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금모으기 운동-1998년

Choi가이버 2026. 2. 16. 14:19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범국민적 운동. 대한민국에 있는 금을 국민들이 모아 시중에서 구입한 다음 한국은행의 금 보유고를 높여 그 금을 통해 국가신용도를 제고한 후 그를 바탕으로 외환보유고를 늘린다는 취지 하에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각자 집안에 있는 미국 달러를 포함한 외화 모으기 운동도 동시에 전개되었다.

1907년 일제가 경제적 예속을 위해 강요한 1,300만 원의 차관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국권을 회복하고자 대구에서 시작된 자발적 금모으기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국민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회원들은 12월 8일까지 금으로 된 물건들을 모아서 국가에 헌납하기로 결의했다.
1997년 11월 20일 새마을운동 단체 중 하나인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에서 선포한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이 시초가 되었다.

1997년 12월 3일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비상경제대책추진위원회 회의에서 이러한 외환위기 극복 계획이 보고되었고 정부는 경제난 극복을 위한 민간단체 차원의 바람직한 활동으로 평가했다. 
1998년 1월 5일부터 운동이 시작되었다. 
 'KBS 금 모으기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종전의 헌납이 아닌 보상의 체계로 운동의 성격도 바뀌었다.

날마다 감동적인 일이 벌어졌다. 
바로 전 세계를 감동시킨 금 모으기 운동이었다. 
국민들이 장롱 속의 금붙이를 꺼내 은행으로 가져갔다. 
전국의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금반지, 금 목걸이가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귀한 사연이 담겨 있는 소중한 징표들이었다.
국민들이 나라의 빈 곳간을 자신의 금으로 채우고 있었다. 
신혼부부는 결혼반지를, 젊은 부부는 아이의 돌 반지를, 노부부는 자식들이 사 준 효도 반지를 내놓았다. 
운동선수들은 평생 자랑거리이며 땀의 결정체인 금메달을 내놓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추기경 취임 때 받은 십자가를 쾌척했다고 한다. 그 귀한 것을 어떻게 내놓으시냐고 주위에서 아까워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은 몸을 버리셨는데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김대중 자서전' 2권 중-

금모으기 운동은 1997년 IMF(https://hl2tci.tistory.com/968) 구제금융 요청 당시 대한민국의 부채를 갚기 위해 국민들이 자신이 소유하던 금을 나라(대한민국)에 자발적인 희생정신으로 내어놓은 운동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외환 부채가 약 304억 달러에 이르렀다. 

1998년 1월 165t, 2월 53t, 3월 5t, 4월 0.8t 등 약 225톤이 모금되었고, 참여한 사람은 전국적으로 349만 명에 달했다. 
당시 시세로 21억 7천만 달러에 해당하는 금액이 모였다.
언론에서는 사회 각계의 금모으기 운동 참여 소식을 전했고, 국민에게 금모으기 운동에 동참할 당위성을 부여했다. 
3월 이후의 보도는 금모으기 운동을 통해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2개월간 금을 모으고 2월 말에는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금모으기 업무를 중지했으며, 4월 말에 농협중앙회가 마지막으로 업무를 끝내면서 금모으기 운동의 막이 내렸다.
같은 달 10일 열린 헌납식에서는 금 2445 돈, 은 133 돈, 외화 28 달러, 한화 701만 2천원을 기부받아 총 1억 3천 95만여 원이 모였다. 

이중 2만1천 명은 금 187kg을 헌납했으며 1천7백35명은 1백31kg을 국채를 사는 형식으로 위탁했다. 
수집기관별로는 주택은행(KBS-대우)이 136.4t으로 가장 많았고 농협(MBC-삼성)이 48.24t, 국민은행과 새마을금고(SBS-LG)가 33.68t, 외환은행이 4.25t, 기업은행이 1.98t씩을 모았다.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다.
이를 통해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진 2001년 8월 IMF로부터 지원받은 195억 달러의 차입금을 모두 상환했다.

모금액은 중소기업청에 중소기업지원금으로 전달됐다.
새마을 금모으기 운동은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의 긍정적인 평가에 힙입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을 제기하나, 반론도 있으며, 자서전 중 내용에 대한 해석 중의 하나인 것으로 판명된다.

전국적으로 351만여 명이 참여하여 이 운동으로 18억 달러 어치의 약 227(225?)톤의 금이 모였으며 4가구당 1가구 꼴로 평균 65g(17.33돈)을 내놓은 셈이 되었다.
금모으기 이전의 금 보유량은 10여 톤 정도였는데 무려 그 20배가 넘는 금이 모인 것이다. 
2019년 6월의 한국은행 금 보유량은 104톤#이었으므로 20여년 전 모인 금이 20여년 후 한국은행이 보유한 금 보유량보다도 2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걸 모두 금 보유고로 돌린다면 2019년 6월 기준 벨기에의 금 보유고와 맞먹게 되며 중앙은행 금 보유고로는 22위에 해당하는 양이다.

모인 금은 거의 대부분이 수출되었다. 
금을 수출한 가격은 22억 달러이며 이는 1998년 1/4분기 수출액 3백 23억 2천만 달러의 7%다. hl2tci
금 수출액을 빼면 고환율에도 불구하고 1998년 1/4분기 수출액은 1997년 1/4분기 수출액과 비교해서 8.4% 늘어났을 뿐이었다. 
결국 수출증가분의 대부분을 금 수출액이 차지한 것이다. 
참고로 1997년 11월의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고 20억 달러보다도 많으며 이때 IMF에서 차관으로 받은 210억 달러의 10% 정도에 해당한다.
금모으기 운동은 절대 공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금을 헌납하면 헌납한 사람에게 정부에서 실제 금값에 해당되는 돈보다 약간 더 얹어서 통장에 입금시켜 줬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고 아무 보상 없는 갈취식 헌납을 받았더라면 헌납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파산해서 길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등에서 IMF를 다루며 금모으기 운동을 조명한 적이 있었는데, 그 자체의 효용성보다는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자세가 국제적인 신용도를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상하는 당시 관련자나 외국 경제인의 평가 등이 소개되기도 했다. 
외환위기 당시 국민들이 스스로 갹출하여 개인의 삶에 피해를 보더라도 국가의 빚을 보상할 만큼 돈을 갚을 의지가 매우 강하다는 점과 이렇게 신속하고 조직적으로 단결된 의지가 있다는 것은 곧 "내부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상환해 나갈 능력이 있다."는 평가로 이어져 실제로 IMF와 주요 투자기관들이 신용등급을 빨리 회복시켜주고 구제금융을 투입하는 결정을 내린 것. 특히 중국과 대만에서는 '자국상품 애용' 이라고 그들에게 받아들여지는 한국에서의 현대차 점유율과 함께[5] 한국인들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칭찬할 때 나오는 단골 레퍼토리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도 국민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애국심에 활용하기 소재이므로 환구시보 같은 매체에서조차 금모으기 운동을 칭찬할 정도다. 
하지만 국가신용도는 근거를 바탕으로 산정되므로 인상이야 개선될지 몰라도 외환보유고로 전용하지 못한 점은 신용도에 뼈아팠음을 여전히 부정할 수 없다.

이 금모으기 운동이 결정적인 도움을 준 분야가 있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이 시행했던 한국 초고금리 정책의 철회를 이끌어낸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은 1997년 11월 한국을 IMF 관리체제로 접수하면서 남아메리카에서 IMF가 했던 그대로 초고금리 정책을 펼쳐서 외국인들의 한국 투자를 이끌어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98년 1월에는 한국의 기준금리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9월 6%에서 1998년 1월이 되자 한국 기준금리가 23%로 치솟아 버렸다. hl2tci
이런 초고금리 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외국인 투자는 안 들어오고 한국의 기업의 침체와 도산만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 금모으기 운동에 따라 모인 금을 해외에 수출하여 IMF 구제금융 300억 달러 채무에 일부 상환하자 IMF는 초고금리 정책을 1998년 5월 철회한다. 
1998년 5월 이후 23%였던 한국의 기준금리는 1999년 1월이 되자 5.25%까지 떨어져 외환위기 직전 수준을 하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