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와 마리안느·마가렛
구한말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주로 의료시설과 학교를 세우는 일을 통해 활동했는데, 당시 전라도 일대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나 시설을 많이 세웠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9년 8월, 대한제국 칙령 제 75호에 의거,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의 요양병원을 전국 각지에 세우는 작업을 했는데, 특별히 한센병 치료를 위한 전문 요양소로 소록도의 자혜의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당시 한센병에 대한 정책은 나요양소를 마련하여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총독부의 위생고문이었던 야마네 마사츠구(山根正次)는 "조선의 나환자도 격리 수용시켜야 한다"고 건의했고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를 수용하여 소록도가 한센병 요양소로 선택되었다.
그리고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 7호가 공포되어 "소록도 자혜의원"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한센인 병원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대대로 소록도에 살던 원주민들은 육지로 쫓겨나야 했다.
한편 소록도 자혜의원 2대 원장 하나이(花井善吉: 1921~29)는 일제강점기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병원에서 강요하던 일본식 생활(일본식 의복, 다다미를 비롯한 일본식 주거문화, 일본 음식 등)을 전면 폐지하는 한편, 자유로운 면회와 교육의 기회 제공,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될지 몰라 조선총독부에서 탄압하던 종교활동(특히 개신교와 천주교 등의 선교활동), 심지어 취미생활과 오락활동까지 권장하는 등 극도로 소외받고 차별받던 한센인들에게 혜택을 많이 주려 노력했다.
얼마나 환자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는지 소록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한센인들이 없는 돈을 추렴하여 송덕비까지 세웠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 부임한 4대 원장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 원장은 소록도를 자신의 탐욕을 실천할 도구로 삼아서 수많은 소록도 한센인들을 토목공사에 동원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동상을 만들어 매달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하는 짓까지 벌였다.
결국 스오 원장은 원생 이춘상에게 살해되었고 나환자이기 때문에 그의 의거는 잘 알려지지 않았고, 병 때문에 친척들이 다 부정했으므로 아무도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센인들의 고난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해방 직후, 병원 운영문제의 주도권을 두고 병원생(=한센인)들과 직원 사이의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병원에서는 운영권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고, 운영권을 노렸던 의사 "석사학"은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당시 한센인 원생의 대표인 이종규에게 "운영권을 장악한 자들이 원생들이 먹을 식량과 의약품 등을 반출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주었고, 결국 직원들과 원생들은 격렬하게 충돌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은 실탄사격을, 병원생들은 직원 몇 명을 폭행치사하는 등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조선인 직원들은 원생들과의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결코 운영권을 한센인들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고흥 치안유지대에 몰래 선을 넣어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8월 21일 아침, 원생들은 대표자 90명을 선발하여 협상장소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죽창과 총이었다.
무장한 직원들과, 이들이 동원한 치안유지대는 이들 90명을 포박하고 사격을 하거나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여버린 것이다.이들 중에서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나, 직원들은 구덩이를 파고 이들의 시신과 생존자들을 전부 던져버리고 기름을 쏟아붓고 불을 질러 이들을 생화장을 시켜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숨진 한센인들은 84명에 이르고, 최근까지도 이 사건의 목격자와 생존자가 소록도 내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소록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도 소록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2002년 8월 22일 11시 30분, 사건 현장이던 국립소록도병원 치료본관 앞에 이 사건을 기리는 "애환의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추모비에 찾아가 묵념이라도 하고 돌아오자. 자유로운 사진촬영이 가능한 장소이다.
6.25 전쟁 때 소록도를 점령한 북한군은 피난가지 않고 남아있던 섬의 10명의 직원과 1명의 목사를 총살했고, 북한군 부역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김민욱, 박순호 장로을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미군기가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전단지를 뿌렸고 인민재판을 종용하던 사람은 돈을 가지고 빠져나갔다.
1960년 7월 1일에 국립소록도병원이 정식으로 건립되었고, 조창원 대령이 원장으로 부임했다. 조 원장은 당시 섬의 다수세력인 개신교 교회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소록도의 7개 부락(리)에는 각 부락민들을 위한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조 원장은 "각 부락의 예배당이 병원 건물이니, 건물을 즉시 반환하고 한 곳에서만 예배하라"는 강제 퇴거명령을 내리고 교회의 종탑을 철거하는 등의 강경 대책을 세웠다.
소록도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이러한 명령은 섬 주민들의 신앙과 부딪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1962년, 김두영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병원측과 교회의 갈등은 수습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소록도 내의 이러한 소란이 잦아들면서 조창원 원장은 주민들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소록도 인근에는 "오마도"라는 무인도가 있는데, 이곳에 간척사업을 벌여서 한센인들이 거주하며 농사를 짓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당연히 한센인들은 크게 호응했고, 몸이 조금이라도 성한 사람들은 전부 간척지 개간 사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문제는 고흥 주민들에게서 나왔다.
고흥 주민들은 "문둥이들과 함께 살 수 없다!"면서 결사반대를 외쳤고, 이러한 간척사업은 곧 난항에 부딪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개척이 90% 이상 완료된 상황에서 새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민주공화당 소속 모 의원이 정책을 뒤집어 간척사업의 주체를 전라남도로 돌려버리며 해결되었다.
조 원장은 곧 국립의료원 부원장으로 강제 보직이동 조치를 당해 소록도를 떠나게 되었고, 오마도 간척지는 1988년, 일반인들에게 불하하면서 소록도 주민들에게 아픔만 주고 끝나버린다.
이 사건을 각색하여 일반에 알린 사람이 바로 소설가 이청준 이고, 이 소설의 이름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한센인들을 차별하고 핍박하는 일들은 일제 시대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계속 되었다.
2016년 7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소록도 한센인들을 향한 끔찍한 일들이 폭로되면서 소록도는 다시 한 번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소록도 주민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이들이 몇 있다.
박정희의 영부인인 육영수는 이곳 주민들에 인상 깊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소록도에 처음으로 방문한 높으신 분이 바로 육영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육영수는 소록도 병원에 방문하여 한센인 환자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며 봉사활동을 하고 떠났다. 육영수는 이후에도 한센인들을 초청하고 주기적으로 위문품을 보내는 등 소록도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당시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생각할 때 처음으로 접근해 온 높으신 분이 주민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영향으로 소록도는 호남 지역에서 보수세가 가장 강하며, 특히 육영수의 딸에게 깊은 애정을 보였다.
나훈아가 1997년 5월 14일 소록도에서 위문공연 '나훈아, 그리고 소록도의 봄'을 진행했다.
휠체어 50대를 소록도에 개인적으로 기증하기도 했다. 이 무대는 SBS에서 생방송되었다.
조용필은 소록도 주민들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 사람이다.
조용필은 2010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소록도 우촌복지관에서 공연을 가졌다. 그 때 조용필은 프로그램 상 꿈, 친구여 등 두 곡만 불렀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그 뒤 2011년, 아예 자신의 팀들과 함께 소록도를 다시 찾아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을 위하여 무료 공연을 개최했다.
이 공연은 더욱 파격적인데, 아예 자신이 프로그램을 짜서 오지 않고 즉석에서 신청곡도 받아 환자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당시 강당은 거대한 노래방이 따로 없었다고. 병원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여태껏 이 곳을 찾은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오지 않았지만 조용필은 거의 유일하게 다시 온 사례였다고 한다.
더욱 감동인 것은, 당시 조용필은 아예 객석 밑으로 내려가 한센인 어르신들과 일일이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면서 마이크를 넘겨주고 함께 즐겁게 노래했다고 한다. 역시 가왕의 풍모는 다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또한 특별한 손님이다.
1984년에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이 어디인가?"라고 질문한 후, 소록도에 방문하여 원생들을 위로했고, 그의 방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병원 측은 그간 원생들과 일반인들이 따로 사용했던 선창과 배를 하나로 통합하여 이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시정했다.
당시 교황은 "마음으로 친애하는 여러분. 머나먼 길을 떠나 한국에 올 채비를 하면서, 이 소록도에 계신 여러분과의 만남을 특별히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아름다운 글을 받은 후로는, 더더욱 여러분을 보러 오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여러분을 위로하고, 여러분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라는 인사말을 직접 읽어주었다.
소록도중앙공원 내 천주교 부지에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하는 자그마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참고로 이 천주교 부지는 과거 1940년대, 소록도의 건물을 짓기 위한 벽돌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한센인들의 애환을 신앙의 힘으로 치유하려는 뜻에서 공장을 없애고 작은 연못 위에 성모상을, 그 앞에 자그마한 제대를 만들어서 천주교인들의 야외 미사터를 만든 것.
소록도에서 40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간호사들이었던 마리안느와 마거렛은 지금도 소록도 주민들에게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오신 두 분은 한센인들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더 나이가 들어 건강이 나빠지자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에 소록도 주민들이 성대한 환송식을 준비하려 하자, 이들을 번거롭게 하기 싫다며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야반도주하듯 소록도를 떠났는데, 얼마 전에 다시 소록도를 방문하여 주민들과 눈물로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동국대는 2016년 7월8일 '제20회 만해대상' 수상자로 '소록도 천사' 마리안느 스퇴거·마가렛 피사레크 수녀님이 받게 됐다고 발표 했다.
마리안느 수녀님과 마가렛 수녀님은 20대의 젊은 나이에 소록도에 들어와 한센인들을 돌 보는 데 평생을 바쳤습니다.
전남 고흥군 박병종 군수는 수녀님이 생활 하셨던 자택이 문화재로 지정됐음을 알리며 이 곳이 ‘박애의 전당’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전하고 감사의 편지를 전달 했습니다
이하 전문 내용
마리안느 수녀님이 계시다 떠난 고흥은 여름 무더위가 본격시작되었습니다.
마리안느 수녀님의 고향 날씨는 어떠한지요? 항상 포근하고 향긋한 봄날처럼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그 동안 저는 마리안느 수녀님이 40여년간 몸담아 오셨던 고흥을 위하고, 군민들과 약속했던 일들을 살피느라 몹시 분주했습니다.
그래서 때론 지치기도 하고 힘이 많이 들기도 하지만, 때 마침 마리안느 수녀님의 온기 가득한 편지를 받아보는 순간, 차분해 지면서 잔잔한 감동의 물결이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일렁였습니다.
지난 5월, 수녀님과 함께했던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재삼 떠올려 봅니다.
우리 군민들의 박수 속에 명예군민이 되셨던 날, 대한민국 국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명예국민이 되시던 날, 그리고 맑고 푸른 고흥바다를 누비던 선상여행 등은 아직도 제 머릿속에는 생생하기만 합니다.
참, 수녀님! 좋은 소식 한 가지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6. 14. 소록도 병사 성당과 마리안느·마가렛 수녀님의 체취가 물씬 스며있는 자택이 우리나라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두 분의 숭고한 희생·봉사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박애의 전당’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저와 우리 군민들은 마리안느·마가렛 봉사체험학교 및 기념관 건립 등을 통해 ‘편견’과 ‘차별’, ‘아픔’과 ‘애환’의 100년을 뛰어 넘어 ‘나눔’과 ‘공감’ ‘치유’와 ‘희망’의 100년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문득, ‘소록도에 머물던 시절이 하늘만큼 행복했었다’라는 마리안느 수녀님의 말씀이 떠 오릅니다.
마리안느 수녀님이 소록도에 계셔서 행복했던 것처럼, 저와 우리 군민 그리고 온 국민들은 두 분이 대한민국에 계셔준다면 더욱 즐겁고 사랑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빠른 시일 내에 두 분을 다시 고흥에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제가 보내드린 홍삼 꼭 챙겨 드시고 힘내셔서, 마가렛 수녀님과 함께 건강하게 다시 만나 뵙는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고흥에서 잊지 못할 소록도의 작은 영웅께... 고흥군수 박병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