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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바이킹전사들의 신화여행(1)

Choi가이버 2023. 9. 10. 12:19

바이킹전사들의 북유럽 신화여행(1)   -강응천-
 

읽기전에 
원시적 생명력을 키워온 북유럽 신화의 힘

  유럽의 신화 하면 많은 사람들이 으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린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유럽 문명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말은 거의 공식처럼 쓰이고 있다.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등 기라성 같은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그리스 로마 문명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왜 그리스 로마 신화만 있고 독일 신화, 영국 신화, 프랑스 신화는 없을까? 이 나라들이 다 근대에 들어와서 세워졌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들의 조상인 게르만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게르만 신화 는 있을 게 아닌가?
  물론 그렇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아프리카 오지의 민족들에게도 신화가 있듯이 게르만족에게도 신화는 있다. 이 게르만족의 신화를 사람들은  북유럽 신화 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 켈트 신화와 더불어 유럽의 3대 신화를 이룬다. 이렇게 되면 많은 분들이 혼란을 느낄 것이다. 북유럽은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같은 나라들이 있는 유럽의 일부일 뿐인데 왜 하필 게르만인 전체의 신화를 북유럽 신화라고 부를까? 그리고 켈트 신화란 것은 또 무엇인가?
  이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서 이 세가지 신화가 형성되는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전,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에서 살던 것으로 추측되는 유목 민족이 인도와 이란, 남유럽 등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발칸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가 각각 그리스와 로마를 세웠다. 이들이 후세에 전한 신화가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 문명이 한창 꽃피고 있을 무렵 유럽 대륙에는 갈리아 지방(현재의 프랑스)을 중심으로 켈트인이라는 기마 민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케사르에게 정복당해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기원전 4세기에 일어난 게르만족의 대이동 때는 게르만파의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영국 일부와 아일랜드로 밀려났다.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은 앵글로색슨에 맞서 싸운 켈트인의 용사들이었다. 이 아서왕 이야기를 비롯하여 전사 코난,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엔그린 등 아름다운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는 켈트인의 신화를 켈트 신화라고 한다.
  켈트인을 밀어내고 로마를 무너뜨린 게르만인은 본래 북유럽에 살다가 중부 유럽으로 퍼져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도 영국의 베어울프 이야기나 독일의 지크프리트 이야기를 파생시킨 자기들의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문명의 유산과 접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본래의 게르만 신화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게르만 신화가 유럽 문명사회에 다시 알려진 것은 9세기부터 시작된 바이킹의 활약 때문이었다. 바이킹은 게르만 대이동 때 북유럽에 남아 있던 게르만의 일파로 노르만인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들 고유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원형대로 유럽 사회에 전해주었다. 바로 이렇게 바이킹이 간직하고 있던 게르만 신화를 북유럽 신화라고 한다. 또 이 신화를 기록한 문헌들이 대게 노르웨이어로 씌어졌기 때문에 노르웨이 신화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북유럽 신화는 영국과 독일의 게르만인도 다 같이 공유하던 게르만 신화의 한 분파인 동시에 오늘날에는 온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게르만 신화인 셈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신화를 낳은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켈트인,  게르만인은 다 같이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따라서 4천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와 이란으로 이동한 아리아인과도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도 신화와 이란의 페르시아 신화도 앞의 세 신화와 형제지간의 신화라고 할 수 있겠다. 단, 인도유럽어족 가운데 러시와와 동유럽에 사는 슬라브인은 동방정교회에 워낙 강력하게 동화되는 바람에 고유의 신화를 거의 남기지 못했다.
  2세기의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게르만인이 살던 중부유럽 일대를 여행하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로마인은 요일에 다 신들의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었는데 게르만인도 똑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목요일을 로마인은  주피터의 날 로 불렀고 게르만인은  토르의 날 로 불렀다. 공교롭게도 주피터와 토르는 똑같이 천둥과 번개의 신이었다.
 그런데 자기네 고유의 신화보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더 존중하는 현대 유럽인도 유독 요일에 관해서만은 고유 관습을 버리지 않고 있다. 영어로 목요일을 일컫는 Thursday는 바로  토르의 날 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화요일(Tuesday)은  티르의 날 , 수요일(Wednesday)은  오딘의 날 , 굼요일(Friday)은  프리그의 날 로 모두 북유럽 신화 속의 신에서 유래한 이름들이다. 수요일이 이상하게 생각되겠지만 그것은 오딘이란 신을 영어로는 웨덴(Weden)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단 하나 토요일(Saturday)만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업신 새턴(Saturn)을 요일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타키투스는 저서<<게르마니아>>에서 게르만 신화를 로마 신화와 비교하여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이 현존하는 가장 오랜된 북유럽 신화 관련 문헌자료이다. 타키투스는 퇴폐와 향락에 빠져 있던 로마인에게 게르만인의 소박하면서도 강건한 기풍을 소개하고 경각심을 일깨워주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런 고대 게르만인의 특징을 반영해서 그런지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세련된 맛보다는 꾸밈없고 직선적인 태도로 원시적인 생명력과 인간의 본능을 드러내 보여준다.
  북유럽의 신화를 그리스 로마 신화와 비교하여 그 특징을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 신화와 북유럽 신화에는 다 같이  신과 거인의 대결 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대결이 그리스 신화에서는 서두에 불과한 데 비해 북유럽 신화에서는 기둥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거인들이 지배하는 무질서한 우주를 신들이 타파하여 질서있고 조화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북유럽 신화에서는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닌 신과 거인의 공멸, 그리고 이 세상의 완전무결한 파국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둘째, 그리스 신들은 말 그대로 불사신이지만 북유럽 신화에서는 신도 죽는다. 그것도 최고신인 오딘이 한 마리 늑대에게 잡아먹힐 정도로 참혹하고 수치스럽게 죽는다. 이런 지독한 신성모독은 북유럽 사람들이 얼마나 현실의 세계를 끔찍해했는가를 잘 말해 준다. 인간의 수호자인 신도 그렇게 죽을 수 있는 세상인데 한낱 미물인 인간의 삶이야 오죽하랴!
  셋째, 그리스 신화가 비교적 밝고 현실긍정적인 데 비해 북유럽 신화는 어둡고 비관적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자신들이 살던 현실 세계가 과거로부터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고대 북유럽인은 언제 이 끔찍한 현실이 끝나고 살 만한 미래 세상이 오는가에 더 신경이 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는 신과 거인의 공멸, 즉 현세의 완전한 파국 뒤에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치 겨울이 만물의 생명을 앗아간 뒤 봄이 되면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듯 푸르른 생명의 땅 위에 펼쳐질 날을 북유럽인은 기다리고 있었다.
  넷째, 그리스 신화는 인간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북유럽 신하에는 인간의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리스 신화가 여러 예술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가공되면서 인간을 위한 신화로 다듬어진 반면, 북유럽 신화는 자연의 힘을 한없이 우러르고 두려워하던 원시시대의 세계관을 비교적 온전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 일 것이다.
  다섯째, 북유럽 신화에는 그리스 신화와 같은 문화 영웅이 없다. 그리스 신화 최고의 문화 영웅인 프로메테우스와 가장 유사한 북유럽의 신화의 인물은 로키이다. 프로메테우스처럼 로키도 거인족의 일원이고 머리가 좋으며 신들의 뜻을 거슬러 가혹한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 신들이 독점하던 불을 훔쳐다주고 기술을 가르쳐준 것과는 달리 로키는 신들에 대한 시샘과 악으로 인해 신들에 대드는  이유없는 반항자 일 뿐이다.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은 오딘이다. 얼마전 우리나라에도 오딘의 이름을 딴 예물시계가 나오고 TV광고로도 방영된 적이 있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잘 생긴 신사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낸다. 이윽고 신사가 여인에게 다가온다. 여인은 짐짓 의아해하는 표정 속에 은근한 기대를 살짝 감추고 있다. 그러나 신사는  오딘(Odin)'이란 글자가 아로새겨진 결혼 예물시계를 보여주며 그대로 지나가 버린다.
  최고신의 이름을 빌려 시계의 품격을 높이려는 취지는 좋은 것 같다. 그런데 이 광고를 보고 나는 슬그머니 웃었다. 신화 속의 오딘은 부인도 있고 자식도 많지만 매력적인 여인의 유혹을 받고 그렇게도 도덕군자연할 위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소한 북유럽 신화에 좀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상품광고 이야기를 꺼냈지만, 실제로 북유럽 신화를 읽다 보면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듯한 인물과 소재들이 꽤 많이 등장한다는 생각이 들 거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여러 명의 난쟁이,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동토에 웅거하고 있는 거인, 태양을 뒤쫓는 무시무시한 늑대, 세상의 한쪽 끝에서 쇠를 달구고 있는 난쟁이, 용의 피에 목욕하고 불사신이 된 사나이, 하늘 끝까지 닿아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 등등...유럽의 민담과 전설과 동화에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한 이런 이야기들의 부리를 따라가다 보면 북유럽 신화에 이르기 때문일 것이다.
  북유럽 신화는 그런 소재들을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훨씬 원시적이고 원색적으로 다룬다. 신과 거인이 충돌하여 세상을 끝장내는 충격적인 결말이 예고되고 있는 만큼 모든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본능과 욕망의 극단을 향해 줄달음친다.
  우리는 이러한 북유럽 신화를 접하면서 단정하게 잘 짜여진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또다른 재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 로마의 문화적 후예답게 세련되고 지성적인 유럽인의 또다른 면을 보게 될 것이다. 북유럽 신화 속에 드러나 있는 고대 게르만인의 원시적이니 생명력과 정신은 오늘날 유럽인의 피 속에 연면히 흐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다.
  부정적인 예를 들어보면 2차대전이라는 파국을 도발했을 당시 독일인 사이에는 북유럽 신화의 라그나랙(신과 거인의 최후의 대결)이 유행처럼 회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근대 유럽에서 일어난 과학과 사상의 혁명은 북유럽 신화가 보여주는 강한 투쟁의식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구가 유럽인의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국내에서 출간된 신화 관련 책들을 조사해 본 적이 있었다. 제목에  그리스 신화 가 들어간 책은 100종을 훨씬 넘는 반면  북유럽 신화 나  노르웨이 신화 가 들어가 있는 책제목은 없다시피 했다. 이건 지나친 편식이 분명하다. 지금가지 누누이 말한 것처럼 유럽 3대 신화 중 하나인 북유럽 신화는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문화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 균형 감각과 풍부한 자양분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고전이다.
  단, 필자는 노르웨이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북유럽 신화를 담고 있는 원전들을 직접 읽을 수는 없어서 이들의 영역본, 일역본과 여러 가지 참고서적들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원전을 그대로 옮겨놓는 것은 북유럽 신화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참고한 자료들을 토대로 필자가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줄거리 전개에 필요에 따라 부분적인 첨삭을 하기도 했고 어떤 이야기들은 소개를 다음 기회로 미루기도 했다.
  북유럽 신화가 우리 나라에서 읽을 만한 고전의 하나로 자리잡아 좀더 자세하고 포괄적인 북유럽 신화 소개서와 해설서가 잇따라 나올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1. 신들의 왕, 오딘
  오딘, 거인을 죽여 그 시신으로 우주를 창조하다

 거인과 신이 세상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이 세상에 최초로 태어난 생명
체는 거인 이미르였다. 하늘도 땅도 없던 시절, 이 세상의 반쪽은 온통 서리뿐이고 나머지 반쪽은
온통 불뿐이던 시절에 거인 이미르는 태어났다. 완전히 상극인 서리와 불 사이에는 기눙가라고 불
리는 틈이 있었고, 이틈에서 만난 서리와 불은 온화한 중립지대를 형성했다. 바로 그 중립지대에
서 거인 이미르가 태어난 것이다.
  불을 만나 녹아내린 서리에서 태어났으므로 이미르와 그의 자손들을  서리거인 이라고도 부른다.
극과 극이 만나 빚어진 생명체라서 그런지 거인족은 성질도 사납고 생김새도 흉칙했다. 그들의 얼
굴은 흑갈색이고 귀는 크게 늘어졌으며 손끝은 독수리 발톱처럼 생겼다. 털이 나 있어야 할 곳은
대머리처럼 빤빤했고 매끈해야 할 곳에는 털이 나 있었다. 그들은 무서운 눈동자를 가졌고, 숨결
은 거칠었다.
  이미르에 뒤이어 얼음에서 태어난 생명체가 있었는데, 그것은 우아하게 생긴 암소 아우둠라였
다. 이 암소는 배고픈 이미르에게 젖을 먹이면서 자신은 얼음을 핥았다. 암소의 부드러운 혀끝에
서 서서히 녹아내린 얼음속에는 아름답고 건장한 생명체가 마치 냉동인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사흘에 걸쳐 진행된 암소의 달콤하고 우아한 혀놀림은 미켈란젤로의 대리석 조각과도 같은 생명
체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다. 서리거인보다는 작지만 잘 생겼고, 강인한 인상을 주는 사내! 그
사내의 후손 가운데 최초의 신이 나올 것이다.
  어떤 방법이었는지는 모르나 그 사내는 아들 보르를 낳았다. 보르는 거인족의 여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오딘, 빌리, 베라고 했다. 신들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최고신 오딘이 드디어 탄생한 것이다.
  오딘과 그의 형제들은 사납고 추한 거인족이 싫었다. 그들은 또한 물과 불밖에 없는 황량한 세
상이 싫었다. 궁이 끝에 그들은 우서 거인족의 우두머리인 이미르를 죽이기로 했다.
  찬서리 내리던 어느날, 그들은 낮잠을 즐기던 이미르를 얼음 벌판으로 끌어내 온뭄을 난도질했
다. 칼레 찔리고 도끼에 찍힌 거인의 몸에서는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마치 남극의 얼음이 한
꺼번에 녹아내리듯 거인의 피는 태초의 우주를 순식간에 뒤덮어버렸다. 이 핏물에 휩쓸려 모두가
비명횡사했고, 단 한 쌍의 거인 부부만이 몸을 피했다.
  이미르의 시체를 떠메고 기눙가의 중앙으로 간 삼형제는 거인의 어머어머한 주검을 재료로 삼
아 태초의 틈새 위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이미르의 살을 떠서 고르게 폈
다. 이것이 육지가 되었다. 다음에는 난도질을 당하고도 부러지거나 상하지 않은 뼈들로 울퉁불퉁
한 산과 언덕을 만들었다.. 으스러진 거인의 이와 턱, 그리고 뼈 부스러기는 대지 위에 고루 뿌려
돌과 바위, 모래를 삼았다.
  다음으로는 대지를 둥글게 둘러쌀 바다를 만들 차례였다. 이것은 따로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르의 몸에서 흘러나와 거인족을 몰살시킨 피는 대지 주위에 고이면서 거대한 바다가 되었고,
거인 몸 이곳저곳에 남아 있던 피는 호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다는 너무나 넓고 깊기 때문에 장
차 태어날 어떤 생명체도 그 끝에 다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이제 서리와 불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우주가 윤곽을 갖춤 셈이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
하기엔 일렀다. 속 빈 나무줄기에 몸을 의지하여 익사를 면한 거인 부부가 있는 한, 위협적인 거
인족은 다시 번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딘은 고심 끝에 이미르의 눈썹을 봅아 대지의 한쪽 끝 해
안을 따라 철책처럼 심었다. 그리고 이 눈썹 울타리 안쪽을 요툰헤임이라고 부르고 거인들로 하여
금 그 안에서 살도록 했다. 일종의 국경선인 셈이었다. 그 국경선 바깥족 대지는 푸르르며 햇살이
따사롭고 먹을 것이 자라는 축복의 땅이었다. 오딘은 이 당을 미드가르다라 이름지었다.
  땅과 바다가 완성되자 삼형제는 대지를 지붕처럼 덮어주는 하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방법을
숙의한 끝에 이미르의 두개골이 하늘감으로 적합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들은 이미르의 두개골을 공
중으로 들어올리되 그 네 귀퉁이가 대지의 끄트머리와 맞닿도록 했다. 그리고 훗날 난쟁이족이 탄
생하자 그 가운데 네 명을 골라 각 귀퉁이에서 대지의 변경을 지키도록 했다. 이 난쟁이들은 각각
동, 서, 남, 북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대지를 덮은 이미르의 두개골이 남쪽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가리는 바람
에 대지가 어두워진 것이다. 그래서 형제는 불나라에서 튀어오르는 깜부기불들을 잡아채 하늘에대
달아매었다. 해와 달과 별들은 이렇게 해서 천지를 비추게 되었다. 어떤 별은 하늘에다 붙박아놓
았고 어떤 별은 일정한 궤적을 따라 하늘을 돌도록 하였다. 한편 이미르의 두개골에서 떨어져 나
온 뇌는 하늘에 던져올려 운치 있는 구름이 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완성되었다. 그러나 거인 이미르의 주검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과연 평화롭
고 안전할 수 있을가? 더구나 자신들의 조상이 오딘과 그 형제들에게 난도질당한 걸 똑똑히 기억
하고 있는 거인 부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지 않은가? 이미르의 죽음은 1회전에 불과할
뿐, 신과 거인 사이에 벌어질 죽음의 대결은 이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오딘,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다
  오딘과 형제들은 어느날 자신들이 창조한 새로운 세상을 흐뭇한 마음으로 감상하며 미드가르드
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지의 끄트머리인 어느 바닷가에서 두 그루의 나무가 뿌리뽑힌 채
넘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하나는 물푸레나무였고 다른 하나는 느릅나무였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이 나무들이야말로 축복의 당 미드가르드에 살 새 생명의 재료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합심하여 물푸레나무로는 남자를, 느릅나무로는 여자를 만들었다.
  맏형 오딘은 이들 남녀에게 생명의 기운을 주었고, 삼형제 중 둘째는 날카로운 기지와 풍부한
감성을 그들에게 주었으며, 셋째는 청각과 시각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렇듯 미드가르드와 그곳에 살 인간을 창조해 놓으니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있
었다. 남뽁 불나라에서 타오르는 해와 달이 문제였다. 그것들은 불꽃의 파편에 불과했지만 대지는
그것만으로도 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과 인간들이 활동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으나,
잘 시간에도 눈이 부셔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오딘 형제는 주기적으로 대지에 어둠을 가져다줄 방법을 찾았다. 때마침 그들의 눈에 띈 것은
요툰헤임에 사는 거인 나르비의 딸이었다. 다른 식구들처럼  검은 눈에 검은 머리, 가무잡잡한 피
부를 지닌 그녀의 이름은 나드(밤)였다. 오딘은 그녀를 마차에 태우고 하루에 한 번씩 하늘을 돌
도록 했다. 이제 대지에는 매일같이 어두운 밤이 찾아와 신과 인간을 편히 잠들게 했다.
  피부가 검기는  밤 뿐만 아니라 그 식구들이 다 마찬가지인데 오딘 형제는 왜 유독 그녀를 택했
을까? 그것은 그녀에게 다그르(낮)라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이는 나드의 아들이지만
그녀와는 달리 희고 빛나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오딘은 다그그고 하여금 어머니의 뒤를 따라
하늘을 돌도록 하였다.
  밤과 낮이 번갈아 하늘을 지나가자 해와 달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달은 밤과
보조를 맞춰 돌고, 환한 해는 낮과 짝을 이루어 하늘을 돌았다.
  해는 언제 보아도 성급하게 발걸음을 서두는 인상을 준다. 특히 할 일이 많은 현대인은 해가 조
금만 더 하늘에 머물로 주었으면 하고 안타까워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해가 이렇게 급하게 움직이
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뒤를 게걸스런 늑대가 뒤쫓고 있기 때문이다. 스콜이란 이름
의 이 사나운 늑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침을 질질 흘리며 해를 잡아먹기 위해 사력을 다해 달리
고 있다. 우리가 개기일식이나 부분일식을 목격하는 까닭은 해가 늑대의 입 안에 들어갔다가 겨우
빠져나가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는 언젠가는 늑대에게 따라잡힐 운명이다. 신과 인간은 가능
한 한 늑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멀리 달아나라고 열심히 해를 응원할 테지만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늑대에 쫓기기는 달도 마찬가지이다. 월식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스콜의 아우인 늑대 하티
는 달을 쫓아 해 앞에서 열심히 보름달만 뜨면 늑대로 변하는 서양판  전설의 고향 주인공은 아마
하티의 먼 친척뻘이 될 것이다. 아우 늑대 하티도 형처럼 언젠가는 달을 따라잡게 되어 있다. 해
와 달이 늑대 형제에게 따라잡히는 날은 곧 오딘이 창조한 세계의 마지막 날이다. 이날 남쪽에 도
사리고 있는 불의 마왕이 불칼을 들고 나타나 온 우주를 불질러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올
대까지 신과 인간은 오딘을 중심으로 거인과 싸우며 서로 사랑하며 열심히 한 세상을 살아 갈 것
이다.

  오진, 바이킹 전사를 불러올리다
  이제 많은 신들이 태어났고 오딘은 신들의 아버지로 우러름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인간의
대지인 미르가르드 위에 아스가르드라는 신들의 나라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살았다. 하늘과 가까운
아스가르드는 무지개다리를 통해 대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신들은 저마다 하나씩 궁전을 가지고 있었다. 오딘의 궁전은 발라스칼프라고 했다. 이
궁전에서 오딘은 용상인 힐드스칼프(높은 자리)에 앉아 온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자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감시하는 것은 이 사나이의 직분인 동시에 취미이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신경을 곤두세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지상에서 벌어지는 바이킹 전사들끼리의 격
투이다. 바이킹 전사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전장에 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전쟁의 신이기도
한 오딘의 혼이 바이킹에게 씌었기 때문이다.
   부룬힐드!
  오딘이 목청껏 발키레(살륙의 선택자라는 뜻)가운데 한 명을 불렀다. 발키레는 아름다운 이딘의
시녀들을 일컫는 이름이지만, 아름다운 자태와는 달리 그녀들은 매우 잔혹한 일을 맡고 있었다.
  예, 오딘 님!
  호출을 받은 부룬힐드가 완전무장을 한 몸으로 달려왔다. 마치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전쟁과 기
술의 여신 아테나처럼 여장부다운 기개를 지였으면서도 차가운 느낌의 미모가 돋보였다.
   저기 지금 맞붙어 싸우고 있는 장수들 보이지? 그 중에 흰 말을 타고 있는 친구가 마음에 들
어. 내게 데려다주겠나?
   네, 알았습니다.
  부룬힐드는 즉시 오딘 앞을 물러나 칼을 비껴들고 말에 올라탔다. 신들의 세계인 아스가르드와
인간의 대지인 미드가르드를 연결하는 무지개 다리를 쏜살같이 건너간 그녀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고 있는 인간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오딘인 지목한 흰 말을 탄 장수는 붉은 구레나룻을 휘
날리며 상대방에게 덤벼들고 있었고 상대방도 결판을 내겠다는 듯이 창을 겨누고 달려왔다. 다음
순간 상대의 창은 흰 말을 탄 장수의 가슴팍을 정확히 꿰뚫었다. 하지만 그 장수는 사실 창에 찔
리기 전에 이미 브룬힐드가 휘두른 칼날에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장수는 처절한 목소리로  오
딘! 을 외치며 말에서 떨어져 죽어갔다.
  부룬힐드는 장수의 넋을 거두어 자기 말에 태우고 다시 날아올랐다. 이 영혼은 이제 죽은 전사
들의 거처인 천상의 발랄라 궁전으로 가서 오딘의 전사로 조련될 것이다. 그리하여 장차 다가올
신들과 거인들의 전쟁에서 오딘을 위하여 다시 한번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브룬힐드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오는 것을 확인한 오딘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
시 쉬려는 모양이다.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시이라면 시력이 무척 좋을 거라고 여러분은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린 오딘에게는 눈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왜 한쪽 눈
을 잃었을가? 전투 장면을 즐기는 신답게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화살이라도 맞은 것일까?
아니다. 그는 최고의 신에 걸맞는 최고의 지혜를 얻고 싶어했고 그 대가로 한쪽 눈을 떼어내는 아
픔을 겪어야 했다. 그 아픈 사연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의 애꾸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새벽에 그의 곁은 떠나 세상을 살피러 떠났던 까마귀 무닌
(기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오 무닌아, 어서 오너라. 그래, 오늘도 별일 없더냐?
오딘이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은 까마귀를 반가이 맞았다. 때마침 궁전 에서 노닐던
또 한 마리의 까마귀 후긴(생각)이  친구의 귀가를 알고 날아 들어와 오딘의 왼쪽 어깨에 앉았다.
이 두 마리의 까마귀야말로 오딘의 지혜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등 참모들이었다.
   아까 발키레 언니가 바이킹 전사를 데리고 가는 건 보셨죠?
  무닌이 오딘의 기억을 되살려 주겠다는 듯이 깍깍대는 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그 녀석 싸우는 기백이 마음에 들어서 내가 시켰지.
   미드가르드에서 소식이 있어요. 아스크르(물푸레나무)와 엠블라(느릅나무)부부가 오딘님을 모시
고 식사 대접을 하고 싶대요.
  아스크르와 엠블라는 오딘이 바닷가에서 빚은 최초의 인간 부부이다.
   어허, 그래? 그러고 보니 미드가르드에 내려가 본 지도 꽤 오래 되었군. 쇠뿔도 단김에 빼랫다
고 당장 움직여 볼까?
  오딘은 유쾌하게 웃으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그는 우선 서부극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챙
이 넓은 모자를 푹 뒤집어썼다. 그렇지 않아도 푸르뎅뎅하고 무표정에서 속마음을 알 수 없는 그
의 얼굴이 모자 때문에 반쯤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딘은 경우에 따라 얼굴을 바구기 위한 가면
도 몇 개 챙겼다. 표정으로는 속마음을 알 수 없고 가면을 즐겨 스는 오딘을 신들은 종종  가면의
신 이라고 불렀다.(영화<마스크>에서 짐 캐리를 찾아온 가면은 바로 오딘의 가면이었다.)
  푸른 망토를 두른  가면의 신 오딘은 보검 궁니르를 허리에 차고 천하의 명마 슬레입니르에 올
랐다. 발할라궁에서는 전사의 영혼들이 나서서 브룬힐드가 새로 데려온 영혼을 위해 환영연을 벌
이고 있었다. 그들은 지나가는 오딘을 보자 일제히 팔을 들어올리며  오딘! 하고 외쳤다.
  오딘이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잇는 무지개 다리에 들어설 무렵에는 땅거미가 짙게 갈리고
있었다. 저무는 해가 다리 건너편에서 오딘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오딘 님! 이 저녁에 어딜 가시나요? 한잔 하실 모양이죠?
  오딘은 대답 대신 황급히 손을 저었다. 해 뒤로 무시무시한 늑대 스콜이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
이다. 해가 기겁을 하며 서선으로 꼴깍 넘어가자마자 늑대가 커다란 아가리로 저녁 노을을 덥석
물었다. 사방은 이제 완연히 밤이 되었고, 하늘 위에는 달과 늑대 하티의 추격전이 서서히 전개되
고 있었다.
   오늘도 또 하루가 저물었군.
  달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오딘이 중얼거렸다.
  그가 아스가르드를 나서려고 무지개 다리에 들어서자 입구를 지키던 아스가르드의 경비대장 헤
임달이 나와 경례를 올렸다.
   근무중 이상 무!
  그렇다. 지금 이 시간 신들의 나라엔 별다른 이상이 없다. 그러나 시시각각 해아의 거리를 좁혀
가는 늑대 스콜처럼 신과 거인 사이에 벌어질 최후의 대결은 틀림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까지
온 세상을 감시하는 게 임무인 오딘은 오늘 그저 운좋게 하루를 넘겼을 뿐이다.

  풍요의 신과 전쟁의 신, 천상의 패권을 다투다
  오딘이 모든 신들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모든 신들이 그를 아버지로 받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신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바나 신족으로 이들은 농
경과 풍요를 관장한다. 따라서 바나 신족은 기본적으로 평화주의자들이다. 반면 오딘을 우두머리
로 하는 아사 신족은 거인 이미르에 대한 오딘의 적의에서 보이듯 호전적이다. 거인족과의 대결은
이들 아사 신족의 몫이며 그래서 그들을 전쟁의 신이라고 한다.
  우주가 창조된지 얼마 안 되어 이들 두 신족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세계 최초의 전쟁이었다.
  전쟁의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다. 여기 그 중 한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바나 신족은 아사 신족이 마녀 굴베이그를 환대한 것이 몹시 화가 나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이다. 굴베이그는 황금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마녀였다. 그러한 물욕은 신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었는데, 아사 신족이 정말로 그녀를 환대했다면 전쟁의 사유가 될만도 했다.
  이에 대한 아사 신족의 변명은 다음과 같다.
  오딘은 결코 굴베이그를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시큰둥하게 그녀의 황금
찬양을 듣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녀를 없애려 했다고 한다. 그들은 마녀의 몸을 창으로 마
구 질러 벌집을 만든 다음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분명히 타죽은 줄 알았던 굴베이그가 얼마 후 늠름하게 불길 사이
로 걸어나오는 게 아닌가? 아사신족은 그녀를 두 번이나 더 불 속에 던져넣었지만, 그때마다 마녀
는 살아 나왔다. 마침내 아사 신족은 그녀의 마력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녀에게  빛나는 자 라는
칭호까지 붙여줄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아산 신족이 끝가지 신의 품위와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황금의 마녀에게 굴복한 것은
같은 신으로서 수치라고 바나 신족은 생각했다. 그들은 아사 신족을 징벌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전
쟁 준베를 시작했다.
  용상에 앉아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내려다볼 수 있는 오딘의 눈에 바나 신족의 이러한 움직임
은 금세 포착되었다. 아사 신족도 창을 갈고 방패를 닦았다. 마침내 두 신족의 군대는 서로 마주
섰다. 진군해 오는 바나 신족을 향해 오딘이 창을 던진 것을 신호로 마침내 세계 최초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바나 신족은 마술을 부려 아사 신족을 보호해 주던 아스가르드 성벽을 한낱 아파트 단지의 과
속 방지턱 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글자 아사 신족은 죽기 살기로 육탄 돌격을 퍼부어 바나 신족의
요새인 바나헤임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그 이후로 두 신족은 서로가 지쳐 나자빠질 때가지 지리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오딘, 초고의 지혜를 얻기 위해 목숨마저 내놓다.
  신들의 전쟁이 소모전 양상을 보이자 양쪽 전사들은 하나둘 지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느 쪽에서 먼저랄 것도 없이 휴전 제안이 나왔다. 그리고 충분한 휴전 협상 끝에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는 데 합의하고 앞으로는 서로 평화롭게 지내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확실한 평화보
장 방안으로 서로 지도자들을 교환하여 상대방 진영에서 살도록 하자고 했다. 일종의 인질 교환이
었다.
  바나 신족은 뇨르드와 그의 아들 프레이르와 프레이르의 쌍둥이 여동생인 프레야를 아스가르드
로 보냈다. 또한 바나 신족 가운데 가장 똑똑하다는 크바시르를 그들과 함께 보냈다.
아사 신족은 이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뇨르드가
결혼하여 쌍둥이 오누이인 프레이르와 프레야를 낳은 여신이 다름 아닌 뇨르드의 친누이동생이라
는 사실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아사 신족이 혀를 내두르는 이 근친상간은 바나 신족 사이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는 일이었다.
  한편 아사 신족은 키다리 호니르와 현자 미미르를 바다 신족의 나라로 보냈다. 체격이 크고 잘
생긴 호니르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현명한 미미르는 환상의 짝이었다.
그들 둘이 함께라면 못할 일이 없어 보였다.
  바나 신족은 그들을 크게 환영하고 곧바로 호니르를 지도자의 한 명으로 추대했다. 호니르는 미
미르를 곁에 두고 무슨 일이든지 조언을 구했다. 미미르가 있는 한 호니르는 어떤 실수도 하지 않
아다. 문제는 미미르가 다른 일로 자리를 비울 때였다. 그럴 때 회의가 열려 신들이 호니르에게
의견을 물으면 호니르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알아서 하시오.
  이런 어이없는 일이 계속되자 바나 신족은 호니르의 두뇌를 의심하게 되었고, 나아가 아사 신족
이 쓸모없는 멍청이를 자기네에게 보냈다고 믿게 되었다.
   이건 사기야! 우리 편에서는 최고의 신들을 보냈는데, 놈들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바보를 우리
한테 떠넘긴 거라고!
  분노에 떨며 바나 신족은 복수를 결심했다. 그들은 현자 미미르를 붙잡아 머리를 베어버렸다.
그런 다음 피가 철철 흐르는 미미르의 머리를 오딘에게 보냈다. 그렇게 하면 아사 신족 최고의 현
인을 잃은 슬픔으로 오딘이 통곡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딘은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
려 이럴 때가 올 줄 알고 기다렸다는 듯이 미미르의 머리가 썩지 않도록 약초를 놓어 보관했다.
그런 다음 자기만이 알고 있는 주문을 외워 미미르의 머리가 말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이  말하
는 머리 를 거인나라 요톤헤임에 내린 우주나무 이그드라실이 뿌리 긑에 두고 그곳에 있는 샘을
지키게 했다. 그리하여 그 샘은  미미르의 샘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오딘은 미미르의 머리로부터 이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얻고자 했다. 그러
자 미미르는 오딘에게 가혹한 요구를 했다.
   제가 가진 지혜를 얻으려면 당신의 눈 하나를 빼내서 제가 주세요. 그리고 이 샘물을 마시도록
하세요.
  세상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얻는다는데 그깟 눈 하나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기꺼이 한
쪽 눈을 빼어 미미르에게 주었다. 그리고 샘물을 마셔 마침내 미미르의 지혜를 독점하게 되었다.
바나 신족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 이 세상 최고의 지혜를 헌납한 꼴
이 되고 말았다.
  오딘은 이 세상 최고의 지혜를 얻기 위해 애꾸눈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근
원적인 비밀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희생으로는 부족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원한 지
혜를 얻으려는 자는 반드시 목숨을 걸고 지옥을 다녀와야 했다. 북유럽의 오딘에게도 그와 같은
통과의례는 예외가 아니었다.
  아홉 세계의 비밀을 꿰뜷고 모든 신과 인간의 진정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오딘은 목숨을 바쳤
다. 그는 세계의 축인 우주나무 이그드라실 가지에 거꾸로 매달렸다. 그러자 신들이 창을 들고 다
가와 그의 온몸을 찔러댔다. 오딘은 다음과 같이 외치며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나는 오딘의 영원한 지혜를 위해 죽어간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희생이다~
  오딘은 죽은 채로 아흐레 동안 우주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에게는 이 세상 그 무
엇에는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의 지혜가 전수되었다. 그는 마법을 알게 되고 예지를 얻었다.
  아흐레가 지나 나뭇가지에서 내려진 오딘은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이 세상이 가장 깊숙한 비밀
가지도 가늠하는 예지의 신으로 모든 신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오딘, 거인국으로 가서 지혜의 술을 마시다
  신들의 전쟁이 끝났을 때 바나 신족과 아사 신족은 모두 큰 항아리에다 침으 뱉었다. 항아리를
가득 채운 침은 평화의 징표가 되었다. 그리고 아사 신족은 한술 더 떠 그 침으로 한 인간을 빚어
내었다. 그의 이름은 크바시르. 바나 신족이 인질로 보내준 현자 크바시르와 동명이인이다.
  신들의 침으로 빚어진 때문이었는지 크바시르는 타고난 천재였다. 그는 아홉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이었고, 이 세사의 비밀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하지만 크바시르는 절대로 자신의
지식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다니지 않았다. 누군가가 문제가 생겨 그엑 견해를 물으면 그는 언제나
바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상대방에게 이렇게 무어보고 저렇게 물어본 다음 상대
방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도록 해주었다. 신이든 인간이든, 그리고 거인이든 난쟁이든 그와 이
야기를 하고 나면 자신이 꽤나 현명해졌다는 생각을 갖기 되곤 했다.
  한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세상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다는 자부심에 차 있는 난쟁이
형제 피얄라르와 갈라르는 크바시르의 명성을 듣고 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크바시르를
초대하여 진수성찬을 대접했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종유석 아래 울퉁불퉁한 돌식탁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이익과 손해, 복수의 방법 따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식사가 끝난 뒤 난쟁이
형제는 크바시르를 음산한 방으로 안내한 뒤 소매 안에 숨겨둔 칼로 그의 심장을 찔렀다. 이어서
형제는 솟구치는 크바시르의 피를 두 항아리와 솥 하나에 가득 채웠다. 불쌍한 크바시르의 몸은
땅에 버려진 채 썩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크바시르가 돌아오지 않자 오딘은 난쟁이 형제에게 전령을 보내 그의 안부를 물
었다. 그러자 형제는 천역덕스럽게 대답했다.
   글쎄, 그분이 자기 지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죽어버리지 뭡니까?
  형제는 크바시르의 피로 가득찬 항아리에다 꿀을 붓고 휘저었다. 피와 꿀은 섞여서 훌륭한 술이
되었다. 이제 이 술을 마신자는 크바시르의 영혼을 물려받아 시인이나 현자가 될 수 있으련만, 난
쟁이 형제는 이 술을 깊숙이 감추어두고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만약 거인 길링과 그의 아내가 이들 난쟁이 형제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크바시르의 피로 만든
지혜의 술은 영원히 난쟁이 동굴에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난쟁이 형제들
은 거인 길링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그만 이들 부부를 죽여버린 것이다. 따라서 사태는 엉뚱한 방
향으로 흘러가게 된 것이다.
  길링 부부에게는 수퉁이라는 잔인한 아들이 있었다. 그는 부모님이 거인 나라 요툰헤임으로 돌
아오지 않자 몸소 난쟁이 형제의 동굴로 찾아 나섰다. 당황한 난쟁이 형제는 횡설수설하면서 거인
부부가 사고를 만나 죽은 거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수퉁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양손에 난쟁이 형제를 한 명씩 쥐고 바다로 내달렸다. 수퉁은
난쟁이 형제들이 도저히 헤엄쳐 들어갈 수 없는 먼 곳가지 끌고 가서 으름장을 놓아다.
   여기다 네놈들을 떨어뜨리면 너희들은 꼼짝없이 물귀신이 되는 거야.
  그러자 다급해진 파알라르가 말했다.
   우리를 살려주면 자네에게 가장 귀한 보물을 주겠네.
  형제능 입에 침을 발라가며 크바시르의 피로 만든 지혜의 술에 관해 말해 주었다. 수퉁은 형제
들을 사려주는 대가로 술이 든 항아리와 솥을 들고 요툰헤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산 가운데 바
위를 깎아 공간을 만든 다음 항아리를 그 속에 숨겼다.
  거인 수퉁은 딸 군로드에게 명령했다.
   한눈 팔지 말고 이 술을 지키도록 해라.
  수퉁은 손에 넣은 보물을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 소문은 곧 신들의 귀에 들어갔
다. 가면의 신인 애꾸눈 오딘은 볼베르크(악의 집행자)라는 이름의 거인으로 변장을 하고 요툰헤
임을 향해 떠났다. 잡초조차 자라지 않는 황량한 사막을 지나고 눈쌓인 길가 푸른 계곡을 지나자
경사진 들판이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아홉 명의 노예가 일하고 있었다. 오딘은 풀을 깎느라 몹시 지쳐 보이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희들의 주인이 누구냐?
   거인 수퉁의 동생 바우기입니다.
  오딘은 낫이 무뎌져서 고생하는 노예들을 위해 자신의 숫돌로 그들의 낫을 날카롭게 갈아주었
다. 그러자 노예들은 저마다 오딘의 숫돌을 사고 싶어했다. 오딘은  씨익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숫돌을 하늘 높이 던져올렸다.  햇빛을 받은 숫돌은 은빛을 차갑게 빛났다.
   저 숫돌을 잡는 자가 임자다.
  노예들은 낫을 치켜든 채 숨을 헐떡거리며 서로 숫돌을 잡으려고 뛰었다. 그러나 숫돌은 너무나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마치 하늘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노예들은 서로 밀치면서 앞으로 갔다 뒤
로 갔다 하며 낙하 지점을 포착하려고 애를 섰다. 그러다가 그들은 그만 낫으로 서로 못을 베고
말았다. 풀밭 위에 쓰러진 아홉구의 시체를 바라보며 오딘은 숫돌을 허리춤에 다시 찔러넣고 온길
로 다시 걸어갔다.
  오딘은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산을 내려가 수퉁의 동생 바우기의 집으로 갔다. 그는 자기 이름
을 보베르크라고 밝힌 뒤, 하루종일 걸어서 몹시 지친 데다가 시장하니 먹을 것과 잠자리를 달라
고 부탁했다. 그러나 바우기의 태도는 퉁명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참, 때를 잘 골라서 오셨군그래. 내 집 일을 해주던 노예 아홉명이 다 죽어버렸는데 날더러 어
쩌란 말이오! 들판에 풀 벨 일도 산더미 같은데....
 바우기는 꽝 하고 주먹으로 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아마 그 주먹에 사람이 맞았다면 머리가 납작
해졌을 것이다.
  오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 잘됐소이다. 보시다시피 제가 힘 좀 씁니다. 제가 그 아홉 명 몫의 일으 다 해드리죠.
  바우기는 미심쩍어하며 오딘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아하, 제가 뭘 바라고 그러느냔 거요? 다른 건 없소. 그저 당신네 형이 갖고 있다는 기적의 술
을 맛만 보게 해주시오.
 바우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방기의 태도가 신통치 않자 오딘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나가려
고 했다. 그러자 바우기가 다급하게 말했다.
   수퉁에게 말해보리다.
 이 거이은 자기 형 수퉁에게 아무런 애중도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애구가 아홉 명 몫의 일을
할 리가 없으므로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올 여름에 내 밑에서 일하시오. 그러면 형한테 말은 해보겠소. 나는 거기까지만 해주겠소.
  오딘은 여름 내내 쉬지 않고 아홉 명 몫의 일을 해냈다.
   이 친구는 인간이 아니야.  하고 바웃기는 생가갰다. 그리고 오딘과 함께 형 수퉁을 찾아갔다.
  하지만 수퉁의 태도는 단호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단 한 방울도 줄 수 없어!
  오딘은 수퉁에게 물러나와 바우기에게 물었다.
   아니, 당신 형은 도대체 왜 그 술을 독차지하련ㄴ 거요? 당신은 그 술을 맛복 싶은 생각도 없
소? 어떻소? 형 몰래 그 술맛 한번 보지 않겠소?
   어디 숨겨노았는지도 모르는걸.
  이렇게 대답하는 바우기는 혀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오딘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딘은 허리춤에서 송곳을 꺼내 바우기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거라면 이 산을 모조리 뚫을 수 있을 거요. 그것만이라도 해주시오. 내 일에 최소한의 보사
은 해줘야 할 것 아니오?
  바우기는 마지못해 송곳을 받아들고 산을 굴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산 한가운데 구멍
이 뻥 뚫리자 오딘은뱀으로 둔갑했다. 바우기가 그 뱀을 향해 송곳을 내리쳤지만, 뱀은 이미 구멍
속으로 스며들어가고 난 뒤였다.
  오딘은 술항아리를 지키는 수퉁의 딸 군로드 앞에서 애꾸이긴 하지만 잘생긴 젊은이로 변신했
다. 군로드는 그만 젊은이에게 한 눈에 반해 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노래부르는 젊은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참지 못하고 달려가 젊은이를 두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그들은 사흘 동안 즐거운 시간
을 보내며 사랑을 나누었다. 열정에 사로잡힌 군로드에게 이제 아버지의 엄명 따위는 아무런 문제
도 되지 않았다.
  오딘이 크바시르의 피를 세 모금만 맛보게 해달라고 하자 그녀는 그를 항아리 앞으로 안내했다.
말이 세 모금이지 오딘은 그 세 모금만으로 항아리와 솥에 있던 술을 모조리 비웠다. 입 안에 가
득 술을 머금은 채 독수리도 변한 오딘은 훌쩍 날아올라 거인의 산을 빠져나갔다.
  이 모습을 본 수퉁도 독수리로 변하여 오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오딘을 기다리고 있던 신들
은 아스가르드 성벽 안에 술 담을 그릇들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두 마리의 검은 독수리는 격렬한
추격전을 벌이며 하늘을 날았다. 오딘은 급히 나는 바람에 부리에 머금고 있던 술을 땅 위에 조금
떨어뜨렸다. 오늘날 지상에서 활약하는 빼어난 시인들은 바로 이 술을 마시고 재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무사히 아스가르드로 돌아온 오딘은 틈나는 대로 신선한 지혜의 술을 맘껏 들이켰다. 그리고 기
분이 나면 때때로 신들과 한두명의 인간에게 한 모금씩 맛보게 했다.
  여러분 주위에 뛰어난 시적 재능을 보이는 사람은 십중팔구 오딘의 부름으로 아스가르드에 갔
다온 사람일 것이다.

    2. 사고뭉치 로키
  로키, 여신 시프의 황금 머릿결을 자르다
  신들의 전쟁은 끝났다. 이제 아스가르드에 평온이 계속되자 로키는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뭐 좀 신나는 일이 없을까?
  이렇게 뇌까리고 다니던 로키는 어느날 밤 몰래 시프의 침실로 숨어들어 갔다. 시프는 오디의
아들이지 신들 가운데 가장 힘이 센 토르의 아내. 토르에게 거리면 목숨이 왔다갔다 할 모험이 아
닐 수 없다. 그러나 로키는 바로 그런 긴장감을 즐기는 위인이었다.
  그는 혼자 미소지으며 칼을 빼들고 시프의 침대로 다가갔다.
  쌔근쌔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시프 위에서 로키는 칼을 쳐들었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칼날이 새파랗게 빛났다. 로키는 그 시퍼런 칼날로 시프의 빛나는
머리카락을 잘랐다. 시프의 머리키락은 마치 바람 부는 황금 들녘의 곡식처럼 출렁거리며 빛났다.
시프가 뭐라고 잠꼬대를 하며 돌아눕자 로키는 흠칫 놀라 동작을 멈췄다. 그러나 미인은 잠꾸러기
라고 했던가. 외간남자의 손에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고 있는데도 시프는 깨어나지 않았
다. 로키는 한 타래의 머리카락을 달빛에 비추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아름다운 미인에게 손짓
으로 입맞춤을 보내며 살며시 침실을 떠났다.
  이튿날 아스가르드는 발칵 디집혔다.
  시프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고 천둥신 토르는 천둥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범인은 잡으로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가 생각이 친구인 로키에게 미치자 그는 주저없
이 달려가 친구의 멱살을 잡았다.
   이 자식,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내 아내의 머리카락을 잘라 어디에 쓰려고?
  솥뚜껑 같은 토르의 손에 잡힌 로키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것 좀 놓고 얘기해! 캑캑... 그냥 장난 좀 친 걸 갖고 뭘 그래?
  토르가 로키를 잡은 손에 힘을 더 주는 바람에 로키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골이 되었다.
   장난? 넌 장난으로 사람도 죽일 놈이군그래. 머리카락이 시프에겐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걸 몰
라?
  토르가 소리를 꽥 질렀다.
   원래대로 해놓으면 될 거 아냐?
  로키가 투덜거렸다.
   내가 난쟁이들과 좀 통하는 데가 있거든. 걔네들을 잘 구스르면 어렵지 않을 거야.
  토르가 로키를 바닥에 내동댕에쳤다.
   만약 제대로 해놓지 않아면 네 놈의 뼈가 남아나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
  로키는 옷매무새를 만진 뒤 울고 있는 시프에게 윙크를 보냈다.
  그는 아스가르드를 서둘러 빠져나가 검은 난쟁이들이 사는 나라로 내려갔다. 으스스하게 여이어
있는 수직동굴 속을 천천히 지나자 이발디의 아들들이 살고 있는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로키는 소문난 대장장이로 알려진 두 난쟁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네들도 토르 부인의 미모에 대해서는 들어봤겠지. 그 여자의 탐스러운 황금빛 머릿결에 대해
서도 알고 있을 테고...그런데 그 머리카락이 어느날 아침에 이어나 보니 잘려 나가고 없더라지 뭔
가!
  교활한 로키는 범인이 자기라는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금을 주물러 시프의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다듬을 수 있는 자가 또 누가 있겠나? 또 자네들이
아니면 누가 그 황금 머리카락이 그녀의 머리에서 자라도록 마법을 걸 수 있겠나?
  이발디의 아들들에게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만들어 드리면 우린 뭘 받게 되나요?
  로키는 씩 웃으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시프와 토르가 자네들에게 감사하는 영광이 있지 않겠나? 또한 모든 신들과 우정을 맺게 될
테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걸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선물을 마련해 주겠네.
  난쟁이 형제는 로키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로키의 말대로 해준다고 해서 손해볼 것
은 없었다. 로키가 전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봤자 그들이 입을 손해는 약간의 노동과 한줌
의 금덩어리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굴 구석에 있는 아궁이에 나무를 한아름 쌓았다. 한 명이 풀무질을 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은 금을 내리쳐 실처럼 뽑아 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내 출렁거리는 금발을 만들어 들고는 무어
라고 주문을 외웠다. 순금으로 이루어진 머리카락은 미풍에도 날아갈 것처럼 가느다랗고 보드라웠
다.
   아직 불이 남았네. 이걸 그냥 내버려두긴 아까우니까 덤으로 다른 것을 좀 만들어 드리라다.
  다시 팔을 걷어붙인 난쟁이 형제는 휘황찬란한 보물 두 개를 뚝딱 만들어냈다. 하나는 황금의
배, 또 하나는 번쩍번쩍하는 창이었다.
   이 배는 스키드블라드니르라고 합죠. 신들이 모두 무장을 하고 올라타도 남을 겁니다. 그리고
돛을 올리기만 하면 바람이 불어와 자동으로 움직이죠. 이런 장난감 같은 배에 어떻게 신들이 다
타느냐고요? 한번 들고 가서 바다에 던져보세요. 금방 부풀어올라 세상에서 제일 큰 배가 될 겁니
다. 게다가 이 배는 완전 조립식입죠. 쓸 일이 없을 때는 이것보다 더 작게 조각내서 보간해 둘
수도 있어요.
  한 난쟁이가 황금 배를 듥 이렇게 설명하자, 이번에는 다른 난쟁이가 창을 들고 말했다.
  이 창은 궁니르라고 해요. 결코 표적을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겁니다.
  로키는 거듭 난쟁이들을 칭찬하고 감사를 표시한 다음 서둘러 동굴을 나섰다. 음산한 지하 동굴
들을 지나 아스가르드로 돌아가던 그는 문득 생각이 난 듯 잠시 멈추어 서서 혼잣말을 하기 시작
했다.
   자, 이제 토르 녀석이 그 솥뚜껑 같은 주먹을 나한테 휘두를 염려는 없어진 거지? 아니, 주먹질
이 다 뭐야? 이렇게 푸짐한 선물을 덤으로 안고 가는데...하지만 이 정도 갖곤 이 재간동이 로키
님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할 수 없지. 내친 김에 다른 난쟁이 녀석들을 고드겨 근사한 보물
들을 좀더 장만해 볼까? 토르뿐만 아니라 오딘이랑 고 궈여운 프레야까지도 이 로키 님을 다시
보게 말야.
  그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익히 소문으로만 듣던 솜씨좋은 다른 대장장이들을 찾아 바람처
럼 내달렸다.
  로키가 찾은 또다른 난쟁이 형제는 브로크아 에이트리였다. 이들은 쇠붙이 다루는 일이라면 이
발디의 아들들 못지않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로키가 세 가지 보물을 내밀자 그만 엄청난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자네들 이렇게 멋진 작품을 본 적이 있나?
  로키는 은근히 형제의 약을 올렸다.
   쳇!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물건이라고. 그런 것쯤은 눈감고도 만들 수 있습죠.
  브로크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로키는 비웃음을 흘렸다.
   설마하니 그럴 리가! 마약 자네들이 이것보다 더 좋은 보물을 만들어내면 내 머리를 내놓겠
네.
  로키는 그렇게 말해놓고는 자기가 너무 경솔했나 싶었지만 이미 둘이킬 수 없게 되었다.
  브로트와 에이트리 형제는 정말로 로키의 머리를 잘라 버리고 싶을 만큼 약이 올라 있었기 때
문에 로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장간으로 달려갔다.
  대장간에서 브로크는 풀무질을 하고 에이트리는 금덩어리와 돼지가죽을 가지고 무언가를 열심
히 만들었다. 도중에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브로크의 손등을 쏘아댔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풀무
질을 계속했다. 마침내 금털을 가진 멧돼지가 완성되었다.
  형제는 멈추지 않고 순금덩어리를 작업대에 올려놓았다. 이번에도 파리가 나타나 브로크의 목을
두 번씩이나 아프게 쏘았지만, 브로크는 우직하게 풀무질을 계속했다. 얼마 안 돼 에이트리는 두
번째 작품인 순금 팔찌를 주조해 냈다.
  다음에 쇳덩어리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했다. 파리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타나서 브로크의 양쪽
눈꺼풀을 쏘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앞을 못 보게 된 브로트는 파리를 쫓으려고 한 손을 풀무에서
잠깐 떼고 말았다. 에이트리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풀무질 좀 똑바로 해! 다된 죽에 코 빠뜨리지 말고.
  에이트리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세 번째 작품을 꺼냈다. 단단해 보이는 쇠망치였다. 작은 흠이
라도 생겨서 로키의 머리가 그대로 붙어 있게 되는 사태가 생길가 봐 에이트리 형제는 꼼꼼하게
망치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쇠망치는 그들의 마음에 들었다. 굳이 흠을 잡자면 손잡이가 약간 작
게 만들어져서 난쟁이 손 안에도 쑥 들어온다는 것 정도였다. 두 난쟁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
다.
  반면, 로키의 가슴은 사정없이 쿵쾅대었다. 사실인즉 브로크를 쏘아대며 작업을 방해했던 파리
는 난쟁이 형제의 작품에 흠집을 내려고 변신한 로키였던 것이다. 그토록 필사적으로 난쟁이를 쏘
아댔건만 작품들에 별 이상이 없다니 이제 자칫하면 로키는 자기 말대로 머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야말로 자승자박인 셈이다.
  브로크가 로키에게 말했다.
   자, 이 보물들을 들고 함께 갑시다. 가거든 당신 목이나 잘 씻어 두시오.
  로키와 브로크가 아스가르드를 향해 떠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토르와 시프뿐만 아니라 모든 신
들은 회의 장소인 글래드스헤임에 모여들었다.
   역시 내가 생각해도 내 머리는 제법이란 말이야.
  로킥 으스대며 말했다.
   나야시프의 머리카락만 가지고 오면 되는 거 아니었냐고? 그런데도 타고난 봉사 정신을 발휘
해서 이렇게 많은 보물을 만들어 왔다 이 말이거든.
 브로트는 로키를 도끼눈으로 쳐다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래, 이 잘난 자식아! 입이 살아 있을 때 실컷 떠벌려라.
  로키가 브로크 형제와 한 약속을 전해들은 신들은 오딘과 토르, 그리고 바나 신족이 프레이르를
심판관으로 선정했다. 로키는 이발디의 아들들에게 받은 세 가지 선물을 각각 세 신에게 헌정했
다. 시프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남편인 토르에게, 창 궁니르는 오디에게, 그리고 조립식 배는 프리
이르에게 바쳤다.
  시프가 황금 머리카락을 머리에 쓰자 신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터져나왔다. 이 신비로운 머리카
락은 쓰자마자 머리에 바로 뿌리를 내렸을 뿐만 아니라 시프의 미모와 어울려 너무나도 아름답게
출렁거렸다.
  신들이 이발디의 아들들이 만든 보물에 감탄하는 모습을 본 브로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만든 제품들을 광고하고 나섰다.
   이 황금털 멧돼지는 프레이르 님게 드립니다. 이놈이 얼마나 힘이 센가 하면 하늘과 바다와 땅
을 한거번에 싣고도 세상의 어떤 말보다 빨리 달린답니다. 그리고 이황금털은 밤에도 빛ㅇㄹ 발해
항상 주위를 대낮처럼 발히죠. 그리고 이 금팔지 드리웁니르는 오딘 님께 드립니다. 차고 계시면
아흐레째되는 날마다 여덟 개의 새 팔찌가 이 금팔찌에서 떨어져 나올 겁니다.
  마지막으로 브로크는 도끼 묠니르를 토르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세상에 이 도끼를 견뎌낼 물건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이 도끼는 아무리 멀리 던져도
반 듯 주인 손에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마약 이 도끼를 숨기고 싶으시면 여의봉처럼 줄여서 옷소
매 안에 감출 수도 있죠. 손잡이가 좀 작긴 하지만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심사를 맡은 세 신은 망설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각자가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받았지만 무엇
보다 소중해 보이는 선물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토르의 도끼 묠니르였다. 이 도끼 하나만 있으면
신들의 나라를 적들로부터 거뜬히 지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에 작품이 더 낫소, 브로크/
  그 말을 듣자마자 브로크는 두 주먹을 곡 쥐고 이를 갈면서 로키에게 다가갔다. 로키는 슬그슬
금 뒷걸음치며 다급하게 말했다.
    내 머리는 잘라서 뭐에다 쓰려고 그러나? 같은 무게가 나가는 금을 드릴 테니 좀 봐주게!
  브로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들, 특히 토르와 시프는 쩔쩔매는 로키를 보는 게 깨소금 맛보
다 더 고소했다.
   쳇! 좋아. 어디 그럼 한번 날 잡아보시지.
  로키와 브로크가 벌이는 숨바꼭질을 보며 신들은 마음껏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봐요, 토르. 내가 준 선물이 고맙거든 날 좀 도와주시오.
  브로크가 약이 바짝 올라 소리치자 토르는 앉은자리에서 솟아 올라 글래드스헤임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으 토르는 로키를 질질 끌며 들어왔다.
  로키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다가오는 브로크를 향해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목소리를 짜내었다.
   이봐, 내가 머릴ㄹ 걸겠다고 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내 목가지 주겠다고 하진 않았으니까 목
부분은 솜털하나라도 건드리지 말게.
  신들은 로키의 두뇌 회저에 혀를 내두르며 씩 웃었다.
   그건 말이 되는군. 그럼 좋아. 어쨌든 당신 머리는 내꺼니까 더 이상 고놈의 혀를 놀리지 못하
게 입을 싹둑 베어버리겠어.
  브로크는 허리춤에서 가죽끔을 끄집어내어 로키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꿰려고 했다.
   내가 혀를 놀리긴 했지만 나쁜 말은 한번도 한 적이 없어!
  로키의 마지막 항변도 소용이 없었다. 브로크는 형에게 받아온 송곳을 끄집어내 로키의 양 입술
을 꿰뚫고 가죽끈으로 꿰매 버렸다. 로키는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다급하게 가
죽끈을 풀어내고 너무나 아픈 나머지 엉엉 울었다. 궁정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입이
아픈 로키는 입술을 악물지도 못한채 이를 박박 갈았다.
   저희들이 그렇게 좋은 선물을 공짜로 받은 게 다 누구 덕분인데, 내가 이 골로 당하는 걸 보고
좋다고 웃어? 어디 두고 보자. 이놈들아!

    여신 프레야, 목걸이 때문에 난쟁이 넷과 몸을 섞다
  바나헤임(바나 신족의 나라)에서 아버지 뇨르드를 따라 아스가르드에 온 미의 여신 프레아는 세
스룸니르라는 궁전을 저택으로 배당받았다. 그녀는 이곳에서 아사 신족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일로
소일했지만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아사 신족은 항상 프레야와 그녀의 가족에게 친절했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그녀의 욕구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프레야는 보석 세공에 남다른 솜씨를 자랑하는 난쟁이들 넷에 대한 이야기를 들
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그들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칫 잘못하면 황금을 탐내 신의 품위를 손
상시킨다는 비난을 듣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신들이 곤히 잠다는 새벽에 아스가
르드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밤을 꼬박 새웠다. 조금이라도 자두려고 했지만 설레는 마음에 잠을 이
룰 수가 없었다.
  이윽고 날이 밝자 프레야는 사뿐히 집을 나서 눈송이가 소리없이 날리는 아스가르드 벌판을 걸
어 무지개 다리 비프로스트로 걸어 갔다. 그녀는 아끼는 애완용 고양이조차 난로 옆에서 곤히  잠
들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녀가 나가는 걸 모르리라고 프레야는 확신했다.
  그러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기를 호시탐참 노리는 로키가 이 장면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창
문 밖으로 프에야가 걸어가는 모습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서둘러 옷을 걸치고 그녀
의 뒤를 밟았다.
  눈 덮인 미드가르드는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황금 장신구에 대한 기대에 가슴 부
푼 프레야는 볼모의 평언을 지나 휘감아 도는 강을 천천히 건너고, 시퍼렇게 날이 선 거대한 빙하
의 밑 바닥으 지나 짧은 해가 떨어질 무렵에야 가파른 낭떠러지 근처의 바윗덩어리에 다가갔다.
뒤를 밟던 로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프레야는 그 바위 사이를 지나 지하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로 들어갔다. 너무나 추운 나머지 그
녀의 눈에서는 황금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통로 끝에 다다를 즈음 물방울이 둘 웅덩이
에 똑똑 떨어지는 소리와 작은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드디어 멀리서 망치소리
가 들려왔다.
  감격한 프레야는 소리나는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따금씩 끊어지면서도 근질기게 이어지
는 망치소리는 점점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네 난쟁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무
언가를 내리치고 있는 대장간이 나타났다.
  한동안 프레야는 용광로의 눈부신 불꽃에 넋을 잃었다. 부신 눈을 비비고 다시 눈뜬 프레야는
난쟁이들이 만들어놓은 기막힌 목걸이를 보고 다시 한번 넋을 잃었다. 그런데 넋을 잃은 것은 프
레야만이 아니었다. 프레야가 이처럼 아름다운 장신구를 본 일이 없었던 반면, 난쟁이들도 그녀처
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멍하니 서 있었다.
  이윽고 프레야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제게 그 목걸이를 파실 수 없겠어요?
  난쟁이들은 서로 바라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물건은 파는 물건이 아니올시다.
  그렇다고 물러날 프레야가 아니었다.
  "제가 무엇 때문에 그 먼 길을 걸어서 아스가르드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세요? 대가로 금
이나 은을 달라고 하시면 얼마든지 드리겠어요.
  난쟁이들은 낯을 찌푸렸다.
   금과 은이라면 우리도 얼마든지 있소이다.
  프레야는 애가 탔다.
   그럼 무얼 드리면 될까요?
  얼굴에 홍조를 띈 프레야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난쟁이들은 음흉한 시선으로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가지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첫 번째 난쟁이가 말했다.
   이 목걸이는 우리 모두의 것이오.
  이어서 두 번째 난쟁이가 추파를 던지며 말했다.
   그러니가 우리 중 한 사람 것이면 나머지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지요.
  세 번째 난쟁이가 말했다.
  "이 목걸이에 걸맞는 대가는 딱 한가지뿐이오. 그것만이 우릴 만족시킬 수 있소.
  잠자코 있던 네 번째 난쟁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한가지 대가는 바로 당신이오.
  여신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당신이 우리 네 명과 각각 하룻밤씩을 보내야 이 목걸이가 당신 목에 걸릴 수 있을거요.
  난쟁이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프레야는 질색을 하며 난쟁이들을 다시 보았다. 못생긴 얼굴, 작고 탐욕스러운 눈, 뾰족한 코,
작달막한 키.
  프레야는 고개극 가로젓고 발길을 돌리려다 황급히 멈추었다.
   여기가지 어떻게 왔는데 그냥 돌아가? 단지 나흘 바이면 돼! 그래, 나흘 밤이면 저 아름다운 목
걸이가 내 거란 말야!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모기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뜻대로 하세요.
  나흘 낮 나흘 밤이 지났다. 프레야가 약속을 지키자 난쟁이들도 약속을 지켰다. 그들은 목걸이
를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프레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두운 동굴을 빠져나갔다.
  프레야가 자기 집으로 숨어 들어가는 걸 보고 로키는 오딘에게 달려갔다. 로키는 오딘에게 능글
맞게 웃어 보이며 이죽거렸다.
   그 여자 하는 짓 봤수?
   그 여자라니?
  오딘이 되물었다.
   아니, 이 양반 직무 태만이시네그려. 용상(힐드스칼프)에 앉아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
시해야 할 분이 그래 그것도 못봤단 말이오?
  로키가 비아냥 거리자 오딘이 애꾸눈이 타오르는 듯했다.
   이 녀석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아하, 흥분하지 말고 내 얘기 좀 들어봐요. 당신이 애지중지하는 고 귀여운 프레야가 말씀이
야...
  로키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오딘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귀를 기울였다. 그리스의 제우스만큼이나
바람기가 많은 오딘이기에 부인 프리그의 눈치를 보면서도 내심 프레야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터
였다. 그런데 로키란 녀석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그 어
여쁜 프레야가 하찮은 난쟁이 녀석들에게 뭘 어떻게 했다고?
   그만해!
  오딘은 참다 못해 소리를 괙 질렀다.
   이 녀석이 전에는 시프의 아름다운 머릿결을 몰래 잘라내더니 이젠 프레야의 뒤꽁무니를 밟고
다녀? 하여튼 넌 야비한 놈이야. 게다가 이젠 나하고 프레야 사이를 이간질학T다고? 자, 그만 까
불고 어디 그 목걸이나 내놓아봐!
  로키는 머멋거리며 말했다.
   이봐요, 내가 가서 달라고 한다고 프레야가 그 목걸이를 내놓을 것 같아요? 지금 나더러 도둑
질을 해와라, 이 말씀입니까?
  오딘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하여간 알아서 해. 어떻게든 그 목걸이를 내 앞에 가져오지 못하면 다신 내 얼굴 못 보게 될
테니 그리 알아!
  오딘의 얼굴은 언제 보아도 가면을 뒤집어 쓴 것처럼 괴이하지만 로키는 이 순간 오딘의 얼굴
에서 악마의 가면을 보고 있었다. 한 마디만 잘못해도 뼈가 으스러지는 사태가 올지 몰라 로키는
재빨리 뒷걸음질쳐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날 밤 프레야의 집을 향해 걷는 로키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토르의 아내인 시프의 머리카락을
훔쳤다가 얼마나 험한 꼴을 당했던가? 위아래 입술이 송곳에 꿰이는 바람에 지금도 무슨 말을 하
려면 입술이 욱신거린다. 하지만 프레야의 목걸이를 훔쳐서 오딘한테 갖다 바치지 않으면 더 끔찍
한 욕을 볼지도 모른다.
  로키는 생각다 못해 브로크 형제의 대장간에서 썼던 방법대로 파리로 변신하기로 했다. 파리로
변한 로키는 프레야의 집 지붕 바로 아래 나 있는 바늘구멍 만한 틈을 겨우 비집고 들어갔다. 문
제의 목걸이는 잠자는 프레야의 목에 얌전히 거려 있었다.
  그녀를 깨우지 않고 목걸이를 벗겨내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로키는 일단 그녀가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다시 빈대로 변했다. 그리고는 기분좋게 미녀의 젖가슴을 더듬고 올
락 목을 거쳐 뺨 위에 앉았다. 그런 다음 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하얀 살갗을 쏘았다.
  프레야는 나흘 밤을 난쟁이들에게 시달리고 난 뒤끝이라 잠시 신음소리만 냈을 뿐 곧 돌아누웠
다. 바로 그 순간 목걸이의 고리가 로키의 눈에 들어왔다. 로키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조심스
럽게 목걸이를 푼 뒤 유유히 그녀의 집을 나섰다.
  이튿날 아침 로키가 보란 듯이 오딘에게 목걸이를 갖다 바치자 마자 프레야가 허겁지겁 달려왔
다. 그녀는 잠에서 깨자마자 목걸이가 없어진 것을 알았고, 이 잡듯이 집안을 뒤지던 끝에 범인이
h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은 열려 있는데 강제로 연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런 짓을 할
자는 로키밖에 없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키의 행적을 수소문한 끝에 그가 오딘의
궁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다.
  프레야는 다짜고짜 오딘에게 다그쳐 물었다.
   로키가 갖다준 게 제 목걸이 맞죠? 당장 내놔요!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야비한 짓을 하실 수가
있죠?
  오딘은 미간을 찌뿌렸다.
   뭐, 야비하다고?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있지? 프레이르의 동생이고 미모도 출
중해 귀엽게 봐줬더니 남의 뒤통수나 치고 다니고 말야. 너야말로 야비한 짓으로 너 자신을 욕보
이고 신들을 욕보인 장본인 아니냐? 그깟 목걸이가 도대체 뭐길래 그것 때문에 난쟁이 놈들한테
몸을 더렵혀?
 프레야는 파르르 떨면서 오딘에게 달려들었다.
   어서 목걸이나 내놔요!
  프레야는 오딘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을 꺾고 밀어붙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황금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러나 오딘은 억센 두 팔로 프레야를 붙잡아 자기 앞에 세웠다.
   네가 뭐라고 해도 그 목걸이는 압수야. 단, 한 가지 조건을 들어준다면 다시 생각해 볼 여지는
있어.
  프레야의 눈이 반짝 빛났다.
   너는 평화로운 바나 신족 세상에 사니까 잘 모르겠지만 우리와 거인족 사이의 대립은 심각해.
신들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나로서는 좀더 많은 용사들을 곁에 두어야 해. 그래야 거인족과의
숙명의 대결에 대비할 수 있지.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겠나? 지상에서 더 많은 용사들이 죽어서 내
곁으로 와야 한단 말이야. 너는 마술을 잘하니까 사람들 사이에 미움을 일으켜서 전쟁이 일어나도
록 부추기란 말야.
  프레야는 놀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오딘을 노려보았다. 오딘은 미동도 하지 않았고 말을 계속했
다.
   내 조건은 이게 전부야. 사람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전쟁은 있어야만 한다고!
  프레야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덜덜 떨고 있었다. 무섭긴 했으나 황금 목걸이를 포기할 순 
없었다. 어떻게 얻은 목걸이던가! 그녀는 나직하지만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제 목걸이를 돌려주세요.
  프레야는 황금 목걸이를 되돌려받았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프레야의 마술에 걸려 서로 미워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마도 황금 목걸이에 눈이 멀어 정조를 내팽개친 프레야처럼 사람
들도 욕심 때문에 서로를 죽일 만큼 미워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에는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고, 오딘은 그 전쟁에서 죽어넘어지는 자들을 거두어 거인과의 최후의 대
결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무너진 성벽을 세월줄 테니 프레야를 주시오!
   18개월을 주시오. 그러면 무너진 아스가르드 성벽을 이전보다 더 튼튼하게 지어드리리다.
  오딘 앞에 버티고 선 사나이는 당당하게 말했다. 아사 신족의 내로라 하는 신들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던 일이다.
  바나 신족과의 전쟁에서 파괴된 채 오랜 세월 방치된 아스가르드 성벽. 만약 그대로 내버려두면
혹시 있을지 모를 거인들의 침공에 신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신들이 수수
방관하는 것은 그만큼 성벽의 재건은 엄청난 난공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랑 말 한 필을 이끌
고 아사 신족을 방문한 이 보잘것없는 사나이가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오딘은 팔짱을 끼고 이 대담한 사나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18개월은 너무 긴 것 같네.
  그러나 사내도 물러서지 않고 배짱을 부렸다.
   그 정도 시간도 못 줄 거면 당신들끼리 잘해 보시오.
  오딘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보내버리기에는 너무 아쉬운 기회였다.
   그렇다면 아스가르드 성벽을 지어주는 대가로 뭘 바라는가?
  사내는 씩 웃으며 주위에 서 있던 신들과 여신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은 한 여
신에게 못박혔다. 그는 턱으로 그 여신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 여신을 주시오.
  신들의 시선이 그가 가리키는 여신에게 쏠렸다. 얼음물을 끼얹은 듯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사
내는 대담하게도 미의 여신 프레야를 지목했던 것이다. 바나헤임에서 온 천하절색 오딘의 아내 프
리그나 토르의 아내 시프보다도 아름다운 최고의 미녀. 모든 신 가운데 오직 오딘만이 똑바로 바
라볼 수 있는 고고한 여신, 바로 프레야였다.
  그녀가 사내의 무례한 행동에 파르르 몸을 떨자 난쟁이들로부터 받은 황금 목걸이와 황금 완장,
금줄 등이 번쩍이며 눈부신 빛을 내쏘았다.
  신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건 절대로 안 돼, 이 발칙한 녀석아!
  그러나 사내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한술 더 떠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프레야와 함께 저 하늘의 해와 달도 가져가야겠소.
  그의 조건은 사실상 신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으므로 흥정은 더 이상 진전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모사꾼 로키가 끼여들었다.
   자, 자, 우리 흥분만 할 게 아니라 이 친구 조건을 잘 생각해 봅시다. 어쨌든 아스가르드 성벽
을 지어 준다니 고마운 일 아니오?
  로키가 이렇게 니오자 오딘은 그에게 무슨 복안이 있겠거니 생각하고 당돌한 사내를 잠시 나가
있도록 했다.
  프레야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저 교활한 로키 녀석의 말 한디에 신들이 사내의 당치 않은 제안을 상의해 보기로 하다니! 경
우에 따라서는 나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거야 뭐야?
  그녀의 눈에서는 도다시 황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사내가 자리를 비켜주자 로키가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녀석의 조건을 들어주는 척하자구요. 그리고 기간을 6개월로 못박는 겁니다.
   제아무리 귀신이라도 여섯 달 만에 성벽을 완성할 수는 없을 거야.
  아스가르드의 경비대장인 헤임달이 거들자 많은 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겁니다. 하고 로키가 말했다.
   6개월을 제기해서 녀석이 못하겠다고 해도 우리는 어차피 본전이죠. 만약 녀석이 6개월을 받아
들이더라도 걱정할 건 없어요. 6개월 만에 그 일을 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놈은 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프레야와 해와 달을 내주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 이 말슴이오.
  신들은 썩 내키지는 않았으나 로키의 언변이 그럴 듯해서 그의 계책에 동의했다. 오딘은 사내를
불러 회의 결과를 통보했다.
   6개월을 주겠네. 그 시간 안에 성벽을 완성하면 프레야는 네 아내가 되고 해와 달도 네 것이
될 것이야. 내일이 겨울의 첫날이세. 내일부터 시작하도록 하되 그 누구의 도움도 받아서는 안되
네. 만약 여름의 첫날가지 성벽이 완성되지 않으면 대가는 없네. 이상이 우리의 조건이고 더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네.
   신께서는 지금 억지를 부리고 계십니다.
  사내는 불쾌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러나 오딘의 태도가 너무도 단호해서 더 이사 절충을 해볼
도리가 없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사내는 고개를 떨구며 뒤돌아 서려다가 다시 한번 프레야를 바
라보았다. 그녀의 눈부신 아름다움은 사내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오딘에게
말했다.
   6개월의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단, 내가 끌고 온 말 스발딜파리의 도움만은 받도록 해주시오.
  오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내의 표정이 절망하는 휩싸이는 순간 로키가 앞으로 나서Te.
  "참 딱도 하시구려, 오딘!
  로키는 오딘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수군거렸다.
   아니, 저까짓 말 한 마리가 뭐 대수라고 그래요? 그 말이 6개월을 18개월로 늘리기라도 한답니
까? 그 정도도 못들어주면 성벽을 조금이나마 쌓아올릴 기회마저 완전히 날려 버리는 겁니다. 받
아들이세요.
  결국 오딘은 로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많은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딘과 사내 사이에 계약
이 조인되었다. 사내는 오딘에게 성벽 건축 기간 동안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신신당부했
다. 그가 특히 우려하는 것은 신들 가운데 가장 힘이 센 토르였다. 토르는 지금 아스가르드에 없
었다. 그러나 만약 거인국으로 여행을 떠는 그가 돌아와 딴소리를 하며 사내를 윽박지르면 정말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오딘은 사내를 안심시키고 다음날부터 공사를 시작할 것을 당부했다.
  로키의 장담과는 달리 사나이는 무서운 속도로 성벽을 쌓아올렸다. 사내가 끌고 온 스바딜파리
는 엄청난 힘을 과시하며 무너진 돌들을 실어날랐고, 사내는  그 돌들을 깎고 다듬어 하났기 솜씨
좋게 쌓아나갓다. 그가 괴력을 발휘하며 일하는 모습을 본 신들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저 친구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어마어마하게 큰 거인이 변신을 한 게 틀림없어.
이러다가는 6개월 안에 성벽이 완성될지도 몰라. 아아, 불쌍한 프레야!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겨우내 사내와 말은 위아래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의 추위 속에서 밤낮없
이 일했다. 힘센 말 스바딜파리는 밤마다 채석장에서 돌을 실어서는 관목숲을 지나 공사장으로 날
랐다. 말이 그늘에서 시는 동안 사내는 돌을 쪼았다. 그러는 동안 여름이 다가오고 낮은 점점 길
어졌다. 석공이 일할 시간이 그만큼 늘어난 셈이었다.
  이제 여름이 시작되려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오딘은 은근히 걱정이 되어 공사장에 나가보았
다.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사내와 말을 보는 순간, 가면의 신 오딘도 활들짝 놀라는 표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성벽이 거의 다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입구에다 문을 다는 작업만 남아 있었다.
오딘은 거듭 애꾸눈을 비비며 보고 또 보았다. 나방이 불을 피할 수 없듯이 성벽의 완성을 피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따라서 프레야와 해, 달을 내주는 일도 불가피해 보였다.
  얼굴이 흙빛이 된 오딘은 서둘러 궁정으로 돌아와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비관적인 생각과 한
숨으로 가득 찼다. 프레야의 눈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궁전 바닥을 황금 눈물로
물결치게 했다.
  오딘은 창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누가 이 내기에 응하자고 했느냐? 누가 우리를 이토록 크나큰 위험 속으로 몰아넣었느냐? 모
두 로키 네 놈의 짓이야! 프레야가 저 야만스런 거인놈에게 시집을 가다니? 내가 몸소 하늘에다
받  놓은 저 해와 달을 놈에게 내주어야 하다니! 그날이 오면 우리는 빛과 온기를 잃고 사방을 더
듬고 다녀야 해!
  신들은 일제히 로키를 노려보았다. 로키는 앞으로 나와서 투덜거렸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계약을 하자고 한 건 나지만 그땐 모도두들 내 의견이 좋다고 했잖
아? 사태가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오딘은 벌떡 일어나 로키에게 다각T다. 그리고 이 꾀바른 신 로키의 두 어깨를 우악스런 두 손
으로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로키가 움찔하며 발악을 했다.
   이거 왜 이래!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오딘이 윽박질렀다.
   저 친구더러 말을 써도 된다고 한 놈은 너야. 네놈이 우리를 이 궁지에 빠뜨렸으니 네놈이 해
결해!
   옳소. 하는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로키, 꾀를 내. 계교를 짜내야만 해. 네놈이 꾀를 내서 거인으로 하여금 대가를 포기하게 하든
지, 아니면 네놈의 목숨을 포기하든지 하라고!
  오딘이 다시 한번 손아귀에 힘을 주자 로키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언제나 상황
판단이 빠른 로키였다.
   할수없지. 어떤 일이 있어도 놈이 푸고히도록 만들겠어.
  천하의 명마 스바딜파리는 남은 한 가지 작업을 위해 돌을 싣고 채석장을 떠났다. 이 바만 지나
면 약속한 날로부터 꼭 하루가 남는다. 그 하루면 성벽을 완성하기에는 충분했다. 스바딜파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여유 있게 공사장으로 가는 관목숲ㅇ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눈앞에 희고 매력적인 암말 한 마리가 요염한 자태로 서 있는 게 아
닌가? 한창 혈기 왕성한 종마 스바딜파리는 그만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이 암말에게 반해 버
렸다. 암말은 달빛까지 받아 더없이 아름다웠다. 게다가 스바딜파리에게 다가와 그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꼬리를 흔들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스바딜파리는 마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발걸음을 멈추었
다. msh53
  마침내 참을성을 잃은 스바딜파리는 암말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암말은 살짝 몸을 빼고 숲 속
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스바딜파리는 등에 지고 있던 돌덩어리들
마저 내팽개치고 암말을 쫓았다. 암말과 숫말의 숨바꼭질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암말을 따라잡아 운우의 정을 나눈 스바딜파리가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공
사장에 나타났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주인의 매질뿐이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
지, 간밤에 날라오기로 했던 돌만 있으면 공사 완료인데 이젠 다 틀려 버린 것이다. 전날 남아 있
던 돌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채석장으로 가서 돌을 실어오기에는 스바딜파리의
힘도 빠져고 시간도 없었다.
  사내는 밤 사이에 관목숲에 나타나 스바딜파리를 유혹한 암말은 로키가 보낸 것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그는 망연자실하여 다 되어 가는 성벽 앞에 앉아 있다가 이윽고 벌덕 일어났다. 신들이
그를 속였다는 생각을 하니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이 나쁜놈들, 모두 죽여 버리겠어!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난 사내는 더 이상 어제까지의 단순한 석공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몸이 불어났고 키는 하늘을 지를 듯이 치솟았다. 신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그는 인간이 아니라 요툰헤임에서 온 거인이었던 것이다.
  오딘은 사내가 거인이 되어 신들을 향해 쳐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침착하게 말했다.
   놈이 거인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숨겼으니 dfl도 이제 놈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지킬 필
요가 없어. 어서 가서 내 아들 토르를 불러오도록 해라.
  모험길에 나섰던 토르가 전차를 타고 급히 아스가르드로 돌아왔다. 그는 난쟁이들로부터 받은
도끼를 치켜들고 득달같이 거인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이 고생시킨 대가가 비열한 속임수냐, 이 여우 같은 놈들아! 내 너히 나라의 여신 년들을
하나도 가만 놔두지 않으리라!
  그 외침이 거인의 마지막 말이었다. 난쟁이들이 신들에게 선물한 보물 가운데 가장 가밧진 도끼
묠니르가 토르의 손에서 번쩍이는 가 싶은 순간, 석공의 머리는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졌다. 그
리고 머리를 잃은 거인의 몸은 저 멀리 북쪽의 니플헤임(서리나라)으로 곤두박칠쳤다.
  한편, 거인의 꿈을 좌절시킨 암말 사건 이후 어디론가 사라졌던 로키는 거인이 죽고 나서도 몇
달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그는 다리가 여덟 개 달린 망아지를 데리고 있었다. 거인이 부리던 말을
유혹했던 암말이 출산한 회색 망아지였다.
   이 망아지의 이름은 슬레입니르라고 지었소. 나는 내가 별 잘못을 한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오딘 당신은 아무래도 나한테 유감이 많은 것 같아서 이 망아지를 드리겠소. 이놈은 조금만 더 크
면 기인국에 있는 어떤 말보다 더 빨리 달릴 거요.
  오딘은 이 멋진 선물을 기쁘게 받으며 로키에 대한 언짢은 감정을 풀고 따듯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를 아스가르드에 다시 받아들였다. 로키는 씩 웃으며 말했다.
   이 말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요. 바다도 뛰어넘고 하늘도 날아다닐 거요. 마음만 먹
으면 주인을 태우고 지옥까지 들어 갔다가 다시 살아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하여 오딘은 프레야와 해, 달을 내주지 않고도 튼튼한 아스가르드 성벽을 얻었을 뿐만 아니
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명마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청춘의 사과가 없어지자 신들이 늙어가다
  오딘과 로키와 호니르는 종종 함께 미드가르드를 답사하곤 했다. 어느 여름날 새벽, 그들은 아
직까지 한번도 가보지 않은 지역을 찾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저곳을 답사한 끝에 저
녁 무렵에는 빙하 계곡을 타고 내려가 어느 들판에 이르렀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 몹시 시장했던 그들의 눈에 들판에서 노니는 소떼가 보였다. 평화
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안됐긴 했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중 한 마리를 잡아먹기로 했
다. 로키가 소를 쳐서 넘어뜨리고 오딘과 호니르는 주변에 널브러진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웠
다. 그들은 죽은 소를 큼직하게 조각 내어 불 속에 던져넣었다.
  고기 익는 냄새를 맡자 신들은 그만 미칠 것만 같았다. 그들은 고기가 다 익어갈 무렵 허겁지겁
불 속에서 고기를 끄집어내었다. 그러나 고기는 물컹물컹하고 아직도 핏물이 배어 나왔다.
  오딘이 고깃점을 도로 불 속에 집어던지면서 말했다.
   우리가 너무나 배고팠던 모양이야. 시간이 얼마 안 지났는데도 꽤 많이 흐른 것처럼 착각했으
니...
  로키와 호니르도 고기에서 숯부스러기를 떼어낸 뒤 다시 불 속에 던졌다.
  또다시 시간이 한참 흘렀다.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찬바람은 불어와 가뜩이나 허기
진 신들은 추위에 떨기까지 해야했다. 그들은 옷깃을 여미고 앉아서 꾹 참고 기다렸다.
  이윽고 오딘이 말했다.
   이젠 다 익었을 시간이야.
  로키가 고기를 끄집어냈다. 오딘은 고기를 이리저리 뜯어보고는 갸윳거렸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불은 잘 타고 있는데...
  호닐도 한 마디 거들었다.
   뭔가 잘못됐어.
  로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 위에 거대한 그림자다 드리워졌다. 흠
칫 놀라 올려다보자 바로 옆 참나무 가지 위에 거대한 독수리가 앉아 있었다.
   뭐야, 네넘의 짓이냐?
  로키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독수리가 징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능청을 떨었다.
   나한테 먼저 한입 주면 고기를 익혀 주지.
  오딘은 얼굴을 붉히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배고파 죽을 것 같은 판국에 달리 방도가 없었
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독수리는 새된 소리를 지르며 날개를 펄럭이더니
순식간에 나뭇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고기를 덥석 물어갔다. 한입 문다고 했지만 먹음직한 어깨와
엉덩이 부위의 살은 모조리 뜯어가 버렸다.
  화가 난 로키는 숯불을 쑤시던 나무 막대기를 번쩍 쳐들어 독수리를 냅다 후려갈겼다. 그 바람
에 독수리는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고기를 떨어뜨리더니 비명을 지르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런데 하늘로 날아오른 것은 독수리분만이 아니었다. 로키도 함께 딸려 올라갔다. 그가 휘두른
막대기는 독수리의 날갯죽지에 꽂힌 채 움직이지 않았고, 웬일인지 로키의 손에서도 떨어지려 하
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로키가 막대기에서 손을 떼려고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손은 막대기에 찰싹
달라붙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독수리가 창공으로 날아올라 로키에게 시원한 세상 구경의 기회를 준 것도 아니었다.
독수리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면서도 당에 닿을 듯 말 듯 저공비행을 했기 때문에 로키는
땅에 질질 끌려가야만 했다. 로키의 무릎과 발목은 쉴새없이 바위에 부딪쳤고, 다리와 발은 가시
덤불이 긁혀 피가 철철 흘렀다.
   살려줘!
  로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독수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제 독수리는 빙하 위를 날
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옷이 찢길 대로 찢겨 벌거숭이가 되다시피 한 로키의 몸은 빙하에 부딪치
면서 살갗마저 다 벗겨질 지경이 되었다.
   이봐, 자네를 살려줄 수도 있어. 한 가지만 약속해 준다면...
  독수리가 음흉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뭐든지 말만 해. 다 들어줄 테니 제발 목숨만 살려 달라고!
  로키는 너무나 무서워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애걸했다.
   네가 사는 아스그라드에 왜 이둔이라고 있지?
   이둔? 청춘의 사과를 가지고 있는 여신 말야?
   그렇지! 그애를 아스가르드 성 밖에르 데리고 나와. 물론 그애가 가지고 있는 사과도 함게 가
지고 와야 해!
  로키는 이제야 독수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바로 둔갑한 거인이었다. 이둔의 사과는 거인들
의 적인 신들에게 영원한 젊음과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영물이었다. 이제 이 거인 녀석이 로키를
이용하여 그 사과를 가로채 영원한 젊음을 누리려 하는 것이다.
  로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독수리는 전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낮게 내달
렸다. 로키는 종지뼈와 정강이, 발목, 발가락이 아파서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서야 다시 비명
을 질렀다.
   그래, 그랴, 약속하마! 약속할 테니 제발 살려줘!
  독수리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일주일 시간을 주겠다. 일주일 후 정오에 이둔을 무지개 다리 건너편으로
데리고 나와!
  그 순간 로키의 손은 지팡이에서 떨어졌고 그는 땅 위에 나동그라졌다. 한찬 동안 기절했던 로
키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동료들을 배신해야 하는 처지를 생각하니 몸의 상처보다도 마음이 더
아팠다. 그는 깜깜한 어둠 속을 비틀비틀 걸어서 동료들을 찾아갔다.
  잔인한 일주일이 흘렀다. 로키는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각본을 고쳐 쓴 끝에 이둔을 찾아갔다.
  그녀는 고운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집 근처 들판을 거닐고 있었다. 세상의 근심거리
나 소란 따위에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노니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천진난만한 어린아
이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청춘의 사과를 관리하는 장본인 아닌가? 그녀의 한족 팔에는
황금 사과가 가득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나 좀 봐, 이둔!
  로키가 목청껏 소리지르며 이둔을 향해 달려가자 이둔이 고개를 돌려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로키를 바라보았다. 로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흥분한 아이처럼 말했다.
   무지개 다리 건너편에서 정말 굉장한 걸 봤어. 야, 정말 내 눈을 믿지 못할 정도야. 이둔도 그
걸 보면 아마 숨이 다 막힐걸.
  이둔이 고운 눈을 흘기며 재촉했다.
   아이, 도대체 뭘 봤는데 이렇게 수선을 떨어요? 어서 말해 보세요.
   글세, 무지개 다리를 건너 미드가르드로 가려는데 말야, 다리 건너편에 있는 숲 속에 뭔가 알
수 없는 향기가 풍기는 게 아니겠어? 그래서 숲으로 들어가 봤더니 글쎄 신기하게 생긴 나무 한
그루가 은은한 빛을 내면서 서 있지 뭐야. 더 놀라운 건 그 나무에 황금 사과가 달려 있더라니까.
이둔이 들고 있는 그 바구니 속의 사과랑 똑같은 사과가 말야.
  이둔은 회색 눈동자를 크게 떴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우리 한번 가볼까? 어쩌면 그 사과들도 네 사과처럼 영원히 시들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면 위 신들을 위해 그 사과들을 따오자고.
  이둔은 해맑은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네 사과도 가지고 가. 그래야 비교해 볼 수 있을 테니까.
  로키는 이둔을 데리고 해 비치는 언덕을 가로질러 아스가르드 밖으로 나갔다. 발 밑에서 불길이
춤추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독수리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독수리는 비명을
지르는 이둔을 순식간에 낚아채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 자리에 오딘이나 토르가 있었어도 어떻
게 할 수 없었을 만큼 날랜 동작이었다.
   다, 당신은 누구세요?
  겁에 질린 이둔은 있는 힘을 다해 겨우 물었다. 독수리는 기분 나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대
답했다.
   으하하하, 나는 요툰헤임의 한쪽 끝, 트림헤임이라는 궁궐에 사는 거인 티아지 님이시다! 너만
아스가르드에서 없어지면 신들이 나이를 먹고 힘을 잃으리란 걸 알고 내가 수를 좀 섰지. 너는 그
저 그 사과와 함께 내 궁궐에 얌전히 있어 주기만 하면 되느니라. 그러면 내게는 영원토록 청춘이
보장될 테니 말이다. 우하하하...
  아스가르드에 거대한 재앙이 시작되었다. 신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초라하게 조그라들기 시작
했다. 몸도 야위어가고 충혈된 눈은 초점을 잃어갔다. 손을 떠는 신이 나타나는가 하면 어떤 신은
머리털이 다 빠져 버렸다. 또 어떤 신은 시도 때도 없이 설사를 해댔다. 신들의 몸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힘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떠들어대던 신들이 점점 말을 잃어갔다. 그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공
포가 엄습해 왔다. 그것은 바로 시간에 대한 공포였다. 신들은 늙어가는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에
새파랗게 질려 아스가르드 들판을 방황했다.
  오딘은 쭈글쭈글해지는 자신의 팔다리를 내려다보며 신들을 소집했다. 하나둘씩 모여드는 신들
의 군상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오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신과 여신을 한 명씩 유심히 살펴
보았다.
  모든 신들이 모여들었건만 두 사람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로키와 이둔이었다. 오딘은 무릎
을 탁 쳤다.
   이둔이야! 이둔이 없어져서 우리가 이렇게 늙어가는 거야. 그애가, 그애의 사과가 어디 갔는지
그걸 알아야 해! 누가 그애를 마지막으로 보았지?
  아스가르드의 경비대장 헤임달이 나섰다.
   우리 경비대의 보고에 따르면 이둔은 로키와 함께 비프로스트(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를 연결
하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다고 합니다.
  오딘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든 신과 여신이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두 짐작했겠지만 로키란 놈이 또 사고를 쳤어. 놈을 잡아오너라. 일을 저지른 놈도 로키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놈도 로키뿐이야.
  비록 힘은 떨어져 가고 있었지만 신들은 필사적으로 로키를 찾아 헤맸다. 그것만이 그들에게 힘
과 청춘을 되찾아 줄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스가르드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도저히
로키를 찾을 수 없었다. 보복이 두려워 아스가르드를 떠났을까? 그렇다면 아스가르드 밖으로 나가
로키를 수소문하고 다녀야 하는데 신들에게는 그런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  게 신들의 운명이 끝나고야 말 것인가? 모두가 절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딘가에서 낑낑
대는 로키 특유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로키는 주인이 떠나고 없는 이둔의
빈 집 뜰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녀석을 몇몇 신의 시종들이 붙잡아 오딘 앞에 대령하였
다.
  오딘은 이를 북북 갈며 로키에게 다갔다. 로키는 오딘의 눈을 피하며 독수리로 둔갑한 티아지에
게 당했던 그날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오딘, 당신도 보지 않았소? 그놈의 독수리가 얼마나 사납고 영악했는지를.
  오딘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그날 우리한테 돌아와서 사실대로 말했어야 하지 않았나? 그때 네 놈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독수리를 멋지게 혼내주고 온 것처럼 행세했어. 자, 변명 따윈 듣
고 싶지 않아. 네놈이 할 일은 단 하나뿐이야. 모든 걸 네놈이 망쳐놓기 전의 상태로 돌려놓는 거
지. 가서 이둔을 데려오란 말이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번엔 정말로 네놈의 목숨을 가만두
지 않겠어!
  로키는 이둔을 데려오기 위해서는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독수리보다 빨리 날 수 있는 능력이 필
수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프레야가 보관하고 있는 매가죽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다. 이 매가죽
은 날개가지 달려 있어서 뒤집어쓰면 매처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었다.
  로키는 오딘의 허락을 얻어 프레야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프레야건만
이젠 파파할머니가 되어 머리털은 다 빠지고 얼굴은 주름살 투성이였다. 매가죽을 꺼내주는 프레
야에게 로키는 짐짓 동정 어린 말투로 말을 붙였다.
   프레야, 당신도 대머리가 되고 보니 예전처럼 예쁘지가 않구려.
  프레야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대꾸할 수도 없을 만큼 자존심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매가죽
을 건네주는 그녀의 손은 부르르 떨렸고, 눈에서는 닭똥 같은 황금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로
키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매가죽을 뒤집어쓰고 거인국을 향해 출발했다.
  티아지가 살고 있는 트림헤임은 멀리서 보면 마치 검은 바위 위에 솟아오른 암자 같았다. 매서
운 바람이 집 주위를 몰아치다가 집안으로 사정없이 불어닥쳤다. 매가죽을 뒤집었느 로키가 이곳
에 당도했을 때 다행이 티아지와 딸 스카디는 낚시를 가고 없었다.
  이둔은 트림헤임 안의 조그만 방구석에 갇혀 있었다. 티아지는 그녀를 그 방에 가두고 방 밑 아
궁이에 땔나무를 잔뜩 집어넣고 불을 피워놓았다. 나무가 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방안 가득히
들어차서 웬만큼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그 안에 있는 이둔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로키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이둔이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그 순간, 로키는 그녀를 향해 매가
죽을 내밀며 룬 문자(북유럽의 고대 문자. 마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믿어졌다)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이둔은 순식간에 호두로 변해 버렸다. 로키는 그 호두를 발톱에 꼭 쥐고 그곳을 떠났다.
  낚시를 마치고 돌아온 티아지는 이둔이 없어진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아니, 도대체 어떤 놈이 감히 여기까지 와서 이둔을 훔쳐가? 그애가 없어지면 안돼! 기껏 청춘
을 회복했는데 이게 뭐야!
  티아지는 울부짖으며 서둘러 독수리 옷으로 갈아입고 날아올라 로키의 뒤를 쫓았다. 트림헤임에
서 아스가르드까지의 거리는 무척 멀었고 매보다는 독수리가 빨랐다. 그래서 그들이 아스가르드에
다가갈 무렵에는 티아지   로키를 거의 다 따라잡았다.
  용상에 앉아 매와 독수리의 맹렬한 추격전을 지켜보던 오딘은 사나운 두 날짐승이 아스가르드
에 다가오는 것을 보자 군사를 이끌고 성벽으로 나갔다. 그는 신들과 시종들에게 대팻밥을 아스가
르드 성벽 앞에 잔뜩 쌓아올리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독수리에게 쫓기는 매가 성벽을 넘어서
는 순간 다급하게 외쳤다.
   어서 대팻밥에 불을 붙여라!
  신들이 대팻밥에 불을 붙이자 불길은 순식간에 치솟아 올라 해를 가릴 지경이 되었다. 독수리는
눈앞에서 이 불길을 보았지만 매를 너무나 바짝 뒤쫓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멈출 수가 없
었다. 독수리의 날개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독수린ㄴ 추락하는 폭격기처럼 비명을
지르며 아스가르드에 떨어져 내렸다. 아스가르드는 피를 볼 수 없는 성역이었으므로 신들은 독수
리를 성문 밖으로 끌고 나가 죽여 버렸다.
  로키는 프레야의 매 가죽을 벗어 던졌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주변의 늙고 추한 신들의 모습은
참으로 볼 만한 광경을 제공했다. 로키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손에 쥐고 있던 호두
에다가 다시 한번 룬 문자로 주문을 외웠다. 호두는 사라지고 사과 바구니를 든 이둔이 나타났다.
그녀는 신들의 몰골을 보고는 가슴아파하며 로키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착하디착한 그녀는 사뿐한
걸음걸이로 신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에게 사과 한 개씩을 건네주었다. 아스가르드에서 사라졌
던 청춘과 활기가 다시 살아나고 웃음꽃이 활짝 피어올랐다.
 
  여름바다의 신과 겨울산의 여신이 혼인하다
  스키를 타고 눈 덮인 설원을 달리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다. 뱀의 모습
을 새겨넣은 칼과 물푸레나무 줄기로 만든 창을 한 손에 움켜쥐고 다른 한 손에는 독수리가 새겨
진 가죽 방패를 들고 있다. 그녀는 빙하와 피오르드를 넘어 신들의 나라 아스가르드를 향해 달려
가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스카디. 얼마 전에 이둔을 유괴했다가 신들에게 죽임을 당한 거인 티아지의 딸이
다. 그녀는 춥디추운 산꼭대기의 트림헤임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까지 안 돌아오시는 걸 보면 아버지는 놈들에게 비참하게 당하신 게 틀림없어.
  스키의 여왕은 그렇게 되뇌며 거인 나라와 신들의 나라를 가로질러 흐르는 이빙 강을 뛰어넘었
다. 태양이 막 지평선을 미끄러져 내려가자 서쪽 하늘이 불타올랐다.
  이둔을 되찾고 청춘을 되찾은 신들은 긴장이 풀려 날마다 축제 분위기에서 살고 있었다. 따사로
운 태양, 지저귀는 새, 파릇파릇한 풀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한창 평화를 즐기고 있는 신들에
게 헤임달이 경계 경보를 발령했다.
   비프로스트에 신원미상의 거인 출현! 완전무장을 하고 스키를 타고 있음!
  스카디가 다가온다고 헤임달이 경계경보를 내렸다. 그러나 신들은 다시는 피를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몇몇 신이 직접 나서서 스카디를 만났다.
   아버지의 죽음은 유감이오. 그 대가로 황금을 드리겠소.
  스카디는 코웃음을 쳤다.
   황금? 웃기는 소리 말아요.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부자였는지는 당신들이 오히려 더 잘 알 텐
데요.
  신들은 물었다.
   그럼 무엇으로 보상하면 되겠소?
  스카디는 신들을 죽 둘러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한 젊은 신에게서 멈추었다. 그녀는 비록 추운
나라에서 온 사나운 여전사이지만 사랑을 갈구하고 함께 살 남성을 필요로 하는 평범한 여인이기
도 했다. 그녀가 시선을 고정시킨 상대상은 발데르, 오딘의 아들이었다. 스카디는 주저없이 말했
다.
   남편을 주세요.
  신들은 당황했지만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다하여 대책을 상의했다. 결국 자
기들 중의 한 명을 스카디가 택하도록 했다. 그러나 오딘은 발데르를 보는 스카디의 시선이 예사
롭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스카디에게 마음대로 고를 자유를 줄 수는 없었다. 그
는 스카디를 불러 조선을 달았다.
   아스가르드이 총각 신들 가운데 아무나 한 명을 고르도록 해라. 단, 얼굴을 보고 고를 수는 없
다. 모두 네 앞에서 얼굴을 가리고 발을 내밀 테니 발을 보고 선택해라. 그런 다음 얼굴을 보게
해주마.
  스카디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신들은 얼굴을 두건으로
가린 채 맨발로 뜰에 정렬했고, 스카디는 주저없이 그 중에 가장 잘생긴 발을 골랐다. 가장 멋진
발데르가 발도 가장 잘 생겼을 거라고 판다했던 것이다.
   역시 눈썰미가 좋아.
  오딘은 스카디의 어깨를 톡톡 치며 칭찬의 말인지 놀리는 말인지를 모를 묘한 말투로 말을 건
넸다. 스카디는 기대에 부푼 얼굴로 발의 주인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두건을 벗어던진 상대는
뜻밖에도 발데르가 아니라 항해와 고기잡이의 신 뇨르드였다. 그의 얼굴은 오랜 바다 생활로 인해
절어 있었고 심지어는 소금냄새마저 역하게 풍겨 나왔다. 스카디는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섰다.
그 바람에 웃고 서 있던 뇨르드가 무안해했다.
  여기서 독자들은 의아한 생각이 들 것이다. 뇨르드라면 신들의 전쟁이 끝난 뒤 교환 사절로 아
스가르드에와서 살게 된 바나 신족의 신이다. 그의 슬하에는 이미 프레이르와 프레야라는 장성한
아들 딸이 있다. 그런 그가 어찌하여 총각 신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스카디의 점지를 받게 되었는
가? 그 해답은 아사 신족과 바나 신족 사이의 풍습 차이에 있다. 뇨르다가 고향에 두고 온 처는
그의 누이동생이었다. 이런 근친상간을 아사 신족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딘을 비록한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뇨르드에게 독신 생활을 강요해왔던 것이다.
   소, 속았어!
  스카디가 비명을 질렀다.
   이봐요, 로키가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봐요.
  오딘이 스카디를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을 건네자 신들 사이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얼음장같이 차가운 스카디의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오딘이 주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로키는 어디 있는가? 로키 좀 데려와!
  로키가 잔뜩 주눅이 든 채로 걸어와 스카디의 표정을 흘끔흘끔 살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고
생각할까 봐서였다.
   이봐, 자네가 책임지고 이 아가씨를 좀 웃겨보게.
  로키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스카디 앞에서 긴 가죽끈을 꺼냈다. 그리   옆에 서 있는 염
소를 가리키더니 스카디에게 추파를 보내며 말했다.
   이 염소는 제가 시장에 가서 산 놈입죠. 잘 아시다시피 염소란 놈은 제법 꾀가 바르죠.
  그는 가죽끈의 한쪽 끝을 염소의 수염에 묶었다.
   이렇게 끈 한쪽으로 염소를 묶고 보니 문제가 생겼어요. 제 두손은 모두 물건을 들고 있었거든
요. 그래서 제가 끈의 다른 쪽은 어디에 묶어야 했는지 아세요?
  스카디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어디다 묶었다는 거예요?
  로키가 엉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다 묶기는요. 이렇게 제 다리 사이에다 묶을 수밖에요!
  스카디는 낯을 붉혔다. 로키는 가죽끈 한쪽을 고리처럼 만들어 자기 음낭에다 묶었던 것이다.
염소가 풀을 뜯으려고 발걸음을 옮기는 바람에 가죽끈은 팽팽해졌다.
   마침 그때는 아침이었죠. 아주 이른 아침이었어요. 아직 쏙독새가 지저귀고 있더군요.
  로키는 손을 둥글게 해서 입에 갖다 대고 새 울음소리를 흉내내었다.
   쏙독, 쏙독, 쏙독...이얍!
  로키가 아랫도리에 힘을 주어 가죽끈을 잡아당기자 염소는 끌려 오지 않으려고 버텼다.
   음매!
   영차!
  염소와 로키 사이에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신들은 이 기상천외한 쇼를 보면서 박장대소를 했으
며 여신들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한 장면 한 장면을 놓치지 않고 훔쳐
보았다. 스카디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웃음을 참으려 애썼다. 마침내 염소가 포기하고 로키
가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갔기 때문에 로키는 반동을 못이겨 뒤로 자빠지면서 스카디의 품에 안겼
다. 스카디는 끝내 참고 있던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오딘이 주머니에서 두 개의 투명한 구슬을 꺼냈다. 스카디는 그것이 아버지의 두 눈알이라는 것
을 바로 알아보았다.
   이걸 보거라!
  오딘은 티아지의 두 눈을 하늘로 던져 올리며 말했다.
   네 아버지는 두 개의 별이 되어 너와 우리 모두를 내려다볼 것이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
지.
  뇨르드는 신접 살림을 자기 조선소가 있는 노아툰에 차리고 싶어 했다. 그런 스카디는 자기 집
인 트림헤임에서가 아니면 결혼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우겼다. 한 차례의 밀고 당기기 끝에 두 남
녀는 절충을 보았다. 아흐레 밤은 뇨르드의 조선소에서, 또 아흐레 밤은 트림헤임에서 번갈아가며
살기로 한 것이다.
  합의를 한 신혼부부는 아스가르드를 떠나 요툰헤임으로 갔다. 바위와 산비탈을 넘고 눈부신 눈
위를 지나고 황량한 벌판을 지났다. 죽음과도 같은 동토로 높이 오르면 오를수록 스카디의 기쁨은
컸다. 그러나 뇨르드는 이 얼음산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아, 끼룩기룩하는 갈매기 소리가 그립군. 저 늑대 울음소리는 정말 소름끼쳐."
  아흐레가 지나자 신혼부부는 노아툰으로 가서 아흐레를 지냈다. 스카디는 갈매기가 시끄럽게 날
아다니고 파도가 쳐대는 바다가 싫어다.
   아아, 소리없이 끓어오르며 흐르는 빙하가 그리워요. 여기서는 너무 시끄러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자겠어요. 선착장도 시끄럽긴 마찬가지고. 아아, 저 갈매기 소리!
  부부는 결혼한 지 열여드레 만에, 그러니까 서로의 집에서 한번씩 살아본 직후에 별거를 결정했
다. 자라난 환경에서 오는 습성의 차이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사랑이 많지 않았던 신과 거인 부부
는 파탄이 나버렸다. 뇨르드는 그대로 노아툼에 머물고 스카디는 요툰헤이으로 떠났다.
  그녀는 신이 나서 스키를 타고 먼 거리를 한달음에  내달렸다. 스키의 여왕은 이제 설원으로 돌
아왔다. 그녀는 어깨에 화살통을 메고 눈 내린 계곡과 들판을 누비면서 들짐승들을 사냥했다. 동
토의 여신 스카디는 가는 곳마다 상처와 죽음을 거두었다.
  뇨르드와 스카디의 결혼은 여름바다와 겨울산의 결혼, 생명과 죽음 사이의 화해였다. 그러나 결
국 이 양극은 서로를 거부하였다. 온 세상에서 삶과 죽음의 대립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풍요의 신 프레이르, 동토의 여신 게르드를 사랑하다
  프레이르의 시종 스키르니르(빛나는 자)는 주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프레이르님, 아버님(뇨르드)께서 몹시 걱정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그토
록 여위어 가시는지요? 무슨 고민이 있는 건지 제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프레이르는 넋나간 얼굴로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야아, 그녀 대문이야. 아무리 애를 써도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
  절규하는 프레이르를 보면서 스키르니르는 가슴이 아팠다. 프레이르의 아버지인 뇨르드가
거인족의 여인 스카디와의 결혼생활에서 쓴맛을 본 지 얼마나 됏다고 이번엔 그 아들이 한
여인 때문에 저 꼴이 되었는고?
   어떤 여인을 말씀하십니까? 제게 알려주십시오. 주인님만 괜찮다면 제가 가서 그 여인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스키르니르가 간곡히 청하자 프레이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이 세상에서 그녀를 나만큼 사랑해 줄 자는 없을 거야.
하지만 아무도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 주지 않을걸.
  프레이르는 넋두리를 한 뒤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는 오딘 못지않은 권위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어느날 오딘의 허락을 받아 오딘 차지인
용상 힐드스칼프에 앉아 북쪽 요툰헤임을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때마침 거인 기미르의 멋
진 저택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게르드. 마치 은빛으로 빚은
듯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저택의 문을 닫으려고 하자 갑자기 온 세상이 밝아졌다.
그 순간 프레이르는 쇠도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강한 충격을 받고 그녀를 사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거인족의 여인을 사모한다면 자네도 실망이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네. 기왕 이렇게
털어놨으니 자네에게 부탁을 좀 해야겠네. 부디 그녀의 아버지에게 가서 내 생각을 전하고
의향을 물어주게. 그리고 제발 그녀를 내 앞에 데리고 와주게.
  스키르니르는 한숨을 내쉬고 난 뒤 주인에게 말했다.
   어둠 속을 거침없이 달릴 수 있는 말을 제게 주십시오. 그리고 유사시에는 저 혼자 날아
다니면서 거인들과 싸울 수 있는 칼도 주십시오.
  프레이르는 스키르니르가 요구한 명마와 보검을 주었다. 그러나 스키르니르가 힘차게 요
툰헤임을 향해 떠난 직후 엄청난 후회가 밀어닥쳤다. 말은 몰라도 그 칼만은 프레이르가 보
관해야 하는 물건이었다. 일찍이 우르드 샘물일 지키는 운명의 여신들이 말하기를 프레이르
의 칼은 신과 거인의 최후의 대결 때 신들을 파멸로부터 지켜줄 보검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불의 나라 무스펠에서 일어나 온 세상을 불질러 버리기 위해 쳐들어올 불의 거인 수르트는
오직 그 칼로만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때늦은 프레이르의 후회를 알지 못하는 스키르니르는 힘차게 말을 몰아 이빙 강(아스가르
드와 요툰헤임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을 건넜다. 그리고는 밤새 산길을 달려 올라가니 이글
거리는 불의 장막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던 속력 그대
로 불을 뚫고 힘차게 전진했다.
  날이 밝을 무렵 그들은 잡초가 무성한 분지에 다다랐다. 이곳은 젖가슴처럼 불룩 튀어나
온 언덕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로 이 분지의 한가운데에 기미르의 저택이 있었고 그곳과
담 하나 사이로 게르드의 집도 있었다. 게르드의 집에는 사납게 생긴 두 마리의 개가 지키
고 있었다.
  스키르니르가 주변을 돌아보자 언덕 위에 목동이 한 사람 앉아 있었다. 스키르니르는 언
덕을 올라가 그에게 물었다.
   안녕하시오? 지나가는 나그넨데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당신 이렇게 높은 데서 일하다
보면 저 아래 분지에서 일어나는 일을 휜히 다 알고 있겠죠? 자, 어떻게 하면 저 개들의 아
가리를 틀어 막고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소?
  두 눈이 휘둥그레진 목동이 되물었다.
   아니, 당신 죽으려고 작정했소? 아니면 벌써 죽은 귀신이오? 세상에, 감히 기미르의 딸을
만나보겠다니! 뼈도 못 추리기 전에 어서 가던 길이나 가시구려.
  스키르니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언덕을 내려왔다. 그릭 게르드가 들으라고 목
청을 돋워 외쳤다.
   게르드, 나와! 나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놈이라고. 집 밖으로 나와 험한 세상을 떠돌
아 다니는 이상 계집애처럼 몸을 사리는 것보다는 배짱 좋게 행동하는 게 훨씬 낫다고! 내
가 죽고 사는 문제는 운명의 여신들께서 알아서 하실 문제이니까 말야.
  목청 큰 스키르니르가 떠들자 땅이 흔들리고 집이 기우뚱했다. 게르드는 그가 보통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하인을 시켜 집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사납게 생긴 개들도 여주인
의 명령이 떨어진 터라 풀이 죽은 모습으로 스키르니르를 노려보았다. 스키르니르는 그런
개들에게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고는 늘름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소복을 입은 게르드가 나타났다.
   당신은 알프헤임에서 온 난쟁이인가요, 신인가요?
  게르드의 목소리에는 소름기치는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스키르니르는 호주머니에 손을
질러 넣으면서 말했다.
   저는 불길을 뚫고 오긴했지만 난쟁이도 아니고 신도 아닙니다. 저는 위대하신 프레이르
님의 부탁을 받고 당신에게 그분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스키르니르는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안에 청춘의 사과 열한 개가 있소. 당신 프레이르 님께 가서 그분을 남편으로 부르
게 되면 이 사과들은 모두 당신 거요.
  게르드는 냉랭한 표정을 거두지 않고 대꾸했다.
   어림없는 짓! 황금 사과로 청춘을 약속한다고 해서 사랑을 살 수 있다고 믿다니! 프레이
르는 신, 나는 거인. 게다가 그분은 만물을 소생시키는 신이고, 나는 만물을 얼려 버리는 여
자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한 지붕 아래서는 살 수 없는 몸이라구요!
  스키르니르는 잇따라 선물을 제시했다.
   금팔찌도 있소이다. 오딘 님이 오래전에 난쟁이 에이트리 형제로부터 선물받은 휘황찬란
한 팔찌죠. 아흐레째마다 여덟 개의 새 팔찌가 생겨나는 보물이랍니다.
  그러나 게르드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요. 우리 집이 얼마나 부자인지 잘 모르시는구요.
  스키르니르는 작전을 바꿨다. 그는 여전히 웃음띤 얼굴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섞
여 있었다.
   그렇다면 내 손에 들고 있는 칼은 어떻소? 말을 안 들으면 이걸로 당신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수도 있소.
  게르드는 비웃음을 흘렸다.
   머리통 날리는 거 좋아하셔! 당신이 여기 있다고 아버지께 알리면 꽤나 좋아하실 걸요.
오랜만에 힘 좀 쓰게 됐으니까 말예요.
  스키르니르는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게르드를 노려보았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을 것이지, 참 한심한 아가씨로구먼. 오늘이 당신 아버님 제삿날이 될
수도 있으니까 까불지 말라구.
  스키르니르는 칼을 내려놓고 마술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수리수리 마수리! 넌 이제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독수리 언덕에 올라가 지옥 문턱을 보
고 있어야 할걸. 자꾸 구역질만 나서 아무것도 못 먹을 게다. 게다가 몰골도 흉하게 변해버
리겠지. 그런 네 모습을 보면 넌 원통하고 분해서 가슴이 갈가리 찢어질 거야. 저주스런 요
물들이 다가와 너를 사정없이 찔러댈 테지. 머리가 셋 달린 괴물거인과 살게 되겠지만 죽을
때까지 남편과 잠자리를 하지 못해. 채울 수 없는 정욕이 네 온몸을 괴롭히겠지.
  스키르니르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지팡이를 치켜들고 더욱 무서운 얼굴로 주문을 외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여인이여, 그대는 모든 신들의 분노를 사고 말았어. 거인들아,
들어라. 아스가르드의 신들도 들으소서! 이제 이 여인은 세상의 어떤 남자도 만날 수 없노
라. 세상의 어떤 남자와도 즐길 수 없으리라. 우주 나무 이그드라실 뿌리 아래에서 오줌 가
득한 뿔이 너를 짓누르리라. 아무리 목말라도 네가 마실 수 있는 건 그 오줌뿐이리니. 내 이
렇게 저주를 내리나니 합당한 이유가 있기 전에는 이 저주가 풀리지 않으리라.
  겁에 질린 게르드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그녀는 결국 스키르니르에게 굴복했다. 그에게
술을 대젒하면서 프레이르를 만나겠다고 약속했다.
   좀더 확실한 약속이 필요하오. 정확히 언제 어디서 그분을 만나시겠소?
   아름답고 평화로운 바리 숲을 아시죠? 아흐레 후에 그곳에서 그분게 저를 바치겠어요.
  스키르니르는 아침이 오기 전에 게르드의 집을 떠났다. 밤을 꼬박 새운 프레이르는 안달
이 나서 집 밖에 나와 스키르니르를 기다렸다. 그는 스키르니르가 말에서 내리기도 전에 다
그쳐 물었다.
   안장에서 내리기 전에 말해 줘! 네가 요툰헤임에서 가지고 온 것은 기쁨이냐, 슬픔이냐?
  스키르니르는 환하게 웃으며 게르드와 한 약속을 말해 주었다. 프레이르는 환희에 젖어
비명을 질렀다.
   아아, 아흐레 밤! 하룻밤도 내겐 한달 같건만. 오, 언제 그날이 오려나?
  이제 우리는 두 남녀의 아름다운 밀회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기로 하자. 겨울철 언 땅에서
보리가 싹트기 시작할 무렵, 그 땅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비친다면 바로 그곳에서 프레이
르와 게르드가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시기를.

  난쟁이 알비스, 토르의 딸을 사모하다 돌이되다.
  알비스라는 난쟁이가 있었다. 그는 토르의 딸 투르드를 사모했다. 다 알다시피 토르는 오
딘의 아들이며 천둥과 벼락의 신이다. 지하 동굴 나라에 사는 난쟁이가 그런 대단한 신의
딸을 사모한다는 것은 저주받은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알비스는 무모할 정도로 담이 큰 사내였다. 난쟁이들이 보통 그러하듯 알비스도
손재주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기
어코 토르의 딸을 아내로 삼겠노라 다짐하며 동굴을 나섰다. 산과 들을 지나 신들의 나라
아스가르드를 향 해 잰걸음으로 달려가는 알비스의 모습은 너무도 결연했다.
  알비스가 마침내 토르의 궁전에 당도한 것은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이었다. 평소 같으면
지상으로 내려가 신나게 모험을 하고 다녔을 토르는 이날따라 집안에 있었다. 다행인지 불
행인지 알비스는 토르를 알아보지 못해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난쟁이 알비스. 투르드에게 청혼하러 먼길
을 달려왔소이다. 한시라도 빨리 내 신부를 보고 싶구려. 어서 투르드를 불러내 우리의 신방
을 화사하게 빛내도록 하시오.
  토르는 이 키작은 사내의 당돌한 요청에 약간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한동안 입을 딱 벌
리고 있던 토르는 이윽고 특유의 벼락 같은 목소리로 난쟁이 알비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 하는 놈이냐? 어디서 구러먹다 온 놈이기에 그토록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
느냐? 혹시 땅 밑에서 시첼ㄹ 벗하며 지내던 놈은 아닌가?
  알비스는 조금이라도 커보이려고 뒤꿈치를 한껏 들어올렸다.
   나는 알비스. 지금까지 신들에게 많은 무기와 장신구를 만들어 바쳤소. 신들은 내게 그
대가로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했소. 이제 그 대가로 투르드를 달라는 것이니 약속을 지키
라고 하시오.
  토르는 너털웃음을 웃다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어느 신이 그런 약속을 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절대로 지키지 못할 약속 같군.
  토르는 뚜벅뚜벅 집안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말했다.
   딸을 누구에게 시집보내는가는 그아비에게 달린 일이지.
  난쟁이가 스윽 토르의 행색을 훑고 나서 윽박지르듯 말했다.
   당신 도대체 누군데 그런 소릴 하는 거요? 아니, 내가 투르드와 결혼하겠다는데 당신 같
은 촌놈이 나서서 애비가 어떻고 헛소리를 하느냐 말야. 나는 아스가르드에 당신 같은 얼드
기가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
  토르는 씩 웃더니 난쟁이가 부르르 떨 정도록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누구냐고? 최고신 오딘의 아들! 도끼를 던지는 신! 천하를 주유한 자 자네가 원하
는 투르드의 아비가 바로 날세.
  그렇잖아도 핏기가 없던 난쟁이의 얼굴이 유령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정신을 잃지는 않았다.
   아...그, 그렇소?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물러나리라고 생각하
면 오산이오. 너무도 오랫동안 투르드를 기다려 온 몸. 당신과 싸워서라도 그녀를 쟁취하겠
소. 
  토르는 잠시 팔짱을 끼고 당돌한 난쟁이를 내려다보았다. 여간한 수를 쓰지 않고서는 난
쟁이의 불타는 사랑을 잠재우지 못랄 것이 분명했다. 도끼 묠니르르 휘두르는 것도 한 가지
수이기는 하지만 딸 문제로 피를 보는 건 상서롭지 못한 일이었다 토르는 팔짱을 풀고 의뭉
스런 눈매로 알비스를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좋다, 알비스. 나는 내 딸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자와 혼인하기를 바란다. 자네가 내
묻는 말에 막힘  없이 대답한다면 내 딸과 결혼하는 걸 막지 않겠다.
  그리하여 그들 사이에 기나긴 면접 시험이 진행되었다.
  토  르 : 우리 주위에 펼쳐진 땅을 뭐라고 하는가?
  알비스 : 인간은 그것을  대지 라고 부르죠. 당신네 아사 신족은  들판 이라 하고 바나 신족
은  길 이라고 합니다.
  토  르 : 대지를 덮고 있는 저 둥근 장막은 뭐라고 하지?
  알비스 : 인간은 그것을  하늘 이라고 부르죠. 당신네 아사 신족은  고지 라 하고 바나 신족
은  구름 공장 이라고 합니다. 거인들에게는  높은 집 이고요.
  토  르 : 밤마다 떠오르는 둥근 공은?
  알비스 : 인간은 그것을  달 이라고 부르죠. 신들은  가짜 해 라고 부르고, 지옥에서는  빙빙
도는 바퀴 , 거인국에서는  발빠른 나그네 라고 불립니다...
  난쟁이 알비스는 토르의 물음 하나하나에 막힘 없이 자시의 지식을 과시했다. 그러는 사
이 어느덧  발빠른 나그네  달은 하늘을 돌아 서쪽 하늘로 사라져가고 동이 터왔다.
  토  르 : 자네처럼 많은 것을 아는 자는 처음이야. 하지만 안타깝군. 자네는 너무 많이 알
아서 탈인 걸 어떡하나?
  난쟁이는 황급히 동쪽 하늘을 돌아보았다. 태양이 떠올라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밝은 햇빛은 그를 꽁꽁 묶었다. 어두운 동구에서만 사는 난쟁
이들은 밝은 세상에서는 꼼짝못하고 돌이 되어야 한다. 알비스의 박학다식함을 이용한 토르
의 물고늘어지기는 성공을 거두었다. 알비스는 황홀한 태양 아래 몸을 내맡긴 채 돌부처가
되고 말았다.
  토르의 딸에 대한 그의 집념만큼이나 단단한 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