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최씨 신도비문 해설
죽산최씨의 유래를 알고져 하면 벼슬이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으로 추대되고 경연홍문관 대제학 성균관사 를 거쳐 예문관,춘추관,관상감과 의정부좌찬성 판의금부사 에 봉직했던 효운의 생애를 고찰함에 있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 초기에 삼한갑족인 소벌공 에게 신라 제3대 유리왕이 최씨의 성씨를 하사함 으로서 비롯된다.
신라의 개국공신인 소벌공의 24세손 인 최치원이 경주최씨의 시조가 되었고, 경주최씨 에서 분적한 해주최씨, 해동공자 로서 소벌공 28세손 해주최씨의 2세인 문헌공 최충(崔충)이 효운공 의 선계이다.
공의 이름은 효운, 자는 효원 이며 호는 일죽 이시다.
서기 1410년 경인년 (이조 태종10년)에 태어나 선계의 문제를 계승 받아 어려서 부터 총명 하고 학문을 좋아해 10세에 글을 통하셨다.
서기 1436년(병진)에 성균관 진사로 등과, 서기 1439년에 문과갑과에 급제 하셨다.
이듬해 검열에 입사, 그 다음해 에는 설서를 거쳐 봉교에 봉직 하셨다.
서기 1442년 제백부 감찰을 제수받아 대관 으로 헌부에 올라 규강을 바로 잡았으며 청정을 하셨다.
서기 1444년(세종26년)에는 결성현이 불치 하여 특명을 받고 도임 하여 선정을 펴니 칭송이 원근에 자자 했다.
서기 1446년에 다시 지평 으로 사헌부에 부임 배관을 감찰 하였으며 이듬해 에는 홍문관교리 를 거쳐 사헌 으로 영전 하셨다.
서기 1450년(세종32년)에 상주 인근에 민심이 흉흉하여 특별히 공을 지명 안무사로 파견 평정케 한후 목사로 제수하니부임 3개월만에 민심은 진정되고 주민들이 그를 사모하여 부모님 처럼 순종했다.
서기 1452년(문종2년) 이조에 영전되어 참판에 올랐고 서기 1455년(단종3년)에는 내직에 추천 되어 탁월한 능력을 인정 받아 의정부좌찬성 에 이르시었다.
그러나 그해(단종3년) 단종께서 폐위 되시어 강원도 영월로 떠나시자 효운은 벼슬자리 를 내놓으시고 삼베옷을 입으시고 죽산현 칠장산에 은거 폐위된 단종임금을 사모 하며 눈물로 지내시다가 서기 1474년(성종5년)에 충신은 두임금을 섬길수 없다 는 유언을 남기시고 끝내 운명 하셨다.
이후 후손들이 조상의 갸륵한 유지를 사모하여 운명 하신곳 죽산현을 이름하여 공의 관행을 죽산 이라 칭하게 되었다.
운명 하신지 316년후 서기 1790년(정조14년) 경술년에 공의 치적과 충성심이 추인되어 영의정 으로 추증 되었다. 부인은 국성 이며 이름은 이가의 감찰사의 둘째딸 이시며 후에 정경부인 으로 추인 되셨다.
1남2녀 를 두셨는데 아들 세형은 병조참판이 되셨고 장녀는 군수 한치륜 에게 출가 하였고 차녀는 참판인 홍명인 에게 출가 하셨다. 장손 충좌는 세조 혜장대왕의 왕자인 덕원군 서(曙)의 딸과 혼인한후 병조참판,장성현감 으로 부임 하였고 공의 증손자 는 6형제를 두셨는데 내환, 외란으로 모두 은거 했거나 출전 하였다.
장손 "언",차손"붕"은 해주전에 임하셨고
셋째 "학"은 은진에 은둔 했으며
넷째 "홍"은 양주전에 임했고
다섯째 "령"은 면천군수 로 봉직후 당진지역으로 출전 하여 전황을 지휘통솔 했다. 또 여섯째 "곤"은 나주전에 출전 하여 충절을 지켰다.
효운공 은 선정가 로 덕치에 힘써 백성이 어버이 같이 따랐으며 사헌부에 재임시 에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국기를 공고히 하셨다.
슬프다!
단종애사 의 난 으로 공 의 역량과 영달이 단성 으로 승화 되어 공 의 선덕이 자손만대 에 빛나 그 후광 으로 자손의 번영이 영원 하리라.
공 의 정직, 충성심, 청렴결백, 덕망의 신조를 후손들은 길히 가훈 으로 계승 하여라.
무오(戊午)年 봄(春)
숭록대부전이조참판겸판의금부사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홍양호 엮음
<서기1991년 1월 1일 대제학공 15세손 현신 옮김 글 에서>
竹山崔氏_十六世孫_洪重(洪基).十七世孫_鎬昇(昇浩)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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