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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전(朴氏傳)

Choi가이버 2022. 11. 17. 09:01

박씨전(朴氏傳)-연대,작자미상.


 조선조 인조 임금 때에 서울 안국동에  이름난 선비가 있었으니 성은 이요, 이름은  득춘, 자는 문초라 했다. 

대대로 나라에 충성한 집안으로 이득춘은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이조참 판, 홍문관(삼서의 하나로 경서에 관한 사무 담당)부제학(홍문관의 정삼품 벼슬)에 이르렀다.

사람이 충성과 효도를 겸하고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워 이름을 온 나라에 떨쳤다.

그  부 인 강씨는 집금오(근위장관)강창문의 딸로 현숙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젊어서  결혼하여 부 부 사이가 다정했으나 나이 사십이 되도록 자녀가 없음이 늘 근심이었다 해서 이름난 산을 찾아가 기도를 드렸으나 끝내 자식이 없었다.

이에 이공이 부인을 보고 탄식했다.  "우리 팔 자가 복이 없어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조를 뵙겠소?" 부인이 황 송하여 사죄하기를, "제가 이씨 집안에 들어와  시부모의 사랑과 지아비의 극진한 보살핌을 입고도 이을 자식을 못 낳으니 모든 것이 저의 죄입니다. 부디 부인을 새로 얻어 저의 죄를 씻어 주소서."

이공이 듣고 부인을 위로했다. "이것은 모두 내가 복이 없는  것이니 어찌 부 인을 나무라겠소."

그리곤 부인과 의논하여 금강산 명월암으로  들어가 정성껏 칠일 기도를 드렸다.

하루는 이공이 책상에 의지하여  잠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흰 수염을 나부끼며 들어오더니 말하기를, "그대의 정성이  지극함에 하늘이 감동하시어  아들을 주시니 귀하게 길러 나라에 큰 공을 세우게 하라." 하며 소매 안에서 구슬을 하나 꺼내 주었다. 이 공이 받 고 감사의 뜻을 말하려고 했더니 노인은 간 곳이 없었다.  

이어 구슬이 변하여 사내 아이가 되어 안방으로 아장아장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공이 놀라  문득 깨어보니 한바탕 꿈이었 다. 크게 이상하게 여긴 이공은 즉시  내실로 들어가 부인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한 꿈을 꾸었는데 참으로 신기하오." 부인은 이공의 꿈  얘기를 다 듣자 웃으며 말했다.  "저도 방금 그러한 꿈을 꾸었으니 참으로 신기하옵니다." 이공이 크게 기뻐하여 부인의 손을 잡고 웃었다.

과연 그 달부터 부인은 태기가 있더니 어느덧 날이 열 달이 찼다.

하루는 부인이 피곤하 여 자리에 누웠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다.

이 순간, 하늘에서 성스러운  빛이 내리비치며 옥같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이 아이는 하늘의 별로, 세상에 내려와 그대 의 집안을 빛낼 것이오.

그리고 이 아이의 짝이 될 사람은 금강산에 있으니 부디 하늘의 정 하심을 어기지 마시오."

이공 부부가 크게 기뻐하며 아기를  보니 꿈에 보았던 아이와 똑같 았다. 때는 갑진년(1604년)사월 십칠 일  오전 여덟 시였다. 이공이  크게 기뻐하여 이름을 시백이라 하고, 자를 명선이라 짓고 보물처럼 사랑했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시백의  나이 세 살이 되자 슬기와 재주가 벌써 보통 사람과 달랐다. 그 이듬해 삼월에 부인이 또 태기가 있어 딸을 낳으니 이름을 시화라 짓고 사랑스럽게 길렀다.

차츰 자라니 얼굴이 옥같이 예뻐 지고 재주가 뛰어나 소문이 자자했다. 다시 세월이 구름같이 흘러  시백의 나이 십 육 세가 되었고 시화는 십 삼 세가 되었다.

이 때에 인조 임금께서 이공의 충성스러움에 만족하시어 특별히 강원 감사(지금의 강원도 도지사)에 임명하셨다. 이공은 임금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 고 아들 시백을 데리고 부인과 딸 시화와 작별하고 임지로  떠났다.

강원 감영에 간 이공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면서 아들에게 열심히 글공부를 가르쳤다. 
 이때 금강산 상상봉에 등지고 숨어사는 한 선비가 있었으니 성은 박이요, 이름은 현옥, 호 를 유점대사라 했다. 

학문이 깊기로  유명한 선비로 그의 부인 최씨와  함께 유점사 근처에 비취정을 짓고 세월을 보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높여 비취 선생이라고도 하고, 또는 유점처사라고 했다. 

일찍이 두 딸을 두었는데 장녀는 십 칠  세였으나 얼굴이 너무 못생겨서 아직 시집도 못 가고 아우만 일찍 시집갔다. 

박처녀는 얼굴이 빌고 박색이라도 마음씨가 착하 고 공부가 끝없이 높아 세상 만물에 모르는 것이 없었다.  

박처사는 이를 기특히 여겨 딸을 매우 사랑하며 늘 칭찬이었다. 

"이 아이는 재주가 이처럼  높으니 반드시 똑똑한 사람을 짝 지어 주리라." 이런 때에 마침 이공이 강원 감사로  내려왔다는 말을 듣자 박처사는 부인을 보고 말했다. "내가 감영에 가서 이공을  만나 청혼하겠소." 부인이 놀라 물었다. 

"이감사는 유명한 집안 출신인데 어찌 시골에 묻혀 사는 집안과 인연을 맺겠습니까?" 

박처사는 웃으며 자신있게 대답했다. "부인은 염려하지 마시오. 두 아이는 하늘이 정해주신 연분이니 이 감사 도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오." 부인은 박처사의 신기한 재주를  알기 때문에 다시는 말이 없 었다.
 박처사는 즉시 나귀를 타고 감영에 이르러 군졸에게 말했다. 

"너의 감사께 손님이 왔다고 전하라." 군졸이 들어가 감사께 아뢰니 이감사는 즉시 들어오시도록 하라고  명했다. 

박처사 가 조금 후에 소박한 옷차림으로 천천히 들어오니 이 감사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 여기고 마당까지 내려가 맞이하였다. 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서로 절한 다음  박처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금강산 산골에 묻혀 사는 박현옥이라는 천한 몸이옵니다. 

이렇듯 외람되게 감사 어른을 찾아온 것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감사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박처사는 자세를 바로 하고 여쭈었다. 

"제가 하늘의 이치를 살펴본즉  아드님이 저의 딸과 천생 배필 이옵니다. 다만 부끄러운 것은 딸아이가  얼굴이 못생기고 바탕이 천하므로  감히 아드님과 짝이 될 수는 없으나 하늘이 정하신 것을 어길 수가 없어 감사께 아뢰는 바입니다." 

감사가 듣고 나서 처사의 언동이 거짓이 아님을 깨닫고 기쁜  낯으로 대답했다. 

"선생의 높고 밝으 신 뜻과 따님의 뛰어난 바탕으로 어리석은 저의 자식을 배필로 삼고자 하시니 더 없는 영광 입니다. 말씀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박 처사는  크게 기뻐하여 엎드려 절했다. 

"감사께서 는 높으신 몸으로 천한 몸의 딸을 쾌히 허락하시니 감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는 즉 시 아들 시백을 불러들여 박 처사에게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처사가 답례하고 눈을 들어보 니 참으로 영웅의 기상을 갖추고 있어 언젠가는 반드시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치리라 생각했다. "참으로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처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감사 역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아주 혼례식을 올릴 날을 정함이 어떻겠습니까?" 처사의 말 에 감사는 쾌히 응낙했다. 

이에 처사가 좋은 날을 가리니  이듬해 팔월 이십 일이 좋으므로 그 날로 정했다. 이어 주인과 손님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날이 저물었다. 그러자  처사가 몸을 일으켜 하직하고 가볍게 돌아가니 그 걸음이 바람처럼 빨랐다. 

이 감사는 아들 시백과 함께 박 처사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신기함에 탄복을 금치 못했다. "참으로 신선이로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어느덧 이듬해 봄철이 되었다. 

상감께서는  감사가 백성들을 위해 정 치를 잘함을 여기시어 이조판서와 세자빈객(세자의 스승)의  높은 벼슬을 내리시고 역말편 으로 서울로 올라오시도록 했다. 

이에  이공은 임금님의 높으신 성은에 감사하고  상경했다.
 이윽고 박처사와 언약한 날이 거의 되어서 이공이 부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부인,  원주 감 영에 내가 얼마간 있었을 때에, 금강산 박 처사의 딸과  정혼하기로 약속한 것은 부인도 이미 알 것이오. 이제 혼례일이 가가이  다가왔으니 애를 데리고 내려가서 성례하고  오겠소."
 부인이 정색하며 말했다. "혼인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대한 일인데 서로 약속하여 정혼까지 하시고 어찌 어길 수 있습니까?" 이공은 부인의 참된 마음씨에 대단히 기뻐하여 다음 날 상감께 나아가서 사연을 아뢰었다. 

이공의 말을 듣고 난 후 상감께서는 쾌히 승낙을 하셨다.
 "속히 내려가서 예식을 지내고 올라와서 안정을 찾은 다음 직책을 보살피도록 하오."하시며 게다가 상감께서 친히 금, 은, 옥 등 귀중한 보석까지 내려 주시었다.

아들과 함께 금강산 유점사  어귀에 이르러 비취정에  살고 있는 박처사의  집을 물으니, "여기에서 삼 사십 년을 살아왔지만 박처사란 이름은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하는 한결 같은 동네 사람들의 말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이 같은 말에 이공은 안타깝게 생각하며 혼 잣말로, "아들의 혼례일이 바로 내일인데 지금까지 박처사의 집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 의 딸과 시백이와의 연분이 없는 것 같구나."하고 머뭇거리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선명한 학 의 소리가 나더니 박처사가 나타나며 이공의 손을 꽉  잡고 웃으며 말하였다.

"귀하신 분이 이렇게 천한 사람을 찾으려고 누추한  곳에 오시어 여러 날을 헤매시었으니,  이 모든 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저의 집은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박 처사는 말을 끝맺고 바삐 시백의 손 을 이끌고, 이공과 함께 몇 리를 들어가자니 산길은 어지간히 험해서 발조차 붙이기가 어려 웠다. 그러나 박처사의 걸음은 어찌나 유연한지 평지를 걷는 것과 같았다.

얼마를 걷자니 빽 빽한 소나무의 숲과 이름 모를 아름다운 꽃들로 만발한 곳에 너댓 간의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보였다.

집 앞에 당도하자 대문 위에 피갈정이라는 금빛 글자로 현판을 달아 붙인게 보였다.

그들이 서당에 이르자 뜰 앞에선 백학이 짝지어 노닐고, 버드나무 위에서는 노란 꾀꼬 리가 지저귀니, 이공의 부자에겐 참으로 신선이 사는 고장인 듯 싶었다. 처사는 이공의 부자 를 인도하여 객실로 모셨다.

객실은 수많은 서적들로 장식되었으며  그 서적에서 풍기는 냄 새가 방에 가득 차 있었고 한쪽 벽에는 거문고가 세워져 있었다. 그야말로 숨어사는 선비의 거처다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처사가  이공의 부자에게 자리를 권하고 잠시  쉬게 한 다음 차를 내오게 했다. 차를 마시고 나자 곧 시녀가 저녁상을 차려 올렸다. 처사가 자시기를  권 하므로 이공이 밥상을 받고 보니 반찬은 청결하고도 소담스럽게 차려 놓아 먹음직스럽게 보 였다. 이윽고 식사를 마치고 상을 물린 후에 처사와 같이  고금의 일을 논의하고 오랜 시간 을 이야기하였다.

밤은 깊어져 처사는 안방으로 들어가고, 이공의 부자도 편히 쉬었다.

이튿 날 이공의 부자와 함께 아침을 먹고 난 뒤에 처사가  정감 있게 웃으며 말하였다. "벌써 날 이 밝았으니 시백에게 예복을 입히고 혼례를 치를 준비를  하십시오." 처사의 말을 듣자 이 공의 얼굴은 기쁨에 가득 찼다.

곧 아들에게 예복을 입혀  안채로 들어가 예식을 올리게 되었다.

시백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간 처사는 식장으로 시백을 인도하니, 신랑이  다가서서 상자 위에 기러기를 놓고 마루 위에 올라 신부와 서로 절을 한 다음 몸을 돌려 바깥채로 나왔다.

이 모습을 본 이공은 기쁨에 겨워 아들의 손을 잡고 처사에게 사례하며 말하였다. "선 생과 같은 지대한 분이 미숙한 저의 자식에게 훌륭한 따님을 내주시니 저의 부자는 그야말 로 행복에 겹습니다." 이공의 말이 끝나길 기다려 처사도 사례하며  말하였다.

"아드님의 총 명한 머리와 뛰어난 얼굴로서 딸의 몹쓸 얼굴을 대하게 되니 저는 몸둘 바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늘이 맺어 놓은 연분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 가 바라는 유일한 청이라면 상공께서는 은덕을  내리시어 딸의 미운 얼굴을 용서하시고  잘 보살펴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공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싶더니 웃으며 대답하였다. "허허, 말씀이 너무 겸양하시군요. 선생의 말씀같이 따님의 얼굴이 아름답지 못 하다 해도 여자의 보배로움은 소박하고 어진 것이 제일의 으뜸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얼 굴이 고운 여자는 기박한 운명을 타고 나기 쉬우니  선생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처사는 상 공의 말을 고맙게 듣고 술을 내다 주객이 진종일 마시며 즐기었다.
 어둑어둑 날이 저물자 저녁을 마친 뒤, 이공이 아들에게  신방으로 들라고 이르니 시백은 분부를 받잡고 신방으로 들어갔다. 시백은 신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방안의 물건이 여자의 바느질 그릇은  도대체 보이질 않고 손오병서 와 육도삼략과 같은 무술에 관한 서적만이 책장에 수북히  쌓여있기 때문이었다.

시백은 방 안의 스산한 풍경을 이상히 여겨 부자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조금 있자니까 방문이 열리며 신부가 들어오는데 키는 거의 일곱 자는 되어 보이고, 퍼진 허리는 열 아름쯤 되며,  뭉뚱한 코와 내민 이마가 둥근 눈망울에 어울려 매우 흉스럽게  보였다.

손발이 부자유스러워서 다리까지 절며, 얼굴빛은 먹칠을 해놓은 것 같고, 양쪽의 혹은 두 어깨에 늘어져 가슴께를  덮 었으니 신부의 모습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흑살천신이라는 귀신이 아니라면, 확실히 염라대 왕이 사는 곳의 우두나찰이란 귀신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신부의  흉악한 얼굴을 대하고 나니 시백은 넋이 달아나고, 거기다 역겨운 것은 신부의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연상 코를 지 르니 신랑의 비위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그만 정신없이 뛰어 나와 놀라움을 진정하지 못하자, 상공이 놀라서 물었다.

"어찌 이렇게 놀라서 단정치 못하게 뛰어 나오느냐?" 시백이 아직 진정되지 않음에 머뭇거리자니 상공이 급히 재촉하며 말하였다. "도대체 네가 무엇 때 문에 놀랜 기색으로 나왔는지 까닭을 말해 보아라."

그러자 시백은 힘없이 부친의 가슴께를 쳐다보며 여쭈었다. "소자가 신방에 들어가 방안의 모습을 이상히 여길 때쯤 신부가 들어왔 는데, 그의 몰골은 마치 지옥에나 있을 법한 검둥이 귀신같아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시백은 잠시 숨을 돌린 후 마음을 안정시키고 나서 계속 말을 이었다. "더더욱 소자의 마음이 상했 던 것은 신부의 몸에서 더러운  악취가 물씬 풍겨 비위가 거슬렸습니다.  

더 이상 마주보기 어려워 이렇게 나왔습니다." 상공이 듣고  크게 놀라서 아들의 옳지  못한 태도를 꾸짖기에 이르렀다. "네가 아무리 어리석다지만 오늘이 바로 첫날밤인데  비록 신부의 겉모양이 아름 답지 못하다 해도 무엇이 그리 놀랄 일이란 말이냐! 여자의 도리는  오직 어질고 착한 것이 으뜸이어서 얼굴이 아름답지 못함은 그리 생각할  필요가 없거늘 하물며 네가 미를  얻고자 덕을 하찮게 보는 것은 옳지 못한 행실인 줄을 모르느냐?" 상공의 노한 얼굴을 보자 시백이 황송하여 땅에 무릎을 조아려 다시 여쭈었다.

"본래 소자가  아우 하나 없어 외로왔고 단지 남매뿐이어서 좋은 아내를 만나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자녀를 낳아 뒤를 이을 본분이 여 자의 행할 도리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 여자의 거동은 말할 수 없이 이상하고 괴이하여 정 녕 마주볼 수가 없으니 이것은 필시 조물주가 시기하고 또한 하늘조차 미워하여 이런 괴물 로서 계집이라 일컬으시니, 아무리 하늘의 뜻을 어기는 행실이  되고 부모님께는 천하의 불 효가 된다 할지라도 다시는 볼 수 없사오니 저의 급박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여 주시 고 어서 바삐 상경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이 말이 끝나길  기다려 상공은 눈을 크게 부 릅뜨며 대단히 노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꾸짖기 시작하였다. "자식된  도리로 아비의 말을 손톱만큼이나 가볍게 여기고 버릇없이 말하는구나.

여자의 정숙한 덕성을 돌아보지 않고 어 여쁜 얼굴만을 요구하니 어찌 아비된 입장에서 한심스럽지 아니하며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 는가? 이제라도 너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신방으로 들어가 신부의 착하고 어진 덕에 감격 하여 잘 지내고 부디 아비의 말에 순종해라."

상공은  차츰 말소리를 낮추며 아들에게 말했 으나 아들의 태도가 수그러지지 않는 것 같아 상공은  덧붙여 다짐을 주었다. "만약에 다시 한 번 거역할 때는 부자의 인연을 완전히 끊을 것임을 명심해라." 너무도 엄격한 부친의 분 부에 시백은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다시 신방에 들어갔다.  

신부를 마주보기가 싫어서 한쪽 구석에 옷도 벗지 않고 누웠다가 새벽닭이 울기를 기다렸다. 닭이 울자 바깥채로 나와 부친 의 침소를 살피고 아침밥을 먹은 후에 또  날이 저물면 구실 삼아 신방에 들어갔다가 날이 밝으면 나왔다. 이렇게 삼 일을 간신히 보내고 날을 가려 상경하게 되었다.

처사와 이별하고 이공의 부자는 신부를 가마에 태워 출발하였다. 
 여러 날이 지난 뒤에 서울 본집에 당도하여 아들을 데리고 대청에 들어가 부인과 절을 한 다음에 다시 의관을 가다듬어 부인과 함께 신부를 맞이했다.  

신부가 단정하게 폐백을 마치 자 부인이 눈을 들어 신부를 보자니 세상에는 둘도 없을 박색이었다. 부인은 기분이 상하여 상공에게 말하였다. "어찌 저런 인물을 며느리로 삼아  살 수 있겠오?" 부인의 말에 상공의 기색이 완연히 달라지며, "부인, 신부의 외모가 아름답지는 못하나 재주가  신기하여 수많은 도법이 마음속에 가득 하다오. 

덧붙여 정숙한 덕을 지녔으니 사실상 우리 집안에 빛을 끌어 들일 인물인데 어찌해서 부인은 얼굴이 아름답지 못한 것을 시비하시오?" 부인은 상공의 엄 한 말을 듣고 더는 말을 못했다. 

조금 후에 상공이  아들과 신부에게 지시하여 사당에 올라 쌍으로 잔을 드려 조상에게 아뢰고 나서 바깥채로 나가 많은 손님을 접대하도록 했다. 날이 저물자 모든 손님들은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상공은 신부에게  제 방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도록 하라고 전했다. 이럭저럭 여러 달이 지나갔다. 

그러나 시백은 한 번도 신부 방에  들 지 않았다. 이에 상공은 크게 성내어 아들에게 이르길, "옛날에 제갈 공명의  부인인 황씨는 퍽이나 인물이 박색이었다 한다.

하지만  공명의 사랑이 두터웠고 마침내는  벼슬길에 올라 유황숙을 도와서 일을 할 때에 황부인이 여덟 가지의 둔갑술과 바람을 일으키고 또한 비를 내리는 술법을 공명에게 가르쳐 주어서 삼국에 이름을 떨치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비록 얼굴은 아름답지 못할지언정 지아비에게 내조하는  정성은 지대했단 말이다. 부디 네가 옛일을 길이 받아들여 내 어질고 착한 며느리를 박절하게 대하지 말아라."라고 심각히 꾸짖었다.

이후 시백은 상공의 분부를 거역하지 못하고 박씨의 방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백 은 한편 구석에서 옷을 입은 채로 누워 있다가 날이 밝으면  나가 버릴 뿐, 박씨에게 한 마 디의 말도 붙이지 않았다.

박씨의 마음속은 말할 수 없이  아팠지만 결코 내색할 처지도 못되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박씨가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인사를 드릴 때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망설이는 기색이 엿보이므로 상공이  인사를 받고 나서 며느리에게  물어 보았다. "무슨 할 얘기가 있느냐, 아가?" 박씨는 조심스럽게 엎드려서 상공에게  여쭈었다.

"어리석고 못난 저의 바탕으로 이처럼 귀한 집안에 들어와서 시부모님을 모시되 잘못이 너무 많아 아버님께 아뢰옵기 송구스럽사오나 저의 본성이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번잡한 곳은 매우  괴롭사옵기 에 미천한 뜻을 아뢰옵니다. 뒤뜰에다 아담한 초당을 짓고  살기가 소원이오니 허락해 주시 기 바라나이다."

상공은 불쌍한 며느리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즉시 사 람을 시켜 뒤뜰에 십여 간이나 되게 초당을 짓도록 하고 아름다운 꽃들도 많이 심어 며느리 의 마음을 펴게 하니 박씨는 상공의 배려에 감격하였다.
 이럭저럭 일을 끝마치고 좋은 날을 잡아서  계집종 계화를 데리고 초당에 이르러서  동산 안을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기이하게 생긴 아름다운 꽃들이 봄빛을 자랑하고 청학과 백학들 이 번거롭게 노닐다가 주인을 반기는 듯, 모두가 선한 정경이었다. 

박씨가 몹시 기뻐하며 계 화에게 아버님께 가서 종이 한 장을 얻어오라고 하였다. 상공은 계화의 얘기를 이상히 여겨 즉시 글공부하는 아이에게 빛이 고운 종이 한 장을 가져오게 하고 친히 가지고 초당으로 들 어갔다. 박씨는 상공이 계화와 같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뜰에 내려와 맞았다. 

"아가, 종이 한 장을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 박씨는 고개를  숙이고 차분히 여쭈었다. "이처럼 귀한 집 에 별호가 없어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공은 크게  기뻐하며 말하였다. "허허, 과연 내 며느리로고. 그대의 문필에 대한 제간을  보고 싶으니 직접 내 앞에서  쓰도록 하라. 자!
 어서." 박씨는 지시를 받고 계화에게 붓과 먹을 가져오라 하였다. 벼루에 먹을  갈아서 종이 에 내려쓰자 먹이 채 마르기도 전에 상공이  보니 필체는 신기하여 푸른 용이 나는 듯하니 그 현판에 피화정이라 씌어 있고 그 옆에 <신미년(1631년)첫 봄에 취희당을 쓰다>라고 되 어 있었다. 

상공은 박씨의 필법을 다시 한 번 읽고 나서 칭찬하여 주며 흐뭇해서  말하였다.
 "참으로 보기 드문 훌륭한 필체로다. 그대가 아버지의 재주를 온통 물려받은 듯 싶구나." 상 공이 대단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박씨는 송구스러워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칭찬에 황 송하여 절하고 그 종이를 한 번  뒤적이니 별안간 금으로 쓴 현판이 되었다.  

이 모습을 본 상공은 더욱 신기하게 여겨져 말하였다. "진실로 그대는 세상에서 드문 재주를 가졌구나. 시 백의 마음이 어리석어 대접이 몹시 심하니 어찌 한스럽지 아니할까."
 이러한 일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난 후의 어느 날 박씨는 안채에 나아가서 시부모님께 절하 고 엎드려 상공에게 여쭈었다. "내일  새벽에 종에게 명하시어 종로에  있는 개주집에 가게 되면 묶어 놓은 수십 필의 말이 있사온즉, 그 중에서 비루먹은 말을 잡고 값을 물어보면 일 곱 냥을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 말은 들은 체도 말고 돈 삼백 냥을 주고 사오라 하십시오."
 "실로 그대의 말이 이상하구나. 일곱  냥이면 살 말을 구태여 삼백  냥이나 되는 많은 돈을 주고 사오라 하니 말이다." 박씨가 대답하여 아뢰었다. "황송 하옵지만, 후일에 보시면 자연 스럽게 아실 것입니다." 박씨의 대답에 상공은 믿고 있었지만 부인이 속으로 비웃으며 상공 의 믿음에 핀잔을 했다. 

이튿날 상공은 바깥채로 나와 가장  충실한 종을 불러내어 돈 삼백 냥을 주고 지시하였다. 종은 상공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상스레  생각하기도 했지만 분부를 받들고 종로에 있는 객주집에  가 보았더니 과연 그러했다. 

말의  흥정꾼을 불러 그 중에서 비루먹은 말을 손으로 가리키며 조용히 말하였다. "저기  있는 말 값은 얼마나 합니 까?" 흥정꾼이 묘하게 생각하는 눈치더니  말했다. 

"건강한 말이 많은데  하필 연약한 말을 사려고 하십니까? 값은 일곱 냥입니다." 

"우리 영감님이  분부하시길 일곱 냥 하는 말을 삼 백 냥 주고 사오라 하시니 이 돈을 받으시고 그 말이나 제게 주시오." 

말 흥정꾼이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그 분 이상도 하시네. 일곱 냥하는 값싼 말을 어떻게 삼백 냥이나  받고 팔 수 있겠소? 절대 받을 수 없소."

상공의 종이 말하길, "이것은 우리 영감님의 분부인데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하며 삼백 냥을 억지로 주려  하니, 말 흥정꾼이 나직히 말했다.

"말 값 은 일곱 냥 내어놓고 그 남은 것은 우리  두 사람이 나누어 갖고 집에 돌아가서 삼백  냥을 다 준 것처럼 하시오." 상공의 종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고 반씩 나누어 가지고 말을 끌고 돌아오니, 상공이 나와서 말을 이끌고 뒤뜰로 나가 박씨를 불러오라고 분부했다.

박씨가  나 와서 보다가 상공에게 여쭈었다. "송구스럽지만 저 말을 도로 내다가  주라고 하십시오."

상 공은 박씨의 말이 이상해서  물어 보았다. "네  말대로 사왔는데 어째서  도로 주라고 하느 냐?" 박씨는 똑똑히 대답했다. "아버님께서는 모르고 계시겠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말 값 을 덜 주고 사왔으니 무엇에 쓸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해서 도로 내어다 주라고 하였사옵니 다." 상공이 놀라서 종에게 꾸짖었다. "너는  말 값을 얼마나 주고 사왔는지  솔직히 말하렸다." 종이 여쭈길, "영감께서 지시하신 대로 사왔나이다." 하니 박씨가 몸을 돌이켜 종을 꾸짖었다.

"아무리 네가 어리석은 상놈이지만 상전을 속이길 예사롭게 하니 어찌 통탄하지 아 니할 일인가? 네가 말 값을 흥정꾼에게 주자 그 놈의 말이 '말 값 일곱 냥만 빼어놓고 다른 나머지는 우리가 똑같이 나누어 먹자' 하니 그 말에 너의 귀가 멀어 나누어 가지고  왔거늘, 너는 나를 속이지 못할 것이다.

상전을 속인 크나큰 죄는  뒤에 다스리겠지만 어서 가서 네 가 나누어 가진 돈을 말장수에게 주고 돌아오되, 만약 늦어지면 너의 목숨은 보존하기 힘들 게 될 것이니라." 종이 박씨의 말을 듣고 나자 두렵고  겁이 나서 땅에 엎드려 백배 사죄하 고 속히 객주집에 가서 거간꾼을 보고 꾸짖어 말하였다.

"이 몹쓸 놈아, 너의 말에 솔직하여 곧이 듣고 말을 가지고 갔더니 하마터면 상전께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을 뻔했다." 말 값을 모두 합쳐서 임자를 찾아가 사연을 말하고 삼백 냥을 억지로 주고 돌아와 박씨에게 말하였 다. "전부 주고 돌아왔습니다."  박씨가 이르기를, "물러가 있거라."  하고, 상공께 여쭈었다.
 "말에게 하루 깨 한 되와 생동쌀 오 홉씩으로 죽을 쑤어서 삼 년만 먹이고 초당  앞뜰에 찬 이슬을 맞힌 다음 버려 두고 나면 쓸 곳이 꼭  있습니다." 박씨의 진중한 말에 상공은 기꺼 이 허락했다.
 벌써 삼 년이 다 되어서 하루는 박씨가 안채로  나아가 시부모님께 절하였다. 그때까지도 부인은 며느리의 얼굴이 보기 흉해서 눈썹을 찡그렸지만 항상 웃는 낯의 상공은 손까지 잡 고 며느리에게 일렀다. 

"무슨  할 얘기가 있느냐, 아가?"  박씨는 담담하게 여쭈었다. "아무 달 아무 날에 명나라 황제가 돌아간 소식을 전하려고 사신이 올 것입니다. 이번에는 기필코 믿을 만한 종을 시키시어 내일 아침에 그 말을 끌고 나가서 남대문 옆에다 세워서 두면  공 문을 가지고 오는 칙사가 보고 '저 말 값은 얼마나 됩니까?'  하고 묻거든 '말 값은 삼만 팔 천 냥이오.' 하면 그 사신이 그 값을 전부 주고 살 것입니다. 

그 말 값을 받아오라고 하십시 오." 상공은 박씨의 말을 신기하게  여겨 그의 말을 허락하고 그  이튿날 심복 종 원삼이를 불러 단단히 분부를 내리었다. "네가  이 말을 끌고 남대문 옆에  서 있으면 필시 명나라의 칙사가 이러이러 물을 것이니까 '말 값이 삼만  팔천 냥이오.' 하면 곧바로 다 치를  것이다.
 주는 대로 받아 오되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원삼이가 분부를  받들고 곧 말을 끌고 남대문 옆에서 있자니 정말로 칙사가 들어오다가 그 말을 보고는 통역관을 시켜 주기에 그대로 말 했더니 다시 묻지 않고 말 값을 다 주므로 받아 가지고 곧 돌아와 상공께 아뢰었다. 

상공은 종의 노고에 칭찬하고 후원에 들어가  박씨에게 말 값을 받아 온  것을 말하였다. "어찌 그 말 값이 그렇게도 비싼 것이냐?" "그 말은 천리를 달리는 날쌘 말이어서 조선에서는 알아보 는 사람도 없지요. 

그러나 명나라는 지방이 넓고 오래지 않아 쓸데가 많으므로 칙사는 영특 한 사람이기에 알아보고 삼만여 금의 비싼 값에도 아랑 곳 없이 사 갔사오나 조선은 지방이 좁아서 쓸 곳이 없사옵니다." 탄복한 상공이 말하였다. 

"비록 너는  여자 몸이지만 총명하여 만일 남자로 태어났다면 이 나라의 큰 기둥이 되어 보탬이 많을 것이다."
 이 시절에는 나라가 태평하여 전 백성이 즐거웠고 또 상감이 성현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드리시고 과거를 베풀어서 인재를 등용시키시니 이시백이 과거를 치르고자 온갖 준비를  갖추고 나가려 했다. 

이날 밤 박씨가 꿈을 꾸었는데 뒤뜰 연못 가운데  꽃이 활짝 핀 곳에 벌 과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옥백으로 만든 벼룻돌을 담는 그릇이  갑자기 변하더니 푸른 용이 되어 놀다가 여의주를 얻어 물고 은색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꿈이었다. 

매우 이상히 여겨져 서 날이 밝기를 기다려 연못가에 나가 보니 거짓말처럼 벼룻물을 담는 그릇이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꿈에서 본 것이었다. 

박씨는 그것을 가져다 간수하고 계화를 일렀다. "소서헌에 가서 상공께 잠시 들어오십사고 여쭈도록 해라." 즉시 소서헌에 다다른 계화는 시백에게 박 씨의 말씀을 여쭈었다. 

계화의 말을 듣고 시백은 언짢게 여기며 빈정거리듯 말했다. "도대체 무슨 큰 일이기에 여자가 대장부의 과거 공부를 지체하게 하느냐?" 계화가 돌아가서 그대로 전하니 박씨는 얼마 간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다시 계화를  보내어 일렀다. 

"무릇 여자의 도 리로써 앉아서 서방님을 오시라 함이 당돌합니다만 잠시 들어오시면 과거장에서 스실  도구 를 드릴 것이니까 한 번의 걸음을 하시기 빈다고  여쭈어라." 

박씨의 명으로 계화가 마지못 해 박씨의 전갈을 상세히 아뢰었다. 계화의 말을 전부 듣고  난 시백은 대단히 노하여서 쩡 쩡 울리는 목소리로 꾸짖었다. 

"일개의  계집이 집안에 앉아 과거  공부하는 장부를 이토록 마음 산란하게 하니 어째서 큰 소리가 안 나올 수 있겠는가?" 시백은 말을 마치자  더욱 분 함이 치밀어 올라 호령하고 계화에게 꾸짖어 말하였다. 

"시골에서 자란 너의 주인에게 일의 순서를 너무도 모른다고 분명히 전하고 여자가 되어서 어찌 장부를 마음대로 오라느니 가라 느니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내 오늘 네게 벌을 주는 것은 너의 주인을 대신하려 함이니 그 대로 전해라." 말을 마치고 매를 서른 대를 때리시니 계화가 울며 박씨에게 자기가 당한 얘 기를 서럽게 말하자 박씨도 눈물을 흘리며 일렀다. "분명히 내 죄를 너에게  내리셨구나. 이 제야 여자의 위치가 가엾다는 것을 제대로 느끼겠구나." 잠시 말을 마치고 긴 한숨을 쉰 연 후에 물을 담는 그릇을 주며 전하였다. 

"이 벼룻물을 담은 그릇으로 먹을 갈아 글을 지으면 장원 급제하여 크게 출세해서 이름이 세상에  날 것이며 부모님께는 영원한 복을  드리므로 집안이 빛날 것이며 이제 나는 서방님에게 필요 없을 테니 내 생각은 마시고 지체 높은  귀 한 집안의 아름다운 여자를 데려와 평생을 행복하게  지내시라고 여쭈어라." 

계화는 박씨의 말을 새겨듣고 그대로 전하였다. 시백이 계화의 말을 듣고 나서 벼룻물을 담는 그릇을 보니 까 세상에서 보기 드문 보배였다. 자기가 너무나 지나친 말을  한 것 같아 속으로 뉘우치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계화에게 천천히 일렀다. "아가씨께 전하여라. 

본디 나의 천성이 우 악스럽고 급해서 아가씨의 말씀을 언짢게 여기고 너에게 심히 책망하여 벌까지 주었으나 아 가씨의 성품이 워낙 온순하여 벼룻물 담는 그릇을 보내주어 과거 보는 일에까지 도움을 주 니 대단히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한 행동을 분하게 여겨서  다른 집안의 여자에게 다시 혼인하라는 말씀은 조금 지나친 말인 줄 안다고  가서 여쭈어라."

명을 받들고 계화가 다시 돌아와 박씨에게 서방님의 말씀을 낱낱이 아뢰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박씨는 아무 대 답이 없었다.
 드디어 과거 날이 되어서 시백이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글의 제목을  보고 곧바로 그 벼룻물을 담긴 물로 먹을 갈아 단숨에 써서  내놓으니 너무도 글이 잘 지어져서 고칠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시백은 맨 먼저 글을 내고 발표하기만을 초조히 기다렸다. 얼마 후  시험 관이 발표를 하는데 장원은 서울 출신 이시백이며, 그의  부친은 이조판서 이득춘이라고 크 게 소리쳐 알리었다. 

시백이 너무 기뻐 당황할 대 시험장  위에서 새로 합격한 사람들을 부 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백이 많은 사람 속에서 나와 과거 보던 곳 아래에 이르자,  상감께서 는 장원을 보셨다. 

시백의 됨됨이가 영특하고 월등한 호걸이므로  임금의 얼굴에는 기쁜 빛 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이공이 그의 아들을 두어 나라에 큰  기둥이 되게 키운 것을 칭송하 시면서 종이꽃과 남빛 옷을 내어  주셨다. 시백은 성은에 사례하고 비단  도포와 옥으로 된 띠에 뛰어난 얼굴로 풍악을 거느리고 대궐문을 나왔다. 

기운으로  불그스레 취한 동작이 참 으로 이 나라의 인재 다왔다. 

시백의  일행이 안국동 가까이 다다르자, 우선 사당에  엎드려 절하고 부모님들과 친지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또한 바깥채에서 치하하러 온 여러 손님들이 장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상공과 함께 나가보니 상공의 친구가 많이 모여 기뻐하고 치하 해 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파연곡(잔치가 끝날 때  부르는 마지막 노래)을 불렀다. 그 후 시끌시끌하던 집안이 이젠 고요해졌다. 모든  손님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  상공은 아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대간 저녁상을 물리고 촛불을 켜서 낮을 이어서 계속 즐기는데 상 공의 얼굴에 서운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마도 상공은  손님을 보기가 부끄러워 방안에만 앉아 있을 박씨를 생각하는 것 같아 보였다. 

부인이 마음이 심히 상하여서 물어 보았다. "오 늘같이 하나뿐인 아들이 과거에 급제를 해서 경사스러운 일은 평생에 두 번 다시 맛보지 못 할 것인즉 어찌하여 상공의 얼굴 빛이 그러하십니까? 혹시 그토록 추악하게 생긴 며느리가 이 자리에 없음을 서운하게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니온지요?" 상공이  침묵하여 대답하기를 꺼리는 것 같아 보이자 부인이 재촉해서 물어보았다.

 "어서 말해 보십시오?" 갑자기 상공의 얼굴빛이 엄숙해지며 일렀다. "부인, 아무리 학식이  얕고 좁다한들, 겉모양만을 중요시하고 속에 담겨진 큰 재주를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는가? 며느리의 재주는 위대하기까지 하며  옛 제갈공명의 부인인 황씨보다 크게 뛰어날 것이오. 

덕행 또한  충만하고 절개가 돋보이니 주 나라의 문왕의 아내인 태사에게도 견줄 정도이니 우리 집안에는 분에 넘치는 며느리인데 부 인의 그 속좁은 말은 우습지 아니하오?" 상공은 여전히 좋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이 때 서방님의 장원급제를 듣고서 계화는  박씨에게 기뻐 치하하고 또 탄식하여  말하였다. "아가씨! 시집오신 후로, 서방님 모습은 단 한 번도 침실에 보이지 않았었지요.

우리  아 가씨가 어질고 착한 성품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의 박대하심을 당하시어 홀로 쓸쓸히  후원 에서 많은 날들을 지내시며 집안의 모든  일에 참석하지 못하시고 근심으로 세월을  보내시 니, 저의 생각에도 아가씨를 생각할 때면 서러워짐을 느끼고 눈물까지 나옵니다."

박씨는 눈 물을 흘리며 여릿여릿 말하는 계화의  이야기를 듣고난 후 태연히  대답했다. "우리 인간의 팔자는 이미 하늘이 정하신 것이니 어찌 나의 기구한 팔자를 탓할 수 있겠느냐?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옛부터  얼굴빛이 붉은 여자와 팔자 사나 운 사람이 한 둘이 아닌고로 나 혼자만이 기구한 것이  아니느니라. 선한 이는 분수와 운명 을 받아들이고 하늘의 뜻을 기다림이 옳은 것이니, 아녀자된  도리로써 어찌 서방님의 은혜 로서 사랑하심을 생각할 수 있겠느냐? 이제 다시 이상한 말을  하지 말아라. 모르는 사람이 듣게 된다면 나의 몸가짐에 관해 천히 여길 것이 분명하다."

박씨의 넓은 마음과 어질로 정 숙한 말에 계화는 감격하였다. 이미 이 때는 박씨가 시집온 지 삼년이 되었다.
 하루는 안채에 나와 시부모님께 절하고 조용히 여쭈었다. 

"제가  시집온 지 벌써 삼 년이 다 되어 가지만 본가의 소식이 아득하니 부모님의 안부를 알고 싶어 다녀오려 하오니 어른 께서는 허락하여 주시기 비옵니다." 

상공은 며느리의 말을 듣고 대뜸 놀라서 일렀다. "네 심 정이 짐작은 간다마는 여기에서 금강산까지는 오백 리에 달하고 길도 험한데 어찌하여 네가 떠나고자 하느냐? 나이 많은 남정네도 출입하기가 어려운 곳인데 하물며 여자의 몸으로 떠 날 수 있단 말이냐?" 박씨가 숨을 죽이고  가만 있자 덧붙여서 말하였다. 

"쓸데없는 생각은 아예 먹지 말도록 해라." 그러나 박씨는 상공의 말을 듣고 송구스러운 듯이 말하였다. "물론 아버님의 말씀이 옳으신 줄 압니다만 꼭 다녀오고자 하는 심정이니 부디 허락하시고 어른들 께서는 너무 염려 마십시오." 

상공은 박씨의 지혜로움을 알고  있어서 더 이상 말리지 못하 고 승낙하고 일렀다. "너의 효성이 아름답기로  꼭 한 번 다녀오도록 할 것이다.  

내일 떠날 차비를 차려 줄 터이니 속히 다녀오도록  하여라." 다시 박씨가 여쭈었다. "저  혼자 사나흘 동안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습니다. 그런즉, 모든  차비는 필요치 않습니다." 사실 박씨의 재주가 월등함을 짐작은 하지만 그렇게 빨리 다녀올 수 있는 줄은 몰랐다. 

박씨의 신통력이 그토록 뛰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상공은 더욱 신기하게  여겨져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이튿날 시부모님께 절하고 방으로 돌아온 박씨는 계화를 불러 다짐을 주었다. "친정집에 잠 시 다녀올 테니까 너는 내가 떠난 모습을 어떤 사라에게도 소문내지 말도록 해라." 말을 끝 마치자 뜰에 내려와 서너 걸음 걷다가 몸을 구름 위로 날려 눈감짝할 사이에 금강산 비취정 에 이르러서 부모님께 절하고 문안을 드렸다. 

딸의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박처사는 슬픔이 복받쳤으나 딸의 손을 잡고 탄식하듯 말했다. 

"어언 시집 보낸 지 삼년 동안에 너의 운명에 기박함을 서러워했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하늘의 뜻이어서 방도를 찾지 못했지만 이제부터 너의 불행이 끝이 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행복이 주어질 것이다.  

이 달 십오 일에 서울 로 올라갈 터이니 너는 잠시 쉬고 가거라." 박씨는 말씀 그대로 몇 해 동안의 정을 풀며 부 모님을 모시고 있는데 처사 내외가 재촉하며 말하였다.  

"네 시아버님께서 기다릴테니 어서 돌아가서 안심시키도록 해라."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마지못해 이별을 고하고 날 이 새기를 기다려 구름을 타고 잠깐 사이에 제 방으로  돌아왔다. 

계화가 아가씨를 맞아 잘 다녀오신 것을 기뻐했다. 박씨는 옷매무새를 고쳐 입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시부모님께 인사 드리고 나서 상공께 여쭈었다. 

"천정에게 돌아올 적에 저의 아버님이 이 달 십오 일에 오신 다고 시아버지께 아뢰라고 하여 이렇게 말씀 올립니다."  상공은 알아들었다고 이르고 집안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술과 안주를 듬뿍 장만해 놓고 처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십오 일이 되자 달빛이 밝게 비치고 맑은 바람이 휙 부는 듯하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학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처사가 구름을 타고서 내려왔다. 

상공이 마당으로 내려가 처사를 맞이해서 방으로 모시고 절을 마친 다음 자리를 정하고 앉았다. 또한 시백은 옷을 가다듬어 입고 처사를 향해 절하며 여러 해 동안의  문안을 드리니 그 모양이 훤하고 의젓하게 보였다.

처사가 대단히 기뻐하고 사위의 굵은 손목을 덥석 잡으며 상공께 치하하여  말했다.

"훌 륭한 인품의 아드님이 장원 급제함을 진실로 축하드리며 높은 벼슬까지 올라가니 귀하신 집 안에 이런 경사가 또 다시 없음을 익히 알면서도 천성이 어리석어 상공께 변변히 치하 드리 지 못했더니 올해에 딸의 불행이 끝나고 지금 그 흉한 얼굴과 추한 탈을 벗을 시기가  되었 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과거에 급제한 사위를 높이  치하하고 더불어 딸아이를 보 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상공은 처사의 말에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음을 짐작하고 갑작스 런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주객이 술을 마시며 서로의 정감 있는 말을 나누기에 밤이 깊어가 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마침 닭 우는소리를 듣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어 편히 쉬고 처사는 박씨의 방에 들어갔다. 박씨는 부친을 맞아 절하고 문안까지 드리니 처사가 딸의 손을 잡으 며 남쪽을 향해서 앉혔다.

처사는 부드럽게 웃으며 박씨에게 일렀다. "비로소 오늘에야 너의 허물이 다 끝났다." 하며,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부르는 말을 줄줄 외며 소매를 들어 박씨의 얼굴을 가리키자 그다지도 흉하던 얼굴의 허물이 깨끗이 벗겨지며 옥같은 고운 얼굴의 뛰어 난 미인으로 바뀌었다. 처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박씨에게 말하였다.

"너의 이 허물을  내가 가져가고 싶다만 의문을 풀 길이 없구나. 그러니 시아버님께 잘 말씀드려 궤짝 하나를 얻어 서 시아버님과 서방에게 보여 의심을 풀게 하여라.

이제 오늘부터  너와 내가 이별한 뒤 칠 십 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지나야 우리 부녀가 다시 만나 다하지 못한 정을 풀 수밖에 없겠 구나." 처사는 아쉬운 듯 딸의 모습을  쳐다보고 바깥채로 나가서 상공과 이별하며  말했다.
 "다음에 혹시 어려운 일이라도 있으시면 며느리에게 물어 보도록 하십시오." 처사가 마당으 로 내려서 두어 걸음 걷는 것 같더니 이내 모습이 없어졌다. 상공은 신기하게 여겨졌다.
 다음 날 계화가 상공께 나아가 알렸다. "처사께서 어제  다녀가신 뒤에 저의 아가씨의 허 물이 말끔히 벗겨져 이제는 매우 아름답고 고운 부인이  되었사옵니다. 이토록 신기한 술법 이 있기에 감히 상공께 아뢰옵니다." 

말을 듣고, 상공은 기쁨에 넘쳐서 속히  후원으로 들어 가 보았다. 과연 며느리는 어여쁜 미인이  되어서 상공을 맞이했다. 입이 딱 벌어진  상공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박씨는 공손히 여쭈었다. "저에게 전생 의 죄가 너무 커서 흉칙한 허물을 쓰고 이 세상에 태어난 수십 년 동안의 불행을 겪으며 사 니 저의 처지를 하늘이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님께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도록 하라고 명하 여 이제 오셔서 제 얼굴을 되찾아 주시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저의 변한 모습에 과히 의심 하지 마십시오." 말을 듣고 난 상공은 어리둥절하여 며느리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거짓말같 이, 구슬같이 하얀 얼굴과 앵두 같은 입술에 만 가지 아름다움이 활짝 피어 이보다 예쁜 미인이 다시없어 보였다.

상공의 놀라움이 너무도 크니, 박씨가 시아버지께서 의심함을 눈치채 고 이미 벗은 허물을 내어 보이니 상공이 보고 틀림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크게 깨 달아 며느리를 향해 일렀다.

"이제야 너의 본래의 모습이 돌아와 아름다운 얼굴이 되었으니 너의 시어머니와 특히 네 서방이  기뻐할 것이다." 말을 마치고  안채로 나오려는데 박씨가 상공에게 여쭈었다.

"궤짝을 하나 주시면  이 허물을 그 속에  넣었다가 시어머님과 남편의 의심을 풀고자 합니다. 선뜻 상공은 허락하고 바깥채로 나아가 궤짝을 얻어 들여보냈다.  

박 씨는 자기의 허물을 소중히 궤짝 속에 넣어 두었다. 이때쯤 상공은 안방으로 들어가 부인과 아들에게 박씨의 얼굴이 말끔히 바뀌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부인이 믿지 아니하고 비웃으며 말하길, "어떻게 세상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래서  마음에 켕기는 무 엇이 있어서 계집종을 시켜 박씨를 부르게 했다.

전갈을 받은 박씨는 옷차림을 가다듬고 계 화에게 허물을 넣은 궤짝을 들게 하고 안방에 이르러 부인께 절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부인 이 한참동안 박씨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 허허롭게  말했다.

"별스런 일도 다 있구 나? 이럴 수가..." 부인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다시 박씨에게 말하였다.  "대체 너의 흉 한 허물은 어디로 가고 그런  아름다운 얼굴이 되었느냐?" 박씨는  엎드려 여쭈었다.

"제가 흉한 얼굴로 주제넘게 귀하신 집안에 들어온 지 이미 팔 년 동안에 시어머니께 다시없게 불 효를 했사옵고, 홀로 팔자를 원망하였더니 전생의 죄악이 끝나서  아버님이 오시어 저의 본 래 얼굴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가시면서 이르는 말씀이 벗은 허물을 궤짝 속에 넣었다가 어 머님과 아버님께 보여 드려 의심을 풀라고 하셨습니다." 박씨는 말을 마치자, 계화에게 궤짝 을 가져오라고 했다.

궤짝 속에서  허물을 내어 보이니 부인이 그것을  보고 의심을 말끔히 풀어 그제서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와 며느리의 손을 꼭 잡고 사랑하였다.
 이즈음 상감께서는 시백의 총명과 덕망을 사랑하시어 벼슬을 높여서 병조판서를 시키시니 시백은 성은에 감사드리고 크게 감격하여 집으로 돌아와 상공을  뵈었다. 

대뜸 상공이 묻기 를, "지금 너의 아내가 어떠하냐?" 시백이 송구스러워 대답을  못하자 상공이 말했다. "사람 의 잘되고 못됨은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므로 너의 지난 어리석음을 뉘우치거라. 

이제 무슨 낯으로 아내를 쳐다볼 수 있겠는가? 그런 됨됨이로 나라의 중책을 어찌 감당 해 낼지 의문이로고." 시백은 면구스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날이 저물자 박씨의 방 에 들어가니 박씨는 등불을 밝히고 얼굴빛을 엄숙히 하고 앉아 있었다. 시백은 무어라 말도 못하고 박씨가 말하기만을 기다리다가 밤이 깊어져서야 먼저  말하였다. 

"어리석은 몸이 부 인의 흉한 얼굴을 싫어하고 여러 해를 박대하였더니 하늘이 나의 처복을 도와 주셨구료. 이 제 당신의 본래 얼굴을 되찾아 세상에선 둘도 없는 미인이 되셨으니 내가 아무리 뉘우쳐도 당신을 마주볼 면목이 도저히 없소이다. 하지만 부인의 도리는 남편을 따름이 그 첫째 요인 이니 부디 부인의 이것을 생각하시어 나의 어리석었던 생각을 용서해 주시구려." 그러나 박 씨는 발끈 화를 내며 말하였다. 

"비록 인물이 추하다  하여 시집온 뒤로 시부모님을 효성껏 모시고 당신을 모시어 커다란 잘못이 없었는데 당신이 저를 안중에도 두지 않으시고 구박까 지 심하셨습니다. 

거기다가 한갓 아름다운 얼굴만을 취하시니 다시는  저 같은 사람은 생각 마십시오. 귀한 집안의 아름다운 여자를 얻어 사시고 저의 생각은 조금도 마십시오."  한 마 디 한 마디가 전부 옳은 고로 시백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더욱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모두 가 자기의 잘못이므로 아무쪼록 박씨의 마음을 달래기에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밤을 지새 며 무릎이 닳도록 사죄하니 어진 덕성을 갖춘 박씨는 시백의 끈덕진 지성에 감동하였다. 박 씨는 자기가 너무 박정히 대한 것 같아 공손히 말하였다. 

"군자의 체통이 귀하고 또한 재상 의 위신이 무거운데 어찌 철없는 젊은이와 같이 행동하십니까? 제가 본래의 얼굴을 감추고 추한 상을 보인 것은 당신의 마음을 반하게 하지 않고 한결같이 정신을 쓰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요, 여러 해 동안에 박색을 꺼려하여 말을 붙이지 못하게  한 것은 당신의 말씀을 삼가 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만 당신의 심보를 괘씸히 여겨서 한평생을 풀지 않으려 했더니 당신이 이렇게 말하심을 보니 여자의 마음인지 제 마음이 봄눈 녹듯이 풀려 이제 지난 일을 전부 잊었으니 당신은 체통을 차리십시오." 

부인의 말을 들으니 판서의 마음이 한없이 기뻐 서 박씨에게 사례하여 말했다 ."나는 세상에 어리석고 무능한  자로서 보는 눈이 좁지만 부 인은 선녀와도 비길 수 있으니 생각이 넓고 마음 또한 깊구려, 철없는 내가 어찌 부인과 사 랑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마는 부인이 내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 해 맺힌 마음을 풀어 버리고 내 이런 기쁨은 평생에게 처음인 듯 싶소이다." 박씨는 곱게 웃으며 자기의 말이 너무 지나 쳤음을 판서에게 말하고 밤이 깊도록 말하니 두 사람의 사랑은 부풀어 갔다. 

어느새 계화가 들어와 이부자리를 펴니 판서가 부인과 함께 자리에 들고 서로 깊이 사랑을 나누었다. 이에 두 내외가 서로 화합한 지 몇 달이 못되어서 아기를 배니 상공의 부부가 손자의 재롱을  볼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달이 다 되어서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상공이 산실로 들어가 뼈대 가 굵고 두 눈방울이 초롱초롱한 갓난 손자들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상공의 부부는 온갖 일을 잊고 손자들의 재롱에 시간가는 줄도 몰랐다. 이에  손자의 이름을 희기와 희인이라고 지어 손 안의 보배처럼 몹시 사랑하였다.
 이때쯤 상감께서는 판서의 총명과 어진 덕망을  아름답게 보시어 평안감사에 임명하였다.
 이에 감사가 황송하여 대궐에 나아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벼슬 이 높아진 것을 알고 일가 친척과 집안 식구들이 이  판서의 승진을 축하해 주었다. 판서는 이제 길 떠날 차비를 하며  장이를 불러 쌍가마를 꾸미라고 하자  박씨가 이상해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쌍교를 꾸미십니까?"  판서가 미소하며 말했다.  

"그것은 부인을 데려 가고자 함입니다." 박씨가 놀라며 말하였다. "장부의 몸이 나라에 맡겨지면 부모를 섬길 수 있는 날 도 적다고 하였는데 게다가 처자까지 돌보겠습니까? 제가 집에서 부모님을 성심껏 받들겠사 오니 저는 생각지 마시고 하루 속히 부임해서 나랏일을  잘 다스리십시오." 

부인의 말이 지 당하므로 이에 머리를 숙이고 사례하며 일렀다. "당연한 말이오. 내가 어리석어 늙으신 부모 님의 외로우심을 생각지 못하고 망령된 말을 했으니 곁의  사람들이 웃을까 두렵소이다. 

내 미숙함을 탓하지 마시고 두 분  어른을 봉양하십시오." 감사는 말을  마치자 부인에게 절을 하고 부인과도 섭섭한 이별을 한 후에 곧바로 대궐에 나가서 절하고 부임길에 올랐다. 

여러 날 만에 평양에 도착한 감사는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의 근심을 보살피고, 각 고을 원님들의 잘잘못을 조사해서 백성을 사랑하고 공무에 많은 힘을 쓰는 자는 나라에 알려 큰사랑을 주 게 하였다. 

또한 백성의 피를 빨아먹는 자는 파면시켜 명백하게 다스리니, 도둑은  양민으로 변하여 백성들은 편안히 살게 되어 태평가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니 도내의 백성들이 감사 의 정치에 고마움을 느끼고 거리마다 선정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축송하는 소리가 상 감께 알려지니 상감께서는 이 감사의 선한 정치를 아름답게 보시고 병조판서로  임명하시며 속히 상경하여 나랏일을 진행하라고 분부하셨다. 

왕명을 받자 이  감사는 대궐을 향해서 네 번을 절하고 서울로 올라오니 여러 고을의  원님과 수많은 백성들이 거리에 가득히  모여서 감사와 이별하기를 아쉬워하였다.
 여러 날만에 서울에 이르러 상감께 절하고 임금님의 은혜에 또 다시 감사를 드리니 임금 께서는 감사에게 칭찬을 아기지 않으셨다.  "그대가 백성을 잘 다스리고  또 사랑하는 것은 이 모두가 백성의 복이요, 나의 충실한 신하다." 하시고 손수 술잔을 들어 권하시니, 판서가 은혜에 감사하고 절하며 물러났다. 

본집에 이르러 우선 부모께  인사드리자 상공이 손을 꽉 잡으며 판서에게 말하였다. "내가 늘 너를 어리석게 여긴  것은 예전에 너의 부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그랬더니만 이제는 감사의 직분을 충실히 다해서 백성이 칭송하고  상감께서 는 네 충성을 아름답게 여기시어 높은 벼슬을 주셨으니, 이제서야 내가 바라던 아들이 되었 고 임금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고 박씨의 마땅한 지아비가 되었구나." 크게 기뻐하는 상공의 말을 듣고 판서는 황송하여 절하고 그 동안 그리웠던 생각을 말씀 드리며 부모님과 이야기 하다가 밤이 깊음을 알고 주무시도록 여쭈고 일어나 박씨의  방으로 돌아왔다. 

박씨는 몸을 일으켜 맞아들이는데 판서가 손을 꼭 잡으시며 앉히고는  정답게 말하였다. "그간 부모님을 모시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오?" 이에 박씨는 수줍게 잡힌 손을 빼며 대답했다. "어찌 그것을 고생이라 할 수 있습니까? 모두 자식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수년간 객지에서 고생한 판서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이럭저럭  이야기하다가 오랜만에 잠자리에 함 께 드니 그 정다움이란 이루 표현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명나라의 남경은 이때쯤 소란스러워서 가달이란 오랑캐의  두목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이 소식이 나라 대궐에까지 들리자, 상감은 근심이 되어 이시백을 상사(명나라로 보내는 사신)에 임명하시고 말씀하셨다. "그대와 화합이 잘되는 사람으로 군관을 삼고 날을 잡아 출발하 여라." 시백은 임경업으로 정하여 임금께 아뢰었다. 

임경업은 원래 충주 사람으로 힘이 세고 슬기가 그지없었다. 어려서 무과에 으뜸으로 뽑히고 때마침 벼슬이 철마산 군영의 대장으로 있을 때였다. 시백은 임경업을 상사군사로 삼아 중국의 남경으로 갔다. 

명나라의 황제는  조 선에서 온 사신의 이름을 듣고 황자명으로 접빈사(외국사신을  맞는 벼슬)를 삼아 맞게 했 다. 접빈사를 따라 임경업과 함께 황제 앞에 나아가 이시백이 네 번 절하고 글을 올리나 황 제가 글을 거두고 옆의 신하에게 저지하여 조선의 사신을 데리고 예부에 나아가 크게 잔치 를 베풀도록 했다. 

그때 마침 북쪽 오랑캐 사신이 이르러 글을 올리어 황제가 보시었다.  그 대충 내용은, 

 

<가달이 일어나서 우리 나라의 땅을 침략하니 그들의 군사는 너무 강해서  거 의 망하게 되었으니 황제게 간곡히 아뢰오니 한시 바삐 지원군을 보내 주시어 저희 불쌍한 백성을 살려 주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황제는 몹시  걱정하여 그곳에 보낼 장사를 선정 하려고 하자 접빈사 황자명이 아뢰었다. "조선 나라에서 온 임경업 상사군관의 얼굴을 보아 하니, 다른 나라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는 지혜와 용기를 높이 갖추어  가달을 물리칠 만한 능력이 있으므로 이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병의 최고 사령관에 정함이 옳지 않을까 생각되옵 니다." 이 말을 듣고 황제가 이시백을 불러 경업의 됨됨이를 물으니 시백이 여쭈었다. 

"경업 의 지혜가 뛰어나기는 하지만 이런 큰 중책은 이끌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백의 겸손 함을 명나라 황제는 칭찬하고 임경업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큰 칼을 손수 주며  어기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베어 죽이라고 하면서 삼만 명의 대군을 내주었다. 

임경업은 명을 받 고 물러 나와서 장병들에게 많은 연습을 시키고 대군을 이끌고 여러 날 만에 오랑캐 나라에 이르니 그곳 국왕이 경업의 용맹을 보고서 크게 기뻐하여 맞이하고 대접을 극진히 했다. 국 왕이 가달의 군대가 강함을 걱정하니 경업이 말하였다.

"국왕께서는 안심하십시오.  비록 제 가 지혜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무찌르겠습니다." 말을 끝마치고 대군을 이끌고 싸움터에 도 착했다. 무려 적군과 삼십여 번을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더니 임원수가 큰 소리를 지르며 길다란 팔을 늘이어 가달을 사로잡아 본진에 돌아오자 호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임원수 를 맞아 웃자리에 앉히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즐기었다.

임원수는 지휘대에 높이 앉아 군 사에게 호령하여 가달을 잡아들이고 뜰 앞에 꿇어 앉히고는 무섭게 꾸짖어 말하였다. "비록 네가 무식한 오랑캐이지만 너의 병력이 강한 것만을 생각하고 남의 나라를 침범하느냐?" 가 달은 땅에 엎드려 백배 사죄하며 말했다.

"무지한 저희가  하늘의 섭리를 모르고 호국을 침 략하여 장군께 죽을 죄를 지었으니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다시는 악한 마음을 먹지 않고 호 국에 복종하여 충성하겠으니 장군께서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원수는 옆 사람에게 지 시하여 묶은 것을 풀어 주고 자기 옆 자리에 오르게  해 술잔을 주며 위로하였다.

"지금 그 대의 말을 듣고 보니 진실로 그대의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므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니 또 다시 이런 부질없는 마음은 먹지 말고 하늘의 뜻대로 살아 죽을 때가지 평안을 누리도록 하라." 가달이 크게 절하고 말하였다.

"저의  죽어 마땅한 죄를 이렇게 용서하시니  제가 죽을 때까지 이 은혜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가달은 백 번 절하고 호왕과 작별하고 남은 군사를 지휘하여 제 나라로 돌아갔다. 임원수의 넓은 그릇됨을 크게 칭찬하고 호왕은 말하였다.

"이 토록 훌륭한 장군이 조선에 있는 줄은 내 미처 몰랐구나!" 경업의 탁월함을 높이 사시어 왕 조의 사위로 삼고자 하여 궁궐 안에 들어가 왕비와 의논하고 공주를 불러 경업의 사내다움 을 말하여 일렀다. :

"너의 남편감을 고르려는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 이 말에  공주는 얼굴 을 숙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정녕 아버님의 분부가 저의 전부이오나 여자의 평생을 가벼이 여길 수 없으니 소녀에게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직접 보고 말씀 드리는 것이 마땅한 줄 아 옵니다." 공주의 바른 말에 호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호왕은 다음 날 바깥채에 나가 임경업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내가 장군을 신임하여 부탁할 일이 있으니 부디 거절하지 말아 달라." 경업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대답했다."어떤 말씀 이신지요?" 호왕은 진지하게 말하였다. 

"내게 딸이 하나  있는데 장군을 내 사위로 삼고 싶 은 바 공주에게 말했더니 그 아이의 말이  제 눈으로 보아야 정할 수 있겠다기에 그러자고 했네만 자네의 생각은 어떤지 그게 알고 싶네." 

임원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삼 가 말씀대로 따르겠사옵니다." 

이 말에  호왕이 매우 기뻐하여 안채로  들어가 말을 전하고 높은 다락채에 발을 내려치고 공주를 그곳에 올려 보내니 임원수는 벌써 공주의 관상 보는 법을 직감하고 신발 속을 세 치나 헝겊으로 높이고 기다렸다. 

과연 들어오라고 하여 경업이 들어갔더니 한참 동안 위 아래를 쳐다보고 말하였다. "키는 세 치가 더 크니 앞으로 보자면 밤 하늘의 별과 같이 크게 될 인물이요, 뒤를 보자니 용봉의 모양이어서 영웅은 영웅이지만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 못내 애처롭소이다." 이 말을  듣고 난 호왕이 경업을 사위로 삼지 못하게 되자 마음 깊이 상해하며 원수에게 나가 있으라 하고 호왕이 바깥채로 나와 공주의 거절하는 뜻을 말하고 마침내 원수와 작별하게 되자 많은 보석을 상으로 주었다. 경업은 많 은 보석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감격하여 한결같이 대답했다.
 "저희 중에 한 사람도 다치지 않아서 원수의 은혜가 바다같이 깊사온데 이렇게 보물까지 나 누어주시니 이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원수의 사람됨에  모두들 감격하고 있을 때, 원수는 호왕과 작별하고 대군을 이끌고 여러 날 만에 남경에 도착하여 황제께 보고하자 황제가 크게 칭찬하여 말하였다. 

"남경에 가 이토록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이제 경업의 이 름이 세 나라에 크게 떨치니  이제 내 사랑하고 신임하는 믿을  수 있는 신하가 되었구나."
 게다가 벼슬까지 높여 주시니 경업은 머리를 숙여 감격하였다.
 한편 호왕은 이시백과 임경업을 보내고 나자 탄식하여 말하였다. "내가 조선을 쳐서 항복 을 받게 하고 우리 나라의 위엄을 말하고자 마음먹고 있었는데 의외로 가달로 인해서 임경 업을 보게 되니 그 힘이 상당히 강하여서 가볍게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겠구나." 

호왕이 마 음이 편하지 못해함을 알고 공주가 곁에 있다가 한 마디 했다. "아버님께서는 과히 근심 마 십시오. 제가 조선에 들어가서 동정을 살피고 있다가 이시백과 임경업을 죽이고오겠습니다."
 공주의 말을 듣고 나서 호왕은 마음이 풀려서 말하였다.  "본시 너의 뛰어난 지혜는 용맹스 ㅏ런 사내들도 이겨낼 지혜가 없음을 잘 아는 터이니 어찌 어리석은 근심을 하겠느냐?"  

잠시후 남장을 하고 나타난 공주에게 왕은 날카로운 칼을  주고 작별하였다. 집을 떠나기 전 에 공주는 왕비와도 작별을 고했다. 왕비는 다짐하여 말하였다.

"이제 조선 땅에 들어가거든 우선 의주와 평양 등지에서 말소리를 배우고 조선 사람들의 생활 습성을 익힌 뒤에 서울로 들어가 이시백의 집을 찾아 감쪽같이 시백을 죽이고 나서 곧 의주로 가 임경업마저 쥐도 새 도 모르게 없애 버리고 돌아와 나라에 큰 공을 세우도록 하라. 부디  몸조심하여라."

공주가 명을 받들고 곧장 길을 떠나서 조선으로 들어왔다. 먼저 평안도 의주에 이르러 이시백의 집 을 찾아 왔다.
 이즈음 하루는 박씨가 안채에서 저녁 인사를 마치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시백은 밤이 깊 어져서야 들어왔다. 박씨가 판서를 맞이하여 앉혀 드리자 아들의  무릎에 앉아 재롱을 피워 박씨와 함께 이야기 하다가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때  박씨는 엄숙하게 판서를 향 해 말했다. 

"내일 저녁때쯤 강원도 원주에서 왔다고 하면서 설중매라는 기생이 당신 서재로 찾아갈 것입니다. 만약에 그 계집의 미모에 빠져 당신의 침실에 가까이 하시면 밤중에 돌이 킬 수 없는 큰 화를 당할 것입니다. 

그 계집에게 적당히 얼버무리고 제 방으로 보내 주시면 제가 잘 처리 하겠사오니 제 말을 무심하게 여기지 마시고 큰 일을 그르치게 마십시오." 유 심히 듣고 있던 판서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허허, 그 말씀 흥미롭군요. 어찌 판서된 도리로 조그만 계집의 손에 몸을 다칠 수 있겠소." 박씨가  마음이 상하여 얼굴을 찌푸리며 강하게 말하였다. "저의 말을 당신이 믿지 않으신다면 그 계집을 후원으로 들여보내시고 상공이 그 뒤를 따라 후원에 들어오시어 그 계집아이 하는 말을 잘 생각해 보시면 제 말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에 판서가 승낙하고 박씨와 밤을 지냈다.
 이튿날 부모님께 문안드리고 관청에 들어가 나랏일을 처리하고 해가 진 후에 집으로 돌아 오니 손님들이 모여들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날이 저물어  손님들은 각자 돌아갔다. 

판서 가 저녁 상을 물리고 한가하게 앉았는데 밤이 점점 깊어지자 어느 여자가 문을 열며 살며시 들어와 절하거늘 판서가 눈을 들고 자세히 보니 대략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천하에 둘도 없는 미인이었다. 

판서가 당황해서 물었다. "대체 너는 어떤 계집이냐?" 그 여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원주에서 살고 있는 설중매라 합니다 .상공의 훌륭하심이 시골 구석까지 파 다하기에 늘 상공의 모습을 그리워하다가 사랑을 맺고자 험준한 길도 마다않고  올라왔사옵니다. 부디 상공께서는 어여삐 여겨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대뜸 판서가 대답했다. "네 말은 기특하지만 이곳에는 손님이 많이 드나드니 후원의 부인에게 가 있으면 밤이 깊은 후 손님 이 돌아가신 다음에 너를 부르도록  할 것이니라." 말을 마치자  계집종을 불러서 후원으로 인도하라 일렀다.

박씨의 방에 들어간 설중매는 박씨에게 엎드려 절하였다. 이에 박씨가  웃 으며 말하였다. "어서 올라오너라." 박씨의 말에 설중매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들어와 앉았다. 계화에게 술과 안주를 가져오도록 하여 한 잔 가득  술을 부어 주니 설중매가 황망히 말하였다. "저는 본시 술을 못하옵나니다만 부인께서 손수 따라  주시니 어찌 사양할 수 있 겠사옵니까?" 이렇게 하여 너댓 잔을 계속 마시더니 정신이 흐려져 술 기운을 이기지  못하 고 방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박씨가 살펴보자 여자의 얼굴에 살기가 스며 있어 독한 기운 이 드러나 보이므로 천천히 옷 속을  뒤져보았더니 날카로운 단도가 깊숙이 감추어져  있었 다. 박씨가 그 칼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자 그 칼이  갑자기 박씨에게 달려들므로 깜작 놀라 서 재빨리 피하고 주문을 외워 칼을 막아내고 잠깨기를  기다렸다.

설중매는 날이 밝아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곧바로 박씨가 일렀다. "어서 빨리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 말에 설중매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이 말하였다.

"본시 저는 강원도 원 주에 사는 계집으로서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의지할 곳 없어 춤과 노래를 배워서 기생이 되었는바 본국으로 돌아가라 하심은 대체 무슨 말씀이옵니까? 아가씨의 높으신 이름을 듣고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박씨가 소리를 높여 꾸짖어 말하였다. "끝내  나를 업신여기고 속이 기까지 하니 괘씸한 일이로구나! 네가 바로 호왕의 공주  기룡대가 아니란 말이냐?" 기룡대 는 너무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마가 닳도록 사죄하며 말하였다.

"부인께서는 신명 하시어 저의 본색을 꿰뚫어 보시니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부인의 말슴대로 저는 호왕의 공주로 아버님의 명을 받고 이 집에 숨어들어 왔으니 넓으신 은덕을 베푸시어 목숨만은 살 려 주시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정숙한 여인으로서의 평생을  마칠 생각입니다." 박씨가 차분히 일렀다. "과연 네가 사실을 말하여 용서해 주겠으니 이 길로 너의 나라에 돌아가 임금에 게 전하여라. 조선에 들어갔더니 이판서의 부인을 만나자마자 본색이 드러나 성공하지 못하 고 박씨가 이르길, 내가 잠시라도 조선에서 머뭇거린다면 큰 재앙을 만나게 될 것이니 하시도 지체함이 없이 돌아가서 화를  스스로 당하지 않도록 하라고  해서 돌아왔다고 하여라."
 기룡대는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엎드려 죄를 모두 고백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원하옵건 대, 제 죄를 용서하시고 무사히 저의 나라에 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씨가 무섭게 말하였다. 

"너의 국왕이 분에 넘친 욕심을 내어서 조선을 침략하려 하니 이 모 든 것은 조선의 운수가 몹시 나빠서 그렇기는 하지만 너의 군사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조선 을 쉽사리 침략할 수 없을 것이니 너는 빨리 돌아가서 상세히 말하도록 하여라." 말을 끝마 치고 기룡대에게 몇 잔의 술을 다시 먹이고 나가기를  재촉하였다. 

기룡대는 계속해서 머리 를 조아리고 사죄한 후에 하직하고 나와서 길을 찾았으나 제대로 찾지를 못하고 한참 헤매 다가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해서 말했다. 

"호국의 공주 기룡대가 조선 이시백의 집에 들어가 서 죽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기룡대의 통탄하는  모습을 보고 박씨가 물었다. "내가 그 토록 말했는데 어찌 지금가지 돌아가지 않고 그러고 있느냐?" 기룡대가 땅에 엎드려 대답했 다. "제가 부인의 은덕을 입고 돌아가려고 했사오나 삼면이 급경사의 낭떠러지여서 갈 수가 없으니, 바라옵건대 부인께서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박씨는  타이르며 말하였다. 

"그대로 너를 보내게 된다면 필시 임 장군을 죽이고 갈 것 같아서 너에게 내 솜씨를 잠시 동안 보여 준 것뿐이다." 박씨는 손을 모으며 공중을 향해서 주문을 외웠다. 

이러한 순간에  갑자기 천 둥소리와 벼락이 치며 비바람이 크게 일더니 기룡대의 몸이 저절로 날아서 눈깜짝할 사이에 호국의 궁성 뜰에 닿았다. 호왕이 크게 놀라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어찌하여  우리 아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느냐?" 한참 후에 기룡대는 의식을  차리고 여쭈었다. "하마터면 소녀는 아 버님을 다시는 못 뵐 뻔했사옵니다."  호왕이 급히 물었다. "그 말은  웬 말이냐?" 기룡대가 조선에 들어가서 겪었던 일들을 빠짐없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상세하게  아뢰었다. 왕은 놀래서 한숨을 크게 쉬고 일렀다.  

"허, 놀라운 일도 다  있구나. 이시백의 지혜로움을 높이 칭찬하였더니 그 부인 또한, 그토록 희한한 재주를 지녔구나. 비록 조선의 땅은 작으나 재주 많은 사람이 한둘이 아님을 잘 알겠구나."
 왕은 많은 신하들을 모아서 의논하며  말했다. 

"지금 내가 조선을  쳐서 항복을 받으려고 하는데 누가 앞장서서 큰공을 세우겠는가?" 호왕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뜰 아래서 두  장수 가 똑같이 아뢰어 말하는 것이었다. "신들에게 기묘한 재주는 없사오나, 군사를 맡겨 주시면 속히 조선을 쳐서 항복을 받아와 나라에 충성을 하겠나이다." 

왕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은 대장군 용골대와 그의 아우 용홀대였다. 왕은 몹시 기뻐하며  모든 신하들을 모아놓고 스스 로 황제 자리에 올라 연호를 준치 원년이라 고치고 용골대와 용홀대로 하여금 좌우 선봉장 을 삼고 군사 삼만 명을 주며 명하였다. 

"이제 동쪽으로 돌아가서 병자년(1636년)십이월 이 십 팔일에 한양성에 도착하여 나라에 커다란 공을 세워라." 호왕의 명령을 받들고 용골대의 형제가 군사들을 훈련시켜 험한 길을 떠났다. 

한편 박부인은  상공을 모시고 걱정스레 여쭈 었다. "기룡대가 혼이 나서 돌아간 뒤, 호국의 힘이 더욱 강대해져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 략하여 임경업을 죽이고 위로는 임금님께 항복을 받고자 해서 용골대의 형제들을 좌우 선봉 장으로 삼아서 북쪽으로 이십 팔일에  동대문을 깨치고 물밀 듯이 쳐들어  올 것이니, 부디 그 날을 기억하였다가 임금님을 모시고 광주산성으로 피신하시어 급히 화를 면하십시오. 뒤 의 모든 일은 제가 이곳에서 막아낼 준비를 하겠습니다."  

박씨의 침착한 말에 상공의 부자 는 알아 듣고 모든 준비를 다 마친 다음에 그 날을 초조히  기다렸다. 

드디어 십이 월 이십 사 일이 되자 시백은 임금께 진중하게 아뢰었다 "신의 아내의 말이 이 달 이십 팔  일 밤에 호국의 군대가 북쪽으로 해서 동대문을 깨치고 쳐들어 올  것이니 임금님과 대비님, 그리고 세자님 사형제를 모시고 광주산성으로 피신하게 하시어  재난을 피하라 하였습니다. 

진실로 신은 그의 신명함을 알기 때문에 감히 상감님께 아뢰옵니다." 상감은 크게 놀라며 산성으로 피난하려고 하시자 영의정 김자점과 좌의정 박운학이 아뢰었다. 

"도슨지 이시백은 평화롭게 편안한 이 때에 그런 사리에 맞지 않는 속절없는 말을 하여 임금님을 불안하게 하니 버릇없 는 이시백을 파면시킨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이에 상감께서 결정을 못짓고 머뭇머뭇 거리 는데 문득 하늘에서 선녀가 칼을 옆구리에 끼고 살며시 내려와 뜰 아래서 절을 하니 임금께 서 깜짝 놀라시며 물으셨다. "선녀는 무슨 일로  여기에 내려왔는가?" 그 선녀는 다시 절하 고 여쭈었다. "소인은 이시백의 부인 박씨의 계집종 계화이옵니다. 

박씨 부인이 제게 이르기 를 지금 임금께서 간신 김자점의 허울 좋은 말을 들으시고 머뭇거리실 테니 네가 빨리 가서 광주산성으로 옮기시도록 하라고 지시하시어 이렇게 왔사옵니다." 말을 끝마치고 칼을 칼집 에 꽂고 앞에 있는 망두석)양편에 있는 돌기둥)을 들어 내려칠 듯이 하여 김자점과 박운학 에게 겁을 주며 꾸짖어 말하였다. 

"김자점과 박운학은 들어라. 너희는 이 나라에서  가장 높 은 벼슬에 올라 있으면서도 임금님의 성은을 갚을  생각은 꿈도 안 꾸고 나라에 옳은 말을 하는 충신들을 헐뜯고 도리어 해치려 하니 너희 같은 썩어빠진 신하를 어찌 용서할 것이냐 마는 너희 죽을 기한이 아직 되지 않아서 우리 부인의 말씀이 너희들의 죄만을 나무라셨다.
 그리고 조선의 국운이 무궁하니 비뚤어진 마음을 다시 품지 말라고 하셨다." 계화의 꾸짖음 에 낯이 벌겋게 달아 오른 김자점이 슬며시 물러났다. 

계화는  다시 임금을 향해 엎드려 여 쭈었다. "만약이 이 밤을 이대로 보내시면 큰 화를 분명히 만나실 것입니다. 부디 저와 부인 의 말슴을 어기지 마시옵소서."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켜 계화는 돌아갔다. 임금은  매우 기 이히 여기시고 이시백에게 이조판서 겸 광주유수를 함께 시키시고 왕족을 호위하게 하여 산 성으로 가려고 했다. 

본래 망두석은 태조 대왕께서 임금으로 되실 때에 일등 석수들을 불러 만들어 세워놓은 것이다. 그 무게 천근도 넘어 세상에서 그것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연약한 여자가 가볍게 드는 것을 보고 조종의 높은 관리들이 전부 놀래서 짐작을 해 보았다. 그 짐작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박씨의 계집종이 저렇게 힘세니 그 주인의 신기 한 재주와 지혜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간신의 무리는 모두 물러가고 그 나머지 신하들은 임금이 타신 수레를 옹호하여 산성으로 피난갔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과연 백성들의 소문을 들으니  호의 군사가 서울에 침입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죽이고 대궐 안에 들어가 관리를 모두 목베어 죽이고 고관들과 부녀자들을 해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서울의 많은 백성들은 피난가느라 길거리를 메웠다고 했다.  임금 은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매우 놀라서 정신없는데도 불구하고 박씨 부인의 신명함과 충성스러움을 아름답게 여기시어 시백을 불러 찬양하시었다.  

이즈음 수많은 군사들을 이끌 고 한양성에 도착한 용골대는 국왕이 이미 광주로 피난했음을 알고 분해 했다. 과연 용골대 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동생 용홀대에게 서울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오천 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물밀 듯이 나아갔다; 송파를 건너서 넓은 벌판에  진을 치고 광주산성의 남대문에 에워싼 후 크게 외쳤다. 

"죽기가 두려우면 어서 문을 열고 항복하여라." 이  외침을 들은 수 문장이 바삐 뛰어 들어가서 아뢰었다.  "호장 용골대가 남문을 에워싸고  문을 열라 고함을 지르니 임금께서는 속히 군사들을 풀어 도적을 막으시옵소서."  상감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탄식하였다. "오오, 빛나는 삼백 년의 왕업이 내게 이르러 하루 사이에 몰락할 줄을 어찌 알 았겠는가. 하늘이 무심도 하구나!"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임금님의 소매는 눈물로 젖었다.
 이 모습을 보고 이시백이 침착하게 아뢰었다. "상감께서는 과히 걱정 말으소서. 이  모든 것 은 하늘의 섭리이니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

용골대가 제 아무리 강한 군사를 갖고 있다고 해도 산성의 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으니 감히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도 상감을 에워싸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곧  총소리가 천지 에 진동했다. 오랑캐가 성의 주위를  빠짐없이 에워싸고 사다리를 놓아  한꺼번에 올라와서 성 안으로 총을 쏘니 성내에는 총알이 비오듯 쏟아졌다. 

온 성의백성들이 서로가 서로를 짓 밟고 짓밟히어 다쳐서 달아나며 슬피 우는 소리에 성내는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상감이 놀 래시어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임금께서는 과히 근심마시고 적군과 화친하소서. 필시  용골대가 삼형제의 세자님을 잡아갈  것이 매우 슬픈 일이오나, 나라의 위태로움을 먼저  구하소서. 나라의 운세가 불길하여 호국의  침입을 받은 것은 모두가 하늘의 섭리이니 어쩔 도리가 없나이다. 

저는  다름 아닌 광주 유수 이시 백의 아내이옵니다. 제가 칼을 한 번 들면 용골대의 머리와  호병 삼만 명을 풀베듯이 죽겨 없애겠지만 하늘의 뜻을 어기지 못함이오니 저의 무능을  용서하시옵소서." 이 모습을 상감 이 신기히 여기시어 뜰로 내려와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칭찬하셨다.
 상감이 적군과 화친을 청하니 용골대가  세자와 왕대비를 데리고 광주를  떠났다. 이때쯤 박씨 부인은 모든 일가 친척과 충신들의  집에 통지하여 피화정으로 잠시 피신하도록  전했다.

한편으론 용골대의 아우 용홀대가 박씨 집 후원으로 들어가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 해 다른 한 편을 바라다보니 담 밖에 나무가 무성히 자라 있고 그 아래에서 수십 간이 넘는 초당이 깨끗하게 있었다.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아름다운  미녀가 다홍치마에 색옷을 어여삐 입고 앉아 있었다. 그 여자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녀의 무릎 위에는 서너 살 된 아이가 재롱을 떨고 있었다.

"도대체  저런 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 겠는가?" 용홀대는 급히 진지로 돌아가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다시 그곳에 와 보니 많은 나무들은 모두 기병으로 변하여 깃발과  창칼이 벌려 있는 것 같았다.  뜰 안으로 들어가니 진을 쳐놓은 곳에 한 미녀가 앞을 향하여 큰 소리로  말하였다.

"네가 바로 호국의 장수 용 골대의 아우 용홀대로구나. 너는 영락없는  오랑캐로 하늘의 섭리를 거역하고  남의 나라를 감히 침략하며, 또한 버릇없이  양반집의 안방에까지 무례하게 들어오니  너는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겠구나." 하며, 서서히  다가서면서 침착하게 말하였다. "내가  누군 줄 모르느냐?
 나는 다른 사람 아닌 광주 유수 이공의 부인 박씨의  계집종 계화이다. 네가 오랑캐의 선봉 이 된 그 죄로나의 손에  목없는 귀신이 될 것이니 그  인생이 참으로 불쌍하구나." 계화는 날카로운 칼을 빼들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용홀대가 자세히 바라보니  그 미인은 머리에 태 화관을 쓰고 몸에는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에는 금빛 갑사띠를 둘렀다. 거기다 가 손에는 큰 칼을 들고서 있으니 흡사 물찬 제비  같았다. 

용홀대는 눈 앞이 아찔하였으나 분함을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쳐 계화에게 말하였다. "가냘픈 여자가 상스럽지 못하게 대장 부 앞에서 감히 칼을 빼어들고 서 있느냐? 내가 대장부로서 너 하나 잡지 못하고 세상에 나 설 수 있겠느냐?" 용홀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달려들었다. 

용홀대와 계화의 칼이 사오십 번 을 부딪쳐도 승부가 속히 나지 않더니 한 번 계화의 칼이 번쩍 불을 뿜으니 용홀대의  커다 란 머리가 칼의 빛을 쫓아서 땅으로 떨어졌다. 

계화는 용홀대를  칼 끝에 꿰어 들고 좌우로 크게 흔들며 사방의 적을 위압하니  모든 장병이 넋을 잃고 한꺼번에  항복을 했다. 계화가 그 용홀대의 머리를 박씨에게 바치자 부인이 일렀다. 

"그  머리를 높은 나무의 가지에 매달 아 용골대가 제 아우의 머리를 보고 놀라게 하라." 박씨의 분부를 받들고 계화가 후원의 전 나무에 높이 달아 매었다.
 그 뒤 여러 날이 지나서 용골대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위세도 당당하게 북을 울리며 동대 문을 들어오다가 제 아우가 박씨의 계집종 계화에게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탄식하였다.

용골대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는 눈치더니 얼굴이 벌겋게 충혈되어 가지고 박씨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 큰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대체 박씨란  여자가 어떠하기에 멋모르고 대장을 죽이고 게다가 그 머리를 저 전나무 위에 매달아 놓고 겁없는 짓을 하느냐? 이제 내가 상대해 줄테니 어서 나와  내 머리도 잘라 놓아 보아라."  

용골대의 우레와 같은 음성에 박씨가 분하여 불러서 일렀다. "네가 나가서 죽이지는 말고 용골대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 어주고 오너라." 계화는 명을 받들고 해와  달, 국화의 무늬가 수놓여 있는 관을  쓰고 몸에 붉은 비단으로 치장하고 손에 석  자 정도의 칼을 들고 문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얼굴은 썩은 대추빛과 조금도 다름이 없고 눈은 가늘게 찢어져서 쳐다보기에도 오싹할 정도로 흉칙 하게 생긴 용골대가 꼼짝 않고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화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차 분히 말하였다. "용골대, 네가 호의 대장으로 위임받고 조선에 들어와서 나약한 여자에게 망 신을 당하고 돌아갈 줄은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용골대는 무섭게 눈을 부릅뜨고  벼락 같은 소리를 지르며 계화에게 말했다. "너는 한낱 천한 조선의 계집으로서 대장부를 얕보고 상스러운 말을 즐겨하니 대체 어찌된 연고인가? 내가 분명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너의 몸을 다섯 조각으로 잘라 죽여 아우의 원수를 갚아 주리라." 말을 듣고 난 계화는 용골대를 손가 락으로 가리키며 말하였다.

"네가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감히 나를 이겨내지는 못할 것이 다. 단지 우리 조선의 운세가 불길해서 너희 오랑캐에게 욕을 보이기는 하지만 너의 아우는 우리 부인의 신명한 비법으로 목이  베였다. 그로 인해 다시 나라를  빛내었으니 어떻게 그 머리를 돌려줄까 보냐. 용골대는 들어라.

옛날 조양자가 지백을 죽이고 그 머리로 오줌 그릇 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 우리 부인도 네 아우의 머리로  그 그릇을 만들어 임금님께 바쳐 서 위엄을 빛내고자 함인지도 모르겠구나.

너는 다시는 망령된 말을 그만 두고 너의 나라로 한시 바삐 돌아가는 것이 너의 생존에도 이로울 것이다."  계화는 잠시 말을 쉬었다가 계속 하였다.

"나라의 운세가 좋지 않아서 네가 세자님을 모셔가는  것을 우리 부인의 재주로 막 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왕대비님은 모셔가지  못할 터이니 그리 알고 속 히 피화정으로 모시게 하여라." 계화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만일 나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면 너의 목숨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용골대는 분함을  못 이기어 삼백 근짜리 쇠뭉치 를 들고 달려들었다.

이에 계화는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며  화단을 헤치고 달아나니 용골대 가 몰아붙이며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달아난다고 해서 네가  이 쇠뭉치에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용골대가 계화의  바로 뒤까지 쫓아오게 되자, 별안간  사방이 분간할 수 없이 어두워졌다.

계화는 쥐었던 칼을 공중에게 휘저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잠시  후 모래와 돌이 날리고 사방으로 귀신 같은 군사들이 에워싸고 들어왔다. 또한 잠깐 사이에 눈 과 비가 상당히 내려 물이 한 길도 넘었다. 용골대가  아무리 맹장이라 해도 박부인의 무서 운 재주는 당할 수 없었다.

손발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넋을 잃고 정신없이 말하였다.
 "소인이 눈은 있어도 망울은 없어 높으신 어른을 빨리 알아 보지 못하고 침략하여  천만 번 죽을 죄를 졌사옵니다. 부디 목숨만은 건져 주신다면 이 길로 제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옵니다." 계화가 큰 소리로 일렀다. "네 생각이 정녕 그렇다면 어서 왕대비님을 이곳으로 모셔와라." 용골대는 바삐 군사들을 재정비시키고 몇몇 군사를  불러 왕대비님을 피화정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용골대의 명령을 받들고 왕대비님을 피하정으로 모셔 오라고 전하니 왕대비님 은 세자를 붙드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말하였다. "너희 세 사람은  부디 몸조심하여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란다." 삼형제의 세자님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국가의 불행한 운세를 아뢰 고 계화에게 명했다.

"용골대를 풀어주어 제 나라로 돌아가게 하라." 계화가 부인의 명을 받 고 용골대에게 말하였다. "네가 돌아가는 길에 의주에 다다르면 부득이 임 장군에게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이 글을 보여 드리면 어쩔 수 없니 너를 살려 보낼 것이다." 용골대가 크 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한 다음 군사들을 이끌고 의주에 도착했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용 골대가 동쪽으로 들어와서 죄없는 백성들을 죽이고 세자님을 데려가는 것을 보고 크게 성내 었다. 그리고 혼자서 창을 들고 말 탄 채 달려들며 벼락 같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오 랑캐의 대장은 목을 내밀고 나의 칼을 받아라!" 임 장군의 노여움에 불타는 얼굴을 보고 용 골대는 겁이 나서 정신없이 말에서 내려와서는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부디 장군은 노여움 을 그치시고 이 글을 받아 보섯. " 하면서 두 손으로 글을 바쳐 올렸다. 임경업이 분을 누그 러뜨리며 칼 끝으로 받아 보니 그 글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조판서 겸 광주 유수인 이시백의 처 박씨는 임 장군께 글월을 보냅니다 .

지금 나라의 운세가 지극히 불길하여 이런 슬픈 변을 당하였으나 이는 하늘이 정한 어쩔 수 없는 운수이기 때문에 용골대가 세자님을 모셔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군은 분한 마음을 진정시키시어 용골대를 무사히 돌아가게 하 여 삼 년 후에 세자님을 편안히 돌아오게 하심이 현재로서는 해야 할 급선무입니다.

장군께 서는 부디 박씨의 말을 곧이 들어주시기 바라옵니다." 임 장군은 글을 다 읽고 나서 분함을 어지간히 누그러뜨리고 말에서 내려 세자님을 뵈옵고 피눈물을 흘렸다.

임장군은 머릴를 조 아려 서글피 말하였다. "원하옵건대 세자님들게서는 부디 슬픔을  이겨내시어 삼 년을 참으 시면 신이 죽기를 다하여 호국에 가서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세자님들은 신의 말을 가벼 이 여기지 마시고 기억해 주시옵소서." 세자는 할 말이  없어 그대로 경업과 이별하고 떠났 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감께서 왕대비님과 세자님을 호국에 보내시고 마음이 원통하시어 침식 이 불안해하시며 며칠을 계속 보냈다. 

그러나  어느 하루, 하늘에서 한 선녀가 머리에  해와 달, 국화 무늬가 수 놓여진 관을 쓰고 몸에는 비단 옷을 입고 사뿐이 내려와서 땅에 엎드리 므로 상감이 놀래서 급히 물으셨다. 

"선녀는 누구기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박씨가 다시 일어나 절하며 대답을 했다. "저는 이시백의 아내 박씨이옵니다."  상감이 놀라서 이르 기를, "그대의 슬기를 늘 칭찬하였는데 오늘에사 그대의 모습을  보니 내 마음에 큰 위로가 되는구나." 상감께서는 이렇게 말을 끝맺고 이시백을 돌아다보며 일렀다. 

"그대의 충성이 지 극하므로 저런 부인까지 두었으니 어찌 갸륵하지  않을 수 있는가?" 상감은 유수의  벼슬을 높여 세사자(세자 시 강원의 으뜸 벼슬로서 정일품)를 시키시고 박씨에게는 정경부인의 직 분을 내리셨다. 

그리고 시백의 부친 득춘에게도 보국숭록대부 겸  봉조하(평생 연금을 받는 벼슬)를 시키시고, 그 부인에게는 정경부인을 내려주시니 시백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였다

"신에게는 조금의 공도 없사온데 분에  넘치는 벼슬을 주시어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 다." 임금께서 이르셨다. "나라의 위태로움을  그대가 지탱하여 나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지 않았는가? 내가 여러번의 위험이 있을 때 그대의 부인이 나를 도와주었고 용골대의 용맹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고 왕대비님을 편히 모셨으니 이는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은공인데 조그만한 벼슬로써야 어찌 갚을 수 있겠는가?" 이어서 대궐로 돌아가시는데  가시는 거리마 다 백성들이 임금님의 행차를 마중하였다.

조용한 때를 기다려 왕대비님은 박씨의 은덕으로 피화정에서 대궐로 돌아오심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씀하시어 상감은 박시의 노고를 아름답게 여기시어 충신문을 세웠다.

그리고 피화정 옆에 한 집을  세우고 이름을 일가정이라고 정하 였다. 그리고 이곳으로 임금께서 매년 한 차례씩 춘삼월이  되면 거동하시어 꽃놀이 구경을 하시었다.

그 이후 이시백의 공덕을 더욱 아름답게 여기시어  시백에게 의정부(내각에 해당 함)우의정(의정부의 정일품 벼슬)과  대광보국숭록대부의 벼슬을 주시고  부인 박씨에게는 충렬 정경 부인의 벼슬을 주셨다. 그리고는 시백과 박씨를 매우 칭찬하셨다.
 이럭저럭 세월이 지나서 세자가 호국에 간 지 삼 년이 되니 왕대비님과 상감이 그 소식을 몰라 늘 걱정하시었다. 그래서 한 신하가  상감께 나아가 아뢰었다. "신에게는 비록  재주가 없사옵니다마는 제가 호국에게 세 세자님을 모시고 오겠사옵니다."  말을 듣고 상감께서 자 세히 보니 그는 의주부윤 임경업이었다. 

상감께서는  몹시 기뻐하시어 임경업에게 병조판서 겸 훈련 대장의 벼슬을 주시고 상사로 삼으셨다. 그리고 곧  떠나라 하시니 경업이 거듭 절 하고 감격해서 임금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수행원들과 함께 여러 날 만에 호국에 도착하 여 황문시관(내시)에게 통했다. 

왕실에 들어간 내시가 조선국 사신이 왔다고 알리니까 호왕 이 속히 들어오라고 해서 경업이  들어가 절하나 호왕이 기뻐하여  말하였다. "어떻게 수천 리 험한 길을 오게 되었느냐?" 경업이 대답하였다.

"제가 이렇게 오게된 것은 다름이 아니 오라 조선 왕이 예물을 갖추고 세자님 삼형제를 돌려 보내시기를 바라옵기에 온 것입니다."
 말을 끝맺고 많은 금은 보석과 글을 올렸다. 호왕은 글을  보자 글시가 온공하고 예물이 욕 심에 흡족하여 기뻐하며 일렀다. "과연 조선 왕은 예절을  잘 아는 임금임에는 틀림이 없구나." 호왕은 곧 이어 세자님 삼형제를 불러 일렀다.

"너희 나라에게 너희들을 데리러 사신이 왔는데 무슨 원이 있으면 한 마디씩 말해 보아라." 먼저 첫째 세자가  대답했다. "저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고 아버님이 기다리시니 오직 자식된 도리로서 하루 속히 돌아가기를 학수고 대합니다." 이어서 둘째 세자가 대답했다.

"저의 원이 있다면 여러  해만에 본국으로 돌아가 는데 혼자서만 가는 것은 옳지 않으니 이미  수백 명의 본국 백성들이 와 있사오니 그들과 함께 가기를 소망합니다."

이번에는 셋째  세자가 대답했다 ."저는 아름다운  미인을 한사람 주시면 데리고 가서 아버님께 뵈오려 합니다." 호왕은 모두의 소망을 전부 들어주었다.

경업 은 즉시 하직인사를 드리고 세자님 삼형제를 모시고 여러 날 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착 한 즉시 상감께 나아가 보고하니 먼 길에서 무사히 돌아옴을 크게 기뻐하시고 세자님 삼형 제를 불러 호국에게 여러 해 동안 고생한 일들을 물으셨다. 그리고 또 일렀다.

"그대들이 떠 나올 때 호왕이 무슨 말을 묻더냐?" 첫재는  세자가 먼저 대답하였다 ."소원을 묻기에 저는 한시 바삐 본국에 돌아가 부왕을 뵙겠다고 했사옵니다." 이어서 둘째  세자가 대답했다.

"저 의 원은 백성들을 오랑캐 땅에 두기가 분하여서  데려 가겠다고 청했사옵니다." 상감께서는 둘째 세자를 크게 칭찬하시고 일렀다. "그대는 한 나라의  생명을 거느릴 만한 능력이 있구 나." 그리고 셋째 세자를 꾸짖어 말씀 하셨다.

"너는 미녀를 나에게 데리고  오면 무엇이 흡 족하느냐? 어리석은 자식이로구나!" 상감께서는 갑자기 벼루를 들어 셋째 세자를 치시니, 왼 쪽 다리를 맞아 다리가 부러져 항시 다리를 절며 다녔다.
 한편 그 전에 영의정이었던 김자점은 이시백과 임경업을 대단히 시기하여 해치고자  하고 있었다. 먼저 임경업을 해치려고 어명이라고 거짓으로 말하고 형벌을  중히 덮어 씌워 감옥 에 가두었다. 

그리고 장차 죽이기로 꾀하였다. 이에 세자는 경업이 자점에게 해를 당하는 것 을 알고 불쌍히 여기시어 감옥으로 가자고 분부하셨다. 

그래서  감옥 문앞의 흥선문을 고쳐 거동하기를 기다렸으나 온 조정이 말리기를, "조정에서는  신하를 보시려고 친히 감옥에 가 시는 법이 절대로 없사옵니다. 세자께서는 깊이 살피시기 바라옵나이다." 하여서  세자는 그 리 여기시고 중지하였다 .

이 때  경업의 형벌은 더욱 가중해져서  기묘년(1639년)삼월 이십 육 일에 서른 두 살의 아까운 나이로 목숨이 끊겼다.
 어느 하루, 상감이 잠자리에서 주무시는데 꿈결에서 경업이 온  몸에 피를 흘리고 걸어오며 아뢰었다.

"생전에 신이 충성으로 임금님을 모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운세가 몹 시 나빠서 김자점의 말에 속아 온몸이 성한 곳이라고 한 군데도 없이 중상으로 죽었습니다.
 이 어찌 통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원하건대 저의 몸을 불쌍히  여기시어 역적 김자점을 죽여 주셔서 저의 한을 풀어주시면 신은 죽어서 넋이라도 충성을 아낌없이 바칠 것입니다."
 상감이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아 곰곰이 생각하시되 덧없는 꿈이었다. 

상감은 이 꿈을 이시 백을 불러 말하고 임경업의 일을  물어보셨다 .시백은 눈물을 흘리며  김자점의 음흉함으로 임경업을 매질하여 가두었기 때문에 맞은  독이 곪아서 원통히 죽음을  아뢰었다. 

지체함이 없이 상감은 크게 성내시어 자점을 의금부에 가두고 엄중히 문초하시니 모든 죄상을 다 말 했다. 그 말에 상감은 더욱 노하시어  명령하셨다 .

"곧 김자점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여러 고을에 돌려 침뱉게 하고 몸뚱이는 경업의 집안에 내어 주어 마음대로 복수하게 하여라. 또 한 김자점의 처자는 모두 목을 옭아매어서 죽이되 사대에  한하여, 모든 세간을 몰수하도록 하여라." 

이처럼 통탄할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한 나라의 영의정 벼슬을 지내어 부귀가 영 화로움에도 불구하고 악독한 흉모를 꾸며 김자점 자기 자신이 몸을 망쳤으니 넋인들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이때 이시백은 상감의 분부를 받들어서  김자점의 죄상을 낱낱이 드러내 고 그의 몸을 묶어 신전에 세워 놓고 먼저 목을 베고,  그 다음에는 몸을 찢으니 경업의 식 구들은 불같이 달려들어 김자점을 썰고 집씹으며 간을 내어다가 영 앞으로 제사하여 원통함 을 풀고 또 풀었다. 

이 대 상감께서는 경업의 원통한  죽음을 가엾이 여기시고 예조에 명하 여 충신문을 세우라고 하셨다. 그리고 벼슬까지 높여 주시어  대광보국과 의정부 영의정 겸 세자사를 내리셨다. 

또한 시호를 충렬공이라 하고 왕족의 대우로  장사지내라 하시고 그 자 식에게 벼슬을 주어 어버이의 거상 중에도 나아가게 하셨다.  그리고 제문을 손수 지으시어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십 년까지 영의정의  녹을 누리게 하시니 성은이 바다 와 같았다. 이때 임금의 건강이 편안하지 못하시어 구월  초순에 돌아가시니 왕위에 오르신 지 꼭 삼십 이년이 되었다. 

온 조정이 장례를 치르고  세자가 즉위하시니 나이가 십구 세였다.
 이제 태평한 날은 계속되어 길에 버려진 것을  줍지 않고 산에는 도적도 없고 밤에 문을 걸지 않아도 걱정이 없으니 거리마다 태평가가 넘쳐 흘렀다.  이러한 태평 연월에 이시백은 한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나랏일을 잘 다스려서 모든 일을 순조롭게 이끌고 백성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였다. 

이에 공의 이름이 온 나라에 떨치고 그의  아들 희인 형제도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하나는 평안도 감사가 되었고 하나는 송도유수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정치가 또 한 청렴 결백하고 자손이 여럿 되어 한결같이 똑똑하여, 그  재롱을 보며 세월을 보내고 살 았다. 어느 해 뜻바까에도 정승이 병을 얻어 끝내 일어나지 못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이 시백의 부부는 아버님을 잃고 주야를 뜬 눈으로 지새우며 깊이 슬퍼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
 도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인이 이어서 세상을 떠나시니 연세는 여든 셋이었다. 

한꺼번 에 어버이의 상사를 당하고 나니 더욱 애통하여 정신까지 잃었다가 겨우 음식을 먹고 기운 을 차리자, 그 때가 장례일이 되었다. 서산에 장사를 지내고 예를 갖추었다. 

이 소식을 상감 께서 들으시고 슬퍼하시어 예관을 보내어 제사 지내게 하시고 이시백을 궁궐로 부르시어 얼 굴이 수척함을 보시고 매우 근심하셨다.  

이시백은 상감의 위로에 감격하여 엎드려  절하니, 상감이 공이 너무 애통해 하는 것을 보시고 넌지시  말하였다. "네가 그대의 무거운 직책을 갈아 봉조하를 시키니 아침 회의에는 참석치  말고 집에서 한가로이 쉬며 자손들의  효성을 받아 보아라." 상감께서는 말을 마치시고 희인의 벼슬을  높여 이조판서의 직책을 맡기시고 희기에는 도승지 겸 형조참판을 시키시며 일렀다. 

"며칠내로  상경하여서 내 기대함을 저버 리지 말도록 하라." 두 사람은 대궐로 나아가 성은에 감사하였다. 상감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일렀다. 

"그대들은 나라의 일에 충성으로 그 직분을 다하여라." 두 사람은 곧 물러 나서 집에 돌아와 공의 부부께 문안드리고 일가 친척을 청하여서 여러 해 동안 그리워하던 정을 풀었다. 

이공의 부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자손들을 교훈하여 부귀를 누렸다.  이럭 저럭 공의 나이가 여든 살 넘었으니 아직까지도 기운이 넘쳐서 장성한 젊은이도 당할 만 하였다.

가을의 구월 보름께에 이르자 달빛이 유난히 밝아서 공의 부인과 함께 완월대에 올라 서 좌우에 남녀 자손들을 앉히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즐기는데 공이 두 아들에게 손 수 잔에 술을 부어 주며 말하였다.

"내 어린 시절이  이제 어제와 같이 느껴지더니 벌써 여 든 살이 지나게 되니 이젠  내게 한이라고는 없구나." 공은 술을  스스로 따라 마시며 다시 말하였다. "우리 부부가 세상 연분이 다하여서 장차 너희들과 영원히 작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 두 사람은 조금도 슬퍼 말고 자손을  거느리고 부귀 영화를 누리며 살지어다." 아버님의 슬픈 말씀을 듣자, 두 아들은 어쩔 줄을 모르고 눈물이 눈 속에  가득 찼으나 어찌해야 옳을겐가? 알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이 속절하기도 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공의 부 부가 정색하며 타일렀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ㅌ 번 죽은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네 아비는 여든이 넘어 노령이고 자손에게 부귀를 남겨 놓으므로 집안을 크게 빛내니 오늘 죽더라고 원통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이제 너희들은 자손들을 잘 보살핌에 많은 생 각을 하여라." 말을 마친 공의  얼굴이 매우 불안하므로 안색을 바로  하고 다시 두 아들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많은 손자들을 일일이 불러본 다음에 상을 물리라 분부하고,  부 부가 가지런히 잠자리에 누워 세상을 떠났다. 이에 이판서 형제가 상을 당하여  슬퍼하였다.
 임금께서 들으시고 또한 슬퍼하시어 예관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또한 시호를 문충공이라 내 리시고 박씨 부인은 충렬 부인에 봉하시었다. 

얼마 후에 계화도 세상을 떠나니 이판서 형제 가 정중히 장례식을 치르고 선산에 묻었다. 

이판서 형제는 무덤가에 풀로 집을 짓고 삼년상 을 치루니 임금께서 그 충효를 아름답게 여기시어 좌의정과  우의정에 각각 중수하였다. 

이렇게 벼슬이 정일품에 이르고 자손이 대대로 번창하니 사람들이 충효의 집안이라 부르며 존 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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