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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Choi가이버 2022. 11. 13. 12:49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금오신화
 
  송도(松都:개성) 낙타교 옆에 이생이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열 여덟이었다. 풍운이 맑고 재주가 뛰어나 일찍부터 국학(國學)에 다녔는데, 길을 가면서도 시를 읽었다.
  선죽리(善竹里) 귀족집에서는 최씨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었다. 태도가 아리땁고 수도 잘 놓았으며, 시와 문장도 잘 지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풍류로워라 이총각
    아리따워라 최처녀.
    그 재주와 그 얼굴을
    누군들 찬탄치 않으랴.

  이생은 일찍부터 책을 옆에 끼고 학교에 다닐 때에 언제나 최씨네 집 북쪽 담 밖으로 지나다녔다. 수양버들 수십 그루가 간들거리며 그 담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느 날 이생이 그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담 안을 엿보았더니,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고 벌과 새들이 다투어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 곁에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꽃떨기 사이로 은은히 보였다.  구슬발이 반쯤 가려 있고 비단 휘장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수를 놓다가 지쳐 잠시 바늘을 멈추며 턱을 괴고 시를 읊었다.

    사창(紗窓)에 홀로 기대앉아 수놓기도 귀찮구나.
    온갖 꽃 떨기 속에 꾀꼬리 소리 다정도 해라.
    마음속으로 부질없이 봄바람을 원망하며
    말없이 바늘 멈추고는 생각에 잠겼어라.

    저기 가는 저 총각은 어느 집 도련님일까.
    푸른 옷깃 넓은 띠가 늘어진 버들 사이로 비쳐 오네.
    이 몸이 죽어 가서 대청 위의 제비 되면
    주렴 위를 가볍게 스쳐 담장 위를 날아 넘으리.

  이생은 그 여인이 읊은 시를 듣고 마음이 근질근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집의 담이 높고도 가파르며 안채가 깊숙한 곳에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으로 (학교에)갔다.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흰 종이 한 장에다 시 세 수를 써서 기와 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져 넣었다.

    무산 열두 봉우리 첩첩이 쌓인 안개 속에
    반쯤 드러난 봉우리가 붉고도 푸르구나.
    양왕의 외로운 꿈을 수고롭게 하지 마오.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양대에서 만나 보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되어 탁문군(卓文君)을 꾀어내려니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은 이미 다 이루어졌네.
    붉은 담머리의 복사꽃과 오얏꽃은
    바람에 날려서 어디로 떨어지나.

    좋은 인연되려는지 나쁜 인연 되려는지
    부질없는 이 내 시름 하루가 일 년 같아라.
    스물 여덟 자로 황혼의 기약을 맺었으니
    남교에서 어느 날 신선을 만나려나.

  최랑이 몸종 향아(香兒)를 시켜서 그 편지를 주워다 보니, 바로 이생이 지은 시였다. 최랑이 그 시를 펼쳐서 두세 번 읽고는 마음속으로 혼자 기뻐하였다. 종이쪽지에 여덟 자를 써서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님이여. 의심 마세요. 황혼에 만나기로 하세요."
  이생이 그 말대로 황혼이 되자 최랑의 집을 찾아갔다. 갑자기 복사꽃 한 가지가 담 위로 넘어오면서 하늘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생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넷줄이 대바구니를 매어서 아래로 늘어뜨려 놓았다. 이생을 그 줄을 잡고 담을 넘었다.
  마침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꽃 그림자가 땅에 비껴 맑은 향내가 사랑스러웠다. 이생은 자기가 신선 세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마음은 비록 기뻤지만, 자기의 마음이나 지금 하려는 일이 비밀스러워서 머리칼이 모두 곤두섰다.
  이생이 좌우를 둘러보았더니, 최랑은 꽃떨기 속에서 향아와 같이 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는, 외진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최랑이 이생을 보고 방긋 웃으면서 시 두 구절을 먼저 읊었다.

    복사와 오얏 가지 속에 꽃송이 탐스럽고
    원앙새 베개 위엔 달빛도 고와라.

  이생이 뒤를 이어 시를 읊었다.

    다음날 어쩌다가 봄소식이 새나간다면
    무정한 비바람에 더욱 가련해지리라.

  최랑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저는 본디 당신과 함께 부부가 되어 끝까지 남편으로 모시고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어요. 그런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마음이 태연한데, 장부의 의기를 가지고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다음날 규중의 일이 누설되어 친정에서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제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향아야. 방 안에서 술과 안주를 가져오너라."
  향아가 시키는 대로 가버리자, 사방이 고요하여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이생이 최랑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최랑이 말하였다.
  "이곳은 뒷동산에 있는 작은 누각 아래이지요.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여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연못가에다 이 누각을 따로 지어 주셨지요. 봄이 되어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면 몸종 향아와 함께 즐겁게 놀라고 하신 거지요. 부모님이 계신 곳은 여기서 멀기 때문에 아무리 웃으며 크게 이야기해도 쉽게 들리지는 않는답니다."
  최랑이 술 한 잔을 따라 이생에게 권하면서 고풍(古風)으로 한 편을 읊었다.

    부용못 푸른 물을 난간에서 굽어보다
    꽃떨기 속에서 님들이 속삭이네.
    향그런 안개 깔린 속에 봄빛이 화창해서
    새 가사를 지어내어「백저사(白紵詞)」를 부르는구나.
    꽃그늘에 달빛이 비껴 털방석에 스며들고
    긴 가지 함께 잡으니 붉은 꽃비가 떨어지네.
    바람이 향내를 끌어와 옷 속에 스며들자
    첫봄을 맞은 아가씨가 햇살 속에 춤추네.
    비단 적삼 가볍게 해당화를 스쳤다가
    꽃 사이에 졸고 있던 앵무새만 깨웠네.

  이생도 바로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도원에 잘못 들어와 복사꽃이 만발한데
    많고 많은 이 내 정회(情懷)를 다 말할 수가 없네.
    구름같이 쪽찐 머리에 금비녀 낮게 꽂고
    산뜻한 봄 적삼을 모시 베로 지었구나.
    나란히 달린 꽃가지를 봄바람에 꺾다니
    하많은 꽃가지에 비바람아 부지 마소.
    선녀의 소맷자락 나부껴  그림자도 하늘거리고
    계수나무 그늘 속에선 시름이 따를 테니
    함부로 새 곡조 지어 앵무새에게 가르치지 마오.

  술자리가 끝나자 최랑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오늘의 일은 반드시 작은 인연이 아니랍니다. 당신은 저를 따라오셔서 정을 나누는 것이 좋겠어요."
  말을 마치고 최랑이 북쪽 창문으로 들어가자 이생도 그 뒤를 따라갔다. 누각에 달린 사다리가 있었는데,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과연 그 다락이 나타났다. 문방구와 책상들이 아주 말끔했으며, 한쪽 벽에는「연강첩장도(烟江疊 圖)」와 「유황고목도(幽篁古木圖)」가 걸려 있었는데, 모두 이름난 그림이었다. 그 그림 위에는 시가 씌어 있었는데, 누가 지은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첫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어떤 사람의 붓끝에 힘이 넘쳐
    이 강 속에다 겹겹이 쌓인 산을 그렸던가?
    웅장해라. 삼만 길의 저 방호산(方壺山)은
    아득한 구름 사이로 반쯤만 드러났네.
    저 멀리 산세(山勢)는 몇백 리까지 뻗어 있는데
    푸른 소라처럼 쪽진 머리가 가까이 보이네.
    끝없이 푸른 물결 공중에 닿았는데
    저녁노을 바라보니 고향이 그리워라.
    이 그림 구경하며 사람 마음이 쓸쓸해져
    소상강 비바람에 배 띄운 듯하여라.

  둘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쓸쓸한 대숲에선 가을 소리가 들리는 듯
    비스듬히 누운 고목은 옛정을 품은 듯해라.
    구부러진 늙은 뿌리엔 이끼가 가득 끼었고
    굵고 곧은 가지는 바람과 천둥을 이겨 왔네.
    가슴속에 간직한 조화가 끝이 없으니
    미묘한 이 경지를 누구에게 말할 텐가.
    위언(韋偃)과 여가(輿可)도 이미 귀신이 되었으니
    천기를 누설할 자가 그 몇이나 되려나.
    갠 창가 그윽한 곳에서 말없이 바라보니
    삼매경에 든 필법이 못내 사랑스러워라.

  한쪽 벽에는 사철의 경치를 읊은 시를 각각 네 수씩 붙였는데, 역시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글씨는 송설(松雪)의 서체를 본받아 자체가 아주 곱고도 단정하였다.
  그 첫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연꽃 그린 휘장은 따뜻하고 향내는 실같은데
    창밖에 붉은 살구꽃이 비 내리듯 하는구나.
    다락 머리에서 새벽 종소리에 남은 꿈을 깨고 보니
    개나리 무성한 둑에 때까치가 우짖네.

    제비새끼 커 가는데 안방 깊숙이 들어앉아
    귀찮은 듯 말도 없이 금바늘을 멈추었네.
    꽃 아래로 쌍쌍이 나비들 짝 지어 날며
    그늘진 동산으로 지는 꽃을 따라가네.

    꽃샘 추위가 초록 치마를 스쳐 가면
    무정한 봄바람에 이 내 간장 끊어지네.
    말없는 이 심정을 그 누가 안다더냐.
    온갖 꽃 만발한 속에 원앙새가 춤추는구나.

    깊어 가는 봄빛을 뉘 집 동산에 간직했나?
    붉은 꽃잎 푸른 나뭇잎 사창에 비치었네
    뜨락의 꽃과 풀들은 봄시름에 겨웠는데
    주렴을 가볍게 걷고 지는 꽃을 바라보네.

  그 둘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밀이삭 처음 베고 제비 새끼 날아드는데  
    남쪽 뜰엔 석류꽃이 두루 피었구나.
    푸른 창가에 앉아 길쌈하는 아가씨는
    붉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새 치마를 지으려네.

    매실이 익는 철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홰나무 그늘에 꾀꼬리 울고 제비는 주렴으로 날아드네.
    또한 해 봄 풍경이 시들어 가니
    고련꽃 떨어지고 죽순이 삐죽 솟았네.
    
    푸른 살구 손에 쥐고 꾀꼬리에게 던져 보네.
    남쪽 난간에 바람 일고 해그림자 더디어라.
    연잎에 향내 가시고 못에는 물이 가득한데
    푸른 물결 깊은 곳에서 원앙새가 목욕하네.
  
    등 평상 대자리에 무늬가 물결 지고
    소상강 그린 병풍에는 구름이 한 자락 있네.
    낮꿈을 깨고도 나른해 누웠더니
    반창에 비낀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네.

  그 셋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가을 바람이 쌀쌀해서 찬이슬이 맺히고
    달빛도 고와서 물빛 더욱 푸르구나.
    한 소리 또 한소리 기러기 울며 돌아가는데
    우물에 오동잎 지는 소리를 다시금 듣고파라.

    상 밑에서는 온갖 벌레들이 처량하게 울고
    상 위에서는 아가씨가 구슬 눈물을 떨어뜨리네.
    만리 밖 싸움터에 몸을 바친 님에게도
    오늘밤 옥문관(玉門關)에 달빛이 환하겠지.

    새 옷을 마르려니 가위가 차가워라.
    나직이 아이 불러 다리미를 가져오라네.
    다리미에 불 꺼진 걸 살피지 못하다가
    머리를 긁으며 피리대로 가만히 헤치네.

    작은 연못에 연꽃도 지고 파초 잎도 누래지자
    원앙 그린 기와 위에 첫서리가 내렸네.
    묵은 시름 새 원한을 막을 길이 없는데
    귀뚜라미 울음까지 골방에 들리네.

  그 넷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한 가지 매화 그림자가 창 앞으로 뻗었는데
    바람 센 서쪽 행랑에 달빛 더욱 밝아라.
    화롯불 꺼졌는지 부저로 헤쳐 보고는
    아이를 불러다 차솥을 바꾸라네.

    밤서리에 놀란 잎이 자주 흔들리고
    돌개바람이 눈을 몰아 긴 마루로 들어오네.
    님 그리워 밤새도록 꿈속에 뒤척이니
    빙하(氷河)가 어디런가, 그 옛날 전쟁터일세.

    창에 가득한 붉은 해는 봄날처럼 따뜻한데
    시름에 잠긴 눈썹에 졸음까지 더하네.
    병에 꽂힌 작은 매화는 필 듯 말듯 하는데
    수줍어 말도 못하고 원앙새만 수놓는구나.

    쌀쌀한 서리 바람이 북쪽 숲을 스치는데
    처량한 까마귀가 달을 보며 우는구나.
    등불 앞에 님 생각 눈물 되어 흐르니
    실에도 떨어지고 바늘에도 떨어지네.

  한쪽에 작은 방 하나가 따로 있었는데, 휘장 . 요 . 이불 .베개들이 또한 아주 깨끗하였다.  휘장밖에는 사향을 태우고 난향의 촛불을 켜놓았는데, 환하게 밝아서 마치 대낮 같았다. 이생은 최랑과 더불어 마음껏 즐거움을 누리면서 여러 날 머물었다.
  (어느 날) 이생이 최랑에게 말하였다.
  "옛 성인의 말씀에,'어버이가 계시면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제 내가 부모님을 떠난 지가 사흘이나 되었소. 부모님께서 반드시 대문에 기대어 기다리실 테니, 이 어찌 아들의 도리라고 하겠소?"
  최랑은 서운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담을 넘어 보내 주었다. 이생을 이 뒤부터 저녁마다 최랑을 찾아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에 이생의 아버지가 이생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네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것은 옛 성인의 어질고 의로운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요즘은 저녁에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반드시 경박한 놈들의 행실을 배워 남의 집 담을 넘어서 아가씨나 엿보고 다닐게다.
  이런 일이 만일 탄로되면 남들은 모두 내가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지 못했다고 책망할 것이다. 또 그 처녀도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라면 반드시 네 미친 짓 떄문에 그 집안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 남의 집에 죄를 지었으니, 이 일이 작지 않다. 너는 빨리 영남으로 내려가서 종들을 데리고 농사나 감독하거라.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그 이튿날 (이생의 아버지가 이생을) 울주로 내려보냈다.
  최랑은 저녁마다 화원에서 이생을 기다렸지만, 여러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최랑은 이생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여, 향아를 시켜 이생의 이웃들에게 물래 물어 보게 하였다. 이웃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도령은 그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 영남으로 떠난 지가 벌써 여러 달이나 되었다오."
  최랑은 이 소식을 듣고 병을 얻어 침상에 누웠다. 엎치락뒤치락하며 일어나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였다. 말도 앞뒤가 맞지 않았으며, 얼굴이 초췌해졌다.
  최랑의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 그 병의 증상을 물었지만, 묵묵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딸의 상자 속을 들추어보았더니, 이생과 지난날에 주고받은 시들이 있었다. 최랑의 부모들이 그제야 놀라서 무릎을 치며 말하였다.
  "어이구. 우리 딸자식을 잃어버릴 뻔했구려."
  그리고는 딸에게 물었다.
  "이생이 누구냐?"
  이렇게 되자 최랑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목구멍에서 겨우 나오는 소리로 부모에게 아뢰었다.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길러 주신 은혜가 깊으니, 어찌 사실을 슴기겠습니까? 저 혼자 생각해보니 남녀가 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은 인정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결혼할 좋은 시기를 놓치지 마라'는 말은"『시경(詩經)』의 주남(周南)편에도 나타나고, '여자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흉하다'는 말은『주역(周易)』에서도 경계하였습니다.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몸으로 얼굴빛이 시드는 것은 생각지 않고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옆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새삼 덩굴이 다른 나무에 의지해서 살듯이 저는 벌써 위당(渭塘)의 처녀 노릇을 가게 되었으니, 죄가 이미 가득 차 집안에까지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 아름다운 도련님과 한 번 정을 통한 뒤부터는 도련님께 대한 원망이 천만 번 생기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몸으로 괴로움을 참으며 홀로 살아가려니, 그리운 정은 나날이 깊어 가고 아픈 상처를 나날이 더해 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원한 맺힌 귀신으로 화(化)해 버릴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남은 목숨을 보존하게 되고, 이 간절한 청을 거절하신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생과 저승에서 다시 만나 노닐지언정, 맹세코 다른 가문에는 오르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부모도 이미 그의 뜻을 알았으므로 다시는 병의 증세를 묻지 않았다. 타이르고 달래면서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리고는 중매쟁이의 예를 갖추어 이생의 집으로 보냈다.
  이생의 아버지가 최씨 집안이 얼마나 번성한지 물은 뒤에 말하였다.
  "우리 집 아이가 비록 어린 나이에 바람이 났지만, 학문에 정통하고 사람답게 생겼소. 앞으로 장원급제할 것이며 훗날 이름을 세상에 떨칠 것이니, 서둘러 혼처를 정하고 싶지 않소."
  중매장이가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최씨가 다시 (중매인을 이씨 집으로) 보내어 말하게 하였다.
  "한 시대의 친구들이 모두들 '그 댁의 영식(令息)은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아직은 또아리를 틀고 있지만, 어찌 끝까지 연못 속에 잠겨만 있겠습니까? 빨리 혼삿날을 정해 두 집안의 즐거움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중매쟁이가 돌아가서 또 그 말을 이생의 아버지에게 전하였더니, 이생의 아버지가 말하였다.
  "나도 젊었을 때부터 책을 잡고 학문을 닦았지만, 나이 늙도록 성공하지 못하였소. 종들도 흩어지고 친척의 도움도 적어, 생업이 신통치 않고 살림도 궁색해졌소. 그러니 문벌 좋고 번성한 집안에서 어찌 한갓 빈한한 선비를 사위로 삼으려 하시겠소? 이는 반드시 일 만들기 좋아하는 이들이 우리 집안을 지나치게 칭찬해서 귀댁을 속이려는 것일 거요."
  중매쟁이가 돌아와서 또 최씨 집안에 전하자. 최씨 집안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물 드리는 모든 절차와 옷차림은 모두 저희 집에서 갖추겠습니다. 좋은 날을 가려서 화촉의 시기만 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중매쟁이가 또 돌아가서 이 말을 전하였다.
  이씨 집안에서도 이렇게까지 되자 뜻을 돌려, 곧 사람을 보내어 이생을 불러다 그의 생각을 물었다. 이생을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곧 시 한 수를 지었다.

    깨어진 거울이 다시 둥글게 되니
    만남도 때가 있어
    은하의 까마귀와 까치들이
    아름다움 기약을 도와주었네.

    이제야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붉은 실을 잡아매었으니
    봄바람이 건듯 불더라도
    소쩍새를 원망 마소.

  최랑이 이 시를 듣고는 병도 차츰 나아져, 자기도 시를 지었다.

    나쁜 인연이 바로
    좋은 인연이던가?
    그 옛날 맹세가
    마침내 이루어졌네.
    어느 때나 님과 함께
    작은 수레를 끌고 갈까?
    아이야, 나를 일으켜 다오
    꽃비녀를 손질하련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 마침내 혼례를 이루니, 끊어졌던 사랑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부부가 된 이후에 서로 사랑하면서도 공경하여 마치 손님처럼 대하니, 비록 양홍 . 맹광이나 포선(鮑宣).환소군(桓少君)이라도 그들의 절개와 의리를 따를 수가 없었다.
  이생이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자,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이 서울을 점거하자 임금은 복주(福州)로 피난 갔다. 적들은 집을 불태워 없애버렸으며,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잡아먹었다. 부부와 친척끼리도 서로 보호하지 못했고 동서로 달아나 숨어서 제각기 살길을 찾았다.
  이생은 가족들을 데리고 외진 산골로 숨었는데, 한 도적이 칼을 빼어들고 뒤를 쫓아왔다. 이생은 달아나 목숨을 건졌지만, 최랑은 도적에게 사로잡혔다. 도적이 최랑의 정조를 빼앗으려 하자, 최랑이 크게 꾸짖었다.
  "창귀( 鬼) 같은 놈아. 나를 죽여 먹어라. 내 차라리 죽어서 시랑(豺狼)의 밥이 될지언정 어찌 개돼지 같은 놈의 짝이 되겠느냐?"
  도적이 노하여 최랑을 죽이고 살을 도려내었다.
  이생은 거친 들판에 숨어서 겨우 목숨을 보전하다가, 도적이 이미 다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이 사시던 옛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집은 이미  싸움 통에 불타 없어졌다. 또 최랑의 집에도 가보았더니 행랑채는 황량했으며, 쥐와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이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작은 누각으로 올라가서 눈물을 거두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날이 저물도록 우두커니 홀로 앉아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보니 완연히 한바탕 꿈만 같았다.
  二更(이경)쯤 되자 희미한 달빛이 들보를 비춰 주는데 낭하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부터 차츰 가까이 다가왔다. 이르고 보니 바로 최랑이었다.

  이생은 그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사랑하는 마음에 의심하지도 않고 물어 보았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 가서 목숨을 보전하였소?"
  여인이 이생의 손을 잡고 한바탕 통곡하더니, 이내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본디 양가의 딸로서 어릴 때부터 가정의 교훈을 받아 수놓기와 바느질에 힘썼고, 시서(詩書)와 예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규방의 법도만 알뿐이지, 그 밖의 일이야 어찌 알겠어요? 마침 당신이 붉은 살구꽃이 핀 담 안을 엿보았으므로, 제가 푸른 바다의 구슬을 바친 거지요. 꽃 앞에서 한번 웃고 평생의 가약을 맺었고, 휘장 속에서 다시 만날 때에는 정이 백년을 넘쳤었지요.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슬프고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군요. 장차 백년을 함께 하자고 하였는데, 뜻밖에 횡액을 만나 구렁에 넘어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어요? 늑대 같은 놈들에게 끝까지 정조를 잃지 않았지만, 제 몸은 진흙탕에서 찢겨졌답니다. 천성이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지, 인정으로야 어찌 그럴 수 있었겠어요?
  저는 당신과 외딴 산골에서 헤어진 뒤에 짝 잃은 새가 되었었지요. 집도 없어지고 부모님도 돌아가셨으니, 피곤한 혼백을 의지할 곳도 없는 게 한스러웠답니다. 절의(節義)는 중요하고 목숨은 가벼우니, 쇠잔한 몸뚱이일망정 치욕을 면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지요. 그러나 마디마디 끊어진 제 마음을 그 누가 불쌍하게 여겨 주겠어요? 한갓 애끊는 썩은 창자에만 맺혀 있을 뿐이지요.
  해골은 들판에 내던져졌고 간과 쓸개는 땅바닥에 널려졌으니, 가만히 옛날의 즐거움을 생각해 보면 오늘의 슬픔을 위해 있었던 것 같군요.
  이제 봄바람이 깊은 골짜기에 불어오기에, 저도 이승으로 돌아왔지요. 봉래산 십이년의 약속이 얽혀 있고 삼세(三世)의 향이 향그러우니, 오랫동안 뵙지 못한 정을 이제 되살려서 옛날의 맹세를 저버리지 않겠어요. 당신이 지금도 그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면, 저도 끝까지 잘 모시고 싶답니다. 당신도 허락하시겠지요?"
  이생이 기쁘고도 고마워하며 말하였다.
  "그게 애당초 내 소원이오."
  그리고는 서로 정답게 심정을 털어놓았다. 재산을 얼마나 도적들에게 빼앗겼는지 이야기가 나오자, 여인이 말하였다.
  "조금도 잃지 않고 어느 산 어느 골짜기에 묻어 두었답니다."
  이생이 또 물었다.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어디에 모셨소?"
  여인이 말하였다.
  "어느 곳에다 그냥 버려 두었지요."
  정겨운 이야기를 끝낸 뒤에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지극한 즐거움이 예전과 같았다.
  이튿날 여인이 이생과 함께 자기가 묻혀 있던 곳을 찾아갔는데, 과연 금과 은 몇 덩어리가 있었고, 재물도 약간 있었다. 그들은 두 집 부모님의 해골을 거두고 금과 재물을 팔아 각각 오관산 기슭에 합장하였다. 나무를 세우고 제사를 드려 예절을 모두 다 마쳤다.
  그 뒤에 이생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고 최씨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목숨을 구하려고 달아났던 종들도 또한 스스로 돌아왔다.  이생은 이때부터 인간세상의 모든 일을 다 잊어버렸으며, 아무리 친척이나 손님들의 길흉사가 있더라도 방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았다. 언제나 최씨와 더불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금실 좋게 지내었다.
  그럭저럭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에 여인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세 번이나 가약을 맺었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즐거움이 다하기도 전에 슬프게 헤어져야만 하겠어요."
  여인이 목메어 울자 이생이 놀라면서 물었다.
 "어찌 이렇게 되었소?"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승길은 피할 수가 없답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당신의 연분이 끊어지지 않았고 또 전생에 아무런 죄도 지지 않았다면서, 이 몸을 환생시켜 당신과 잠시라도 시름을 풀게 해주었었지요. 그러나 제가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머물면서 산 사람을 미혹시킬 수는 없답니다."
  그리고는 몸종 향아를 시켜서 술을 올리게 하고는, 「옥루춘곡(玉樓春曲)」에 맞추어 노래 한 가락을 지어 부르며 이생에게 술을 권하였다.

    칼과 창이 어우러져 싸움이 가득한 판에
    옥 부서지고 꽃 떨어지니 원앙도 짝을 잃었네.
    흩어진 해골을 그 누가 묻어 주랴.
    피에 젖어 떠도는 혼이 하소연할 곳도 없었네.
    무산의 선녀가 고당에 한번 내려온 뒤에
    깨어진 종(鐘)이 거듭 갈라지니 마음 더욱 쓰라려라.
    이제 한번 작별하면 둘이 서로 아득해질 테니
    하늘과 인간세상 사이에 소식마저 막히리라.

  노래를 한마디 부를 때마다 눈물이 자꾸 내려 거의  곡조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생도 또한 슬픔을 걷잡지 못하며 말하였다.
  "내 차라리 당신과 함께 황천(荒天)으로 갈지언정 어찌 무료하게 홀로 여생을 보전하겠소? 지난 번 난리를 겪고 난 뒤에 친척과 종들이 저마다 서로 흩어지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해골이 들판에 내버려져 있었는데,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장사를 지내 드렸겠소? 옛 사람 말씀에,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는 예로써  섬기고, 돌아가신 뒤에는 예로써 장사지내라' 하셨는데, 이런 일을 모두 당신이 감당해 주었소.  당신은 정말 천성이 효성스럽고 인정이 두터운 사람이오. 나는 당신에게 고맙기 그지없고,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소. 당신도 인간 세상에 더 오래 머물다가 백년 뒤에 나와 함께 티끌이 되었으면 좋겠구려."
  여인이 말하였다.
  "당신의 목숨은 아직 남아 있지만, 저는 이미 귀신의 명부(冥府)에 실려 있답니다. 그래서 더 오래 볼 수가 없지요. 제가 굳이 인간세상을 그리워하며 미련을 가진다면 명부의 법도를 어기게 되니, 저에게만 죄가 미치는 게 아니라 당신에게도 또한 누가 미치게 된답니다. 저의 유골이 어느 곳에 흩어져 있으니, 만약 은혜를 베풀어주시려면 (그 유골이나 거두어) 비바람을 맞지 않게 해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눈물만 줄줄 흘렸다.
  "낭군님, 부디 안녕히 계십시오."
   말이 끝나자 차츰 사라지더니 마침내 자취가 없어졌다.
   이생은 (여인의 말대로) 유골을 거두어 부모님의 무덤 곁에다 장사를 지내 주었다. 장사를 지낸 뒤에는 이생도 또한 지나간 일들을 생각하다가 병을 얻어, 몇 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마다 가슴 아파 탄식하며 그들의 아름다운 절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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