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없고 벽없는 집 - 노년의 눈을 빌려 인생을 배운다
영화 속 절은 물 위에 떠 있다.
호수 어느 쪽에서도 그절을 향해 배를 저어 갈 수 있지만,
스님도 방문객들도 다 담없이 서있는 문을 통해서만 들고 난다.
절 집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방에는 한가운데 부처님을 모셔 놓고, 양쪽으로 벽 없는 문이 세워져 있다.
벽이 없어 아무 데로나 다닐 법한데도 모두 문으로 들고난다.
절에서 자라는 아이는 심심하다.
호수를 건너 산으로 오른 아이는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을 잡아
그 허리에 실을 묶어 돌을 매단다.
돌을 허리에 매달고 헤엄치고 기어가는 동물들. 아이는 웃지만,
우리들 평생의 삶에 떨쳐버리지 못하고 끌고 가야 하는 그 무엇처럼
무거워 가슴이 다 내려앉는다.
그래도 그때 아이가 서 있는 산은 봄이다.
새잎이 나고 꽃이 피는 봄이다.
아이는 돌을 매단 동물들이 아파하는 것도,
자기 인생에 지고 가게 될 무거운 돌덩이도 아직 알지 못한다.
절에 요양하러 온 소녀와 사랑하게 된 소년 스님.
저쪽 문 안쪽에 누운 소녀에게로 갈때
그는 잠든 노스님의 몸을 타고 넘어, 문 아닌 뚫린 벽으로 나가 소녀의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문은 그렇게 우리들 삶이 지나가야 하는 통로이지만,
때로 비껴 가고 싶어지는 거추장스런 얽매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는 세상도, 소년의 마음도 온통 푸른 여름이었다.
절에서 자란 청년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 붙잡고 절을 떠나지만 결국
그 사랑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끊어버리고 절로 도망쳐 온다.
아이 때부터 그를 키워주신 노스님은 분노로 절절 끓는 그가 피를 토하듯 뱉어내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저 "그런데…그랬구나…" 하실 뿐이다.
그 때 세상은 가을이다.
노스님이 스스로 몸을 불살라 세상을 떠나고 오래 텅 비어있던 절에 중년의 남자가 돌아온다.
호수가 꽝꽝 얼어붙은 겨울이다.
절 앞나무 바닥에 노스님이 마음을 다스리라며 써주신 반야심경을
한자 한자 칼로 파 새겨놓고 감옥으로 갔던 남자.
그 글씨들이 그사람의 마음 바닥에도 그대로 새겨졌던가.
몸과 마음을 닦으며 절을 지키는 남자.
절을 찾은 이름 모를 여인이 두고 떠난 아기가 그 남자의 옆에 남고,
맷돌짝을 끈으로 묶어 허리에 두른 남자는 눈 덮인 산길을 넘어지고 미끄러지며 올라
산꼭대기에 부처님을 모신다.
그리고는 다시 봄이다.
아기는 자라 아이가 되고, 절 앞마루에서 머리 희끗해진 스님이 아이의 얼굴을 그려줄 때
햇살은 따스하고 포근하다.
심심한 아이는 산으로 가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의 입에 억지로 돌을 물린다.
아이는 재미있어서 터질 듯 웃어대고, 산꼭대기에 모셔진 부처님이 가만 내려다보신다.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는 일은 아주 흔하다.
영화 역시 아이에서 소년으로,청년으로,중년으로 그리고 노년으로 옮겨가는 인생의 길을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을 바탕으로 그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비록 한 평생 사는 일이 돌고 도는 원이 아니라
태어남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이라 해도 우리들 서있는 자리는 결코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인류의 시작이 있었던 저 먼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그 어느 날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는 이어질 것이며,
우리 개개인의 생이란 그 길고 긴 선 위의 아주 작은 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의 삶은
과거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미래에 존재할 사람들을 이어주는 고리와 같은 것.
원으로 도는 삶의 법칙이든 일직선상의 어느 지점이든
우리들 삶의 연속성과 찰나성에는 역시 변함이 없다.
한 남자의 인생과 그 인생을 지켜보는 또 다른 한 남자 노스님.
노스님에게도 아무 고민 없었던 아이 시절과
사랑과 질투로 아프고 피가 끓었던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며,
그 후에 그 고통과 분노를 넘어
스스로 안을 들여다보게 된 중년과 장년의 시간이 찾아 왔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노년의 텅 빈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리라.
그 시간이 있었기에 바로 옆에서 아프고 힘들게 인생을 겪어내는 그 남자를 모르는 척,
그리도 담담하게 무심한 듯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노스님이 자신의 얼굴에 뚫린 모든 구멍을 "닫을 폐,막을 폐(閉)"자가 써 있는
종이를 붙이고 세상 떠날 때, 우리들 삶의 모든 죄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기에 참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그 무엇이 있어 평범한 우리들의 죄를 막고 닫아 줄것인가.
어떤 담도 벽도 그것을 해줄 수 없기에 영화속 절에는 담이 없고, 방에는 벽이 없었을까.
그러니 스스로 문을 세울 일이다.
어디로 드나들어도 상관없는 우리 마음이지만 내가 알고 그 분이 알기에
우리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닫을 일이다.
물 위에 떠있는 절은 꿈속에서 만난 듯 아름답고,
사계절은 내가 서있는 이 계절이 어디인지를 묻는다.
인생의 계절과 자연의 계절이 함께 흘러가고 있다.
노스님 없이 한 남자의 인생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노인으로 변하며 거기에 있었더라면 그 감흥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계절을 돌아 노년의 삶에 이른 그 분의 눈이 지켜보고 있기에
함께 보는 우리들 눈도 좀 밝아졌을 것이다.
그래서 노년은 참으로 힘이 있으며 매력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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