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 혹은 선감원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 있는 선감도라는 섬에 1941년 10월 당시 미나미 지로 조선 총독의 지시로 세워졌다.
농사 지을 주민을 제외한 나머지 섬 주민들을 섬 밖으로 강제이주시킨 후 전국에서 부랑아로 지목된 소년 수백명을 섬으로 잡아들이고 선감학원(선감원 같음)에 가두었다.
거리의 불량아들을 감화하는 이른바 감화원이라는 미명 하에 지어진 이 곳에 끌려오게 된 명목상 이유는 절도, 폭행 등의 경범죄부터 항일 독립운동 행위, 정치범이나 사회주의자 등이었으며 이유 없이 잡혀온 청년들도 많았다.
피상적으로는 일반 학교와 동일한 학제를 이수하게 되어 있었으나 선감원에 온 소년들은 공부는커녕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잘못을 하면 처벌의 일환으로 끝을 뾰족하게 깎은 대나무를 손톱 밑에 끼워넣는 고문을 어린애들을 상대로 자행한 것이다. 게다가 섬이어서 소년들은 달리 나갈 방법도 없었다.
탈출을 시도한 소년들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거나 갯벌 쪽으로 나가다가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였는데 이렇게 죽은 소년들의 시신은 같이 생활하던 동료 소년들이 가마니에 싸서 원생 공동묘지에 매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살아남은 소년들도 전쟁 말기에 이르러서는 강제징용되거나 군사 훈련을 받고 전쟁터로 내몰렸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8.15 광복 이후 선감(학)원은 관리권이 경기도로 이관됐고 선감학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 '부랑아 수용시설'로 다시 문을 열어 20세 미만의 소년들만 수용하는 부랑아 강제 수용소로 자리잡았으며
1950년 6월에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선감도 섬 전체가 미군들의 손에 넘어갔다가 전쟁 후 다시 경기도청이 직접 운영하는 부랑아 선도 수용 시설로 악명 높았다.
1954년 4월에 사무실, 교사, 관사 등의 건물이 신축되기도 했다.
해방 후 박정희 대통령 시기까지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거리의 부랑아들을 마구잡이로 모아서 수용하였다.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같은 케이스처럼 무고한 어린이나 청년도 다수 포함되었고 일제강점기의 잔혹한 고문과 강제 노역도 그대로 행해졌으며 농업과 양잠 등을 할당량을 주었고 이행하지 못하면 폭행이 가해졌다.
삼청교육대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군사정권 특유의 머릿수 채우기라는 악습에 의해 경찰들은 오직 아무 의미도 없이 할당량 채우기에만 급급해 아무나 마구 잡아가는 통에 이렇게 되었다.
당시부터 섬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선감도 안에서 선감원장이 가진 권력은 대통령이나 다름없었고 정보매체가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이 사실을 알리려다가 잘못되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릴 수 있던 만큼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선감원에 무고하게 끌려간 어린이들이 많았으며 억울하게 갇힌 어린이들이 바다를 헤엄쳐 탈출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1964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에도 보도되기도 했다.
가장 큰 비극은 대한민국의 1세대 사회복지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도 오랜 과거부터 선감원에 근무한 이력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프로필에서 선감원 관련 약력을 고의적으로 누락한 탓에 결국 이들의 선감원에서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의 선감원에 지옥 같은 생활을 버티며 기회를 봐 섬을 탈출했던 임용남 목사의 증언을 토대로 실화 소설 '뭉치'가 만들어졌다.
당시 정부에서는 5.16 군사정변 이후, 정확히는 1961년 6월에 '혁명정부'의 이미지 홍보를 위해 이 시설이 모범적 복지 시설이라며 국정홍보 기록영화를 내보냈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자료 없이 잊힐 뻔한 소외자들에 대한 국가폭력인 선감원 사건은 당시 선감원 부원장의 아들인 이하라 히로미츠가 쓴 〈아!선감도〉라는 소설을 1989년에 발표하고 선감원 위령비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극우 단체 회원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아가면서도 일본 전국에서 연설했다.
이하라 히로미츠 는 1998년에 3천만 원을 모금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안산시를 방문하여 모금약정서를 작성했으나 갑자기 백지화되었다.
2000년 8월 15일 MBC에서 광복절 특집극으로 선감원을 다룬 '선감도'를 방영했는데 극본 이경식, 연출 오경훈 PD였으며 양동근, 김인권, 김경호, 송금식, 박종설 등 아역 및 중견배우들이 출연했다.
그럼에도 위령비는 감감무소식이었다가 2014년에야 세워졌다.
이때 79세였던 이하라 히로미츠도 참석했다.
2022년 9월 26일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피해자 150여명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 선감동 산 37-1에서 유해 시굴을 시작했다. 유해 시굴은 9월 30일까지 5일간 진행되었다.
발굴 하루 만에 유해가 발견되었는데 10대 추정 치아 10여개·단추 4개도 발견되었다.
다만 땅의 산성도가 높아 유골은 삭아 버리고 치아만 남는 형태로 발굴되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묻힌 유해의 수와 신원을 정확하게 특정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2022년 10월 20일 진실화해위는 선감원 사건에 대해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10살의 나이에 선감학원에 들어가 22년의 세월을 선감도에서 보간 김춘근 씨는......(관련정보:기자,이래현,BBC 코리아)
"선감학원은 고독한 지옥이었어요."
계모의 구박을 피해 도망치듯 들어간 큰아버지 집에서도 정착하기 어려웠던 그는 거리를 서성이다 순찰 중이던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관이 무조건 잡더라고요. 도망갈까 봐 내 목덜미를 잡고 안 놓아요. 내 집이 여긴데, 내가 뭘 잘못했냐고 막 울었어요.
그랬더니 발로 엉덩이를 막 차는 거야. 좋은 데가 있는데, 거기 있으면 공부도 시켜줄 테니 가자고."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가 들어간 곳은 바로 악명 높은 선감학원이었다.
당시 10살이었던 김 씨는 선감학원에 들어오자마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전깃불도 없어. 깜깜한 지옥이야. 뭘 먹을 수도 없어서 애들이 생식하러 다녔어요.
풀뿌리 뽑아 먹고, 밭 가서 배춧가랑지 주워 먹고. 배고프니까."
식사로 나온 국물은 짠맛만 가득한 소금국이었고, 어느 날 배식 받은 새우젓에선 구더기가 나오기도 했다.
매일 이유 없는 기합과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좀 부당하게 많이 때리고 그랬어요.
하나가 잘못하면 전체적으로 맞는 거예요.
150대를 맞고 엉덩이 한쪽이 없어진 애가 있더랬어요.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서로 간 싸움을 시키기도 했다.
때리고 맞더라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선감학원에 들어간 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했다.
어느 날 그는 선감학원에서 탈출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원생 두 명과 함께 어두운 밤에 도망을 쳤다.
하지만 섬에 위치한 탓에 탈출은 순탄치 않았다.
배를 타고 겨우 산을 넘어 도착한 인근 마을에서는 선감학원 도망자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숨어 지내야 했다.
결국 스스로 탈출을 포기하고 어두운 밤을 틈타 다시 제 발로 기숙사에 돌아갔다.
그는 실제로 선감학원에서 탈출을 시도했다가 매를 맞는 일은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탈출하던 중 목숨을 잃는 아이들도 있었다.
김 씨는 어느 추운 겨울에 12명이 한 번에 도망간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중 한 아이가 얼어 죽은 채로 바닷가에서 발견됐다.
“애가 땡땡하게 얼었더라고요. 그래서 불을 피워서 녹이고, 산에다가 묻었어요.”
함께 지낸 원생들을 아침에 깨우고, 구보를 뛰는 등 학원 내 성실한 생활로 눈에 띈 그는 이곳에서 원장의 주선하에 결혼도 했다.
그때부턴 ‘원생’이 아니라 ‘직원’에 가까웠다.
1969년부터 1972년까지 기숙사 관리인직을 맡아 100여 명의 사생들을 관리했다.
김 씨는 선감학원에서 가장 오래 지냈던 원생이자, 근무자다.
그리고 한때 피해자였던 그도 그 ‘지옥’에선 누군가의 가해자가 됐다.
기숙사를 관리하는 동안 부당한 일을 지시하는 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관리자 역할을 한 김 씨를 원망하는 이들도 있다.
"나한테도 그런 질문이 들어와요. 지금 우리끼리 모임을 하잖아요.
그럼 ‘나 춘근이 형한테 매 맞았다.’ 이래요.
네가 뭘 잘못해서 내가 때린 거니, 물어보면 때린 사람은 생각 못 한다고 막 그래요."
무려 22년간 선감학원에 몸담았던 그는 학원이 폐쇄되던 1982년, 32세가 되던 해에 사회로 나왔다.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그는 일용직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 왔다.
현재 기초생활수급자인 그는 “배우지 못한 것”이 가장 억울하다고 말했다.
"우리 생존자 중 잘 사는 사람이 없어요.
머리에 들어간 게 있어야 어디 공장이라도 들어가서 일하는데, 그러니까 일을 못 하는 거예요.
그때 그 소년들의 미래가 선감도에서 어떻게 보면 끝났다고도 볼 수 있죠."
그는 선감학원 생존자 대부분이 글을 쓸 줄 모른다고 말했다.
"뭘 알아야 뭘 한다고 그러잖아요. 나도 지금 75세지만 운전면허 좀 따려고 해도 못 땄어요.
한글을 못 읽으니 창피스럽고 누구한테 알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현재 선감학원 부지에는 선감역사박물관이 있다.
여느 피해자들처럼 선감도 쪽은 쳐다보기조차 싫었다던 김 씨는 역사 해설사로 이곳에서 자신의 아픈 기억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한다.
"우리 생존자 중에서 선감도에 살았다는 걸 (주변에) 얘기조차 안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알면 창피할까 봐. 그래서 숨기고 있다가 이제 이렇게 진실이 밝혀지니까 (자녀들도) ‘우리 아빠가 이런 데 와서 고생했겠구나’ 하고 놀라더라고요."
어떤 보상을 기대하냐는 질문에 김 씨는 "어느 정도 살게끔 해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시설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바람이죠. 나라에서는 우리를 가둬놓고 노예를 시켰으니까, 우리가 보상해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경기도에서는) 해줄 수 있는 데까지 다 해주겠다고 대답은 해놨어요.
우리 집 없는 애들도 많아요. 여기 (터에) 쉼터라도 좀 해줬으면 하는 그런 바람이 있어요."
진실화해위는 2021년 5월 조사를 시작했고 이듬해 10월 18일 1차 진실규명 결정을 통해 행정안전부와 경기도에 예상 암매장지 6곳 전면 발굴, 유족에게 공식 사과 등 후속 조치를 권고했다.
이에 경기도지사가 나서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처음으로 위로금을 지급하는 등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애초 사건 당시 공권력을 중심으로 사건이 행해졌음에도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과는 찾아볼 수 없다.
진실화해위는 추가 조사를 통해 오는 3월 중으로 선감학원 사건에 대한 2차 진실규명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2024년 6월 20일 '부랑아 교화' 명목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약 40년간 경기 안산시의 섬 선감도에 아동들을 강제 수용했던 선감학원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배상하라는 첫 판결이 나왔습니다.
서울중앙지법은 피해자 13명이 낸 소송에서, 국가와 경기도가 함께 1년 수용에 5천만 원을 기준으로 총 21억여 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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