾀돌이 로키는 만족할 줄을 모르고 거인국으로 가서 거인족 여인 앙그르보다와
살을 섞어 둘 사이에 세 명의 괴물 자식이 태어났다.
첫째는 뱀 요르문간드였다. 이 녀석은 치명적인 독을 뿜어대는 독사였다. 둘째는 늑대 펜
리르였다. 이 녀석은 얼마나 힘이 센지 날고 기는 거인들이 몇 명씩 달려들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셋째는 헬이라는 여자아이로 이 녀석만이 유일하게 사람하고 닮은 모양을
타고났다. 그러나 괴상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별처럼 많은 여자아이들 속에 데려다놓아도 금
방 알아볼 정도였다. 그녀의 상체 피부는 분홍빛으로 아주 비정상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엉덩이 아래 피부는 썩은 시체 같은 검푸른 색이었다.
항상 말썽만 일으키고 다니며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로키가 자식들을 낳았다는 소문을
들은 신들은 일급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 그들은 운명의 여신들이 지키는 우르드 샘가에 모
여 대책을 숙의했다. 운명의 여신 세 자매는 신들에게 말했다.
그애들의 엄마는 사악하죠. 하지만 그 아버지인 로키에다 비할바는 아니죠. 그런 부부 사
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면 오죽하겠어요? 그애들은 끝까지 여러분을 괴롭히고 위험에 빠뜨
릴 겁니다.
신들은 로키의 아이들을 체포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딘의 명령을 받은 체포조가 야음을 틈
타 요툼헤임으로 잠임했다. 그들은 앙그르보다의 침실로 침투하여 그녀가 눈을 비빌 틈도
없이 재갈을 물리고 몸을 묶었다. 이어서 그들은 아이들을 꽁꽁 묶어 오딘 앞에 대령하였다.
오딘은 뱀 요르문간드를 집어들어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바다에 던졌다. 뱀은 허공을 가
르며 날아가 바다 밑바닥까지 곤두박질 쳤다. 그곳에서 녀석은 플랑크톤과 물고기들을 잡아
먹으며 자라났다. 다 자라났을 때는 몸이 어찌나 길어졌는지 바다 빝에서 대지 전체를 감사
고도 남아서 제 꼬리를 제 입으로 물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뒤이어 오딘은 여자아이 헬을 주저없이 아스가르드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녀는 세상
저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니플헤임의 안개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딘은 그녀에게
명령했다.
그곳에 내려가서 병들어 죽거나 늙어 죽은 자들을 돌보거라.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무엇을 먹더라도 항상 그곳을 죽은 자들과 나누어 먹어야 하느니라.
헬은 니플헤임에 집을 지었다. 파멸의 낭떠러지 라는 언덕 위에 거대한 성벽을 쌓고 그
안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헬의 궁전 엘류드니르(죽은 자의 집)는 두터운 두 개의 문을 통과
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헬의 하인과 하녀는 움직임이 하도 굼떠서 과연 움직이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헬이 음식을 담아 먹는 접시는 배고픔 이라
불렸고, 음식을 썰어 먹는 칼은 기근 이라고 불렀다. 헬이 누워 잠을 청하는 침대 이름은
병상 , 침실을 가려주는 커튼의 이름은 가물거리는 불행 이었다.
이제 늑대 펜리르만이 남았다. 이 녀석은 워낙 천방지축이라서 멀리 보내는 것보다는 신
들 가까이 두고 직접 감시하기로 했다. 펜리르는 겉보기에 다른 늑대와 조금도 다를 게 없
었으므로 신들은 그가 아스가르드의 푸른 벌판을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래도 워낙
사나운 놈이라 웬만한 신은 가까이 가기를 거려했다. 용감하기로 소문난 오딘의 아들 티르
만이 나서서 펜리르에게 먹을 것을 주며 달랬다.
펜리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아무래도 더 이상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 같
았다. 게다가 운명의 여신들은 끔찍한 소리가지 하고 다녔다.
보통놈이 아니야. 두고 보라고. 운명의 그날이 오면 이 늑대가 오딘을 잡아먹고 말걸.
그 소리를 들은 오딘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당장 늑대의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지만 이곳
은 성역 아스가르드였다. 그 어떤 생명체의 피로도 더럽힐 수 없는 곳이다. 어떤 일이 있어
도 늑대가 날뛰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어놓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오딘의 분부를 받은
신들은 단단한 쇠사슬을 준비하여 펜리르에게 갔다.
늑대야, 늑대야. 이 사슬을 끊어 보일 수 있겠니?
펜리르는 쇠사슬을 샅샅이 훑어보고는 말했다.
제법 단단하게 만드셨군. 하지만 이 정도쯤은 엿가락보다 간단하게 처치할 수 있지.
신들은 이놈 봐라 하는 표정으로 늑대의 몸에다 쇠사슬을 칭칭 감았다.
그걸 지금 묶었다고 묶은 거야?
늑대는 이죽거리면서 네 발에 힘을 주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불근 힘을 주었다. 그러자
쇠사슬은 마치 과자 부스러기처럼 툭툭 떨어져 나갔다. 깐짝 놀란 신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훨씬 강한 사슬을 만들었다. 이 사슬의 고리 하나하나는 부둣가의 닻보다도 컸다. 나르
기는커녕 들 수조차 없을 만큼 무거운 사슬이었다.
늑대야, 늑대야. 이것도 끊어 볼래? 그러면 아마 온 세상이 네 괴력에 찬사를 보낼걸.
펜리르는 한눈에 사슬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펜리르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게다가 녀석은 당돌하게도 이런 소리까지 할 줄 알았다.
모험을 하지 않고는 명성도 얻을 수 없지.
신들은 꼴값 떨고 있네 하는 말을 삼키며 녀석의 목과 몸통과 다리에 사슬을 감았다.
그걸 지금 묶었다고 묶은 거야?
늑대는 다시 이죽거리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슬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쩔렁거렸다.
그러나 한번에 끊어져 나가지는 않았다. 펜리르는 땅바닥에 마구 뒹굴었다. 어느 것이 늑대
의 근육이고 어느 것이 사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온몸에 힘을 주자 사슬은 다시 한 번 힘
없이 끊어져 버렸다.
사슬을 이루고 있던 수백 개의 고리들은 와장창 무너져 내리고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신들은 극심한 절망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이대로라면 오딘이 놈의 쩍
벌린 아가리속으로 들어가는 건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오딘은 궁전을 왔다갔다하며 심각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사슬을 만들어야 하는데,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
가?
오랜 시간 괴로워하며 생각에 잠겼던 오딘은 마침내 이마를 탁쳤다. 그는 프레이르의 전
령인 스키르니르를 검은 난쟁이들이 사는 나라인 스바르트알프헤임으로 보냈다. 스바르트알
프헤임에서는 험상궃게 생긴 수백 명의 난쟁이들이 불꽃을 튀기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아홉 세계의 지배자인 오딘의 부탁을 받고 왔네. 지금 아스가르드에서는 펜리르라
는 늑대 녀석 때문에 비상이 걸렸네. 자칫 하면 오딘이 그놈에게 잡아먹힐지도 모르게 됐지.
그러니 달라는 대로 황금을 줄 테니까 부디 아무도 끊을 수 없는 단단한 사슬을 만들어주
게.
스키르니르의 사정을 들은 난쟁이들의 누이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빛났다. 그들은 자기
들기리 뭐라고 수군거리며 작업에 착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비단 끈처럼 부드럽
고 유연한 끈을 만들어 스키르니르에게 주었다.
이 끈은 글레입니르라고 합죠. 모두 여섯 가지 재료로 만들었지요.
스키르니르는 끈이 너무나 가볍고 부드러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여섯 가지란 뭔가?
고양이가 움직일 때 내는 소리, 여자의 콧수염, 산의 뿌리, 곰의 힘줄, 물고기의 숨, 새의
침, 이렇게 여섯 가집죠.
그것들로 끈을 만들면 아무도 끊을 수 없는 이유가 뭔가?
우리 난쟁이들의 재주를 의심하시는 거요? 생각해보시오. 고양이가 우질일 때 왜 소리가
나지 않는가를. 여자들한테는 왜 수염이 나지 않는지를. 그리고 산에 뿌리가 있는지 없는지
당신이 증명해 보일 수 있소? 이처럼 이 여섯 가지는 당신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오. 우리는 그런 재료들을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이처럼 중요한 물건을 만들 때 씁니다.
스키르니르는 쾌재를 부르며 아스가르드로 뛰어올라갔다. 신들은 처음에는 스키르니르처
럼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설명을 듣고는 모두가 희색이 만면했다. 그들은 글레입니르를 들고
아무 거리김없이 펜리르에게 갔다. 그들은 펜리르를 데리고 세상 끝의 호수 한가우데 있는
링비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신들은 비단결 같은 끈을 내보이며 펜리르를 놀렸다.
늑대야, 늑대야. 너 이 끈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래봬도 제법 질긴 끈이란다.
글세 이렇게 가느다란 끈을 바보 같은 우리들은 한 명도 끊을 수가 없었지 뭐냐? 너라면
끊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로키의 아들 늑대 펜리르는 결코 저능아가 아니었다. 녀석은 끈 글레르입니르를
자세히 뜯어보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것들 보라고. 이렇게 가느다란 끈을 끊어 보인다고 해서 그게 내 명성에 무슨 도움이
돼? 이 먼데까지 와서 날 놀리는 거야, 뭐야?
늑대는 다시 한번 끈을 힐끗 보고 나서 이어 말했다.
만일 이 끈을 만들 때 무슨 마법이라도 걸었다면 너희들이나 잘 간직하라고. 난 취미 없
으니까.
그러자 신들 가운데 한 명이 다급하게 나서서 펜리르를 달랬다.
이봐, 자네는 그 굵은 쇠사슬도 끊었던 막강한 늑대 아닌가? 이 따위 끈을 그렇게 두려
워하는 이유가 뭐야?
다른 신도 나섰다.
만약 자네가 이 끈을 끊지 못하면 우리가 풀어줄 테니 우릴 믿으라고.
펜리르는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 거렸다. 시들은 그 흉측한 모습에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
났다. 펜리르는 눈을 부라리며 시들에게 대들 듯이 말했다.
내가 이 끈에 묶이면 너희들이 나를 잘도 풀어주겠다. 용용 죽겠지 하면서 아마 죽을 때
까지 날 갖고 놀려댈걸.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펜리르는 뱃속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
는 기분 나쁜 목소시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 끈은 기분나빠. 하지만 너희들이 날더러 겁쟁이라고 놀릴 생각을 하니 그것도
못할 노릇이야. 이 일을 시작한 건 너희들이니 한 가지 조건을 걸고 내가 그 끈을 풀어보겠
어. 만의 하나 내가 끈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너희들 중에서 한 명이 내
입 안에 손을 집어넣으라고. 너희들이 나를 풀어준다는 걸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말이야.
아무도 예기치 못한 섬뜩한 제안이었다.
신들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용감한 신 티르가 앞으로 나섰
다. 그는 말없이 오른손을 들어 펜리르의 커다란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다음 순간 신들은 순식간에 마법의 끈으로 펜리르를 붙들어 매었다. 펜리르는 마치 묘기
를 보이는 스턴트맨처럼 안간힘을 다해 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그러나 세상에 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마법의 끈은 이전의 쇠사슬과는 달랐다. 늑대가 기를 쓰면 쓸수록 끈은 더
욱더 단단히 몸통을 옭아매었다.
늑대는 으르렁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 바람에 용감한 신인 티르는 오른손을 통째로 잃
었다.
신들은 늑대를 묶은 비단 끈 끄트머리에다 쇠사슬을 이었다. 그들은 거대한 바위에 구멍
을 내고 이 쇠사슬을 그 구멍 속으로 통과시켜 뺀 다음 그 끝을 매듭지었다. 그리고는 바위
를 땅 밑 1.5킬로미터 정도 깊이에 받아 넣은 뒤 또다른 바위덩어리를 그 위에 얹었다. 펜리
르는 이를 갈면서 피로 물든 아가리를 쩍 벌렸다. 그러자 신들 가운데 한 명이 칼을 빼들고
는 늑대의 주둥아리에다 힘껏 내리꽂았다. 늑대는 끈으로 온몸이 묶인 데 이어 칼로 재갈까
지 물린 것이다. 울부짖는 늑대의 입 안에서 침이 흘러나와 강을 이루었다. 섬에서 호수로
들어가는 이 강은 그후로 본(기다림의 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강의 이름대로 로키의 자식들에게는 기다림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미드라그드 뱀은 세
계를 감싼 채 바다 밑에서, 헬은 시체와 안개에 둘러싸인 채 니플헤이에서, 그리고 늑대 펜
리르는 링비섬에서 묶인 채 최후의 결전 라그나랙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르, 여장을 하고 거인국으로 가다
아스가르드에서 내로라 하는 미용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매우 어려운
일에 매달려 있었지만 무엇이 즐거운지 시종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들에게 맡겨진 일이
란 토르를 아름다운 신부로 꾸미는 일이었다.
전쟁의 신들인 아스가르드 신족 중에서도 토르는 가장 우락부락한 사나이였다. 구런 그가
지금 뾰루퉁한 모습으로 앉아서 머리를 볶고 얼굴에다 분을 처바르고 있다. 아스가르드 경
비대장 헤임달은 옆에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미용사들에게 이것저것을 주문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토르를 아름다운 신부로 꾸며야 해. 허리춤에 열쇠다발도 채워주고 아스가
르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혀. 치마는 길수록 좋아. 목에는 프레야의 목걸이를 걸어줘.
가슴은 더 불룩하게...그렇지! 거기다 브로치를 좀 달아줘.
남자 신들이 가끔씩 다가와서 토르를 보며 놀려댔다. 그럴 때마다 토르는 도끼눈을 하고
헤임들을 노려보았지만 헤임달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좋았어. 그리고 모자는 이걸 씌워. 어이! 면사포 가져와.
토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헤임달이 달려들어 그의 두 볼을 쥐고 흔들었다.
가만히 좀 있어요! 화장한 거 다 지워지지않소.
토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무어라고 중얼거리자 이번엔 로키가 다가와서 윽박질렀
다.
이봐, 토르! 이게 어디 자존심 내세울 일이야? 신들의 운명이 걸린 문제 아닌가? 제발
국 참고 신부처럼 조신하게 있으라고.
토르가 신부화장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신들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
리인가? 제발 꾹 참고 신부처럼 조신하게 있으라고.
토르가 신부화장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신들의 운명이 걸려 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
리인가? 사태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어느날 토르가 잠에서 깨어보니 그의 도끼 묠니르가 보이지 않아다. 그의 머리카락이 쭈
뼛 일어섰다. 아사 신족 가운데 그의 도끼를 훔쳐갈 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틀림없이 도둑맞은 거야. 신들에게 해를 입히려는 자들의 소행이라고.
아스가르드에는 비상이 걸렸다. 신들을 지켜주는 도끼가 없어진 사실이 알려지면 머잖아
거인족이 쳐들어와 아스가르드를 박살낼 것이다.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로키는 프레야에게
갓 다시 한번 그녀의 매가죽을 빌려 입었다. 그리고 훨훨 날아서 거인들의 나라 요툰헤임으
로 갔다. 신과 거인 양쪽 모두와 통하는 로키로서는 토르의 도끼를 훔쳐갈 만한 자가 누구
라는 것쯤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는 거인 트림에게 바로 날아갔다.
어이, 로키! 오랜만일세. 그래, 시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뭐 좋은 소식이라도 가져왔
나?
능청을 떠는 트림에게 로키는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이봐,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도끼를 훔쳤어? 설마 토르가 어떤 자라는 걸 모르지는 않겠
지? 경치기 전에 어서 돌려줘.
틀은 로키의 어깨를 두드리며 낄낄거렸다.
자네 넘겨짚는 솜씨는 여전하구만그래. 하지만 토르가 제아무리 사납다고 해도 먼저 도
끼를 찾아야 날 어떻게 하지 않겠나? 가서 전하게. 도끼를 찾고 싶거든 프레야를 내 신부로
달라고.
로키는 우거지상이 되어 아스가르드로 돌아갔다. 그는 먼저 프레야의 집으로 달려갔다.
오 아름다운 미녀여, 면사포를 쓰세요.
로키는 매가죽을 돌려주며 다짜고짜 이렇게 다그쳤다.
어서 신부 차리을 하고 나랑 같이 요툰헤임으로 가시다. 글쎄, 트리이란 친구가 당시을
좋아하게 된 모양이오.
프레야는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녀가 어찌나 화가 났는지 집이 다 덜덜 떨
리고 아름다운 브릿ㅇ 목고리의 고리가 끊어져 구슬들이 바닥에 굴러 떨어질 정도였다. 로
키는 그녀가 바로 그 목걸이 때문에 난쟁이한테 몸을 주던 일을 떠올리며 능긂ㅈ게 웃었다.
프레야는 로키의 생각을 읽었는지 얼굴이 홍당무가 되면서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당장 내 방에서 나가요!
오딘은 신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도끼가 거인족의 수중에 있으니 전쟁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묘안이 없어서 모두들 끙끙 앓고 있을 때 경비대장 헤임달이 나서서 말했다.
토르에게 면사포를 입힙히다.
신들 사이에는 잠시 어리둥절한 침묵이 흐른 뒤에 폭소가 터져 나왔다. 토르의 얼굴은 붉
으락푸르락했다. 그러나 헤임달은 굽히지 않았다.
방법은 하나뿐이오. 결자해지. 토르가 프레야로 분장하여 놈에게 접근하도록 합시다.
신들은 만장일치로 헤임달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토르는 거구의 미녀로 탈바꿈한 것이다.
로키가 단장을 마친 토르를 황홀한 눈매로 훑어보면서 말했다.
야, 이거 대단한 미인일세그려. 그럼 내가 자네 시녀가 돼서 동행하겠네.
일찍이 그리스 영웅 아킬레스는 트로이 전쟁에 가지 않으려고 여장을 한 채 숨어 있었다
고 한다. 그러나 아스가르드의 영웅 토르는 거인과의 전쟁을 위하여 여장을 한 채 적지로
달려가는 것이다.
신부와 시녀가 트림의 집에 도착한 것은 이른 저녁이었다. 성대한 환영식이 벌어졌고 하
인들은 맛난 음식을 내왔다. 트림은 면사포를 쓴 토르를 상석으로 안내했다. 바로 옆에는 로
키가 앉았다.
토르는 긴 여행길에 몹시 시장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고운 자태이 여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앉은 자리에서 황소 한 마리를 먹어치우고 잇따라 연어 여덟 마리까지 해치웠다.
여인들을 위해 마련된 음식들은 순식간에 토르의 뱃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뿔잔에 담긴 술을 석 잔이나 연거푸 들이켰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트림은 로키에게 물었다.
아니 무슨 저런 여자가 다 있어? 우리 거인국에서도 저렇게 먹얻는 여자는 본 일이 없
어.
로키는 간드러진 여인네의 목소리를 흉내내 재치있게 대답했다.
아이, 모르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우리 아가씨가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렸으면 그러시겠어
요. 저분은 말예요, 꼬박 여덟밤을 한끼도 안 먹고 굶었거든요. 오늘을 기다리면서 말이죠.
그러니까 말이죠, 첫날밤에 대한 기대도 남다르시답니다. 오늘밤에 힘 좀 쓰셔야겠어요. 호
호...
로키는 트림에게 추파까지 던졌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트림은 더욱 안달이 났다. 그는 덥
석 신부의 머리를 잡고 면사포를 젖히려 했다. 이제나저제나 신부에게 입을 맞추려고 벼르
고 있었는데 로키의 말을 듣고 보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으악, 저 여자 눈 좀 봐! 프레야는 눈이 원래 저렇게 무섭게 생겼나? 꼭 불타는 것 같아
서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로키가 흐느적거리며 트림에게 다가가 겨드랑이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일으켰다. 그리고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생각해 보셔요. 아가씨는 오늘을 기다리느라 드시지만 못한 게 아니라 주무시지도 못했
다고요. 그러니 눈에 핏발이 서는 건 당연하죠. 오늘밤에 잘 어루만져 주세요.
그 말을 듣는 트림의 목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그는 벌떡 일어나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뭣들하느냐? 어서 도끼 묠니르를 가져와라. 우리의 바르 신에게 신성한 결혼 서약을 하
려면 망치가 있어야지.
마침내 도끼가 나타났다. 난쟁이 에이트리 형제가 신들을 위해 만들어준 선물 가운데 가
장 귀한 보물인 도끼 묠니르가 돌아온 것이다. 토르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붉
은 턱수염만큼이나 붉었다.
거인 트림이 내미는 도끼를 손에 쥐자마자 아름다운 신부는 광포한 천둥신으로 돌아갔다.
그는 거추장스러운 면사포와 긴 치마를 북 찢어버리고 닥치는 대로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
다. 트림은 머리끝부터 발끝가지 곧게 두쪽이 났다. 그리고 축하연 자리에 있던 모든 거인이
똑같은 운명을 당했다. 그가 얼마나 광분하여 날뛰었는지 하마터면 로키마저 저세상의 객이
될 뻔했다. 잃어버린 도끼 묠니르는 그렇게 토르의 손으로 돌아와 제몫을 다했다.
토르, 거인국을 여행하다 1
여름철이 되었다. 할 일이 없어지자 토르는 우트가르드로 원정을 떠났다. 우트가르드는 거
인국 요툰헤임에 떡 버티고 선 거인들의 성이었다. 요툰헤임을 활보하고 다니는 것은 언제
든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거인 전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우트가르드 성안으로 들억는 것은
이맍만한 모험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로키가 동행했다.
그들은 새벽닭이 울기 전에 두 마리 염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길을 떠났다. 거인 나라로
가기 전에 그들은 우선 인간 세계인 미드가르드를 산책하는 기분으로 달렸다. 마치 소풍 나
온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며 여행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마침 외딴 농가가
눈에 들어왔다. 집이 얼마나 허름하고 납작한지 지붕을 덮은 풀이 땅바닥에서 자라는 것처
럼 보였다.
주인 부부와 아이들은 집 밖으로 나와서 방문객을 맞았다.
뉘신지요?
에헴. 이쪽은 인간의 보호자인 신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하신 토르 님이시고, 나는 가장
지혜로운 로키 님이니라.
로키는 장난스레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네 식구는 파랗게 질려 덜덜 떨고 떨었다.
겁내지 말고 하룻밤만 재워주게나
토르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하자 농부가 그들을 집안으로 안내했다. 부인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귀한 손님들께서 오셨는데 찬거리가 변변치 않아 어쩌죠? 야채도 있고 수프도 있지만 고
기는 없거든요."
토르는 안됐다는 표정으로 부인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렇게들 어렵게 산단 말인가? 좋아! 그럼 내가 한턱 쓰지. 저 염소 녀석들을 잡아먹자구
토르는 힘들이지 않고 염소 두 마리를 잡고 가죽을 벗겼다. 농부 가족은 하루 종일 다리
품을 파느라 고생했을 염소가 불쌍했지만 오랜만에 고기를 먹게 되어 입맛을 다셨다. 토르
는 고기를 토막으로 잘라 부엌 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벗겨낸 염소 가죽은 불에서 좀 떨
어진 곳에다 펼쳐놓았다.
모두 명심하게. 고기를 먹고 나면 뼈는 반드시 그대로 이 가죽 위에다 던져야 해. 알았
지?
토르는 영리하게 생긴 이 집 아들 티알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 이윽고 염소
고기가 알맞게 익어 두 신과 네 인간은 뜰에 나와 앉아 별을 보면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했
다. 염소 가죽 위에는 금방 뼈가 쌓였다. 그런데 티알피는 염소 넓적다리 뼈를 핥고 또 핥다
가 골수가 먹고 싶어졌다. 그는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토르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타 자기 칼로 뼈를 재빨리 잘랐다. 그리고 뼈 안에서 배어나오는 골수를 정신없이 핥
은 다음 순간 그 골격에 살이 입혀진 후 가죽이 그 위를 뒤집어 씌웠다. 간밤에 먹어치웠던
염소들이 감쪽같이 부활한 것이다.
염소들은 음매 하고 울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토르는 자기 눈을 으심했다. 염소 한 마리
가 뒷다리를 절고 있었던 것이다. 토르는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누구냐? 누가 내 염소의 넓적다리 뼈를 부러드렸느냐?
농부 가족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토르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걸 보고 그들은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토르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도끼를 치켜들었고 모녀가 비명을 올렸다.
도낏날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은 순간, 티알피가 소리를 질렀다.
제발 살려주세요, 토르님. 제가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그만 그놈의 골수를 먹고 싶어
서...저희들 당이랑 밭, 집 뭐든지 다드릴 테니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토르는 천둥신이다. 천둥은 한번 내리치면 무섭게 내리치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 그처럼
화를 내던 토르도 벌벌 떠는 농부 가족을 내려다보자니 딱하다는 생각에 솟구치던 피가 가
라아낮았다.
그는 도끼를 내려놓고 티알피에게 물었다.
네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
옆에서 티알피의 예쁜 여동생 로스크바가 나섰다.
오빠는 이 세상에서 걸음이 제일 빨라오. 아마 신들도 오빠를 따라잡지는 못할 걸요.
그러자 토르는 염소들을 농가의 우리로 몰고 가면서 말했다.
그러면 됐다. 우리는 우트가르드로 가는 길이니 티알피를 첨병으로 데려가겠다. 그리고
로스크바도 함께 가면서 잔심부름을 좀 하거라. 그걸로 더 이상 염소 문제는 얘기 않겠다.
토르는 염소와 수레를 농부에게 맡겨두고 길을 떠났다. 로키와 티알피 남매가 그 뒤를 따
랐다.
토르 일행은 거인국으로 접어들었다. 납빛 하늘 아래 납작한 구릉들이 펼쳐져 있는 이곳
은 토르와 로키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우트가르드
성으로 가야 했다. 로키뿐만 아니라 토르 얼굴에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트가르드 성은 거인국 해안에서 배를 타고 반나절 정도 걸리는 섬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섬의 바닷가0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그곳에서 얼마쯤 안으로 걸어가다 보니 울창한 숲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 숲은 어찌나 넓은지 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숲을 지나야 할
것 같았다.
일행은 숲으로 들어섰고 티알피가 정찰병 노릇을 했다. 얼마 후 티알피는 숲 속에 빈집이
있다고 알려왔다. 그 집은 모양이 매우 특이했다. 입구는 문도 없이 툭 터져 있었고, 기둥도
없었고 천장이며 벽, 바닥이 이음새 없이 일체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발할라성도 쏙 들어
갈 만큼 큰 집이었지만 창문이 하나도 없어서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동굴처럼 어두웠
다.
이상한 집일세. 아무튼 비는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 눈 좀 붙이세.
로키가 바닥에 드러눕자 토르와 남매도 함께 쓰려져 배고픔도 잊은 채 곯아떨어졌다. 그
들은 한밤중에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었다. 그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와 그
넓은 집이 다 들썩거릴 정도였다.
지진이야!
토르가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며 외쳤다. 남매는 무서워서 꼭 껴안았다. 그들은 집이 무
너지면 깔려 죽을까 봐 입구를 찾아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작스럽게 천둥 같
은 소리는 그쳤다. 로키가 말했다.
밖은 안보다 위험하니까 그냥 있어. 그보다는 도대체 이 집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좀
자세히 살펴보자구. 내부 구조를 알고 있어야 유사시에 대쳐할 테니까.
넷은 집안을 더듬고 다녔다. 칠흑 같은 어둠속이었지만, 그들은 드넓은 본채 옆에 딸린 작
은 방을 발견했다.
여기서 자는 게 낫겠어. 설령 거인이 쳐들어와도 여기서는 싸울 수 있을 테니까.
일행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 누웠고 토르는 도끼를 손에 쥔 채 문간에 앉아서 눈을 감았
다.
그러나 더 이상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샌 그들에게 아침
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토르는 도끼를 들고 집안을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집안에는 특별히 이상한 낌새는 없었
다. 그러나 집 밖을 살피러 입구 쪽으로 걸어가던 토르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이 커
다란 집채보다도 더 큰 거인의 머리통이 입구 바로 바깥쪽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머리의 주인공은 집 앞의 빈터를 꽉 채우고 누운 채 쿨쿨 자고 있었다.
어젯밤 지진인 줄 알았던 소리는 이 녀석이 코 고는 소리였어.
토르는 넋두리하듯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만났던 어떤 거인도 이 자와 비교한다면 장난감
병정에 불과했다. 토르와 일행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거인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토르가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스크리미르. 당신은 토르지? 당신이 온다는 얘기를 들었소.
거인은 우르릉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두 눈을 희번뜩이며 무언가를 찾았다.
당신들이 내 장갑 치웠소? 아, 여기 있군.
그가 장갑이랍시고 들어올린 것은 놀랍게도 토르와 일행이 들어가 자던 그 거대한 집이었
다. 거인이 그 벙어리 장갑을 끼는 것을 본 티알피의 여동생 로스크바는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일행이 집안을 뒤진 끝에 찾아낸 작은 방은 이 벙어리 장갑의 엄지손가락
부분이었다.
장갑을 낀 스크리미르가 물었다.
어떻소? 초행길이신 모양인데 나랑 함께 움직이겠소?
토르는 순간 망설였지만 두려움 때문에 거절하는 인상을 주기는 싫었다.
좋소. 우리는 우트가르드로 가는 중이니 같은 방향이면 우릴 좀 안내해 주시오.
그들은 함께 식사한 뒤 스크리미르의 제안에 따라 짐을 합쳤다. 거인은 토르 일행의 배낭
에서 물건들을 끄집어내서 자신의 거대한 자루에 집어넣고 짊어졌다. 그리고는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가자 토르 일행은 그를 따라잡느라고 젖먹던 힘까지 다 내야 했다. 가까스
로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스크리미르를 따라잡았을 때 이 거인은 참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
었다. 그는 퉁명스럽게 일행에게 말했다.
이 주변에는 집이라곤 없소. 그러니 불편하겠지만 이 참나무들 아래서 쉬고 갑시다. 아
흠, 종일 걸었더니만 졸음이 몰려오네.
남매는 고향이 그리워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인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로스크바에
게 저녁 준비를 하라고 자루를 던져준 뒤 자기는 벌렁 드러누워 그대로 꿈나라로 가고 말았
다. 그가 코를 골자 새들이 멀리 날아가 버리고 내뿜는 콧김에 나뭇잎들이 요란하게 울부짖
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불은 피워 음식을 만든다는게 불가능했다.
피가 거꾸로 치솟은 토르가 도끼 묠니르를 번쩍 들어 거인의 이마를 냅다 내리쳤다. 그러
자 거인이 일어나더니 이마를 이리저리 어루만졌다.
어라? 방금 내 이마에 나뭇잎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네.
다시 드러눕는 거인 앞에서 일행은 입을 딱 벌렸다. 식사 준비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거인은 다시금 천둥처럼 코를 곯아대었고 로키와 남매는 귀를 틀어막은 채 오만상을 찌푸렸
다. 참다 못한 토르는 다시 한번 묠니르를 들고 거인의얼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거인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쳤다. 도끼는 거인의 머리를 파고 들어가 골에
까지 박혔다.
스크리미르가 다시 일어났다.
아니 또 뭐지? 이번엔 도토리가 떨어졌나 보네. 이봐, 토르 양반. 거기 올라가서 뭘하는
거야?
토르는 멋쩍게 얼버무리며 일행 곁으로 갔다. 그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복수를 다짐
하며 자리에 누웠다. 날이 밝기 직전에 그는 다시 한번 거인의 코고는 소리를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다시 묠니르를 들고 가서 이번에는 거인의 관자놀이를 향해 세게 내리
쳤다. 도끼자루까지 거인의 살 속에 파묻히는 강타였다.
스크리미르가 깨어나 뺨을 비볐다.
허참! 웬 놈의 새들이 남의 얼굴에다 똥을 싸갈긴다지? 그런데 토르, 당신은 그렇게 잠을
안 자도 괜찮소?
토르는 말문이 막혔다.
거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어험, 어쨌거나 날이 밝아버렸군. 그럼 다시 출발해 볼까? 우트가르드는 이제 다 왔소이
다. 그런데 도대체 당신들 같은 난쟁이들이 그곳엔 왜 가려 하시오? 당신들 눈엔 내가 꽤
커보이는 모양인데, 우트가르드에 한 번 가보쇼. 나 정도는 세 살 난 어린애밖에 안 돼 보일
테니까
거인은 눈치를 못챘지만 토르의 안면 근육에 심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다른 세 명도 기
가 질리는 표정으로 거인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거인은 실실 웃더니 갑자기 표정을 싹
바꾸며 차디찬 음성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
충고 하나 할까요? 우트가르드-로키가 다스리는 거인 나라에서는 당신네 같은 피라미들
이 잘난 체 하는 꼴은 결코 그냥 넘기지 않을 거요.
토르는 심한 모욕감에 사로잡혔지만 서서 듣기만 할 뿐 다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거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그는 자루를 풀어 토르 일행의
짐을 내준 뒤 다시 자기 짐을 싸들고 북쪽으로 발걸으을 옳기면서 말했다.
나 같으면 여기서 그냥 집으로 돌아갈 텐데...그래도 꼭 우트가르드로 가야겠다면 여기서
동쪽으로 걸어가면 되오.
토르 일행은 망연자실한 채 그의 거대한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토르, 거인국을 여행하다 2
토르 일행은 우트가르드 행을 감행했다. 성벽이 너무나 높아서 꼭대기를 보려면 고개를
젖혀야 할 정도였다. 어쨌든 그들은 기나긴 장저으이 끝에 다다랐다는 생각에 기뻤다.
크면 클수록 요란하게 무너지지.
토르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도끼를 어루만졌다. 그는 도끼 묠니르를 들고 철제 대문을 깨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스크리미르에게 당한 모욕이 십년 묵은 체증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대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완력보다는 머리를 서야지.
로키가 그렇게 말하면서 대문을 가로지른 빗장 사이로 스며들어갔다. 몸이 여윈 남매도
어렵지 않게 로키를 따라했다. 토르는 자존심 때문에 머뭇거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간신
히 빗장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토르는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집을 향해 걸어갔다. 열려 있
는 문 안으로 들어가자 스크리미르가 말한 대로 거대한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면서 토르 일행
을 흘겨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비웃음이 가득 어려 있었다. 집 끝에는 거인 하나가 위엄을
부리며 앉아 있었다. 토르는 바로 그가 우트가르드-로키, 그러니까 거인 제국의 제왕이라고
판단했다.
반갑소.
토르가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알고 있소!
우트가르드-로키가 토르의 말을 가로챘다.
다른 세계에서 오셨다고 말하려던 참이죠? 오다가 재미없는 일도 만났을 테고. 그리고
당신 이름이 바로 오만방자하기로 소문난 토르라는 것도 밝히려 했겠지.
토르는 턱을 치켜들었지만 거인들 사이에 둘러쌍니 터라 함부로 나갈 수는 없었다.
그제야 우트가르드-로키는 토르를 바로 보았다.
흠, 당신은 보기보다 강할 것 같군. 당신이 잘하는 게 뭐가 있지? 그리고 당신 친구들은
또 뭘 할 줄 알고? 뭐라도 하나 확실하게 하는 자가 아니면 이곳에 머물 수가 없는데.
토르가 제대로 대답을 못하고 있자 뒤로 물러나 있던 로키가 나섰다.
말씀하시는 게 어쩐지 듣기 거북하군요. 하지만 원한다면 하나 보여드리죠. 음식을 빨리
먹는 걸로 말하자면 이 안에서 날 당할자가 없을 겝니다.
우트가라드의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로키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대단한 재주게군. 어디 한번 시험해 보세.
우트가르드-로키는 둘러서 있던 거인들 가운데 로기란 자를 불러내 로키와 맞대결 시켰
다.
나무쟁반에 내온 음식을 로키는 어지간히 빨리 해치웠지만 어찌 된 일인지 로기를 당할
수는 없었다. 로기는 음식뿐만 아니라 나무쟁반마저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로키가 두 손들고 항복하자 이번에는 지상에서 발빠르기로 당할 자가 없다는 티알피가 나
섰다. 그의 주력은 이미 드넓은 숲 속에서 정찰병 노릇을 할 때 입증된 것이었다. 우트가르
드-로키는 그의 상대로 후기란 거인을 내세웠다. 모두 세 번을 겨룬 경주에서 첫판은 무승
부였다. 그러나 점점 체력이 떨어진 티알피는 둘째 판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배를 당하더니
셋째 판에서는 어림없이 뒤쳐지고 말았다.
이제 토르의 차례가 왔다. 본래 영웅은 두주불사인 법. 분래 말술인데다 지금 잔뜩 목말라
있는 토르로서는 어느 누가 술마시기 내기를 걸어 와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게 어찌된
일인가? 우트가르드-로키가 건넨 술잔을 들고 젖먹던 힘까지 다 내어 들이켜도 술은 줄어
들 기색조차 없었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한 토르라고 해도 술마시기 내기를 하다 배 터져
죽을 수는 없는 노릇. 그는 고개를 젖혀가며 세 번씩이나 들이켰는데도 술잔의 무게가 줄어
들지 않는 걸 보고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윌 우트가르드에는 두 번 들이켜서 그 술잔을 비우지 못할 팔불출은 없지.
거인 왕은 그렇게 토르에게 빈정거렸다. 아무리 자존심을 구겼다고 해도 천하의 토르가
이런 모욕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그는 주먹을 휘두르며 노호했다.
좋아, 힘으로 해보자구. 아스가르다가 자랑하는 천하장사 토르님한테 힘으로 맞설 놈이
있으면 나와! 빈정거리지만 말고!
정 그렇다면 우트가르드가 자랑하는 노파 엘리하고 한판 붙으시지. 비록 할망구긴 해도
토르 자네보다 힘 세보이는 자를 거꾸러뜨렸으니까.
쭈글쭈글한 노파가 나타났다. 토르는 너무나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런 할머니와 힘겨
루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도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 그는 다짜고
짜 노파 엘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토르가 아무리 힘을 주어
도 노파는 억세게 버티는 것 아닌가? 그리고 마침내는 노파가 토르를 꿇어앉히고 말았다.
거인들은 참담한 심정에 빠진 토르 일행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푹신푹신한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패배한 토르 일행은 일찌감치 일어나 우트갈드를 떠났
다. 토르는 거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겠다는 야심과는 달리 묵사발이 나고 떠나는지라
잔득 기가 죽어 있었다. 로키 역시 할 말을 잃었다. 오직 티알피 남매만이 내색은 하지 않았
지만 다치지 않고 그리던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우트가르드의 로키는 성문 밖까지 일행을 배웅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토르의 소매를 잡
아끌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떻던가? 우트가르드의 거인들은 자네가 예상했던 대로인가, 아닌가?
토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인 왕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몰랐네.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당하리라고는 정말 예상치 못했어. 게다가 이제부터
당신들이 나를 비웃고 다닐 생각을 하면 어다 가서 콱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네.
솔직히 말하자면...
낭패감에 젖은 토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거인 왕이 나직이 말을 건넸다.
자네가 그렇게 힘센 줄 알았으면 자네를 결코 성문 안에 들여 놓지 않았을 걸세. 자네
가 우리 거인들을 거의 끝장낼 번했다는 걸 알고 있나?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토르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우트가르드-로키
를 올려다보았다. 거인 왕은 귀 밝은 로키를 곁눈질하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사실 자네는 내 주문에 걸렸던 걸세. 자네가 숲에서 만나 거인 스크리미르는 다름아닌
바로 나였다네. 그때 자네가 도끼로 날 세 번 내리치지 않았나? 첫 번째 내리친 게 가장 약
한 거였지만 만약 그게 날 진짜로 건드리기만 했더라면 난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걸
세. 내 요술 때문에 자네는 가상의 존재를 내리치면서 그걸 나라고 생각했던 거지.
우트가르드-로키의 설명을 듣는 토르의 심정은 좀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회복된
것 같아 기분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속았다는 생각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
다.
그리고 자네 일행이 우리 성안에 들어왔을 때도 나는 역시 주문을 걸었네. 나랑 같은 이
름을 가진 로키란 친구, 거인의 피가 섞여서 그런지 정말 엄청나게 먹더구만. 하지만 그가
상대한 로기란 거인은 사실 들불을 둔갑시켜 놓은 것뿐이라네. 들불의 화신 이지. 그러니 들
판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이 고기뿐만 아니라 나무접시까지 홀랑 삼켬버리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또 티알피가 달리기 내기를 한 거인 후기는 사실 내 생각에다 거인의 모습을 입힌
것뿐이야. 티알피가 제아무리 날쌘돌이라고 해도 내 생각보다 빨리 달리 수야 없지 않겠
나?
거인 왕은 짓궂은 표정으로 토르를 향해 히죽 웃어보이고 나서 말을 이었다.
자네도 역시 내 주문에 속았네. 자네가 그 술잔을 들이키는 걸 보고 정말이지 나는 기절
할 뻔했네. 자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술잔의 밑바닥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지. 그런
데 자네가 정말 기절초풍할 음주 실력을 발휘하는 바람에세상의 바닷물이 적잖이 줄어들었
지 뭐가?
이 말을 듣는 토르야말로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상대한 노파 말인데, 그 할망구는 늙은 나이의 화신이었네. 전쟁이며 병
따위를 다 이겨낸 천하장사도 늙어가는 나이 앞에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는 법 아닌가? 그런
데 그 노파한테 자네가 그렇게 버틸 수 있었다는 게 정말 놀랍네.
토르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런 토르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트가르드-로키는 마
지막으로 말했다.
제발 다시는우리를 찾지 말게. 자네가 또 오면 나는 위 거인국을 지키기 위해서 또다시
마술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네.
토르는 참고 참았던 분통을 터뜨리며 도끼 묠니르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거
인 왕은 사라지고 없었다. 토르는 우트가르드 성벽을 향해 돌진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성벽 역시 감쪽같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바람 부는 벌판만이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하룻밤의 꿈처럼 토르를 농락하고 사라졌다. 토르 일행은 애초의 목적과는 달리 거인을 상
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헛되이 힘만 쓰다 돌아가게 된 것이다. 남은 것은 오직 염소 한
마리가 다리를 절게 됐다는 것뿐.
토르, 대지를 칭칭 감은 뱀을 낚아올리다
토르는 생각할수록 분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거인 놈들을 혼내주겠다고 요툰헤임까지 갔
다가 도리어 놈들에게 속아서 헛심만 쓰다가 돌아왔으니...
토르는 와신상담 끝에 다시 거인국을 향해 달려갔다. 아무래도 복수를 하지 않고는 못 견
딜 것 같아서였다. 그는 청년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히미르란 거인의 집을 방문했다. 새벽
에 아스가르드를 떠났는데 도착하고 보니 이미 이슥한 저녁 무렵이었다.
토르는 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그 집의 주인인 거인 히미르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낚시 도구를 챵겨 바다로 고기를 낚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토르는
벌떡 이렁나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자네 같은 애송이는 별 도움이 안 되네. 늘 하는 대로 바다 멀리까지 나가소 오랫동안
배를 띄우고 있으면 자넨 아마도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을걸.
토르는 속에서 욱하고 끓어오르는 걸 참고 말했다.
그렇지 않소. 나도 얼마든지 멀리까지 노를 저어갈 수 있어요. 게다가 아마 당신이 나보
다 먼저 돌아오자고 하게 될걸요.
평소의 성미대로라면 토르는 아마 그 자리에서 도끼를 휘둘러 거인 히미르를 비명횡사시
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어느 때인가? 우트가르드-로키의 요술에 속아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토르가 다른 곳에서 다른 거인을 상대로 자기 능력을 시험해 보려는 순간이 아
닌가?
토르가 또다시 매달리자 히미르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정 따라나서려거든 미끼는 자네가 알아서 챙겨.
그리고는 바닷가로 걸어가면서 빈정거리는 말투로 덧붙였다.
우리 집 뒤의 들판으로 가보게. 거기 소들이 많이 있으니까 소들이 싸지른 똥을 실컷 주
어다 자네 미끼로 쓰면 될 것 같구면.
토르는 듣기 거북한 히미르의 말투를 흘려 넘기고 소들이 풀을 뜯고 있는 들판으로 갔다.
그곳에서 하늘이 쩌렁저렁 울릴 만큼 크게 울어 젖히는 황소 한 마리를 점찍어 그 소의 뿔
을 잡았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뿔을 지틀어대자 처음에는 두 뿔이 쑥 뽑혀져 나왔고, 다음에
는 소대가리가 통째로 ha통에서 떨어져 나왔다. 토르는 이 황소 대가리를 미끼로 삼아 히미
르의 낚싯배에 올랐다.
히미르는 한 것 노를 저어 바다 한가운데로 나갔건만 토르는 좀더 멀리 가자고 주문했다.
그러나 히미르는 그 이상 나가면 대지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와 마주친다면
거부했다. 토르는 인상을 붉히며 제 손에 쥐고 있던 노를 힘차게 저어 평소 히미르가 나갔
던 데보다 훨신 멀리 나갔다. 히미르는 토르의 노젓는 힘에 주눅이 들어 더 이상 뭐라고 말
은 못했지만 기분이 여간 나쁜 게 아니었다. 게다가 불안하기까지 했다.
이봐, 젊은 친구! 자네 요르문간드가 얼마나 무서운 뱀인지 알고나 있는 거야?
토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단단한 낚싯줄, 그리고 세사에서 가장 커다란 소의 대가리를
끼운 날카로고 거대한 바늘 등 낚시 도구를 챙겼다. 거인 히미르가 불안하게 바라보는 가운
데 토르는 낚싯줄을 어깨너머로 휙 던졌다. 무거운 미끼를 단 낚싯바늘은 바다 밑으로 서서
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토르는 우트가르드-로키가 자신을 놀리던 일을 떠올리면서 바다 밑을 향해 목청
껏 외쳤다.
야, 그 밑에 사는 피래미 같은 녀석아! 우리 아버지 오딘께서 네놈을 바다 속에 던질 때
어디 너보고 대지에 들러붙어 있으라고 했느냐? 모래 속에라도 파고 들어가서 조용히 지낼
일이지...네 꼴을 좀 봐! 제 꼬리를 제 입으로 물고 앉아 있는 몰골을 오늘 밤엔 네 녀석을
회쳐서 술이나 한잔 해야겠다.
그 순간, 무언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들자 토르는 재빨리 낚싯대를 낚아챘다. 해수면 위로
쑥 올라온 것은 무엇이었던가? 거인 히미르는 그놈을 보고 그만 까무러칠 뻔했다. 낚싯바늘
에 입안을 꿰인 채 소대가리를 입안 가득히 물고 있는 것은 수여이 성성한 요르문간드의 머
리통이었다. 로키의 아들, 늑대 펜리르와 지옥의 마녀 헬의 형제인 요르문간드였던 것이다.
거대한 뱀이 포효하자 거인 나라의 신들이 메아리쳤다. 대지는 덜덜 떨었다. 뱀이 몸을 한
번 뒤챌 때마다 바다에는 해일이 일고 낚싯대를 잡은 토르의 손이 뱃전에 이리저리 부딪쳤
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토르는 젖먹던 힘까지 내려갔다. 그리하여 바다 밑바닥을 딛고 선
토르와 바다 표면까지 딸려올라온 뱀 사이의 사투는 차으로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마침내 토르는 뱀을 배 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거인 히미르는 하얗게 질렸다. 토르
가 도끼를 높이 치켜들어 뱀의 모가지를 내리치는 순간, 히미르가 달려들었다. 그가 고기 내
장을 딸 때 쓰는 칼로 토르의 낚싯줄을 베어버리는 바람에 뱀은 극적으로 토르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요 미구라지 같은 뱀 녀석이 어딜 달아나려고 해!
토르는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면서 바다 밑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뱀을 향해 바른 속도로
도끼 묠니르를 던졌다.
어떤 사람은 그 도끼에 맞아 마침내 거대한 뱀 요르문간드의 몽은 두 동강이 났다고 전한
다. 첨단 현대 해양과학으로도 대양 속에서 지구를 감쌀 만한 크기의 뱀을 간측한 일은 없
으니까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의 말로는 요르문간드는 여전히 북유
럽의 바다 밑에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토르가 히미르에게 무섭게 화를 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두 주먹을 잔
득 움켜쥐고 훼방꾼에게 핵주먹을 날렸다. 히미르는 애송이 라고 우습게 보았던 토르의 강
타를 맞고 시커먼 바다 속에 빠져 버렸다. 물론 아무리 사나운 뱀이라고 해도 자기를 살려
준 생명의 은인을 덥석 먹어치울 수는 없는 법이다. 히미르는 몇날 며칠을 고생하며 헤엄친
끝에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뱀 요르문간드가 살아남아 바다 속에서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다면 토르의 복수혈전은 절
반의 성공으로 끝난 셈이다.
토르와 흐룽그니르, 한판 승부를 벌이다
오딘은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자
신이 오늘다라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아들 녀석인 토르가 신이 나서 모험을 벌이고 다
니는 모습을 보니 부럽기도 하고 마구 좀이 쑤시기도 했다.
마침내 오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애마 슬레입니르 위에 올라탔다. 세상에서 둘째가라
면 서러워할 준마 슬레입니르 역시 천상의 뜰에서 풀이나 듣고 있는 자기 신세가 한심하던
터이므로 히힝거리며 신나게 들판을 박차고 나갔다.
오딘은 모험의 상대를 고르는 데에서도 토르보다는 한수 위였다. 이미 거인들의 세계를
휜히 꿰뚫고 있는 오딘은 토르처럼 거인의 요술 따위에 걸려 시행착오를 되풀이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거인 가운데 가장 힘이 세다는 흐룽그니르의 집으로 직행했다.
당신 누구야?
흐루그니르가 퉁명스럽게 물어왔지만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쓴 오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거인은 코를 문지르며 오딘과 그의 애마를 쓱 훑어보았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표
정이었다.
당신 오는 걸 보고 있었어. 말 하나는 잘 빠졌네.
흐룽그니르가 다시 말을 걸자, 오딘이 거만한 어조로 맞받았다.
요툰헤임의 어떤 말도 이 말한테는 상대가 안 되지. 장담할 수 있네.
거인이 같쟎다는 표정으로 오딘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생각하나, 꼬마 친구?
오딘은 턱을 곧추세워 거인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틀린 말 했을까?
거인이 코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이봐, 자넨 황금갈기 이야기도 못 들었나?
뭐? 황금으로 뭘 갈겨?
오딘이 의뭉을 떨었다.
정신 나간 놈! 황금갈기는 이 어르신이 타고 다니는 천하의 명마란 말이다. 네 녀석의 말
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해도, 우리 황금갈기를 따라잡지는 못할 걸! 차라리 황천길을 서두
르는 게 나을게다.
거인의 흥분하자 오딘은 기다렸다는 듯이ㅣ 고비를 잡아채 말머리를 돌렸다.
그렇다면 우리 한번 겨루어볼 텐가? 내 말이 이긴다는 데 내 목을 걸겠네.
거인이 이놈 잘 걸렸다는 표정으로 황금빛 갈기가 치렁치렁한 자기 말에 올라탔다. 그러
는 사이에 오딘의 말 슬레입니르는 뽀얀 먼지를 날리면서 멀리 보이는 구릉 위를 달렸다.
황금갈기와 슬레입니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무려 열아홉 구비를 넘었다. 정신없이
말을 달리던 거인 흐룽그니르가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그들은 거인나라를 떠나 신들의 세
상인 아스가르드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그제야 거인은 상대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오딘, 이놈! 네가 비열한 속임수를 써서 나를 꼬여들었구나. 도대체 날 어쩔 셈이냐?
거인이 이를 갈며 윽박지르자 오딘은 두 손을 내저으며 달랬다.
그게 아닐세. 자넬 어쩌려는 게 아니고, 내가 궁전에만 쳐박혀 있자니 하도 좀이l 쑤셔
한번 달려본 것뿐일세. 자, 운동 한번 신나게 잘했으니 이제 우리 발할라궁에서 시원하게 한
잔 하세나.
지상의 전투에서 죽은 전사의 영혼들이 모여 있는 발할라궁은 왁자지껄했다. 오딘과 거인
이 숨도 쉬지 않고 두 잔을 연거푸 비우자 주변에 앉아 있던 전사들은 적잖이 놀라는 기색
이었다. 오딘은 눈썹을 꿈틀했다. 토르가 이 자리에 있었어도 그렇게 마시기는 벅찼을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나다를가 그렇게 많은 술을 한입에 털어넣은 거인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눈자위가 반쯤 풀린 채 꼬부라진 혀로 이렇게 떠벌리는 것이었다.
야야, 조용히들 못해! 발할라궁을 쑥 뽑아서 거인나라에 갔다 박든지 해야지, 이거 원 시
끄러워서...
술을 마시던 전사들이 그 얘기를 듣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오딘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아뿔싸를외쳤다. 거인은 웃고 있는 천사들을 향해 몸을 홱 돌렸으나 중심을 잡지 못
하고 비틀거렸다.
내 이누므 아슈가르드를 박솰낼 테다.
그러자 오딘이 말대접해 주었다.
저런! 아이고, 무서워라. 그럼 우린 어떡하라고?
너희들...너휘들은 이제 죽었어. 너,너,너! 죄다 요절을 내버리겠다 이 말씀야.
거인이 주먹으로 술상을 내리치면서 덧붙였다.
요기 요 두 년만 빼고.
거인 흐룽그니르가 가리킨 것은 미의 여신 프레야와 토르의 아름다운 부인 시프였다. 오
딘이 그녀들에게 눈을 꿈쩍해 보였다. 그러자 두 미인은 흐룽그니르 옆으로 다가가 술시중
을 들었다. 그 바람에 거인은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지만 오딘과 여신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주사가 심해질 뿐이었다. 오딘은 자기 뒤통
수를 탁탁 치면서 자책했다.
실수였어. 아무리 심심했어도 저런 놈을 여기까지는 끌어들여선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 방법은 토르를 불러올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발할라궁이 아수라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토르는 부리타케 달려왔다. 그는 도끼 묠니
르를 치켜들고 당장이라도 거인 흐룽그니르를 두 동강 낼 드싱 달려들었다. 그러나 거인은
술독에 빠졌으면서도 꾀는 말짱했다.
이봐요, 토르 양반. 지금 아무 무기도 없이 평화롭게 술을 마시고 있는 날 죽이겠다고?
참 좋은 소문 나겠쉐다. 천하장사라더니 째째하게 맨손의 상대를 도끼로 내리쳤다고 말요,
힘자랑을 하려면 정정당당하게 하슈.
토르는 멈칫했다. 듣고 보니 말인즉슨 옳았다.
그렇다면 정정당당하게 한판 붙자!
거 좋쉐다. 지금은 아무 무기도 없으니, 나중에 우리 중립 지대에서 만납시다. 거 왜 돌
로 울타리를 두른 집 있지 않소?
그렇게 해서 가장 힘센 신과 가장 힘센 거인 간에 세기적인 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다.
거인국의 우트가르드 성으로 돌아온 흐룽그니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거인들 사이에
는 환호와 우려가 교차했다. 흐룽그니르가 발할라궁에서 신들의 혼쭐을 빼놓은 건 자랑스러
운 일이었으나, 거인들 가운데 최강인 흐룽그니르가 무지막지한 토르와 결투를 벌이게 됐다
는 사실은 여간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흐룽그니르가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거인들이궁지에
몰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우트가르드의 로키가 요술을 부려 스크리미르라는 가상의 거인을 만든다 해도
토르가 다시 속아줄 리는 없었다. 생각다 못한 거인들은 약속 장소인 돌 울타리 집 부근에
다 무시무시한 인조 거인을 만들어 토르의 기를 죽여 보자는 꾀를 내었다. 그 곳에는 진흙
위를 흐르는 강물이 있었는데 이 강바닥을 파올려 거대한 괴물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드릉ㄹ 내려다보는 거인들이 힘을 모아 진흙을 쌓았으니 그 규모는 엄청
날 수밖에 없었다. 키가 무려 40킬로미터, 에베레스트 산보다 다섯 배나 큰 인조 괴물이 우
뚝 섰다.
보기엔 그럴 듯하지만 생명이 없으니 움직이질 못하잖아. 그래도 조금은 꿈틀거려야 토
르가 속을 것 아닌가?
한 거인이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숙의를 거듭한 끝에 암말 한 마리를 잡아 펄펄 뛰는 염
통을 인조 거인 속에 이식했다. 어마어마한 덩치에 고작 암말의 심장을 가졌으니 그야말로
새가슴에 불과했지만 인조 거인의 생명을 얻었다.
이윽고 결투의 날이 밝자 거인 흐룽그니르는 자신감을 가지고 한 손에는 거대한 방패,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허수아비 거인 곁에 나란히 서서 토르 기다렸다. 토르가 제아무리 타
고난 싸움군이라지만 허수아비 거인을 보면 기절초룽해서 전의를 상실하리란 기대를 안고.
바로 그 시간, 토르도 대지에 천둥과 우박을 뿌리며 시종인 날 쌘돌이 티알피와 함께 여
소 전차를 타고 아스가르드를 떠났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웠던지 대지 미드가르드에 사
는 인간들은 세계 최후의 날이왔다는 생각에 벌벌 떨었을 정도이다. 그런데 기억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티알피는 지난번 토르의 거인국 원정 OE 토르가 묵었던 농가의 아들이다.
토르의 염소 다리를 부러뜨린 죄로 토르와 함께 거인국으로 가게 된 티알피는 빠른 걸음 때
문에 전초병 노릇을 했었는데, 그 후 아예 토르의 시종으로 눌러앉은 것이다.
티알피는 달리는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전차를 끄는 염소들보다 앞서 거인과의 약
속 장소로 달려가싿. 그의 시야에 방패를 든 거인과 그 옆에 우뚝 선 허수아비 거인이 들어
오자 티알피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흐룽그니르 님! 방패를 내려 발 밑을 막아요! 토르가 땅 밑에서 당신을 노리고 이썽요!
티알피의 목소리가 워낙 화급하고 진지했기 때문에 거인은 그를 자기 편으로 믿었다.
rmfojt 거인은 부랴부랴 방패를 땅에다 깔고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두 손으로 술잔을
굳게 잡았다. 티알피의 뒤를 따라 득달같이 달려오던 토르가 이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그
는 도끼 묠니르를 치켜들고 거인의 정수리를 겨냥하여 힘껏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
는 도끼의 시퍼런 날을 보고서야 거인은 들고 있던 술잔을 요격용으로 던졌다. 도끼와 술잔
은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순잔은 산산조각이나서 온 세상으로 흩뿌려졌다. 아스가르
드에도 떨어지고 대지에도 떨어졌다. 그렇게 떨어져 내린 파편 하나하나는 어마어마한 규모
의 돌산이 되었다. 그 술잔의 재료가 본래 숫돌이었기 때문이다.
숫돌의 파편은 토르의 이마에도 날아가 박혔다. 토르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당 위에
곤두박질쳤다. 한편, 술잔과 부딪친 도끼는 조금도 방향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날아가더니
거이느이 정수리를 부수었다. 고구라지는 거인의 한쪽 다리가 토르의 목을 내리 눌렀다.
티알피는 허수아비 거인을 맡았다. 그는 거인 흐룽그니르를 잡고 나동그라진 토르의 도끼
를 집어들어 이 인조 거인의 정강이를 힘껏 내리찍었다. 여차하면 인조 거인의 어마어마한
발에 깔려 죽을 수도 있으리라 각오했다, 예상과는 달리 인조 거인에게는 저항할 히이 없는
것 같았다. 비명을 올리면서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허수아비 거이을 보고 사정을 짐
작한 티알피는 마음놓고 도끼를 휘둘렀다. 결국 거인들의 눈물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4만
미터 높이의 인조 거인은 대지에 크게 눕고 말았고, 거인 나라에 웅크리고 있던 거인들은눈
물을 흘렸다.
내 목, 내 목 좀 꺼내줘!
토르가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는 거인 흐룽그니르의 다리에 누려 거의 질식할 지경
이었다. 그러나 티알피의 힘으로는 도저히 거인의 다리를 치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티
알피는 빠른 발을 이용해 아스가르드까지 되돌아서 신들을 불러모았다. 토르가 승리했다는
쇡에 신들은 크게 기뻐하며 토르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신들이
모두 힘을 합쳐도, 심지어는 오딘까지 합세했는데도 죽은 거인의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
다.
뒤늦게 달려온 토르의 세 살배기 아들 마그니가 아니었다면 신들과 거인들은 합동 장례식
을 치러야 했을지도 모른다. 토르가 시프를 두고 거인족의 여인과 몸을 섞어 낳은 자식 마
그니는 그 어린 나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못지 않은 괴력을 발휘하여 거인의 다리를 가볍
게 들어냈다. 토르가 쇠장갑을 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마그니가 뭐라고 하는지
를 들어보라.
토르아 거인족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제가 아닌가요?
토르는 씩 웃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자랑스런 아들아! 아비 목숨을 구해준 대가로 죽은 거인의 애마 황금갈기를 네게 주겠노
라.
그러자 오딘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나섰다.
안 된다! 거인의 피를 가진 아이한테 그런 보물을 주다니! 황금갈기는 이 아비에게 다
오.
그러나 토르 오늘의 이 사태를 초래한 원흉인 아버지 오딘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토
르와 마그니는 어깨를 겯고 신들의 환호에 둘러싸인채 아스가르드를 향해 발걸음을 떼어놓
다. 뒤에 홀로 남은 신들의 왕 오딘만이 허리춤에 두 주먹을 얹은 채 혼잣말로 무어라 투
덜거리고 있었다.
오딘과 토르 부자, 원수로 맞부딪치다
모험을 떠났던 토르는 얼어붙은 황야를 하루종일 가로질러 어느 해협 앞에 섰다. 이곳을
건너야 아스가르드로 돌아갈 수 있건만 날은 이미 저물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던 토르의
눈에 멀리 건너편 바닷가 모래밭에 누워 있는 사나이가 들어왔다. 그의 옆에서는 배 한 척
이 한가로이 떠 있었다.
어이! 자네 뱃사공인가?
토르가 부르는 소리에 해협에는 풍랑이 일었다. 사내는 단잠에 빠져 있었던지 벌떡 일어
나 반쯤 감긴 눈으로 토르를 바라보더니 기분 나쁘다는 투로 투덜거렸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데 이 조용한 바닷가에서 소리를 질러대고 난리야?
토르는 어이가 없었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어서 웃는 낯으로 사내를 달랬다.
이보게, 날 좀 건네주게. 내 보상은 얼마든지 함세. 내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이 배낭
에는 먹을거리가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네.
그러나 사내는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는 푹 눌러썼던 모자의 챙을 약간 들어올리며 토
르를 놀리기 시작했다.
자네 꽤 기분 좋은 모양인데...이봐, 자넨 집으로 돌아가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어. 곡소
리만 요란할걸. 왜냐하면 말이지...
사내가 씩 웃으며 말을 끌었다.
자네 엄마가 죽었걸랑.
뭐라고!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아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토르는 사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아는지 따져볼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
런 순진한 토르를 향해 사내의 조롱이 날아들었다.
한심한 녀석같으니라고. 맨발에다 거지 행색하고는...바지도 제대로 못 입고 말야. 네 녀
석이 돌아갈 집이라도 있는지 의시스럽구만.
토르는 신들 가운데 가장 힘이 센 자신을 이토록 업신여기는 사내가 너무도 얄미웠다. 그
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것뿐이었다.
어서 이리 오지 못해! 도대체 네놈은 누구야? 그 배는 누구 거야?
사내는 꾸물거리면서 토르의 약을 올렸다.
살인자 힐돌프가 이 배를 내게 맡기면서 말했네. 좀도둑이나 말 도둑 따위는 절대로 태
우지 말라고. 그러니 오직 태울 만한 가치가 있는 자만 태울 수밖에. 이 바다를 건너고 싶으
면 자네 신분을 대게.
오너ㅑ, 좋다. 내 이름은 토르다. 최고신 오딘의 아들이며 마그니의 아버지다. 지금 네 녀
석은 신들 가운데 가장 힘이 센 벼락의 신 토르 님과 이야기를 하는 중이지. 이젠 네 이름
을 밝혀라.
나는 하르바르드. 내 이름을 숨기는 일은 별로 없어.
별 대단한 이름도, 아닌 것 같은데 숨기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나? 혹시 죄라도 짓고 쫓
겨 다니는 녀석 아냐?
이거 왜 이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오히려 네놈이 도망 다니는가 보군. 안 그래도 행
색이 수상쩍다 했더니. 그러니 네 녀석을 어떻게 내 배에 태울 수 있겠어?
토르는 두 주먹을 꼭 쥐고 한번 부르르 떨었다. 하르바르다는 제 손으로 엉덩이를 톡톡
치면서 다시 한번 토르를 놀렸다.
난 여기 꼼짝않고 앉아 있겠어. 가만 보니 네 녀석은 거인 흐룽그니르하고 싸운 이래 나
만한 임자를 만난 적이 없는 것 같군그래.
토르는 어깨를 으쓱했다.
촌뜨기 뱃사공이 녀석이 그래도 이 토르 님의 무용담은 얻어들었나 보군. 흐룽그니르를
아나? 그놈은 거인 가운데 최고 장사였지. 머리통은 단단한 돌이어서 웬만큼 얻어맞아서는
끄떡도 하지 않는 괴물이었다고. 그런 물건을 내가 한방에 보내버려다는 거 아냐. 어떤가,
자네도 뭐 내세울 만한 무용담이 있나?
사공 하르바르드는 씩 웃으며 맞받았다.
이 몸께선 알그론 섬에서 5년을 보냈지. 거기서 일곱 명의 아가씨와 밤마다 즐겼다 이
말Tam이야. 내가 그 재주 하나는 죽여주거든. 자, 어디 또 한번 힘 자랑 해보시지?
토르의 눈이 작아졌다. 쥐새끼 같은게 여자 꼬시는 재주는 있네 하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벽력 같은 소리를 질러댔다.
이 토르 어르신은 고원지대를 어슬렁거리는 추잡한 거인 계집을 없애버린 적도 있느니
라. 그년을 내버려뒀으면 대지 위에 남아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을 거야.
인간들을 꽤나 위해주시는군.
하르바르드가 이죽거렸다.
이봐, 나는 어쭙잖은 인도주의자들을 싫어하거든. 오히려 인간들 사이에 싸움을 불러이으
키는 게 내 취미야. 싸움에서 죽은 고귀한 전사 계급은 오딘에게 가서 보살핌을 받니. 글너
데 토르네 녀석은 비천한 노예들을 위해서나 힘을 쓰는 얼간이라고.
천둥시노가 뱃사공ㅇ느 그 후로도 오랳동나 설전을 계속했다. 말싸움이 이어지면 이어질
수록 성급한 토르는 더욱더 화를 참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도끼를 치켜들고 울부짖으리
라.
사공 하르바르드의 뱀 같은 혀는 물러설 줄을 몰랐다.
얘, 네 계집 시프한테 애인이 생겼단다. 힘을 쓰려거든 바람난 연놈한테나 쓰거라.
토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사공 하르바르드의 애꾸눈이 석양에 반사되어 이글이글 타올
랐다. 바다 저편으로 해가 떨어지는 절보면서 토르는 절망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사공에게
다시 한번 사정을 해야 했다. 그러나 사공이 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이보게, 날 태워주기 싫으면 돌아서 아스가르드로 가는 길이나 알려주게.
그거야 간단하지. 물론 간단하다는 얘기고 실제로 걸어가려면 다리 품 깨나 팔아야 될걸.
왼쫏으로 죽 가다보면 미드가르드가 나올 걸세. 거기서 자네 어미 표르긴을 찾게. 그 여자가
무지개 다리로 가는 길을 알려줄 걸세.
토르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발길을 옮겼다.
나중에 다시 만나면 내 오늘의 수모를 반드시 갚아주겠네.
석양빛을 받으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천둥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공은 생각에 잠신 듯
외눈을 깜박거렸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챙 넓은 모자를 벗었다. 착잡함이 가득한 표정의 구
릿빛 얼굴은 바로 오딘의 얼굴이었다. 얼마 전에 아들 토르에게 당했던 수모를 앙갚음하기
위해서였던가? 가면의 신 오딘은 사공의 모습을 하고 아들 앞에 나타나 독설을 퍼부었던 것
이다.
토르, 피의 강을 건너 거인 부녀를 해치우다
로키는 프레야의 매가죽을 빌려쓰고 혼자소 거인국으로 여행을 갔다. 거기서 어쩌다가 그
는 교활한 거인 게이로드의 포로가 되었다. 로키를 석달이나 굶긴 게이로드는 기진맥진한
로키에게 명령했다.
가서 토르를 데리고 오겠다면 널 살려주마. 단, 토르의 힘의 원천인 허리띠와 도끼 묠니
르를 가지고 와서는 안 돼!
그 무렵, 가장 힘센 거인 흐룽그니르를 제거한 토르는 이제 더 이상 거인들을 상대할 일
이 없다고 생각하여 아스가르드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로키가 야릇한 미
소를 띠고 나타났다.
내가 멋진 곳을 하나 봐뒀는데 자네 같이 안 가려나?
토르는 이 세상에 자신이 안 가 본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로키가 말하는 게이로
드라는 거인의 영지는 들어보지 못한 곳이었다.
게이로드란 거인은 정말 못생겼지만 두 딸은 천하절색이라네. 그러니 자네 허리띠도 풀
고 도끼도 놓아두고 가세나.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해야 미인도 즐길 수 있지 않겠나?
토르는 군침을 흘리며 로키의 말에 따랐다. 로키는 토르의 눈에 띄지 않게 한숨을 푹 내
쉬었다. 두 신은 어깨동무를 하고 아스가르드를 떠나 거인국으로 향했다. 게이로드의 영지는
거인국에서도 아주 길숙한 곳에 있는 푸른 벌판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빠른 토르의 걸음걸이
로도 하룻만에 갈 수는 없었다. 해거름에 그들은 숲 속에 자리잡은 그리드의 집 앞에 다다
랐다. 그리드는 오딘의 정부이므로 토르에게는 작은 엄마뻘이었다.
그리드의 집은 항상 열려 있지. 앞문으로 오딘이 들어가서 뒷문으로 비다르가 나왔다구.
로키가 능청을 떨며 토르를 이끌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드와 오딘이 사랑을 나누어
아들 아들 비다르를 낳았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리드의 환대를 받으며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로키가 먼저 곯아떨어지자 그리드가 살짝 토르를 불러냈다.
그녀는 토르에게 자신의 허리띠와 쇠장갑, 단단한 지팡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게이로드가 널 초대한 건 속임수야. 그놈은 아주 교활한 거이이거든. 게다가 흐룽그니르
를 죽인 신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어.
토르가 눈을 크게 떴다.
흐룽그니르를 죽인 신이라면 바로 저 아닙니까?
그러니 속았다는 거야. 이 무기들을 꼭 몸에 지니거라.
이튿날 아침 토르는 로키를 의심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길을 떠났다. 로키도 그리드
의 무기로 무장한 토르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참을 걷다 보니 눈앞에 세차게 흐르는 핏빛 강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사나운 흐름이었
으나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게이로드의 집으로 갈 수 없었다. 토르는 그리드가 준 허리띠
를 단단히 조이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로키는 두 순으로 그 허리띠를 꼭 잡았다. 얼마 가지 않아 물은 토르의 허리가지 차 올랐
고 로키는 물 위에 겨우 머리만 내민 형국이 되었다. 물살이 너무나 드세어 여차하면 떠밀
려갈지도 몰라 토르는 그리드의 지팡이로 강바닥을 꼭 짚었다.
갈수록 깊어지던 물은 강 한가운데 이르자 마침내 토르의 머리까지 뒤덮었더. 물 속에 머
리를 박았다가 지팡이에 의지하여 다시 물 위로 rhromf 내민 토르는 가쁜 숨을 내쉬며 상
류 족을 바라보았다. 아아, 저런! 핏빛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에는 거대한 여인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밑으로 피를 붐어내고 있었다. 토르를 익사시킬 뻔한 이 강줄기는 그녀가 월경
으로 내보내는 피였다.
홍수를 피하려면 수원지를 막아야지!
토르는 강바닥에서 큼직한 바윗덩어리를 들어올려 거인족 여인을 향해 던졌다.
바위는 여인의 하반신을 강타했고 불구가 된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그 순간 강
물은 일시에 확 불어나 토르는 정신없이 떠내려갔다. 그리드가 준 지랑이도 소용없다. 거의
자포자기 심정에 빠진 토르에게 다가온 구원의 손길은 강바닥에 깊이 뿌리박은 나무였다.
토르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나무의 가지를 움켜쥔 덕분에 겨우 익사를 모면할
수 있었고, 로키는 필사적으로 토르의 목을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함께 살아날 수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둘은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강을 벗어나 게이로드의 집으로 갔다.
게이로드의 집에 게이로드는 없었고 대신 하인 한 명이 두 신을 영접하였다. 토르와 로키
는 집 가깥의 헛간으로 안내되었다. 염소 우리로 쓰이는 헛간에는 짚단이 아무렇게나 널브
러져 이썽T고 의자 하낙 댕그라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푸대접이었지만 토르
는 게이로드를 흐르는 강으로 몸을 씻으러 가고 토르는 그리드의 지팡이를 두 손에 꼭 쥔
채 의자에 앉았다. 피로한 하루였기 때문에 분노로 달아오른 토르도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
고 말았다.
토르는 자면서 꿈을 꾸었다. 낮에 건넌 피의 강에서 정신없이 떠내려가는 꿈이었다. 한참
을 허우적거리던 토르는 비명을 올리며 잠에서 깨었다. 아닌게아니라 토르의 몸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천장을 향해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겁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낮에 피를 쏟아내던 거인족 여인과 그녀의 동생이 의자와 연결
된 도르래 줄을 열심히 잡아당기고 있었다. 함정이었다. 거인 자매는 토르를 서까래에 충돌
시켜 죽이려고 줄로 의자와 들보를 연결해 놓았던 것이다. msh53
토르는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서까래에 대고 세게 찔렀다. 그 반동에 밀려 의자는 자
매가 서 있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자매는 토르의 육중한 몸에 갈려 찍 소리도 못하고
즉사했다. 그녀들이 노리던 토르의 운명이 그녀 자신들에게 돌아간 셈이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짚더미 속에서 자던 로키는 그제야 쿵 하는 소리를 듣고 눈을 비비며 기어 나왔다.
토르, 나오시오! 게이로드 님게서 찾으십시다!
방 협박조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자신을 불러대지 않았어도 토르는 더 이
상 게이로드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고 쇠장갑을 낀 토르는
헛간을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게이로드는 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큼직한 부지깽이가 들려있었고 그
앞에는 엄청나게 큰 용광로가 시뻘건 불꽃을 토해내고 있었다. 토르가 쿵쿵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자 게이로드는 악마의 웃음을 지으며 용광로 속에 부지깽이를 집어넣어 빨갛게 달아
오른 쇳덩어리를 집어올렸다. 그리고는 소림사 주방장처럼 날랜 솜씨로 부지깽이를 휘둘러
토르에게 쇳덩어리를 날려보냈다. 쇳덩어리는 쉿 하고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지만 모든 사람
의 예상을 깨고 쇠장갑을 낀 토르의 손아귀 안에 사뿐히 들어갔다. 거인들은 비명을 올렸고
게이로드는 쇠기둥 뒤에 숨었다.
그러나 토르가 누구인가? 천하 제일의 도끼 묠니르를 벼락처럼 뿌려대던 투척의 신 아닌
가? 그는 날카로운 제구력으로 벼락치는 듯한 강속구를 게이로드에게 날렸다. 쇠기둥은 여
지어벗이 두 동강이 나고 벌건 쇳덩어리는 교활한 거인 게이로드를 산산조각내 버렸다.
로키는 슬금슬금 뒷걸음쳐 도망가 버렸고 토르는 성난 늑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게
이로드 일당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있었다. 그 자리에 로키가 있었다면 게이로드와 같은 운
명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게이로드의 집을 폐허로 만들어 버린 토르는 아스가
르드에서 로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맥없이 웃었다.
뭐, 아리따운 아갔들? 로키 이 녀석, 다음엔 네놈이 나한테 당할 차례다.
4. 신들의 황혼
세상 만물이 발데르를 해치지 않겠다고 서약하다
발데르는 신들 중에서 가장 잘생겼고 가장 품성이 훌륭한 신이었다. 어느날 그는 매우 불
길한 굼을 구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난 그는 내용을 잘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
러나 소름끼치는 혼령들이 나타나 저주의 마을 퍼부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오딘은 아스가르드의 신들을 불러모았다. 오딘의 아들이며 모든 신이 칭찬을 아끼지 않은
미남 신에게 나타난 불길한 징조에 관해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신들은 발데르에게 해
를 입힐 수 있는 것들을 남김없이 열거하였다. 땅에 있는 것, 물 속에 있는 것, 하늘에 있는
것...
이렇게 신들이 위험한 물건들의 목록을작성하자 발데르의 어머니 프리그는 이 목록을 들
고 아홉 세계를 순방하였다. 아홉 세계를 샅샅이 돌아 다니는 일은 오딘도, 토르도 못한 일
이었다. 프리그는 모성애 하나만으로 이 험난한 일을 해냈다. 그년는 목록에 있는 모든 것들
로부터 발데르를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내었다. 땅도 맹세했다. 돌도, 나무도, 하늘을
나는 새도 맹세했다. 온갖 병균들도 빠짐없이 맹세했다.
프리그가 돌아오자 신들은 다시 모였다.
그들의 맹세를 시험해 보자.
한 신이 이렇게 말하고 돌멩이를 집어들어 발데르를 향해 던졌다. 돌멩이는 발데르의 이
마를 정통으로 맞추었다.구란 발데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씩 웃었다.
나한테 돌을 던졌어요?
신들은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돌은 프리그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 기제 위험은 사라졌다.
아스가르드에 드리웠던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고 봄날 같은 즐거움이 신들의 집과 들판에 가
득했다.
아스가르드에는 이제 새로운 게임이 등장했다. 모든 위험으로부터 해방된 신 발데르를 과
녁으로 세워놓고 무엇이든 던져보는 일종의 다트 게임이었다. 발데르는 기꺼운 마으으로 과
녁이 되어 주었고, 모든 신들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이 게임에 참여했다. 어떤 신은 돌을 던
지고 어떤 신은 다트를 던졌다. 칼을 들어 발데르의 배를 배려는 신도 있었고 도끼를 던져
대는 신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발데르는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 희한하고 흥겨운 놀이를 기꺼운 마음으로 즐기지 못하는 신이 딱 두 명 있었
다. 한 명은 장님인 호두르였다. 그는 발데르의 동생이었으나 어려서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불운을 타고났다. 신들 사이에 끼어 자기도 마음껏 투첫 솜씨를 뽐내고 싶었으나 앞이 보이
지 않으니 어쩌랴. 또 한 명의 불운의 주인공ㅇ느 외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라 비뚤어진 마
음 때문에 남 행복한 꼴을 못 보는 로키였다. 그는 행복해하는 신들의 골이 정말 보기 싫었
다. 그는 슬그머니 신들 사이를 빠져나와 프리그의 집으로 향했다.
프리그의 집 앞에 다다른 로키는 노파로 변신했다. 프리그는 마침 집안에서 아들 발데르
의 무사함을 기뻐하고 있다가 낯선 노파를 맞이하였다. 근심을 싹 씻은 프리그는 매우 친절
하게 노파를 대접했다.
여기가 아스가르드인가요? 아이고 그럼 제가 길을 잘못 들어나 보군요. 그런데 오다 보
니 신들이 무슨 시골 장돌뱅이들처럼 야단법석을 떨고 있던데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프리그는 노파의 말투가 못마당했지만 기분좋게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우리 아들 발데르가 불길한 꿈을 꾸었답니다. 그래서 제가 세상 만물을 찾아다니며 우리
아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죠. 신들이 그 맹세들을 확인하고 있는 거랍니다.
아, 세상 만물 모두에게서요?
네. 딱 하나 맹세를 하지 않은 게 있긴 해요. 서쪽 벌판에서 자리는 겨우살이 가지는 워
낙 약해 빠져서 그냥 무시했답니다.
노파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다시 본모습으로 돌아온 로키는 서둘러 서쪽 황무지로 달려갔
다. 그곳은 오랜 세월 신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마치 시간이 정지해 버린 것처럼 황폐했다.
프리그가 말한 겨우살이 가지는 참나무 줄기에 뿌리를 박은 채 질긴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
다. 로키는 이 볼품없는 풀줄기를 정성껏 꺽어 품에 안고 아스가르드로 돌아갔다. 그는 공들
여 겨우살이 가지의 끝을 뾰쪽하게 깍아낸 다음 자신의 허리띠로 다듬었다.
로키가 다시 신들의 놀이 장소로 나갔을 때까지 다트 게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신들의 웃
음소리가 높을수록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호두르의 모습은 더욱 처량해 보였다. 신들
사이를 빠져 나간 로키는 호두르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넌 왜 가만히 있니? 한번 던져보지 그래? 정말 재밌는걸.
형이 어디 서 있는지 알아야지요. 그리고 저한테는 아무 무기도 없어요.
로키가 씩 웃으며 그의 손에 겨우살이 가지를 쥐어주었다.
이걸 던져봐. 내가 도와줄 테니까.
호두르는 로키의 도움을 받아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로키가 알려주는 방향을
향해 겨우살이 가지를 힘껏 던졌다. 뾰족한 가지 끝이 발데르를 향해 날아가 그의 심장을
꿰뚫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러나 그 시간은 아스가르드ㅡ이 신들에게는
영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발데르는 눈을 뜬 채 뒤로 넘어졌다. 왁자지껄하던 아스가르드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침묵만이 의기양양하게 신들을 덮쳤다.
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호두르와 로키에게 쏠렸다. 사태는 분명했다. 신들은 복수심에 불탔
지만 이곳은 성역인 아스가르드였다. 어떤 이유로도 피를 불 수는 없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호두르는 멍하니 서 있었고 신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딜 수 없던 로키는 슬금슬금 뒷
걸음질쳐 그곳을 빠져나갔다.
신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소식을 들은 프리그가 달려와 아들의 차가운 시신 위에 무너지
면서 오열할 때까지 아무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프리그가 울음을 터뜨리
자 모든 신이 다 함게 울음을 터뜨렸다.
프리그가 신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지옥으로 내려가 내 아들을 찾아올 용사 없나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프리그가 다시 물었다.
누가 지옥으로 내려가 내 아들을 찾아올 용사 없나요?
침묵은 계속되었다. 프리그는 절규하듯 다시 물었다.
누가 지옥으로 내려가 몸값을 지불하고 내 아들을 찾아올 용사 없어요!
과감하기로 소문난 오딘의 또다른 아들 헤르모드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오딘이 정신을 차리고 시종들에게 자신의 애마 슬레입니르를 끌고 오라고 일렀다. 슬레입
니르가 오자 오딘은 그 곡삐를 헤르모드에게 주었다. 헤르모드는 신들의 뜨거운 배웅을 방
으며 슬레입니르에 올라 아스가르드를 떠났다.
사상 최대의 장례식을 치르다
장례식 전날 신들은 아무도 잠을 자지 않았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되자 네 명의 용사가
발데르의 시체를 짊어지고 걷기 시작했고, 모든 신이 그 뒤를 따랐다. 바닷가에는 발데르의
시신을 태울 배 링그호른이 모래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네 명의 용사는 배 열 바닷물 위에
시신을 내려놓았다.
신들은 발데르의 재단을 배 한가운데 마련할 생각이었다. 네 명의 용사들이 뱃전으로 가
배를 바다 위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스픔에 젖은 나머지 힘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배가 꼼짝도 하지 않아서 굴림대 위에 올려놓을 수가 없었다.
신들은 거인국으로 전령을 보내 무당 히로킨을 데려오록 했다. 히로킨은 뱀을 채찍삼아 휘
두르며 늑대를 타고 달려왔다. 히로킨이 늑대에서 내려 배에 다가가자 오딘은 전사들을 시
켜 늑대와 뱀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늑대는 조용히 있도록 달래기에는 너무 사납고 힘이
셌다. 전사들은 늑대를 붙잡고 있으려다가 될어 늑대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다. 전사들은 어쩔 수 없이 곤봉 같은 주먹을 사정없이 휘둘러 늑대를 영원히 잠들게 했
다.
히로킨은 무서운 힘을 지닌 마녀였다. 그녀가 발데르의 배 링그호른을 향해 주문을 외자
배는 무서운 속도로 미끄러져 바다를 향해 내달렸다. 굴림대들은 배와 마칠을 일으켜 불이
붙었고 배가 구르는소리에 아홉 세계가 모두 부르르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히로킨의 늑대
들이 일으키는 소란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토르는 히로킨의 경건치 못한 행동에 참을성을 잃
고 말았다. 그는 도끼 묠니르를 번쩍 치켜들고 마녀를 향해 뛰어들 태세를 취했다. 히로킨은
경멸 섞인 시선으로 토르를 노려보았다. 신들이 기겁하며 달려가 토르를 말렸다.
저 요사스런 년을 박살낼 테야!
토르가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신들은 동생 발데르의 명복을 위해 참으라고 타일렀다. 토
르는 기적적으로 분노를 추슬러 도끼 든 손을 내렸다. 그리고 돌아선 그는 애꿏은 모래밭만
세차게 걷어찼다.
운구를 담당한 네 명의 신이 바다로 들어가 시신을 들어올려 배위에 얹었다. 처음부터 초
인적인 인내심을 가지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발데르의 아내 나나는 마침내 한계에 다다랐
다. 그녀는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메말라 버린 상태였다. 남편이 푹신푹신한 건초더미에 올려
지는 것을 바라보던 그녀는 마침내 그 자리에 쓰러져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숨을 거든 나나는 남편 곁에 나란히 누웠다. 발데르가 타고 다니던 말이 끌려왔다. 신들은
말을 사정없이 토막내어 발데르 부부의 시신 주위에 흩부렸다.
장례식의 마지막 절차로 상주인 오딘이 바닷물을 헤치고 나가 배 위에 올랐다. 그는 아들
부부의 시신을 한참동안 굽어보았다. 난쟁이들이 만들어 오딘에게 바친 황금 팔찌가 아들의
시신 곁에 헌정되었다. 오딘은 허리를 굽혀 아들의 귀에 마지막 키스를 했다.
오딘의 시호에 다라 시종 한 명이 횃불을 치켜들고 배로 다가갔다. 그가 발데르의 제단에
불을 붙이자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때 리트라는 난쟁이가 발을 헛디뎌 토르의 앞을 가
로막았다. 분노한 토르가 그를 걷어찼고 불쌍한 난쟁이는 타오르는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
장례식의 마지막 희생물이 되었다.
신들은 마침내 배를 붙들고 있던 줄을 끊었다. 타오르는 배는 서서히 해안을 떠나 바다
한가운데로 떠나갔다. 활활 타오르며 불붙은 배는 얼마 안 가서 한 점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되어 신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 불덩어리를 이끌고 갔다. 피어오
른 뭉게구름 속에 파묻힌 불덩어리는 발데르 부부의 시신을 안고 사라져갔다.
세상 만물이 발데르를 애도하면 그를 살려 보내리
발데르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의 형 헤르모드는 지옥을 향해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지옥은 일찍이 오딘 형제가 세상을 창조하기 전부터 있던 북녘의 동토 니플레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헤르모드와 그가 탄 오딘의 애마 슬레입니르는 꼬박 아흐렛 동안을 달린
끝에 니플헤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부글부글 끓거나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얼음 강을 건너
야 여자 요괴 헬이 다스리는 지옥으로 다가갈 수 있다. 로키와 거인족 여인 사이에 태어난
헬을 오딘이 이곳으로 쫓아보낸 이야기를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마침내 헤르모드와 슬레입니르는 마지막 강에 놓인 다리를 건넜다. 그때 다리 감시인인
한 노파가 그들을 세웠다.
어제 다섯 구의 시체가 이 다리를 건너갔지. 그런데 당신은 그 다섯 명이 내는 발소리보
다 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가는군. 지나가기 전에 먼저 신분을 밝히게.
헤르모드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당신은 아무리 봐도 죽은 사람 같지 않아. 하고 노파가 다시 말했다.
헤르모드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내 이름은 헤르모드. 오딘의 아들이오. 어제 이 다리를 지나간 사람은 내 동생 발데르죠.
나는 그애를 찾아야 해요.
그제야 노파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지금가지 오신 만큼 더 가셔야 해.
헤르모드와 슬레입니르는 기운차게 지옥문을 향해 내달렸다. 마침내 웅자를 드러낸 지옥
문과 솟아오른 성벽은 지옥이 얼마나 범접키 어려운 곳인가를 웅변하고 있었다. 이 문으로
들어서면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물고 있는 해안이 나올 곳이다. 슬레입니르는 한참 히힝거
리고 섰다가 헤르모드가 박차를 가하자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 잠겨 있는 문을 도움닫기로
껑충 뛰어올랐다. 까마득히 솟은 성벽도 사력을 다한 명마의 동갸 앞에는 장난감 성에 불과
할 뿐이었다.
지옥에 들어선 헤르모드는 말에서 내려 죽은 자들이 갇혀 있는 엘류드니르궁의 열고 동굴
같은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푸르딩딩하게 썩어 들어가는 시체들이 얼굴을 내밀고 천상에서
온 용감한 신을 바라보았다. 하녈같이 처량한 몰골들 뒤로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발데르의
화사한 얼굴이 보였다. 악취가 진동하는 그곳에서 헤르모드는 오직 발데르를 위하여 미동도
하지 않고 하룻밤을 꼬박 세웠다.
지욱의 여왕 헬은 병상에 누워 있다가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깜박이는 불행 의 장막을
걷었다. 그녀의 용모는 살아 있는 여인과 다를 것이 없었으나 다리와 허벅지에는 여느 시체
처럼 푸른 반점이 번져가고 있었다.
무슨 일로 산 자가 죽은 자의 궁전을 방문했는고?
지옥의 여왕이 섬뜩한 목소리로 물었다. 헤르모드는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을 움직이기 위
해 정성을 다했 자신이 온 목적을 설명했다.
아스가르드의 모든 신이 식음을 전폐하고 발데르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자비를 베푸소서.
그러나 헬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당신이 말하는 것만큼 발데르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의심스럽군.
헬은 헤르모드의 옹색한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나 헤르모드는 할말을 다한 만큼 굳게 입
을 다물고 침묵으로 헬의 결단을 호소했다.
헬은 한참 뜸을 들인 다음 무겁게 입을 열었다.
흠, 이렇게 하도록 하지. 발데르가 사람들의 사랑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 시험을 해보자
고. 만약 세상 만물이 발데르를 추모하며 눈물을 흘린다면 이 냉혹한 헬 님께서도 감동받지
않을 수 없을 거야. 그러면 발데르를 당신들 곁으로 돌려보내겠어.
발데르와 나나는 헤르모드에게 감사하며 그를 엘류드니르 궁전 밖으로 배웅했다. 헤르
모드와 슬레입니르는 한번도 쉬지 않고 아스가르드를 향해 내달렸다. 그의 보고를 접한 아
사 신족은 아연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사절단을 조직하여 니플헤임과 지옥을
제외한 모든 세계에 파견했다.
발데르가 흉흉한 꿈을 꾸어을 때 그를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만물이 이제는 기꺼이
그를 위해 목놓아 울 것을 약속했다. 아름답고 고상한 인품의 발데르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도 돌도 울었다. 세상의 모든 병균,
세상의 모든 독초도 발데르를 기리며 엉엉 울었다.
사절단은 이제 거의 모든 곳에서 약속을 받아냈다고 판단하여 귀로에 올랐다. 도중에 그
들은 어느 초라한 농가를 지나게 되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문을 두드렸다. 암팡지게
생긴 노파가 qkdas을 획 열어젖혔다.
친애하는 발데르를 위해 울어주시오. 그리하면 그분을 돌려보내겠다고 헬 여왕이 약속했
답니다.
노파는 사나운 눈매로 사절단을 쏘아보았다.
울라고? 내 눈에 눈물 따위는 없어. 썩 돌아가라. 그깟 애송이를 위해 거짓을 행할 만큼
한가한 내가 아니야!
그 순간 사절단은 온 세상이 노랗게 보였다. 그들은 엎드려 울면서 탄원했다. 그들이 거기
서 쏟은 눈물의 백문의 일이라도 노파가 흘려주면 만세상의 희망이 살아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노파는 끝내 그들의 애원을 뿌리쳤다.
어깨가 축 처진 채 돌아오는 사절단을 맏이하여 오딘 이하 모든 아사 신족의 신들은 비탄
에 잠겼다. 단 한 명의 노파 때문에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말았다. 신들은 누구나 알고 있었
다. 사실은 노파가 둔갑한 로키라는 것을. 그동안 신과 거인 사이를 넘나들며 어지간히 분란
을 일으키던 로키가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 확실히 신들에게 등을 돌렸음을 그들은 간파했
다.
그들은 이를 갈며 마음속으로 한 목소리를 내었다.
로키 이놈, 어디 두고보자!
로키, 신들에게 잡혀 사슬에 묶이다
저기 있다. 잡아라!
험준한 계곡에 신들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그들은 쏜살같이 흐르는 계곡의 강물을 거슬러
도망가는 연어를 쫓고 있었다. 연어는 강바닥으로부터 솟구쳐 올라 눈부신 햇살 아래 늘씬
한 자태를 뽐내고는 부리나케 달아났다.
한참 추적을 계속하던 신들은 잘 만들어진 그물을 발견했다.
이건 정말 작품인걸. 많이 워낙 촘촘해서 피래미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겠어.
솜씨로 보아 로키 녀석이 만든 게 분명해. 놈은 이곳에서 이골로 고기를 잡아먹으며 연
명했던 게 틀림없어. 교활한 놈!
이게 우리 손에 들어온 이상 놈을 잡는 건 이제 시간 문제야. 로키 녀석, 제 무덤을 제가
판 셈이군.
신들은 이렇게 한바탕 떠들고 난 뒤 작전을 짰다. 아까 강물을 거슬로 도망간 연어는 로
키가 변신한 게 틀림없었다. 그가 이 계곡에 숨어 있는 걸 용상에서 내려다본 오딘이 토르
를 반장으로 하는 특별검거반을 조직하여 이곳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신들은 두 패로, 아니 두 패라기보다는 토르와 다른 신들로 나뉘었다. 다른 신들은 그물에
바위를 매달아 강바닥을 훑는 방식으로 로키를 추적했다. 그리고 토르는 그물 뒤에서 기다
렸다. 연어가 공중제비를 돌아 그물을 뛰어넘어 뒤쪽으로 도망가려 할 때 손으로 연어를 잡
기 위해서였다.
강바닥에서 숨을 수도 없고 그물망 사이로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된 연어는 선택의 기로에
서 서게 된다. 지금처럼 계속 달아날 것인가, 아니면 공중제비를 돌아 추적자들을 뛰어넘은
다음 넓디넓은 바다로 헤엄쳐 갈 것인가? 그런데 이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로는 더 이상 강물
의 흐름을 거슬러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모험이긴 하지만 다시 한번 도약을 해볼 도리
밖에 없었다.
그물을 끌고 가던 신들의 머리 위로 연어의 찬란한 비상이 재연 되어싿. 연어는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가 토르의 발 아래로 풍덩 빠져들어 갔다. 토르는
재빠른 손놀림으로 물밑을 더듬었다. 연어는 안간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지만 솥뚜껑 같은
토르의 손을 피할 수는 없었다. 토르는 도끼를 던질 때의 날랜 동작으로 두 손아귀에 연어
를 틀어쥐었다.
잡았다!
토르가 연러를 쥔 손을 하늘 높이 들어올리며 포효했다. 연어는 몇 차례 몸을 비틀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다. 천하의 로키가 마침내 신들의 손에 잡히고 만 것이다.
로키가 장님 신 호두르를 고드겨 발데르를 죽였을 때 신들은 어금니를 악문 채 그를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신성한 땅 아스가르드를 피로 더럽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여기는 신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버림받은 땅 미드가르드이다. 신들보다 한참
지위가 낮은 인간들이 사는 대지이다. 여기서 신들은 얼마든지 피의 축제를 벌일 수 있었다.
신들의 일부는 본모습으로 돌아온 로키를 끌고 동굴로 갔다. 그리고 일부는 로키의 처와
자식들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갔다. 한 명이 로키의 아들 발리에게 저주를 걸었다. 발리는
한번 부르르 떨더니 온몸에 털이 나고 송곳니가 튀어나오면서 무시무시한 늑대로 변했다.
이 늑대는 숨돌림 틈도 주지 않고 동생 나르비에게 덤벼들었다. 먼저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어놓은 뒤 잇달아 온몸을 물어뜯어 사지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비명을 올리며 기절해 버
린 어머니 시간을 뒤로 한 채 늑대 발리는 씩식거리며 광야로 뒤쳐나갔다.
신들은 나르비의 주검에서 내장을 모조리 빼들고 로키의 아내 시긴과 함께 로키가 잡혀
있는 동굴로 갔다.
잘 보시오, 배신자의 운명이 어떠한지를.
토르는 위압적으로 말하고는 커다란 바윗덩어리 셋을 나란히 세워놓았다. 그 각각의 바윗
덩어리 복판에는 큼직한 구멍을 뚫었다.
교활한 녀석! 네놈이 이 곤경에서 벗어나려면 지금까지 쓴 계책보다 휠씬 단수가 높은
계책을 써야만 할걸.
신들은 이렇게 비아냥 거리며 나르비의 내장으로 로키를 바윗덩어리에다 묶기l 시작했다.
첫 번째 바위에는 어깨를, 두 번째 바위에는 엉덩이를, 그리고 세 번째 바위에는 무릎을 묶
었다.
아버지의 온몸에 칭칭 감긴 나르비의 내장은 곧 쇠사슬처럼 단단해졌다.
겨울산의 여왕 스카디가 사납게 생긴 독사 한 마리를 잡아들고 동굴로 들어왔다. 처량하
게 묶여 있는 로키를 바라보는 토르의 가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렇게 다정하게 거인국
을 함께 여행했건만...그러나 그는 곧 상념을 걷어내고 독사를 동굴 천장의 종유석에 붙들어
매었다. 독사의 쩍 벌어진 입은 정확하게 로키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변신과 술
수에 능한 로키도 이제는 달아날 방법이 없었다. 신들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분노와 증오심
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연민 어린 표정으로 동굴을 나섰다.
로키의 아내 시긴은 눈물 흘리며 한숨지을 새도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나무 그릇을 가져
다 로키 얼굴 위에 얹었다. 독사의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무서운 독액이ㅣ 금세 그릇에 가
득 찼다. 시긴은 서둘러 그릇을 비우고 다시 독을 받아냈다.
아아, 잔인한 신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한 일이 과연 그렇게 나쁜 것이었던가? 나는 이
세상이 아무런 재미도 없이 그저 게으름에 대한 찬양과 술잔치로만 채색되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시끌벅적하게 서로 싸우고 모험을 벌이고 도박도 하는 것이 세상 사는 재미 아닌
가? 나는 그런 재미를 너희들에게 제공했을 뿐인데, 그 대가가 고작 내 아들의 내장과 뱀의
독이란 말인가?
로키의 눈은 저주로 불타올랐다.
그대 신들에게 저주 있어라! 아스가르드에 묶여 있는 내 아들 늑대 펜리르여, 대지를 감
싸고 있는 내 아들 뱀 요르문간드여, 그리고 지옥을 다스리는 내 딸 헬이여! 그리고 요툰헤
임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거인들이여! 일어나서 저 신들에 맞서 싸우라! 신과 거인의 결전
라그나랙으로 나아가자!
신과 거인, 최후의 대결 라그나랙의 날이 오다
마침내 때가 왔다. 온 세상에 파국이 닥쳤다.
파국의 신호탄은 인간이 사는 대지에 밀어닥친 2년 간의 처절한 전쟁이었다. 이 험악한 젙쟁이
할퀴고 지나간 인간 세상에는 패륜과 유혈의 아비규환만이 남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형제
들끼리 서로 싸우며, 오누이가 살을 섞는 일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어머니가 남편을 버리고 자
기 아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참혹한 3년 전쟁이 끝나자 뒤이은 3년은 내내 겨울만 계속되었다. 여름은 자취를 감추었고 온
세상엔 눈보라만 세차게 불었다. 그나마 이것이 이 세상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겨울이었다. 3년의
기나긴 겨우이 끝나자 늑대 시대 라고 불리는 세상 최후의 시대가 막을 올리면서 더 이상 여름도
겨울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의 마지막 날이 저물 무렵, 해를 뒤쫓아 달리던 늑대 스콜은 마침내 그 해를 붙잡아 꿀꺽
삼켜 버렸다. 아스가르드는 해를 물어뜯는 스콜의 게걸스런 어금니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로 뒤범
벅이 되었다. 늑대 하티도 달을 붙잡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해와 달이 사라지면서 별들도 하늘
에서 사라져 칠흑 같은 암흑이 대지를 덮쳤다.
대지가 떨기 시작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사정없이 흔들리다가 뿌리째 뽑혀 나뒹굴었고 산은
울부짖었으며, 바위는 무너져 내렸다. 세상의 모든 굴레와 사슬이 풀려 나갔다. 신들이 섬 한가운
데 묶어놓았던 사나운 늑대 펜리르는 마침내 끈에서 풀려 나와 으르렁거리며 아스가르드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피얄라르라고 불리는 붉은 수탉이 거인들을 향해 투쟁의 날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며 홰를 쳤다.
그러자 오딘의 전사들이 모여 있는 발할라궁에서도 황금볏을 지닌 닭 굴림캄비가 결전의 날을 알
리는 울음을 울었다. 닭은 지옥에도 있어서 요란을 떨며 죽은 자들을 깨워 일으켰다.
일어나 최후의 날을 맞아라 !
바다 밑에 도사리고 있던 우주 뱀 요르문간드가 대지로 나아가기 위해 몸을 비틀자 세계의 모
든 바닷가에는 어마어마한 해일이 밀어닥쳤다. 먼바다에서는 죽은 자들의 손톱과 발톱으로 만든
배 나글파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 안에는 흐림이란 거인을 선두로 하는 거인 군단이 타락 천
사와 같은 으스스한 몰골을 한 채 도열해 있었다. 나글파르 호의 행선지는 거인과 신들의 결전장
인 비그리드 평원이었다.
한때 신들 편이던 로키도 아들의 내장을 끊어버리고 동굴을 나와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는 지옥
에서 건져올린 귀신들을 잔뜩 태운 전함을 몰고 비그리드 평원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토르 이놈! 내 아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그 내장으로 아비인 나를 묶어놓은 천하의 무뢰한아!
이제 이 로키의 철퇴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거라!
늑대 펜리르도 뱀 요르문간드와 함께 비그리드 평원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침이 질질 흐르는
늑대 펜리른의 아가리는 위로 하늘, 아래로 땅에 닿아 있었고, 뱀 요르문간드는 온몸을 뒤채며 하
늘과 땅에 독을 흩뿌려댔다.
세계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괴이한 소리들로 가득 찼다. 태고 적부터 화염을 뿜어온 남쪽 불의
나라에서도 불의 거인들이 비그리드 평원으로 향하면서 하늘을 활활 태워버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 같은 이 거인들의 선두에는 태양처림 이글거리는 불칼을 든 불의 화신 수르트가 서
있었다.
거인들과 로키의 아들들, 지옥의 귀신들, 불으 거인들... 사방 600킬로미터에 달하는 비그리드 평
원도 이 괴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자 거의 빈틈이 없어 보였다.
신들도 최후의 결전을 위해 만반의 대비가 되어 있었다. 먼저 아스가르드 경비대장 헤임달이 초
소에서 나와 모든 신을 향해 경적 나팔을 불었다. 그 소리가 아홉 세계 전역에 울려 퍼지자 신들
은 모두 일어나 오딘의 궁전에 모여 최후의 작전 회의를 열었다. 애마 슬레입니르에 올라탄 오딘
은 미미르의 샘으로 가서 샘을 지키고 있는 현자 미미르에게 조언을 청해 들었다.
천지창조 이전부터 있어 온 우주나무 이그드라실도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신음을 토해내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때마침 한 쌍의 남녀가 다가오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이그드라실 줄기
속 깊이 들어가 숨었다.
아사 신족과 발할라궁의 전사들 에인헤르야르는 무장을 갖추었다. 모두들 투구를 쓰고 쇠비늘
갑옷을 입고 칼과 창과 방패를 들었다. 발할라 궁전의 540개나 되는 문 앞에는 각각 800여명의 전
사들이 도열했다. 오딘은 이들 40여만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거인족이 몰려오는 비그리드 평원으
로 진군했다. 신 중의 신, 전쟁과 지혜의 신 오딘은 황금 투구와 빛나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난쟁
이들로부터 받은 보검 궁니르를 휘두르며 대군의 선두에 섰다. 날카롭게 빛나는 그의 외눈은 전방
을 투시하며 적군의 진용을 살피고 있었다.
오딘이 늑대 펜리르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마침내 최후의 결전은 시작되었다. 오딘
바로 옆에 포진하고 있던 토르는 도끼 묠니르를 휘두르며 오딘을 엄호하려 했지만 우주 뱀 요르
문간드가 그에게 덤벼드는 바람에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도 급급해 졌다.
한때는 거인족 여인인 게르드를 사랑했던 프레이르는 불의 거인 수르트와 맞섰다. 수르트가 이
글거리는 불칼을 휘드르며 달려들자 프레이르는 하인 스크르니르를 통해 사모하는 여인 게르드에
게 보냈던 보검이 못내 아쉬워졌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용맹한 신. 비록 역부족이긴 해도 장렬하
게 저항하다가 수르트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고 난 다음에 쓰러져 갔다. 동토의 여신 게르드와 나
누던 사랑의 추억이 죽어가는 그의 뇌리에 아름다운 영상처럼 스쳐지나갔다.
늑대 펜리르에게 한 손을 물려가며 이 괴물 늑대를 묶어두는 데 성공했던 외팔이 용사 티르는
거인국에서 온 괴물 개 가름과 맞붙었다. 그들은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은 서로으 숨통을 끊어
놓는 것으로 치열한 승부를 마감했다.
동굴에 묶여 있다 나온 거인 로키는 두눈을 희번덕거리며 한때의 절친한 친구였으나 이제 불구
대천의 원수인 토르를 찾아헤맸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아스가르드의 경비대장 해임달이 버티고
서 있었다. 거인족이 토르의 도끼를 훔쳐갔을 때 토르를 여자로 분장시키려는 로키의 제안에 맞장
구를 쳐주던 헤임달이었지만 생사가 걸린 육박전에서는 조금도 양보가 없었다. 그들의 대결은 무
승부로 끝났다. 지금과 같은 필사의 대결에서 무승부란 물론 어느 한쪽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의미
에서 였다.
토르는 우주 뱀 요르문간드를 상대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둘은 이전에는 바다에서 맞붙
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요르문간드는 토르의 낚시에 결려 거의 다 죽은 목숨이었으나 요행히 거
인 히미르의 도움으로 빠져 나갔었다. 오늘 최후의 결전에서 다시 맞붙었으나 괴력의 용사 토르에
게 뱀 따위는 아무리 덩치가 크다고 해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최강의 거인 흐룽그니르를 한방에
해치운 힘과 솜씨로 토르는 요르문간드를 난도질했다. 그러나 요르문간드가 내뿜는 독은 치명적이
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조심하지 않았던 것이 토르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는 죽어 넘어진 요르문
간드로부터 불과 아홉 발짝을 떼자마자 피부 깊숙이 스며든 독 때문에 피를 토하며 쓰러져 영웅
적인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신들 가운데 가장 장렬하고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은 자는 역시 최고신 오딘이었다. 이 세상 무
엇이든 먹어치울 것 같은 늑대 펜리르와 그가 벌이는 용호상박의 대결은 차마 눈뜨고 다 볼 수
없을 만큼 처절하고 잔혹했다. 오딘은 궁니르를 휘두르며 늑대를 유린했다. 그러나 세상 끝에서
사슬에 묶인 채 오랜 세월 절치부심 이날만을 기다려 왔던 늑대 펜리르가 창에 몇 번 찔린다고
해서 간단히 쓰러질 리는 없었다. 오히려 놈의 신경을 콕콕 찌르는 상처는 놈을 더욱더 포악하게
만들었다.
구중궁궐에 앉아 온갖 마녀들을 탐하며 세상을 살아온 늙은 신 오딘이 이런 야수를 상대해 오
래 버티기란 처음부터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인들의 조상 이마르를 죽인 이래 모
든 거인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던 최고신 오딘의 최후는 그렇게 찾아왔다.
신들의 왕 오딘은 죽고 신들의 수호자 토르도 죽었다. 신들과 인간의 희망인 발데르는 이미 죽
어 지옥에 갇혀 있다. 누가 남아 이 최후의 전투를 이끌 것인가? 신들과 에인헤르야르의 사기는
급격히 떨어져갔다. 그러나 아직 긑나지는 않았다. 죽은 오딘에게는 또다른 용맹한 아들 비다르가
있었으니까.
비다르는 누구인가? 여러분은 토르가 로키에게 속아 허리띠도 풀고 도끼 묠니르도 놓아둔 채
거인국으로 떠났던 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토르는 숲 속에서 그리드라는 오딘의
정부 집에 하룻밤 묵었고, 그녀가 자시느이 무기를 토르에게 빌려주었기 때문에 토르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 숲속의 여인 그리드와 오딘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바로 비다르였다. 그 여인은 거인
족이었으므로 비다르의 피에는 신과 거인의 피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비다르는 아주 특별한 군화를 신고 다녔다. 그는 유사 이래 가죽으로 신발을 만들 때마다 남아
서 버려진 가죽 찎Jrl들을 죄다 모았다. 그리고 그 엄청난 양의 가죽조각들을 압축하여 한 켤레의
신발로 만들었다. 그 신발이 바로 비다르의 특별한 군화이다. 따라서 이 가죽 군화는 질기기로 말
하면 쇠심줄보다 더하고 단단하기로 말하면 강철보다 더했다. 비다르는 이 무적의 군홧발을 아버
지 원수 펜리르의 벌어진 아가리 속에가 쑥 집어넣었다. 천하의 펜리르라도 무쇠보다 단단한 군홧
발이 뱃속으로 들어가 헤집어 놓으니 맥을 출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놈은 비다르의 발을 두 토막
내겠다는 듯 으르렁거리며 이를 악물었으나 어금니들만 유리병처럼 으스러지고 말았다.
비다르는 그렇게 늑대를 꼼작못하게 해놓고는 두 손으로 녀석의 위아랫니를 잡고는 아가리를
찢어버렸다. 신들의 왕을 잡아먹은 무서운 야수는 비그리드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러댔고, 비다르
는 냉혹하고도 침착하게 녀석의 온 몸을 두 갈래로 찢어버렸다.
로키도 죽고 그의 사나운 두 아들 요르문간드와 펜리르도 죽었다. 이제 거인 진영에서 남은 것
은 불의 거인 수르트분. 그는 미쳐 날뛰며 아군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온 세상을 향해 불칼을 던져
댔다. 아홉 세계는 모조리 이글이글 타오르는 용광로로 변해 버렸다. 아스가르드도 미드가르드도
활활 타오르고 요툰헤임도 화염에 휩싸였다. 심지어는 만년설의 나라 니플헤임도 열기로 인해 부
글부글 끓어올랐다.
신들은 모두 죽었다. 발할라의 용사들도 모두 죽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인간이 죽었다.
거인들도, 남북에서 몰려온 괴물들도 모두 죽었다. 산천초목도 들짐승도 날짐승도 모두 죽었다. 하
늘은 사라지고 니플헤임의 얼음과 서리와 빙하는 불길에 녹아 남쪽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순식간
에 불어난 바다는 모든 생명이 죽어간 대지를 서서히 뒤덮게 됐다.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로써 최후의 결전은 끝나고 우주는 그 생명의 한 차례 순환을 끝맺게 되었다.
파국은 대지와 천상의 세계를 모두 소멸시키고 오직 유유한 푸른 바다만을 남겼다. 이 바다는
고요하고 평온하지만 그 속에서는 또다른 생명의 순환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소리없이 진행될 것
이다. 새 생명과 새 세계가 탄생하여 바다를 뚫고 떠올라올 것이다. 그것은 악다구니 같은 싸움질
과 갈등으로 뒤덮였던 지난날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온 세상을 눈보라와 서리로 뒤덮던
겨울은 신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 될 것이다.
새 세대의 신과 인간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할 신세계는 일년 365일 아름다운 녹색 풀로 뒤덮
인 상춘의 세계이다. 씨를 뿌리지 않아도 나무와 과일들이 저절로 자라는 축복의 대지가 그곳에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갈 신인로는 무서운 거인은커녕 인강 사이에 전쟁을 불러일
으키는 외눈박이 신 오딘도, 두 눈 부릅뜨고 천둥을 내리치는 도끼 신 토르도 모르고 살아갈 것이
다.
새로운 세상의 지배자는 온화한 성품의 미남신 발데르이다. 그가 지옥에서 부활하여 지난 세상
에서 꽃피우지 못했던 지도력을 맘껏 발휘하며 생명의 새로운 순환을 앞장서서 이끌어갈 것이다.
구세계의 중추를 이루었던 우주 나무 이그드라실은 새로운 세상에서도 여전히 세계의 축이다.
그는 만물에게 생명의 원천을 제공한다. 악의 세력이 소멸한 신세계에서도 이 우주 나무가 종말의
예감으로 몸을 부르르 떨 일이 닥칠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신세대 신과 인류의
비극적인 최후를 의식하지 않고 힘차게 발데르의 찬가를 부르면서 새 삶을 시작할 것이다.
5. 저주받은 반지와 영웅 시구르드
5장을 읽기전에
우리나라에 동명성왕이 있고 그리스에 아킬레스가 있다면 독일에는 지크프리트가 있다. 지크프
리트는 탁월한 재능과 불굴의 모험 정신을 타고나 최고의 미인을 얻었으나 운명처럼 배신과 저주
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영웅이다.
4세기 게르만 대이동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크프리트 전설은 중세 이래 줄곧 독일 정신의 원
천으로 받아들여졌고 수많은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유명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
의 반지>와 독일 중세의 명작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는 지크프리트를 주인공으로 한 2대 명
적이다.
북유럽에서는 지크프리트에 해당하는 영웅이 시구르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지역적으로 북유
럽이 북쪽이니까 먼저 시구르드 전설이 생겨났고 그것이 독이레 전파됐으리라고 추측할 수도 있
지만 이 경우에는 지크프리트가 먼저 나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까도 말했듯이 게르만 대이동기에 라인강 유역을 주된 배경으로 하여 생성된 지크프리트 전
설이 북유럽 지방으로 흘러들어가 유사한 시구르드 전설을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쪽
전설보다는 북유럽쪽 전설이 좀더 작위적이고 억지춘향격 줄거리도 더러 눈에 띈다. 그러나 독일
쪽 원형을 북유럽 신화 속에 녹여 시구르드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괴하리만큼 처절한 북유
럽 특유의 비극성이 가미 되기도 했다.
여기서는 <불숭가 사가>,<에다>등 북유럽의 고전들이 전하는 시구르드의 이야기를 모아 소개
한다. 또 시구르드 이야기 말미에는 독일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와 바그너의 오페라<니벨룽
겐의 반지>의 줄거리를 요약해서 수록했다. 시구르드 이야기와 비교해 보고 기회가 닿으면 서사
시 본문도 읽고 오페라도 감상해 보기 바란다.
난쟁이 안드바리, 반지에 저주를 걸다
어느날 오후, 신들의 왕 오딘과 지략의 신 로키는 날쌘돌이 호니르와 함께 계곡을 지나고 있었
다. 근처에 폭포가 떨어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오딘은 울퉁불퉁한 강둑에 늘어져 있는 수달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 수달은 마침 폭포에서 잡아온 연어 한 마리를 맛있게 먹으려던 참이었다. 오
딘은 말소리를 죽이고 로키와 호니르에게 수달을 가리켰다.
로키는 슬그머니 강가의 돌멩이를 집어들고 수달에게 다가가서 힘껏 던졌다. 돌멩이는 정확하게
수달의 머리를 강타하여 불쌍한 수달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로키는 한 손에 연어를
들고 한 손에 수들을 잡고는 씩 웃었다.
그야말로 일석이조로군.
세 명의 신은 푸짐한 저녁거리가 마련됐다는 기쁨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하루 묵을 곳을 찾아다
녔다. 때마침 멀지 않은 곳에 어부의 집이 보였고 그 앞에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하룻밤만 재워주실 수 없겠소. 사례로 찬거리를 드리리다.
오딘이 정중하게 부탁했다.
내게는 아들 셋과 딸 둘이 있소. 그들이 모두 배불리 먹을 만한 음식이 있소?
어부가 묻자 셋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물로닝죠.
흐레이드라므라는 이름의 어부는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그들이 수달을 보여주자 어부
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영문을 몰라하는 신들에게 기다리라고 하고는 찬바람을 휙 일으
키며 밖으로 나갔다. 그가 서둘러 찾은 것은 집안에 있던 두 아들 레긴과 파프니르였다.
무슨 일이세요, 아버지?
저 방 안에 든 놈들이 네 아우 죽였어. 글니 우리가 복수를 해야 한다. 놈들도 셋, 우리도 셋
인데 만만치 않은 놈들이니까 기습을 해야한다. 한 놈한테서는 창을 뺏고 다른 한 놈에게서는 신
발을 뺏도록 해. 나머지 하나는 별볼일 없는 것 같아.
갑자기 들이닥친 어부 삼부자에게 오딘과 로키와 호니르는 간단히 사로잡혔다.
아니, 무슨 대접이 이렇소?
당신들이 우리에게 갖다준 수달은 내 아들 오투르(수달)야. 긍 애는 낮동안 수달로 살면서 물
고기를 잡아 내게 갖다 주곤 했어.
이보시오, 우리는 그 수달이 당신 아들인 줄 몰랐소.
오딘이 애원조로 말하고는 슬쩍 로키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런 줄 알았다면 이 친구가 돌을 덩지지 않았을 거요.
로키는 책임을 자기에게 떠넘기는 오딘을 흘겨보았다.
어쨌든 죽은 건 죽은 거야. 그 대가로 네놈들을 회쳐야겠어.
그러자 오딘이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외쳤다.
잠간만! 당신 아들의 몸값을 지불하겠소. 뭐든지 달라는 걸 주겠으니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시
오.
어부 흐레이드마르는 잠시 생각한 후에 아들들을 시켜 죽은 수달의 가죽을 벗겨 오도록 했다.
솜씨좋은 여동생들이 벗겨낸 오투르의 가죽을 벗겨 오도록 했다. 솜씨좋은 여동생들이 벗겨낸 오
투르의 가죽을 레긴이 들고 오자 어부는 오딘에게 말했다.
먼저 이 가죽을 가득 채울 붉은 보석을 가져오게. 그런 다음 다른 보물들로 가죽 바깥 부분을
완전히 덮어야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들의 몸값으로 당신들의 머리를 갖겠어.
오딘이 고개를 끄덕이고 로키에게 귀엣말로 무어라 속삭였다.
로키가 말했다.
이 두명을 인질로 잡고 나를 풀어주시오. 당신이 요구하는 보물을 가져오겠소.
풀려난 로키는 오딘이 일러준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로서는 급할 게 전혀 없었다. 오히
려 얄미운 오딘이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며칠 고생할 생각을 하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로키가 찾아간 곳은 미드가르드 끝에 있는 섬나라 흘레시였다. 이곳에는 신들이 마실 맥주를 만
들 수 있도록 큰 솥을 선물해 준 바다신 아에기르가 살았다. 아에기르에게는 솜씨좋은 고기잡이
아내 란이 있었는데 그녀가 만든 그물을 세상에서 가장 튼튼하고 가장 튼튼한 특제품이었다. 로키
는 갖은 교언영색을 다 발휘하여 이 그물을 빌릴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이 그물로 결코 사람을 해치지는 않겠습니다. 오직 신들을 구하는 데만 쓸 겁니
다.
로키는 그물을 들고 지하 동굴 세계로 내려갔다. 검은 난쟁이들이 사는 동굴 나라 한 곳에 깊디
깊은 지하 연못이 하나 있었다. 로키는 연못의 깊이와 어비를 대충 가늠한 다음 란에게 빌린 그물
을 쫙 펼쳐 연못 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물에는 큼직한 창꼬치 한 마리가 걸
려 올라왔다.
온몸을 비틀면서 팔딱팔딱 뒤는 못생긴 창꼬치를 두 손에 꼭 쥔 로키는 주문을 외웠다.
본모습으로 돌아가라!
그러자 동굴 전체가 돌아가라! 하고 로키의 말을 복창했다.
제모습을 찾은 창꼬치는 검은 난쟁이 안드바리였다. 그는 로키의 억센 두 손아귀에 목을 졸린
채 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제게 뭘 우너하십니까?
네가 금부자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얘기야. 갖고 있는 보물을 다 내놔.
겁에 질린 안드바리는 얼른 로키를 자기 동굴집으로 안내했다. 그는 울먹이면서 동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금덩어리나 금조각들을 두 개의 커다란 자루에 담았다.
이게 답니다. 어디에 쓸건지는 몰라도 대대손손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거요.
로키는 잠시 안드바리를 훑어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로는 안 되겠어. 네 손에 차고 있는 반지로 자루에 담아.
안드바리는 울부짖으며 로키에게 빌기 시작했다.
이것만은 안 됩니다. 금을 더 달라면 얼마든지 더 드리겠소.
로키는 특유위 비웃음을 흘렸다.
손다락에서 잘 안 빠지나 보지? 자, 내가 도와주지.
로키는 아드바리의 손목을 비틀어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낸다. 아아, 그 영롱한 아름다움이란! 절
로 탄성을 지르며 한동안 넋을 잃고 반지만 바라보았다.
안드바리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단호하게 저주를 푸부었다.
다 가져가라, 이 악당아! 더불어 내 저주도 함께 가져가라. 누구든 그 반지의 주인이 되는 놈은
끔찍한 파멸을 면치 못하리라!
로키는 자루들을 어깨에 둘러메면서 씩 웃었다.
그 저주를 어부 흐레이드마에게 전해 주지.
로키는 오투르의 가죽 속에 한 자루의 보석을 가득 담았다. 그런 다음 다른 한 자루의 보석으로
가죽의 겉부분을 덮었다. 그러나 어부 흐레이드마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투르의 신체 가운데
보석이 덮지 못한 딱 한 부위가 눈에 듸었기 때문이다.
이것 봐, 수염이 밖으로 비어져 나와 있쟎은가?
로키는 흐레이드마르를 흘겨보면서 주머니 속에 감춰두었던 안드바리의 반지를 그 수염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으로 로키는 난쟁이에게 빼앗은 보물을 모조리 내놓은 셈이고, 오투르의 몸은 완
벽하게 보석더미에 덮이게 되었다.
심술이 난 로키는 안드바리의 저주가 떠올랐다.
한 가지 말해줄 게 있군. 이 반지를 갖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는 원주인의 말씀.
로키는 음흉한 웃음을 남겨둔 채 오딘, 호니르와 함께 인간 백정의 집을 빠져 나왔다. 그들을
배웅하는 흐레이드마르의 입은 함박만큼 벌어진 채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아스가르드에서 로키가 오딘을 찾았다.
뭐 재미있는 일이 없었소?
있었지.
오딘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며칠 전에 자신의 용상에서 목격한 사건을 이야기했다.
안드바리의 저주가 허풍이 아니더군. 글쎄, 어부 흐레이드마르의 아들 녀석들이 아버지가 차지
한 황금을 탐내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겠나?
저런! 그럼 두 아들 녀석이 황금을 한 자루씩 나눠 가졌나요? 반지는 누가 갖게 됐소?
오딘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게 한도 끝도 없더군. 형제 가운데 파프니르란 놈이 레긴을 속이고 저 혼자
보물을 독차지해 버렸네. 물론 반지도 놈 차지가 되었지. 그뿐인 줄 알아? 파프니르 녀석은 아예
커다란 용으로 둔갑해서 또아리를 틀고는 하루 종일 보물만 지키고 있다네. 그놈의 보물이 뭔
지...
로키도 혀를 끌끌 찼다. 앞으로도 그 보물 때문에 여러 번 피비린내가 진동하리라고 생각하면
서.
시구르드의 아버지, 복수극을 벌이다
이제 잠시 눈을 돌려 이야기의 주인공인 시구르드가 세상에 태어나기가지 그의 가문에서 일어
났던 일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시구르드는 인간의 영웅이지만 그의 조상을 거슬러 올ㄹ가면 최
고신 오딘에 다다른다. 오딘의 피를 물려받은 북유럽의 명문 볼숭가가 바로 그의 출신 가문이기
때문이다.
어부 형제 파프니르와 레긴이 안드바리의 보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일
즈음 볼숭가의 궁정에서는 호화로운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볼숭왕의 고명딸 시그니가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고트족 왕자 시게이르가 그녀에게 청혼을 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청춘한 처녀
시그니는 왠지 오만해 보이는 시게이르 왕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볼숭왕은 딸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딸을 이 명문가의 사내에게 시집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불숭족의 궁전에서는 초례 잔치가 흥겹게 벌어졌다. 볼숭왕이 오딘의 시녀인 발키레와 결혼하여
낳은 열 명의 아들들은 새신랑 시게이르와 권커니 작커니 주연을 즐겼다.
주흥이 무르익어 가던 저녁 무렵, 타닥타닥 타오르던 모닥불을 등지고 노인 한 사랑이 뜰 한가
운데 나타났다. 키가 크고 챙이 넓음 모자를 썼으며 하나뿐인 눈은 불타는 듯 날카로웠다. 볼숭가
사람들치고 이 노인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이 과연 어디 있으랴?
노인은 놀란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들고 있던 칼을 들어 뜰 한 가운데 있는 참나무에
깊숙이 꽂았다.
이 명검은 나의 선물이니라. 누구든 이 칼을 뽑는 자가 그 선물의 주이이 될 것이다.
노인은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하고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볼
숭가의 조상신인 오딘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앞다투어 참나무로 달려나와 칼을 뽑
으려고 애썼다. 새신랑인 시게이르 왕자도 그 대열에 끼여들었다. 그러나 힘깨나 쓰는 장사들이
젖먹던 힘을 다 짜냈건만 오딘이 꽂아놓은 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볼숭 형제들 가운데 맏이인 시그문드가 나섰다.
그는 하늘을 향해 오딘! 하고 포효가 된 뒤경건한 자세로 명검의 손잡이를 감아줭T다. 잠시 후
참나무가 뿌리째 뽑히기라도 하듯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칼날이 나무 줄기를 빠져나와 허
공을 갈랐다. 명검 엑스칼리버를 뽑아든 열다섯 살 손년 아서처럼 시그문드는 오딘이 선사한 명검
그람을 높이 쳐들었다.
남달리 명예욕이 강한 고트족 왕자 시게이르는 처남 시그문드가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는 게 너
무나도 샘이 났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그는 은근슬쩍 시그문드에게 다가가 결혼 선물로 그 칼을
줄 수 없느냐고 물어보았다.
이 칼은 우리 조상 오딘께서 내려주신 보검이네. 게다가 그분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나무에서
뽑는 자가 주인이ㅣ 될 거라고 했으니 자네에게 줄 수는 없네.
시게이르 왕자는 새색시 시그니를 데리고 고트족 나라로 돌아가면서 앙심을 품었다. 그의 표정
에서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을 예감한 시그니는 마음이 한없이 어두웠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시게이르 왕자는 장인 장모와 처남들을 초청하는 사신을 보냈다. 불숭왕과
열 명의 왕자들은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하여 대규모 방문단을 구렸다. 관례에 따라 그들은 고
트족 나라 인접 항구에 배를 정박시켜 놓고 하룻밤을 보냈다. 사돈이 다스리는 거대한 왕국을 방
문하고 어여븐 공주를 다시 만날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볼숭 가족 앞에 시그니 공주가 밤을 틈타
몰래 나타났다.
지금 제 남편은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있답니다. 그러니 어서 돌아가세요. 그러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공주는 아버지에게 매달려 애원을 했다. 그러나 볼숭왕은 오딘의후예답게 의젓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얘야, 도망가는 일은 명문가의 도리가 아니란다. 죽음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찾아오는 게 아니
더냐?
그리하여 마침내 모딘 운명은 불숭가를 휘몰아쳤다. 비열한 시게이르 왕자는 군대를 단단히 무
장시켜 한줌밖에 안 되는 불숭왕 부부와 왕자들을 습격하였다. 불숭왕은 사위가 이끄는 군대의 손
에 장렬히 전사하였고 열 명의 왕자는 모조리 사로잡혔다. 시게이르 왕자는 처남들을 숲으로 끌고
가 한 명씩 참나무에 붙들어매었다. 시그니 공주는 식으믕ㄹ 전폐하고 몸져 누웠다.
왕자들은 밤마다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 특대에게 하루에 한 명씩 잡아먹혔다. 소문에 따르면
그 늑대는 시게이르 왕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부탁을 받고 둔갑한 요물이라고 했다. 마침내 아흐레
밤이 지나고 이제 단 한 명, 시그문드만이 살아남았다.
문득 정신을 차린 시그니는어떻게든 오빠를 살려서 반드시 피의 복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고트 왕실에 보관되어 있더너 오빠의 명검 그람을 몰래 빼돌려 술 속으로 갔다. 보름달이
떠오르고 늑대가 마지막 먹이로 배를 채우려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순간, 여동생의 도움으로 포승
줄을 푼 시그문드는 시퍼런 칼날을 휘둘렀다. 아홉 형제를 먹어치운 늑대는 그 칼날에 쓰러져 다
른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다.
시그문드는 아버지의 복수를 기약하며 계속 숲 속에 숨어 지냈고, 원수의아이를 밴 시그니 공주
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궁중에서 지냈다. 공주는 시게이르와의 사이에 태어난 사내아이를 모
랠 숲 속으로 데리고 가서 시그문드에게 주었다. 시그문드와 함게 단련시켜 남편에게 복수하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사내 아이는 거친 숲에서의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죽어버렸다.
시그니는 궁중을 거닐며 생각에 빠졌다.
고트인의 피를 받은 아이는 복수하는 데 적합하지 않아. 그렇다면 오로지 순수한 볼숭 혈통의
아이라야만 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제 볼숭가의 후손이라곤 나와 오빠분인데...
시그니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세게 물었다. 그런 다음 두 주먹을 꼭 쥐고 숲으로 갈 준비를
했다.
잠시 후 변장을 하고 나타난 시그니는 숲 속에서 짐승처럼 살고 있는 오빠 시그문드를 유혹했
다. 여자에 굶주려 있던 시그문드는 쉽게 그녀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렇게 며칠 밤을 오빠와 정을
통한 끝에 마침내 시그니는 볼숭가의 순수 혈통을 잉태할 수 있었다. 열 달이 지나 잘생긴 사내아
이를 낳은 시그니는 이 아이에게 신피에트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버지 시그문드에게 맡겨진 신피에트리는 과연 볼숭가의 자식답게 모든 시련을 이겨내며 무럭
무럭 자라났다. 마침내 어엿하게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게 자라난 아들을 데리고 시그문드는 복수
에 나섰다.
그들은 시그니가 여어놓은 문을 통해 몰래 고트족 왕궁에 잠입한 뒤 준비했던 짚단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엉겁결에 화재를 만난 왕자 시게이르와 고트족 왕실 사람들, 전사들, 시종들은 한 사
람도 남김없이 불타 죽었다. 시그니는 오바 시그문드와 아들 신피에트리를 따라 왕궁을 멀지감치
벗어나자 가던 기을 멈추었다. 그리고 오빠에게 무서운 비밀을 털어놓았다.
오라버니 사실 신피에트리는 오라버니와 저 사이에 태어난 아이랍니다. 전날 숲속에서 오라버
니를 유혹했던 여인은 바로 저였어요. 이제 부모님과 오바들의 원수를 갚고 나니 저는 죽어도 한
이 없답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시그니는 오빠이자 남편인 시그문드와 아들 신피에트리에게 입을 맞춘 뒤 화염 속으로 몸을 던
져 한많은 일생을 마감했다. 시그문드의 뺨에는 굵은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고, 남매 사이에서
태어난 비운의 사내아이도 땅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시구르드, 용을 죽이고 반지의 주인이 되다
부왕의 원수를 갚은 볼숭적의 영웅 시그문드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국을 침략한 외적
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부인을 맞이했다. 그러나 새로 맞은 부인은 눈엣가시같이 생각하던
신피에트리를 죽여버렸고, 이에 분노한 시그문드는 그녀를 추방한 뒤 현모양처형인 효르디스라는
여인과 재혼했다. 이 여인이 바로 영웅 시구르드의어머니이다.
시그문드는 참으로 불행한 일생을 살아왔다. 아버지와 형제들을 잃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이동생과 살을 섞는 근친상간을 범했다. 그 누이 또한 불길에 잃었을 뿐만 아니라 누이와의 사
이에서 태어난 불행한 자식마저 새엄마의 손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명문가의 아름다운 재혼
한 이제라도 그동아느이 불우한 삶을 보상받는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운명은 끝낸 시그문드 편이 아니었다. 그 역시 아버지와 형제들처럼 천수를 누리지 못하
고 푼딩족과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게다가 그에게 영광보다는 시련만을 안겨주었던 브란스
톡 참나무의 명검 그람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생과부가 된 효르디스는 시그문드의 아이를 잉태한 채 덴마크 왕자 알프와 재혼했다. 그리고 얼
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덴마크 왕실에서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하였다. 장차 온 유럽에 이름을
떨칠 불세출의 영웅 시구르드였다.
효르디스의 시아버지인 덴마크 왕 할프렉으 시구르드의 양육을 당시 덴마크의 왕실에 머무르고
있던 난쟁이 레긴에게 맡겨다.
여기서 잠시, 챂서 살펴보았던 안드바리의 보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오딘과 로키가 수달로 변
한 오투르를 죽였다가 그 몸값으로 난쟁이 안드바리의 보물을 오투르의 아버지에게 갖다준 이야
기 말이다. 그때 오투르의 두 형은 보물에 눈이 뒤지혀 아버지를 죽인 다움 자기들끼리도 서로 싸
워 한 녀석이 보물을 독차지하고 말았다. 바로 그 형제 중 한 며이 지금 뎆마크 왕실에 머물고 있
는 레긴이었다. 형 파프니르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빈툴털이가 된 채 덴마크 왕실에서 대장장이
노릇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형에게서 보물을 되찾으려는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등이 구부정하고 음산하게 생긴 난쟁이 레긴은 밥 먹고 일하는 시간만 빼면 오로지 형 파프니
르로부터 어떻게 보물을 빼앗을가 궁리하는 일로 소일해Tekl 파프니르가 무시무시한 용으로 변해
그니타헤이데의 동굴에 또아리를 틀고 보물을 지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놓았기 때문이다. 남
은 문제는 용으로부터 보물을 빼앗아올 힘세고 무모한 젊은이를 찾는 일이었다. 그런 레긴에세 시
구르드가 맡겨졌으니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게 아닐 수 없었다.
주물 공예에 능한 난쟁이답게 레긴은 양아들 시구르드에게 온갖 대장간 일을 세심하게 가르쳤
다. 솜씨 있는 젊은이로 자라난 시구르드는 산산조각난 아버지의 명검 파편들을 모아 훨씬 성능이
뛰어난 신형 검으로 주조했다. 명검 그람이 부활한 것이다. 그 날카로움으로 말하면 라인강을 흘
러가는 깃털을 향해 내리쳐서 반으로 가를 정도였다. 레긴은 마침내 벼르고 벼르던 일에 착수했
다.
어마어마한 보물을 틀어쥐고 있는 용을 내가 알고 있단다. 그 칼로 놈을 요절내고 보물을 차지
하지 않으련?
그러나 늠름한 젊은이 시구르드는 양아버지의 제안을 유보시켰다.
그보다는 불송족의 왕자로서 싸움터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한을 씻어드리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 일도 하지 않고 용을 친다면 황금에 눈이 어두워 경거망동했다고 후손들이 얼마나 저를 비웃
겠습니까?
시구르드는 할프렉 왕의 지원으로 군사를 일으켜 아버지의 원수인 푼딩족의 형제들을 징벌하러
떠났다. 시구르드가 이끄는 덴마크 군은 도중에 풍랑을 만나 고스란히 수장될 위기에 처했다. 그
때 외눈박이 노인이 나타나 그들을 풍랑으로부터 구하고 푼딩족의 나라로 가는 바른 길을 알려
주어다. 시구르드는 그 노인 덕분에 푼딩가 형제들을 몰살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이었다.
외눈박이 노인은 물론 오딘이었다. 조상신 덕분에 위기를 넘기고 큰 공을 세운 시구르드는 스칸
디나비아 일대에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숙원을 이룬 시구르드는 마침내 양아버지 레긴과 함
께 용 파프니르가 도사리고 있는 그니차헤이데의 동굴로 떠났다. 황야를 지나 동굴 앞에 선 시구
르드는 먼저 동굴 안의 동정부터 살폈다. 마침 용은 물을 마시러 나간 듯 동굴이 비어 있었다.
레긴을 뒤에 놔두고 시구르드는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내부 구조를 샅샅이 살핀 시구르드는 바
닥 한가운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으로 들어가 숨었다. 물을 마시고 들어온 용이 시구드르는 때를
놓치지 않고 명검 그람을 빼들어 용의 심장을 정확하게 찔렀다. 용은 동굴이 무너져내릴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며 온몸을 비비틀었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려 밖으로 기어나가는 용을 시구르든가
칼을 비껴들고 쫓았다.
황야에서 시구르드와 맞서게 된 용 파프니르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저주를 퍼부었다.
어린 놈이 벌써부터 금은보화에 눈이 어두워 날뛰다니 ... 네 녀석은 저 동굴 속의 보물들과 함
께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시구르드는 미동도 하지 않고 파프니르를 노려보며 응수했다.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다. 내 기꺼이 그 보물들과 죽는 날까지 함께 하겠
노라.
파프니르는 무거운 몸을 뒤채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다가 마침내 한 마디 말을 남긴 채 고개를
떨구었다.
넌 내 동생 레긴에게 이용당한 거야.
시구르드는 칼에 찔린 용의 심장을 도려내어 나무꼬챙이에 꽂아 불에 구웠다. 심장이 충분히 익
었다고 생각했을 때, 손가락을 내밀어 심장에서 스며나온 즙을 마시던 시구르드는 화들짝 놀라 손
가락을 급히 뺐다. 즙이 너무나 뜨거워서 손가락을 델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엉겁결에 손가락
을 혀에 갖다댄 시구르드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근처 나뭇가지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말소리
가 들리기 시작했다. 죽은 용이 지니고 있던 마법의 힘이 그 심장의 즙을 먹는 순간 시구르드에게
전해진 것이다.
새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레긴이 시구르드를 죽이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지?
글세 말야, 시구르드가 레긴을 가만히 놔두면 안 되는데....
그제서야 시구르드는 자신이 레긴에게 이용당했다는 파프니르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그는 분
노하여 레긴을 찾았다. 레긴은 벌한 한 곳의 낮은 풀섶에서 잠들어 있었다. 다가오는 시구르드의
발소리가 들리자 레긴은 흘러내린 침을 닦으며 일어났다.
아, 시구르드! 어떻게 됐니? 그 사악한 용을 해치웠니?
그러나 그 말에 대한 시구르드의 대답은 용의 피가 선연하게 묻어 있는 그람의 시퍼런 날이 대
신하였다. 시구르드에게 말을 하려고 벌린 입이 채 다물어지지도 않는 채 레긴의 목은 허공을 가
르며 힘없이 툭 떨어졌다. 이로써 안드바리의 보물을 탐낸 세 부자가 모두 지상에서 사라졌다. 시
구르드는 용의 심장을 먹고 용과 레긴의 피를 마셨다. 이제 마력을 가진 두 난쟁이의 힘은 고스란
히 시구르드에게 남겨진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말소리가 시구르드의 귀를 낭랑하게 울렸다.
저 보물을 갖는 사람은 아름다운 여인도 갖게 되어 있지.
암사슴이 사는 산꼭대기에 가면 타오르는 불길을 담장으로 가진 집 한 채가 있어.
그 안에는 아름다운 처녀가 잠들어 있어. 오딘의 시녀인 발키레였대.
오직 시구르드만이 불타는 담장을 뚫고 들어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지.
시구르드는 동굴에서 보물을 끄집어내 자신의 명마 그라니등에 싣고 자신도 말에 올랐다. 붉게
타는 석양을 등지고 우리의 젊은 영웅은 새들이 가르쳐 준 암사슴의 산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구르드, 잠자는 미녀와 사랑을 나누다
브린힐드는 오딘의 총애를 받던 시녀 발키레 중의 하나였다. 발키레는 오딘의 명령을 받아 전사
의 영혼을 천상의 발할라궁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지상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오딘은
발키레들에게 명령을 내려 전사들을 죽여 발할라로 데려오도록 한다. 독자 여러분은 제1장 신들
의 왕, 오딘 편에서 오딘의 지시로 전사를 죽이는 브린힐드의 활약상을 본 기억이 있얼 것이다.
어느날, 그토록 오딘에게 충성스럽던 브린힐드가 갑자기 오딘의 명령을 어기는 사태가 일어났
다. 오딘이 죽이라는 남자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남자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
리하여 인간에 대한 연민을 지닌 브린힐드는 그 남자의 상대방을 꺼꾸러뜨려 발할라로 데려왔다.
크게 분노한 오딘은 나뭇가지로 브린힐드를 찔렀고, 브린힐드는 저주가 걸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져들게 되었다. 오딘은 그녀를 지상의 어느 산꼭대기 집에 가두어 두고 집 주위를 영
원히 타오르는 불로 둘러 쌌다. 그런 다음 이렇게 말했다.
이 무시무시한 불의 담장을 뚫고 들어갈 용사가 아니면 그녀를 깨울 수 없으리라!
바야흐로 그 용사가 지금 산을 오르고 있다. 그의 이름은 시구르드, 오딘의 피를 이어받은 볼숭
가의 젊은 영웅이다.
명마 그라니에서 내린 시구르드는 불타오르는 담장을 자세히 살폈다. 방패들로 이루어진 담장은
시뻘건 불길로 뒤덮여 있어서 보통사람은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시구르드는 이미
새들의 말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알고 이었으므로 과감히 칼을 빼들고 화염 앞으로 나아갔다. 뼛
속까지 파고들 기세로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그는 담장 밑을 파헤쳐 그 아래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불 담장 안에는 완전무장한 사내가 옆으로 누워 있었다.
아름다운 처녀가 잠들어 있을 거라고 했는데... 이 친구는 경비원인가? 그런데 이렇게 태연히
자고 있으면 어떡해?
시구르드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사내의 투구를 벗겼다. 그 순간 시구르드는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막상 투구를 벗기니 건장한 사내인 줄 알았던 투구의 주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것이다. 시구르드는 한동안 넋을 잃고 잠자는 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그
녀가 입고 있는 무거운 갑옷을 벗기려 했다. 그러나 갑옷은 마치 그녀 몸의 일부이라도 되는 듯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시구르드는 실오라기도 반으로 가를 수 있는 명검 그람으로 갑옷을 잘라내기 시
작했다 타오르는 불꽃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는 갑옷의 비늘들이 하늘씩 둘씩 떨어져 나가다.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가 오롯이 드러나자 여인은 마침내 눈을 떴다.
여인이 물었다.
아아, 용사여! 그대는 누구시온지요?
제 이름은 시구르드. 볼숭가의 위대한 왕이신 시그문드의 아들입니다. 그대를 구하러 왔습니
다.
그러자 여인은 눈부시게 웃으며 일어나 해를 오려다보며 기도를 올렸다.
오오, 태양이여! 그리고 태양의 모든 아들들이여! 바라옵나니 우리 두 사람을 굽어 살피소서.
우리 두 사람에게 승리를 내려주소서!
시구르드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제 이름은 브린힐드랍니다. 오딘의 명령을 받들어 전사들의 영혼을 무지개 다리 건너 인도하던
발키레였죠.
브린힐드는 여기 누워 있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시구르드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브린힐드는 밝게 웃으며 뿔잔에 영롱한 빛을 뿜는 액체를 따라 시구르드에게 건넸다.
이 술을 드세요. 용기와 영예를 주는 마법의 술이랍니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술이지요.
시구르드가 뿔잔을 죽 들이켜자 브린힐드는 그에게 룬 문자를 가르쳐 주었다. 시구르드는 브린
힐드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는 내 아내입니다.
브린힐드도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수많은 남성 가운데서 오직
당신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두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말자는 굳은 사랑의 맹세를 했다. 타오르는 불 속에서 두
남녀는 일찍이 어느 누구도 나누지 못했던 열렬하고 진실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오딘의 얼굴엔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신이
점지해 준 두 남녀의 미래도 그리 밝지만은 않을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영원하자던 사랑의 맹세는 깨지고
시구르드는 브린힐드에게 반드시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불 속의 집을 떠났다. 그가
명검 그람을 차고 명마 그라니에 올라 세상을 주유하다가 이른 곳은 규키족의 나라였다.
규키족 왕에게는 혼기가 꽉 찬 구드룬이란 딸이 있었다. 규키왕은 마침 자기 나라에 들른 천하
제일의 영웅 시구르드를 사위로 삼고 싶어했다. 그러나 시구르드는 브린힐드를 생각하며 점잖게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 규키 왕의 아내 그림힐드는 신통한 요술의 소유자였다. 시구르드를 꼭 딸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어느날, 그녀는 마법의 술잔을 시구르드에게 건넸다. 영웅은 그 술을 받아먹자마자 브린힐
드에 관한 기억을 깡그리 잊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별다른 거부감없이 명문가인 규키 가문의
규수를 신부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시구르드는 일찍이 이곳에 당도했을 때부터 아내의 오빠, 그러니까 처남인 군나르, 회그니 형제
와 의형제 맹약을 해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함께 술도 마시고 사냥도 다녔다. 시구르드는
모든 면에서 처남들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런 매제를 눈여겨 보던 군나르는 어느날 시구르
드와 술잔을 기울이는 자리에서 중요한 부탁을 하고 나섰다.
이보게, 매제! 내부탁 좀 들어주겠나?
거나하게 취한 군나르는 비틀거리면서 시구르드에게 다가와 꼬부라진 혀로 이렇게 말을 걸었다.
말해 보게, 처남. 우리는 피를 나눠 마시며 의형제를 맺은 사인데 무슨 일인들 돕지 못하겠
나?
그의 아내 구드룬은 호기롭게 대답하는 시구르드를 흐룻하고 애정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산꼭대기에 천하절색의 미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가?
시구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브린힐드와 사랑을 나누던 기억은 그의 머리를 떠나고 없었
지만, 천하를 주유하던 그였기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도 남아 있었고, 그 산이 어디쯤 있는
지도 알고 있었다.
그 미녀의 이름은 브린힐드라고 한다네. 오딘의 명령을 수행하던 발키레였다더군. 내가 그 여
자와 결혼을 하고 싶은데 좀 도와 주지 않겠나?
시구르드는 브린힐드 란 이름을 듣자 잠시 멈칫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언가 머릿속을 어
른거리는 상념을 붙잡으려고 애를 써봤으나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처남을 바라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 산이 어디쯤 있는지는 내가 잘 아니까 안내를 함세. 나를 따라오게.
그들은 다음날 아침 함께 암사슴 산으로 원정길에 올랐다. 산꼭대기에 다다라 타오르는 불길을
보자 시구르드는 다시 한번 무언가를 생각해 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역시 아무 생각도 해내지
못한 채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군나르는 창을 꼬나쥐고 무서운 기세로 불길을 향해 돌진했지만 몇 걸음 못 가서 발길을 돌렸
다. 아니, 발길을 돌린 것은 그가 아니었다.
왜 돌아오나?
시구르드가 물었다.
글쎄, 이놈의 말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질 않네그려.
시구르드는 자신의 말 그라니를 군나르에게 빌려주었다. 그러나 천하의 명마 그라니조차 군나르
를 태우고 불 근처에서 한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군 그래. 내가 직접 하겠네.
시구르드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하지만 내가 들어가서 그녀를 구해내면, 정해진 운명에 따라서 내가 브린힐드의 남편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자네의 갑옷을 내게 주게. 내가 자네로 변장해서 들어가도록 하겠네.
시구르드는 처남의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그라니 위에 올라 탔다. 그러자 군나르는 기다렸다
는 듯이 어머니 그림힐드가 준비해준 물약을 시구르드에게 건넸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림힐드는
시구르드에게서 열렬한 사랑의 기억을 지워버렸을 정도로 뛰어난 마술사였다. 그녀가 특별히 조제
해 준 그 약을 먹은 시구르드는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 주인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즉 군나르
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영락없이 군나르가 되어 버린 시구르드는 힘차게 고삐를 잡았고 그라니는 앞발을 들고 산
아래 내려다보이는 온세상을 향해 포효한 뒤 맹렬한 기세로 불벽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는 언제
머뭇거렸냐는 듯이 불벽을 뚫고 미녀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짖쳐 들어갔다. 마법의 약이 시구르드
의 체력과 말 다루는 솜씨마저 군나르의 것으로 바꿔놓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다, 당신은 누군신가요?
흠칫 놀라 잠에서 깬 브린힐드가 군나르의 모습으 한 시구르드에게 물었다.
나는 규키가의 왕자 군나르라고 하오. 내가 그대를 구하려고 저 불벽을 뚫고 이렇게 들어왔소.
이제 그대는 내 아내가 되었소이다.
그러나 브린힐드는 옷깃을 여미며 경계 자세를 풀지 않았다. 오매불망 시구르드를 기다려 왔건
만 눈앞에 나타난 사나이는 전혀 예상 밖의 인물.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내게 가까이 오지 마시오. 나는 피로 물든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사내들을 때려줍히던 죽음의
전령이오. 내게 함부로 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오.
브린힐드는 매몰차게 경고한 뒤 칼을 빼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상대는 비록 삼류 한량의 얼
굴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였다. 시구르드는 좀더 브린힐드를 설득
하다가 더 이상 시간을 끌기가 싫어 힘으로 그녀를 제압했다.
당신이 뭘 믿고 지금 이렇게 저항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오딘이 저안 운명에 따르면 당신은 내
여자가 될 수 밖에 없소. 이 불의 담장을 뚫고 들어올 사내는 단 한 명뿐이란 걸 나도 익히 듣고
있었거늘.
심한 혼란에 빠진 브린힐드는 칼을 빼앗기고 시구르드의 완력에 굴복당해 그의 말에 실리는 꼴
이 되고 말았다. 꼼짝못하고 시구르드의 등에 몸을 맡긴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내가 꿈이라도 꾸었다는 건가? 분명히 이 남자는 불을 뚫고 들어
왔어. 그리고 힘도 보통이 아냐.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하여튼 시구르드와 맞먹거
나 그 이상이야. 하지만 이건 아냐. 이 남자한테는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야. 아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브린힐드를 태우고 쏜살같이 규키의 궁정으로 내달리는 시구르드로부터 한참 뒤처진 곳에서 군
나르와 회그니가 달리고 있었다. 규키의 궁전으로 돌아온 시구르드와 군나르는 서로 바꿔 입었던
갑옷을 다시 교환했다. 시구르드는 자기 모습으로 돌아왔다. 미리 연락을 받은 궁전에서는 벌써
결혼식 준비를 다 마쳐놓고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군나르 모습의 시구르드에게 이미 기가 꺾여
있던 브린힐드는 참담한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결혼식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명문가답게 결혼식은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어찌 되었든 브린힐드로서는 오랜 유폐 생활을 벗어
나 인간 세상에서 새출발하는 의식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띠며 아름다운 신부 화장을 하고
예식에 참여했다. 왕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딘이 이제는 그녀를 용서하고 새출발을 축하하
겠거니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식을 마치고 결혼 피로연이 시작되면서 그녀는 허물어져갔다. 이제는 꿈속에서 봤겠거
니 하면서 포기하고 있던 그 남자, 강렬한 사랑의 기억이 남아 있는 남자 시구르드의 얼굴이 보였
던 것이다. 그녀는 너무나 놀랍고 당황스러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더군
다나 시구르드는 다른 여자의 남편, 그것도 자기 시누이의 남편으로 피로연장을 부산히 돌아다니
며 하인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 등 진행을 맡고 있는 게 아닌가?
브린힐드는 애원을 담은 눈길을 그에게 보냈다.
당신이 여기 있었군요. 우리 사랑의 맹세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나요? 하지만 맹세를
먼저 깬 것은 당신이었지요. 제발 저를 보세요. 저를 지옥보다 더 괴로운 신방으로 보내지 마세요.
저를 여기서 빼내 도망쳐 주세요. 어디든지 따라 갈게요.
마침내 시구르드가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한번 경악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시구르드는 전혀 브린힐드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환하게
웃으며 남에게 하듯 인사를 건네 시구르드의 태도는 연기라기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날 밤 브린힐드는 혼돈과 모멸감과 좌절감 속에서 군나르의 접근을 철저히 뿌리쳤다. 그녀의
저항이 너무나 심했기 때문에 군나르는 홀로 자는 것보다 외롭고 힘든 밤을 보내야 했다. 그는 하
는 수 없이 몰래 신방을 빠져나와 자존심을 억누르고 매제인 시구르드를 불러냈다.
우리 누이와 꿀 같은 신혼의 단꿈에 빠져 있었을 텐데 이렇게 불러내 정말 미안하이. 하지만
저 여자가 끝내 나를 거부하니 어떡하나? 제발 이번 부탁만 한번 더 들어주게.
군나르의 부탁은 다시 한번 시구르드가 자신으로 변장해 브린힐드와 동침하면서 그녀를 길들여
달라는 것이었다. 사람 좋은 시구르드는 다시 한번 그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다시 군나르로 모습을 바꾼 시구르드는 신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저항하는 브린힐드를 번쩍 침대
에 뉘었다. 한번 나갔다 오더니 불을 뚫고 들어왔을 때의 기력을 회복한 남편을 의아한 눈길로 바
라보면서 완력에 밀린 브린힐드는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시구르드는 갑옷을 벗었다.
브린힐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옷을 다 벗은 시구르드가 브린힐드에게 다가오더니 허리춤에서 명검
그람을 빼드는 것 아닌가? 눈을 감았던 브린힐드도 칼에서 비치는 섬광에서 놀라 벌떡 몸을 일으
켰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시구르드는 말없이 칼을 그녀 옆에 길게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불을 끄고 자신도 그 옆
에 누웠다. 시구르드와 브린힐드 사이에 시퍼런 칼날이 놓인 것이다. 두 남녀는 아무리 한 지붕
밑한 침대에서 잠을 자더라도 서로의 살을 맞댈 수가 없었다.
이튿날 밤에도 군나르 모습의 시구르드는 똑같이 했다. 밖에서 보면 완전한 부부였지만 실제로
는 완전한 남이었던 것이다. 브린힐드는 밀려오는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 당신은 나를 원해서 결혼했으면서도 나를 범하지 않으시나요?
시구르드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니 나라의 결혼 풍습에 따르는 것이오. 첫 사흘 간은 이렇게 순결을 지키며 지내야 하오.
사흘째 밤, 침대에 누운 시구르드는 말없이 브린힐드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
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반지를 끼워주었다. 용 파프니르가 지키고 있던
보물 속에서 나온 그 저주받은 반지였다. 옛날 난쟁이 안드바리가 로키에게 이 반지를 빼앗길 때
퍼부었던 저주, 반지의 주인에게 재앙이 내릴 거라는 그 저주를 알지 못한 채.
브린힐드는 이것이 처녀로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오딘의 전령으로서 전선을 누비
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암사슴 산에서 시구르드와 나우었던 짧은 사랑의 기억도,
원치 않던 결혼식 날 그녀를 조금도 알아보지 못하던 시구르드의 야속한 눈길도 그녀의 머릿속을
괴롭혔다. 그녀의 눈에서는 한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구르드, 반지의 저주를 받다
사흘째 밤이 지나가고 날이 밝았다. 새색시 브린힐드는 시누이 구드룬과 함께 강가로 목욕하러
나갔다. 브린힐드로서는 사랑의 기억이 남아 있는 남자의 부인인 구드룬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
다. 구드룬으로서도 사흘 동안 밤마다 자기 남편을 빼앗아 간 브린힐드를 곱지 않게 생각하고 있
었다. 두 여인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오갔다.
구드룬과 함께 옷을 벗은 브린힐드는 구드룬이 목욕하러 들어가는 강물 위쪽으로 올라가서 몸
을 담궜다. 브린힐드가 몸을 씻고 내려보내는 물에 목욕을 하게 된 구드룬은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봐요, 새언니! 여기서 같이 목을 하면 될 걸 가지고 왜 꼭 그 위에 가서 몸을 씻으려 하죠?
그러자 브린힐드는 눈매를 치뜨고 구드룬을 쏘아보았다.
아가씨, 그 이유를 몰라서 하는 말인가요? 아가씨와 내가 어떻게 한 곳에서 목욕을 할 수가 있
어요? 저는 출신도 아가씨보다 좋도 남편도 아가씨 남편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잖아요? 제 남편
은 아가씨 오빠, 이 나라의 왕세자예요. 아가씨 남편은 그런 제 남편의 시종에 불과하다구요.
이런 말에 발끈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진실을 알고 있는 구드룬임에랴.
이것 봐요, 뭘 좀 제대로 알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당신 남편이 우리 오빠가 아니라 내 남편
시구르드란 말이에요. 우리 오빠가 당신을 차지할 능력이 모자라니까 내 남편이 오빠로 변장해서
당신을 그 남자와 함께 잠들었을지 모르지만 내 남편은 밤이 이슥해지면 당신 곁을 떠나 내게로
와서 나와 즐거운 밤을 보냈어요.
브린힐드는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는 구드룬이 틀림없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구드룬이 손을 치켜들며 결정적인 증거를 내밀었다.
이 반지를 보세요. 이러고도 제 말이 틀렸다고는 못하겠죠. 내 남편이 당신 손가락에서 뺀 반
지를 제게 끼워주셨거든요.
브린힐드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사태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자신은 완벽하게 농락
당했다. 더구나 자신을 농락한 그 남자가 실은 자신과 영원한 사랑을 다짐했던 시구르드라니! 그
녀는 미친 듯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침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군나르가 허겁지겁 침실로 달려왔다.
왜 이러시오, 부인 내가 잘못했소.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당신을 사랑하오. 제발 이러지 마시
오.
그러나 브린힐드는 차가운 눈길로 군나르를 보며 쏘아붙였다.
이 바보 같은 사람! 당신은 시구르드를 믿었는지 모르지만 그 치한은 당신을 속이고 나를 농락
했어요. 나는 매일 밤 그의 짐승 같은 야욕에 몸을 내맡겨야 했어요. 게다가 그 치사한 자식은 내
몸을 더럽히는 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내가 아끼던 반지를 빼앗아 제 마누라에게 줬어요. 이제 나
는 떠나요. 아무도 모르는 곳에 처박혀서 죽은 듯이 지내겠어요.
군나르는 배신감과 질투가 뒤섞인 비참한 심정으로 브린힐드를 부둥켜 안고 애원했다.
제발 떠나지 말아요, 뭐든지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하겠소.
브린힐드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잠시 어리다가 사라졌다.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나를 속이고 욕보인 그 남자를 나는 결코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를
죽이세요. 그것말고는 그 무엇으로도 나를 달랠 수 없어요.
군나르는 벌벌 떨면서 그녀 앞을 물러 나왔다. 그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아우 회그니를 불렀
다. 회그니는 형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고개를 번쩍 쳐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시구르드를 해치웁시다.
군나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혀엦까지 맺은 사이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러나 회그
니는 완강했다.
방법이 없어요. 게다가 시구르드는 엄청난 금은 보화를 가지고 있어요. 무력과 재력이 출중한
그가 언제 우리 왕국을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를 제거하면 형은 복수를 하는 것이고 우
리 형제는 큰 부자가 되는 겁니다.
"하지만 누가 시구르드를 죽이지? 그와 의형제 밀약까지 한 우리가 직접 그를 죽이면 천벌을
면치 못할 거야. 게다가 놈은 천하장사라고.
회그니는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한번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우리 동생 구트호름이 있잖아요그애는 밀약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시구르드의 피로 몸을 더럽
혀도 괜찮아요. 기회를 보아 기습을 하면 천하장사라도 당할 도리밖에요.
그리하여 음모는 완성되었다. 구트호름은 완강하게 악역을 거부했으나 보물을 미끼로 설득하는
회그니의 회유에 끝내 넘어가고 말았다.
달빛조차 희미한 한밤중에 일이 벌어졌다. 구트호름은 칼을 비껴들고 시구르드의 침실로 스며들
었다. 시구르드와 구드룬은 간밤의 사랑이 지나쳤던 듯 알몸으로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구트호름
이 치켜든 칼날이 어스름 달빛을 받아 파랗게 빛나는 순간, 살기를 느낀 시구르드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옆에 놓아둔 명검 그람을 구트호름에게 던졌다. 구트호름은 그 칼을 맞고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정확히 두 조각으로 갈라져 죽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구트호름의 손을 떠난 칼이 시구
르드의 등을 꿰뚫은 뒤였다.
무언가 끈적거리는 느낌 때문에 잠이 깬 구드룬은 침대 주변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침대를 가득 덮고 있었다. 손을 좀더 뻗어 남편의 몸을 더듬는 순간 그녀는 자지러지게 비
명을 질렀다. 안뜰에서 놀고 있던 집오리들까지 놀라 꽥꽥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닐 정도였다.
침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구드룬의 비명을 들은 브린힐드는 집안이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그녀의 배 안에서 울려나오는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가 저 땅 끝 지옥에서 올라오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브린힐드는 군나르와 회그니가 서 있는 궁정으로 나왔다. 군나르가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잡았
다.
보시오, 시구르드는 죽었소. 우리는 원수를 갚았소.
그러나 브린힐드는 다시 한번 몸서리쳐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군나르의 손을 뿌리쳤다.
바보 같은 자식! 시구르드는 나를 범한 적이 없어. 그는 내 옆에 누워 자면서도 둘 사이에 칼
을 올려놓은 끝까지 너와의 의리를 지켰어. 속임수를 써서 나를 아내로 맞은 것은 바로 너야. 나
는 악을 악으로 갚은 것뿐이라고. 자, 이제 나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어.
브린힐드는 들고 있던 칼로 자기 가슴을 푹 찔렀다. 군나르가 말릴 틈도 없었다. 이로써 지상에
서 영원한 사랑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비련의 남녀는 함께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것은 또한 저
주받은 안드바리의 반지를 손에 지녔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규키가의 사람들은 이 무서운 저주 앞에서 모두 부르르 떨었다. 이제 시구르드가 차지했던 안드
바리의 보물은 그들 손에 들어왔다. 앞으로 그들 앞에는 또 얼마나 무서운 저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규키 일가는 훗날 훈족의 아틀리 왕에게 몰살당한다.
참고1
독일 서사시<니벨룽겐의 노래>
다음에 소개하는 것은 독일의 <일리아스>라고 일컬어지는 중세 독일 최고의 서사시 <니벨룽겐
의 노래>줄거리이다. 이 서사시는 기원전 4세기 게르만 대이동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
고 있다.
비교문학자들에 따르면, 니벨룽겐의 반지와 영웅 지크프리트 전설은 독일에서 생겨나 북유럽으
로 흘러 들어갔을 것이라고 한다. 앞에 소개한 북유럽의 시구르드 전설과 비교해 보기 바란다.
* 각 인명 뒤의 괄호 속은 그 인명에 해당하는 북유럽 인명이다.
예) 지크프리트(시구르드)
제 1부
부르군트에 3남 1녀의 귀족 가문이 살고 있었다. 군주인 군터(군나르)와 그의 아우 게르놋, 기젤
헤르와 누이동생 크림힐트(구드룬)가 그들이었다. 그들 주위에는 트로니의 하겐(회그니)과 그의 형
제 당크바르트(구트호름)같은 강하고 정의로운 기사 집단이 포진하고 있었다.
어느날 크림힐트는 그녀가 키우던 매가 두 마리의 도수리에게 찢겨 죽는 꿈을 꾼다. 어머니 우
타(그림힐드)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그녀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해몽을 내놓는다.
네가 고결한 남편을 얻게 될 모양이야. 하지만 하느님이 그 남편을 지켜주지 않으면 그는 곧
죽을 운명이지.
지크프리트(시구르드)는 네덜란드에서 지크문트(시그문드)와 지클린테(시그니)의 아들로 태어났
다. 어렸을 때, 아름다운 크림힐트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를
아내로 맞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부르군트 사람들이 사납고 호적적이라는 이야기도 아랑곳하지 않
고 결심을 실행에 옮기려는 모험 여행을 떠난다. 나라 안 방방곡곡에서 친구들이 찾아와 지크프리
트를 환송했으며 많은 친구들이 자원하여 그의 수행 기사로 나섰다.
지크프리트 일행이 군터의 궁정에 당도하자 지크프리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하겐은 군터의
궁정에 당도하자 지크프리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하겐은 군터 형제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지
크프리트의 모험 편력과 그가 소유한 니벨룽겐의 보물에 관한 이야기였다. 니벨룽겐의 보물이란
본래 난쟁이 알베리히(안드바리)가 지니고 있던 황금과 보석을 말했다. 지크프리트는 도한 난쟁이
알베리히로부터 투명 망토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용의 피까지 뒤집어써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능력을 얻게 됐다고 하겐은 소개 했다.
군터 형제들은 하겐의 이야기를 들고 나서 기꺼이 지크프리트를 맞아들였다. 지크프리트는 이곳
에서 일년 간 그들과 함께 지낸다. 그러나 그 일년 동안 그는 크림힐트를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때 룻거왕이 이끄는 작센족이 부르군트 왕국을 정복하겠다고 위협해 왔다. 지크프리트는 자신
이 작센족을 격퇴하겠다고 맹세하고 싸움에 나가 대승한다. 며칠 동안 축하연이 벌어지고 우타여
왕과 딸 크림힐트에게 청혼할 수 있었다.
한편 군터는 보탄(오딘)의 딸인 브룬힐트(브린힐드)와 결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군터는 미래의 처남인 지크프리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만 해주면
자기 누이 크림힐트와 결혼시켜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군터와 지크프리트는 함께 대장정에 나섰
다. 군터는 브룬힐트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값비싼 옷으로 치장하고 있었지만 브룬힐트의 아상형은
옷 잘입는 왕자가 아나라 용감무쌍한 영웅이었다.
브룬힐트는 자기와 결혼할 남자는 기예와 힘에서 자기를 능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군터는 지
크프리트의 도움을 받아 브룬힐트를 이겼고 브룬힐트는 약속한 대로 군터의 아내가 되어 그를 따
라갈 것을 약속하였다.
부르군트 궁에서는 두 쌍의 겨혼식이 함께 열렸다. 그러나 남몰래 지크프리트를 사모하게 된 브
룬횔트는 결혼 축하연에서 크림힐트와 지크프리트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눈물을 흘
린다. 브룬힐트는 군터와 잠자리마저 거부하고 추근거리는 군터를 내동댕이치곤 했다. 군터는 하
는 수 없이 지크프리트에게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하였다. 지크프린트는 군터로 변장하고 침실로
들어가 힘으로 브룬힐트를 제압했다, 브룬힐트는 그때부터 군터와의 동침을 허락한다.
얼마 후 군터의 아이를 낳은 브룬힐트는 이 아이의 이름을 지크프리트라고 짓는다. 그녀는 크림
힐트를 데리고 네덜란드로 돌아간 지크프리트를 그리워하다 못해 남편을 졸랐다.
여보, 사냥 대회를 크게 열어요. 그래서 아가씨랑 지크프리트님도 초대해요.
사냥 대회가 열려 다시 만난 브룬힐트와 크림힐트 사이에는 냉랭한 분위기가 감돈다. 서로 자신
을 돋보이기 위해 경쟁하던 끝에 크림힐트는 비밀을 털어놓고 말았다.
이봐요, 새언니! 뭘 모르시나 본데 언니는 창녀나 다름없는 여자야. 왜냐고? 한번은 우리 남편
하고 자고 한번은 우리 오빠하고 잤으니까.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크림힐트는 자기 말의 증거물로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와 허리에 두르고있는 거들을 내보였
다. 그 두 가지는 지크리프트가 군터로 변장하고 브룬힐트의 침실에 들어갔을 때 브룬힐트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브룬힐트는 치욕과 분노에 몸을 떨며 남편 군터를 찾았다. 그러나 군터는 이 문제
를 두 여인 사이의 사소한 말다툼으로 치부하고 지크프리트와 계속 사이 좋게 지냈다.
사태는 교활한 하겐으로 말미암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겐은 지크프리트가 부르군트 가
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고 군터의 동생들을 부추긴 뒤, 그를 파멸시킬 계책을 함께 모색하기 시
작했다. 때마침 색슨족이 부르군트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크림힐트가 하겐 앞에서 남
편의 급소를 걱정했다. 지크프리트는 일찍이 용을 죽이고 그 피에 목욕을 함으로써 불사의 능력을
얻었지만, 당시 나뭇잎이 달라붙었던 등 부위만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겐은
싸움터에서 지크프리트를 보호해야 하니까 그가 입을 옷에다 표시 해달라고 크림힐트에게 부탁했
다.
색슨족이 공격을 포기하자 군터는 수하의 모든 기사를 거느리고 사냥에 나섰다. 사냥감을 쫓던
지크프리트는 깊은 숲 속에서 옹달샘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굽혔다. 그 순간 하겐이 쏜 화살이 그의
등에 표시된 부위를 정확히 관통했다. 지크프리트는 부르군트족에게 영원한 저주를 퍼부으며 죽어
갔고, 하겐은 그의 시체를 떠메고 궁정으로 돌아갔다. 남편의 시체를 접한 크림힐트는 직감적으로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보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속으로 복수를 다짐했다.
지크프리트의 장례식에는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은 지그문트왕이 며느리 크림힐트에게 함께 네
덜란드로 가자고 하였으나, 그녀는 아들과 함께 부르군트에 남겠노라고 하였다.
더불어 지크프리트가 보관하고 있던 니벨룽겐의 보물은 그녀 소유가 됐지만, 이 보물을 노리던
하겐에 의해 라인강으로 던져졌다. 크림힐트는 그저 언젠가 다가올 복수의 날만 기다리며 눈물로
나날을 보낼 따름이었다.
제 2부
마침내 크림힐트에게 복수의 기회가 왔다. 모든 게르만인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훈족의 왕 에첼
(아틀리)이 그녀에게 청혼을 해왔다. 훈족 왕실의 안주인이 된 크림힐트는 오빠와 가신들을 초청
했다. 부르군트 왕실에서는 몇 가지 흉흉한 징조가 나타났지만 군터와 하겐은 개의치 않고 짐을
꾸려 에철의 궁정을 향하여 먼길을 떠났다.
부르군트 살마들이 에첼의 궁정에 당도하자 훈족 병사들은 그들을 궁정에서 따로 떨어진 전택
으로 안내했으며, 하겐과 그의 동생 당크바르트에게는 또다른 집을 제공했다. 크림힐트가 그들에
게 나타나 친선 방문인 만큼 무기들을 자기에게 맡기라고 요구했으나, 하겐은 이를 거부하고 기사
들에게 훈족의 야간 기습에 대비 할 것을 지시했다.
손님이자 처남 식구들인 부르군트인과 훈족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자, 대왕 에첼은 만약의 사태
를 막기 위해 자신과 크림힐트사이 얻은 아들을 군터에게 인질로 맡겼다. 그러나 훈족의 블뢰델경
이 당크바르트의 숙소에 찾아가 언쟁을 벌이다가 당크바르트의 칼에 목숨을 잃으면서 사태는 걷
잡을 수 없이 번지고 말았다. 블뢰델 경을 추종하는 훈족의 병사들이 당크바르트의 가신들을 모조
리 죽여버리자, 곤경에 처한 당크바르트는 형 하겐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크림힐트의 음모에
완전히 걸려든 것을 깨달은 하겐은 살아서 크림힐트에게 복수하기는 틀렸음을 느기자 인질로 맡
겨졌던 그녀의 아들을 칼로 베어 죽였다. 드디어 양쪽 군대 사이에 피비린내나는 살육적이 전개되
고, 군터와 하겐은 쳐들어온 상대 병사들을 모조리 처치해 버렸다.
수많은 병사를 잃었지만 크림힐트는 보복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용맹한 훈족의 영웅 이링은 크
림힐트의 지시에 따라 하겐에게 덤벼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었고 중
과부적인 부르군트 기사들은 하나씩 둘씩 낙엽처럼 떨어져 갔다.
마침내 군터를 비롯한 부르군트의 영웅들이 전멸하고 오직 상처 입은 하겐만이 남자 칼을 들어
그의 숨통을 끊어놓은 사람은 크림힐트였다. 그러나 그 최후의 순간까지도 하겐은 니베룽겐의 보
물을 라인강에 숨겨 놓은 사실을 비밀로 간직한 채 떠났다.
한 여인의 서릿발 같은 한으로 말미암아 부르군트와 훈의 영웅 호걸들이 덧없이 쓰러져간 복수
극이 끝났다. 깊은 좌절감에 빠진 대왕 에첼은 가신 힐데브란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힐데 브란트
는 칼을 높이 쳐들어 무서운 여인 크림힐트를 향해 내리쳤다. 끔찍한 저주만을 게르만 땅에 남긴
채 니벨룽겐의 반지는 오늘도 저 라인강 어딘가에서 깊이 잠들어 있다.
참고 2
바그너 오페라<니벨룽겐의 반지>
이 작품은 독일 작곡가 라하르트 바그너가 1874년에 완성한 대작 오페라로서 독일 서사시 <니
베룽겐의 노래>뿐만 아니라 북유럽 고전 <에다><볼숭가 사가>등을 소재로 하여 각색한 작품이
다. 오페라 사상 전대미문의 대형 걸작으로 전야제<라인의 황금>에 이어 <발키레><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이 사흘간 상연되는 4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야제<라인의 황금>
제 1 장
라인강 밑바닥에서 세 아가씨가 라인의 황금 을 감시하고 있다. 이때 지하의 난쟁이족인 니벨룽
겐족의 알베리히(안드바리)가 다가와 황금의 힘에 대해 묻는다. 이 황금으로 만든 반지를 소유한
자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얻는다는 비밀을 들은 난쟁이는 술수를 부려 황금을 빼앗아 달아난다.
물 속은 암흑으로 돌변하고 아가씨들은 울부짖으며 난쟁이를 쫓는다.
제 2 장
주신 보타(오딘)은 발할(발할라)성을 내려다보며 아내 프리카(프리그)와 함께 기뻐한다. 이 성은
거인 형제 파졸트(레긴)와 파프나(파프니르)가 미의 여신 프라이아(프레야)를 대가로 요구하며 지
어준 r서, 마침 프라이아가 거인 형제에게 쫓겨 도망쳐 오고, 거인 형제는 약속대로 프라이아를
내놓으라고 법석을 떤다. 그러자 애초에 거인에게 이 약속을 해준 장본인 로게(로키)가 나타다 프
라이아 대신 알베리히가 빼앗아간 황금을 거인들에게 주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보탄과 로게가
함께 알베리히를 찾으러 지상으로 내려간다.
제 3 장
보탄과 로게가 지하의 니벨룽겐족 나라에 내려갔을 때는 황금의 권능에 힘입은 알베리히가 일
족의 지배자로서 황금산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로게는 요술 도롱이를 입어서 보이지 않는 알베리
히에게 재주를 보여달라고 부탁한다. 알베리히가 자신의 재주를 뽐내려고 구렁이로 변랬다가 두꺼
비로 변하자, 로게는 재빨리 요술 도롱이를 걷어내고 알베리히를 사로잡는다.
제 4 장
신들이 알베리히로부터 황금을 모두 빼앗자 알베리히는 그 황금으로 만든 반지를 가진 자는 모
두 몰락하리라는 저주를 퍼붓고 떠난다. 거인 형제는 그 황금이 프라이아의 온몸을 가릴 정도로
많아야 프라이아 대신 가져갈 수 있다고 우긴다. 알베리히가 가진 황금을 다 쌓아놓아도 프라이아
의 머리카락이 보이자 거인 형제는 보탄이 빼돌린 반지까지 내놓으라고 한다. 본탄은 머뭇리지만
알베리히의 저주를 염두에 두고 거인 형제에게 반지를 내준다. 황금을 받자마자 거인 형제 사이에
는 싸움이 일어나 형 파프나가 동생을 때려 죽이다.
황금 독차지하여 유유히 사라지는 파프나의 뒷모습을 보며 신들은 전율한다. 이어 무지개 다리
를 건너가는 신들의 뒤에서 로게는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이제 신들의 몰락도 멀지 않았어.
제 1 일<발키레>
1 막
지크문트(시그문드)와 지크린데(시그니)는 베르제(볼숭)의 쌍둥이 남매이다. 그들은 어려서 도적
의 침입으로 부모를 잃고 헤어진다. 방랑 생활을 계속하던 지크문트는 어떤 아가씨가 내키지 않는
결혼을 강요당하는 걸 보고 남자쪽 형제와 싸워 그를 죽인다. 그 바람에 남자의 일족에게 쫓기는
신세가 지 지크문트는 물푸레나무를 에워싸고 지어진 푼딩의 집으로 숨어들어간다. 마침 그 집의
주인인 푼딩은 외출하고 없었고 지크문트는 자신을 친절하게 보살펴 준 안주인과 사랑에 빠진다.
돌아온 남편 푼딩과 저녁식사를 하던 지크문트는 자신이 쫓기게 된 사연을 말하고, 푼딩은 자신
이 그 추적자 일당의 한 명임을 밝히다. 그날 밤은 그냥 자고 다음날 결투를 하자고 말하는 푼딩.
놀란 안주인은 남편의 술에 몰래 수면제를 섞어넣은 뒤 지크문트에게 칼 한자루가 꽂혀 있는
물푸레나무를 가리킨다. 그녀가 결혼할 때 어떤 외눈박이 노인이 나타나 칼을 꽂아놓고는 이것을
뽑을 수 있는 자가 진짜 영웅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크문트는 안주인을 힘껏 끌어안고 관능적
인 사랑을 노래한 뒤 전력을 다해 칼을 뽑아든다. 그리고 그녀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권하자 그녀
는 눈물을 머금고 노래한다.
당신의 말을 듣고 알았어요. 제가 바로 당신의 어릴 때 헤어진 쌍둥이 여동생 지크린데랍니
다.
2 막
발키레 중 한명인 브린힐데(브린힐드)는 지크문트와 푼딩의 싸움에서 지크문트를 이기게 하라는
보탄의 명령을 받고 싸움터로 떠난다. 그러나 보탄의 명령은 곧 번복된다. 여신 프리카가 누이와
근친사안을 범한 지크문트를 죽이라고 보탄에게 졸랐기 때문이다. 쌍둥이 여동생 지크린데와 함께
도주하던 지크문트 앞에 브린힐데가 나타나 곧 죽을 운명임을 알려준다. 그러자 지크문트는 들고
있던 칼로 지크린데를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고 울부짖는다. 이 극진한 사랑에 감동한 브린힐데는
보탄의 명령을 어긴 브린힐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3 막
브린힐데는 지크린데가 지크문트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고 그녀를 동쪽 숲으로 피신시킨다.
그곳에는 구렁이로 변한 거인 파프나가 신들로부터 받은 보물을 지키고 있다.
한편, 브린힐데는 바위산에서 다른 여덟 명의 발키레(발키레는 모두 9명)와 만나 자신이 보탄으
로부터 쫓기는 몸임을 알리고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바람을 몰아치며 다가온 보탄 앞에서
다른 발키레들은 두려워 벌벌 떨 뿐이었다.
브린힐데는 보탄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불벽 속에 둘러싸이는 벌을 달라고 자청한다. 오직
세상에서 가장 용맹한 용사만이 그 불벽을 뚫고 자신을 구해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보
탄은 그녀의 청을 받아들여 구해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보탄은 그녀의 청을 받아들여
불의 신 로게로 하여금 그녀 주위에 영겁의 불을 일으키도록 한다.
제 2 일<지크프리트>
1 막
동방의 숲 속에서 지크린데는 오빠 지크문트의 아들을 낳고 죽는다. 이 아이의 이름은 지크프리
트. 출산을 도와준 난쟁이 미메가 이 아이를 키우다가 어느날 그의 출생 비밀을 일러주고 아버지
가 쓰던 부러진 칼을 보여준다. 지크프리트는 직접 이 칼을 버려서 천하의 명검으로 만든다.
2 막
지크프리트는 미메에게 구렁이 파프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보물을 찾아 떠난다. 그에 앞서 보
탄과 난쟁이 알베리히가 파프나 앞에 나타난 보물을 놓고 흥정하지만 파프나가 꿈쩍도 하지 않는
다. 마침내 영웅 지크프리트가 나타나 파프나를 해치우고 니벨룽겐의 보물을 차지하게 된다. 또
파프나의 피를 먹고 새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능력을 갖게 된다. 지크프리느는 흉계를 꾸미고 이는
양아버지 미메를 베어죽인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앉아서 쉬다가 불 소그이 미녀에 관한 이야기를
새들에게서 듣는다.
3 막
지크프리트는 브린힐데를 만나려고 바위산을 향해 가다가 보탄을 만나다. 보탄은 지크프리트의
힘을 시험해 보려고 창을 쑥 내밀었지만 지크프리트가 벼른 칼에 창은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보
탄이 물러가고 지크프리트는 바위산에 올라 브린힐데를 구한다. 브린힐데는 자신을 버린 발할성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사랑하는 영웅 지크프리트의 품에 힘껏 안긴다.
제 3 일<신들의 황혼>
서막
바위산에서 운명의 세 여신이 황금 그물을 짜고 있다. 지크프리트 때문에 아끼던 창이 부러지자
보탄은 홧김에 물푸레나무를 잘게 잘라 발할성 둘레에 쌓고, 애꿎은 불의 신 로게를 부러진 창으
로 찌른다. 로게는 무섭게 화를 내며 물푸레나무 장작에 불을 붙여 발할성 주위는 온통 불바다로
변한다. 그 서슬에 운명의 여신들이 짜던 황금 그물이 끊어져 버리고 여신들은 지 의 끝장을 노래
하며 도망쳐 간다. 그러자 지크프리트와 브린힐드가 나란히 등장하여 지크프리트는 그녀에게 황금
의 반지를 주고, 브린힐드는 애마 그라네(그라니)를 그에게 준다.
1 막
라인 강변의 기비히(규키)가의 주인은 군터(군나르)이고 누이동생은 구트루네(구드룬)이다. 난쟁
이 알베리히의 아들 하겐(회그니)은 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알베리히는 흉계를 꾸며 군터와 브린
힐데를 결혼시키고 구트루네와 지크프리트를 결혼시키려 한다. 그렇게 하면 니벨룽겐의 보물들이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이다.
흉계는 착착 진행되어 기비히가를 찾아온 지크프프리트는 군터가 제공한 망각의 약을 먹고 브
린힐데와의 사랑을 깡그리 잊어버린다. 그가 구트루네에게 청혼하자 군터는 브린힐데를 데려와서
자신과 결혼시켜 준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한다. 그리하여 지크프리트는 군터로 변장하고 브린힐
데를 강제로 끌고 오기 위해 바위산으로 간다. 그는 바위산 동굴에서 브린힐데와 하룻밤을 보내지
만 군터와의 의리를 생각하여 브린힐데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다.
2 막
기비히가에서 군터와 브린힐데, 지크르피트와 구트루네의 합동 결혼식이 열린다. 여기서 비로서
지크프리트의 얼굴과 그의 손가락에 긴 니벨룽겐의 반지를 본 브린힐데는 하얗게 질리며 소리친
다.
저 남자야말로 내 남편이야.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브린힐데와 나눈 지난날의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지크프리트는 이를 완강히 부인하여 그 위
기를 모면한다. 그러나 알베리히의 아들 하겐은 은근히 이런 순간을 기다렸으므로 원한 맺힌 브린
힐데에게 접근하여 지크프리트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 브린힐데는 지크프리트의 등에 치명적인 급
소가 있다고 알려준다.
3 막
숲 속에서 사냥을 하던 지크프리트는 하겐이 권한 마법의 술을 마시고 기억을 회복한다. 그가
브린힐데와 나우었던 사랑을 이야기할 때 보탄이 까마귀 두 마리가 나타난다.
하겐이 지크프리트에게 묻는다.
저 까마귀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 수 있소?
그 말에 뒤돌아보는 지크프리트의 등에다 하겐은 창을 깊숙이 꽂으며 외친다.
저 까마귀들은 지금 복수 를 외치고 있노라!
지크프리트의 시체를 메고 기비히가로 돌아온 하겐은 항의하는 군터마저 죽이고 반지를 내놓으
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브린힐데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장작더미 위에 지크프리트의 시신을 올
려놓고 장례식을 준비한다. 그녀는 반지를 라인강에 던져 원주인인 세 아가씨에게 돌려준 뒤 스스
로 횃불을 장작더미에 던져 불을 붙인다. 그리고 그녀도 명마 그라네를 타고 불길로 뛰어든다.
그때 라인강이 소용돌이치며 세 명의 아가씨가 헤엄쳐 올라오자 하겐은 그녀들로부터 반지를
빼앗으려고 물 속으로 뛰어들지만, 오히려 아가씨들에게 어디론가 끌려가 버린다. 지크프리트와
브린힐데를 태우며 솟아오른 불길은 기비히가를 잿더미로 만든 뒤에도 계속 타올라 발할성마저
불태운다. 우왕좌와하며 신들이 성으로 모여들지만 그들의 모습도 곧 불길 속에 휩싸여들고 만다.
참고문헌
북유럽 신화를 담고 있는 원전은 다음과 같다.
1. 구에다(Old Edda) : 아이슬란드에 전해 내려오는 여러 시편(에다)들을 한데 모아 1200년경에 만든 시집이다. 시편으로 이루어져 시 에다(Poetic Edda)'라고도 불린다. Patricia Terry,<Poems of the Elder Edda>, Univ of pennsylvania Press, 1990 참조.
2. 신에다(New Edda) : 아이슬란드의 호메로스라고 불리는 13세기의 시인 스노리 스투를루손(1179-1241)이 전래 신화를 모으고 시 스는 법을 서술해 놓은 일종의 시작법 교재이다. 산문체로 되어 있어서 산문 에다(Prose Edda)'라고도 한다. Snorri Sturlson, Prose Edda of Snorri Sturluson : Tales from North Mythology, Univ of Chicago Press, 1964 참조.
3.스칼드(Skald) :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무대로 활약한 음유시인들이 남긴 시를 말한다.
4.사가(Saga) : 아이슬란드의 무훈시. 시구르드 이야기를 담은 <볼숭가 사가(Volsunga Saga)>가 대표적이다.
5.데인인 이야기(Gesta Danorum)(1215) : 덴마크의 저술가 삭소 그라마티쿠스(Saxo Grammaticus)가 16권으로 기록한 데인인의 역사책으로, 전래 신화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msh53
6. 기타 역사서 : 타키투스, 이븐 파들란, 브레멘의 아담 등이 남긴 역사책, 기행문 등에 북유럽 신화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다.
북유럽 신화를 소개한 2차 자료나 참고서적으로 필자가 이용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J.A. McGulloh,D.D., The Celtic and Scandinavian Religions, Hutchinson's University Library, 1948.
Kevin Crossley-Holland, Norse Myths-Gods of the Vikings, Penguin Books, 1980.
Arthur Cotterel, TheEncyclopedia of Mythology, Smithmark Publishers, 1996.
허창운<니벨룽겐의 노래>상/하, 서울대 출판부, 1995.
토마스 불핀치,<그리스 신화>(역), 범우사. (북유럽 신화가 부록으로 딸려 있음.)
에디스 해밀터,<그리스 로마 신화>(이선우 옮김), 을지서적, 1985. (역시 북유럽 신화가 부록으로 딸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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