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5월 11일 오전 6시 56분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치 현 초등학생과 고치 현 중학생을 태운 일본국유철도 우코연락선 소속 철도 연락선 시운마루호는 안개가 끼었는데도 출항을 강행한다.
계속하여 바닷길을 나아간 시운마루호는 이윽고 세토 내해 메기지마(女木島) 남서쪽 해역에 다다른다.
해당 해역은 조수 간만의 차도 크고 조류도 빠른 곳, 이런 와중에 맞은편에서 같은 항로를 다니는 일본국유철도의 대형화차운항선 제3우코마루가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두 배는 모두 과속 운항을 하였다
그나마 두 배는 맞부딪치기 전에 서로를 식별하고 회피했으나, 하필 두 배 다 같은 방향으로 꺾는 바람에 결국 충돌했다.
이로 인해 시운마루 선체 우현 기관실 쪽에 높이 3.5m, 최대폭 3.2m, 선내쪽 3.5m로 찢어져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게다가 기관실 엔진룸 복수기와 주배전장치까지 폭발하여 선내 전체가 정전이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선내 침수를 막아 침몰을 지연시키는 역할인 수밀문이 정전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이미 선미 쪽에 물이 차버린 탓에 선원들도 수동으로 폐쇄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런 연유로 배가 좌현으로 급속도로 기울자, 승객들까지 황급히 우현으로 몰리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힘이 일반 남성보다 약한 어린이와 청소년은 그대로 배 안에 남겨져 희생되고 말았다.
한편 서로 부딪치긴 했어도 제3우코마루는 상대적으로 멀쩡했고, 파손된 시운마루호 우현 기관실의 침수 진행을 막으면서 조난 당한 승객들을 옮겨 태우려고 좌현으로 완전히 틀어 배 엔진을 전속력으로 전진시켜 밀어 붙었다.
제3우코마루가 접근하는 광경을 보자마자 사람들은 재빨리 배를 옮겨타는 가운데 인솔하는 교사들은 선내에 남겨진 학생들을 구하러 갔다. 하지만 이미 학생들은 이미 들어찬 바닷물에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고, 구하러 내려온 교사등 5,689명과 네덜란드 포로 1,278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왜 희생자들 중에 학생들이 많았냐면 우선 주변 어른들이 정신없이 서로 밀쳐댔기 때문에 대피가 늦어졌다.
게다가 구명조끼를 수납한 곳에 손이 닿지 않았고 선원들이 배포한 구명 조끼를 입으려 해도 착용법을 몰랐다는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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