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하루하루가 천국' 이란 송이의 대답은 무심결에 그녀가 천주학쟁임을 드러내 보인 것이 아닐 것인가.
"송이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임상옥이 송이의 손에 들려 있는 낯선 물건을 가르키며 물어 말하였다.
"무엇을 말씀이시나이까. 소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나이다.
송이는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오른손 말고 왼손에 말이다."
송이는 망설이다 왼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과연 그녀의 손바닥 에는 무엇인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작은 나무구슬들을 줄에 꿴 물건들이었다.
염주처럼 보였지만 염주는 아니었고 그 끝에 엇갈린 십자(十字) 형태의 작은 나무토막이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무었이냐, 염주냐."
임상옥이 묻자 송이는 대답하였다.
"아니나이다."
"그럼 이것이 뭐라고 부르는 물건이냐."
"그것은 묵주(默株)라고 부르는 물건이나이다."
"묵주라니."
"'장미로 만든 꽃다발' 이란 뜻이나이다."
"끝에 매달린 그 나무토막은 무엇이냐."
임상옥은 십자 형태의나무조각을 가리키며 물어 말하였다. "그것은 십자가라고 부르나이다. 나무로 만든 형틀이라는 뜻이나이다."
임상옥은 그 이상한 나무로 만든 형태 위에는 아주 작게 조각된 물건 하나가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주의깊게 보았다. 그 물건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철물을 부어 만든 작은 사람의 형상은 그 십자 형태의 나무조각에 두 팔을 벌린체 매달려 있었다.
"이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왜 이렇게 이상한 형상으로 십자 형태의 나무조각에 매달려 있느냐."
"그 사람의 이름은 야소(耶蘇)라 하나이다."
"야소가 도대체 누구인가."
그러자 송이는 대답하였다.
"야소님은 천주님의 아드님이시나이다."
비로서 송이는 자신이 천주학쟁이임을 밝힌 샘이다.
순간 임상옥은 이 만남 어딘가에 수수께끼와 같은 은밀한 무엇이 숨어 있는 듯한 느낌이 어디서 부터 비롯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4년 만의 만남에 어째서 그토록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던가 를 임상옥은 비로서 느낄수 있었다.
왜 유기장수는 그토록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했던가.
소문에 듣기에 천주학쟁이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토기들을 팔고 다닌다는데 그렇다면 그 그 유기장수 또한 천주학쟁이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시장거리의 야경꾼을 그토록 경계할 수밖에 없었던지 그 이유를 임상옥은 그제서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조정에서는 눈에 불을 켜고 천주학쟁이들을 색출해내고 있었다.HL2TCI
천주학쟁이들은 그들에게 조상을 위한 제사마져 거부하는 '무부무군(無父無君)' 의 사교의 집단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2년전인 기해년, 전국적으로 사학토치령에 의해서 천주학쟁이들을 색출하는 한편 가혹한 형벌로 천주학을 근절하기 위한 대학살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기해사옥(己亥邪獄)
기해년에 일어났던 천주학에 대한 박해를 기해사옥이라 하였는데, 교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추적되었고 비록 투옥은 모면한 사람일지라도 가산과 전답을 버리고 도망쳐야만 했다.
박해는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지에 골고루 미쳤으나 가장 박해가 심했던 곳은 경기도와 서울 지역 이었다.
당시의 기록인 '기해일지' 에 의하면 참수되어 순교한 자가 54명이고 그밖에 옥에서 교수되어 죽고 장하(杖下)에 죽고 병들어 죽은 자들 또한 60여명이 넘는 전국적인 대박해였던 것이다.
임상옥도 천주학쟁이들에 대한 소문을 익히 전해들어 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송이가 자신의 입으로 '하늘에 있는 천주' 를 믿는 천주학쟁이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지 아니한가.
"천주는 도대체 누구인가."
임상옥이 송이에게 물어 말하였다.
그러자 송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대답하였다.
'천주는 이 세상에 만물을 만드신 전지전능하신 분이옵고 무시무종한 분이나이다."
"무시무종 이라니, 그러면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다는 뜻인가."
"그렇사옵니다. 나으리."
"어찌하여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면 그 천주라는 분이 우리들 사람도 만들었단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나으리. 우리들 인간도 천주님께오서 흙을 빚어 만드셨나이다."
"그렇다면 야소는 천주의 아들이란 말이더냐."
임상옥은 십자 형태의 나무토막 위에 묶여 있는 조각상을 가르키며 말하였다.
"그렇사옵나이다, 나으리. 야소님은 천주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천주의 아들이 어째서 이처럼 십자가의 형틀 위에서 죽어 있단 말아냐."
"그것은. 그것은."
송이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하였다.
"야소님께서 이 송이가 지은 죄를 대신해서 벌을 받아 십자가의 형틀 위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것이나이다."
(중략)
송이는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이 소녀는 천주학쟁이가 되었나이다. 나으리께오서 알고 계신 송이는 이미 죽어 사라졌나이다.
나으리. 소녀는 이제 새 사람이 되었나이다. 소녀는 또한 새 이름을 갖게 되었나이다."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구."
"그렇습니다, 나으리."
"새 이름이 무엇이냐."
임상옥이 묻자 송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하였다.
"막달레나이다."
"막달레나라구, 그것은 서양 사람의 이름이 아니더냐."
"그렇사옵니다, 나으리. 막달레나는 몸을 팔던 천한 창기 였나이다.
길거리에서 남정네들에게 몸을 팔다가 붙들려서 돌에 맞아 죽을 뻔하였던 것을 천주님의 아드님이신 야소님께오서 살려주셨나이다.
나으리. 이 소녀 또한 웃음을 팔던 비천한 창기가아니었나이까.
그런 소녀를 천주님의 아드님이신 야소님께오서 살려 주셨나이다.
막달레나. 송이의 새 이름 막달레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긴 한숨을 쉬면서 임상옥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네가 지금 서양귀신에 홀려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자 송이가 얼굴에 미소를 띄워올린 후 이렇게 말하였다.
"언젠가는 나으리께오서도 이 소녀의 말을 믿게 되실 것이나이다."
그리고 나서 송이는 몸 속에서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붓을 꺼 내들었다.
그녀는 주위를 살펴서 한약을 처방하는 종이 한 장을 가져왔다.
그녀는 그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이 써내렸다.
未生民來 前有上帝 미생민래 전유상제
唯一眞神 無聖能比유일진신 무성능비
六日力作 先闢天地육일역작 선벽천지
萬物多焉 旣希且異만물다언 기희차이
遂辨和土 捋爲靈矣수변화토 장위영의
命處賜臺 千百皆與명처사대 천백개여
아직 세상에 사람이 생기기 전에 이미 상제가 계셨으니
오직 한 분만이 참 신으로 능히 비할 성인이 없으시도다
천주님 6일 동안 우주를 지으실 때 하늘과 땅을 먼저 열으시니
그 가운데 온갖 만물 많기도 하고 기이하고 또한 신기롭게 하셨도다
마침내 흙을 가지고 빚으셔서 장차 영혼이 있는 인간이 되게 하시고
살아갈 땅과 터를 주시고 천백가지 모든 것을 베풀어 주셨도다
원래 이 내용은 천주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던 광암(曠菴) 이벽(李蘗)이 지은<성교요지>의 첫 장에 나오고 있는 본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최인호 장편소설 상도5권중 제2장 혈세中에서
'가톨릭 스토리 > Anoth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란치스코 교황 퇴원 (0) | 2023.04.02 |
---|---|
나이지리아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길 (0) | 2023.03.31 |
가톨릭 기도서 모음 (1) | 2023.02.25 |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벽화 (0) | 2023.02.04 |
가톨릭 성녀 (1) | 2022.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