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 15 부정선거-1960년

Choi가이버 2026. 3. 14. 17:04

1960년 3월 15일 치러진 부정선거. 이 사건으로 인해 3.15 의거와 4.19 혁명이 발발했다. 
직전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장면이 이겼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된다면 이승만이 사망할 시 대통령직이 민주당 소속 부통령에게 승계된다는 것을 우려한 자유당에 의해 부정선거가 자행되었다.
다만 이 선거가 국회에 의해 법적으로 무효 처리되지는 않았다. 
사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는데, 두 당선인 모두 임기 개시일 이전에 사퇴하거나 사망하여 어차피 재보궐선거를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1956년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민주당 신익희에게 도전을 받았으나, 선거 운동 기간 도중에 신익희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유일한 야당 후보가 된 조봉암은 야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일방적인 압승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막상 실제 선거에서는 조봉암에게 30% 가량의 득표율을 내주었고, 부통령은 민주당 장면이 자유당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당시 결과는 이승만은 504만 표, 조봉암 약 216만 표에 투표 당시 사망 상태인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약 185만 표가 나왔으며, 추모표까지 합치면 이승만은 전체 득표의 55.7%를 가져가는데 그치며 약 44.3% 가량의 유권자들이 끝끝내 이승만을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2대 대통령 선거와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압승으로 자신이 국부로서 존경받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이승만은 이에 충격을 받았다.
요즘 시각에서 보면 3자 구도에서 55.7%를 확보하면서 승리를 거둔 격이었기 때문에 왜 불쾌해한 거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당시 이승만과 자유당 입장에서는 이승만 독식 구도가 아닌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 성균관대학교 서중석 명예교수는 1955년경부터 '이승만 숭배 운동'이 일었던 당시의 상황을 지적했다. 
요약하자면 3대 대선을 전후해서 이승만에 대한 찬양 여론 조성이 자유당 정권 및 친여 세력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선거 운동 도중에 유력 야당 후보가 사망하는 호재까지 겹쳤지만 그럼에도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 44%가 끝끝내 이승만에게 표를 던지는 것을 거부하면서 74.6%의 득표율을 기록한 제2대 대통령 선거 때에 비해 지지율이 크게 내려간 것을 입증한 것은 물론 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야당 후보가 당선되고, 전체 득표에서도 친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과반에 미달하여 최소한 전체 유권자의 절반에 가까운 수가 이승만에게 비판적이라는 것이 단단히 입증된지라 체면을 단단히 구겨버린 셈이었다. 
물론 제주 4.3 사건과 보도연맹 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 각종 사건사고와 학살로 죽은 사람은 수십만 단위에 달하지만, 전후 반공을 강조하던 분위기로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공권력에 맞서 제대로 낼 수 없던 시대적 상황이었음에도 야당이 자유당을 제친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3대 대선이 치러지기 2년 전인 1954년 9월 18일에는 교통부 광장에서 '철도 창설 55주년 기념 이승만 대통령 흉상 제막식'이 열렸고, 1956년에는 파고다공원과 남산에도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
뚝섬에다 이승만의 호를 따서 '우남송덕관'을 짓고 또 이승만의 반신상을 세웠으며, 남산에는 우남정을, 남한산성에는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서 오래오래 사시기를 축수한다"는 뜻으로 송수탑(頌壽塔)을 세우고 파주 용미리에도 앞서 1954년에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옆에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탑인 '미륵불 이대통령 각하 기념탑'을 세웠다.  
또 그 당시 건축 중이던 서울시민회관을 두고는 '우남회관'이라고 불렀다.
1955년에 부산의 용두산공원도 '우남공원'으로 이름이 바뀌는가 하면, 1958년 11월 16일에는 이승만의 모교라는 배재중고에 '우남학관'도 만들어졌고 중앙대학교와 대전에서는 이승만 탄신 80주년을 기념한 '우남기념도서관'도 신축 중이었다. 
심지어 1955년부터는 아예 서울시의 명칭을 우남시로 바꾸자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러한 일련의 '이승만 열풍'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정권에 아부하고 영합하는 자들의 알아서 기기에 가까웠고,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 정권이 지지층 결집 및 득표를 위해 조장한 면도 없지 않았다. 
'민족의 태양', '위대한 반공 지도자', '국부' 이렇게 칭송하는 글들이 당시에도 꽤 많이 나왔다. 
1959년 10월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측면 얼굴을 도안으로 하고 후면에는 대통령 문장을 넣은 100환짜리 동전이 나오는 등 대통령을 소재로 한 화폐도 8종이 발행됐다.
그랬는데 3대 대선이 있고 석 달 뒤인 1956년 8월의 지방자치선거에서 수도권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이 강세를 보였는데, 서울만 하더라도 서울시의원의 47명 중 40명이 민주당에서 당선되었다. 
자유당은 1명밖에 못 됐다. 사회 여기저기에서 이승만의 호를 붙인 정자를 짓고 동상을 세우며 한껏 이승만을 국부로 띄워주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나온 선거 결과가 이랬는데, 이승만의 심정이 좋았을 리는 없다.
그리고 자유당은 대선이 끝나자마자 다음 대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958년에 치러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233석 가운데 127석을 확보하여 의석 과반을 확보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민주당도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승리를 거두며 개헌저지선을 넘는 79석을 확보하였고 자유당은 여러 가지 부정선거를 저질렀음에도 득표율은 42.1%에 머물렀다. 
이에 자유당은 불리해진 전황을 뒤집어 보고자 했고, 그리하여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제거된 뒤 자유당 정권의 처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언론(특히 경향신문)에 재갈을 물리는 신 국가보안법을 발동시키고 민주당이 아직 대통령 후보조차 정하지 못하고 내부 갈등으로 갈팡질팡하던 1959년 3월부터 이미 새로운 내무장관이 된 최인규의 지도 하에 부정선거 계획을 수립했다.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최전선에는 항상 최인규가 있었다. 
내무장관 취임식 연설에서 "모든 공무원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기필코 자유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며 일찌감치 싹수를 보인 그는 전국 시·읍·면·동에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해 매주 1회씩 모여 득표 공작을 점검하고, 같은 해 5월부터 11월까지 서울, 인천, 대전, 춘천, 대구, 광주, 부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측 후보자가 당선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 놓고 보아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 
국가대업 수행을 위하여 지시하는 것이니 군수 서장들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최인규, 군수 및 경찰서장들과의 모임에서 (출처: 국가기록원 자료)-

* 4할 사전투표: 선거당일 자연 기권표와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전체 유권자 4할 정도의 표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어둔다.
* 3인조 5인조 공개투표: 미리 짜둔 3인조, 5인조 별로 조장의 확인 아래 투표하여 자유당 선거위원에게 보여준 다음 투표함에 넣는다.
* 완장부대 활용: 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을 여럿 투표소 주변에 배치시켜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자유당에게 투표하도록 유도한다.
* 야당 참관인 축출: 민주당 측 참관인을 매수해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구실을 붙여 투표장에서 축출한다.-당시 제시된 구체적인 부정선거 행동지침-

자유당과 정부는 애초에 대통령과 부통령 모두에 대한 부정선거를 시도, 준비하고 있었다. 
1960년 2월 3일, 정부는 선거를 기존의 5월에서 두 달 앞당긴 3월 15일에 치르기로 발표했다. 
농번기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라지만 애초에 과거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 모두 농번기인 5월에 치러졌던 점, 그리고 당시 이승만의 유력한 대항마로 주목되던 야당의 조병옥 후보가 신병 치료차 미국에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야당 후보가 제대로 유세를 할 수 없는 틈을 노리겠다는 저의가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충분했고 당시 언론이나 정계 인사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기왕 농번기를 피하려면 7월로 미루는 게 어떠냐는 문제 제기도 있었지만 정부는 듣지 않았다. 
조병옥도 선거가 갑자기 앞당겨졌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전해들었으며, "등에다 대고 총을 쏘는 추잡한 정략"이라고 격노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조병옥이 갑작스레 미국에서 병사했다. 
대통령 선거에 후보 등록을 한 사람이 이승만과 조병옥 2명밖에 없었는데 조병옥이 죽었으니 이로써 사실상 대통령은 이승만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대통령 선거의 경우는 그렇더라도 투표를 해서 전체 유권자의 30%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당선되도록 했지만, 아무리 여론이 안 좋아졌어도 국부 버프를 받아 고정 지지층이 있는 이승만이 고작 30%를 못 받을 리는 없었다.
부통령 선거의 경우 지난번 대선에서 자유당이 내세웠던 이기붕이 보기 좋게 민주당의 장면에게 박살났기에 승산이 없어 보였다. 
부통령의 권한 자체는 크진 않았지만, 문제는 당시 헌법 기준으론 대통령 유고 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한다는 것이었다. 
제1공화국 시절의 부통령은 이후의 국무총리와는 달리 대통령이 사망하면 권한대행이 아닌 차기 대통령으로서 남은 임기를 수행하게 된다.
선거 당시 이승만이 워낙 고령이었기 때문에, 장면이 또 부통령으로 당선되고 이승만이 임기 중 혹여 사망해 버리면 그 즉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자유당은 실각할 것이었다.
따라서 대통령 당선을 위해 준비했던 부정선거 계획은 자연스레 부통령 당선을 위한 것으로 대신 진행되었다.

자유당이 이승만 사후를 대비해 부통령으로 내세운 이기붕에 대한 당시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지금 봐도 장수했다고 할 수 있는 85세의 고령이었던 데다가 건강 상태도 안 좋아 보였기 때문에 정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국민과 언론들의 여론도 이승만의 장기 독재에 지쳐있긴 했으나 그래도 일단은 국부에 준하는 대접을 받는 인물인 만큼 대놓고 낙선시켜 쫓아내기보다는 부통령에 장면을 당선시키는 방법으로 자연스러운 정권 교체를 유도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래서 더욱 장면에게 우호적인 여론이 쏠린 것도 있었다.  hl2tci
결국 목표를 부통령으로 바꾸고 1년 정도를 기다리고 마침내 시작된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최인규를 비롯한 자유당은 꾸준히 준비해온 자신들의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독재를 위해 3.15 부정선거에 올인한 자유당 정권은 부정선거 자금 마련을 위해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대출 커넥션을 동원했다. 
그 결과 1000만 환 이상의 선거 자금을 바친 기업인들이 200여 명, 총액은 70억 환에 달했다. 
또 도로사업비 등 정부사업예산에서 80억 환을 전용, 선거 자금으로 사용했다.

이 선거 자금 조달 작전에 앞장선 것은 박용익 자유당 총무위원장이었고 송인상 재무장관, 김진형 한국은행 총재, 김영찬 산업은행 총재, 김영휘·배제인 한국은행 부총재 등이 동원됐다. 
우선 12개 주요업체로부터 선거자금을 징수했다. 
대한양회, 극동해운, 중앙산업, 경남모방, 동양시멘트, 삼호방직, 대한방직협회, 삼성물산, 태창방직, 대한방직 등 주요 재벌들이 수억 환씩, 도합 21억 환을 모금했다. 
또한 산업은행은 산업부흥국채 인수를 핑계로 13개 업체에 42억 환을 대출해주고 대출액의 30% 내외를 선거 자금으로 뜯어내 총 17억 환을 조달했다. 
대한중공업 9억 환, 대한양회 5억 환, 기아산업 3억5000만 환, 조선방직 5억 환, 락희화학 2억 환, 한선기계 1억 5000만 환, 한국나이론 2억 2500만 환, 동립산업 7억 환, 대한중기 3억 환, 동신화학 2억 환, 고려모직 2억 환 및 극동연료 5억 환 등이었다. 
이것이 1958년의 연계자금 사건에 이어 산업은행의 제2의 정치 자금 의혹 사건이다.

● 부정선거 방식
가능한 온갖 수법들이 총동원되었다. 다음은 당시 민주당 의원들이 입수한 부정선거 관련 문서에 나온 정황들이다.
4할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투표함의 4할(40%) 정도를 이승만, 이기붕으로 미리 채워놓고 시작했다. 
선거 전에 미리 이기붕 표로 채우거나 이기붕 표로 채워진 투표함으로 바꿔치기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이런저런 핑계를 대 야당 측 참관인을 몰아내고 표를 조작했다. 
투표소 시계를 조작해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인데도 선거가 끝났다면서 내쫓거나 막무가내로 협박, 납치, 폭행으로 축출하는 등 억지로라도 내보냈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미 써먹은 수법이었다. 당시 이름을 날리던 수많은 정치깡패들이 이 악행에 동참하였다.
3인조, 5인조 투표: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을 지도한다며 3~5인씩 한 조로 투표하게 했다. 
물론 각 조의 조장은 당연히 자유당 후보를 찍게 유도했다. 
노년층은 아직 문맹자가 많았기 때문에 투표를 도와드린다는 명분이 잘 먹혔지만, 일찍이 도시화가 진행되어 정치색이 짙었던 도시 시민들 입장에선 코웃음도 안 나오는 일이었다. 
7인조 투표도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모의투표까지 진행했다.
뇌물 살포 및 협박: 사람들에게 뇌물을 뿌리면서 자유당 투표를 독려했고, 이른바 "어깨"들을 동원해 유권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유권자를 협박했다.

개표도 철저하게 조작했다. 이른바 창의적인 개표 방법.
올빼미표: 밤중에 투표소에 몰래 잠입하여 투표 현장에 있던 투표함을 싸그리 바꿔버린다. 
심지어 대낮에 일부러 불을 끄고 정전 드립을 치면서 어둠을 틈타 미리 준비한 투표함으로 바꿔치기도 했다.
피아노표: 부정 개표가 얼마나 교묘히 이루어졌는지 보여주는 사례. 매수된 검표원이 야당 후보를 찍은 표를 보면 책상 아래에 떨어트린 척하며 책상 아래로 들어가 양 손가락에 지장을 듬뿍 찍은 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사정없이 찍어서 무효표로 만들었다.
샌드위치 개표: 다른 후보를 찍은 표 뭉치 위아래에 한 장씩 이기붕의 표를 씌운 후 모두 이기붕의 표로 집계했으며, 아예 검표하지도 않고 몽땅 이기붕의 표로 집계하는 무식한 방법을 쓰기도 했다. 
그러니까 맨 첫 표가 이기붕을 찍었고 마지막 표도 이기붕을 찍었으니 그 사이에 있는 표 뭉치도 모두 이기붕 것이겠거니 하고 냅다 못을 박아버리는 말도 안 되는 수법이다. 그야말로 기적의 논리의 극치.
그 외에 군인들이 투표할 때는 담당관이 보는 앞에서 투표해야 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 당시 대한민국 군인들이 투표할 때 일어났던 셈이다. 
군대에서의 부정선거는 이 사건 이후에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다가 1992년 이지문 중위가 군대 내 부정선거를 폭로한 이후에 사라졌다.

● 결과
당연히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었다. 
문제는 선거 조작을 너무 열성적으로 한 나머지 이기붕의 득표율이 99%를 찍고 일부 지역은 총 유권자를 넘긴 115%를 달성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 개표 결과를 보고 자유당 국무위원들부터가 이게 말이 되냐고 뒤집혔으니 말 다 했다. 
부흥부 장관 신현확이 투표할 줄 모르는 노인들의 무효표도 지금 장면의 표보단 많이 나오겠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다른 장관들은 좀 더 지켜봐야 하지 않냐는 반응이었지만 그 대구에서 이기붕이 압승했다는 결과가 나오자 신중론을 펼치던 국방장관 김정렬조차도 부정선거라고 흥분하여 국무위원들이 내무장관 최인규에게 해명을 요구했지만 최인규는 도주해 버렸다. 
국무위원들을 피해 달아난 최인규는 반발을 우려해 "야, 너무 많다. 줄여, 줄여."라고 지시를 내려 이기붕의 득표율을 79%로 줄여서 발표하는 말도 안 되는 촌극이 빚어졌다.

 

● 제4대 대통령 선거
기호 1
조병옥(趙炳玉) 민주당
기호 2
이승만(李承晩) 9,633,376 자유당
득표율 88.68%

  제5대 부통령 선거
기호 1
이기붕(李起鵬) 8,337,059 자유당
득표율 79.19%
기호 2
김준연(金俊淵) 249,095 통일당
기호 3
임영신(任永信) 97,533 대한여자국민당
기호 4
장면(張勉) 1,843,758 민주당

 

물론 국민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뭔가 이상함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고, 바로 선거 당일부터 광주와 마산 등 각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이 중 마산의 시위가 가장 격렬했으며, 결국 경찰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를 내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시민들이 부정선거에 반발하며 줄줄이 들고 일어나면서 4.19 혁명(https://hl2tci.tistory.com/448)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3.15 의거가 일어난 3월 15일은 2010년부터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마산(현 마산회원구, 마산합포구)에서는 관련 행사가 열렸다. 
마산 시내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국립3·15민주묘지가 있으며 마산 시가지를 통과하는 대로를 3.15대로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헌법 기관으로 독립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제1공화국 정권이 붕괴되고,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이후 열린 재판에서 3.15 부정선거의 최종 책임자로서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과 곽영주 및 임화수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일각에서는 당시 부정선거는 이승만이 나서서 지휘한 것이 아니라 최인규를 비롯한 자유당 강경파들이 주도했다고 주장하며 이승만의 부정선거 책임론을 부정한다. 
애초에 이승만 입장에선 야당 후보 조병옥이 급사해서 단독 출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당선이 확정된 상황이라 굳이 부정선거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그 주요 근거로, 당시 국무회의 기록을 보면 이승만은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다가 마산 지역을 비롯해 전국 여러 지역에서 각종 시위들이 일어난 후에, 선거가 잘못되었으며 그 선거에 문제가 있다면 자신이 하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략) 어린 아이들을 죽여서 물에 던져놓고 정당을 말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만큼 무슨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인바 이승만이 대통령을 내놓고 다시 자리를 마련하는 이외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데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일일이 없는가?-1960년 4월 12일 국무회의록 중 이승만의 발언-
가기(可期)이방, 할 일이 있어야 하지 지금 말들 하는 것을 들어서는 안정책이 못된다고 보며 이 대통령이 싫다고 한다면 여하히 할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나로서는 지금 긴급히 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사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연구하여 보라.-1960년 4월 12일 국무회의록 중 이승만의 발언-

실제 윤치영, 허정 같은 이승만의 측근들도 '그는 부정선거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얘기했던 것도 그 근거로 꼽힌다.
무엇보다 당시 이승만은 이미 85세의 고령이었고 건강이 나쁘며 정신까지 오락가락했던 터라 일 처리와 정국 장악력이 예전만 못했던 것도 있다는 점도 3.15 부정선거에 대한 이승만의 책임 소지를 두둔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한다. 
이승만은 나중에 하와이에 가서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소식을 듣고 "그래, 박정희. 그 사람이 잘하고 있다더냐?"고 묻자 측근들이 "뭐, 그럭저럭 한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 '한답니다'란 애매모호한 말을 믿을 수 없다. 
내가 4.19 혁명 때 '그렇다고 합니다'란 말만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고 그의 양아들이 증언한 바 있다. 
이승만은 권력욕이 매우 많아 '독재자'라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전단(傳斷)하려고 했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어 1958년경부터는 멍하니 허공을 쳐다볼 때가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선거와 같은 예민한 권력 문제를 제외하고는 이기붕과 박찬일 비서, 곽영주 경무관 같은 측근들이 중요 업무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다만 3.15 마산 항쟁이 일어났을 땐 확실히 이승만 본인 스스로가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있음을 자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서 언급했듯이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에 있어서 완전히 무결한 것도 아니고, 사건의 발생이나 전개 및 사후 수습 과정에서 대통령이자 자유당 총재로서 이승만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직접 지휘한 것은 아니라고 한들,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를 전후해 4.19에 이르기까지 보인 태도는 비록 나중에 가서 "어, 뭔가 잘못됐나? 그럼 내가 물러나야 되나?"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들어 이승만을 두둔하기에는 그의 발언이나 행적에 있어 문제가 되는 부분이 많다.
우선 이승만은 2월 13일 정부통령 선거 직전 긴급담화(일명 '2.13 담화')를 발표했는데,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자유당 간부들을 비롯해 내각(특히 최인규 내무장관)에게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왔으며 성균관대학교 서중석 명예교수는 2016년 프레시안과의 대담에서 이승만의 2.13 담화에 대해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의 최다 득표자가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이 되도록 헌법과 선거법에 해놓고 있는데 2.13 담화처럼 "나와 다른 당에서 부통령이 나오면 나는 그런 대통령 자리 안 맡겠다"고 해버린 것은 헌법과 선거법을 무시하는 발언이며, 해당 발언은 "국민에 대한 협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결국 직접적으로 자유당 그리고 정부, 너희들이 꼭 러닝메이트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에둘러 말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신문을 안 봐서 신문 보도를 보기 전에는 3.15 선거가 부정선거임을 몰랐다'는 일각의 주장을 두고도 서중석은 아무리 신문을 안 본다고 하더라도 그 중요한 상황에서 하루치만 신문을 봐도 '이럴 수가 있어?' 할 정도로 언론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부정선거를 보도하고 있었고, 1960년 3월 3일자에,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선거 부정을 저지르려고 하는가를 민주당에서 폭로한 게 있고 <동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같은 당대의 쟁쟁한 대형 신문사가 몇 면에 걸쳐서, 지면을 거의 이걸로 메우다시피 할 정도로 상세하게 써서 보도하고 있는 판에 그걸 '몰랐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1960년 4월 12일 국무회의록에서 이승만이 "혹시 선거가 잘못되었다고 들은 것은 없는가?"라고 물었다거나 "지금 긴급히 또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하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발언한 것을 들어 이승만이 4.19 이전부터 선거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면 자신이 하야하는 게 맞다는 생각을 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승만은 국무회의록에 나온 해당 발언이 있고 바로 다음날, 그러니까 4.19 혁명 엿새 전인 4월 13일에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맨 위에 소개되어 있는 담화로 다시 소개한다.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주게 할 뿐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며, 또 지방경찰은 각각 그 지방의 정돈을 지켜서 혼잡이 없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동아일보 1960년 4월 14일자-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에 직접 개입하여 주도적으로 부정선거를 지시하지 않았다고 한들, 자유당 내부 이승만 측근들이 저지른 선거부정인 3.15 부정선거를 '선거부정'이라 항의하며 들고 일어난 마산에서의 시위조차 이승만은 그 항의의 대상이 자신을 내세운 자유당 정권의 선거부정이며 시위의 가장 큰 1차적 원인이라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정당 싸움"이라고 일축해 버리고, "문제가 있다면 내가 하야하는 게 맞다"고 발언한 바로 다음날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군중의 시위를 '난당의 행위로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의 생명을 살해하며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선동하여 끌어내다가 혼동을 일으켜 위험한 자리를 이루게 되니'라든가, '공산당이 배후에 있다는 혐의가 있다', '이런 시위는 공산당들 좋은 일만 시킬 뿐이다'라고 대국민 담화를 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번 선거에 뭔가 문제가 있다면 내가 하야하는 게 맞지"라고 했던 국무회의록 발언과는 제대로 상치되는 이 담화는 이승만의 어떤 사태의 원인이나 사건의 인과 관계를 전혀 파악 못하는 정도의 차원을 넘어서 이러한 시위 자체를 공산당의 선동으로 취급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3.15 부정선거에 개입했고 안 했고의 문제를 떠나 대중을, 자유당의 부정행위에 대해 항의하는 대중의 시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조차 의심하기 충분하다는 소리다.
3.15 부정선거의 최종 책임 여부를 떠나 이승만의 당시 정국을 보는 눈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음을 또한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정선거 이후 이미 정국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해졌고 이기붕이 하야를 고려한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이승만도 "그렇게 망측스러운 불의를 보고서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나 다름이 없지. 불의를 보면은 일어나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발표한 성명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4월 26일 열린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 내용에 대한 해석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 끝에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을 국민이 원한다고 공식적으로 요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이 날 국회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 및 3.15 선거 무효 처리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다음 날인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 뜻을 받아들여 사임한다"는 내용의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다만 이때 이승만은 4월 27일 국회에 대통령 사임서를 제출해야 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사임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측근 허정과 김정렬이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이승만의 대답은 자신이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사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가 되어서야 이승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사임서에 사인하고 국회에 제출하면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1960년 5월 3일 국회에서 정식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를 접수하여 대통령의 사임을 선포함에 따라 이승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인정된 부정선거로써 매체에서도 많이 나왔다. 
제1공화국, 제2공화국, 무풍지대, 야인시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무풍지대와 야인시대는 같은 작가가 집필해서인지 이 사건을 보는 시각도 같은데, 대통령 후보 조병옥의 급사로 인해 지난 선거에 이어 부통령 선거에서 또 낙선할 것을 두려워한 이기붕이 주도해서 저지른 것으로 그려진다. 
반면 제2공화국에서는 최인규가 부정선거를 주도하고 이를 이승만과 이기붕이 이를 방조하는 양상으로 전개한다.

● 기타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국립 3.15 민주묘지가 있는데, 이곳은 이 사건 및 4.19 혁명 관련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4.19 희생자들을 기리지만 3.15가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가끔 보훈 단체 같은 곳에서 발행하는 달력에 "3.15 의거 기념일"라고 적혀 있는 경우가 있는데, 당연히 부정선거를 기념하려고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은 아니고 같은 날 마산 지역에서 벌어진 마산 의거를 기념하는 것이다. 마산 의거 관련 기타 내용은 3.15 의거 및 4.19 혁명( https://hl2tci.tistory.com/448)참조.
이승만을 다룬 다큐 영화 건국전쟁에 대해 광운대학교 정보과학교육원 특임교수 진중권은 2024년 2월 13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 "영화감독들 제발 쓸데없이 이런 것 좀 만들지 마라."라고 이 영화를 딱 잘라 혹평했다. 진중권은 '건국전쟁'이란 제목부터가 그냥 장사하려고 붙인 제목이라고 지적하며, "이 영화의 이승만을 재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우리 공동체의 역사적 기록을 조직하는 일반적 방식과는 꽤 벗어나 있고, 그걸 옳다고 말한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편향적인지를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이승만더러) '국부'라고 하는데 니들 아버지 하세요, 내 아버지 하지 말고. 자기 아버지로 모시고 싶으면 뭐 제사라도 지내든지, 그래야지 왜 이걸 갖다 자꾸 모두한테 강요를 하게 되는 겁니까? 아버지 한 명 있는 것도 피곤한데 왜 두 명씩 부르라고 그러는지..."라고 비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