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IMF-1997년

Choi가이버 2025. 6. 14. 15:02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의 자금 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이에 따른 다방면에 걸친 경제 구조조정 부담도 능동적으로 감내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중략) 지금은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묻기보다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분담하여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이 담화를 기점으로 대한민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하에 운영됐다.
빛 독촉에 몰려 일가가 음독자살하고, 중소기업 사장이 투신자살하며, 어제까지 회사의 어엿한 중견간부이던 사람이 졸지에 집 잃고 마누라 잃고 서울역의 무숙자가 되고, 택시운전수가 강도로 돌변하며,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울고 있다. '소비의 사회', '영상세대의 등장', '정보통신혁명'의 구호가 들린 지가 어제인데 오늘은 생존을 위한 일차적 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사람들의 신음과 고통이, 한국전쟁 직후에나 볼 수 있었던 결식아동들의 쾡한 눈동자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밥 투정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뼈만 앙상히 남은 북한의 어린이들을 보라고 야단치던 한국의 부모들은 이제 고아원에 넘쳐나는 풀 죽은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김동춘, 한국 사회에서 '진보'의 의미, 경제와 사회, 1998년 봄호-

1997년부터 외환 위기 사태 발생 직전까지 문민정부의 금융 정책으로 인해 각 기업들은 무분별한 차입에 의존하며 무분별한 과잉투자를 벌였다. 
동시에 국외적으로는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인해 환율을 이용한 외국 자본의 차익 실현으로 동남아시아에 통화 위기가 발생하였고 동북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불안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 불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한국에서는 단순히 IMF (사태), (1997년) 외환위기, IMF 외환위기 등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세계적으로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1997 Asia Financial Crisis)로 불린다. 
이 시기에 한국만 위기를 겪은 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 전반이 큰 금융 위기를 겪었다. 1997~98년 당시 IMF에서 돈을 빌린 국가는 한국 이외에도 무려 40여개국에 달했는데, 이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 거의 필적하는 수준이다. 당시 인도네시아와 태국이 타격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였고 홍콩, 북한, 라오스,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필리핀, 몽골, 캄보디아, 마카오 등도 침체에 시달렸다. 브루나이, 중국, 싱가포르, 대만, 베트남 또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나마 영향을 덜 받았다.

그리고 당시 세계 2위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나게 큰 사건이다.

이러한 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 무분별한 차입으로 의존하던 한국 기업의 외국자본 단기부채 만료와 아시아 경제에 불안감을 느낀 외국 자본의 급격한 유출이 발생하면서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게 되었고, 충격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기업의 파산이나 부도, 대량 실직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경제 위기로 인하여 단기부채의 연장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환을 독촉받았다. 
한국은 이러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는데 해당 문서는 이를 상환하기 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IMF 사태는 1997년 말에 발생하여 2001년 8월 말까지 약 4년간 지속되었으며 이후에도 'IMF 사태 이후로 힘든 시기'나 'IMF보다 힘든 시기' 같은 표현으로 경제적 고난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외환 위기 직전까지 국내 경제가 호황을 누린 것으로 여겨지지만 1997년은 1월부터 한보 사태를 시작으로 대기업들과 그 하청업체들이 줄줄이 무너진 절망스러운 한 해였고, 위기 조짐은 전년인 1996년부터 보이고 있었다. 
1996년의 경제성장률이 1995년도의 9.7%에서 8.0%로 떨어졌던 것이 그 단초였고 언론에서는 경기 침체 및 전망에 대한 우려를 잇따라 보도하고 있었다. 
즉, 이미 이전부터 불황 조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외채 상환은 해야 하는데 당장 갚을 외화(달러$)는 없어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IMF에 "시키는 대로 할 테니 돈 좀 빌려주세요. 곧 갚을게요."라고 요청한 사건이다. 
대략 1985년부터 1996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즉 외환 위기 사태 발생 전이었던 대한민국이 OECD에 가입한 1996년까지의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불리던 시절을 누렸다.
그러나 1990년에 무역수지가 다시 적자로 돌아선 이래로 무역수지 적자행진은 꾸준히 이어져내려갔으며, 1996년의 무역 적자는 무려 230억 달러에 달하며 외채는 1,000억 달러를 뛰어넘는 등 이미 대내외적으로 장기적인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당수의 한국 경제학자들은 이를 일시적인 상황 정도로 여기고 머지않아 잃어버린 10년을 겪던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며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에 급급했다. 
즉, 현실 인식을 완전히 반대로 했다. 불과 몇년 전 일본에서도 곧 있으면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며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결국 외환 보유액 부족과 여러 가지 경제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지 못한 것이 발목을 잡게 되면서 이후의, 그리고 현재까지의 대한민국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먼저 배경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997년 외환위기는 아시아 전체에 일어난 대형 사태다. 
한국사 및 사회 국정교과서와 이후 검정교과서 모두 외환위기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당시 금 모으기 운동만을 강조해 외환위기 시절을 몸소 체험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1980년대 중반 이후 출생자들은 IMF 구제금융을 단지 '한국에서만 일어난 문제였다'고 오해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97년 여름 태국부터 시작해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국가부터 번진 외환 위기는 같은 해 가을 한국을 연쇄적으로 강타했고 직접적인 경제 위기까진 아니었던 중국과 일본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태국은 1995년부터 자국 통화가 위기에 빠질 때 중앙은행 간에 서로 도와주기로 한다는 쌍무협정을 주변 국가들과 체결해 놓고 있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사들의 투자성 환율공격이 이를 연쇄적으로 터트린 것. 그런데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는 동아시아 경제 위기 이후 동남아 지역의 투자가 증가하면서 일시적인 반사 이익을 좀 받긴 했다.
특히 중국은 동아시아 외환 위기로 동아시아 경제 블록에서 위상이 급격히 높아졌다.
쉽게 말해 미국산 대신 중국산을 선택하는 거래처가 많아진 것. 외국에서는 이 사태를 총체적으로 아시아 금융 위기(Asian Financial Crisis)라고 칭한다. hl2tci

그러나 동남아 국가 중 외환보유 대비 단기부채가 한국만이 독보적인 위치였던 건 한국만의 특수성이 있었다.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에 힘입어 동아시아에서 대한민국과 대만이 그 뒤를 쫓아 치고 올라가고 있었고 그것을 본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까지 그를 따라하기 시작한 이른바 안행 효과(雁行效果)가 일단 세계적 흐름의 배경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의 버블 붕괴까지 시작되며 '3저호황'으로 경제 성장률이 오르기 시작했고 기본적으로 당시 수출 주도형 국가들의 시스템은 자기 자본이 없는 국가지만 외국 자본을 많이 도입함으로써 자국 화폐 가치를 평가절하해 그 반사 이익으로 수출의 증대, 그렇게 생산되는 제품들을 통한 기술력 증대, 결과적으로 자국의 경제적 부흥을 이끌어내는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되었을 때 계속해서 잘 굴러가게 되면 자국의 자본이 적더라도 외국 자본을 통해 외국의 설비를 들여와 자국의 생산 기술을 올리며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기초과학과 기본기술을 올려 생산설비의 자체제작도 노려 볼 수 있는 괜찮은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이미 그렇게 성장해 온 나라로서 싱가포르와 한국, 대만이라는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아주 좋은 사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보통 여기에 홍콩도 포함되나 홍콩은 제조업이 아닌 금융업이 성장을 주도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다만 이 경우 수출의 증대를 통해 자국의 국가경쟁력이 강화되면 자국의 화폐가 평가절상된다. 
이렇게 되면 경상수지 적자 상황이 나기 때문에 환율조작을 통해 다시 강제적으로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시켜야만 다시 수출을 할 수 있게 되고 경제가 굴러갈 수 있게 된다.
게다가 기업고정자본형성이라는 고정투자로 투자 증가로 인한 경기확장으로 이어지게 만들었고 이는 물가안정에 도움을 주는 동시에 경상수지와 경제성장률을 높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한국은 1996년에 GDP의 5%에 달하는 경상수지 적자를 맞았다. 
이에 정부는 사치성 수입재가 경상수지 적자의 원인이라고 해명하며, 투자로 수출을 늘려 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한다.
게다가 1997년 1월 미국에서 금리 인상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미국 내수가 일시 축소되는 동시에 미국의 대외수입이 감소하며 한국을 비롯한 수출주도형 국가들이 수출을 할 시장의 규모가 감소했다.
이로 인해 생산된 물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것은 고사하고 투자나 융자로 외국자본을 유치한 국가들은 미국의 금리 인상 여파로 일부 큰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현상을 감당해야 하고+갚아야 할 돈이 늘어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특히 수출을 늘리고자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 시키는 순간 갚아야 할 돈이 더더욱 늘어나는 악재까지 나타나는 등 대형 악재가 연이어 터진 것이다.
화폐의 평가절하를 못 하게 되자 기업들은 경상수지 악화를 견뎌야 했고, 일시적인 수출량 부재에 이어 전에 계약해 둔 수입 물품으로 인해 유동자금 경색이 시작되자 재고품을 덤핑 판매하여 자금을 수혈했으며, 최후의 보루로 단기부채를 끌어오게 된 것이다. 
외환위기 직전 한국은 자동차 덤핑 대미 수출로 미국의 반덤핑 무역 제재법인 슈퍼 301조 조치를 받았던 게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김영삼 정부 측에서는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매년 300억 달러를 유지한다는 걸 국민들에게 알리며 안심시켰으나 실상은 정부 발표 외환보유액인 300억 달러의 5배를 족히 뛰어넘는 1,530억 달러라는 막대한 외채가 확인되었다.

건물의 기둥이 균열나면 건물 자체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다가 폭삭 내려앉는 것과 같다. 
돈을 신용, 즉 적정 한도 이상으로 빌리면, 그리고 외환을 적정 수준으로 보유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좋은 사례다. 
1. 한국은행이 1997년 3월 26일 외환위기 도래 가능성을 예고하고, 청와대와 재정경제원에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외화를 긴급차입하는 비상대책을 강구할 것을 건의했으며,
2. 역시 1997년 3월에 한국개발연구원(KDI) 역시 위기 가능성을 시사하며 대책강구를 촉구하는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강경식 전 경제부장관이 이 보고서가 시중에 유포되는 걸 못마땅해하는 눈치라 강경식 장관이 홍콩 출장 중일 때 전국에 배포했는데, 강 장관이 이를 알고 홍콩에서 대노, 재정경제원에서 해당 보고서를 다시 회수하는 일이 있었다.
※ 3년 후 강경식 전 경제부장관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고자 한나라당 입당을 시도했으나 외환위기와 이 보고서 회수건이 빌미가 되어 무산되었다.

사실 정부에서도 마냥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뒤늦게나마 금융개혁법을 발표하는 한편 중반기인 7월 무렵에는 기존 1만 달러였던 "(非사업자) 개인의 외환보유 한도를 50만 달러까지 확대하고, 출처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취지의 시행법령을 발표한 것이다. 
즉 어떤 경로로든지 좋으니 1인당 50만 불까지는 양지로 꺼내 달라는 부탁이었던 것.
이런 노력 끝에 300억 달러 수준의 외환보유고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위기 바로 전년도까지만 해도 선진국으로부터 기간은 12개월 이내의 단기면서 이율은 저이율인 외채를 끌어들여 롤오버로 연장해 가면서 그 돈을 다시 동남아시아 금융시장에 장기 고이율로 대주는 방식으로 따로 드는 돈도 필요없이 그야말로 앉아서 돈을 쓸어담으며 떼돈을 벌었던 종합금융회사(약칭 종금사)들과 OECD에 29번째로 가입해 선진국 클럽에 합류한 한국의 위상 문제, 그리고 12월에 실시하는 대통령 선거가 발목을 잡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무려 30여 개로 난립한 종금사들이 일본 등지에서 1년 이하 단기 외채로 끌어들인 돈을 다시 장기채권으로 빌려주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상황이 점점 나빠져서 불량채권이 늘어나게 되었고 미국의 금리인상 여파로 아시아 국가들에 투자된 자금 일부가 다시 미국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한국의 종금사들도 12월, 1~2월인 채권 만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1996년 BIS 자기자본비율의 도입으로 일본 은행들이 한국에 빌려준 부채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1994년에 수출 1,000억 달러를 돌파하고 1995년에는 마침내 선진국의 기준처럼 여겨진 국민소득 10,000달러까지 달성한, 문민정부의 경제성과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게다가 1996년 총선의 압승으로 여권 단독 표결로 통과시킬 수 있는 각종 개혁 입법들마저도 정권 말 지지도가 급락한 YS와 거리를 두려는 여당의원들의 비협조로 통과하지 못하였다. 표결에 다수가 불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7년 10월과 11월 사이 정부는 환율 급등을 막기 위해 118억 달러를 외환시장에 쏟아부었으나 해외시장에서 한국의 대외신인도를 다시 끌어올리지 못하고 무디스 등지의 신용평가회사들의 평점은 계속 하락하는 악재가 연이어 발생했다. 
이 와중에 대외부채상환용 외환마저 모두 다 써버려서 추후 있는 외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앞서 말한 300억 달러 유지는 사실상 11월을 지나면서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전이었다.

1997년 9월이 되자 외환보유액 부족이 본격적으로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불태화 정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영삼 전직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및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한테 긴급하게 한국한테 외환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본도 하필이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일본 Top 3인 야마이치 증권이 파산하고 일본 최대의 지방은행이던 홋카이도타쿠쇼쿠 은행이 파산하는 등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라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대신도 아시아 통화기금을 통해 타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려는 의지를 미국과 IMF측에 타진했는데 미국과 IMF는 찬성입장을 번복해서 반대했다. 이 사건으로 국제통화기금 자체에 대한 신뢰성에 의구심이 퍼지게 되었다.
11월 6일에는 미국과 IMF가 아시아 통화기금에 대해 찬성입장을 밝혔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이후 자신들의 불이익을 예상한 미국 로렌스 서머스 재무부 차관보는 이를 번복하고 아시아 통화기금은 위험하다며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고 사흘이 지난 11월 11일, 미국과 IMF의 반대로 일본주도의 아시아 통화기금 창설은 무산되었다.
그로 인하여 당시 미국과 일본간의 강한 신경전이 오갔으나 결국엔 11월 15일 일본 대장상이 아시아 통화기금 창설을 철회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일본주도의 AMF 아시아 통화기금 창설계획은 무산되었다.

흔히 한국에서는 일본이 자국으로 돈을 빼가서 외환위기가 더 빨리 왔던 것이 아니냐고 하는데 실상은 유일하게 도와줄 일본에서도 거품경제의 후유증이라든가 동남아발 외환위기로 투자에 실패하는 적자를 볼 위기에 처해 있어서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한국을 쉽게 도와줄 처지가 못 된 것도 있었다. 
현재 일본의 국가부채는 GDP 대비 250%에 달하는데 바로 하시모토 류타로 시절에 부실채권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그냥 일본 정부 부채로 인수하고 일본 국민연금의 적자를 일본 정부가 전부 다 떠안는다는 정부부채 확대 정책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당장 위에 나온 홋카이도타쿠쇼쿠은행을 누가 인수했냐면 우정성이 인수를 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이전에는 일본의 국가부채가 GDP대비 50% 수준이었으나 오부치 게이조 총리가 들어오는 2000년이 되면 일본의 정부부채는 GDP 대비 100%를 돌파하게 되었다.

일각에서는 과거에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문제로 "일본 놈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라는 말 때문에 한일관계가 안 좋아졌고 일본의 자본 지원이 있었더라면 1997년 외환 위기를 겪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을 가능성이나 대한민국 정부가 요청했는데도 미국의 압력이나 일본이 거부해서 자본을 지원하지 못했다는 등의 왜곡된 주장들이 존재하지만, 사실은 그 당시의 일본에서도 그야말로 '제 코가 석자'라서 한국을 도울 수 없을 정도로 재정적인 위기 상황이었던데다 금융위기 상황이라 위험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본을 지원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동남아발 외환위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많은 손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국은 일본이 독자적으로 한국 지원을 하지 못하게 철저히 막고 있었다.
임부총리가 11월28일 오후6시 일본 도쿄(東京)의 미쓰즈카 히로시(三塚博)대장상 집무실에 들어섰다.
"한국이 무너지면 일본도 흔들립니다. 일본이 (한국을) 도와줘야 합니다."
임부총리의 말에는 협박과 호소가 뒤섞여 있었다. 
임부총리는 일본계 은행들이 97년 들어 무려 1백50억달러를 회수해갔다는 자료도 내보였다.
그러나 미쓰즈카 대장상의 답변은 짧고도 명확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이때 미쓰즈카 대장상이 11월 초 루빈 미 재무장관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내보였다고 알려져 있다(이에 대한 일본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미쓰즈카는 루빈이 편지를 보냈는지 여부조차 확인해 주기를 거부했다).
이날 임부총리가 대장성을 나서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내용은 루빈 편지의 내용을 짐작케 한다.
"양국은 한국이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협력할 것입니다. (일본은) IMF의 틀 내에서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IMF로 가지 않으면 한 푼도 지원할 수 없다'는 미국의 입장을 일본도 앵무새처럼 반복한 셈이다.
다만 동아일보 김순덕 대기자는 외교 갈등을 보복하기 위해 일본 은행들이 일부러 돈을 빼갔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면서도,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만일 일본과 최상의 외교관계였어도 미국 핑계로 도움을 거절당했을까. 국가 대 국가의 지원은 아니어도 '만기 연장'의 행정지도나 통화 스와프 체결은 가능하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을 보였는데, 실제로 김대중 정부는 한일관계를 개선하고 일본 및 중국과 통화 스와프를 체결해 외환 유동성을 확보했다.
이 아시아통화기금은 국민의 정부의 집권 시기 김종필 국무총리에 의해 다시 제안되기도 했다.
당시 정부의 입장도 아시아통화기금을 김종필 국무총리의 사견으로 여겼으나 아시아통화기금에 대해 현상황에서는 한중일 금융협력이 최우선이나 장기적으로는 검토할 만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일본은 한국의 도움요청을 받아주지 않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 마쓰시타 야스오 총재는 일본은행이 매입했던 한국 정부의 외평채 50억 미국 달러에 대해 "외평채를 발행하던 시점의 한국 신용도에 비해 현재 한국 신용도가 떨어져 외평채에 손해가 발생하므로 한국 정부한테 외평채 조기 상환을 요구(콜옵션 행사)했다.

미국은 상황이 복잡했다. 
이미 클린턴 정부 중기부터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금리인상 기조를 밀어붙였고, 안보 관련해서는 4월부터 로버트 김 사태에 도널드 래클리프 구속 사태로 인해 한미간의 미묘한 갈등이 벌어지던 중에 한국의 외환위기가 터지자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샌디 버거 국가안보보좌관은 한국 상황이 심각하므로 150억 달러 수준의 긴급 차관을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 시점에 한국과 미국이 미국산 쇠고기와 대한민국 자동차 건으로 통상 분쟁을 빚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한국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에서 O-157 대장균이 검출됐다는 사실을 언론에 터뜨리면서 상황이 결정적으로 꼬였다. 
O-157 대장균 검출 사실이 공개되자 분노한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과 윌리엄 M. 데일리 상무장관, 앨 고어 부통령이 한국 지원에 대해 결사 반대 및 슈퍼 301조 적용을 통한 미국 협상력의 우위 확보를 주장하면서 한국을 절대 지원하면 안 된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미국 내각 내부에서 수많은 논쟁 끝에 고어 부통령과 루빈 재무장관이 이겼다. 
1997년 10월 2일 미국 정부는 슈퍼 301조를 발동시켜 한국의 모든 대미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10월 13일 수많은 격론 끝에 로버트 루빈과 앨 고어의 의견대로 미국 정부는 한국에 대한 특별 차관 제공을 거부했다.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나중에 회고록에서 1997년 10월의 한국 지원 거부 결정을 하고 나서 미국 재무부 직원들한테 "한국은 이제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루빈 장관은 IMF에서 미국이 가진 거부권을 발동해서, '한국의 IMF 관리체제 승인조차 거부'하려는 생각도 있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정리하자면 동아시아의 경제 급성장 기류에 편승한 한국의 초호황경제로 인한 세계시장 내 비중 확대와 여러 기술적 진보가 오히려 금융위기를 악화시키는 뇌관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

이 냉랭했던 한미관계는 민간 사회에서도 영향을 끼쳤다. 
1997년 6월 24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한국 정치외교 사학회가 전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천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4대 강국 가운데 한국의 안보에 가장 위협을 줄 수 있는 나라로는 응답자의 10명중 4명이나 미국을 꼽아 이 조사에서 90년대 들어 심해진 혐미, 반미감정을 잘 나타내었다. 
이 조사에선 미국다음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를 꼽아 한국과 통상마찰이 잦은 미국과 일본에 더욱 반감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조사가 나온 1997년 6월 27일 캐나다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의 모습, 이 자리에서 클린턴은 김영삼 대통령과 마지못해 악수를 하면서도 김영삼 대통령의 눈길조차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사상 최악의 관계를 보였던 것은 김영삼의 임기 말인 97년 한미관계였다. 
1997년 6월 27일 뉴욕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클린턴은 서로의 얼굴조차 외면할 정도로 매우 냉랭한 관계를 보였으며, 이 때문인지 1997년 한 해동안 주한미국대사가 공석이었다. 
결국 사태가 터진 1997년 12월 15일, 미국이 마지못해 스티븐 보스워스 대사를 임명하여 김영삼이 그에게 신임장을 수여했지만 1년 동안이나 주미대사의 공백이 발생한 1997년은 그당시 얼어붙은 한미관계의 현실을 절실히 보여준 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반미감정이 한국을 벼랑 끝에서 건져냈다. 
1997년 12월 9일 미국 정부 내에서는 격렬한 토론이 오갔다. 루빈 재무부 장관은 끝까지 한국에 대한 외채 만기를 월가 등 민간에 맡기자는 입장이었으나, 코언 국방부 장관과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은 북한의 존재와 한국 내 반미의식을 들어 한국에 대한 빠른 지원을 주장했다.
그나마 마지막에 국방부 국무부의 의견이 먹혔는지 채권 만기가 연장되었다.
하지만 IMF와 재무부의 강한 요구에 가장 친미적 집단인 재계까지 이게 동맹이냐고 울분을 토할 지경으로 국방부, 국무부의 우려대로 한국 내 반미감정은 매우 커졌다. 
국방부와 주한미군은 그 이후 한국 내 반미감정을 누그러지게 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그 무렵 11월 18일자 보도를 보면 당시 금융지표들이 악화일로를 치달으면서 금융권은 물론 정부 일각에서도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었다. 
금융계는 당시의 대내외의 여건상 구제금융을 통해 국제통화기금의 수혈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펴고 있었는데, 이미 몇주전부터 국내 금융기관은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이건 민간은행이건간에 해외차입이 사실상 봉쇄된 상황이라는 게 구제금융 불가피성의 근거였다. 
그리고 이미 프랑스의 한 경제잡지는 한국정부가 은밀하게 IMF에 구제금융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기사마저 게재하여 한국의 구제금융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공식적으로 구제금융설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었다.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만큼 한국의 외화부족이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입장이었다. 
그러나 정부 일각에서는 구제금융 가능성에 대해 수긍하는 견해가 나오고 있었다. 
한국은행을 통해서 외화차입에 나서는 등 비상시의 외화확보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처럼 그리 쉽지 않고 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지적과 함께, IMF의 기능이 바로 특정 회원국의 외환위기를 극복해주는 것이어서 신청 즉시 30억달러 가량의 자금지원을 신속하게 받을 수 있으며 금리 조건도 리보(런던은행간금리)보다 낮아서 사용국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또한 국제통화기금 지원을 받는 순간 대외신인도 문제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1997년 11월 18일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와 민주당 조순 총재는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이런 사태가 계속되면 우리나라가 부도위기에 몰리게 된다. 
정부와 한은이 자립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게 최선이지만 그래도 외환이 부족하다면 IMF로부터 긴급 외환지원을 받을수 있다. 
물론 이것은 최후의 수단이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또한 기자회견을 열어 "대외 신인도를 높이고 긴급 외화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IMF에 자금지원을 요청할 것을 촉구한다"면서 'IMF 자금지원 요청', '경제구조조정 특별법 제정' 등의 방안을 정부에 촉구했다.
11월 20일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당시 상황에 대해 대기업 부도와 금융불안, 증시붕락, 외환위기로 이어지는 매우 위험한 상황으로 국가가 부도날 가능성이 있는 총체적 위기로 규정하면서, 외환위기 극복 대책으로는 외환보유고를 늘리기 위한 범국민운동으로 해외여행을 줄이는 등의 '달러 아끼기와 모으기 운동' 전개를 제의했으며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요청을 적극 검토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구제금융을 받더라도 경제주권이 상실될 일은 없을 것"이라며 IMF 자금수용에 대해 적극 수용 입장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11월 20일 오후 IMF 수석부총재와 만나 IMF 구제금융 신청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으며 20일 재경원 등 관계부처 논의 후 정부는 11월 21일 IMF 구제금융 신청 방침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인가를 받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1997년 11월 22일 청와대 영수회담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IMF자금의 활용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협조해주시기 바란다."고 하자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IMF 자금활용을 서둘러야 한다. 
우리가 1985년 IMF를 졸업하기 전에 우리 경제에 대해 정책충고를 한 것이 경제체질 개선에 큰 도움이 됐다. 
IMF 자금에는 조건이 있지만 이를 계기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체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조순 총재는 "IMF 지원을 받기로 한 것은 옳은 방향이다. 
정부는 그동안 지원을 받는게 잘못된양 얘기해왔는데 잘못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정부가 IMF지원을 받지 않는다고 공언해놓고 이제 와서 받는다니 국민들의 자존심이 상하고 불만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시에 정부는 거시경제 운용에 대한 IMF측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였는데, 경제성장률이 정부가 생각했던 GDP기준 6%~6.5%에서 3%로 낮아지게 되어 인위적인 긴축에 따른 부작용이 전망되었고, 긴축성장과 함께 예산삭감이 불가피해 각종 사업 차질과 기업들의 투자 위측 등으로 대량실업사태가 우려되었다. 
또한 부가가치세율 인상으로 국민들의 체감 경기는 성장률 하락 이상일 것으로 예상됐으며, 더욱이 환율상승 등으로 물가상승 압력은 높아지고 있는데 정부가 인위적으로 물가를 4.5%대에 묶으려면 결국 임금동결 등의 비상조치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등의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대해 대선주자들 간에 의견충돌이 있었는데 김대중 후보와 국민회의 측은 "우리나라에 지나친 부담이 되는 부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 세부사항에 대한 추가협상을 통해 국민들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 "지금의 협약내용대로면 한국 경제가 대량실업 등으로 힘들어질 것"이라며 재협상 혹은 추가협상을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이회창 후보와 조순 한나라당 총재는 "한국 측이 더 적극적으로 IMF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혀야 경제위기를 빠른 시간 안에 극복할 수 있다.", "국민회의의 재협상 주장은 정치적 인기발언이다."며 김대중 측을 비판하였다. 
IMF는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등 유력 대선 후보들로부터 '협정 준수 이행 각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이후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1월 18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3개월 미만의 단기외채는 250억 달러에 이르는 반면 외환 보유고는 120억 달러에 불과하고 게다가 매년 이자가 한 150억 불이 나가야 한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또한 외국자본의 무차별 유입이 경제 식민지를 초래할 지 모른다는 세간의 우려에 대해서는 "미국은 약 17%가 외국 자본입니다. 우리나라는 얼만지 아십니까? 불과 2%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급해져도 누가 안 도와주는 겁니다."라고 답변했다. 
이어 경제 파탄의 직접 책임이 국민에게는 없지만 물가나 실업 사태 등으로 어느 가정이든 피해를 볼 것이라면서 난국 타개를 위해 국민들이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후 김대중은 미국 부통령 앨 고어와의 말레이시아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철강보조금문제와 쇠고기 문제, 지지부진한 한국의 구조조정 문제를 고어에게 강하게 추궁/질책당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미국의 조기 자금지원으로 국가부도 위기를 넘기고 외채의 만기연장률도 1997년 12월 18일 5.1퍼센트에서 1998년 1월 15일 77.4%로 급속회복되었으나 외환분야에서 실물분야로 위기가 전염되어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량해고가 발생했다. 
1997년 12월 사태가 시작된 직후 대한민국의 실업률은 3.1%로 집계되었다.

1997년 10월 외환위기 직전 노동부에 신고된 전국 사업장 체불임금 금액은 6,480억 원에 달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임금도 못 받는 상황에 직면해 경제위기 상황을 실감케 해 준다.
당연히 상황이 상황이었고 노동부도 어떻게든 고용주로부터 체불임금을 받아내려고 노력하고 싶었지만 대다수 사업체가 아예 증발해버렸거나 공매로 넘겨도 한푼도 못 건질 상황이었고, 그렇다고 국가가 오늘날과 같이 구직지원금을 지원해주자니 국고가 형편이 안되어서 대다수 체불임금은 그대로 받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당시 유명 백화점인 뉴코아나 미도파 등이 부도났는데도 시민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 많은 시민들이 평소와 같이 백화점을 찾았는데 알고 보니 부도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상황도 많았다. 
이는 종금사나 증권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98년 1월에 집계된 실업률은 4.7%를 기록하고 1년 전보다 3배 많은 3,300여 개의 업체가 도산했다. 
노동부마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실업급여 신청자 수가 폭증하였으며 임금체불 신고도 급증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99년 2월, 실업률이 1966년 이후 최고인 8.7%에 달해 전무후무한 경기위축을 실감하게 하였다. 
1999년 2월을 피크로 실업률은 하락하였으나 현재까지도 여파가 미쳐 취업난은 아직까지도 한국 경제를 괴롭히는 주요 문제다.

1997년 11월 19일, 경제가 위기에 빠져들면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물러나고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이 새 경제 부총리로 임명됐다.
환율 변동 폭을 현행 2.25% 범위 내에서 10% 범위 내로 대폭 확대한다고 발표한다.
이튿날 11월 21일, 정부가 결국 국제통화기금의 구제 금융을 신청하기로 했다. 
당시 MBC 이인용 앵커의 말대로 "경제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부도를 인정하고 국제기관의 품 안에서 회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아픈 처지"가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IMF의 지원을 받은 나라들이 경제 주권을 포기할 정도라는 말이 있듯 IMF가 그냥 무조건적으로 돈을 빌려주는 곳이 아니며 IMF의 명령에 따라 경제 운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불만도 상당했다. 
그러나 당시 KBS 보도 중에선 부작용 관련 얘기가 별로 없었다.
IMF 구제금융 요청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경제자체의 신뢰도는 끝장났고 IMF의 경제식민지가 된 이상세계의 금융기관들 사이에서 나라경제 신뢰도는 남미의 개도국 아르헨티나 수준으로 끝장났으며, IMF 측에서도 한국이 IMF와 맺은 약속을 지킬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서 강하게 의심했다. 
오죽하면 미셸 캉드쉬 당시 IMF 총재는 12월 13일 미국 PBS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고질적인 정경유착 행태를 꼬집으며 "한국 정부는 금융기관 기업과 근친상간적인 관계"라며 힐난했다.-(MBC 보도)- 
다만 KBS에서는 캉드쉬의 동일 인터뷰를 다루며 "한국은 최악의 위기상황을 벗어났다"는 발언을 강조하여 다른 관점으로 보도했다.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는 김영삼 대통령과 3당 대통령 후보와의 청와대 만찬에 참석해 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의 불가피성을 설명한 뒤 그날 밤 10시에 IMF 구제금융 요청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임창열 부총리는 그날 대한민국을 방문 중이던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티모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부 차관보와의 잇단 접촉에서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2월 3일 IMF와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발표되었다.

임창열 경제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협상을 마치고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대회의장으로 나와서 협상의 타결 소식을 전했는데, 캉드쉬 총재는 이 자리에서 한국에 지원할 자금 규모는 모두 550억 달러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먼저 550억 달러의 자금 조달 내역을 보면 국제통화기금가 210억 달러, IBRD 세계은행이 100억 달러, ADB 아시아 개발은행이 40억 달러 등 국제기구에서 350억 달러를 지원하는 데 합의했다. 
사실상 경제주권을 국제통화기금에 바친 셈이다.
이 양해각서가 체결된 12월 3일은 대한민국이 IMF 관리 체제로 들어선 시점으로 보는 편이다.

이후 약 4년간 한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의 경제 정책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게 되었다.-(관련 기사: KBS, MBC)- 
이런 관계는 2001년 8월 23일 한국은행이 IMF 구제금융 차입금 195억 달러 전액을 상환해서 당초 예정보다 3년 빨리 IMF 관리 체제 종료가 될 때까지 이어졌다.
우리 스스로를 비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가히 국치일이라 할 만 합니다.-1997년 12월 3일 MBC 뉴스데스크 이인용 앵커의 오프닝 멘트 일부-
이날의 체결은 모든 방송사가 생중계로 송출할 정도로 국가 초미의 관심사였고,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담으로 소비하는 등 대수롭지 않은 분위기였으나 정작 협상이 체결된 직후의 사회 분위기는 위의 이인용 앵커의 말마따나 국치일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때 위기에 비해 가혹한 처방을 강요한 IMF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IMF도 느낀 게 있었는지 이명박 정부 시절에 한국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처방을 내린 것을 실수였다고 인정했다.

가장 큰 후유증은 다름 아닌 출산율이다. 
하필이면 외환위기 시기는 2차 베이비붐(1968~1974년생) 세대들이 한창 결혼과 출산을 할 시기에 찾아왔다. 
이들 중 적잖은 수가 결혼과 출산을 미루며 본격적으로 만혼 추세와 초산 연령 상승, 출산율 감소가 시작되었다.
한 해 100만명이나 태어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인구집단 중 하나인 이들의 출산율이 2005년 1.08명까지 줄어들면서 인구구조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2005년 이후 가장 출산율이 높은 해는 2012년으로 1.3명에 불과하다. IMF 이후 만들어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출산율 하락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지적은 계속됐지만 백약이 무효로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2018년 이후로는 출산율이 0명대로 접어들었고 2020년대 이후에도 초저출산이 더욱 심화되었다.

흔히 이 사태를 두고 'IMF' 혹은 'IMF 사태'라고 많이 이야기하는데, 사실 IMF는 정식 명칭으로는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으로 구제금융을 해 준 기관인 것이지 외환위기의 원인은 아니다. 
정확히는 "대한민국의 외환 위기"가 맞고, 학술적으로는 상술하였듯이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중 대한민국의 사례로 보고 있다. 
1970년대 석유 파동 당시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이하 주요 국무위원들이 외환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1997~1998년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영업활동에 나섰다. 
1970년대 석유 파동 당시 미국을 방문해 달러화 지원을 요청했던 김종필 국무총리는 사태 수습에 한창이었던 1998년에 다시 국무총리를 맡아 김용환과 함께 경제를 조율할 관료들을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역할을 맡았다.
'저승사자'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이 시기에 구원투수로 등판, 30대 기업의 구조조정을 강하게 밀어붙여 1996년 말 기준 평균 387%의 부채율을 평균 200% 이하로 줄이고 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을 8% 이상으로 강제해 재무구조를 강화하는 데 성공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해외 순방 때마다 투자유치 활동을 겸하여 한동안 홈플러스의 모기업였던 테스코 사가 이 무렵 한국 투자를 결정하기도 하였다.

 

●당시 사라진 유명 기업, 금융기관 목록
거평그룹. 고합그룹. 극동그룹. 갑을그룹. 기아그룹. 나산그룹. 뉴코아그룹. 대농그룹. 대우그룹. 동아그룹. 삼미그룹. 신동방그룹. 신동아그룹.새한그룹. 성원토건그룹. 신호그룹. 해태그룹. 쌍방울그룹. 쌍용그룹. 아남그룹. 우성그룹. 우방그룹. 진로그룹. 청구그룹.파스퇴르유업. 삼립식품. 한보그룹. 한일그룹. 한라그룹. 강원산업그룹. 충남방적그룹. 온누리여행사. 태일정밀. 동국무역그룹. 한신공영그룹. 조양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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