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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Choi가이버 2022. 10. 13. 13:37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지은이: 한국역사연구회

 *또 하나의 전통, 고려사회의 이해를 위하여
  21세기를 눈앞에 둔 요즘처럼 우리의 전통을 알려는 열망이 드높았던 때는 없 었던 것 같다.  사실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사람들은  일찍부터 ‘한 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화두삼아 잊혀진 전통을 되살리 고자 노력해 왔다.  전통은 우리들의 현재적 삶을  풍요롭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우리다운 삶의 방식을 찾는 데에도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은 언제부터 전통이었으며 언제까지 전통일 수 있는가? 일례로 최 근 ‘동성동본혼금지법’의 존폐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을 보자.  한 편에서는 현대 산업사회에 맞지  않는 고루한 인습이라 하여  이 법의 폐지를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기자이래의 아름다운  전통이므로 존속시켜야 한다고 반 박하기도 한다. 동성동본  혼인금지가 인습이냐 전통이냐를 떠나서  적어도 고려 시대에는 이러한 관습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라 이래 고려말까지 왕실에 서는 필요에  따라 왕자와 공주를  결혼시킨 사례가 한둘이  아니었다. 동성동본 사이의 혼인 금지는 조선 후기 이래 300년밖에 안 된 ‘새로운’전통이다.
 이처럼 전통은 사회의 변화 발전에 따라 새로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한 다. 그러므로  현대에 사는 우리는  동성동본혼 금지가 전통이라고  하여 무조건 고수하기보다는 전통에 생명력을 부어 넣어 현대화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최근 우리 옷입기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현대생활에 편리하게 만든 옷을 개량 한복이 아니라 생활  한복으로 부르자는 주장은 매우 의미 있는 전통 의 현대화작업이라 평가할 만하다.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의 중세사회에 해당된다. 따라서 두 시대는  중세사회로서의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고려는 918년에 건국하여 1392년에 멸망할  때까지 475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지속하면서 독특한 문화유산과 전통을 만들었다. 고려 사회는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전통’ 의 모습과 다른 점이 적지 않다. 고려는  형식적인 사대의 예와 함께 내부적으로 황제국체제를 취한 자주적인 국가였다. 또한 군현민과 부곡민, 양인과 천미과 같 은 차별의  구조가 존재하면서도,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고 함께 제사를 받드는 동등의 원리가  통하던 사회였다. 불교, 유교와 더불어 도교와 풍 수지리설도 독자적인 역할을 한, 즉 다양성을 존중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고려사회의 풍부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 전통에 대하여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에게조차도, 고려시대의 역사상은 고대사나 조선시대사에 비하여 덜  알려져 있다.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기에는 고대사보 다 자료가 많고, 풍부한 사실을 끌어내기에는 조선시대보다 자료가 빈곤하다. 연 구자들의 관심을 끄는 분야도 인접 시대와  비교하면 제한적이다. 요즘 방송매체 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다양한 기획을 하면서도 고려시대사를 다루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인에게 잘못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고, 고대 이래  우리 사회 가 경험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생생히 전달하는 것은 역사를 전공한 학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단 우리들은 당대의  구체적인 생활모습과 삶의 커 다란 테두리를 쉽고 재미있게 그려, 일반인에게  고려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충분 히 전달할 필요성을 느꼈다.
 우리는 이 책을 1995년 여름에 처음 기획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검토를 거쳐 그 해  말 적절한 항목을 골랐다.  그리고 38명의 필자가 42개의  항목을 나누어 집필하였으녀, 중세1분과원이  함께 내용을 다듬고 그림을  뽑았다. 이렇게 하여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가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이제까 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역사상이 올바르게 전달되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한 다. 특히 강희정님 이정훈님 장남원님은 우리  연구회 회원이 아니면서도 기꺼이 어려운 부담을 나누어 주셨다. 이분들과 함께 책의  출판을 맡아 주신 청년사 사 장 정성현님,  아담하게 책을 꾸며주신  편집부 여러분께도 거듭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1997년 4월 12일
 한국역사연구회 중세사1분과
 문화를 꽃 피우다
 대각국사 의천의 중국 유학
 남동신(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사월 초파일 밤의 밀항
 1085년(선종 2)4월 8일.  사월 초파일은 예나 이제나 불교계  최대의 명절이다.
 명절은 그 말만으로도 남녀노소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하다. 때는 고려시 대. 개성과 인근의 크고 작은 사찰은 낮  동안 수많은 남녀신도와 승려와 상인들 로 북적거렸으며, 밤에는 그들의 갖가지 사연을  담은 오색찬란한 연등행렬로 불 야성을 이루었다.  이날 밤 예성강  하구의 무역항 벽란도에서는  송나라 상선이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미끄러지듯 포구를 빠져나갔다.  배에는 상인 말고도 변장 을 한 의천 일행  11명이 타고 있었다. 선종은 뒤늦게야 친동생  의천이 남긴 글 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만 번의 죽음도 가벼이 여기고  험한 파도를 건 너 법을 구한다’는  밀항의 변이었다. 놀란 선종이 황급히 사람을  보내 뒤따르 게 하였으나 끝내 놓치고 말았다. <고려사>는  이날 밤의 한바탕 소동을 한마디 로 잘라 말하였다. “왕의 동생인 승려 후가 몰래 송나라로 빠져나갔다!” 후는 의천의 본명인데  송나라 철종의 이름과 같기 때문에, 이를  피하고 대신 자인 의천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그는  1055년 9월 문종과  인예태후 사이의 10남 2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으며, 열한 살  때 개성 교외의 화엄종 사찰인 영 통사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불과 열세 살에  ‘왕사’바로 아래이자 교종 승려로 서는 최고위직인 ‘승통’에 올랐다.
 문종은 의천의 앞날을 위하여, 평소 후원해  왔던 화엄종에 출가시키고 파격적 일 정도로 높은  자리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면세계를  진정으로 대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할 나위 없이, 인격을 도야하고 학식을 겸비하는 일은 전적으로 의천에게  달렸던 것이다. 그는 출가  후 십여 년간 일정한  스승 없이 도가 있는 이를  찾아다니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불교 경전은  물론 유교와 도교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학설까지 두루 섭렵하여,  약관의 나이에 이미 ‘법문 의 종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경전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자 의천은 중국 유학을 꿈꾸기 시 작하였다. 그가 보기에  신라말 고려초 이래 수많은 승려들이 중국  유학을 다녀 왔는데, 그들은 거의 대부분  선종 승려였다. 반면 교종 승려들의 유학은 단절되 다시피 하여, 마침내 의천 당시의 고려 불교학은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 이다. 이에 그는 중국 유학을 통하여 고려  불교의 ‘눈을 가린 막’을 벗겨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의천은 송나라 상인들을 통하여 화엄종 승려 진수정원을 알게 되 었다. 송상들 중에는 복건성  출신이 많았는데, 그들은 같은 고향 사람인 정원을 소개한 것이다. 의천과 정원은  수차례나 편지와 서적을 주고 받은 끝에, 1083년 8월 마침내 정원은 의천을  초청하였다. 이듬해(선종 2)정월 의천은 궁궐에 들어 가 송나라 유학의 뜻을  간곡히 아뢰고 반대하는 조정대신들에게 눈물로 호소하 였다. 선종은  감격하였으나, 조정대신들은 너무나 완강하였다.  “왕의 동생이라 는 고귀한 신분으로  바다를 건너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불 교 외적인 요인 즉 당시의 미묘한 국제정세가 작용하고 있었다.
 고려는 현종 때 요나라와  통교하면서 요와 적대적인 송과는 외교관계를 단절 하였다. 문종은 송과의 외교를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071 년(문종 25)실로 반세기 만에 송과 국교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려는 여전히 인접한  요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의천은  왕자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혜택을 누려왔지만,  이럴 때는 그것이 도리어 약점이 되었다. 이 러한 국제정세의 틈바구니에서 서른 한 살이 된 의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밀 항뿐이었다.

 진수정원, 그리고 고려사
 벽란도를 떠난 지 25일째인 1085년  5월 2일 의천 일행이 마침내 밀주 판교진 (산동성 교주시)에 도착하자, 밀주지사가 마중을 나왔다.  의천이 온 뜻을 송나라 조정에 알리자, 5월 21일 철종과 태황태후는  특별히 중앙 관리를 파견하여 서울 인 변경(하남성 개봉시)까지 안내토록  하였다. 이 때부터 중국을 떠나는 그날까 지 송 왕실은 수시로 음식을 비롯한 각종 물품을 하사하는 등 극진한 환대를 베 풀어 주었는데, 이는 송나라 조야는 물로 불교계의 이목을 끌기에도 충분하였다.
 의천은 송 왕실이 미리 불교계의 추천을 받아 선발한 화엄종 승려 유성으로부 터 중국 화엄학의 새로운  성과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관리의  안내를 받아 변 경의 여러 사찰을 찾아다니며 많은 승려들을 만나  볼 수 있었는데, 인도 출신의 승려를 만나 인도에 관해 상세히 묻기도 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리고 변경에 머 무른 지 채 한 달도 안되어 진수정원을 만나러 항주로 출발하였다.
 절강성 항주에 도착한  것은 8월이었다. ‘이승의 천당’이라 할  만큼 이곳은 옛부터 빼어난 산수로  유명하였다. 당대의 내노라하는 고승대덕들이  이곳 서호 일대에서 수행하였으며, 그들이 머물던 사찰이 500여  곳을 넘는 그야말로 송 불 교계의 중심지였다. 그들은  고려 왕자가  불법을 배우고자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만나주었기에, 의천은 그들로부터 여러  종파의 사상을 골고루 접할 수 있었다.
 의천이 진수정원을 찾아갔을 때 정원은 서호  동북쪽의 상부사에 있었는데, 새 로 항주지사로 부임한 포종맹의  주선으로 1086년 정월 서호 남쪽의 혜인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포종맹은  여기에 화엄종 일곱 조사의 상을 만들어  봉안케 하였 으며, 조정에 건의하여  혜인원을 선종사찰에서 교종사찰로 소속을  바꾸고 특별 히 조세를 면하도록 해주었다. 의천은 이곳에서  정원으로부터 화엄학을 배울 수 있었다.
 의천이 항주에 머물던 1085년 11월 신종의 죽음을 조문하고 철종의 즉위를 축 하하기 위한 고려 사절단이 변경에 입성하였다.  이들은 어머니 인예태후가 의천 의 귀국을 간절히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의천으로서는  국법을 어겨가면서 까지 감행한 중국 유학을 1년도 못 채우고 귀국하자니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 다. 마침내 그는 1086년 윤2월 변경으로 가서  황제에게 고별 인사를 하고 4월에 다시 항주로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항주에서  변경을 왕복하는 배 위에서  정원으로부터 계속 화엄학을  익혔다. 도중에 수주의  진여사에 들러 거금을 쾌척하여 퇴락한  장수자선의 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도  하였다. 장수 자선은 정원의 스승이니,  만년의 노구를 이끌로 수천리 뱃길을 함께  해준 스승 정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의천이 정원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침 체일로에 있던 중국  화엄학을 부흥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그 가 혜인원에 머무를  때는 불교 서적 7,500여 질을 간행하여  비치하도록 하였으 며, 귀구한  후에는 금물로 쓴<화엄경>180권을 보내  주었다. 정원은 이를 위해 전각을 별도로 세우는 동시에 의천의 상을  봉안할 사당을 건립하였다. 1101년에 는 의천의 친형인 숙종이 거금을 보내어 불상을 조성하고 새로운 전각을 세우게 하였는데, 뒷날 남송의 황제가 친히 이 전각의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의천의 체 류를 계기로  혜인원은 중국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부상하였으며,  고려와 송의 우호관계를 보여 주는  상징 사찰로서 번영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본명보다 ‘ 고려사’라는 속칭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신법당’의 호의
 한편 의천의  중국 유학은 송의 양대  정파인 ‘신법당’과 ‘구법당’사이에 하나의 정쟁거리가 되었다.  신법당은 피폐한 농촌사회와 고갈된  국가재정을 일 신하고자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인 정책을  내새웠다.
 다만 송의 군사력만으로는 요를 상대하기 벅찼기  때문에, 고려와 연합하여 요를 견제하려는 외교노선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신법당의 정책은 고려와의 통상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될 송상 - 그들 중 대부분이 복건성과 절강성 출신임- 들 로부터 당연히 환영을 받았다. 송상들은 의천을 동향 출신의 정원과 연결시켰고, 그렇게 해서 의천의 중국유학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의천이 중국에 온다는 소식 을 듣고 내심  가장 반긴 정치세력은 당연히 신법당이었으며, 그들은  ‘승려 의 천’보다 ‘왕자 의천’에 무게를 두었다.
 신법당에는 남방출신이 많았는데, 핵심인물인 여혜경은 정원과 동향이었다. 그 는 나중에  항주지사로 부임하여 혜인원에  정원의 비석을 세워  주었다. 의천이 항주에 머무를 때 정원을 후원하였던 포종맹도  신법당 소속이었다. 그는 구법당 의 영수 사마광의  인사 정책을 비판하다가 좌천당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의천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항주지사로 부임하여 왔던  것이다. 또한 당파는 불분명 하지만, 의천을  시종 안내하였던 양걸이란  관리도 나중에 절강  지방의 관리가 되어 화엄종을 후원하였다.
 그런데 시넙버당의 고려 우대정책  때문에 고려 사절이 지나가는 연도의 지방 민과 수령이 경제적인 고충을 겪게 되었다.  대외정책보다 내정의 안정을 우선하 는 구법당이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특히 구법당의 맹장 가운데  한 사람인 소 동파는 때로는 지방관으로 때로는 유배자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신법당에 비판적 인 지방여론을 익히 체감하고 있었다. 의천이  밀항하기 직전인 1085년 3월 신법 당의 후원자였던 신종이  죽고 철종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아홉  살 소년이 었기에 할머니인 태황태후가  섭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신법당을  몹시 싫어하여 신법당의 개혁책을 차례로 폐지시킨 반면, 구법당  그 중에서도 소동파를 신임하 여 유배 중이던 그를 사면 복권시켰다.
 소동파가 지방 관리를  거쳐 중앙 관직에 복귀한  것은 의천이 항주에 내려가 있던 1085년 12월 중순이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잘못 씹은 음식물을 뱉아내듯 이 신법당의 제반 시책을 연일  공격하여 남아 있던 몇몇 개혁마저 폐지시켜 버 렸다. 그리고 1089년에는 자원하여  항주태수가 되었다. 3년 전에 귀국한 의천은 이 해 11월 제자 수개를 항주로 보내어 그 전해에 입적한 정원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동시에, 따로  황제와 태황태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에서  금탑 2기를 바치도록 하였다. 소동파는 정원을 돈밖에 모르는 용렬한 승려로 매도하는 한편, 수개 일행에 대해서는 제사만 허락하고 금탑은 돌려 보낼 것을 중앙정부에 건의 하였으며, 수개 일행을  태우고 온 송나라 상인 서진을 직권으로  구속시켜 버렸 다. 이 부렵 소동파는 송과 고려의 문물교류를  통제하자는 건의를 수 차례나 올 렸으며, 1090년 마침내 그의 건의가 채택되어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물론 의천 과 송 불교계의 교류가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소동파가 고려와의 통상을 반대한  이유의 하나는 송의 서적이 해외로 반출된 다는 것이었다. 소동파는 우국충정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이는 오해와 기우에 불 과하였다. 중국은 당나라  말기 이래로 계속되는 전란과 두 차례의  대대적인 불 교탄압으로 수많은 불교서적이 유실되었다. 그런 화엄학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 은 고려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많은 서적이 송으로  역수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1145년 이들 화엄종 전적이 송의 대장경에 정식으 로 편입되었다.

 교종에 공감, 선종에 반감
 성인은 자기 몸을  굽혀서 남의 장점 취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천 또한 하나의 지식, 작은 행실이라도 배울 점이 있으면 두루 찾아보았고, 그럴 때 마다 반드시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그는 14개월의  짧은 기간에 각 종파의 고승 50여 명과 교류할 수  있었는데, 귀국 보고서에서는 단지 화엄. 유식. 천태. 율학 의 종지를  받아왔다고만 하였다. 이들은 모두  교학불교였다. 의천은 왜 선종을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물로 그는 선종 승려를 만났으며, 그  중에는 당대 최고 의 선승도 있었다.
 1085년 7월 하순 의천은 변경 상국사에서  운문종의 종본을 만났다. 종본은 왕 실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던 선의 거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화엄경>을 소재 로 선문답이 오갔는데,  종본으로부터 들은 말은, “그대는 아직 <화엄경>을  깨 닫지 못하였다.”는  한마디였다. <화엄경>이야말로 수십  번도 더 읽어 보았을 의천이 아니던가. 그러나  스스로도 고백하였듯이 여태껏 참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선의 문외한이었다. 문외한과 거장의 첫대면은 이렇게 끝났다.
 의천은 항주로  내려가는 도중 경치  좋기로 이름난 금산사(강소성  진강)에서 운문종의 요원을 만났다. 그는 유학자 집안 출신으로  계율보다 시와 술을 더 좋 아하였으며, 소동파와의 재기발랄한  일화로 훗날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 게 된다. 의천은 우연히도  소동파가 다녀간 직후에 금산사에 이르렀다. 두 사람 의 만남은 대화  내용보다 첫인사 장면이 동행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 다. 의천이 요원에게 스승의 예를 갖추자, 요원은 앉은 채 절을 받아서 안내하던 양걸을 당혹서럽게 하였다.  요원의 눈에 의천은 왕자가 아니라 단지  불교를 구 하고자 온 타국의  승려일 뿐이었다. 송대 지식인 사회에 팽배한  배타적 중화주 의가 요원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일까.
 1086년 여름 의천은 귀국선을 타기 직전 명주성(절강성  영파) 동쪽에 있는 아 육왕사를 찾아가서 회련을 만나 그로부터 설법을  들었다. 회련은 은퇴한 노승에 불과하였지만, 그야말로 운문종을 왕실에 전파한 일등공신이었다.
 의천은 이들 운문종 승려 외에 다른 유파의  선승도 만났으나, 끝내 선종을 받 아들이지는 않았다. 선  자체는 모든 불교도들의 보편적인 수행법이지만, 그것을 독립된 종파로 발전시킨 것은 중국 불교도의 창안이었다. 선종에 따르자면,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인데, 나를 알기 위해 반드시  경전을 읽거 나 불상에 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기왕의  교종은 경전의 자구 해석에만 골 몰한다거나, 아니면 미신에 가까울 정도로 불상을 숭배함으로써, 정작 찾고자 하 는 ‘나’를 놓치고 있었다. 경전과 불상을 빼놓고  과연 불교를 이야기할 수 있 을까마는, 선종이 그랬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선승들 사이에서는 부처 어록인 경 전보다 선사어록이 더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인도  이래의 전통 불교를 자처해온 교종으로서는 이러한 선종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교종의  눈에 선종은 단연 이단 이었다.
 그런데 중국사회가 당나라 말기  이후 혼란기를 거치면서 숱한 경전이 불타고 불상이 파괴되었으며, 인도로부터  새로운 경전의 전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따 라서 인도적인 전통에  기반한 교종이 급격히 위축된 반면, 중국적  전통을 강화 한 선종이 급속도로 득세하였다. 송대 선종은  수많은 유파로 갈라지며 성행하였 으며, 항주는 그 중심지였다.  특히 정교한 언어와 고매한 담론을 자랑하는 운문 종은 의천이 중국에 갔을 무렵  이미 왕실까지 파고들 정도로 전성기를 맞고 있 었다.
 의천은 철저한  교종승려였다. 그가 중국에  간 목적은 침체된  고려의 교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송 불교계는 선종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의천 이 내심 ‘중국에  인물이 없다’라고 탄식할 만도 하였다. 그러나  송 불교계에 도 선종의 득세와  교종의 침체 현상을 우려하는 승려들이 있었다.  자연 의천은 이들과 만나 서로의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1085년 섣달 그믐께 의천은 서호 동쪽에  자리잡은 영지사로 원조를 찾아갔다.
 원조는 영지사 생활 30년 동안  늘 베옷에 지팡이 차림으로 탁발 행각을 하였다 는 계율종의 고승이었다.  그는 계율뿐 아니라 천태사상과  정토사상에도 조예가 깊어서, 의천은 그로부터 계율과  정토에 관해 특강을 들었으며, 그의 저술을 가 져와 간행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원조는 선종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책을 간행하 려다, 선승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판을 허무는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원조는 그 책을 의천에게 보내주어 지금껏 합천 해인사에 전해지고 있는 데, 따로 보낸 편지에서, “나를 알아주는  자 오직 우리 스님(의천)뿐이십니다” 라고 하였다.
 의천이 선종을  얼마나 비판했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한번은 선종에 비판적인 송나라 승려의 글을  입수해서는 말미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간행 한 적이 있었다.  덧붙인 글에서 요나라 임금이 대장경을 편찬하면서  선종의 대 표 전적인 <육조단경>과 <보림전>이 거짓되었다는 이유로 불태워 버린  사건을 언급하면서 “요망을 잘  제거하였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의천의  글을 구 해 읽은 송나라 화엄종 승려가 기쁨에 넘치는 편지를 보낸 것은 그 후의 일이었 다.

 천태종 개창을 맹세
 선은 불교의 기본적인  수행법이기 때문에, 의천도 선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 니었다. 교종 승려도 선을 닦을 필요가 있었다. 다만 선에는 ‘익히는 선’과 ‘ 말뿐인 선’이 있는데, 선종이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고 보고 격렬히 비난하였던 것이다. 그는 ‘말뿐인  선’에서 ‘익히는 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 였으며, 그것을 천태학의 수행법에서 찾았다.
 항주는 10세기 이래로 중국 천태학의 중심지여서,  의천이 만난 승려들은 종파 를 불문하고 대개 천태학을 배운 경력이 있었다.  1086년 초 의천은 포종맹의 추 천을 받아 서호 서쪽의 상천축사로 가서 정통파  천태종 승려 종간을 만나, 그로 부터 천태학의 교리롸 수행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 너머 용정사 로 종간의 스승 원정을  찾아가 천하제일이라는 용정차를 맛보며 종일토록 담론 을 나누었다.  나중에 원정은 의천의  도움으로 교종이 쇠퇴하지  않게 되었다는 감사의 글을 보내기도 하였다.
 1086년 봄 변경을 다녀온 의천은 혜인원에 머물다가 정원과 하직한 다음 귀국 길에 올랐는데, 바로 항구로  가지 않고 천태산(절강성 천태현)을 향하여 남쪽으 로 내려갔다. 천태산 남쪽 기슭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유서 깊은 국청사가 자리잡 고 있다. 이 절은  일찍이 수 양제가 지자대사의 유언에 따라  창건하 ㄴ이래 중 국 천태종의 중심  사찰이었다. 우리 나라 승려들의 발길도 잦아서  국청사 앞에 ‘신라원’이 있을 정도였다. 고구려승 반야와 신라승  도육은 이 곳에서 수행하 다가 일생을 마쳤으며,  10세기 고려에서 온 의통과 제관은 중국  천태종을 부흥 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의천은 천태산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었을 것 이다. 마침내 지자대사탑을 참배하는 자리에서, 그는 고려에 돌아가면 반드시 천 태종을 창건하겠노라고 굳게 맹세하였다.

 금의환양
 1086년 5월 12일 의천은 명주 포구에서 고려 사절단의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되 는데, 그를 전송하는 고관들의  수레가 길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6월 고려 국경 에 다다르자, 그는  허락없이 중국유학을 감행한 데 대해 선종에게  죄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 이  글에 의하면, 의천은 자신의  유학을 당나라 승려 현장의 인도 유학에 비견하고 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유명한 현장  역시 국법을 어기 고 몰래 인도 유학을 하였으나, 귀국할 때는 거국적인 환영을 받았다. 의천의 유 학기간은 현장의 17년에  비해 턱없이 짧았지만,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한껏 높 인 점, 침체일로에 있던 송 불교교학을 진작시킨 점, 그리고 3000여 권의 경전을 가져온 점 등은 현장 못지않게 성대한 환영을 받을 만하였다.
 지눌은 왜 불교계를 비판하고 결사를 창립했나 박영재(서울대 강사)
 (1174년, 명종 4)중광사. 홍호사. 귀법사. 홍화사 등의 승려 2000여 명이... 숭인 문까지 불태운  후 쳐들어와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고 했다.  이의바이 알아채고 군사를 풀어 그들을 쫓아 100여 명을 죽였으나 군인들도 또한 많이 죽었다.
 (1217년, 고종 4)거란병이 개경  가까이까지 쳐들어오자, ... 흥왕사. 홍원사. 왕 륜사. 수리사  등의 승려로서 종군했던 자들이  최충헌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최충헌의 가병에게 패했고)... 전후 거의 800여 명의 승려를 죽였 으므로,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몇 달 동안은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했다.
 명색이 불교국가인  고려시대, 일반민에서  문신 무신이나 국왕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교를 신봉하였으며  승려들이 많은 특혜를 누렸던 그 시대에,  선뜻 이해 가 되지 않는  사건이 다발적으로 터졌다. 도대체  100여 명, 800여 명의 승려가 몰사를 당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왜 승려들은  당시 정치의 실세인 이의방과 최 충헌을 죽이려 했을까. 불교를 닦고 중생을 구제해야  할 승려들이 창과 칼을 들 고 일어선 배경이 사뭇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승려는  거의 교종 계통이 며, 때는 무신이 문신 중심의 기존 체제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후이다.

 체계불교와 불교교단의 세속화
 고려시대 불교는 국가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기본적으로 국가 불교. 체계불교적 성격을  지녔다. 국가는 불교를 지배이념으로 하여 체제안정과 사회통합을 꾀하였는데, 상징적으로 국사. 왕사제도 등을 두고 승려를 극진히 대 우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들을 일반  행전체계 아래에 두고 인사와 교단 운영 을 통제하였다.
 불교계는 준관료적 성격을  띠어 국가권력에 철저하게 종속되었고 결과적으로 체제불교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에 편승하여 불교계 내부 에 분열이 있었고 지배세력의 교체에 따라 불교계를 주도하는 종파가 바뀌는 경 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앞의  사료에서 나타난 무신세력과 교종 사이의 생사를 건 싸움이었다. 1170년 무인정변의  후원을 바아 불교계를 주도했 던 교종불교는 그 기반을 치명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교종측은 무인정권 에 대항하여 목탁과 불경을 내던지고 대신  창칼을 들었다. 1174년 승려 2천여명 이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고 쳐들어 갔다가  백여명이 죽임을 당했으며, 1217년에 는 최충헌에 대항한 승려 중 8백여 명이 참살 된 것은 이미 충분히 예견된 일이 었다.
 이런 사건은 한국불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로서, 불교가  지배세력과 세속적 이해관계로 얽혀 있었던 데서 말미암은 병폐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불교교단 은 이제 시기적으로 불교  본래의 사명감을 회복하고 불교계를 개혁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보조국사 지눌(1158에서 1210)이 등장하 게 된 시대적 배경이다.

 불교계 비판
 1165년(의종 19)8세의 이른 나이에 출가한 지눌은,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되기 위하여 이름있는 선승을 찾아 법을  묻기도 하고 참선을 하기도 하면서 그 과정 에서 얻은 기쁨을 남과 함께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세태는 그 가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여기 저기 두루 다니면서 세상 을 보니 불교계는 말이 아니었다. 승려들은  세속적인 이익에만 급급하고 수도는 뒷전이었다.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하는 일을 돌이켜 보면,  불법을 빙자하여 나와 남을 구 분하면서 세속적인 이익에  구차스럽고 세상의 풍진 속에  푹 빠져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만을 허비하니, 비록 출가했다고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아, 삼계를 벗어나고자 하나 번뇌를  끊을 수행이 없고 남자의  몸이 되었으나 장부의 뜻은 없구나. 그러니 위로는  도를 넓히지 못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 며 가운데로는 부모. 스승. 국왕. 시주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참으로 부끄럽도다.
 그렇다면 무엇이  승려들을 수도에 전념하지 않고  세속적 이익에만 급급하게 하였을까. 그것은 승려 개인의 종교적 양심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 으로는 불교계가 지배세력과 세속적  이익을 목적으로 결탁하여 불교 본연의 임 무를 망각한 때문이었다. 이런  세태를 지눌은 매서운 눈으로 비판한 것이다. 그 대상은 물론 개경을 중심으로 권력과 밀착된 정치 승려와 그 무리들이었다.
 이처럼 불교계의 병폐가 극에 달해 있는 어두운 상황에서 기존 불교계에 편입 되어 승려 본연의 자세를 견지해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는 타 락의 본거지를 멀리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양심과 용기 있는  승려들이 개경 을 떠나 지방에서  결사운동을 전개하였으니, 그것은 시작은  작은 횃불이었으나 후일 한낮을 밝히는 해가 되었다.
 특히 지눌이  주도한 결사는 불교교단이 타락하여  사회정화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이를 비판하고 개혁하기  위해 기존 교단에서 벗어나  뜻이 맞는 도반끼리 진정한 수행을  목적으로 결성한 자발적인 신앙공동체이다.  국가나 중 앙 지배층의 후원을 배제하면서 수도를 떠나 지방민의 후원을 받아 출발하기 때 문에, 따라서 그 규모가 초기에는 소규모적이었다.

 결사 선언
 지눌이 결사 의지를 처음  피력한 것은 1182년(명종 12) 1월이었다. 선을 토론 하는 승려집회, 즉 담선법회가 열리고 있던 개경 보제사에서, 그는 뜻이 맞는 동 학에게 결사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법회가 끝난 후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해서 결사를 하 자. 그래서 항상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닦기에  힘쓰며 예불하고 경전 보며 노동 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소임에 따라 수양하여 인연 따라 성품을  기르고 평생을 구속 없이 멀리 덕 높은 이의 삶을 좇는다면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지눌의 말은 세속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면서 수행하지 않은 승려 생활은 이제  청산하고, 결국 은둔해서 출가 본연의 수도에  충실하자는 것 이다. 그 말이  끝나자 여러 승려들이 ‘요즘 같이 어수선한  시대에 나무아미타 불이나 외우면  되지 선정과 지혜를  닦을 필요가 있겠는가’,  ‘선정과 지혜를 닦으면 신통을 부릴  수 있는가’, ‘우리의 심성이 본래 깨끗하다면  수행은 오 히려 스스로를 묶는 불필요한 행위가 아닌가’등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 해 지눌은 논리  정연하고 일관되게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이 불교의 근본임을 역설하였다. 토론이 끝나자  결사 취지에 동감을 표한  동학들은 ‘정혜사’라는 결사의 명칭을 정해 놓고 후일을 기약하였다.
 그러나 결사는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얼마 후 실시된  승과시험에서 당락에 따라 제각각 현실적인  이해를 좇아 뿔뿔이 흩어졌던 것이다. 지눌은  승과에 합 격하였지만 주지와 같은 승직에 연연하지 않고 지방으로 구도 행각을 홀로 떠났 다.
 보제사에서 기약한 후  6년 여가 지났을 때 결사의 인연이  다시 찾아왔다. 경 북 하가산 보문사에 머물고 있던 지눌에게 전에 결사를 기약했던 동지로부터 이 제 시작해 보자는 편지가 문득 날라 왔던  것이다. 이에 지눌은 팔공산 거조사로 거처를 옮겨 전에  약속했던 사람들을 모으니, 죽고 병들거나 명리를  좇아 떠나 버린 자들을 빼고 겨우 3, 4명이었다. 그러나 애당초 산림에 들어가 운둔하여 선 정과 지혜를 닦자는 마당에 인원수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1190년 늦봄 지눌은 장문의 <권수정혜결사문>을 지어 정혜사(이후 수선사, 송 광사로 바뀜)의 창립을 선언하고 신분과  종교, 종파를 가리지 않고 취지에 찬동 하는 모든 이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하였다 때는 지눌의 나이  31세, 결사문에는 권력과 밀착되어 세상의 하찮은 이해 따위나 좇는 타락한 불교계를 질타하고 타 력에 의한 깨달음을 버리고 자력에 의한 깨달음,  즉 선정과 지혜를 닦아 주체적 인 깨달음을 이루자는  정연한 주장이 전편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결사를 선 포하고 나자 뜻밖에 공감하고 모여든 사람들이  많아졌다. 거조사는 비좁아 결사 장소로 적당한 곳을  새로이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옮겨간  곳이 지금의 송광사 자리였다

 수선사 중창과 지방민의 후원
 결사가 옮겨간 곳에는 원래  신라시대에 세웠다고 하는 폐사 직전의 길상사가 있었는데. 지눌은 이  곳에 지방민의 힘을 빌어  중창을 마무리 지었다. 그 때의 정황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전남 북부 장성현 백암사 승려 성부는 목수  일로 평생을 보냈는데, 불법을 듣 고 발심하여 염불을 일삼았다. 중창은 모두 그의 손에 의에 이루어진 것이다. 금 성(전남 나주)의  안일호장 진직승은 처와 함께  지극한 마음을 내어  술과 매운 냄새나는 채소를 끊고 반야심경을 수지하였는데, 백금  10근을 시주하여 절을 조 성하는 비용으로 삼았다. 그리고  남방의 각 고을에 사는 부자는 재물로, 가난한 자 몸으로 절을 완성하였다.
 위 자료에서 우리는  수선사가 중창될 때 후원한  인물들이 인근 지역의 지방 민, 특히 진직승과 같은  상층 향리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정치권력의 후원 은 일절 없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수선사 중창에  지방민이 발벗고 나선  것일까. 그들이 지눌에게 염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방민의 후원으로 이룩된  수선사는 지 방민의 바람에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지눌은 전 시대와는 달리 지체 높은 집안의 후예가 아니라 지방 향리지식층으 로서 하급관리를 지낸 인물의 자제였다. 승과에  합격하였지만 이렇다 할 승직도 갖지 못한, 그러면서  권력과 연결된 부패한 불교를 박차고 개경을  떠나 결사를 결행한 승려였다.
 지방민도 무인정변 이후  역시 이전의 모습과는 달랐다. 문신 중심의  기존 지 배층이 무신에 의해 도태되면서,  지방민은 중앙관인층의 모집단으로서 중앙으로 의 새로운 길이  크게 열렸고 지방사회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전국 적인 농민. 천민향쟁으로 피지배층은 사회의식의 성장을 가져왔다.
 이제 지눌의 참신한 불교사상과  도덕성은 새로운 사회의식에 눈뜬 이들 지방 민의 종교적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들과 지눌은 교감이 없을  수 없 었다.
 지눌이 이타적 보살행의 실천을  강조한 것은 종교적 깨달음을 사회에 환원하 고자 한 것인데, 이는 결국 지방사회의 일반민에 대한 관심의 표출인 것이다. 그 리고 중생의 다양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성불의  가능성을 모두에게 개방한 것은, 당시 역사발전에서 역동적으로 분출된 하층민의 신분해방과 무관한 사상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지눌과 지방민은 중창공사에서 처음으로 만나 바야흐로 결사의 터전을 닦기에 이르렀다. 1197년 공사가 시작, 1205년 드디어 중창공사는 마무리되고 지눌의 결 사운동은 본격화되었다.

 세 번의  감동적인 깨달음
 지눌은 일생 세  번의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그는 이를 토대로  사상체계를 세 워 나갔으며, 그  사상은 결사의 장에서 펼쳐졌다.  첫 번째 깨달음은 전남 창평 청원사에서 <육조단경>, 두 번째는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서<신화엄경론>을 읽 고 이루었다. 두  번째의 경우는 선승이면서도 교종 계통의 논서를  보고 깨달은 것이 특이하다. 선종세서 문자를 소홀히 여기는 관행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그는 두 번째의 깨달음을  이룬 후 대중을 인도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깨달음이 완성되면서 이타행의 종교적 실천도 익어갔던 것이다.
 지눌은 수선사 중창을  도반에게 맡기고서 이듬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여기 서 2년을 지내면서  열정적인 구도열릉 다시 한 번  보였다. 드디어 <대혜어록> 을 보다가 활연대오하였다.  이 마지막 깨달음은 결사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의 미를 가진다. 현실에  대한 선의 적극적인 면을 발견하고 현실사회와  새로운 관 계를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속세를 떠나 은둔하려는  결사가 속세로 되돌아오면서 속세에  물들지 않는 단계로  차원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제 그는 깨달음이 굳건하게 서고  현실과 결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대중과 함 께 결상에 매진하는 일만 남았다.
 지눌의 세 번에 걸친 깨달음은 그대로 대중을 이끄는 지도원리가 되었으며 저 술로 구체화되었다.  현재 저술로는 <권수정혜결사문>. <진심직설>.  <수심결>.
 <원돈성불론>. <화엄론절요>.  <법집별행록절요사기>. <간화결의론>등이 전해 온다. 문자를  거부하는 일반 선승과 달리  여러 저술을 남기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들 저술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면서  다양한 중생의 능력을 고려 하여 차근차근 친절하게 깨달음의 세계로 이끈다.
 
 우리는 부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지눌의 불교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이 ‘돈오점수 정혜쌍수’이다. 그는 <수심결>에서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인들이 밟아간 길이라고  단언하였다. 자신 이 바로 부처임을, 자신이  부처와 똑같은 완전한 지혜;의 성품을 그대로 가지고 있음을 단박 깨닫는 것이 돈오이다.
 그리고 그렇게 깨달았더라도 깨닫기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몸에 배어 온 습관 의 기운이 일시에 없어지지 않고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선정과 지혜로 점차 지 속적으로 닦아야  한다고 아였으니, 이것이 점수이다.  이 점수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고 해서  정혜쌍수인 것이다. 이러한 수행이 필요한 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난 날에 모든 기관이 성장한  어른과 조금도 다름이 없으나, 힘 이 충분하지 않아 먹고 뛰놀며  세월이 흘러서야 어른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 다.
 지눌은 돈오의  철학적 근거를 그가  두 번째의  깨달음에서 의지한<신화엄경 론>에 두고 있다. 선사사의 철학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교학의 사상을 과감 하게 원용한 것이다.  이는 신라말 고려초 선종의 수입으로 인해  불교사의 새로 운 과제가 된 선동과 교종 사이의 갈등을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해결하려고 했던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런데 지눌의 사상은 다분히 지적 이해의 차원이 ‘돈오점수 정혜쌍수’에서 끝나지 않는다. 부청의 성품을 깨달으라 하면  그 성품이 절대적으로 실재하거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다. 이는 원시불교의  연기사상이나 대승불교의 공사상에서 보면 비불교적인 것이다.  그리고 말과 글로 이해하는, 다시 말해 생 각하고 헤아려서  깨닫는 것은 깨달음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깨달음에서 아직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화두 참구라는 수행법 을 권한다. 화두야말로 알음알이를 뛰어넘어 인식과  실천의 간격이 없는 진정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뛰어난 도구이기 때문이다.
 한편 지눌 사상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깨달음을 중생에게 되돌려 그들을 구제하려는 이타적 보살행의 실천이다. 지눌은 자신만  깨달은 채 중생의 고통을 외면한 승려가 아니었다. 그는 저술 곳곳에서  깨달음에만 머물러 중생을 외면하 는 세태를 경계한다. 돈오점수거나 화두 참구거나 보살행이 없으면, 고요한 곳에 빠져 깨달음에 생명력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깨달은 후에 중생의  능력과 형편 에 맞추어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굳은 원을  내여 실천해야만 그 깨달음은 비로소 원만히  완성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지눌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수선사 제2세 주지인 혜심에 의하여 사회의식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지눌의 비문은 조계산 아래에서 조용하게, 그러나  치열하게 살다간 그의 삶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지금은 부처가 떠나신  지 오래 되어 법도 따라서 해이해졌다.  학자들은 케케 묵은 말만 지키고 비밀스런 뜻을 몰라 근본은  버리고 말단만 좋고 있다. 그리하 여 마음을 관찰해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은 막히었고 문자로 희론하는 풍조는 벌 떼처럼 일어나 올바른 불법은 거의 땅에 떨어졌다. 이에 여기 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홀로 들뜨고 거짓된 속세를 등지고 바르고 참된 종지를 사모하여 처음에는 경전의 말에 따라  진리에 나아가고 마침내는 선정을 닦아 지혜를  드러냈다. 이 미 몸소 얻으매 , 아울러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서 잠자던 선풍을 떨치게 하고 어두웠던 조사의 가풍이 다시 밝아지게 하였다.  그런 사람이라면 가섭의 적손이 며 달마의 적통으로서 잘 이어받고 잘 계승하고 발전시킨 사람일 것이다. 아, 우 리 국사가 바로 그 분이시다.
 지눌은 정치권력의 안주로부터 빠져 나와 권력과 결탁한 불교계를 비판하였으 며, 이와 함께 독창적인 선사상 체계를 마련, 선수행 공동체를 결성하여 남과 더 불어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이는 불교운동에서  끝나지 않고 역사 정화운 동으로까지 이어졌다.그가 비록  현실에 뛰어들어 사회적 해방을  부르짖지는 않 았지만, 그의 종교적 해방의 과정은 넓게 보아  사회변혁과 궤도를 함께 하는 것 이었다.

 오늘에 살아 있는 지눌
 현재 지눌이 창건한  송광사는 제8차 중창공사를 마무리하고 지눌사상의 선양 으로 내실을 도모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주류인  주류인 조계종은 종헌에 지눌을 중천조로 명시하고 있다.  작게는 송광사에서 크게는 한국불교에서  그의 사상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고려불교의 깃발 아래 살고  있고 지눌의 숨결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지눌의 삶과  사상은 오늘의 종교계 내지  불교계에 많은 시사를 줄  수 있다.
 고려, 유교.   불교. 도교가 역할 분담으로 갈등없이 공존했던  그 시대에서 사상 의 중심부를 차지했던 지눌의  사유체계는 분명 다종교시대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3교를 포용하고 선종과 교종을 아우를  포괄적인 지눌 의 선사상과, 권력과 밀착되어 타락한 불교계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축발한 그 의 결사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관 심을 돌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에 담긴 염원 김영미(이화여대 교수)
 우리 나라의 불교문화를 이야기할  때 삼보 사찰이라고 하여 중시하는 절들이 있다. 불교의 삼보란 부처, 부처의 가르침, 승려를 말한다. 우리의 경우 석가모니 의 진신사리를 모신  통도사를 불보사찰,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해인사를 법보사 찰, 고려시대에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를 승보사찰이라고 한다.
 팔만대장경은 해인사 대적광전  뒤편의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는데,  담장 안으 로는 낙엽 한 장 떨어지지  않고 하늘 위로는 새가 날아다니지 않으며 경판에는 먼지가 끼지 않는다고  전해 온다. 1995년 유네스코  산하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경판을 보관한 판고를 종묘, 불국사. 석굴암과 함께 인류 가 보호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그런데 근래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 뒷편에 골프장이 들어선다고 하여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불교계를  비롯한 각계 사람들은 팔만대장경을  보호하기 위해서 는 골프장 건설 허가를 취소해야 한다며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골프장이 들 어서면 노약 등을  뿌리게 되어 대장경판의 보존에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 다. 그런데도 지방자치단체는  해인사 장경각의 팔만대장경 판목에  미칠 영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건설을 허가하였던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때 새긴 대장경판을 가리킨다.  따라서 고려대장경이 라고도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아. 고대 인도에서는 많은 숫자를 8만  4천이라 하였는데, 8만 4천 번뇌,8만4천 법문 등이 그 예이다. 이를 간단히 8만이라고도 하므로, 부처의 설법을 담고 있는 대장경을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 8만여 매에 이르는 판목으로  이루어져 있 다는 점에서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판목의 앞뒷면에 불경을 새겼으 므로 실은 16만여 장에 이르는 경전을 판각한 셈이다.
 팔만대장경은 1232년 몽고의 침입을  피하려 강화로 수도를 옮긴 이후 대몽항 전을 계속하던 시기에  15년간에 걸쳐 새겼다. 그렇다면 전쟁에 온  힘을 기울여 야 했던 고려 조정이 팔만대장경 조판이라는 엄청난 작업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 일까?
 옛날 현종 2년에 거란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임금은 남쪽으로 피 난하였는데, 거란 군대는 오히려 송악에 머물며 물러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임금 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크게 발원하여 대장경의 판각을 맹서하자 스스로 물러났 다. 대장경은 한 가지이고 전후에 새긴 것도  같으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발원한 것도 동일하니, 어찌 그 때에만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나고 이번의  몽고군은 그러지 않겠는가.오직 부처와  여러 천인들이 얼마나 버살펴 주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규보가 지은 이 글은 임금과 신하가 모여 부처의 신통력으로 몽고군을 물리 쳐 주기를 빌며  대장경의 판각을 고한 것이다. 현종때 만들어  부인사에 보관하 던 대장경판목이 1232년(고종  19)제2차 몽고 침입 때 불타 버렸기  때문에 새로 운 대장경을 만들어 몽고군이 저절로 물러나기를 기원한 것이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위기에 몰렸던  1236년에 대장도감을 설치하였고,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1237년부터  1248년 사이에 판각하였다. 그런데  1237년에 판 각한  것은 2종,  1248년에 판각한  것은 <대장목록>1종에  불과하므로, 실제로 1238년부터 1247년에 걸쳐 거의 대부분을 판각하였다. 마침내 1251년(고종 38년) 국왕과 신하들이  강화도 선원사 대장경판당에 나아가  대장경의 완성을 기리는 분향 의례를 거행하였다.
 이와같이 어려운 시기에 대장경을  판각한 것은 한국불교의 호국적 성격을 말 해 주기도 하지만, 최씨정권이 백성들을 규합하여  자기들 중심으로 항쟁을 지속 해 가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것은  1237년 무 렵 대규모 투항민이  발생한 것을 참작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을 부처의 힘을 빌어 극복하고자 했던 고려인의 신앙심이 발 현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대장경 조판에 참여한  사람들을 살펴보 면 알 수 있다.

 팔만대장경은 누가 어떻게 다 새겼을까?
 8만여 장의 판목에 16만여 쪽에  이르는 경전을 누가 어떻게 새겼을까? 그 비 용은 어떻게 감당했을까.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  최씨정권은 당시 서울이었던 강 화에는 대장도감을 두고  남해에는 분사도감을 설치하였다. 강화와  남해에 도감 을 설치한 것은 이 곳이 몽고군이 남하하더라도 안전이 보장되는 섬이기 때문이 며, 또한 섬과  해안가에서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를 구하기 편리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남해의 분사도감은 정안과 관계가 있는데 그는 대장경 조판을 발원하고 지 휘한 최이의 처남이었다.  당시 그는 최이가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을 보 고 해를 피하기 위하여 남해에 물러나 있다가,  대장경 조판 소식을 듣고 사재를 털어 절반을 나누어 새기기로 하였던 것이다.
 대장경 조판을 위해서는  두 가지 작업을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경판 에 대고 새기기 위한 판본을 마련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경판을 마련하는 일이 다. 경판은 먼저 목재를  베어내 운반한뒤, 적당한 크기와 부피로 판목을 잘라내 어 바닷물에 담가  두었다가, 다시 소금물로 쪄서 기름성분을 완전히  빼낸 다음 몇년 동안 그늘에서  말리고 대패질을 하여 마련하였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경 판 한 장의 크기는 세로 24에서 25센티미터, 가로69센티미터 또는 78센티미터,두 께는 2.4에서  3.6센티미터 정도이다. 이러한  크기의 경판을  마련하려면 적어도 지름이 50센티미터 이상인 곧은 나무를 사용해야  했다. 따라서 8만여 장이나 되 는(잘못 판각하여 버리는  경우를 생가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음)경판을 마련하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경판이 완성되면 승려나 문인이 쓴  경문을 그 위에 뒤집어 붙인 뒤에 양각하 였는데, 양면에 각각 14자씩 23행을 새겼다. 그 후 양쪽 끝에 각목으로 마구리를 대고 경판 표면에 진한 먹을 발라 나무를 물들인  후 결을 메끄럽게 한 다음, 그 위에 안료를 섞지 않은 생옻을 두세 차례 칠하여 말렸다. 그리고 순도 99. 6퍼센 트 이상의  구리판으로 네 귀둥이를  감싸서 판이 뒤틀리지  않도록 마감하였다.
 이렇게 하여 대장경판은 지금까지도  뒤틀리거나 좀먹지 않은 채 보존될수 있었 다.
 이처럼 복잡한  제작과정에는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벌목공, 운반공, 목공, 칠공, 필사하는사람, 글자를 교정보는 사람, 그리고  새기는 사람 등이 바로 그들 이다. 그 중 나무를 베어 운반하고 켜낸 후 말리는 일, 강화로 마른 경판을 운반 하거나 남해에서 새긴 경판들을  강화로 운반하는 일 등은 지방민에게 부과되었 을 것이다. 동원된 지방민들은 처음에는 고역으로  여기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을 것이다. 인과응보설과 윤회설을 굳게 믿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불사에 동참하는 일만큼 공덕을 쌓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이 16 년간이나 지속되었으므로 항상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고 때로는 괴로운 의무가  되었을 것이다. <고려사>에서  ‘정안이 대장경  조판에 참여한 뒤 그 지방 사람들은 불사가  매우 번거러워 싫어하고 괴롭게 여겼다’고 한 것 이 바로 그  예이다. 조선초기 유학자들이 찬술한  <고려사>의 기록이므로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사료비판이따라야 하겠지만, 16년간이나  작업이 지속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한편 글씨를 쓰거나 새긴 사람들이 모두 강제  동원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새 긴 사람들 가운데는 전문적인  각수라고 보기 어려운 신분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각수가운데 승려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사원에서 경 전을 개별적으로 판각하여  간행하기도 했던 것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 다. 그리고 진사  신분의 사람들도 각수로 참여하였다.  진사 임대절은 7년 동안 177장을 새겼고, 진사 영의는 한  해 동안 31장을 새겼다. 또 박문정, 염수정, 황 공석은 경판을  새긴 뒤에 국자감시에  합격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도 진사들을 더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강제 동원된 전문  각수라고 할 수 없고 신앙으로 국 가의 위기를 극복하려 자발적으로 동참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고려사>에서는 최우. 최항 부자와, 정안이 대장경판 조성을 감당했다고 하였 다. 1255년(고종 42)국왕은 대장경판  조성에 최이부자가 세운 공로를 기리는 조 서를 내렸는데, 그에  따르면 최이는 사재를 기울여 대장경을 거의  반이나 조판 하였고, 최항도  재산을 시주하고 일을 감독하였다는  것이다. 또 정안도 사재를 내어 대장경을 절반 가량 조판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모든 비용을 댄 것은 아니었다.  경판의 끝부분을 보면 대개 구 석에 한 명에서 이르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경판을 만들거나 새 기는 데  재산을 시주한 사람들이다. <대방등대집경>권  3의 맨 끝장(제34장)을 보면 천태산인 요원 , “이 공덕의 힘에  의지하여 영원히 윤희의 과보를 벗어나 고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극락향에 편안히 사소서”라고  기원하고 있다. 그 밖에 ‘여신도 김씨가 부모를 위해’, ‘사미 백우가  부모를 위해’등의 기록으로 미 루어 재가신자들과 승려들이 발원하며 경판을 시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장경을 새기는  데 일반민으로부터 관리,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팔만대장경은 몽고군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국가적 사업의 산물인 동시에  개인적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 전 고려인 의 염원이 담긴 문화재인 것이다.

 고려인 모두의 염원이 담긴 찬란한 문화의 꽃
 단지 판목의 막대한 숫자  때문에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아니 다. 오히려  몽고 침입이라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민족이 발휘한  문화적 저력에 유의해야 한다. 16년간이라는 단기간에 대장경을 완성할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우리 민족이 불교를 깊이 연구하고 출판 문화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먼저 목판  인쇄술을 비롯한 인쇄술의  발달을 들 수  있다.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사찰에서응 불경을 금은 등으로 사경하였을 뿐 아니라 목판으로 간 행하기도 하였다. 석가탑으로 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견>은 751년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각종 경전을 수 집 간행하였는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종 때 초조대장경을 조판할  수 있 었다. 그 후 선종과 숙종 때 대각국사  의천은 국내뿐만 아니라 송, 거란, 일본에 서 승려들의 저술을 구해 먼저  <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찬하고 속장경을 판각하 였다.그 밖에  혜덕왕사 소현도 금산사(전북 김제군)에  광교원을 설치하고 경을 판각하였다.
 이와 같이 각 사찰에는 필요한  저술을 판각하여 유통시킬 수 있을 만큼 기술 이 축척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도 유교 경천  및 역사서를 판각할 수 있는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1192년(명종 22)에 이부상서 정국검과 판 비서성사 최선에게 명하여 여러 선비들을 모아 <증속자치통감>을 교감한 후 여 러 주현에서  판각하여 신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중앙과 지방의 행정 기관 및 사찰에서 축적으로 있던 목판인쇄술이 집대성된 것이 팔만 대장경이었다.
 그런데, 이미  1234년에 <상정고금예금>이 금속활자로 간행되었던  사실로 미 루어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도 상당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는데,  굳이 목판으 로 새긴 것은 수요가 있을 때마다 재간행할  수 있다는 목판으로 인쇄의 이점과,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복구하려는  염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불경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점을 들 수 있 다. 태초가 경전을 수집  간행토록 한 이후 정종은 양곡7만 섬을 내어 불경명보, 광학보등을 설치하여 경전을  연구하고 간행 보급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960년 에는 송의 요청으로 <천태론소>를 비롯한 경전들을  보내줄 정도였다. 그 후 송 의 최초로 대장경을 간행하자 991년 송에 간 한언공이 대장경 2천오백여 권 481 상자를 구해 왔는데, 현종 때 조판한 대장경은 이를 저본으로 한 것이다. 1063년 거란본 대장경을 들여온  이후에는 이에 근거하여 송 대장경에 없는  경전, 본문 에 차이가 심하거나 판각하여 편입하는 한편 송에서 새로 번역된 경전들을 계속 조판 하였다.  초조대장경을 조판한 이후에도  계속 여러 판본을  비교 연구하여 더욱 완성된 판본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가 팔만대장경을 간행할 때 반영되었으니,  수기를 책임자로 한 교 감자득은 우리  나라에서 유통되던  파본, 송  대장경, 거란  대장경을 교감하여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30권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대장 경을 판각함으로써 그동안 간행된 대장경 중 내용이 가장 정확하여 오자가 없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1924년 <대정신수대장경>을 간행할 때, 팔만대장경 저본으로 삼기로 하였다. 또 현재 전하지 않는 거란 대장경의 면 모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고 있다.
 한편 팔만대장경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판고의 건축술로 주목되야 한다. 대장경판이 오늘날까지  상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대장경판 자 체뿐 아니라  뛰어난 판고 건축술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장격각은 팔만대장경을 나누어 보관한 동. 서 사간고로 이루어져 있다. 법보전과 수다라장 의 건물규모는 각각 30칸(195평)씩으로,  건물안의 판가는 길이150센티미터, 높이 64센티미터로 판가당 34에서 44장의 경판이 꽂혀  있고, 각 판가는 5단으로 이루 어져 각각 수직으로 습도가 결정적이다. 판고는 해발 645미터에 있는데, 세 계곡 이 만나는 지점에서 1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곳으로 바람이 늘 불어온다. 바람은 맨 밑단에서부터 맨위 판가에 이르기까지 경판 틈을 골고루 지나면서 습도를 조 절해 준다.  또한 판고 지붕의 구운  기와도 온도 조절까지 하게  되어 곰팡이나 썩음균의 서식을 막아준다.
 판고는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길 무렵 세웠을 것이다.  원래 팔만대장경은 강화도 선원사에 보관하였는데, 1398년(조선 태조 7)왜구의 침입 및 병란에 대비 하기 위해 한강을  통해 서울. 지천사(현재 독립문 부근)를  거쳐 약 8개월 만에 해인사로 보안하였던  것 이다. 그런데  조선왕조 개창 이후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잦은 요청에 따라 팔만대장경경판이 한때 일 본으로 건너갈 위기에  처한 적도 있다. 1414년(태종  14)경판을 일본에 보내 줄 것을 조정해서 의논하기도  하였으며, 1413년(세종 5)에는 대장겨판을 주어도 아 까울 것이 없다는  데에 의견이 일치하기도 했으나, 일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 다가 훗날 줄  수 없는 물건을 요구할 때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그만두었던 것이다. 그 후에는 1695년(숙종 21)이후 일곱 차례의 큰화재로 해인사의 많은 건 물이 불에 타는 등 피해를 입었으나 판고는 무사 하였다.
 1951년에는 가야산 일대의 인민군  패잔병 소탕을 위해 해인사 대적광전 일대 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공군  편대장은 수백 명의 적을 소탕하기 위해 파리 인도와 바꿀 수  없는 세계적 보물인 팔만대장경판을  잿더미로 만들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한 순간의 판단은  750년간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켜 본 팔만대장경판을 보존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는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성숙한 문화의식으로 골프장 건설 등 개발을 통해 얻을  눈앞의 이익을 쫓으려는 사람들의 짧은 생각으로 비 판하고 시정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고려 불상의 이모저모 강희정(이화여대 박물관 학예연구원)
 우리 나라 전 역사를 통틀어 불고가 가장 융성하고 발달하였던 때는 고려시대 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석굴암을 꼽 는 사람은 많아도  고려시대의 상상을 떠올리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면 고려 시대에 불교미술이 융성하지  못했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흔히 ‘고려’ 하면 연상되는 청자나  각종 공예품을 기억한다면,고려의 정신세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치지하였던 고려 불교미술의  미적 수준이 낮았다고 단정할 아무런 근거 는 없다. 불상만 놓고 본다면, 통일신라에 비하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뒤지지 않을 고려가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통일신라  중대의 불교미술을 한국미술사의 고전으로 파 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상화된  인체 묘사, 자신감 넘치는 역동적인 선은 물 론 후대까지 미술 창작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 러나 고려의 불상이나 보살상도 통일신라와는 다른  시대정신과 미적 특징을 지 니고 있다. 세련된 미적 완결성을 추구하던  통일신라기의 불교미술이 고려로 넘 어오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였을까? 무엇보다도  서민적이고 한층 대형화된 ‘거대한 불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거대한 불상의 시대
 여느 예술과 마찬가지로 불교미술도  제작 당시의 시회적 분위기에서 결코 자 유로울 수는  없다. 고려 불상에도  전통을 고수하려는 보수성과  새로운 기운을 반영하려는 진취성이 뒤섞여  있는데, 대체로 13세기를 전후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려 전기 불상의  특징은 대형화 추세이다. 높이 18미터의 관촉사석 조보살상은 이러한 흐름을 웅변해 준다.  흔히 은진미륵으로 알려진 이 거대한 석상은 규모나 돌덩어리처럼 단순한 형체가 영국의 스톤헨지를 연상시킨 다. 높은 원통형의 보관  위에 풍경이 달린 천개를 덮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 고 얼굴이나 신체에도 이전 시기의  조각에서 볼 수 있던 굴곡과 양감이 표현되 지 않았다.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기괴한 얼굴 묘사와  그에 걸맞게 두툼한 손 모습이 두드러진다. 미륵으로 알려져  있지만 길다란 연꽃가지를 들고 있어 관음보살일 가능성이 높다.
 보통 몇 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을 찾기가 쉽지 않으므로 이런 종류의 불상을 만들 때에는 일반적으로 다리, 몸통, 상반신과 얼굴 등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조각을 한 뒤
 맞춰 세운다.  그런데 은진미륵은 어떻게 세웠을까?  이 궁금증을 풀어  줄 만한 이야기가 관촉사에 전해 내려온다.
 은진미륵을 만든 스님이  고민에 빠졌다.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세운담! 깜빡 잠이  든 스님의 꿈에 너댓  살 먹은 어린아이들이 자기들  키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진흙 인형을  만들고 있었다.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 만들 어 볕에 말렸다. “요녀석들이
 저걸 어떻게 하나 보자”며 스님이 멀찍이서 지켜  보는데, 발과 다리 부분을 세 운 어린아이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모래를 잔뜩 날라오기  시작하였다. 먼저 똑바로 세운 다리 주위를 모래로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모래 위에 물 을 뿌려 단단하게 다지더니 비스듬한  모래 사면 위로 몸통 부분을 끌고 올라가 다리 위에 올려 세웠다. 같은 방식으로 머리를  세우더니 스님을 돌아보고 씩 웃 는 게 아닌가. 그  미소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스님의  옷에 난데없이 물에 젖은 모래가 붙어 있었다.  그제서야 스님은 “아, 우둔한 나를 깨우치려고 관음 보살님이 몸을 바꾸어  나타나셨던 게로구나”하고는 꿈에서 배운대로 은진미륵 을 무사히 세울 수 있었다.
 이 설화는 은진미륵도 선사시대의 고인돌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비슷한 방 식으로 세워졌음을 시사한다. 18미터에 이르는 거상을  제대로 세우기 위하여 모 래나 푸석푸석한 흙을 동원했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은진미륵과 같은  불상은 고려 전  시기에 걸쳐 조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에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 대조사의 석조보살입상, 예산 삽교리의 석조보살입상, 당진 안국사지의 석조삼존불입상 등 이 좋은  예이다. 이들 조각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양감을 잃어  비석이나 장승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다.  크기는 관촉사불상보다 훨씬 작은  경우가 대다수이지 만, 몸체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조각한 뒤  차례로 올려 세우는 방법은 같았을 것이다.
 
 바위에 새긴 불상
 거대한 석상의 또 다른 예로 마애불이 있다.  커다란 바위나 암벽에 낮은 부조 나 선각으로 불상을 조각한  마애불은 3에서4미터에 이르는 자연 암벽을 몸체로 사용하고 머리 부분은 별도의 돌로 만들어 올린 혼합형과 머리까지 암벽에 새긴 완전한 마애불의 두 종류가 있다.
 안동 이천동의 마애불은 앞의 방식을 따랐다.  신체는 두루뭉실 엉성하게 조각 하고 머리만 원각으로 따로 새겨 얹은 형상인데,  낮은 보관과 천개를 올린 것이 흥미롭다. 보살상이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은 당대의 실제 복식과  밀접한 관련 이 있어 보인다.  여성화 경향이 더욱 현저해진  고려의 보살상은 특히 오대, 복 송, 원으로  이어지는 중국왕실의 지체  높은 여인네들의 장신구나  머리 꾸밈에 많은 힌트를 얻은 듯하다. 물론 이는 고려만의 일은 아니다. 중국 내부나 일본에 이르기까지 인도적 모델을 찾기 어려웠던 시기에 폭넓게 사용되었던 방법 중 하 나였다.
 고려시대 석불  중 두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천개이다. 고인돌의 뚜껑돌처럼 생긴 천개는 말 그대로 ‘하늘 뚜껑’인 셈인데 기능에 대한 정설은 없다. 보통 노천에  세워진 석불이나 마애불에 직접적으로 눈비가 닿는  것을 막 기 위해 모자처럼 불상머리 위에 얹은 것으로  생각된다. 천개는 모양을 내서 곱 게 다듬기도 했으나 납작한 판석을 그대로 올려  놓은 것도 있다. 또 은진미륵처 럼 불상 조성 당시에  미리 천개를 고려하여 만든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전 시 대의 조각에 천개만을 따로 만들어 얹은 경우도  적지 않다. 어느 쪽이든 천개는 법당이 아닌 야외에 세워진 고려석불의 중요한 특징이라 해도 좋을 듯싶다.
 충주 월악산 덕주사의 마애불, 천원 삼대리의  마애불은 높이가 각각 13미터와 7미터에 이르는 대불이다.  역시 얼굴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만  얕은 부조를 하고 나머지는 선각으로  처리하였다. 덕주사에는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 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이  자리에서 회한의 눈물을 뿌렸다는 전설이있다. 그러나 규모와  수법은 통일신라의 것과 거리가 있어 실제  절의 창 건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이들 거대한 석조불상은  통일신라기에 비해 조형적 완성도가  떨어진다. 이는 조각가의 솜씨가 통일신라기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지만 미의식보다는 불상의 규 모를 더욱 중시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마애불은 통일신라기와 달리 중앙의 미의식이 지방의 미술을 좌우할 만큼 파급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지방민의 종교적 열의가 자유롭게 분출된 결과물이다.
 불상의 대형화 움직임은 신라하대인 9세기 경부터 전국 각지에서 태동하여 고 려 건국과 더불어  한층 강화되었다. 충분히 중앙집권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 앙정부로는 새로 일으켜  세운 불교국가의 위상과 저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에서, 지방세력가는 부처님의 힘을  빌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방편에서, 경 쟁적으로 더 큰 불상을 세웠던 것이다. 부처의  위신을 빌어 힘을 키우려는 세력 가나, 대중들에게 부처의  위엄을 보여 주려는 교단의 바람이 영험  있어 보이는 거대한 석불상을 양산하였던 것이다.
 
 지방색 짙은 불상
 전기 불상의 대형화는 석불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철조여래좌상은 하남시  하사창동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높이 2.8미 터 규모로 철불 가운데에서 작은 크기는 아니다. 신체 비례와 자세, 옷자락 처리 는 석굴암 본존불을  모방하였다. 8세기 중엽에 오성된 석굴암  본존불은 철불이 건 석불이건 간에 불상의 재료에  상관없이 이미 신라 하대부터 다른 불상의 모 델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철을 불상의  재료로 사용한 것은 8세기 경으로 신라하대에  들어 널리 보급되었는데, 10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 되는 이 철불을 안면과 가슴에  양감은 있되 탄력이 줄어 역동적인 긴장감을 주 지 못한다. 눈도 길고 가늘게 치켜 올라간  반면 콧날이 평평하고 입이 지나치게 작아
 통일신라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이전 시 기 불상의 자비로운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거칠고 근엄한 인상이다.
 별로 크기 않으나 한송사의  석조보살좌상은 고려전기 불상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다지 흔치  않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조각수 법도 특이하다. 높이 원통형의  보관과 장신구, 눈썹 밑을 깊이 파서 눈두덩이와 의 경계를 분명히  한 점, 작고 합죽한  입매 등은 분명 신라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신라 보살상의 당당한 가슴에서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곡선미 와 달리 이  보살상은 어깨가 좁고 가파르며  몸매는 통통하고 둥글게 처리되어 있다. 그래서 같은 시기인  중국 오대의 조각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보살상이 강릉 신복사지와  오대산 월정사에 전래되고 있어, 강원도 일대의 특수한 지역양상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고려시대는 특히  석불의 경우, 지방마다  고유색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앞에서 언급한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의 석불도  지방유파로 규정하기 도 한다. 이처럼 고려석불이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 점은 통 일신라 전성기의 조각이 대체로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석불은 청동불이나 철불과 달리 특별한  기술이나 용광로와 같은 시설이 따로 필요치 않으며 비용도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훨씬 제작이 쉬웠을 것이다.
 각지에서 다양한 성격의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진 것은 불상을 조성하도록 시 주하고 발원한 사람들의 계층이 매우 다양해졌음을 말해 준다.
 
 이국적인 불상
 고려전기의 불교미술이  정치, 문화적  원심력으로 인해 지방색이  강하면서도 크고 소박한 불상을 양산한  반면, 중앙의 불교미술 흐름은 중, 후기로 넘어가면 서 세련된  고려청자에 못지 않은  우아하고 귀족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대표적이다. 14세기  작품으로 여겨 지는 이  보살상은 갸름한 얼굴과 가늘고  긴 팔다리, 여윈 듯이  보이는 몸통의 굴곡이 인상적이다. 두  팔을 휘감아 내린 천의나 영락 장식까지  착착 휘감기는 선적인 조형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고려 불교조각의 귀족적  미의식을 엿 보게 해준다. 비록 유물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으나, 개성을 중심으로 한 문화의 중심지에서는 이와 유사한 모습의 조각이 다양하게 제작되었을 것이다.
 중기 이후 불상의 특징을  보여 주는 조각 가운데 충주의 철불2구와 호림박물 관 소장의 금동대세지보살좌상이  있다. 충주 철불은 기하학적인  경향이 극도로 표현되어 추상성이 강조된 것으로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험상궂은 얼굴을 하 였다. 2구의 형상이 매우 유사하여 같은 조불소(불상제작소)에서 조성되었던듯하 다. 현재는 별다른 장식도 없고 금칠도 하지 않은 상태지만, 워낙 생김새가 험상 궂어 밀교 의식을 위한 불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금동대세지보살좌상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예가 많지 않은 세지보살상인데 다가 미적 특징 또한 티벳불상과 매우 유사하여 과연 우리 나라 작품인지 한 번 쯤 의심하게 하는  상이다. 확실하지 않으나 금강산에서  출토되었다는 꼬리표가 오래 전부터 붙어 있다. 이 때문에  몽고족의 금강산숭배와 조심스럽게 연관시키 기도 한다. 그들이  숭배한 금강산에 자기네가 만든 불상을 모셔  놓고 예배하였 을지도 모를 일이다. 온몸을 메운 과도한 영락과 목결이 장식, 다부진 몸매와 경 책(경전을 새긴 작은  두루마리나 그것을 담은 작은 상자)이  얹혀진 연꽃가지를 손에 든 정확한 도상의 표현에서  이국적인 라마미술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색 다른 조각이다. 얼굴  생김새와 인체비례까지도 전형적인 티벳불상과  상당히 닮 아 있다.  같은 계열의 조각이지만  이보다는 고려적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예가 국립전주박물관 소장의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호암미술관 소장의 금동관음보 살좌상이다. 이들 두 상으로 미루어 몽고 미술이  고려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 하지만 고려화도 동시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 가지 마음, 만 가지 불상
 이렇듯 수적으로 결코 적지 않고 다양한 면모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 려불상에 대한 세간의 인지도가  낮은 이유는 근본적으로 제작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상이 많지 않다는 데서  기인한다. 미술품의 제작 연대를  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미적  취향이나 감수성, 나아가 시대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 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고려불상에는 막연히  ‘고려’라고만 적혀 있는 경 우도 적지 않다. 어느  특정 시기를 못박아 말할 수 없는  까닭에 그저 ‘고려’ 라고 하느 것이다. 또한 불상의 외형적  아름다움이 통일신라기의 불상에 비하여 뒤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정신성이 약화되었다거나 예술성이 쇠퇴하였다는 평 가를 받기도 한다.  문헌이나 명문에 대해 좀더 정치한 고찰이  뒤따른다면 고려 불상의 역사는 좀더 체계화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성격 자체가 고려불상의 특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려 전 시기에 걸쳐 어느 하나의  잣대로 균일하게 평가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모 습의 불상들이 제작되었다.  고려 불상에 대해 통일신라 전성기 조각을  미적 가 치판단의 잣대로 삼아 측량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시대 에는 여러계층의 사람들이  갖가지 이유로 불상을 조성했다.  불교의 대중화만큼 불상 조성의 대중화가 이전보다 훨씬 폭넓고  뿌리깊게 이루어진 셈이다. 세련되 고 우아한 귀족적 미의식이  엿보이는 불상과 투박하고 조잡한 서민적인 불상으 로 대별되겠지만, 이 역시 단순한 이분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고려불상의 특 징을 굳이 꼽는다면,  대중들에 의한 거대한 불상과 일관된 특징을  추출해 내기 어려운 각양각색의 불상에서 나타나는 ‘대형화와 다양화’라고 할만하다. (성신 여대 강사)
 
 푸른 옥에 핀 꽃, 천하제일의 고려청자
 장남원
 우리는 세계에서 뛰어난  도자문화를 이룩한 민족이다. 특히  청자를 완성함으 로써, 도기에서 자기로  도자 제작 기술상의 진보를 이루었으며 중국과  함께 일 찍부터 세계도자사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고려청자는 공예품이면서도 고려  미술의 여러 특징을 잘  소화 흡수하였는데, 특히 형태에서 보여 주는  빼어난 선과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유색, 격조 있 는 문양 등 뛰어난 조형감각을 발휘함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받아 왔다.
 
 청자의 탄생
 청자란 점토로 기물을  만들고 700도씨 부터 800도씨  사이에서 구워낸 후 그 위에 다시 철분이 1에서 3퍼센트 가량 들어  있는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1,200도 씨 내외의 고온에서 구워 낸 자기를 말한다.
 청자 제작이 가능하려면 선결해야  할 기술적 요건이 있다. 우선 1,000도씨 이 상의 온도에서 경질도기를 구워 낼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더하여 높은 온도에서 녹는 잿물유약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굽는 온도가 1,000도씨를  넘으면 흙 속에 섞여 있던 규사질이  땔감으로 사용 한 나무재와 결합하면서 유약층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을 자연유 현상이라 한다.
 이것에 착안하여 인공적인  잿물을 만들고 이를 입혀  구워 낸 것이 회유도기이 다.
 우리보다 도자기술이 먼저 발달한  중국의 경우 재를 유약으로 사용한 회유도 기는 은나라 때부터  있었으며, 발전을 거듭하여 한나라와 육조시대를  거쳐 4세 기 이후에는  질 좋은 청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후 오대 송에  이르면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청자를  완성시키게 되어 월주요. 요주용. 남송관요.  용천요같은 가 마들이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청자가 만들어졌을까?
 삼국시대부터 1,000도씨 내외의  높은 온도로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좋은 경질 의 도기를  굽기 시작하였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녹유, 갈유등 유약 입힌 도기 생산이 가능해졌다.  유약은 도기 표면을 아름답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릇 자체의 내구성을 높여 주고 물기의 흡수도를  낮춘다. 그래서 위생적인 실용품으 로 많이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같은  배경 아래서 청자의 탄생은  이미 예고된 것이다.
 또한 삼국시대 이래 전래된 중국의 청자와 백자는 우리 민족이 자기를 적극적 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래서 9세기  이후 국내에서는 청자의 생산이 본 격화되며 곧이어 백자도 함께 제작도기 시작하였다.
 청자는 황해도와 경기도를 비롯하여  충청남도, 전라도로 이어지는 서남해안의 가마들을 중심으로 먼저 발달하는 지리적 특성을  보인다. 그리고 기술적인 진보 를 배경으로 장보고 등을 통한 중국과의  해상교류, 신라말 고려초 지방호족들의 세력 확장과 그에 따른  자기 수요 및 자본의 창출, 선총의  전래와 차문화의 보 급 등으로 생산지역이 더욱 확산되었다.
 당시 청자 가마터로는 황해남도의 봉천군 원산리를 비롯하여 경기도의 용인군 이동면 서리  장흥면 부곡리 원당면  원흥리 안양시 비산동,  충청남도의 성연면 오사리 보령군 천북면 사호리 등이 주목된다.
 이들 초기 청자 가마터에서는 대개 차를 마시는 다완이나 제기 의식용구 등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다구류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이거시은 고 려에 들어와 차가 승려나 문인의 벗으로, 왕실이나  불교 교단의 각종 행사에 필 수 품목으로 부상하여 차 마시는  습관이 성행하였고 이를 위한 청자가 다량 제 작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송사>고려전의 1015년 기록에 민가의 그릇은 모두가 구리라고 한 것 처럼 청자가 아직은  일부 용도로 만들어졌을 뿐  고려의 생활문화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것은 아니었다.

 천하제일’의 비색
 1123년(인종 1)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 고 려 사람들은 도기 가운데 푸른 빛을 띠는  것을 비색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 는 당시 중국인이 그들의 청자를  ‘ 비색’이라 불렀던 것과 달리 고려인은 자 신의 청자를 ‘  비색’이라 하여 중국의 그것과  구별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 다. 고려인들이 청자의 독특한 아름다움에 대하여  은연중에 긍지와 애착을 가지 고 있었던 것을 말해 주는 예로서 서긍도 이 점에 주목한 것이다.
 이러한 비색청자는 중국이니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어 칭송을 받았는데 송나 라 태평노인의  <수중금>에는, “ 건주의  차촉 지방의 비단,  정요백자, 절강의 차, 고려비색 모두 천하의 제일인데,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 하여, 천하의 명품들 가운데 고려청자를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백자의 경우  하북성 정요 제품을 제일로  여기면서도 청자에 관해서는 ‘ 고려비색’이 천하제일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중국을 능가하는  독특한 세련 미를 보인 고려청자의 완성도에  대한 감탄이며 고려비색이 주는 아름다움과 자 연스러움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일찍이 당나라 시인 육구몽은 그 유명한 절강성 월주요 청자의 신비로운 색을 “ 늦가을의 바람과 이슬 속에 가마가 열리면, 천  봉 우리의 푸른 빛을 다 빼앗 아 가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경험을 가진 중국인들이  송대에 이르러 이처럼 고려비색에 마음을 빼앗 긴 것을 보면,  절정에 달했던 12세기 전반기 청자의 준수함은  짐작되고도 남음 이 있다.
 특히 인종  때(1122에서 1146)에는 안정된 대외관계를  바탕으로, 비록 내치의 혼란은 있었으나 문풍이 진작되고 불교 및  예술이 발달하였으니, 청자의 조형도 이와 분위기를 함께  하였다. 인종의 능인 장릉에서는 제작 연대를  고려청자 최 고의 전성기인 12세기  전반(1146년 전후)으로 추정할 수 있는  청자화병이 옥책 과 함께 발견되었는데,  유색과 제작 기술이 완벽할 뿐만 아니라  균형과 조화가 돋보이며 장식과 형태의 절제가 두드러져 전성기 청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 다. 이 시기 청자를  생산하는 가마터는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  일대에 주로 분 포하는데, 특히 강진 가마터에서는 같은 유형의  파편들이 수집되고 있어 우리의 관심을 끈다.
 한편 청자 제작기술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의 강진과 부안 일대 가마터를 조사 해 보면, 생산 품목도 다완이나 제기는 물론  정병이나 향로 등 불교용품에서 기 와나 장식타일 같은 건축용재 및 화장용구,  문방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체로와 생 활의 각 부분에서 청자가 두루 애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고려사>  의종 11년(1157)의 기록에 의하면 왕궁 동쪽에  새로 마련 한 궁원에 세운  양이정은 청자로 만든 기와를 덮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강진의 가마터와 수도였던 개성 만월대  왕궁터 등에서 청자 기와편들이 발견되고 있어 청자라는 소재가 이미 건축용재에까지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기도 한다.
 아래의 시는 청자인형 연적에  대한 기특함과 소중함을 따뜻하게 읊은 이규보 (1168에서 1241)의 시로 문인들 사이에서도  청자용품이 사랑받았음을 보여 주는 예이다.
 
 작기도 하여라 푸른 옷 입은 동자
 고운 살결 옥과 같구나
 무릎 꿇어 앉은 모습 너무도 공손하고
 눈과 코의 윤곽 또렷하여라
 종일토록 지친 듯한 내색도 없이
 물병 들어 벼룻물 부어 준다네
 너의 고마움 무엇으로 갚을손가
 깨어지지 않게 소중히 간직하리
 그렇지만 이 시기  청자 가마터를 조사해 보면 사발  접시 잔 병 항아리 등과 같은 일상의  음식용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청자가  생활 전반에서 광범하게 사용하게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흙의 자유로움, 그 다양한 시도
 한편 청자 생산이 시작되는  9-10세기 이후부터 강진이 요업 중심지로 부각되 는 11세기까지 청자 발전기에는 청자의  질과 형태 및 문양이 안정되고 발생 초 기에 강하게 나타나던 중국적  요소가 약화되며 12세기 경에는 고려만의 특징을 지니게 된다.  즉 이미 생활용기로서  자리잡은 청자는 오래  전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어오던 도기류나 금속기의  형태적 기능적 장점들을 적극적으로 응용하면 서 도자기만의 새로운 조형을 이루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품종 대량생산체제 아래서 청자를 만들면서 좀더 효율적인 제작방법 을 모색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 과정에서 청자는 형태와  제작방법에서 도기 나 금속기와는 다른 독자성을 갖는다. 즉 흙의  특성과 제작의 목적에 따라 도기 와는 다른 다양한 제작방법이 시도되는데, 물레성형을  기본으로 하면서 틀을 사 용하여 형태를 만들거나, 부분적으로  문양을 눌러 찍거나, 또는 서로 형태가 다 른 부분들을 별도로 만들어 접합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청자는 표면장식에 따라 순청자, 음각청자, 철화청자, 진사청자, 화금청자, 철재 청자 등으로 나눈다. 그  가운데 순청자는 무늬장식이 없는 순수한 청자이며, 음 각청자는 순청자 위에  음각기법으로 꽃이나 기타 식물  또는 장식 문양을 넣은 경우를 말한다. 양각청자는  무늬를 돋을새김하여 도드라지게 하는  것이고 철화 청자는 유약을 입히기 전에 붓에  철분 안료를 묻혀 회화적 방법으로 무늬를 그 린 것이다.
 그 밖에 그릇의  벽면을 뚫어 장식하는 투각,  백토를 바르는 퇴화, 다른 색의 흙을 섞어 만든 연리문청자와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상형청자 등이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 흙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방법들이 시도되고 다시 반복되며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푸른 옥에 핀 꽃, 상감청자
 고려 비색이 정점에 달했던 12세기를 전후하여 고려인들은 상감이라는 공예기 법을 과감히 도자에  적용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상감은 바탕이 되는  재료의 성 격이 서로 다르거나 또는 바탕과  색이 다른 물질을 집어 넣는 보편적 공예기법 으로 동서양에서 모두  오래 전부터 해오던 것이다.  고려의 금속공예에서도‘입 사’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상감청자는 강진과 부안  일대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청자의  몸체에 무늬 부분을 선 또는 면으로  파낸 후, 문양 부위나 또는 바탕에  백토나 자토를 넣어 메우고 다듬고 유약을 입혀 구운 것이다. 그  결과 문양은 백색 또는 검은색으로 나타나게 되고 청자의 푸른 바탕위에서 강한 색채의 대비를 이루었다.
 상감기법의 발달로 청자는 지금까지의 단색을 주조로 하는 정적인 고요함에서 다채롭고 장식적인  새로운 멋을 품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고려의 장식미술, 특히 청자 조형감각의 새로운 변화를 맛보게 된다.
 
 푸른 자기 술잔을 구워 내어
 열 가운데 하나를 고르니
 빛나도다, 푸른 옥의 광채여
 몇 번이나 푸른 연기에 파묻혔던고 ...
 이제야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
 하늘의 조화 빌어온 것을
 작은 점 꽃무늬
 오묘하기가 그림 그린 듯하네
 이규보의 시는 고운 비색 바탕에  그림으로 그린 듯 섬세한 꽃무늬를 넣은 상 감청자 술잔에 대해 노래한  것으로 상감청자의 다채롭고 명랑한 경지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12세기  후반을 지나면서 상감문양은 지나치게  의장화되며 청자의 본 바탕을 가리게 될 만큼 문양의 비율이 많아졌고 내용 또한 복잡해진다.

 청자의 조락, 그리고 움트는 새싹
 몽고침입 이후  13-14세기를 지나면서 약간의  고급품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청자의 질은  퇴보한다. 이제 이전과 같은  투명한 비색의 좋은 질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쟁을 치른 이후 국력이  소모되면서 전 과 같은 청자제작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제작상의 통제와  집중력이 약화되면 서 청자의 문양은  긴장감을 잃게 되고 형태의 유려함과 제작의  공교함, 뛰어난 유약, 번조기술 등이 해이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자는 더 이상 한정된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대중 일반을 위해 대량 생산된다. 그리고 특정  지역이 아닌 전국의 가마에서 같 은 유형이 만들어지면서 새로운 면모로 탈바꿈한다.
 바야흐로 조선의 건국과 함께 상감의 아들이 분청자라는 청자 2세대를 펼치면 서 생명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후 이루어 낸 경질백자 역시  오랜 시간 동 안 축적된 고려청자 제작기술, 즉 도토의 정제와  장석유의 사용 및 고화도 환원 번조 등을 모태로 하여 가능케  된 것임을 생각할 때 고려청자의 도자사적 위치 와 그 중요성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김부식과 정지상: 설화와 진실 최연식(서울대 강사)
 최고 시인의 명예를 둘러싼 갈등?
 고려 중기의 문인 김황원은 대동강가의 연광정에 올라 먼 산과 들판의 아름다 운 경치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상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긴 성 한쪽에는 넘실거리는 물이요,
 큰 들판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이어가려 하니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날 이 지도록 정자에서 고심하다가 끝내는 눈물을 흘리며 내려오고 말았다.
 이처럼 문인들은 한  구절의 훌륭한 문장을 짓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쉽사리 자신과 다른 사람이 공감하는 명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 니다. 그래서 종종 문인들 사이에는 모방과 표절의 시비가 있게 되고, 특정 문인 의 문장을 둘러싼 시기와 질투에 관한 소문도  생겨나곤 한다. 그 중에서도 고려 중기의 시인 정지상에 대한 김부식의 시기와 질투는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일 것이다.
 <고려사> 묘청천에는 정지상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김부식이 평소에 정지상 과 문장을 경쟁하다가 불만이 있어 묘청의 난에 연루된 것을 구실로 살해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 불만의 구체적인 내용이  고려 후기에 편집된 <백운소설> 에는 다음과 같 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김부식과 정지상은 문장으로 함께  이름을 날렸는데 두 사람은 서로 갈등하여 잘 지내지
 못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정지상이 “사찰에 범어가 그치자, 하늘빛은 유리처 럼 맑다.”라는 시구를  짓자 김부식이 이를 탐내어 자기의 시로  만들고자 하였 다. (그러나 정지상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정지상은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하여 음귀가 되었다.  김부식이 어느 날 “버드나무 천 가지가  푸르고 복숭아 꽃 만 송이가  붉다”라고 봄을 노래하자,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의  귀신이 나 타나 그의 뺨을 때리며 “누가 천 가지, 만 송이를 세었느냐. ‘버드나무 가지마 다 푸르고 복숭아 꽃마다 붉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고 나무랐다. 뒤에 (김부 식이)어느 절에 가서 변소에 들어갔는데 정지상의 귀신이 (김부식의)음낭을 쥐고 서 “술도 마시지  않고서 왜 얼굴이 벌건가”하고  묻자 김부식은 “강 저쪽의 단풍이 얼굴에 붉게 비쳤다”고 대답하였다. 정지상의  귀신이 더욱 세게 쥐면서 “이 가죽이 무엇이냐”라고  하자 “네 아비의 불알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이 더욱 힘을 주어 김부식은 끝내 변소에서 죽었다.
 여기에는 은연중 별다른 문장  능력이 없던 김부식이 재기발랄한 정지상을 질 시하고 끝내는 정치적 이유를 내세워 해치고 마는 비겁한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천재소년 모짜르트를 질시하여  그의 성공을 막고 끝내는 비참하게 숨져가 게 한 살리에르의 모습(영화 아마데우스 중에서)을 연상시키기에 족하다. 고등학 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비 갠 언덕 위 풀빛 푸른데/  남 포로 님 보내는 구슬픈 노래//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 눈물 보 태는 것을// (님을  보내며)’이라는 시를 10대에 지었다고  하는 천재시인 정지 상, 규범적인 유교사상을  앞세워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를  위축시킨 사대주의적 역사책인 <삼국사기>를 편찬한 모짜르트와 실리에르의 모습이라고 하기에 부족 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12세기초 중국사신의 견문록인 <고려도경>에 김부식이 최초의 학자요 문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이 문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단순 히 문장에 대한  질투 때문에 무고한 천재시인을  시기하고 죽여야 했던 정도의 인물이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인정되고 있었다면 당시 고려의 지식인들의 수 준은 어느 정도였다는  말인가. 이 문제는 고려 중기의 사상계를  제대로 이해하 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상을 담을 것인가, 감수성을 담을 것인가
 국어 교과서에는 실리지 못했지만 김부식도 많은  시를 지었고 상당 수가 <동 문선>에 실려 있다. 그 중 한 편을 적어 보자.

 요 임금 뜰은 석자 높이였지만 천추에 덕을 남겼고
 진시황의 성은 만리나 되었지만, 2대만에 나라를 잃었네.
 옛날의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 될 만한데
 수나라 양제는 아무 생각 없이 토목공사로 백성의 힘 말렸구나.  (비단궁전에 대하여)
 수 양제의 사치를 비판하는 내용의 이 시는 교훈적이고 계몽적이긴 하지만 정 지상의 시처럼 심금을 울리는 멋있는 시라고하기는  힘들다. 남포로 임을 보내는 애절한 감정 대신 ‘정치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당위의 명제만이 있 을 뿐이다. 이로  보면 김부식은 정말로 문학적 감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학자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들이 나타나 게 된 문화.사상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 성급하게  내린 결론은 역사의 본 모 습을 흐리게 할 뿐이다.
 문종 때(1046-1083) 이후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매 우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문화교류의  결과 고려 사회에는 새로운 흐 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지식인들의 학문과  문장에서 그러한 변화가 두드러 졌다. 고려 전기에는  통일신라의 경향을 계승하여 당나라의 시가 유행하였는데, 특히 비애적인 정서를 노래하는 만당풍이 아름다운 시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종 때 이후에는 송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시풍이 등장하였 다. 송나라를 주도해  간 사대부들은 황제와 귀족들의 비서에 가깝던  남북조 시 대 이래의 문인형 지식인들과는 달리 사회를 올바르게 운영해 가야 할 책임의식 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지식인들이었다. 따라서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도 개인 적 정서를 노래하기보다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자 하였다. 이 러한 시풍의 영향을 받은 고려  중기의 시는 지식인 관료들의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정지상과 김부식의 시는 각기  이러한 만당풍과 송나라풍의 시를 대표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송나라 풍의 시는 사상을 담고자  하다 보니 자연히 음악성과 감수성에는 비교적 관심을 덜 쓰게  되었고, 당연히 시적 아름다움에서 는 만당풍에 견주기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는 당나라의  것이 제일로 꼽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지만, 송나라의  시는 그다지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새로운  지식인들의 등장은 역사적 의미가 적지 않은  것으로, 이는 동아시아 사회의  발전 특히 정치. 사상 분야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개인적 감수성과 공존해야  하는 사회적 감수성을 내 세운 이들의 문학관은  ‘문학은 도, 즉 사상을 담아서 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해 야 한다’는 ‘문이재도론’으로 불리는데 이러한 입장은 잊혀졌던 문학의 사회 성을 재발견함으로써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추구하게 하였 다.
 따라서 송나라 풍의  시가 고려 사회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시풍이 기반하고 있는 문학관의  수용을 뜻한다. 이는 또한 개인적 감수성에  기초한 아 름다움이 아니라  정치의 주체인 지식인으로서 사회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일반 민중들을 올바른 길로 교화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지닌 문인들의 등장을 의미한 다. 실제로 현재  남아 있는 자료를 보면 김부식과 가까웠던  사람들에게서 이러 한 풍의 시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물론  김부식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거센 비가 바닷바람 따라 휘몰아치니
 뇌성 수레 구름 사닥다리 어찌 그리 웅장한고.
 개천 바닥은 물이 넘쳐 수레도 말도 못 다니고
 마을은 폐허인 듯 우물과 부엌이 다 비었네. ...
 만 백성들 모두 농사의 희망을 잃었으니
 태평한 세상 올 섭리의 공 어서 베풀어 주소서. (김돈시, ‘거센비’)

 옛 놀던 곳에 다시 찾아오니
 바람과 달은 지난 봄과 같은데
 다만 완산 아래에
 배부른 이 없음을 탄식하네. (허홍재, ‘완산 가는 길에’)
 김돈시는 김부식의 아들이며,  허홍재는 김부식이 주관하는 과거에  합격한 후 문하생으로서 김부식과  가깝게 지냈고 <삼국사기>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들 의 시에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이 시기의 시에서는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12세기에는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문학관이 고려 사회에 주요한 흐 름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에  큰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김부식이 었다. 그런데 새로운  경향의 지식인들의 출현은 자연히 기존의 수식  위주의 문 인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최충의 손자인 최약은 문구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 은 나무에 조각을 하는 기술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면서 그러한 문학은 진정한 문 학이 아니라고 하였다가 기존의  문인들로부터 문장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하는 질투일 뿐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한편 위의 허홍재의 시에 대하여도  일부 문인 들은 시의 기품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인 진짜 속사정
 당시의 문화적 경향과 김부식의 위치를 생각할 때 <백운소설>에 나오는 것처 럼 김부식이 정지상의  시구를 빌리려고 했다거나, 그것을 거절당한 데  대한 분 노 때문에 정지상을 죽였다는 일 같은것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기 존의 경향을 비판하고 새로운 문학풍조를 만들어 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비판 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시풍에 미련을 가지고 시구를 빌리려 했다는 것은 생 각하기 힘들다. 설혹 그렇게 빌려서 시를 지었다고  해도 누가 그 시를 김부식의 시로 받아들이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상반되는 문학관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일 정한 갈등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문학관의 차이는  기보적으로 정 치적 입장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단순히 ‘문학적’차이만은  아니었다.
 현대 문학계의 참여, 순수논쟁에서도  그 배경이 되는 정치, 사회적 지향의 차이 를 모르로서는 그러한 논쟁의 실제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 가지이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인 직접적  이유는 정지상이 묘청의 난에 연루되었기 때 문이었다. 당시 묘청 일파는  땅의 기운이 왕성한 서경(평양)에 천도하면 36국에 서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서경천도 이후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축 하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정지상과 점술가인 백수한 같은 서경출신들이 적극적 으로 참여하고 있었따.  이러한 주장은 외척의 발호로 권위가 실추되어  있던 국 왕으로부터도 호응을  받았으며, 북쪽에서  새롭게 등장한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민족주의적 주장으로 일시 여론의 지지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적 근거가 풍수설이나 도참과 같은 비합리적인 사상체계를 이용하였던 점에서 적지 않은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송나라의  사대부적 정치이념을 받아들이고 있 던 김부식과 같은 유교관료들이 반대하였던 것은 당연하다.
 유교관료들은 묘청의 행태를 북송  말기에 황제의 신임을 얻어 정치에 관여하 다 나라를 망친 승려 임영소에 견주면서,국가기강의  확립과 사회의 안정은 도참 이나 풍수지리적 방법이 아니라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는 유교정치 이념의 실천 에 달려 있다고 주장 하였다. 이들은 서경  건설을 위한 대규모 공사자금 조달과 백성들의 부역 동원이 바로 사회안정을 해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 점은 국가의 부강과 왕실의 권위 강화를 명붐으로 내세워 백성들의 어려움을 고 려하지 않은 묘청일파보다 정치적으로 진전된 입자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국왕이  묘청을 적극적으로  신뢰하였으므로 유교관료들이 열세였지 만,묘청의 장담과 달리 서경 궁궐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민심이 동요 하면서 점차 국왕의 지지도 약해졌고 유교관료들의  비판도 강해졌다. 이러한 상 황에서 조급해진  묘청은 결국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는데,중앙에서는 진압 책임자로 묘청  반대에 앞장 섰던 김부식을 임명하였다. 그는  반란군의 배 후세력을 일소한다는 구실로 당시  개경에 있던 정지상과 백수한 등을 즉결처분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물론 총애를 받던 정지상 등이 국왕을  설득하여 정책을 다시 되돌리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에서 나온 것으로 전략상 불가피한 것이 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국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처형을  단행한 것은 이후 정지상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이 되고 김부식 자신은 질투의 화신으로 전해 지는 배경이 되었다.
 
 정지상의 복권과 천재시인 살해설 출현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김부식은 고려의 저치를  주도해 나갔다. 따라서 이 기 간에는 김부식의 문학관이 보다  우세해졌고 개인적 감수성을 중요시 하는 문학 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특히 정지상은 역적의 일원으로  구정되었기 때문에 이후 상당기간 문학적으로 제대로 인정받기 힘들었다.  그러나 무인정변 이후 사 회분위기가 바뀌고,그에 따라  문인들의 위치와 문학관이 변하면서  상황은 다시 일변하였다. 잘 알려진 대로 무인 집권기에  문신들은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단지 문장 솜씨를 무인 집권자들에게 인정받아 그들의 식객으로 연명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규보 같은 사람도 과거에 합격한 후에  관직을 얻지 못 하자 연일 최충헌에게 시를 지어  바치며 탄원한 후에야 겨우 작은 벼슬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무인  집권자에게 등용돤 문인들은 자연히 그들의 식객과 같은 존재로서 무인들의 잔치자리에  나가 집권자를 칭송하는 시를 짓거나 그들 에게 부족한 문학적 소양을 보필하는 역할을  수행하여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념을 담은 글을 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오히려 세련된 표현과 민첩한 글솜씨가 요구될 뿐이었다. 앞에서부터 읽거나 뒤에서부터  읽거나 모두 시가 되 는 회문체나 짧은  시간을 정해 놓고 먼저 시  짓는 것을 경쟁하는 주필 풍조가 유행한 것 등은  이 시기의 문학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정지 상과 같은 인물이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정지상의 복권은 조심스러운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무인집권기  초에 이인 로가 고려
 문인들의 이야기를 모은 <파한집>에는 정지상의 시가 두어 편 소개되고 있는데 이인로는 정지상이라는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단지 ‘시인’이라고만 언급하였 다. 아직도 쉽게  그의 이름을 드러내기에는 석연치 않은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 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조금  늦게 나온 최자의 <보한집>에는 분명하게 ‘정지상’이 라는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의 시가 대단히  아름답고 뛰어나다고 칭송하였다. 송 나라 풍의 시가 퇴조하고 다시 개인적 정서가 강조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일반 문인들 사이에 정지상에  대한 인기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애 상적 시풍은 그의  비극적 죽음과 연결되면서, 불우한 처지에 있던  많은 문인들 에게 정서적 공감을 일으켰고 이는 자연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마음으로 연결 되었을 것이다.
 반면 김부식의 시가 말하고자  했던 문인의 사회적 책임감과 정치참여에 대한 자신감은 지도력을 상실한  당시의 문인들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의 시는  단지 따분하고 재주없는  사람의 글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정지사의  죽음은 점차 억울한 죽음으로  인식되었고,그 이유 도 정치적인 것에서 문학적인 것으로 대체되면서 그를 죽인 김부식이 자신의 문 학적 부족함을 감추기 위하여 천재시인을 죽였다는 전설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어떻게 다른가 강성원(한국외국어대 강사)
 김부식(1075-1151)이 활동했던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사회의 내부갈등이  심화 되어 간  시기였다. 농민이 유망하고  지배층이 분열하는 가운데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과 같은  정치적 격동이 이어졌다. 또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면서 종 전과는 다른  국제관계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는 <삼국사 기>를 편찬했다. 구 후 무인정변이 일어나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동안 사회 모순이 더욱 격화되고 농민. 천민의 항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이어 몽고족의 침략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항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 일연(1206-1289)이 <삼국유사>를 찬술하였다.
 김부식과 일연,  두 사람의 성장배경이나  직업, 종교 등이  다르듯이 <삼국사 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체제와  내용, 역사관이 서로 다르다.  두 책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에 관한 일들을  기록하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차이 가 난다. 그렇지만 두 책은 서로 보완적이며, 어느 것이나 우리 고대사를 공부하 는데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교적 합리주의 역사관
 김부식의 본관은  경주이며, 21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 때부터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시작하여,  다섯 형제 가운데 승려가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다.  김부식은 유교의 예법을 충실하 게 실천하는 것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으며,  뛰어난 문학소양과 유학지식을 바탕 으로 출세하였다.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인종이 즉위한 다음  이자겸이 정권 을 장악하자 그에 붙은 사람들은 이자겸이 임금의 외조이고 장인이라고 하여 신 하의 예로  대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또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이자겸은 신 이라고 쓰지 말고,  신하들이 모인 연회석상에서도 백관들과 함께 설  것이 아니 라 임금과 함께 앉게  하자고 하였다. 그 때 대 부분의  신하들은 이자겸의 권세 를 두려워하여 그 의견에 따랐으나, 김부식은 중국에서도  이 같은 예를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또한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부르자고 하였 을 때, 김부식은 당나라 현종때부터 황제의  생일을 천추절이라고 불렀는데 신하 의 생일을 절로 부를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처럼 김부식은 아무리 실권 을 가진 사람의 의견이나 그  사람을  위한 일이라도 예의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반대하였다.
 이자겸세력이 제거된 다음 곧이어 묘청세력이 임금에게 황제를 칭하고 금나라 를 정벌하자고 주장하면서 서경천도운동을 벌였을때, 김부식은 반대하였다. 그리 고 묘청세력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군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뒤 수상까지  승진하여 정계를 주도하였다. 이 무렵인  1145년(인종23)에 <삼 국사기>편찬을 주도하였다.
 흔히 <삼국사기>를 김부식 혼자 쓴 것처럼 생각하지만, <삼국사기>는 왕명에 의해 관에서 편찬한 역사책으로서 김부식이 책임자로서  감수를 했을 뿐이다. 물 론 편찬  책임자인 김부식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실제 자료수집, 분석,  서술에는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과거 에 금제하여 문장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여 편찬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임금이었던 인종과 김부식세력은  계속되는 사회변동과 정치변란에 대응하여 지 배질서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사회가 어지러우면 흔 히 역사 바로 세우기를 강조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관료와 지식층 이 우리 나라 역사보다 중국  역사에 더 달통한 것을 개탄하고 중국 역사책만으 로 교훈을  삼기엔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전에 만들어진 역사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만으로는 정치를 밝혀  권장하고 훈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역사책을 편찬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책은 당연히  유교적 역사관에 입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는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인정을, 신하에게는 충절을, 자식에게는 효행을 강조하여 수술하였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어떤 부분에 유교적 역사관과 합리주의가 반영되었다 고 볼 수 있을까.
 <삼국사기>는 역사책의 편찬 방법 중에 본기, 지, 표, 열전으로 분류하여 편찬 하는 기전체로 만들었다. <본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정치, 전쟁, 외교 에 관한 것을 주로 기록하였다. 정치는 유교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아 그 실 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왕을 하늘의 명령을  대리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왕을 거역하는 일은 철저히  응징하는 논조를 폈다. 이는 논어에 ‘왕은  바람이요 민 은 풀이라 바람이 불면  풀은 눕게 마련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사회기강을 확립하려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자연변이에 대한 기록을  정치적 사건과 관련시켜 서술하였는데, 정치가 순조롭지 않을 경우  혜성의 출현, 일식, 월식 등 자연질서에 이변이 생긴다고 보았다.
 <열전>에는 충효와 정절을 강조하여 그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기록하였다. 예 컨대 승려였지만 백제가 침공하여  신라가 위기에 봉착하자 승복을 벗고 전쟁에 뛰어들어 온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꽂혀 죽은 취도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형제들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미모에 반한  임금의 수청을 거부하고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남편과 운명을 같이한 도미 부인의 기 록에서 여자의  정절을 강조하였다. 자신의  몸을 부잣집의 노비로  팔아 부모를 잘 봉양한 효녀  지은을 서술하여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모습을  기록하였다. 그 밖에 열전에 기록한 많은 인물들의 사례를 통하여 유교의 기본 사상인 삼강오륜 의 실천을 중시하고 그에 바탕을 둔 사회질서가 확립될 수 있기를 바랐다.
 
 <삼국사기>, ‘술이부작’의 원칙 아래 서술
 한편 <삼국사기>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것에 대해서는  가능한 서술을 피하고  있어 합리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리고 삼국을 모두 ‘우리’라고 기록하여 우리 나라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려는 국가의식을 강조하였다. 물론  이 책은 중세국가의 공식적인  역사서로 편찬되었 기 때문에 지배층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백성들의 삶의 모습은 별로 다루지 않았 다. 그러나 이  책은 ‘서술은 하되 편찬자가 창작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 하여 객관적으로  편찬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역사책이다.
 그런데<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우리의 고대사를 정 리했기 때문에  나타난 한계도 있다.  신화를 비판하고 증거주의를  내건 나머지 단군조선과 삼한의  역사를 누락하였으며, 전통문화를  축소시켰다. 일찍이 일제 침략에 대항하여  고유의 전통을 살려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고 애썼던 신채호 같은 역사가는 이 책을 사대주의에 입각하여  편찬한 역사책이라고 혹평 하였다.
 그는 이 책이  우리의 고유사상에 바탕을 둔  화랑도의 인물들을 기록하지 않은 대신 당나라 문화에 동화한 최치원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당나라에 대항하여 혈 전을 벌인 복신은  열전에 기록하지 않고 오히려  투항한 흑치상지를 기록한 것 등을 지적하였다. 실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 들이 당시 사회변동 속에서 유교이념으로 지배질서를 재정립하고 대외적으로 온 건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결과 그러한 한계를 보인 것이다.
 
 <삼국유사>, 자주의식과 신이사관
 일연은 속성이 김씨이며, 현재의 경북 경산지역의 향리집안에서 태어났다. 9세 에 출가한 다음  승과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후 불법을 닦는  과정에서 몽고병이 침략해 왔을 때는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피난처를 알려주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40대에 최우의 인척이었던 정안의 초정을 받고 남해분사대장도감에서 대장 경 조판사업에 참여하면서 정계와 관련을 맺었다.  최씨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원 종과 충렬왕의 존숭을  받았다. 77세 되던 해에는 충렬왕이 그를  국존으로 책봉 하였으며, 임금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절하는 의례를  행할 정도로 일연을 후대 하였다. 만년에 경북  군위군의 인각사에서 선문을 총망라하여  구산문도회를 두 번 개최하는 등 불교 교단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전국  각지의 절에서 승려생활을 하면서 일반민의 생활모습과 그들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데 상당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몽고와 장기간에 걸쳐 전쟁을 하 고 끝내  그들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일반민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피해와 고통의 질곡에서 구원과 희망을 갖기 위해 신앙생활에 의지하는 것은 충 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때 일연은 이러한  욕구에 부응하여 실천적인 불교를 표 방하고 민족적 위기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 가 1281년 무렵에 완성한 <삼국유사>의 편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이  편찬한 역사책이기 때문에 체제와 양식이 자유롭 다고 평가받아  왔다. 그러면 정말 이  책은 일연 혼자 편찬한  것일까. <삼국사 기>가 김부식 한 사람만의  작품이 아니듯이, 이 책도 일연 혼자만의 작품이 아 니고 자료수집,  필사, 판각등을 제자들과 함께  곧동 작업한 결과였다. <삼국유 사>의 편찬에 앞서 선행작업으로 여러  해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역대연표>를 간행하였는데, 그런 과정에서 일연의 제자들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유교적 합리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편찬된  것이 <삼국사기>라면,  <삼국유 사>는 기이하고 신비한 일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신이사관으로 편찬되었다.
 때문에 당대의 고승 일연이 이 책에서  불교사상, 불교설화, 고승들의 일화, 일반 민들의 불교 신앙사례,  구도와 득도의 과정 등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은 당연하 다. 일반민은 합리적인 유교사상보다는 무속 신앙을 믿었고, 불교 역시 미신적인 기복신앙의 형태로 믿었다. 또 산수와 지형의  모습이 인간생활의 길흉화복에 영 향을 미친다는 풍수지리 사상도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삼국사기>가 유교이념에 입각한  사회질서 정치질서의  재정립에 목적을 두고  편찬되었다면, <삼국유사>는 당시 현실 속에서 광범위한 대중에게 구원과 희망을 갖게하기 위 하여 신이사관으로 서술되었다.
 또한 <삼국유사>를 쓸 당시는 이민족인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오랜 항전을 치루고 나서 그들의 간섭을  받으면서 민족적 자주의식 내지 위기의식이 높아져 있었다. 일연뿐만 아니라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도 역사를 서술하면서 민족적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대배경과 편찬목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 비교를 하여<삼국 유사>가 <삼국사기>보다 복고적이거나 진보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삼국유사>, 민중에 대한 애정으로 당대 생활문화 생생히
 <삼국유사>는 편찬체재에 구애받지 않고 수집된 자료에 의거하여, 왕력, 기이, 흥법,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으로 목차를 분류하였다.
 <왕력>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 다. <기이>는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하였다. 여기 에서 현존하는 역사책  중 단군신화를 최초로 기록하여, 우리 역사를   고조선까 지 소급하여 서술하였다.
 그리고 각 나라  시조임금들의 신화를 채록하여, 그들은 보통 사람과  달리 신비 하게 태어나고  초월적인 능력을 소유하여  통치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 밖에 여러 곳에서 삼국시대에 일어난 신비한 일들을 기록하면서 신의 도움을 받아 정 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흥법>에는 삼국의 불교 수용과 융성에 관한 항목들을 설정하여 삼국에서 불 교를 개척하고 기초를  닦을 때의 신기한 일들을  기록하였다. <탑상>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들을 서술하면서 구도와 성불과정에서 일어난 신비스런 사건들 을 수록하고  있다. 예컨대 황룡사 9층탑을  세운 후에 천지가  비로소 태평하고 삼한을 통일하였다 하여 이 탑의 영험을  치하하였으며, 신라가 불국토임을 입증 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수록하였다.
 <의해>에서는 고승들의 저술과 포교 활동 등을 기록하였다. <신주>에는 신라 의 밀교적 신이승들이 초월적인  힘으로 악과 미신을 퇴치하는 모습을 묘사하였 다. <감통>에는 여러  가지 신비한 신앙 체험들을  기록하였다. 예를 들면 몸종 욱면이 용맹정진하는 도중에 법당 천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 극락으로 간 사례 나, 짚신 만드는 광덕과  농사 짓는 엄장이 극락 왕생한 경우  등 하층민들의 성 불한 신앙 체험을 기록하였다.
 <피은>에는 속세에서 초탈한 인물의 행적을  실었다. 그 안에는 공직자로서의 생활을 마다하고 구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다른 나 라로 간 사람들도 있었다. <효선>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 한 미담들을 수록하였다. 대부분 몹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 는 일반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예를 들면 흉년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자 기 다리 살을 베어 부모에게  봉양한 향득의 이야기나 늙은 어머니의 음식을 빼 앗아 먹는 아들을 민망하게 여겨 어머니 봉양을 위해 아들을 생매장하려고 땅을 파다 돌종을 얻은 손순의 설화 등이 그것이다.
 <삼국유사>는 다른 어떤  역사책보다도 일반민에 대한 의식이 두드러져 보인 다. 불교신앙을 고취시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했지만, 그들에 대한 연민 과 애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전편에 걸쳐 그들의 생활상과 의식, 신앙  등의 사례와 향기들을 있는 그 대로 기록하여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는 상호 보완적인 역사책
 <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낮추어 평가하는 사람은, 전자를 사대주의 역사관 에 입각하여 편의대로  사료를 없애버렸다고 혹평한다. 그리고  후자에 대해서는 황당 무계하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기록하여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악평을 하 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객관적인 원칙 아래 철저하게 문헌기록에 의거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은 삼국의 정치나 제도 등을  아는 데에 가장 기본이 된다. 비록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사료를 선택하였지만, 사실 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려는 자세를 견지하여 신라의 고유한 왕명  표기나, 전쟁 에서 패배한 사실들도 그대로 기록하였다. 우리  나라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인정 하려는 국가의식도 보여 준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을 포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삼국의 불교 를 전반적으로 모두  다룬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신화전설과 향가  등의 원형을 보존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으며,일반민의 생활상과 불교신앙을 복원하는  데 가 장 기본이 되는 사료들을 제공한다.
 <삼국사기>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만 서술하였음에  비하여, <삼국유 사>는 고조선부터 삼한, 부여까지 기록하고, 아래로는 고려시대까지 기록하였다.
 특히<삼국유사>는 <가락국기>를 통하여  삼국만이 아니라 가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두 역사책이 각기 장단점이 있지만  우리는 두 책을 서로 보완적 으로 이용한다면 고대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
 
 풍수지리는 과연 미신인가 류주희(중앙대 박사과정)
 삶의 터전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명당에 대한  관심은 도에 지나칠 정도로 끊일 줄 모 른다. 요즈음에도  자손의 발복을 위하여  이른바 명당이란 묏자리를  잡아 놓고 수천 평의 땅을 흡사  왕릉처럼 꾸며놓은 묘들을 볼 수 있다.  과연 좋은 자리에 묘를 쓰고, 집을 지어야만 자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까? 명당이란 도대 체 어떤 것이기에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자손 대대로  명당 잡기에 혈안이 되어 지관을 상전 모시듯 하는 걸까?
 풍수지리란 산과 물의 형세를 살펴, 도읍지,  주택, 묘지 등을 선정하는 일종의 지리학이다. 도읍지나 주택  같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곳을  양기 또는 양택이라 하는  반면 죽은 사람이  묻히는 묘지를 음택이라  한다. 고려시대에는 음택풍수보다는 양기 또는 양택풍수를 더욱 중요시하였다. 서긍이 지은 <고려도 경>에 보면,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한 계책을 세 울 수 있는  곳이라야 자리잡는다”고 하였다. 풍수지리설이  도읍지를 선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 주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선정한 곳의 쇠퇴하고 왕성함과  순하고 거스름에 따라 국가나 인간의 길흉화복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땅에는 만물을 탄생시키 는 힘이 있는데 그 힘이  왕성하기도 하고 쇠약하기도 하여 땅의 기운이 왕성할 때에는 그 곳에  자리잡은 국가나 개인이 흥하고, 반대로 쇠약할  때에는 멸망한 다는 것이다. 이것이 땅의 활력 여부에 따라  국가나 개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 을 끼친다는 ‘지기쇠왕설’이다.  한편으로 땅의 기운은 고정불변하지  않고 항 상 변하기 때문에 애초에 땅의 기운이 왕성한 곳을 선정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 땅의 기운이 쇠약해지면 국가나 개인도 그에  따라 멸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려 중기 이후에 개경은 땅의 기운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도성을 옮겨 야 한다거나, 국왕이 일정 기간 동안 땅의  기운이 왕성한 곳으로 가서 머물러야 한다는 등의  주장도 나왔다. 이러한  주장은 국정 운영을  쇄신하려는 방편으로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일부 계층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 으로 제기 되었다.
 풍수가들이 주장하는 명당은 산세가 바람을 막아 주고 수세가 열기를 식혀 주 는 곳으로  곧 배산임수의 땅이다. 그들은  그와 같은 명당이 아니면  절이나 탑 등을 세워 재앙을  막아야 한다는 ‘비보사탑설’을 내세운다.  이러한 비보사탑 설은 지리적 조건의  부족함을 인위적으로 고칠 수  있다는 관념에 기초하고 있 다.
 풍수지리설은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도참설과 연결되어 고려시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도참은  미래의 길흉화복이나 성쇠 혹은 득실 등의  징조를 추즉 하거나 예언하는 일종의  복술을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많은  도참설들이 유행하 였는데, 대체로 풍수지리설과 관련하여 왕조의 장래를 예언하고 있다. 고려의 역 대 왕들은 이러한  도참설에 입각하여 3경(개경, 서경, 남경 혹은  동경)이나 3소 를 설치 경영하기도  하였다. 3소는 국도의 진산이며 수호산인  송악을 중심으로 한 주위의 세 진산을 말한다. 곧 백악산(경기도 장단의 백악산)의 좌소와 백마산 (경기도 개풍군  소재)의 우소, 기달산(황해도 신계군  소재)의 북소이다. 이곳에 궁궐을 조성하고 순주하여 국업을 연장시켜 보려고 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풍수지리가들은  서운관이라는 관청에 소속되어 천문.  역수. 축후.
 각루. 점복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풍수지리와 관련된 일을 맡은 관리들은 958 년(광종9)에 쌍기의 건의로  실시된 과거시험에서 잡업 중  지리업으로 등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풍수지리사들의  관리 임용은 당시 사회에  풍수지리사상이 널 리 보급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들은 주로  완실의 능묘를 축조하고 보수하는 일 을 전담하고 풍수에  관한 책을 편찬하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왕명으로 이 궁지(왕의 별장터)나 천도할 만한 땅을 찾아다녔으며, 성을 축조할 만한 터를 잡 거나 왕의 피서지를 선정하는 역할도 하였다.
 
 전 국토의 효율적 운영월니, ‘풍수지리설’집대성
 우리 나라에는 삼국시대  이래로 고유의 풍수지리설이 전래되어  왔다. 삼국통 일 이후  체계화된 중국의 풍수이론이 도입되면서  풍수설은 급속도로 확산되었 다. 신라 하대에는  특히 지배층 내부의 거듭된 권력 쟁탈전으로  지배체제가 붕 괴되었고 중앙 귀족들은 끝없는 정치적 혼란상태에서 정신적인 안식처가 필요했 다. 그러한  상황에서 풍수지리설은 불교  신앙과 함께 그들에게  안정과 희망을 주는 또 하나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지방에 대한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 각지에서는  성주 장군을 칭하는 호족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이들 호족들은  세력을 성장시키는 데 풍 수지리설을 적극 이용하였다. 특히 왕건이 태어나기도  전에 도선이 이미 새로운 왕조의 창건을 예언하였다고 전하는 <옥룡사 선각국사비>의 내용에서 풍수지리 설은 호족들에게 자기 세력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적극 이용되었 음을 볼 수 있다.  이 비문은 도선이 입적한 후 곧바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250 여 년이 지난 1150년(의종4)에 찬술되었기 때문에 윤색된 부분이 적지 않다.
 중앙귀족에게 받아들여졌던  풍수지리설이 지방의  호족사회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신라말  고려초의 승려인 도선이다. 도선 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의 승려로 20세에 혜철 문하에 들어가 선을 배우 고 태백산 등지를  유람한 뒤 광양의 옥룡사에 들어가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머물렀던  옥룡사는 견훤의 세력권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도선과 견훤을 연결하는 풍수지리설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왕건이 후삼 국을 통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곧 왕건세력을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는 풍수지리설만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데 그 원인이 있을 것이 다.
 도선은 전국을 답사한 경험을 토대로 국토의 효율적인 운영원리로서 풍수지리 설을 집대성하였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827년(신라 흥덕왕 2)부터 898년(신라 효공왕2)에 걸쳐 생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각 국사비>에 따르면 도선은 이인에게서 풍수지리설을 배웠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불교계의 인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가 술법을 전해 주면서 이  또한 대보살 이 세상을 구제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법 이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 련하여 도선에게 풍수지리설을 전수해 준 사람이 바로 그의 스승인 혜철일 것이 라는 의견도 있다. 혜철이 당나라에 다녀오면서  중국의 풍수이론을 도입하여 전 수해 주었다는 것이다.
 도선은 그 후  전국을 답사한 경험을 토대로  산수의 순함과 거스름을 정하고 명당을 제시하는 한편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와 답산가를 남겼다.  그의 저술로 는 <도선비기>가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외에도 <도선밀기>,   <송악명 당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옥룡기>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풍 수지리사상이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알려 줄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도선비 기>이다. 이 책은  오늘날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중요한 정책결 정을 할 때에 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도선은 풍수지리의 이론에만 치우치지 않고 실제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풍수지 리설을 유기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어느 한 지역(명당)을 중심으로 국토를 재 편성하고 그에 맞는 운영원리를 찾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산수의 순함과 거스름 을 정하는 데  중점을 두고 보조적인 성격으로 비보사상을 내세웠다.  도선의 풍 수지리설은 명당을 설정하고 그  곳을 중심으로 전 국토의 순역형세를 집대성한 것이다.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지역차별
 이러한 도선의 풍수지리설은  왕건에게 적극 수용되어 정치에  반영되었다. 그 러나 왕건은 도선과  달리 비보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는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의 정치운영에 맞게 비보사상과 도참사상을 연결하여 변용 시켰다. 비보설은 도참설과 연결되어 특정 지역을 중시한다든가, 혹은 반란을 일 으킬 형세이거나 임금에게 배역하는 모습이므로 그 지역민은 등용해서는 안된다 는 등의 이론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왕건이 남긴 훈요10조 가운데  차령산맥 이 남과 금강 밖은 산수의 형세가 배역하는 모습이므로 그 지역 사람들도 배역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하여 그 곳 인물들은 기용을  삼가라는 내용이 있다. 곧 후백제 땅에 대해 유독  차별적인 인사정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리적인 이 유에서라기보다는 고려 체제에 순응하고 투항한 신라와는 달리 끝까지 반항했던 후백제에 대한 보복적인  조처로 보아야 한다. 또 한편으로 강제로  통합된 후백 제 출신 인물들이 그 원한으로 반란을 꾀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 곳 출신 인물들의 정치참여를 막고자 한 것이다. 왕건은  풍수지리의 이론에서 권위를 빌 어와 후백제 지역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는 그 정치적 의도와는 상관없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풍수지리를 동원한 묘청의 야망
 풍수지리설은 비보사상과  결합될 때까지도 전 국토를  답사한 경험을 토대로 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도참사상과 결합되면서 그 것은 지리도참설로 흘러  정쟁에 이용되었다. 정치가들은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 으로 풍수지리의 권위를 빌리려 하였으며, 풍수가들은  정치가의 권력을 빌려 자 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정치가들은 풍수지리의  권위를 빌려 정책 추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풍수가들은 그들의 정책을 뒷받침해 줄  이론을 개발하여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 과정에서 도참 논리를 빌어 왔다.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의 결합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건이 서경천도운동이다.
 서경은 동쪽과 남쪽이  대동강에 닿아 있고, 북쪽은 을밀대와 모란봉을  품은 금 수산이 있으며, 서쪽은 대동강의 지류인 보통강이  흘러 풍수가들이 말하는 명당 이었다. 이 곳은  수덕이 순조롭고 지맥의 근본을 이루는 ‘만대  대업의 땅’으 로 지목되어, 태조는 후대의  임금들이 반드시 넉 달 동안 이  곳에 머물라는 훈 요를 남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다. 태 조는 북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는 국방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서경지역의 이반을 사전에 봉쇄하는 정치적  의도로 서경경영을 추진하며 이론적 근거로 풍 수지리를 내세운 것이다.
 고려시대에 지리도참설을  바탕으로 발생한 가장  커다란 사건을  1135년(인종 13)에 묘청 등이 일으킨 서경천도운동이다. 인종 때는 외척인 이자겸이 ‘십팔자 (이)위왕’이라는 도참설을 믿고 난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죽고 궁궐이 거의 불 타 버려 민심이 매우 흉흉하였다. 대외적으로도  금나라의 외교적 압력에 시달리 고 있었다, 이 때 묘청. 정지상 등은 개경의 지덕이 쇠약해져 국내외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며  서경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서경천도 주 장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인종 6년에 일관  백수한이 검교소감으로 서경의 분사에 임명되고,  묘청을 스 승으로 삼고 음양비술을 잘한다 하여 뭇사람을  현혹하였다. 정지상 또한 서경사 람이라 그 말을 깊이 믿고 말하기를 “상경은 기업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불 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왕기가 있으니  도읍을 삼는 것이 좋겠다.”하고 곧 근시인 내사랑 김안과 더불어  꾀하기를 “우리들이 만약 임금을 모시고 서경에 도읍하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니 일신의 부귀 뿐만 아니라 자손의 무궁한 복이 될 것이다”라  하였다... 묘청 등이 아뢰기를 “신 들이  서경 임원역의 지 세를 살펴보니 이것은 곧 풍수에서 말하는 큰  꽃 모양의 터입니다. 만약 궁궐을 지어서 거처하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으며 금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 할 것이고 36국이 모드 신하가 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를 보면  인종 때의 서경천도운동은  묘청. 정시장 등  서경세력이 자기들의 출신지역으로 도읍을  옮겨 중흥공신이 되어 정권을  잡으려는 정치적 야심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서경기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마침내 묘청 등의 주장에 따라 대화궁을 짓고 그  안에 팔성당을 세우는 등 서경천도가 곧 실현되 는 듯하였다. 그러나  궁궐을 준공한 뒤 대화궁 근처에 벼락이  떨어지고 임금이 서경으로 행차하는 도중 갑작스런  폭풍우로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는 등 불상사 만 잇따라  일어났다. 이에 서경천도론은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묘청 일파를 배척하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서경천도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 자 묘청 등은 서경에 대위국을 세워 개경의 조정과 정면으로 대결하기에 이르렀 다.
 이 묘청의 난을  김부식은 5,6년 전부터 계획하여 일으킨 것으로  설명하고 있 다. 그러나  묘청이 난을 일으켰다가  곧바로 서경사람들에게 잡혀  죽은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랜  준비 끝에 일으킨 거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도 국왕의 서경 행차가  중지된 인종 12년 8월  이후에야 반란 계획을 꾸민 듯하며 거사도 반란을 일으키기  며칠 전에 갑자기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경천 도운동의 중심인물인 정지상.  백수한 등이 반란이 일어난 줄 몰고  개경에 그대 로 머무르고  있었던 데에서 알 수  있다. 또한 대위라는 나라  이름과 천개라는 연호를 칭하고는 있지만  국왕을 새로이 옹립하지 않았다든지,  군대를 일으켰다 고 그들 스스로 임금에게 알린 점 등으로 미루어 왕권 자체에 대한 도전이 아닌 중앙의 문벌귀족들을  타도하는 데 그 거사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정이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완전히 평정하는 데에는 일년이라는 시일이 필 요하였다. 결국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개경의 보수귀족들에  의해 서경천도운 동은 좌절되고 서경의 지위는 갈수록 격하되어 갔다.
 그 뒤 고려에서는 무인정권의  성립 등 사회가 크게 바뀌지만 지리도참사상은 여전히 유행하였다. 조선초까지도  풍수지리설은 도읍지의 선정 등에  많은 영향 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허무맹랑한 비기로 전해지면서 미신화되어 결국에는 집 터나 묘자리 등을 잡아  주는 가장 초보적인 방법만 남게 되었다.  도선이 전 국 토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으로 집대성하였던 풍수지리설은 후대로 갈수록 미신적인 요소만 남게  된 것이다. 풍수지리를 빙자한 갖가지 행사가  왕실과 지 배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때 각종 폐단이 일어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지금 도 종교적 의미를 떠나 미신적  속성을 지닌 사이비 종교가 자주 세상을 떠들썩 하게 한다.
 고려말 풍수지리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물론 그에 대한 폐단이 큰 이유가  되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성리학의 발전과  깊은 연관을 지닌다. 특히 신진사대부는 당시 왕실을 지배하고 있던 불교가 통지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잃고 풍수도참과 습합되는 등 폐단을 노출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과 함께 풍수도 참을 비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유교와 불교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던 고려말에 있었던 것이었고, 조선 건국  이후에도 여전히 풍수도참은 이성 계와 무학대사에 의해 한양을 수도로 정할 정도로 중요한 사상으로 작용하게 된 다.
 
 삶의 즐거움과 괴로움
 농민의 한해살이는 어떠했을까 전병무(국민대 강사)
 요즘 ‘신토불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우리 농 산물을 먹어야  몸에 좋다는 말이다.  일관된 농업정책의 부재로  농산물 가격이 폭락과 등귀를 거듭하고, 외국 농산물이 물밀듯이 밀려오며, 상당수 농민들이 파 산하는 상황에 직면함에  따라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던 이 구호가 이제는 매우 절실해졌다. 최근에는  국제화 새대에 농업은 더 이상 보호받을  산업이 아 니라는 논리까지 제시되고  있다. 지금의 농촌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농업사 회에서 산업사외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부정적  현상과 부작용을 다시 한 번 생각게 하는  시점이다. 이 점은 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서 농춘의 현실과 농민의 생활이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는 일반적인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 구체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농업사회였던 고려시대의 농촌  현실과 농 민의 한해살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익히 알려진대로 고려시대는 전형적인 농 업사회였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고 같이 여긴 다는 이념이 농업정책의  중심이었고, 농부의 소중함과 농업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사회였다. 정부는 농사철에  농사를 방해하는 일을 일체 중지하여 농민들이 오직  농사에만 힘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국 왕 역시 농사의 고됨을 체험해야 한다고 하여 입춘 무렵 따로 마련된 농토에 나 가 친히 농사를 짓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백정은 양인농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백저의 의미는  조선시대 백정을 일컫는다. 이들 은 소나 개 등  짐승을 잡던 천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고려  백정은 이들과 전 혀 다른 존재였다. 고려시대에 조선의 백정과  같이 천시되었던 존재는 야수척과 화척이었다.
 고려 백정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에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농사를 짓고 살았던 농민을 말한다.  이 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던 토지는 매매나 상속, 증여 등이 자유롭고, 법적으로도  보장받은 농민의 개인 소유지였다. 그러므로 백정은 당시 농민의 대표적 존재였다. 이들이 국가에 내는 세금은 대체로 3종류였다. 토 지를 경작하고 내는 전세, 각 지역의 특산물을 바치거나 포로 대신 내는 공물세, 아무 대가 없이  노동력을 징발하는 요역이 그것이다. 이 모두는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농민이 백정은 아니었다. 하늘과 같은 상전의  농토를 경 작하며 살았던 노비농민과  같이 더 열악한 처지에 있던 농민들도  많았다. 설사 백정농민이라 하더라도 자기 농토가 부족하여 생계유지가 곤란했던 사람도 있었 다. 이들은 사정사정하여  손바닥만한 땅이라도 빌려서 농사짓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또한  이들은 언제 어떤  이유로 자신의 농토를  빼앗기고 유리걸식하게 될지 몰랐다. 고려시대 농민의 사회경제적 처지는 이렇듯 동일하지 않았다.

  농민의 한해살이 스케치
 예나 지금이나 농민들은 대개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한다. 밭고랑 논두렁에서 뙤약볕을 온몸으로 받으면서도  다가올 풍년을 위해 일년 농사에 피 땀을 흘리는 것이다. 그런데 농사는 아무 때나  씨를 뿌리고 적당한 시기에 거두 어 들이는 것은 아니다. 기상이나 토양성질과  같은 자연조건과 경지정리나 시비 기술, 종자개량 등과 같은 생산력 수준을 적절히 고려하여 농사를 짓는다.
 사실 인간은 신석기혁명을 거쳐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래 자연과의 숱한 싸움 속에서 농업경영  방법을 체득하였고, 입에서  입으로 혹은 직접  몸으로 시범을 보여 줌으로써 농사경험을 쌓아 왔다. 이렇게  전승되고 축적된 농업기술의 가늠 하려면 당대  발간된 농서를 보아야 한다.  고려시대 한 해 농사의  과정과 농업 수준도 농서를 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려 농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고려말에  이암이란 사람이 원나라 농서인  <농상집요>를 발간하여 참고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때에 재배된 벼, 조, 보리, 콩등 다양한  곡물들을 각기 세부적으로 나누어 농업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여기서는 대표적인 농작물이라 할 수  있는 벼 농사를 중심으로, 파종과 제초, 수확에 이르는 농민의 한해살이를 살펴보자.
 농부들이 봄철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볍씨를 뿌릴 수 있도록 논을 갈고 고르 는 경지작업이다. 보통 음력 1월과 2월에 한두 차례 쟁기질을 하여 갈아 두는데, 쟁기질은 인력으로 하기도 하고,  소가 끌기도 하였다. 소를 이용할 경우 대체로 쌍겨리로 두 마리 소를  연결하여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쟁기질을 하였다. 이 후4월 중순과 하순  사이에 써레질을 하여 다시 논을 고른  다음, 논물을 충분히 가둔 뒤 미리 발아시켜  둔 볍씨를 직접 논에 뿌렸다. 이렇게  농민이 볍씨를 직 접 논에 뿌리는  벼 파종법을 직파법이라 한다. 현재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파종 법은 모판에서 모가  일정 정도자라면 논에 심는 이앙법이다. 이는  고려말에 소 개되었지만, 여러 약점이 있어 조선 전기까지 금지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일 반적인 벼 파종법은 직파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파종을 끝낸 후 한달 가량 지난 후부터  김매기를 시작하여, 추수 때까지 대략 4,5차례 반복한다. 김매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형 호미로 하는 데, 이런 호미는 이웃한 중국, 일본에서는 별로  볼 수 없다. 말 그대로 ‘한국형 ’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 나라의 자연조건을 고려한 농민들의  농사경험이 낳 은 것이다.  그러나 호미질은 여간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다. 한여름 뙤약볕에 하루종일 허리를 구부려 벼  사이에 자란 잡초를 제거하노라면 당장이라도 호미 를 내던지고 싶은 심정이 수없이 들 것이다.  이러한 김매기 작업을 하면서 논에 물을 대고 다시 빼는 작업을 몇 차례 한다.
 고달픈 김매기 작업이 끝나면  이제 수확의 기쁨을 나누는 계절이 성큼 코앞에 다가온다. 음력 8월에 공동으로  벼베기 작업을 끝내면, 타작마당은 가벼운 흥분 으로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벼를 힘차게 터는  사람, 도리깨질을 하는 사람, 탈곡 된 벼의 낱알을 쓸어 담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농사일이 힘들지 않는 것 이 있겠냐마는, 타작만은 왜 이리 좋은지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농가의 수입과 지출은 어떠했나
 이렇게 수확을 끝내야  농민들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한  해 수입을 계산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농민마다  경작한 토지규모의 차이가 있어 일률적이지 않다. 농 민 개개인의 토지소유량을 계산하고  평균을 내어 한 농가의 수입규모를 산출하 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려말에 백정농민이  안정적으로 토지를 경작할 수 있도록 평전1결을  지급한 일이 있다. 이 조치를 잘  음미해 보면 1결 의 토지는  당시 백정농민들이 가족  노동력을 이용하여 경작  가능한 면적이고, 한 가족이 1년 정도  생활하는 곡물을 수확할 수 있는 토지임을 알  수 있다. 이 러한 가정이 맞다면  당시 농민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백정농민이 농토1결에서 한 해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어 가을에 수확하는 18석에서 20석을 한 해 수입이 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타 몇몇 수입이  있다 하더라도 이 범위에서 크게 벗어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농가의 1년 지출도 이런 방식으로 개평치를 계산해  낼 수 있다. 우선 표준 농 가가 지출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한 해  소비하는 식량이다. 당시 가족수는 부부 와 자녀를 포함하여 평균 5인에서 6인  정도라고 한다. 1인의 하류 식량소비량은 성인의 경우 2승(1승은 0. 6리터)  정도로 1년에 약 4. 8석이다. 그러므로 5인 가 족이 부부 2인과 자식3인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고 소인이 성인의 2분의 1을 소 비한다고 치면 한  농가의 1년 식량은 16.  8석이다. 둘째는 국가에 내는 세금이 다. 조세는  생산량의 10분의 1을 납부했으므로  1. 8석에서 2석이  되고, 요역과 공물은 포 3필에서 4필인데 포 1 필은 미 2두이니 약 1석이 되어 합계 조세액은 전체 3석 정도이다.  셋째는 다음 해 생산을 위한  종자 확보이다. 조선 세종 때 파종량이 전체 평균 결당  10두에서 20두로 이를 미로 환산하면 5두에서 10두가 되지만 대략 0. 5석에서 1. 0석이다. 넷째는  빌린 돈과 기타 경비 2석에서 3석을 잡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한 농가의 1년 총  지출액의 합계는 최대 23. 8석이 된다. 1결의 토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수입이 18석에서 20석인데, 식량과 세금 으로 지출되는 비용만 19. 8석이나 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적자라고 평가할 만한 것이다. 때문에  백정농민은 남의 토지를  소작하거나 새로운 농토  개간에 적극 참여하여야 겨우 적자를 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정상적인  농업경영을 했을 때도 농민의  대차대조표는 적자를 면하기 어렵다. 더구나 지배층의  불법적인 수탈까지 더해지면, 농민들은 농토에서 쫓겨 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농민의 사정은 고려말  윤여형이라는 이가 읊은 <상률 가>에 잘 나타나 있다.

 내 촌집에 들러 늙은 농부에게 물으니,
 늙은 농부 나를 보고 자세히 얘기한다.
 요사이 세력 있는 사람들 백성의 토지를 뺏아,
 산이며 내로써 한계 지어 공문서 만들엇소.
 혹은 토지에 주인이 많아서,
 도조를 받은 뒤 또 받아 가기 쉴 새 없소.
 혹은 홍수와 가뭄을 당하여 흉작일 때에는
 해묵은 타작 마당엔 풀만 엉성하다.
 살을 긁고 뼈를 쳐도 아무 것도 없으니,
 국가의 조세는 어떻게 낼꼬.
 몇 천 명 장정은 흩어져 나가고,
 늙은이와 어린이만 남아서 거꾸로 달린 종처럼 빈 집을 지키누나.
 차마 몸을 시궁창에 박고 죽을 수 없어,
 마을을 비우고 산에 올라 도토리며 밤이며 줍는다.

  땅을 갖기 위해 산으로 저습지로
 몇 년 전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서편제’라는 영화가 있다.  이가운데 주인 공 3명이 아리랑을 부르면서 논밭길을 지나는  장면애 있다. 무언가 남도의 정서 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배경이 된 사 다리 모양의 논밭이다.  인구가 늘어난 요즈음 산비탈에 있는 사다리  모양의 논 밭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러한 형태의 토지는 고려시대에서도  볼 수 있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는) 평기자 적기  때문에 경작지 가 산간에 많다. 그  높낮이 때문에 경작하고 개간하기가 대단히 힘들며, 멀리서 바라보면 사다리나 돌계단과  같다”고 한 대목이 있다. 이와 같이  산비탈을 갈 아 곡식을  심던 토지가 산전이다.  외국인의 눈에는 이것이  특이하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고려 농민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개간한 땅이엿다. 땅에서 태어나 땅에 서 죽는 농민에게는 토지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한 뙈기 땅 이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갖는 것이 최대  소원이었다. 그리하여 산간계곡에서 자 갈을 치우고 나무뿌리를 들어내거나, 자연재해로 황폐해진  농토를 다시 가는 등 농재개간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농민에게는 생계의 터전을  마련하기에 더없는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농지 개간은 농민에게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었고, 국가는 세름을 더 많이  거둘 수 있어 서로 좋은 것이었다. 그래서 국가 는 적극적으로 이를 지원해 주었다.
 개간은 산전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농업은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가뭄이나  홍수는 농토를 황폐화시키기 일쑤였다.  또한 이민족과의 전쟁 중에도  농토는 망가졌다. 이렇게 농토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토지를 진전이라고 한다. 농민들에겐 이 역시 주요한 개간 대상이었다. 산전처럼 완전히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지만, 1년에서 3년 동안 세금이  면제되는 등의 특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농민들에게는 큰 관심사였다.
 산전과 진전의 개간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자 농민들은 저습지나 간척지 개발 로 눈을 돌렸다. 이는 저습지에 고인 물을 빼는 데 유용한 하거 공사와 벙천, 방 조제 공사등 수리시설의 개발과 함께 이루어졌다.  다만 저습지와 간척지 개발은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되어야 했다.

  공동체 모듬살이의 한 자지, 향도
 농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자신이 태어난 마을에서 살다가 그 땅으로 돌 아간다. 농민에게  마을은 곧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생활공동체였던 것이다.
 농민들은 일상의례와 공동노동 등을  통해 자신이 마을 구성원의 아나임을 확인 하였다. 농민들은  국가의 제도에 의해서도 사는  지역에 묶여졌다. 국가가 걷은 각종 세금은 농민 개개인이 내는 것이지만, 국가는 이를 군현 단위로 매겼다. 이 속에서 농민들은 마을 단위의 공동체 속에서 살아 갔다.
 공동체 조직으로 대표적인  것이 본래 불교의 신앙조직이었던  향도였다. 불교 신앙 가운데는 매향이라고 하여 바닷가에 향나무를  묻는 신앙활동이 있었다. 위 기가 닥쳤을 때나  불안감에 사로잡혔을 때, 묻었던 향나무를 통해  미륵을 만나 구원받고자 하는 염원에서 나온 것이다. 이  매향활동을 하는 무리들을 향도라고 한다. 고려는 불교국가였기 때문에 향도와 같은 신앙 공동체 조직이 성행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향도는  단순히 매향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규모  인력이 동 원되는 물상을  만들거나 절을 지을 때,  혹은 석탑을 세울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경북 예천에는  보물53호로 지정된 개심사지 5층 석탑이 있는데, 거기에는 개심사석탑기가 새겨져 있다. 이 석탑은 1010년(현종 원년) 3월에 공사 가 시작되어 이듬해 4월까지 약 1년 정도  걸려 완성되었다고 한다. 소 천마리와 수레 18대가 동언된 엄청난 공사였다. 이 때  두 부류의 향도가 참가하였는데 임 원만 해도  각각42명, 95명 이었으며,  1만명의 무리가 참가하였다고  한다. 실로 군현민 전체가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 작업은 군현 단위 공동노동에  촌락의 지 배층과 농민들이 협력, 결속하는 전통에서 나온 행위였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촌락 공동체 조직인 향도의 성격이 변하여,  불교 신앙단 체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지배층 중심의  향도에서 일반 백성들이 자 신들의 이익을  위해 조직하는  향도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조선 초기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향도연회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대체로 이웃  사람끼리 모여 회합을  갖는데 적으면 7인에서  9인이요, 많으면 100여 인이 되며, 매월  돌아가면서 술을 마신다. 상을 당한 자가 있으면 향도끼 리 상복을 마련하거나  관을 준비하고 음식을 마련하며, 혹은 상여줄을  잡아 주 거나 무덤을 만들어 주니 이는 참으로 좋은 풍속이다.
 이제 향도는 자연촌락을 중심으로  하층민이 모여 그들만의 행사를 치루는 모 임이자 농민의 일상생활 그 자체가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향도는 마을 공동노역이나 혼례와 상례, 민속 신앙과 관련된  마을 제사 드 공동체 생활 을 주도하는 농민조직으로  정립되어 갔다. 이것이 조선시대  대표적인 농민조직 인 두레로 계승 발전되어 나갔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았던 고려 농민들의 바람이 있었다면 무엇일까?  그바람 은 고려말 우왕 때  이금이라는 승려의 일화를 통하여 음미해 볼  수 있다. 그는 백성들에게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하면서, 농민들에게 재화를 분배해 주고, 농업 기술도 전수해 줄뿐 아니라 왜구도 격퇴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고려 체제를 위협하는 자신의  사상적 구호로 인해  곧 체포되어 처형되었지만,  그가 제시한 구호 속에서 당시 농민들의  바람을 알 수 있다. 그가 내걸었던  구호는 고려 농 민뿐만 아니라 여전히 우리 시대 농민의 바람이기도 하다.
 
 고려인들은 어떤 의료혜택을 받았나
 김미엽(성신여대 박사과정)
 고려의 옛 풍속은 사람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고 귀신을 섬길 줄만알 뿐이고 저주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1118년(예종 13)에 고려 사신이 와서 글을 올려 의원을 보내 의술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자 황제가 허락하여 남줄을 고려에 보냈 는데 두  해 만에 돌아왔다. 그  뒤로부터 의술에 능통한 자가  많아져 보제사의 동쪽에 약국을 세우고 세 등급의 관원을 두니,  첫째 태의, 둘째 의학, 셋째 국생 이라 하여 푸른 옷차립에 나무로 만든 홀을 들고 날마다 임무를 다하였다.
 윗 글은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의 기록으로 고려는 송나라의 도움으로 의술을 익혀 의료혜택을  받게 되었음을 알려 주는 기사이다. 그렇다면  고려 사 람들은 병이 생겼을  때 서긍이 언급한것처럼 약을  먹지 않고 귀신만을 섬겼을 까? 또 예종 때에 와서야 송나라의 도움으로 의원과 약국이 생겼을까? 지금이야 의료보험이 국민복지의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행해지므로 병원과 약국이 멀지 않 게 느껴지고 있지만, 당시  고려 사람들은 어떻게 병을 치료했으며, 병원과 약국 은 어떠하였을까?
  
  각종 병원
 고려를 세운 왕건은 건국 초기부터 의원을 지방에 파견하여 하픈 자들을 치료 하게 하였다. 본격적인 의료기관인 상약국과 태의감은  목종 때인 1000년경에 이 미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고려가 중국에서  의술을 배워 처음  의사가 생겼다는 <고려도경>의 기록은 과장된 것이다.
 상약국은 주로 왕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일을 담당하였다.  태의감은 왕실뿐만 아니라 전염병에 대한  치료, 약품 제조, 일반  관리들의 건강관리를 담당하였다.
 요즘 각 기관에서 건강진단을 하는 것처럼 성종 때에는 문관 5품 이상 무관 4품 이상인 고급관리로서 질병이 있는  자를 소속 관청에서 보고하여 태의감에서 치 료하게 하였다. 또 새로 임명된 자 가운데  신병이 있어서 휴가를 청하면 6품 이 상은 태의감에서 치료하기도 하였다.
 이 두 기관은 개경에 있었는데 국가의 최고 의료기관으로서 왕실내의 병을 치 료하는 것이 최우선 임무였다.  따라서 문종이 중풍에 걸렸을 때 이  두 곳 의원 들이 총동원되어 온갖  의술을 행하였다. 병에 차도가 없자 송나라와  일본의 의 사를 구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치료하지 못했다.
 이 외에도  1022년(현종 13)에 설치되어 태자의  의료를 담당하였던 동궁의관, 문종 때 설치되어 임금이 사용할 약을  관장하였던 한림원의관, 지금의 군의관에 해당하는 군의가 있었다.
 
 의료혜택, 민중에게는 먼 길
 앞에 언급한  기관들이 중앙에서 지배층의 질병을  치료하였다면 일반 백성을 상대로 의료행위를 하였던 것으로는  동, 서배비원과 제위보, 혜민국을 들 수 있 다. 동배비원과 서대비원은  1036년(정종 2)에 개경에는 2곳, 서경에는  1곳을 설 치하여 의원을 전속시켰다. 제위보는 963년(광종 14)에 처음 설치되어 빈민과 행 려환자의 구호와 치료를  담당하였다. 혜민국은 1114년(예종 4)에 전염병을 치료 하고 약을 판매하기 위해 설치된 약국이었다.
 지방의 경우에도 일찍부터 수령과 함께 의사를  파견하였고, 보건소 격인 약점 을 설치하였다. 930년(태조 13)  각 지방에 의학원을 두었으며, 그 후 동경(경주) 과 남경(서울)에도 의사를 배치하였다. 문종 때에는 대도시에는 의사 1명씩을 파 견하였고, 국경지대에도 의사 1명을 파견하여 질병치료를 담당하게 하였다.
 약점은 전국적으로 설치하였는데, 인구에  비례하여 약점사라는 관리를 배치하 였다. 약점사는 1018년(현종 9)에  큰 지역은 4명, 중간 지역은 2명, 작은 지역은 1명씩 배치하였다.이들 약점의 경비는 국가에서 지급하였다.
 그러나 동, 서대비원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지적과 지방에 파견된 의사 들이 부잣집만 찾아가  진료하고 가난한 집은 치료를 제대로 해주지  않아, 원래 국가에서 의사를 설치한 본분을  잊고 있다고 개탄하는 글이 임금에게 보고되었 을 정도로, 일반 백성이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은 쉽지 않은 듯하다.

  전문의, 하늘의 별따기
 현재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국가에서 실시하는 의 사면허시험에 합격하여야  한다. 고려시대 의사가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과거를 통하는 방법으로  기술고시격인 잡업에 합격하여 의사가 되는 것 이다. 958년(광종 9) 처음 시작된 과거에 의업이 있을 정도로 고려국가는 초기부 터 의사 양성에 관심이  많았다. 이후 1136년(인종 14)부터 태의감에서 예비시험 을 통해 1차 합격자를  뽑고, 그들을 교육하여 다시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다. 이 때 시험과목은 현재의 내과에  해당하는 의업과 외과에 해당하는 주금업으로 나 뉘었다. 시험을 보았던 책은 다음과 같다.
 의업: <본초경><명당경><맥경><침경><난경><구경>
 주금업: <본초경><명당경><맥경><침경><유연자방><창저론>
 이 책들은 대부분 중국의  의학서로서 통일신라기에 우리 나라에 들어왔던 것 으로 추정되며, 현재도 한의학에서 기본 서적으로 학습되고 있다. 그러나 시험과 목이 너무나 어려워서 시험에 응시하는 자가 매우 적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의료 시험에 합격하기가 무척  힘들었고, 이에 의한 의사 양성은 수월하지  않았던 것 으로 보인다.
 의사가 되는 또  다른 하나의 길은 도제교육을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에 의한 양성은 민간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뛰어난  의술을 통해 전격적으로 궁주 의 의사로 박탁되었는데, 대부분  의술은 가업으로 삼고 있었다. 충선왕 때 활약 한 설경성과 무신집권자인 최이의  다리종기에 고약을 만들어 주어 치료 하였던 임정의 처가가 그  예이다. 이 외에도 사찰에서 전해 내려오는  불교의학을 전수 받은 경우도 있었다. <고려사>열전에 입전되어  있는 이상로는 승려에게서 의술 을 배워 의종의 발에 난 병을 침으로 고쳤으며 충혜왕 때 활약하였던 승려 복산 은 충혜왕과 관계하여 임질에 걸렸던 황씨를 치료하기도 하였다.

  신토불이 의학서, 평균수명 늘리다
 일반 고려 백성은 어떤 수준의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까? 동양 의학은 서양의 의술처럼 임상학적인 시술보다 약재의 배합을 통해  약을 지어서 병을 치료한다.
 따라서 그러한 사실을  담은 의서를 통해 당시 의술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 다.
 현재 고려의 의학서가 남아 있는 것은 극히  적다. 그러나 당시 기록에 의하면 많은 의학서가 인쇄되거나  수입되어 유통되었다고 한다. 1091년(선종 8)에는 전 란으로 많은 서적이 없어진 송나라가 오히려 고려사신을 통해 중국에 없는 서적 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 중에는 의학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록 좋은 의학서라 하더라도 그  책에 사용되는 약재가 우리 나라의 것이 아 니면 약의 처방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고려의 경우  중국의 의서에 의지하였던 만큼 약재의 수입을 중요시하였고,  이러한 모습은 <고려도경>에 “ 약재만은 현금으로 장사한다”는 기록과 100여 가지의 약재를 수입한 문종 때의 기록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약재를 사용하는 의학책의  간행은 비싼 수입약재를 사용할 수 있는 일부 지배층의 질병만을 치료하는 수준에서 이제 일 반 백성들까지도 의료의 혜택을 넓힐 수 있는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고려의 의학책으로서 제일 먼저 편찬된 것은 예종에서 인종 때에 활약한 김영 석(?~ 1167)의  <제중립효방>이다. 이 책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묘지명에 의하면 중국과 신라의 의학책을  종합, 정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신라 이 래의 전통적인 처방전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책의 내용은 <향약집성 방>에 단지 한 조목만이 전해지고 있다.
 한쪽에 맞은 중풍으로 손과 발을  쓰지 못하고 아리고 아픈 것을 치료하는 데 에는 솔잎 5말쯤을 소금 2되와  같이 쪄서 뜨거울 때 자루에 넣어 탈난 데를 찜 질하고, 식으면 다시 쪄서 나을 때까지 계속한다.
 여기서 중풍을 치료하는  데에 솔잎과 소금만을 사용하고  있으며, 솔잎이라는 토산 약재를 사용한 것은 고려의 독자적인 의학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후 최종준의 <어의촬요방>이 출간되었다.  당시 재상으로 있었던 최종준은 예전에 출간되었던  의학책이 심하게  훼손되는 것을  애석히 여겨  1226년(고종 13) 국왕의 허락 아래 그것을 다시 출간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복간이 아니라 여 러 처방전을 첨부하여 새로운 의학책의 면모를 갖춘 것이었다. 그 내용은 <향약 집성방>에 12개의 처방전이 전하고 있는데, 그 처방전은 중국의 의학 지식을 단 순히 발췌한 것이  아닌 고려에서 터득된 경험을  바탕으로 약을 조제하고 있는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토산약재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강구한 것은  고종 23년 (1236)경 정안이 편찬했다고  추정되는 <향약구급방>이다. 이 책은 당시 민간에 서 이용되었던 응급조치법들을 모은  것으로 당시 몽고의 침략을 피해 임시수도 로 삼았던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과  함께 간행되었다. <팔만대장경>이 부처 의 힘에 의존하여  외적의 침입을 물리칠 것을  기원한 것이라면, <향약구급방> 은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각종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다 루고 있는 질병의 증세는 다음과 같다.
 상권: 음식의 독, 고기의 독, 버섯 따위의  독, 약으로 인한 독, 게를 잘못 먹어 생긴 독, 가시뼈를 삼켰을  경우, 딸국질이 날 경우, 갑자기 졸도하였을 경우, 목 매달아 죽었을 경우,  열병으로 죽었을 경우, 물에 빠져 죽었을  경우, 술에 중독 되었을 경우,  술을 다리는 법, 뼈가  부러졌을 경우, 쇠붙이에  찔리거나 베였을 경우, 열이 있고 떨려 마치 디프테리아 같은 증세, 혀가 무거우며 입안에 상처가 생긴 경우, 이빨이 썩었을 경우
 중권: 여러 가지  종류의 상처나 뾰루지들(피부병), 항문에서  고름이 흘러내릴 경우, 대소변이 꽉 막혔을 경우, 성기에서 물이  질질 흐를 경우, 소변에 피가 섞 여 나올 경우, 성기가 가렵거나 상처 났을 경우, 코피가 쏟아질 경우, 눈병, 귀병, 입술병
 하권: 부인의  여러 가지 증세. 어린이의  여러 증세. 아이가  잘못해서 물건을 삼켰을 경우, 중풍, 미쳐서 날뛸 경우, 학질, 두통
 이 책은  현재 전하는 우리 나라의  가장 오래된 의학서로서, 다음의  세 가지 특징과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토산약재류를 소개하는 부록을 실었다.  창포, 국 화, 지황, 인삼 등 180여 종에 대한 속명, 약의 맛, 효능과 독성, 채취방법을 서술 하여 일반인에게 약재를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함으로서 보다 손쉬운 치료를 가 능케 하고 있다. 둘째는  하권에 부인과 1개 항목과 소아과 2개  항목 등이 각각 설정되어 출산과 더불어 신생아와 영아의 사망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인구증가에 기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셋째는 책의 명칭  ‘구급방’이라는 데 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응급조치를 위한 것이다. 즉  전문적인 의사가 아니더 라도 일반인 등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향약구급방)의 편찬으로  고려인들은 크게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약재의 토산화는 인간의 평균수명을 늘리는 데 기여하였다.
 최고의 의료  혜택을 받은 고려 국왕의  평균수명은 43.93세이다. 가장 장수한 왕은 충렬왕으로 73세였고, 그 다음으로 고종이  68세, 태조 왕건이 67세였다. 가 장 단명한 왕은 12살에 죽은 충목왕이었다.  그런데 왕의 평균수명은 무인정변을 기점으로 전기(태조~ 의종)에는 39.39세인 데 반해,  후기(명종~ 공양왕)는 49. 79 세로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묘지명을 통해 산출되는  자녀의 조사 의 발생빈도와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고려 전기의 경우 수입된 값비싼 약 재는 백성들이 쉽게  이용할 수 없었던 반면에, 후기로 가면서  토산약재를 이용 한 의학서의 보급으로 백성들은 의료 혜택을 많이 받았다. 이는 무엇보다도 <향 약구급방>의 기여가  컸다. 그 후  편찬된 <향약혜민경험방>,  <삼화자향약방>, <향약간이방>, <동인경헙방>등도 모두 토산약재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는  조선 전기에 <향약집성방>으로 집대성되어 토산약재를 통한 치료의 절정기를 맞이하 게 되었다.

  사람 살리던 이름난 약손
 당시 국가간의 교류는 의학서와 의사 양성의  경우도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고 려시대에는 중국의 유명한  의사도 많이 들어 왔다. 이들 외국인  의사들은 주로 왕실 치료와 의술 교육을 담당하였다.
 문종 때 마세안이라는 송나라 의사는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방문하여 의술을 가르쳤다. 한편 1279년 (충렬왕 5)에는 원나라 세조가 연덕신이라는 의사를 보냈 다. 그는 특히 방중술에  뛰어나 고려왕의 총애를 받았다. 연덕신은 양기를 보완 하는 환약을 조제하여 왕으로  하여금 복용케 하였는데 고려의 관리 오윤부라는 사람은 이 약이 왕의 몸에 좋지 못하여 자손을 번성하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 적하면서 분통히  여겼다. 결국 공주가  해마다 태기가 있었으나  왕이 연덕신이 지은 환약을 복용함으로 인해 17년간 임신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의 의사가 고려와 왔을 뿐 아니라 고려인으로 중국에 가서 이름을 빛낸 자도 있었다. 원 간섭기에 활약하였던  설경성은 경주사람으로 설총의 후예 임을 자처하면서 통일신라  전통 의술을 익혀 대대로 의술을 업으로  삼았다. 그 는 상약국의 의원으로 발탁되어  충렬왕의 병을 고쳤고 이후 충렬왕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런데 원나라  세조가 병이 나서 고려에 의원을 구하다  충렬왕의 비인 안평공주가 그를 원나라에 보냈다. 설경성은 원세조를  위해 약을 조제하였고 그 약이 효험을  보자 원나라에서는 그를 궁중에  머물게 하였다. 2년이  지나 그가 고려로 돌아가려  하자 원세조는 그를  만류하였고, 결국 가족을  데리고 원으로 돌아오도록 당부하면서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뒤 에 원나라 성종이 병이 들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그를 치료하였다. 그는 키가 크고 풍채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곧고  후덕하였다. 비록 원나라  황제와 고려 왕에게 신임을  받았으나 자손을 위해  은혜를 구하지 않았으며,  원나라 공주가 고려출신의 비를 모함하자 원 황실에서 간여하여 그로 하여금 이 일에 참여하게 하였으나 잘못된 사실을 밝히고 오직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다고 한다.
 일반 백성을 위해  의술을 베푼 사람으로서는 채홍철과 배덕표를 들  수 있다.
 채홍철은 충렬왕 때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일찍 이 집 북쪽에 전단원이라는 집 을 짓고 승려를  두어 약을 조제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받고는 그곳을 ‘사람을 살리는 집’이라 불렀다고 한다.
 공민왕 때의 배덕표는  관직에서 물러나 김해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약초를 캐어 정성껏  조제하여 동네에서 병자가 생기면 곧 치료해  주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면 자신의 곡식을  나누어 주었으며, 백성들이  곤란한 일을 당하면 관청에 가서 구원하여 주었다. 그 자신도  병이 있어서 항상 지황을 이용 해서 치료하였고,  이 지황을 뜰  안에 길렀으므로 아호를  황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환자를 치료하고 도운 배덕표, 그는 바로 고려의 백성을 돌본 슈바이처이며 고려를 지킨 의사였던 것이다.
 
 무당의 입김이 천하를 호령하다
 정학수(경기도사 편찬위원회 집필위원)
 최근에 대형 사건.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이를 미리 예언했다하여  항간에 유 명해진 점쟁이들이 있다. 무슨 보살이니 도사니  하는 이들은 대기업에 초빙되어 신입사원을 뽑을 때에 면접관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자문을 해주기도 했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다가도 곤경에 처하거 나 결정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 울인다. 첨단 과학의  시대에 살면서도 운수를 점쳐 보고 그들이  제시하는 처방 에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체계적인 교리와 의식 그리고 조직을 갖춘  종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속으 로 대표되는 민간신앙이 아직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은 생명력을 유지할 만한 그 만한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다면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이러한 무속은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귀신을 숭배한 사람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 사람들은 병이  나서 아파도 약 을 먹지 않고 오직 귀신을 섬길 줄만  알아 저주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본래 귀신을 섬겨 주문과  방술을 알 따름이다. 백성들이 재난이나 질병이  생기면 개 경 북쪽에 있는 숭산신사에 가서 옷과 말을  바치고 기도한다”고 하여, 고려 사 람들이 귀신을  무척 숭배한다고 기록하였다.  불과 두어 달  머물다간 외국인의 눈에 비친 오만하고  과장 섞인 내용이기는 해도, 고려시대 민간에  성행한 무풍 의 정도를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무풍에  관한 기록은 이미 태조 때부터 나타나고 있다.
 918년(태조1)에 담당 관리가 “전대의 임금도  해마다 한겨울에 팔관재를 크게 베풀어 복을 빌었으니 그 제도를 따르자”고 건의하자 태조는 이를 받아들여 그 해 11월에 팔관회를  열었다. 팔관회는 원래 출가하지 않은 일반  신도들이 이날 하루 동안만은  여덟가지 계율을 지키면서 승려처럼  경건하게 살아보고자 만든 불교의 법회였다.
 그런데 이 때에 벌어진 모습을  보면 이 행사가 순수한 불교 행사는 아니었던 듯하다. 대궐 안 넓은 광장에 갖가지 등불을  설치하여 밤이 새도록 땅에 가득히 광명을 비추었다. 또 두  곳에 각각 높이가 15미터나 되는 연꽃  형상의 채색 무 대를 높게 설치하고  그 위에서 온갖 유희를 벌였다. 사선악부라는  악단이 나와 흥을 돋구었으며, 용.  봉황. 코끼리. 말. 수레. 배의 가장  행렬이 벌어졌다. 모든 관원이 정복 차림으로 예를 행하였으며, 밤낮으로  즐기며 구경하는 사람들이 개 경을 뒤덮었다고 한다. 한 마디로 경건한  불교 법회라기보다는 음가무가 벌어지 는 신명나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이 때 태조는 위봉루에 올라 이를 관람하고,  그 명칭을 ‘부처를 공양하고 귀 신을 즐겁게 하는 모임’이라 하였다. 그가  남긴 훈요10조에는 팔관회에서 즐겁 게 하는 귀신의  종류가 구체적으로 거명되어 있다. 하늘,  큰 산, 큰 강, 그리고 바다의 용이 바로 그것들이다. 더욱이 국가에서는  이 신령들에게 대왕이나 장군 이니 하는 작호를 내려 주었으니, 그 신들의  이름은 오늘날 무당들이 섬기는 것 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 개인적인 신앙 형태는 어떠했을까.
 무인집권기의 권력자인 이의민은 본래 글을 모르며  무당을 믿었다고 한다. 고 향인 경주에 나무로 깎아 만든  귀신상이 있었는데 그 곳 사람들은 이를 두두을 이라고 불렀다. 이의민은  집안에 당을 짓고 그 귀신을 맞아다가  날마다 제사하 면서 복을 빌었다. 그것이 신통했는지 그는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 하여 최고권력자가 되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사당에서 이상한 곡성이 들려왔다.
 그가 괴상히 여기고  물으니, “내가 너의 집을 오랫동안 지켜주었는데  이제 하 늘이 화를 내리려 하니 내가 의탁할 곳이  없어서 울고 있다”라고 하였다. 과연 얼마 안 있어 그는 최충헌 형제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였다.
 이처럼 지배층 가운데서도 집안에  신당을 마련하여 귀신을 섬기는 경우가 있 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개인적인 신당을 갖추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은 안녕을 위하여 귀신에게  의뢰할 일이 생기면 명산  대천에 있는 신당에 찾아가 빌거나 무당에게 굿을 청하였다. 이규보의 글을 보면, 이 때에 벌어진 굿판의 모 습은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규보가 개경에 살  때 이웃에 무당집이 있었는데, 날마다 많은  남녀들이 구 름같이 모이고 북, 장구 등의 시끄러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무당은 주름진 얼굴, 반백의 머리에 대략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들보에 닿을 듯이 동동 뛰는 중간중간에 새소리 같은  목소리로 늦을락 빠를락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예 언이 신통하게 잘 맞는다 하여 신도들은 손비빔하며 곡식과 옷감 등을 바쳤다고 한다. 타고 있는 두 자루의  촛불에 떡이며 고기, 과일로 질편하게 차린 굿상 뒤 신당의 벽에는  무신도가 액자처럼 모셔져  있고, 신이 내려오는  길목인 신간과 굿상 곁에는 굿을 차린 사람이 바친 재물이 수북이 쌓여 있는 모습을 쉽게 상상 할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사회는 위로는 국가.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지배층과 일반 백성 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생사화복에 관한 것을 귀신에게 상당히 의존하였다.

  서슬 푸른 무당의 권세
 고려시대에는 지방관이 임지에 부임하면  그 지방의 유력한 신들을 찾아 인사 를 드려야 했다. 만약  이것을 어기면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한 때  등주(함경남 도 안변)의 성황신이 여러 번 무당에게 내려 국가의 길흉과  화복을 신통히 알아 맞추었다. 그 지방의  관리였던 함유일은 성황당에 제사할 때 고개만  숙이고 절 하지 않았다 하여 파면당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토속신들과 그 신들을 섬기는 무당들의 권세가 대단하였 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이같은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 신령들이 국토를 지 켜주고 백성을 보살펴  준다고 여겼고, 권력이나 재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불가 항력의 재난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사람들의 바람을 신령과 교감하는 무당을 불러 기우제를 지냈다. 1021년(현종 12)에는 뜰 가운데에 흙으로 용을 빚어 놓고 남녀 무당들을 모아  비가 오기를 빌었고, 1132년(인종11)에는  관청 앞에 무당 300여 명을 모아  놓고 비를 빌었으며,  6월에 또 무당을 모아서  비를 빌었다고 한다.
 1173년(명종3)에는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개울과  우물이 모두 마르고 곡식 들이 말랐으며 전염병까지 발생하여 사람들이 많이  굶어죽었다. 그러다 보니 심 지어는 사람의 고기를 파는자가 있게 되자 무당을  모아 놓고 비를 빌었으며, 근 신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명산 대천에서 또 빌었다.  이런 때에 왕은 불기운을 멀 리하고 물기운을 끌어오기 위하여 물과 관련되는 것이면 명산 대천 어디에든 기 우제를 지내고, 여기에서 무당을 동원하여 의식을 담당케 하였다.
 1146년(인종24) 왕이 병들자  무당에게 점을 쳐 보게 하니  모반죄로 축출당한 척준경이 그 병의 원인이라른 점괘가 나왔다. 이에  왕은 무당의 지시에 따라 척 준경에게 문하시랑평장사라른  벼슬을 추증하고  그 자손들에게 관작을  주었다.
 그리고 내시를 파견하여 김제군에 신축한 벽골제의  뚝을 헐어버리게 하였다. 이 사례는 무당의 점복과 치병의 기능을 동시에 보여준다.
 한편 무당과 관련된 폐단도 많았다. 고종 때  홍복원은 자신의 집에 머물던 왕 족인 영녕공 준을 미워하여 무당을 시켜 몰래  저주하게 하였다. 그 무당은 왕준 의 형상대로 나무인형을 만들어 손을  묶고 머리에 못을 박은 다음 땅에 묻거나 우물에 넣어  저주하였다. 또 충렬왕  때에는 무당과 술승들이  공주를 저주하여 병들어  죽게 한 사건이 있었다.
 영험하다고 사람들이 믿고 있던 신령의 권위를 빌려 위세를 떨치고 농간을 부 린 무당의 사례도 있다. 충렬왕 때 심양이라는  사람이 공주 지방의 관리가 되었 을 때의 일이다.
 장성 지방에 한 여자가 있었는데, “금성대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네가 만약 금성신다의 무당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반드시 네 부모를 죽일테다’라고 하였 기 때문에 놀라운 나머지 무당이 되었다”라고 떠벌였다.  그 때 그녀는 같은 지 방 사람인 공윤구와  사통하고 있었다. 그녀가 귀신의 말이라 하면서  “내가 장 차 원나라에 가겠는데 반드시 공윤구를 데리고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 여 나주의 수령이  역마를 그에게 내주었다. 나주출신의 관리가 왕에게  그 무당 이 신기하고 영험하다고 말했으므로 왕은 그  무당을 맞아다가 접대하려 하였다.
 때문에 무당 일행이 지나가는  고을에서는 수령이 예복을 입고 교외에까지 나가 서 맞이하여 후하게 접대하였다. 그런데 그녀가  공주에 도착하였으나 심양은 그 들을 맞이하지 않았다.  무당이 화를 내면서 귀신의 말이라며 “나는  반드시 심 양에게 재앙을 내릴 것이다”라고 하고는 되돌아가  다른 곳에서 숙박하였다. 심 양이 사람을 시켜  그들을 엿보게 하였더니 그녀는 공윤구와 함께  자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체포하여 문초하자 모든 사실을 자백하였다.
 무당들은 귀신을 전문적으로  받들면서 신령과 교감하는 역할을 국가로부터도 인정받아 사회의 안정을  가져오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위와  같이 때로는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악용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민초의 동반자 무당
 무당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과 의례 그리고 신봉자 집단 등으로 이루어진 종교 형태를 무속. 무교. 무격신앙이라고 하는데, 이는  흔히 종교적 체계를 갖추지 못 한 채  민간에서 전승되는 신앙이라는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민간신아의 부류에 넣어 부르고 있다. 우리가 민간신앙하면 으레  무속신앙을 떠올리는 것은 무속이 지니고 있는  전문성 이외에도 오히려 민초들의  사고와 종교의식이 무속신아에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속의  중심인 무당은 인간의 생사 화복을 해결해 주는 해결사임을  자처하고 있고 민초들은 그것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것이다.
 잦은 자연재해와 전쟁 그리고 힘있는 자들 밑에서 시달이며 춥고 배고픈 생활 을 하던 민초들에게근 유교나  불교가 강조하는 정신적 윤리성이나 내세적 구원 의 의식이 자리잡을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현세에 굶지 않고 병들어 죽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 당면  문제가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 었다. 따라서 무속은 민초들에게 베풀어 주는 역할, 곧 불안의 해소와 생활에 희 망을 주고 삶의 이상과 의미를 부여하는 중대한 종교적 기능을 해왔던 것이다.
 무속은 불교와 같은 종교가 수용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 이 언제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조선의 단군신화에 무속적 요 소들이 나타나고 있어 무속이 고조선  시기를 전후해서 이미 우리 문화 속에 자 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초기 유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편찬한 <고려사>에서는 고려시대의 무속 을 음사라 하여 세상에서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으로 모았다. 남녀가 굿판에 모 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유교적인 안목에서 부정적으로  본 것은 당연한 것이 고, 또 가나호 굿을  빙자하여 간통, 재산축적 등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였으니 더욱 비판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시각은 앞의  함유일의 사례 에서 보았고, 무속을 몰아내야겠다는 의도에서 쓴  이규보의 글에도 강조하고 있 지만 특히 무인집권기에 현덕수라는 사람이 겪은 일에도 그와 같은 무속의 폐해 가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일찍이  안남도호부사가 되었을 때 정사가  청렴하고 밝았으므로 아전과 백성이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음사를 미워하여 무당을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아전이 여자무당과 그 남편까지 잡아와서 현덕수가 신문하였는데, “이 무당은  여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 러자 동료들이 웃으며 말하기를, “만약 여자가 아니면  어찌 남편이 있을 수 있 는가.”라고 하였다.  현덕수가 곧 사람을 시켜  무당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남자였다. 예전부터 무당이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술수를 핑계하고 사대부의 집 에 드나들면서 몰래 부녀자를 간음하기도 하였다.  몸을 더럽힌 자는 부끄러워서 감히 남에게 알릴  수 없었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그러한 병폐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음지에서도 뿌리 내린 무속신앙
 이 밖에도 <고려사>에는  음사로 치부하는 무당 관련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그 대부분은  후세를 경계하기 위한 의도에서 서술된 것이다.  무속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고려시대에는 무속이 엄연히 존재하였고 또한 자뭇 성행하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유학자들은 무속을  미신, 국가재정 낭비등의 이유로 배척하였는데, 인종 때에는 무당을 도성  밖으로 몰아내거나 궁중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였다.  그 후 무당이 주관하는 국가 제사를 중지하고, 일부 지방관은 무당을 탄압했으며, 나아 가 국가에서 무당에게  세금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이는 이후 무당의  활동을 어 느 정도 제약하고  천시하는 경향을 낳기도 하였으나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 다.
 우리 역사에서  종교는 사회통합과 정치이념의 확립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시대의 주요한  종교는 불교였다. 불교는 왕실과 지배층을 비롯하여 민간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지지를 받았으니, 개인의 신앙 대상일 뿐  아니라 국 가 사회의 지도사상이었다.  흔히 고려시대라 하면 팔만대장경을 떠올리듯이, 고 려는 우리에게 불교적 이미지를 강하게 남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으려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보면, 절 박한 곤경에  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에든 매달리려고 한다.  그럴 때면 고상하고 숭엄한 천상의 멀리 있는 신보다는 나를 직접 겨냥하여 속시원히 말해 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점쟁이나 무당들이 더욱 절실한 믿음의 대상이 되었 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무속은 신앙의 대상이기 이전에  일상적으로 집안신이나 마을신, 성황신 등을  모시는 것과 같이 민초들에게 있어서는 생활의  한 부분이 었다.
 
  술에 울고 웃던 고려인 삶의 빛과 그림자 홍영의(국민대 박물과 학예원)
 굴러 들어온 소주가 토속주를 몰아내다.
 얼마전 모 국회의원과 재벌이  일반인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루이14세’ 인가 ‘발렌타인 30년산’인가 하는  값비싼 양주를 외국에서 사들여 와서 물의 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문득 1079년(문종33) 송나라에서 붉은 칠에 도금하고 꽃 을 조각한 상자에  곱게 넣어 보내온 행인자법주 10병이 생각났다.  물론 그것은 약용으로 쓰였을 터이지만, 아마도 당대에는 가장 비싼 수입주가 아니었나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서민들이 그런  고급 술은 커녕 술병조차 구경하기 힘든 것 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고급 술만이 술은 아니다.
 옛 사람의 말에 “한  고을의 정치는 술에서 보고, 한 집의  일은 양념 맛에서 본다. 대개 이 두가지가 좋으면 그 밖의 일은  자연히 알 수 있다”라고 하지 않 았던가. 술이란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사람을 취하게 하는 음료를 말 한다. 주세법에 의하면 알코올  1도 이상의 음료는 술로 정하고 있다. 술은 일부 민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민족이 즐기고 있으며, 그 용도도  다양하여 관혼상제 와 같은 행사에 꼭 필요한 물품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쌀로 술을 빚었다.  언제부터 곡물로 술을 빚었으 며, 어떤 재료와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지는  자료가 부족해서 확인하기 어렵지 만, 술  빚는 솜씨가 일찍부터 발달해  왔음은 틀림없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때보다 술의 종류와 이름도  많이 보인다. 우리  나라의 전통  술 중에서는 막걸 리와 청주가 일찍부터 빚어졌다.
 고려 최고의 주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과 각종 문집에 는 수많은 토속주가  소개되어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동동주. 황금주.
 춘주. 송주. 국화주.두견주. 죽엽주. 백주. 이화주. 오가피주. 백자주. 창포주. 자주.
 부의주 등이 그것이다. 이런 종류의 술들은  조선시대에도 대갓집이나 각 고을의 토속 명주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다.
 오늘날 서민층과  가장 절친한 소주는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  전래의 막걸리.
 청주와 함께 3대 주종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소주는 타이나 인도네시아. 서인도 에서는 ‘아라크’, 원나라에서는  ‘아라길주’, 만주어로는 ‘알키’등으로 불 려져 왔으며, 우리 나라 개성에서는 ‘아락주’라고도 했다. 최근 각광받는 안동 소주는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계획으로 안동에 병참기지를 만들면서 전파시킨 것이다. 이  때 들어온 소주를  지금껏 우리 술이라고  자연스럽게 인정하였듯이 언젠가는 양주를 우리 술로  인정할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  때는 양주를 어 떻게 부르게 될까?
 이렇게 밖에서 굴러 들어온 소주가 박힌 토속주를  빼내 자리를 잡고 난 이후, 소주는 빠른 속도로 유행을 타게 된다. 1375년(우왕원년)에 소주금주령이 내려진 것이나, 그 이듬해 김진의 소주에 얽힌 일화는 자못 흥미롭다. 이 사건은 경상도 원수였던 김진이 이름난 기생을 모아 부하 장수들과 밤낮으로 소주를 마시는 바 람에 ‘소주도’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는데, 왜구가 마산에  침입하자 싸워보 지도 않고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에 와서는  약으로 쓰는 것 이외에는 소주를 마시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할 정도였다.
 
 무역항, 벽란도에서 질펀한 술 한 잔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맑디 맑은 강가엔 낮이나 밤이나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 들, 낮이면 드나드는 상선과 어선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조운선들로 나루는 발 디딜 틈  조차 없다. 만선을 하고 돌아온 어부들은  서로가 고기를 많 이 잡았네 하며, 잡아온 고기를 상인에게 넘기며  옥신각신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양 씨름하며 값  치루기에 바쁘고, 온갖 물화를 도성으로 나르는  수레꾼들은 진 흙탕에 빠진 수레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한  쪽에서는 물주가 아직 오지 않았는 지 송인들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아라비아 상인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를 소리를 저희들끼지 주고 받으며 노닥거리고 있다. 이들이  들여온 물건은 상류층이나 살 수 있는 약재, 비단, 그리고 도자기와 향료. 상아. 공작등의 금은 보화들... 갈매기 떼 노니는 한쪽 백사장 가에  수군들을 옹위하여 나팔 소리 요란하게 불며 나타 난 조운고사관은 사공들의 굽실거림에  흐뭇한 듯 연신 거들먹거리며 아래 관원 에게 삿대질하는 모양새가 가관이라.
 바로 이곳이 수도  개경에서 30리 길인 예성강 포구의 벽란도이다.  신라 때부 터 무역항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이래 광종 때 송나라와 공식 무역관계가 열 린 이후부터 국제간의 무역항으로 크게 자리잡은  것이다. 여기 저기에서 우리의 금.은.인삼.면포 등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세계 곳곳에서 모여드는 대상인들 이 관리를 붙잡고  무역허가를 내달라며 아우성치던 곳, 이들 때문에  오늘날 우 리 나라가 ‘코리아’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여기는 밤만  되면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룬다. <예성강곡>을  부르며 고기를 낚는 어선들의 불빛, ‘청기’라 불리는 등 달아세워 둔 주막의 푸른 깃대, 포구 안쪽에 즐비한 요리집과 긴 장대를  세워 양가와 구별한 색주가의 붉은 등불 아 래 문을 기대어 비단 옷 입고 손짓하며  뭇 남정네를 유혹하는 여인들, 무뢰배와 시비가 붙은 어느  순진한 시골 장정의 우격다짐, 어디선가 시회를  여는지 기생 들의 풍악소리와 술 취한 이들의 호기 어린  웃음소리, 도성에서 바람 쐬러 나왔 는지 한 무리의 고관과 그 부인들을 인도하는  초롱불, 그리고 하인이 소리 지르 는 벽제소리...
 도성에서 두서너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곳이기에 너나 할 것없이 모여든 벽란도 의 저녁풍경에 길 가는  이나, 도회에서 바람 쐬러 나온 이들의  눈을 멈추게 한 다.
 그러나 이러한 벽란도도 한때는 그 명성이  퇴조하기도 하였다. 몽고침입과 그 로 인한 강화로의 천도는 새로운 환락가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최자의 <삼도 부>를 보면, 대몽항쟁시 항전의 수도였던  강화도의 풍경을 그린 내용이 보인다.
 이 글에는 수도천도와 함께  새로운 번화가로 등장한 13세기의 강도에는 해안과 언덕에 공경대부의 화려한 저택과  비교되는 상인. 어부. 소금 굽는 이의 집들이 즐비하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대몽항전의 본거지가  오히려 이전의  개성에서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였다면, 강화로 천도한 최씨정권의  항몽자세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이 삼 별초와 일부  관료들, 일반민들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제주와  진도로 옮겨 가면서 그들과 대항하게 되었던 근본적인 이류가 되었을 법하다.

  농민만 우롱하는 금주령
 지금 이땅에 금주령이 내려진다면 1930년대 미국의 마피아 대부 알카포네처럼 밀주로 떼돈을 벌 수  있을까. 또 술과 관련된 그 많은  사업들과 그것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어찌 될까. 미국은 경제공황 때문에 금주령을 내렸다지만, 우리는 어떤 핑계를 댈 수  있을까. 설마 1960,70년대 잘살기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 던 새마을 운동 때의  밀가루 막걸리에 치기 어린 향수를 느껴가며,  한 때 남아 돈다는 쌀 때문에 집집마다  담아놓은 농주와 겨우 복원한 민속주를 금주령이란 미명 아래 없앨 수  있을까 말이다. 더구나 막대한 재정수입을 포기하면서까지...
 오히려 술  때문에 모진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아니면  몇 개 안되는 세계 1위  자리를 선뜻 양보하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위스키의 본고장인 영국에서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양주 수입국, 둘째 가 라면 서러워할 1인당  술 소비량, 음주운전 적발과 그로 인한  사고가 가장 많은 나라. 고려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실정이다. 그럼 고려정부는 술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적절히  이용했을까. 지금처럼 주세를 국가의  주요한 재정수 입으로 삼았을까. 또 금주령은  무슨 이유로 내렸을까. 이에 대해 애주가들은 어 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다.
 고려시대에는 양온서라는  관청을 두어 행사에 필요한  술과 감주를 관장하였 다. 양온서는 장례서.사온서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으며,  사온서는 조 선시대까지 계속  존속하였다. 983년 (성종2)에는  성례. 낙빈. 연령.  영액. 옥장.
 희빈 등 6개의 주점을 설치하였다. 사람과  물물의 유동량이 많은 개경의 번화가 등지에 주점을 설치하여 술을 판매하였던 것이다.  국가에서 주점을 설치하여 술 을 관장한 이유는  다점.역원 등과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대민정책과 정보수집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아울러  주점은 화폐유통에도 활용되었다. 이것은  1002년(목 종5) “차. 술. 음식 등의 점포들이 교역을 할 때에는  화폐를 사용하라”고 한점 에서 짐작할 수 있다. 숙종때에는 해동통보를  유통시키면서 중앙과 지방에 술을 관장하는 관청을 설치하였다.  이 때 송나라처럼 술의  전매제가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였을 것이다.
 한편 국가에서는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다. 금주령은 홍수나  가뭄등의 자연재 해로 곡식이 부족하거나, 나라에 대상이 있어 자숙해야 할 때 내려졌다. 또한 절 이나 승려가 술  때문에 폐단을 일으킬 때에도 금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소주를 사치품목으로 여겨 금지한 일도  있었다.심지어 원간섭기에는 원나라에서 금주령 이 내려지자 고려 정부에서도  하는 수 없이 이를 실시한 적도  있었다. 즉 국가 행사인 성절일.팔관회.연등회 등을  제외하고는 사사로이 술을 만들어 마시는 무 리는 처벌하였고, 누룩까지도 값을 치루어 거둬 들여야만 했다.
 이렇게 내려진 금주령은 관료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큰 불편이 아닐 수 없 었다. 술에 취해 돌아오다가 야경꾼들에게 들켜 곤욕을 치룬 이규보는, ‘나라에 서 농민들에게 청주와 쌀밥을 먹지 못하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라는 시에서 이 렇게 불만을 토로하였다.

 장안의 부유한 집에는 술과 패물이 산같이 쌓였는데
 절구로 찧어낸 구슬 같은 쌀밥을 말이나 개에게도 먹이고
 기름처럼 맑은 청주를 종들도 마음껏 마시네
 이 모두 농부에게서 나온 것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로세 ...
 희디 흰 쌀밥이나 맑디 맑은 청주는
 모두 이들의 힘으로 생산한 것 
 하늘도 이들이 먹고 마심을 허물치 않으리 
 권농사에게 말하노니 법령이 혹 잘못된 것 아니요
 높은 벼슬아치들은 술과 음식에 물려 썩히고
 오랑캐들도 나누어 갖고는 언제나 청주를 마신다오
 노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데 농부들은 어찌 못 먹게 하는가
 말이나 개에게 쌀밥을 먹이고, 종들에게 청주를  마음껏 마시게 하면서도 매일 같이 힘들여 일하는 농민에게는  그들이 생산한 흰 쌀밥, 맑은 술  한 번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개탄한 것이다. 금주령을 내렸지만, 힘없는 사 람이나 피해를 당했을 뿐, 권세가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현실은  고려말 윤여형이 <상률가>에서 농민들의 참상을 절실하게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고위 관료와 부호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조세를 이 중 삼중으로 물리며, 그들의 집에서는 하루 먹는 것이 만전어치나 되고, 그 좋은 음식들이 모두 다  촌 늙은이 눈 밑의 피인  줄을 그들이 어찌 알기나 하랴마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던 우리네 삶은 아직도 그대로이다.

  술에 얽힌 사연도 가지각색
 술은 예로부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백가지  약의 으뜸’이라 하는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광약’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는 약주가 되고 위 로주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술 때문에 몸을 해치고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있고,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치는 위정자도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가전체 소설인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이러한 술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국순전>은 무인정권  때 현실에 대한 불만과  포부를 토로하며 지내다 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은 임춘이 지은  것이다. <국선생전>은 한 세대 정도 차이가  나는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그는 만년에 시. 거문고와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 선생이라고 불린 주성이었다.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형식상 인간과 술의 관계를 통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조명해 보고자 한 점에서  비슷한 체제를 갖고 있으나 약간의 차이를 보 인다. <국순전>은  인간이 술을 좋아하게 된  것과 때로는 술  때문에 타락하고 망신하는 형편을 풍자한 것으로,  당시의 국정의 문란과 병폐, 특히 관료들의 발 호와 타락상을 증언하고 고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국선생전>은 신하 는 군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이상을 바르게 실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신하가 총애를 받게 되면 자칫 방자하여 신하의 도리를 잃게 되고, 국가나 민생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자신의 몰락까지 자초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굳게 지켜야 하고  때를 보 아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작품을 남기면서도 서로 상반된 삶을 살아간 임춘과 이 규보의 행태는 지금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지식인들은 무인정변 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느냐 죽느냐, 농민의 힘겨운 외침을 외면할  것인가 하는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임춘이나 이규보 역시 생활고와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무인정권에 순순히 젖어들었다.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자신들의 그러한 처 리를 반영한 작품이다.  따라서 그 주인공은 바로 현실에 순응한  임춘과 이규보 자신이었고, 현실에 순응한 삶은 단술과 쓰디쓴 술, 텁텁한 술 그 자체였다.
 어느 분석에 따르면, 역사의 흐름을 직. 간접적으로 변화시킨 쿠데타의 음모와 그 주위에는 항상 술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반대파의 요주의 인물을 꼬득이거나 고립시키기 위하여 주지육림의  질펀한 향락을 베풀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국 한하여 보더라도 일대사건인 무인정변의  연원이 술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 을 정도다. 의종의 향락,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김돈중의 취기, 무인의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 그리고  최후 승리자의 축배를 위하여 술은 분명  필요하였을 것이 다. 그러나 술은 권력을 휘두르는 집권층과  사치를 일삼는 귀족층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술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연인들 과 생활고에 지칠대로 지친 일반민의 위안이자 벗이었다.
 
 음주문화 소묘
 고려인들은 술을 어떻게 마셨을까? 송나라 사신  서긍은 그의 견문록인 <고려 도경>에서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되  좋은 술은 얻기가 어렵고, 서민들이 마 시는 것도 맛도  싱겁고 빛깔도 탁한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맛있게 마신 다.”라고 하였다. 또 “안주로는 말린 고기와 해산물을 섞어서 내오지만 풍성하 지 않고, 술을 마실 때 잔 돌리는 절도가 없으며 많이 내오는 것을 힘쓸 뿐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사람인  서긍의 눈으로 고려의  음주 습관을 표현한 것일 따름이다. 술에 얽힌 일화 가운데 주목되는 것으로, 과거 합격자 출 신의 관원을 우대하며 결속을 다지는 문주회가 있었다.
 옛 풍습에 문주회가 있으면 삼관의  관원들이 큰 술잔을 잡고 술을 가득히 따 르며 선생을 부른다. 고관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관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했다. 그 모임에  참여한 자는 비록 달관  귀인이라 할지라도, 홍지 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이라  불렀다. 이 풍습은 고려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지금의 회식과 같은  절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참여할 경우,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이라 불 러 구별하였다. 또한  충렬왕 때는 ‘구직주’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이행검이  고밀의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았는데도, 술 잘  빚기로 소문난 고밀의 처가 매번 술로 아첨하여 벼슬을 얻었다는 것이다.
 권세가나 지체 높은 관리가 마셨을  그런 술과는 달리 서민들과 밭에 거름 주 는 일꾼들은 잠시 쉬어 가며 아무런 부담없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쉽게 빚을 수 있는 막걸리를 마셨을 것이다. 계와 결사의  모임인 향도들도 남녀노소가 차례대 로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결속을 다진 일도  있다. 그 힘든 생활 속에서도 잠깐 의 여유를 가지고 마셨던 이 술은 분명 새로운 세계로의 동경과 함께 삶의 질을 재생산하는 활력소가 되었음직하다.  술은 바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으 며, 여기에 술의 참모습이 담겨져 있다.

 고려장은 과연 고려시대 장례풍속이었나 이우석(건국대 박사과정)
 전설의 진위
 상장례를 전공하지 않더라도  고려시대 전공자라면 한번쯤 ‘고려장’에 관한 질문을 받는다. 고려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당연히 고려의 풍습일  것으로 생각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은 ‘늙은 부모를 산  채로 내다버리던 악습’이다. 이렇듯 고려시대  장례풍속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어  있는 고 려장의 실체는 무엇일까? 다음 이야기를 보도록 하자.
 옛날에 늙은 노인을  산중에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 어느 노인이  나이가 70세 가 되자 아들이 늙은 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약간의 음 식과 지고  왔던 지게를 놓아둔 채  되돌아오려고 했다. 그러자 그를  따라 왔던 어린 아들이 그 지게를  다시 지고 왔다. 그는 아들에게 왜  지게를 가지고 오는 가를 물었다. 아들은  “아버지도 늙으면 이 지게로  버리려고요”라고 대답하였 다. 그 말에 크게 뉘우치고 늙은 아버지를 다시 집에 모셔와 잘 봉양하였다.
 이 이야기는 고려장에  관련된 여러 가지 설화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중국 <효자전>의 원곡이야기와 비슷하다.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는 점에서 효의 윤리를 확산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인 듯하다.
 또 다른 형태의  이야기도 전한다. 국법을 어기고 숨겨 봉양하던  늙은 부모의 지혜로 국가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자, 이를  계기로 고려장을 폐지했다는 것이 다. 이는 불교경전인 <잡보장경> 기로국조의 설화와 유사한데, 이러한 이야기가 수용 확산되면서  기로국이 고려국으로,  기로의 풍습이 고려장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면서 고려장이 실재한 것처럼 믿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장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며, 고려시대의 장례제도는 더욱 아니다. 고려장의 모습을 전하는  당대의 자료나 이를 해명하는 고고학적 성과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장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되어 영화로,소설로, 때로는 불효가 판치는 각박한 세태를 비판하 는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속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고려시대는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아 들과 손자가 호적과 재산을 달리하고 공양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징역 2년에 처한 다.”고 하였고, 또 “부모나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는 자는 징역 3년에 처한다.”고 법률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부모 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늙은 부모를 내다버리는 풍습이 있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관리들도 화장을 했다는데
 고려사회에서는 매장과 화장이  사제 처리 방식으로 널리  이용되었고, 가난한 사람 중에는 간혹  풍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장법은  국왕, 관리, 일반 인 등 사회계층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데, 편의상 관리의 경우부터  먼저 살펴보 자.
 고려시대의 묘지에 의하면, 이 시기 지배층은 화장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화장은 불교용어로 다비라고  하는데,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불교식으로 마무리 함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유고식 사당이 없었으므로  사원이 상제례를 행하는 장 소로 활용되었다.  사원에서 임종을 맞은  경우뿐만 아니라 집에서  임종을 맞은 경우도 빈소를  사원으로 하는 예가 많았다.  이 때 사원 근처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거둬 사원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올린다. 어느 정도 시일이 지 나면 유골을 묻는데, 사망에서 유골의 매장까지 걸리는 기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유골은 골호나 석관에 담아 묻었는데, 신라 통일기에는 골호를 주로 이용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석관을 널리  사용하였다. 석관은 대개 1미터 미만의 작은  판석 6 매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불교식 의례는 사망일로부터 49일이 되면 사십구제를 올리고 100일이 되면 백 일재를 올린다. 장례를 치룬 사원 근처에 묘소를 쓰기 때문에, 이 사원은 장례가 끝난 뒤에도 원당이 되어 해마다 기일재를 치르는 곳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 다. 이러한 재를  준비하기 위한 비용은 자녀들이 공동으로 마련한  기금을 운용 하여 생긴 이익으로 충당하였다.

  딸도 아들과 동등하게 제사에 참여
 상제례 비용은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부담하였는데, 이는  이들이 부모로부터 균등하게 상속을 받는 고려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다.  당시에는 딸도 아들과 동 등하게 생각하였으므로 딸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양 자를 두어 후사를 세울 필요가 없었고, 자식이  없는 경우에도 사원에서 대신 제 사를 주관하였으므로 자녀가 없어도 세계가 단절되었다는 두려움은 없었던 듯하 다. 물론 이런한  사생관은 불교의 윤회사상이 고려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 음을 짐작케 한다.
 
 고려시대 장례풍습 이모저모
 일반 서민의 경우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 체로 관도 없는  구덩이에 시신을 매장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는  사체를 그 대로 땅에 두고 그 위에  풀을 덮어 인적이 없는 산야에 방치해 두는 풍장이 간 혹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인종 때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다녀간 서긍은 <고 려도경>에서,“만약 가난한 사람이 장사  지내는 기구가 없으면 들 가운데 버려 두어 봉분도 하지 않고 비석도  세우 지 않으며 개미나 까마귀나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 두되,모두  이를 그르다고 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풍장의  모습을 기 술하고 있다. 1124년(인종2)에는  가난하여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경우 관청에서 장례비용을 지급하여 주도록 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화장을 한 후에 재를 산이나 강물에 뿌리는 방법이 있었다. 1389년(공 양와1) 사헌부 상소에, “요즈음  불교의 화장법이 성행하여 사람이 죽으면 시체 를 뜨거운  불꽃 속에 넣어 장사를  지냅니다. 모발을 태우고 피부를  익혀 뼈만 남기는데,심한 자는 뼈를 태워 그 재를  날려서 물고기와 새들에게 보시합니다” 라고 하는 것처럼 종교적 이유로 산골을 한 듯하다.
 국왕의 경우 실라 통일기에는 화장하기도 하였으나 고려에서는 대체로 매장을 하여 성대한 분묘를 만들었다. 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자궁이라 하고, 자궁이 묻 힌 곳을 능이라  부른다. 왕릉은 죽어서도 왕실을 보위한다는 관념에  따라 도성 주변에 석실분으로 조성하였다.  석실의 벽면과 천정에는 성신도, 사신도등의 벽 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로 남향을 하며 왼쪽에는 청룡, 오 른쪽에는 백호를  이루는 언덕이 있고  뒤쪽에는 주산이 있으며,  능 오른쪽에서 시작해서 능 앞을 흐르는 시내를 끼고 있다.  능 주위에는 12지신상의 호석과 여 러 석물들을 배치하였다.
 “공후 이하는 3일이  되면 장례한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 은 신분에 관계 없이 3일이 지나야 장례를  치를 수 있는 하한의 설정일 것이다.
 이 기간은 죽은 사람의 소생을 바라는  상제의 소망을 담고 있으며,현실적으로는 장례 도구도 갖추고  먼 곳의 친척에게도 알리는 준비기간이라 할  수 있다. 3일 이후에는 장례기간의 제한 규정이 없는데, 묘지명에  길면 2~3년에 이르는 등 매 우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고려 전기에 비해 후기로  내려올수록 사망부터 매장까지의 기간이 단축되는 경향을 보인다. “옛적에  부모의 장사날을 멀리 정 하는 것은 예장을 하기 위함이었는데, 지금은  사대부들이 삼일장을 하니 완전히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다”라는 1339년(충숙왕 후8)의  기록을 보면 후대에는 3일 장도 유행하였던 것 같다.

  묘지는 어떻게 정했을까
 고려시대에는 화장과 더불어 매장이 사체의 처리방식으로 널리 이용되거 토광 묘나 석곽묘에 목관을  사용하였다. 976년(경종1)에는 문무양반의 무덤에 대해 1 품은 사방90보, 2품은80보, 높이는 각각1장6척이며, 3품은70보에 높이는 1장이고, 4품은60보, 5품은50보,  6품 이하는 모두 30보로  하되, 높이는 각각  8척을 넘지 못하게 하여 신분에 따라 차등 있게 규정해  놓았다. 매장과 매골의 경우엔 장사 지낼 때 지석을 무덤  근처 남쪽에 묻게 되어 있다. 지석을  묻는 이유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후손이 조상의 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더불어 묘 주인의 생시의 행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에는 지석의 재료로 검은 빛을 띠는 돌인 오석을  많이 이용하였는데,조선시대에는 도자기 기 술의 발달로 저렴한 자기로 만든 지석을 널리 이용하였다.
 그런데 묘지는 어떻게  정하였을까? 고려에서는 불교 외에도 풍수지리설이 유 행하였다. 풍수는 장풍득수에서 유래한 말로, 바람을 잘 막아내고 물을 넉넉하게 얻을 수 있는 곳에는  땅의 생기가 모여 있어, 이러한 생기를  얻으면 사자의 자 손이 번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생기가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가 족의 묘를 같은 묘역에  쓰지 않고 따로 장지를 택하여 묻었다.  또한 장례 후에 도 이장이나  개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묘지풍수에 의하면 조상의  묘를 길지에 쓰면 복이 생기고 흉지에 쓰면 재앙이 생긴다고  한다. 재앙을 피하고 복을 구하 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에 집안에 불상사나 환자가 생기면 묘지가 좋지 않다 고 믿고 새로운  길지를 찾아 개장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묘지에  습기가 많거나 해충의 피해를 입는 곳이면 불가피하게 이장을 할 수밖에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는 복을 바라는 후손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면 더욱 기승을 부려 한정된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묘지를 잡으려 하였기 때문에 묘지에 대한 소송인 산송이 큰 사회문제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임익돈(1163~1227)의 묘지명에, “우리  나라에는 조상을 남북 또는 동서로 줄 지어 묻는 족분의 법이 없어 각각 땅을  점쳐서 장사 지낸다”라고 하듯이, 고려 시대에는 족분 곧  가족묘지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이러한  족분의 부재는 고려사회가 조선시대와 달리 부계  중심의 종법 원리가 작용하는 친족이 조직화 되어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고려 후기가 되면  지배층의 묘지를 선정하는 데 새로운 경향이  나타난다. 고 려 전기에는  귀족들이 다른 지방에서  사망하였을 경우에도 반드시  서울(개경) 주위의 경기지역으로  매장지를 정하였다.  이에 비해 무인정권시기에  들어서면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한 인물들이  경기에 국한하지 않고 주로 자기 고향이나 연고 있는  곳에 장지를 정하였다.  이로부터 지배층의 매장지는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더불어 무인정권기까지 한 가문의  집단묘지 즉 족분이 존재하 지 않았는데,  후기가 되면서 한 가문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같은  묘역에 묘지를 정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 오면 부부도 같은  묘 안에 함께 묻는 합장이나  같은 묘역 안에 묘소를  달리하여 묻는 부장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변화들은 고려 지배층이  후기로 갈수록 재지세력화하는 경 향을 보여 주는 역사적 추세의 반영이며 또한  충렬왕 이후 고려에 전래, 수용된 성리학적 예제 보급의  영향이었다. 더 나아가 고려 말기에 이르면  정치적 실권 을 잡은 유자들은  불교의 다비법을 법률로 금지하였고 사대부층이 <주자가례> 를 실천하도록 적극 권장하였다.
 
 고려시대에도 3년상이 있었을까
 985년(성종4)에는 상복착용의 기간을  5등급으로 나눈 오복제도를 마련하였다.
 고려시대의 오복제도는 중국의 것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조선시대와 달리 상대 적으로 간략하게 구성되었으면서도,  부분적으로 친족에 따른 상복  착용의 기간 을 다르게  규정하고 있다. 오복은 친족의  대상에 따라 입는  상복을 참최(3년), 자최(3년,1년), 대공(9월), 소공(5월),시마(3월)로 구분한 것이다.  참최 3년과 자최 3년은 자식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입는  복제이다. 3년상은 초상  후 1년이 되는 소상과 2년이 되는 대상, 그리고 대상  후 두달 만에 지내는 담제를 포함해 실제로는 27개원이 된다.
 중국의 <의례>나 조선의  <경국대전>에 외할아버지를 위한 상복은 소공 5월 로 되어 있는데, 고려는 자최 1년으로 높였으며, 처부모를 위한 상복도 시마 3월 로 되어 있으나,  고려에서는 소공 5월로 높이고 있다.  1184년(명종14)에는 처부 모복을 자최 1년으로 더욱 높이고 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몇 년간 신부의 집에서  머물러 생활하는 결혼풍습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처부모 와의 관계가 돈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상황이 복제에 반영된 것이 다.
 원래 부모의  상을 당하면 관리는  관직을 그만두고 상례를  집행해야 하는데, 고려시대에는 관리들에게 참최 3년과  자최 3년은 각각 100일, 자최 1년은 30일, 대공 9월은 20일, 소공 5월은 15일, 시마  3월은 7일의 휴가를 주었다. 또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각1일,  대상, 소상제에 각 7일, 담제에 5일의  휴가를 주어 3년 상이 허용된 오복제도의 취지는  벼슬살이를 통해 경제생활을 운영해 나갈 수밖 에 없는 사족을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3년상은 오복제도가  마련되기 이전인 광종 때(950에서  975)에도 자율 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유방헌은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상을 마치고 있다. 그 러나 3년상은 당시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이와 더불어 주모되는 것이 여모이다. 여묘란 분묘를 상주가 3년간  보살피는 것으로 수묘 또는 수분이 라고도 하였다. 전기에는  노비에게 분묘를 지키도록 하고 3년이  지나면 양인으 로 신분을 상승시켜 주기도  하였다. 그만큼 여묘 3년은 고된 일이었다. 고려 중 기가 되면 상주가 직접 부모의 분묘를  돌보는 기록이 보이는데,국가에서는 이러 한 여묘자에게 정문을 하사하여 그 효행을  기렸다. 이렇듯 집에서 행하는 3년상 이나 부모의 분묘 곁에서 행하는 여묘는 지배층에게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관인들은  부모상에 따른 100일 동안은  휴가에 따라 백일만에 상복을 벗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00일의 휴가는 본래  관직자를 위한 것이엇으나 사회지 도층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100일만에  상복을 벗자 재야시족들이나 서민들도 이를 추종하게 되었던 듯하다.
 국왕의 장례라고 하면  매우 엄숙하고 까다로운 의식을  떠올리기 쉬운데,고려 사람들은 국상에 대한 의식을 제정하지 않고 임시로 고전을 참고하고 전례를 인 용하여 장례를 치렀다.  고려 국왕의 장례는 중국 한나라 이후  일반적으로 왕실 에서 사용되던 이일역월제를 채택하였다.  보통 역월제라고도 하는 이일역월제는 27개월로 끝나는 유교식 3년상을  달을 날로 바꾸어 27일 만네 끝내는 단상제인 데, 이는 왕의 승하에 따른 정치적 공백을  최소화하여 왕권의 안정적 계승을 위 한 조처였다. 능에 장사 지낸  3일 후에 상복을 벗는데, 그 동안 종실 관리 백성 등은 검은 갓에 흰  상복 차림을 하였다. 소상이 되면 혼전  또는 우궁이라 불리 는 곳에 모셔 오던 왕의  초상을 사원으로 옮기고 대신 그곳에는 신주를 안치하 여 아침 저녁으로 음식을 올렸다.  그리고 대상이 되면 혼전의 신주를 태묘(후의 종묘)로 옮겼다.
 
  인간을 생각하는 마음이 살아 있는 상장례
 통과의례 가운데 하나인 상장례는 흔히 보수적 성격이 강하여 변하지 않고 오 래 유지된다고 한다.  통시대적으로 볼 때, 고려시대는  사찰에서, 조선시대는 사 당에서 상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현대의 도시생활에서는  병원의 영안실이 그 기 능을 넘겨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는 결혼예식장처럼 장례식장이 건립되어 이 곳에서 장례의식을  치른다고 한다. 또한 늘어나는 묘지로 인해  전국토가 공 동묘지화 되는 추세에 직면하여 국가에서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매장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화장하여 가족 납골당에 안치하는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전 통사회에서 사회통합 기능을 수행했던 복잡한 장례의식들의 변화는 급격히 변모 하는 현대산업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이지만  그 의식 속에 담겨 있었던 인간존중 의 정신은 되새겨 볼 일이다.
 
 사회생활의 테두리
 원님이 없어도 고을은 돌아간다 윤경진(서울대 강사)
 지방행정의 기본모습
 현재 우리 나라 지방행정구역의 기본단위는 군이고,  모든 군에는 군수가 임명 되어 행정책임을  맡고 있다. 대도시에는 구가  있으며, 구청장이 군수에 해당한 다. 군수와 구청장 밑에는 군청.구청에 속한 지방공무원들이 행정실무를 보고 있 다. 한편 군 위에는  도라고 하는 중간행정구역이 있으며, 대도시의 경우는 특별 시.직할시가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이다. 여기에는 도지사 혹은 시장이 임명되 어 있다.
 이러한 지방행정의 모습은  사실 옛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지금은 지방행 정단위의 명칭이 군과 구로  통일되어 있지만 고려시대 지방행정의 단위가 되는 고을은 격에 따라 주.부.군.현등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을 통틀어 군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 군현에는 목사나 지군사,현령같은 다양한 명칭의 지방관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수령이라고 하였다. 명칭은 조금씩 다르 지만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군현 위에는  도라고 하는 중간행정구역이 있었다. 조선에는  8도가 있었 으며, 고려에는 5도. 양계. 경기라고 하는 세가지 형태의 중간행정구역이 있었다.
 5도는 조선의 8도와  비슷한 행정구역으로서 안찰사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고려 의 5도는 안찰사가  돌아다니면서 수령을 감독하는 순찰구역을 뜻하는 것으로서 조선의 8도만큼 뚜렷한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일반  행정업무는 중앙정부 와 각극 군현  사이에 직접 전달되었으며, 경.목.도호부 등  계수관이 부분적으로 중앙정부와 군현을 연결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양계는 지금의  평안도와 함경 남도 및  강원도 동해안 지역으로서  군대 지휘권을 가진  병마사가 파견되었다.
 그 밑에는 일반 군현과는 다른 방어주와  방어진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방어사와 진장이 임명되었고 국방을 위해 많은 수의  군사가 배치되었다. 경기는 중앙정부 기관인 상서도성에  직접 속해 있는  군현들로서 수도 개경에  필요한 물적.인적 자원을 공급하는 역할을  띠고 있었다. 5도. 양계. 경기는 조선이  건국된 후 8도 로 개편되었다.
 이처럼 고려 지방행정의  모습은 조선시대나 현재와 유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볼 때 조선시대나 현재와 크게  다른, 그리고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특징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고을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지방행정단위마다 각기 행정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임명되다는 것은 지극히 당 연한 상식이다. 그래야 해당 행정단위의 운영에  대한 책임소재가 분명해지기 때 문이다. 조선시대에도 물론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는 일부 군현에만 수령이 파견되었다. 그렇다면  고려는 어떻게 지방행정을 처리 하였을까?
 
 수령이 없는 고을
 고려의 군현수는 시기에  따라 다소 변동이 있지만 <고려사>지리지에 수록된 군현수는
 500여개가 넘는다. 그런데 고려의 지방행정이 정비된 1018(현종9)에 수령이 파견 된 군현은 116곳에 불과했다. 그나마 국방을  위해 수령이 집중적으로 파견된 양 계 지역을 제외하고 보면, 나머지 일반 군현에  파견된 수령의 수는 더욱 적어진 다. 곧 수령이 파견된 군현보다 파견되지 않은 군현이 몇배 많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군현을 속현또는  임내라고 불렀으며, 수령이 파견된 군현을 통해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속현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지만 수령이 파견된  군현과 다름없는 독자적인 행정구역이었다. 속현도 인구  규모에 따라 향리의 정원이 정해졌고, 지방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인 공해전시도 나누어 받았다.  세금을 거두거나 노역을 동원 할 때도 별개의 단위가 되었다.
 수령이 파견된 군현에는  많게는 20여 개 이상, 적게는 3개  내외의 속현이 배 정되어 있었으며,  수령은 관할 내에 있는  속현들의 운영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우선 수령은 관할 속현들을  둘러보면서 지방사회의 정세를 파악하고 주요 업무 를 처리하였다. 가장 주된 업무는 권농과 세금징수, 감창(재정감독), 재판 등이었 다. 매년 봄이 되면 ‘행춘’이라 하여  수령이 속현지역을 둘러보면서 권농활동 을 폈다. 권농은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것인  동시에 지방사회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지방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였는데, 속현까지  그 대상이 되었던 것 이다.
 수령은 속현의 세금납부까지 감독하였다. 그런데 속현은  대개 규모가 작은 편 이었고, 국가에 납부할 세금조차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수령은 속현의 세금까지  책임져야 했으므로 수령이 재임하는  군현이 부담을 떠맡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 후기에 남원부사로 부임했던  이보림은 ‘제용재’라는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자로 속현지역의 세금부족분을 충당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대개 군현마다  한 사람의 수령을 파견할 뿐이었다. 아주  큰 고 을인 경우에만 판관이라는 보좌관을 보냈다. 이렇듯  고려시대에는 수령 한 사람 이 책임져야  할 업무가 너무 많아서  이러한 업무를 모두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려의 수령들을 여러 명의 속관을 거느리고 있었 다. 평양이나 경주 같은 큰 군현에는 판관,사록참군사,장서기,법조,의사,문사  같은 속관이 함께 파견되었고, 일반  군현도 한두 명의 속관이 함께 파견되었다. 속관 들은 목사나 지군사  같은 주임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속현 지역을 둘러 보는 것이 대표적인 임무였다.
 <동명왕편>으로 유명한 이규보는 전주의 속관으로 재직할 때 많은 시를 지었 다. 이 때 지은 시에는  속관의 업무가 잘 표현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를 인용하 면 다음과 같다.

 고을살이 즐겁다 마오
 고을살이 도리어 걱정뿐일세
 관아의 뜰은 시끄럽기가 시장 같고
 송사 문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네
 가난한 마을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감옥에 가득한 죄수들이 안타깝네
 입가에는 웃음 띨 날 없는데
 어떻게 태평하게 놀러다닐까
 고을살이 즐겁다 마오
 고을살이 걱정만 점차 새로와
 성낸 얼굴로 향리를 꾸중하고
 무릎 끓고 와의 사신에게 인사드리네
 속군을 봄마다 순찰하고
 신령한 사당에 기우제도 자주 지냈네
 잠시도 한가할 때 없으니
 어떻게 몸 빼낼 생각하리오
 (<동국이상국집>권9, 고을살이 즐겁다 마오)
 이규보의 시를 살펴보면 그는 향리들을 감독하고, 소송을 처리하고, 세금을 부 과하고, 죄수들을 관리하고,  속현을 순찰하고, 사신을 맞이하는  등의 업무를 보 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업무는 주임 수령의 업무와  차이가 없는 것이 었다. 곧 고려의 지방행정은 수령 아래에 여러  명의 속관이 여러 군현을 포괄적 으로 다스리는 형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속관이  있었다고 해도 몇  명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이들만으로 20여 개가 넘는 군현을 관할한다는 것은 자칫 행정적인  공백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운영형태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각 군현마다 읍사가 있어서 행 정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읍사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 던 향리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지방사회 운영의 실제 담당자, 향리
 춘향전을 보면 사또(수령)  변학도의 명령을 받아 각종 업무를  처리하는 이방 등이 등장한다. 이처럼 수령 밑에서 각종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을 향리라 고 한다.  수령이 지금의 군수나 구청장에  해당한다면, 향리는 군청이나 구청에 있는 지방공무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향리라고 하면 춘향전의 이방처럼  수령의 비위나 맞추는 인물을 연상하게 된 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그 지위가 크게  떨어진 조선 후기의 향리를 소설적으 로 표현한  것이며, 실상과는 거리가 있다.  더구나 고려시대에는 그처럼 지위가 낮은 것도 아니었다.
 고려시대의 각 군현에는 수령이 파견된 것과는 상관없이 향리조직이 마련되어 있었다. 향리의 으뜸인  호장이라고 불렀으며, 그 다음이 부호장이었다.  그 밑에 는 호정.  부호정과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병정,  재정업무를 담당하는 창정 등이 있었다. 곧 군사와  재정이라는 행정의 중심체계가 향리조직안에  마련되어 있었 던 것이다. 이 조직이 곧 읍사로서 군현의  명칭에 따라 주사, 군사, 현사 등으로 불렀다.
 향리들은 군현의 구모에 따라 그 수가 정해져 있었다. 1018년(현종9)에는 전국 의 지방행정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향리의 정원도 함께  제정하였다. 큰 군현의 경우에는 호장8명을  포함하여 향리가 무려 84명이나 되었고,  아주 작은 군현에도 30명 내외의 향리가 있었다. 이 해에는 향리의 공복(관원들이 입는 옷) 도 등급에 따라 정해졌다. 그리고 1051년(문종5)에는 향리의 승진 규정까지 마련 하였다. 향리가  지는 의무인 향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으며, 그 대가로 중앙의 관리처럼 토지를 지급받았다. 이러한 조치들은 향리가  단순한 수령 보좌역을 넘 어서 실제 지방행정을 책임지는 존재였음을 뜻한다.
 그러나 향리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향리중에서도 호장. 부호 장 등 호장층은  자신들과 격이 비슷한 부류들과  통혼하였고 그 지위도 사실상 세습하였다. 그 아래의 향리들은  이보다 격이 크게 떨어졌으며, 말단 향리는 상 급 향리로 진출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향리들이 지방행정의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중앙정보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들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향리에 대한  통제의 일차적인 책임은 수령에게  있었다. 1018년에 제정된 수령의  복무규정인 ‘봉행6조’에서 는 향리에 대한 통제를 수령의 기본 업무로 규정하였다.
 고려시대 각 관청은 5일 간격으로 행정처리를  위한 회의가 열렸는데, 이는 지 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속현의  향리는 그 때마다 수령으로부터  명령을 시달받 고 관할구역의 동향을  보고하였다. 또한 속관들이 속현을  순찰하면서 수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능도 향리들의 활동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특징적인  제도인 기인제와 사심관제도 향리를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 따. 기인이란 향리의  자제를 뽑아 개경에 머물도록 하면서 인질의  효과를 냄과 동시에 이들을 통해  지방사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기인제는 고려 후기에 이르면 중앙관서에 땔나무를 납부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고역으 로 변질되었다.
 사심관제는 고려 초기에 공신들을  연고가 있는 군현의 사심관으로 삼아 부호 장 이하의 향리를 통제하도록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996년(성종15)에 군현의 규모에 따라 2-  4명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사심관은 연고지역의  향리와 결탁하 여 부정을 자지를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나 친형제가 호장으로 있을 경우 에는 사심관에 임명하지 않았다. 사심관은 처음에  친가 쪽에만 임명되었지만 점 차 범위가 확대되어 외가나 처가 쪽에도 임명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심 관은 세금의 수취과정에도 간여하여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 려말에 폐지되었다.
 
 속현의 감소와 향리지위의 변화
 고려는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민이 크게 늘어나고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새 로운 대책이 요구되었다. 특히 속현지역의 사정이 더욱 어려웠다. 이에 고려정부 는 여러 차례에  걸쳐 속현에 감무를 파견하여 유민을 안정시켰다.  감무가 대량 으로 파견되면서 대신 기존의 속관들이 크게  감축되었다. 그리고 지방사회의 운 영도 점차 개별 군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따.
 한편 원 간섭기에 들어오면서 국가재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세금을 내지 않는 농장이 증가하였고, 원나라에 보내야 하는 공물과  일본정벌을 위해 내놓아야 했 던 군비의 부담이 컸다. 이를  채우기 위해 지방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각 군 현은 보다 많은 세원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수령은 속현의 세금납부까지 책 임지고 있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오히려 속현을 수탈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의례적으로 군현의 격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외적의 침입을 격되한 군현이나 공신. 왕비를 배출한 군현, 국왕의 태를 묻은 군현은 그 격이 올라갔다. 속현인 경우에는 수령을 파견하였고,  현은 군으로, 군은 주로 승 격하였다. 그 결과 군현의 격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어 각 군현은 격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격이 높아졌다고 해서 토지나  인구 면에 서 그에 걸맞는 규모를 마련해  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군현 사이에는 이를 마련하기 위한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원종 때 예천군의 향리였던  임지한은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우자 정부에서 관직을 상으로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상주의 속현이던 다인현을 옮겨 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다. 또한  영해부는 동여진이 침입했을 때 성이 함락된  벌로 격 이 강등되고 속현이던 보성부는 복주(안동)로 이속되었는데, 뒤에 향리인 박성절 이 정부에 호소하여 돌려받은 일도 있었다.
 한편 우왕 2년 예안현은 당시 권세가인 지윤에게 뇌물을 주고 우왕의 태를 묻 었다. 그 결과 안동의 속현이던 예안현은  군으로 승격하면서 수령이 파견되었으 며, 나아가 안동과 땅을 다투게 되었다. 이에 안동은 예안현이 태를 묻기에 적합 하지 않다고 조정에 보고하면서 두 군현의 갈등은 중앙 정계의 분쟁으로 비화되 기도 하였다.
 이처럼 속현을 차지하기 위한  분쟁이 발생하면서 속현은 점차 예속적인 위치 로 변질되어  갔다. <고려사>악지에 수록된  <동경>이라는 가요에서는 동경(경 주)과 속현인 안강현 사이의  관계를 군신관계나 부자관계에 비유하였는데, 그만 큼 속현은 예속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예속의 정도가  깊어지면서 속현 은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서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에 조선 초기에는 부득이 한 경우 외에는 속현을 전부 없애고 직할  촌락으로 만들었으며, 남아 있는 일부 속현도 공해전을 폐지하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통합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속 현으로 유지되다가 16세기에 이르면 거의 소멸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지방행정도  점차 향리중심에서 수령중심으로  바뀌었다.
 조선이 건국된 후  정부는 많은 속현에 수령을 파견하는 한편,  향리들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법제화하는 등 수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향리는 종전과 같은  지위를 잃고 점차 수령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로 떨어졌 다.
 고려의 향리는 처음에 호장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었지만 고려 후기에 이르 면 향리조직이 점차 분화되어 문서  등 행정 실무를 보던 조문기관의 지위가 점 차 높아져  호장과 대등한 지위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수령의 업무를 보조하는 육방  중심의 향리조직이 마련되었다.  육방은 향리의 직책을 이.호.예.
 병.형.공 등 6개로 나눈 것으로서 중앙관서인  6조를 모방한 것이다. 수령의 관부 는 중앙정부의 축소판이었고,  수령은 사실상 국왕의 권한을  대행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한편 향리에게 지급되었던 토지도 모두 폐지되었고,  신분도 점차 떨어져 중인 신분으로 고착되었다. 고려의  향리는 과거를 통해 중앙관직으로  진출하는 경우 가 많았다. 지방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는 관리들의 상당수가 향리출신이었다. 그 러나 조선 초기의  향리는 과거를 통해 관직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사실상 막혀 있었다.
 지방사회 내부에서도 사족층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가 형성되면서 향리의 지 위는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고려말부터 중앙의  품관들이 지방으로 내려가 거주 하면서 유향소라는 자치기구를  두고 지방사회를 주도하였다. 이와  함께 향리들 은 재지세력으로서  힘을 잃고 수령의  권위에 기생하게 되었다.  별도의 급여를 받지 못한 채 수령의 부림을 받아야 했던 향리들은 행정 실무를 담당한 것을 이 용하여 농간을 부리고 민폐를 끼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우리가 고전소설이 나 텔레비젼 사극 등을 통해  익숙해진 향리의 모습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는 것 이다.
 
 호적은 어떻게 만들었나 채웅석(가톨릭대 교수)
 호적, 국가재배의 기본 자료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호적과 주민등록부에  등록하여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진다. 국적 변동 또는 형벌  등의 제한사유 가 없는 한,  교육, 선거 등의 권리를 누리게  되며, 납세.병역 등의 의무를 져야 한다. 이렇듯 호적과 주민등록부는 국민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법적 수단 이다. 동시에  국가는 국민을 파악하고  범법자를 가려내는 등  지배의 수단으로 이용한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국민을 등록하고 파악하는 수단도  정교해지는 경 향이 있다. 신분증의 경우 조선시대의 호패를 이어  도민증. 주민등록증 등의 형 태로 변화하였으며, 곧 운전면허증. 의료보험증. 은행카드  등과 겸할 수 있는 전 자카드 형태의 신분증이 나타날 보양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왕조권력의 지배력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가 호구의 등록이다.
 고려시대에도 건국 직후부터  호구를 조사하고 등록하여 지배하려  하였다. 당시 에는 오늘날처럼 호적과 주민등록부제도가 따로 있지 않고 호적 한 가지만 있었 다.
 호적을 작성한 목적은, 첫째로 호구를 파악하여 담세원을 확보하는 것이다. 호 적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16~59세 사이의 양인을 정이라 하여 국역을 부담하도 록 하였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호적제도와  국역 부과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라가 부강하냐 빈약하냐의 여부는 민이 많고 적은  데 달려 있고, 부역을 고 를게 하려면 민의  숫자를 세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러므로 민을  다스리는 직 책을 맡은 사람이 민을 길러서 번성하게 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면 민이 많아지게 된다. 그리고 호와 인구를 등록하여 그  증감을 살피면 민의 숫자를 잘 파악할 수 있고,  인구를 조사하고 장정을 계산하여 부세를 매기면  부역이 고르 게 된다. 이렇게 하면 위로는 일이 잘 풀리고 아래로는 소요가 일어나지 않으며, 나라는 부우해지고 민은 편안하게 될 것이다.
 그는 호구가  국가재정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정확하게 등록하여 파악해야만 국가의 토대를 충실하게  할 수 있으며, 동시에 민에게 부역을  공평하게 부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둘째, 호적은 개개인의  신분사항을 기재하여 신분을 확인하고  유지하는 수단 이었다. 양인과  천인을 구별하고, 양인에게는 관직과  역에 관련된 사항을 밝혀 기록하였다. 호적은 국역 부과 대상자를 파악하는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신분제 도를 꾸려 나가는 기초 자료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셋째, 호적은 국가가 기층사회를 조직하고 편제하는 근거가 되었다. 고려 초기 에 호적에 등록한 곳을 본관으로 부여하고 관의 허락없이 마음대로 이주하는 것 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행정력이  쉽게 침투할 수  있도록 지역공동체를 고려하면서 촌락지배조직을 편성하였다.
 이처럼 호적은 국가  지배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그런데 당시  호적에 등록되 지 않고 자유로이  옮겨 다니면서 국가의 부역을  부담하지 않았던 부류도 있었 다. 사냥. 도살업을 하거나 버들고리를 엮어  팔아 생활하였던 양수척. 화척이 바 로 그들이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할 때 제압하기 어 려웠던 자들의 후예라거나 우리와는 다른 북방민족계통으로 여기고 고려의 공민 으로 보지 않았다. 이렇듯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국역 부담에서 빠질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국가가 보장하는 법적 권리를 누릴 수 없었다.
 
 호구조사와 호적작성
 고려 건국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호적을 완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신라 말 기부터 각  지방에서 할거하였던 지방세력들을 단시일  내에 통합하고 집권력을 갖추기는 어려운 상태였기  때문에, 중앙권력의 의지대로 일시에  호구를 재조사 하여 등록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한동안 지방사회를  그 지역 지배세력의 자율적 지배에 맡기고 중앙권력은 간접적으로 지배할 수 밖에 없었다.
 936년(태조 19) 후삼국을  통일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광종 때에  어느 지역 에 “읍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기록은 당시 처음으로  그 지역을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삼았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호구를 파악하고 등록을 마 치게 되어 직접적으로 지배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전 왕조나 지방세력 들이 쓰던 호적도  있었지만, 그 동안 사회변화를 거치면서 현실과  차이가 많이 났으며, 그간의 변화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호적이 필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호적을 국가권력을 세우는  기초로 여기고 점차적으로 지방별로 공을 들 여 작성해 나갔다. 대개 성종대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파악을 완결하였을 것이다.
 호적을 한 번 작성한 다음에는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3년마다 다시 조 사하여 고쳤다.  이것을 식년성적이라 하였다. 그  밖에 부역의 징발과 관련하여 호구사항을 집계한 계장이라는  문서를 매년 작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호적을 보완하여 신분  계층별 등록부를 따로 작성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종 실을 대상으로 한 종적,  군반씨족을 대상을 한 군적, 수공업자를 등록한 백공안 독, 노비를 등록한 천적등이  있었다. 이러한 호적이나 여러 가지 등록부를 이용 하여 고려왕조는 인민을 정교하게 파악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
 호적을 작성하는  절차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각 호에서  가장이 가구내역을 밝힌 신고서 2부를  작성하여 올리면, 군현에서 확인한 다음 1부는  관에 보관하 여 호적을 고치는 자료로 삼고 1부는 돌려 주었다. 이것을 호구단자라고 부른다.
 단자를 수합하고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 마을의 이정 또는 촌장이 간여하여 정확 한지 여부를 살폈다. 만약 가장이 가족을  누락시키거나 나이를 속였으면 고의든 부주의 때문이든 처벌하였다.  역을 피하기 위하여 고의로 그랬을  경우에 1명을 속였으면 도형1년, 2명은 1년반이라는 무거운 형벌을 내렸다. 정확하게 확인하지 못한 이정의  경우도, 1명이 문제되면 태형40대,  7명이면 장형60대 하는 식으로 처벌하였다. 이렇게 만든 호적대장은 각 군현에  보관하고 부본을 중앙의 호부에 바쳤다.
 한편 호적에 등록된 사항을  관으로부터 증명받을 필요가 있을 때는 오늘날의 호적등본에 해당하는 준호구라는 문서를  발급받았다. 준호구는 과거시험에 응시 하거나 소송을 할 때 첨부자료로 사용하였으며, 자기 소유의 노비를 확인하거나, 신분이나 출신가문의 내력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도 사용하였다.
 
 호적의 내용과 특징
 호적에 기록하는  사항은 시대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가족이나 친족제도가 변함에 따라 기록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 는 것이다.  현재 국보 131호로 지정된  고려말기의 호적을 통하여  당시 호적의 기록내용을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1390년(공양왕 2) 이성계에게 하 사했던 노비 20구에 대한 호적과  그 이듬해 개경에 거주하던 30여 가구의 호적 으로 되어 있다. 이 호적에 등록된 한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호: 군기시승의 벼슬을 지낸 김영록, 나이46, 본관 금주
 부: 검교중랑장의 벼슬을 지낸 익려, 사망
 조: 검교호군의 벼슬을 지낸 김보
 증조: 사후에 좌우위중랑장의 벼슬에 추봉된 군식
 모: 조이, 본관 황려현
 외조: 학생인 이인
 호의 처: 우근이, 나이41세, 본관 울진
 부: 검교중랑장인 임천년, 나이67세
 조: 산원동정의 벼슬을 한 임고, 사망
 증조: 대상의 향직에 있던 임종, 사망
 모: 조이, 사망, 앞의 본관과 같음
 외조: 호장인 금음이
 자식: 1남 난우, 나이15
 호처의 어머니쪽에서 전래한  비 기지가 낳은 비  갓가의 딸인 비 사계,  나이 4 위와 같이 당시의  호적에는 호주와 처, 자녀,  동거인 또는 소유 노비와 같은 호구의 구성, 각자의 성명과 연령, 신분과 직역, 본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호주 와 처의 부모, 조, 증조, 외조에 대하여 성명과 신분.직역을 밝혔다.
 우선 조상을 많이  기록해 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어떤 경우에는 조모, 증조모의 부, 처 외조모의 부까지 맑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조상들을 추적하 여 밝힌 이유는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산을 기록하더라도 중국  당나라의 호적이 직역을 가진 자에 한하여 부, 조,  증조의 이름만을 기록한 것과는  달리, 고려에서는 모와  외조를 더하여 이른바 4조호구식을 만들어 관인층은 물론  일반 양인층의 호적에도 적용하였다.
 관인층의 일부는 더 확대하여 8조호구식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8세의 호 적에 노비 등  천류의 혈통이 들어 있으면 관직 진출을  금지하였다.이렇게 조상 을 추적하는 범위가 넓어진 까닭은 고려의  친족체계가,부계 중심의 중국와는 달 리, 부측과 모측에 거의 비슷한 비중을 두는 친족체계였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 에 중국의 여러 제도들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사회의 실정에 맞게 변경하여 사 용하였는데, 호적제도도 그러했던 것이다.
 기재내용 가운데 두  번째로 주목할 것은 본관을 기록한 점이다.  요즈음도 호 적에 본관을 기록하게  되어있다. 오늘날 본관은 부계중심의  사회질서를 유지하 는 수단이 되고 있으며,  본관으로 문벌을 표시하는 관행도 남아 있다. 그렇지만 본관과 거주지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본관지역에 대하여 아무런 연고의식도 갖 지 않는다.  흔한 오해 가운데  하나는 고려시대에는 문벌들만이  본관을 가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우리 역사에서  본관제도가 처음 나타난 것 은 고려 초기였다. 당시 호적을 붙여 등록한 지역이 본관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 날 우리가 사용하는 본관과 고려시대의 본관은  의미가 달랐다. 그렇다고해서 요 즈음의 본적지나 주민등록지 정도의 의미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국가는 본 관제도를 향촌과 인민에 대한 지배방식으로 이용하였다.  예를 들면 본관별로 차 별이 있었다. 일반 군현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과 향. 소. 부곡.  진. 역등을 본관 으로 하는 사람을  구별하였다. 후자를 잡척이라고 부르고, 국역부담이나 신분상 차별대우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민의 거주지 이동 을 통제하였다. 본관을 기준으로 호구를 파악하여 관의  허가를 받지 않는 한 거 주지를 옮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세 번째로 호적기재에  나타나는 여성의 지위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부계 친족제도가 발달하였던 조선 후기와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여성도 호주가 될 수 있었으며 자녀를 기록할 때는  남녀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연령순으로 기재하였 다. 위 사례에서 여성의  이름을 기록하는 난에 ‘조이’라고 쓴 것이 보이는데, 조이는 평민 이상의 여성을 이름 대신 표시할  때 사용한 이두였다. 평민층의 경 우는 이름을 직접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지배층의 경우에는 이름  대신 조 이라고 쓰거나 봉작명을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네 번째로 주목할  부분은 노비에 대한 기록이다. 노비는 호적에서  이름 앞에 ‘노’또는 ‘비’라고  신분을 분명하게  표시하였다. 주인집과는 별도로  호를 구성하는 외거노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주인을 밝혔다. 노비는  호적에 오르지만 양인과는 달리 4조화  본관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에  제시한 호적사례에 서 볼 수 있듯이 상속 받은 곳을 아버지측, 어머니측, 처측등으로 구별하여 밝혔 다. 이것은 상속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을 때 처리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였 다. 노비에게 남편과 부인이 있는 경우에는  그들이 양인인가 천인인가를 분명하 게 기록하였다. 만약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노비가 발각되면 공노비로 만들었다.
 그 밖에 연령을 기록할 때 오늘날에는 생년월일을 기록하는 것과는 달리 나이로 표시한 것도 눈에 뛴다.
 
 호적제도 운영의 한계와 변화
 고려시대에 전국적으로 호적에  올라 파악된 인구는 얼마였을까? 자료의 부족 으로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고려  중기에 인구가 210만 명 정도였다는 기 록이 있다. 그렇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숫자이고 실제인구는  대략 250만 명 이상  또는 300만명 내외였을 것으로  보인다. 호적상 파악되는  인구와 실제 인구는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호적제도 운영의 한계에서 비롯한 것이다.
 일반민의 입자이에서  보면, 호적에 등록되면 국가에  역을 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역이 과중하다고  여겨지면 피하기 위하여 호저에서 빠지려고 하는 경우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역 부담이 가벼운 지역에 있는 친척의  호적에 위장 하여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다른 지역으로 도망하여 역을  피하기도 하 였다. 이는 범법행위임에  틀림 없지만 권력이 수탈을 일삼을 때  자위수단을 갖 지 못한 민에게는 소극적인 저항으로서의 의미도 갖는 행위였다.
 역에서 빠지거나 부담을  덜기 위하여 호적에 기록된  내용을 변조.위조하기도 하였다. 신분  상승을 노려 평민이 양반으로,  천인이 양인으로 호적을 위조하였 다. 반대로 양인농민이 국가의 가혹한 수탈을  피하여 권세가의 농장에 예속민으 로 몸을 맡기기도  하였다. 권세가들이 농장을 확대하면서  예속노동력을 확보하 기 위하여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으로 만드는  사례도 많았다. 신분질서는 호적제 도의 문란과 함께 흔들렸다.
 이상과 같은 호적제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양한 위법.  저항행위들은 국가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특히 12세기 이후 정치행태가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부분 에 치중하면서 이러한 현상들이 크게 늘어나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호적제 도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여  지방관들이 관내의 호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 고, 역을 징발할 때는 뇌물을 받고 협잡을 벌이기 때문에, 세력이 있거나 부유한 자들은 면하고  빈약한 사람들만이 당하였다.  그렇게 되면 부담을  떠넘겨 받은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도피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호구를 다시 조사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위조를 막기 위하여 법령을  발표했다. 양. 천간에 신분이 위조된 것을 적발하여 본래대로 돌리기 위하여  ‘노비변정사업’을 여러 차례 시도하기도  하였다. 한 편으로는 조세부담층을  확보하기 위하여 양수척도 한  곳에 정착시키고 호적에 올려 양인화하려고 하였다. 민의 유망을 막기  위하여 우왕때는 요충지에 방책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그렇지만  고려사회의 모순은 이미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도들이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또한 호적제도를 본관 중심으로 운영하던 정책도  한계를 보였다. 많은 유망민 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을 때 그들 전부를 본관으로 강제로 돌려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향리와 같이 특수한 직역을  부담하는 계층은 여전히 본관을 중심으로  통제하였지만,일반민의 경우는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지 역에 그대로  등록시켜 지배하려고 하였다.  본관별로 차별하던 정책도  물론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웠다.
 
 출신지에 따라 인격이 다른 사회 박종기(국민대 교수)
 지역에 따라 인격이 다르다고?
 고려시대 사람들은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지위에 차이가 있었다. 주, 부, 군, 현 등 군현에 거주하는 사람을 군현인이라 하였다.  그 중 농업을 전업으로 하는 양인을 법적으로 백정이라  불렀다. 이는 도살업 등 천한 직업에  있었던 조선시 대의 백정과는 크게 다르다. 또 재산이 있고  관리, 군인, 향리 등 벼슬길에 오른 사람은 정호라 하였다. 한편 향,소, 부곡, 장, 처 등 부곡제지역에 사는 사람을 흔 히 부곡인이라 불렀는데,  이들을 법적으로 잡척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람들보다 훨씬 낮은 계층을 천민이라  했는데, 국가나 관청, 개인의 부림을 받았던 노비가 대표적이다. 천민은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받았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대개  거주지인 본관의 이름을 붙여  남경사람, 처인부곡사 람 등으로 불렀다. 언뜻 보기에  오늘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듯이 보인다. 그 러나 그 사람의 본관이  군현에 소속되었는지,부곡지역에 소속되었는지를 엄격히 따져 세금 부과여부와  관리 진출에 차별을 둔 관행이 있었다.  이는 조선시대와 다른 고려시대 특유의 사회제도였으며,  요즈음 사회통념상 어느 지역출신인가에 따라 일정한 편견을 갖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려시대에는 이같이 지역에 따라 사람의 격이  다르고,그에 따라 부담하는 세 금과 역의  내용이 달랐다. 이러한 체제는  지금 우리의 눈에는 천  년이라는 긴 세월의 간격만큼이나 생소하고  낯설게 보이지만, 이 또한 우리 역사  속에 엄연 하게 존재하였다. 특히 부곡제도는 고려시대 사회체제의  특징을 보여 주는 하나 의 상징이었다.
 
  부곡인은 어떤 사람인가?
 부곡지역의 사람들은 일반 군현의 농민과 같이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 중에서 향, 부곡, 장, 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국가, 왕실과 사원의 토지를 추가로 경작 하는 역을 부담하였다. 한편  소의 주민들은 금, 은, 먹, 종이,  소금 등이나 광산 물, 해산물이나 각종  수고업제품을 생산하는 역을 부담하였다. 국가에서는 이들 을 ‘여러 가지  특별한 역을 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모두 잡척층이라 하였 다. 정부는 부곡제라는 지방제도를 만들어,이들이 다른 직업으로 혹은 다른 지역 으로 이동하는 일을 제도적으로 제안했다. 출신지  거주지별로 사람들을 묶어 해 당 지역 행정단위의 격을 달리하여 여러 가지의 제약을 두었던 고려시대의 지방 지배 방신을 본관제라 하였다.
 부곡제도는 통일신라기부터 국가각 토지경작을 위해 주민들이 산간 오지나 벽 지에 들어가서 정착한  곳을 향과 부곡으로 파악하여, 군현의 하부  단위로 묶어 둔 데서 기원하였다. 이들은 소규모 촌락으로  국가나 지방세력에 예속되어 일반 군현에 비해 더한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관행이 고려시대에는 반왕조적인 세력 과 그들의 근거지를 부곡제로 묶어 일반  사람들과 차별하였다. 또한 고려시대에 도 농경지 확대를 위한 개간을 정책적으로  장려하였다. 이러한 개간과정에서 형 성된 촌락  역시 향과 부곡으로 파악하였다.  이들 주민에게 국가,  왕실, 사원의 토지를 경작하게 하거나,각종 수공업제품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 러한 다양한 과정을 통하여 부곡지역을 제도화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시대까지는  강력한 지방세력이 존재하였고 군현의 경계지 역에는 개발되지  않은 땅이 많았으므로  그만큼 개발의 여지가  많았다. 따라서 국가가 전국의 백성을 일률적으로 장악할 수 없을 정도로 지역간 계층간에 발전 의 격차가 있었다. 부곡제는 이러한 발전격차를 메꾸어 나가는 역할을 하였던,일 종의 사회적  분업체제의 하나였다. 부곡집단은  고려시태에 통틀어  900여 개나 되었다. 지역적으로 전체의 80~90퍼센트가  지금의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지역에 있었다. 군현이 500여  개였던 것에 비하면 아주  많은 수치였다. 이러한 집단은 군현에 묶여 행정적으로 지배를 받았다.
 고려 전기 부곡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각종  차별을 받았다. 부곡인의 역을 확 보하기 위하여 이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였고,결혼도  되도록이면 부곡인 끼리만 하도록 했다.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멀리 떨어진  지역의 둔전을 경작하기 위하 여 집단적으로 징발되기도 하였다.
 
 재상의 지위에 오른 부곡인들
 역사는 흐르는  물과 같다. 물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자연을  살찌우기도 하고 변화시키기도 하듯이,  인간의 역사 역시  하나의 변화하는 생명체로서  그 흐름 속에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고려의 부곡제도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려고 했던 사람들에 의하여 변화되었다.
 똑같은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났으나, 출신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 것이 바로 천 년 전 고려시대 사람들의 처지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오면 모든 사람 들이 적어도 출신지나  거주지 때문에 차별을 받지 않게 되었다.  부곡지역이 사 라지고 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법적 이념적으로는 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단순한 세월의 흐름이  이러한  변화를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출신지의 제약 을 벗어나려는 고려시대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과 용기있는 행동이 뒷시대 사람 들의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자양분이 되었다.  고려 후기 유청신과 박구의 사례 에서 주어진 제약과  굴레를 극복한 부곡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유청신은 고려가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시기인 원나라  간섭기에 살았던 사람이었 다. 그의 처음 이름은  비라고 하였다.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지역인 고이부곡 사 람이었다.
 우리 나라 제도에는 부곡의  향리인 부곡리는 국가에 공이 있어도 관직을 5품 이상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청신은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용기가 있었으며, 뒤에 몽고어를 익혀 여러  번 원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잘  처리했다. 이로써 충 렬왕의 사랑을 받아 낭장(6품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교서를 내려 말하 였다. ‘유청신은 조인규를 따라  원에 가서 힘을 다하여 공을 세웠다. 유청신은 부곡인 출신이므로  5품밖에 줄 수  없으나 그에게만은 3품을  허용하겠다. 또한 그의 고향인 고이부곡을 고흥현으로 승격시키겠다’고 하였다.
 부곡인은 기술직인 잡과에 응시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관리로 서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막혀  있었다. 관리가 되더라도 5품 이상으로 승 진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유청신은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3품직인 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몽고어를 잘 한다는  능력 하나로 출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고이 부곡이 오늘날의 고흥이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뒤에 충선왕이 다시 실권 을 장악한 다음 유청신은 재상이 되었다.  충선왕은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 머무르며, 국내의 정치는 측근인 유청신과 최유엄에게 맡겼다. 그만큼 당시 유청 신은 정치적으로 비중이  큰 입지를 점하고 있었다. 뒤에 충선왕이  실각하자 그 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고려를 원의 한 지방 지방 행정단위 로 편입시키자는 이른바 입성론을 제기하였다. 이  실책 때문에 조선초 역사가들 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유청신의 행적을 간신전에 기록하였다.  하지만 입 성책동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안은 계속해서  번성하였다. 아들 유기와 손 자 탁도 모두 재상을 역임하여, 3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고려 후기의 신흥 명 문가가 되었다. 탁의  아들들도 이성계에 의해 발탁되어  조선시대에도 명문가의 명맥을 이어갔다. 같은 무렵 또 한 사람의 부곡인이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박구 라는 사람은 지금의  울산에 소속된 부곡인이었다. 그의 선조는 장사를  하여 상 당한 재산을 모은 부자였다. 그는 재력을 바탕으로  벼슬길에 올라 충렬왕 때 무 반의 최고직인 상장군(정3품)이 되었다. 일본정벌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웠고, 그 뒤 출세를 거듭하여 재상이 되었다.
 
 출세에는 개인의 능력이 더 중요했었나
 유청신과 박구가 재상이  된 것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들은 능력도 있었지만 시대상황과 조건도 이들의 출세에  한몫을 하였다. 이들이 활동 하던 때에는 여몽연합군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정벌이 있었다. 또한 원나라에서 는 왕실의 권력투쟁  결과 내안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 잔당인  합단이 원나라 군사에 쫓겨 고려에 침입하였다. 그리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고려군이 출정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고려로서는 무인정권이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되었으나, 왕권은 여전히 불안하였다. 국왕은 군사를 파견하여 원나라를  돕는 대신 원나라의 지원 을 받아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충렬왕은 원나라의 일본원정에 적극적이 었는데, 거기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나름대로의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일본정벌과 내안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원나라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던 고려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원나라는  충렬왕의 정치적인 지위를 보장해 주는 대가로 소기의 목적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고려와 원나라는 정치 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유창한  몽고어를 구사하는 역관 유청신이 나 무예가 뛰어난 박구는 양국간의 외교적 군사적 관계를 원활하게 풀어주는 데 아주 필요한 존재였다.  고려 전기 부곡인의 처지와 비교하면 실로  엄청난 변화 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근본 원인은 군현과 부곡지역으로 각각  지역을 묶 어 인간의 지위를 차별화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구조가 크게 변화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고려 후기에는 전기와 같은 사회제도의  틀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 는 사회였다. 사회구조의 변화와 함께 의식도 변화하였다. 유청신과 박구가 부곡 인으로 지배층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고려 후기사 회는 변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귀족정치가 활짝핀 12세기 무렵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생산력의 발전으로 12세기 이후부터 고려사회는 지역간의 발전격차가 거의 없 어졌다. 그러나 부곡지역에 대한 차별적인 수취는 여전하였다. 따라서 지역과 신 분의 굴레가 이제 부곡인에게 하나의 사회모순으로  인식되었고, 이에 대하여 이 들은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무거운 세금과  부역을 피하기 위하여 거주지를  떠나 먼 산간 벽지로 도망하였는데, 이를 유망이라 하였다. 고 려시대는 다른 시대와  달리 민들의 유망현상이 더 많았다. 이는  본관제에 의해 거주지별로 법적  제도적 차별을 받았으므로,  이를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길은 해당 지역을 도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별을 받았던 부곡민이 더  많이 유 망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제재로  유망이 점차 어렵게 되자, 12세기 후반에는 정 부에 반기를 들고  직접 지방관과 정부를 공격하는 항쟁의 형태로  바뀌었다. 이 를 촉발시킨 또  하나의 계기는 1170년 무인들의 쿠데타였다. 하급  군인들이 귀 족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을 장악한 사실은 부곡인뿐만 아니라 하층민에게 지역 과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1198년 개경의 노비 만적은 봉 기를 모의하면서 ‘무인정변 이후 천한 사람들이  많이 관직을 얻었다. 공경장상 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기회가 오면 될 수 있다’고 한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무인쿠데타 소식은 이들에게 하나의 기회와 희망의  신호로 받 아들여졌다. 하층민들은 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정변으로  권력을 잡아 자신의 처 지를 얼마든지 바꾸어 나가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이제 제도와 법에 의한 제약과 굴레는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무인정변 이후 약1 세기간에 걸쳐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 가운데 부곡지역은 항 쟁의 중심지의 하나였다. 1176년  공주 부근의 명학소에 거주한 망이, 망소이 형 제가 봉기하였다. 이들 형제는 ‘비록 놈들의  칼날에 죽을지언정 항복하지는 않 을 것이다. 반드시 서울에 올라가 놈들을  없애버리겠다’는 비장한 심정을  토로 하였다. 이 말 속에는 그들을 차별하였던 정부에  대한 반감과 함께 새로운 시대 를 열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제 부곡이라는 행정구역은 이름뿐이었 다. 이러한  변화는 12세기 이후  사회구조의 변동과 함께  하층민의 사회의식이 성장한 결과였다. 이로써 부곡지역이 해체,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부곡인은 부곡 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유청신이 부곡지역을  벗어나 역관의 길로 들어선  것이나, 박구와 같이 재산을  모아 관직에 오르게 된  것은 단순히 이들의 개인능력이나 시대상황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부곡제와 같 은 전기 사회구조의 틀이 무너진 것이 더 중요한 배경이었다.
 
 고려 후기 하층민이 신분을 상승하는 길은?
 원과의 전쟁이 종식되고 양국간에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 지면서 새로운 인 물들이 지배계층으로 많이 편입하였다. 그 과정은  이전부터 정상적인 통로로 인 정되었던 과거제도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몽고어에 익숙하거나, 일본에  원정하여 공로를 세우거나, 원 나라의 환관이 되거나, 고려국왕이나 왕족의 시종이 되어 출세하였다. 여자의 경 우 원 왕실이나  고관의 부인이 되면 그 집안까지도 현달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현달한 인물들은 문벌이나  학문적 능력으로 관리가 되었던 명문가의 자 제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가계에  흠이 있거나, 출신지의 제약을 받은 노비 부곡 인 등 당시로서는  보잘 것 없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출세하더라도 서로 무리를 이루어 국왕이나 권력자에 기대는 측근이  되어, 당시 유행한 측근정치의 한 축을 이루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유청신과 같은 역관출신의 조인규였다.
 그는 고려말 위화도  회군 후 정도전과 함께  사전을 개혁하여 조선왕조 건국의 주역이 된 조준의 증조부였다. 조인규는 평양부근의  상원군 사람으로 원래 한미 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몽고어에 능통하여 출세하였다.  그의 딸이 충선왕의 왕비 가 되었으며 그도 충선왕의 측근이 되어 집안이  크게 번성하였다. 그는 같은 역 관 출신인 유청신과  함께 정치행로를 같이 하였다. 이와 같이  이들은 역관출신 으로 세력집단을 이루어 정치적 지위를 이어갔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 로 이어져 당시 신흥 명문가문으로 발돋움하였다.  심지어는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한 노비들도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출세하였다. 민족의  시련기라는 원간섭기 가 오히려 이들에게는 새로운  입신양명의 길로 들어서는 기회와 희망의 시대로 비춰졌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역설적인 역사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고려 후기는 과연 문란한 사회였는가
 조선 초기 역사가들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전기를 이상적인 사회로 평 가한 반면에 후기사회는 권세가와  간사한 무리들이 나라의 근본을 갉아먹은 문 란한 사회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고려  후기 사회의 문란상을 부각시키면 서,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곡인, 노비 등 하층민들이 지배 층으로 대거 진출한 사실이 유교적 대의명분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고려 후기는 전기와  같이 문벌이나 학문적  능력만으로 고위관직에 올라 명예와 부귀를 누리던 사회는 아니었다.  이제 기회만 주어진다면 누구든지 군사적 기예나 통역관으로  혹은 원나라의 세력에 기대어  명예와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이를 가장 반기는 계층은 그간 온갖 제약과 굴레에 묶여 있었던 부곡인, 노비 등 하층민중이었다. 이들이 출세의 길을 달리게 된 것은 개인의 능력, 시대 환경의 변화만도 아니었다. 12세기 이후 정치  사회구조의 변화로 하층민들의 사 회의식이 성장하였던 결과이다. 고려 후기 사회는  전기사회의 강한 제도적 규제 가 무너지면서 그  반작용이 곳곳에서 분출한, 한국사에서  낭만적이고 약동적인 사회상의 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기득권자인 지배층의 시각에서 보면 왕조의 몰락이라는  비극을 잉태한 문란하고 혼란된  사회였지만, 하층민들 의 눈에는 오히려 기회와 희망의 시대였다.
 군대 가는 사람 따로 있었다 - 권영국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 연기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에 너의 웃음이...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헤어짐의 아쉬움과 우정,  그리고 군복무의 비장한 각오가  표현된 입영전야란 노랫말의 일부분이다.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움, 힘든 훈련과 얼차려 등 말로만 듣던 군생활에  대한 두려움 속에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은 이 노래를 합창하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훈련소로 떠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와의 긴 이별을 경험하게 된 다. 젊은이들은  군입대를 반갑지 않은 인생의  장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군생활이 젊은  시절에 새로움을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3년이라 는 기간이 짧은 청년기에서 너무나 길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고려시대  사람들의 군대 생활은 어떠하였을까? 어떤 사람들이 군 대에 갔고, 복무 기간은  얼마 동안 이었으며, 군량과 무기는 어떻게 마련하였는 가 등의 여러 의문을 오늘날과 비교하면서 살펴보자.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나
 오늘날의 의무병제 아래에서도 권력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여러 편법을 동원 해 군역의 의무를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은 사회  권력층이나 부유 층 자제들의 현역입영 비율이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최근의 국정감사 자 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양반 신분과 평민. 천민.  신분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고려시대에는 군대에  가는 계층부터 오늘날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모든 양인 남자는 일단  법제상으로는 모두 군대에  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특권 지배층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군대에 가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 나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어 군대에 가지  않았다. 설령 군인으로 동원되는 경우 가 있다 하더라도 특별한  군사조직에 편입되거나 장교로 진출하여 일반인이 지 는 힘든 군역은  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군대에 갔을 까? 이 물음에  대해서 그 동안 연구자들은 서로 다른  견해들을 제시하였다. 하 나는 군사력의 중심을 이루는 중앙군은 농민이었다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 는 중앙군과 지방군 모두 일반 농민 출신의 군인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견해이 다. 전자는 신라 말기 중앙 귀족이나 지방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이 후삼 국의 전란 속에서  점차 전문적인 군인이 되고  신분도 아울러 향상되어 일종의 특수한 신분층을 이루게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군인을 핵심적  지배층인 문무 양반 속에  끼지는 못했지만 말단  지배층에 포함되는 중간  계층으로 이해한다.
 후자는 군인이  농민으로 구성되었다고  이해한다. 평상시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군인이 되어 개경에  올라가 도성을 지키거나 변경에 나아가 국경을 지켰다고 본다. 이처럼 지금까지  연구자들을 군인의 존재를 둘러 싸고 그 신분을 두 가지로 각기 달리 파악해 왔다.
 
 평상시엔 농민으로, 순번제로 군인되어
 최근에는 위의 두  견해를 절충하여 오늘날의 직업  군인과 같은 전업 군인과 일반적인 의무  군인의 두 부류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추세이다.  그러나 이처럼 두 부류의 군인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전체 군인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농 민 출신의 의무 군인이었고  이들이 국방력의 중심을 이루었으므로 결국 고려시 대의 군인은 병농일치의 존재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양인 농 민이 다 군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서  군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일부만이 군인이 되었다. 즉 군대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비교적 부유한 농민들이 군인으로 징발되었는데 이들을 정호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경 제적으로 생활이 어려워 생업을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되어서 군대 생활을 감당하 지 못하는 농민은  군인이 되는 대신 조. 용.  조 3세로 불리우는 조세의 의무를 졌다. 이들을 백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정 농민도 언제든지 군인이 될 수 있 는 후보자로서 군인이 부족한 비상시에는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이 경우 국가에 서 토지를 지급하여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군대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군인이  된 기본 계층은 농민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6 품 이하의 양반, 향리, 노비 등도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오면서 모든 농민층이 군인의  징발 대상이 되었다. 즉 농 업 생산력의  발전으로 농민들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안정되면서 그동안 농민층 내에 존재하던 정호와 백정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모든 백성이 군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점차 강화되면서 그동안 사실 상 군인으로 징발되지 않았던 양반층의 상당  부분이 군인으로 징발되거나, 간접 적인 형태로 군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기에는  거의 군인으로 징발되지 않던 노비도 일부가 군사조직 속에 편입되게 되었다.
 
 군대 생활은 얼마 동안 하였나
 오늘날 군인들의 복무기간은  육군이냐, 공군이냐, 해군이냐 또는 현역이나 보 충역이냐 등의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6개월에서 30개월 정도이다.
 고려시대 군인의 복무기간은 원칙적으로  16세에서 59세까지였다.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군대 생활로  보내는 셈이다. 물론 지금도 현역으로 제대한  후에는 예 비군이 되어 1년에 며칠씩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고,  또 제대 후 8년 동안 예비 군으로서의 의무가 끝난  다음에는 민방위에 편성되어 40세에 이르기까지 1년에 몇차례씩 소집에 응하여야 한다.
 군인들의 복무  기간이 16세에서 59세까지라고 하여도  44년간을 계속 군대에 매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3년에 한번씩  교대로 개경에 올라가 경비하거나 양 계 지역에 들어가  국경을 방어하였다. 따라서 16세에서 59세에  이르기까지 1년 은 군복무를 하고 2년은 자신의 고향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식의 군대 생활을 반 복하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40여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러한 군복무를 계속하지는 않았 을 것이다.
 아마도 20,30대의 건장하고  젊은 동안에는 3년에 한번씩 교대로  개경에 올라가 경비하거나
 변경에 나아가 국경을 지키는 군생활을 반복하였겠지만,  고된 군복무를 하기 어 려운 나이가 되면 오늘날  예비군과 비슷한 군사조직에 편입되어 자기 고향에서 향토를 지키거나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는  정도의 가벼운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오늘날의  군복무 기간인 2,3년에 비하면 엄청나게 긴  기간 동 안 군생활을 하여야 했다.

  군사 조직은 어떠하였나
 군사 조직에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이  있었다. 2군 6위로  구성된 중앙군은 그 기능에 따라  국왕과 궁성을 호위하는 부대와  수도 개경을 경비하는 부대로 구분되었다.
 2군 6위의 전체  병력은 편제상으로 4만 5천명이었다. 그 가운데  3만 8천명은 지방에서 교대로 개경에  올라와 도성을 경비하는 농민  의무병이었으며, 나머지 7천명 정도는 직업군적 성격의 전업군인이었다.
 지방군은 지역에 따라  남도의 주현군과 국경의 주진군으로  구분되었다. 주현 군은 보승군,정용군, 일품군  등 오늘날의 현역병과 같은  성격의 군인과 2.3품군 으로 불리우는 예비군적  성격의 군인으로 나뉘었다. 주진군은  동북면과 서북면 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초군. 좌군. 우군. 보창군. 영새군 등의 여러 부대 로 조직되었다. 특히 국경지역에는 토착주민으로 조직된  주진군 이외에 남도 주 현에서 교대로 수자리하러 오는 방수군이 주둔하였다.
 주현군의 수는 현역병이 약  5만여 명 정도였고 예비군의 성격의 군인은 이보 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한편 국경지역은 적과  바로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장정이 주진군 조직 속에 편입되어 그 수는 약 14만명 정도였다.

  군복무 중에 하는 일들
 군대 생활은 형식이나 절차,  내용 등에서 오늘날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오늘 날 대부분의 군인들은 전방에  배치되어 휴전선을 지키거나 후방에서 향토를 방 위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고려와 같은 왕조국가에서는  국경을 지키는 것 못지않 게 국왕이 거처하는  궁성과 도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따라서  수도인 개 경에는 많은 군인을 배치하였다.
 군복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부대와 병종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먼저 중앙군인 2군 6위의 주된  임무는 왕실과 도성을 경비하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2군은 국 왕의 신변과 궁성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6위는 개경을 경비하고 도성 안의 치안을 유지하였다.
 중앙군의 또  하나의 임무는 양계  지역에 들어가 국경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국경의 수비는 1년을  단위로 교대하였는데 비상시에는 그 기간이  더 길어졌다.
 이것은 군인의 임무  가운데 가장 힘들고 무거운  것이었으며 복무 기간 중이나 왕래하는 도중에 죽는 군인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이들의 시체를 수송해 주고 장례비용을 지급해 주는  등 군인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를 하 였다.
 이들은 또한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일어났을 때 이를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 다. 이러한 출정시에는 중군, 좌군, 우군,  전군, 후군의 5군이나 중군, 좌군, 우군 이 3군으로 편제되었다.
 지방군 역시 병종과  부대에 따라 임무에 차이가 있었다. 남도의  주현군 가운 데 보승군과 정용군은 교대로 개경에 올라와 자신이 속한 중앙의 6위에 각기 소 속되었다. 이 밖에  그들은 중앙과 지방의 각종 노역에도 동원되는  한편 일부는 교대로 지방관아  소재지에 나아가 향토 방위와  치안을 유지하였고 비번시에는 거주지에서 생업에 종사하였다.
 주현군 가운데 1. 2.  3품군은 성을 쌓거나 다리를 놓거나 궁궐을 짓거나 제방 을 쌓는 등의 각종 노역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들 품군도 비상시에는 모두 전 투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주진군의 임무는 국경  지역의 방어였다. 이들은 성을 견고히 하여  굳게 지켰 다.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고 등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을 받으면서 이들을 매번 물리칠 수 있 었던 저력은 다름아닌 이 주진군의 활약에서 나왔던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품군이라는 노동부대가 따로 조직된  것이 한 특징이기도 하였지만, 일반 군인들도  중앙이나 지방에서 벌어지는 온갖  노역에 동원되었으 며 이러한 노역동원에 대한  군인들의 누적된 불만은 무인정변을 일으키는 중요 한 원인 가운데 하나로 작용되기도 하였다.
 
 군량과 무기는 어떻게 마련하였나
 오늘날에는 군에 입대하면 자신이  입고 간 옷이나 신발을 비롯한 소지품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군생활에 필요한  군복. 군량. 무기 등 군수품 일제를 국가로 부터 지급받는다. 몇 푼 안되는 액수이지만 월급까지 받는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는 군복이나  군량은 물론 무기까지도  군인이 스스로 마련해야  하였다. 그러면 그들은 이러한 군수품들을 어떻게 마련하였을까?
 고려사에서 “국가는 기름진 땅을  나누어 42도부 갑사 10만여 인에게 녹으로 주었다. 그 때문에 그들의 옷과 양식과 무기가  모두 토지에서 나와 국가에서 따 로 군사를 양성하는 비용이 없었다”라고 한  것처럼, 국가에서 군량. 의복. 무기 등을 지급하는 대신 군인전이라는명목의 토지를 지급하여 군복무에 필요한 비용 을 군인 스스로 조달할 수 있게 하였다.
 군인전은 전업 군인과 의무  군인 모두에게 지급되었는데 지급 규정이나 토지 지배에 많은차이가 있었다. 전업 군인의 군인전은  관리에게 지급되는 토지와 마 찬가지로 전시과  규정에 따라 지급  되었다. 이들의 군역은  문무관리의 관직과 같은 직업의 성격을  띤 것이므로, 이들의 군인전은 관리에게 지급된  토지와 성 격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토지는 원칙적으로 자기  소유토지에 대해 수 조권을 지급하는 형태로 조세를 면제받았다. 그러나  토지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 에 한해 타인의 토지에서 수조권을 지급받았다.
 의무 군인도 역시  군인전이라는 토지를 지급받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지급된 군인전은 전업  군인에게 지급된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다. 이들은  일정한 규모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부농층이었으므로, 이들의 군인전은 본래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해 군인전이라는 명목을붙여 조세를 면제해 주는 것이었다.
 전업 군인은  직업 군인이었므므로 복무하는 기간  내내 군인전을 보유하였던 반면에, 의무군인의 경우는 실제 군인으로 복무하는  기간에 한해 군인전을 주었 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개경에 올라가 도성을  경비하거나 변경수비에 나아간 기간에 한해서만 그의 소유토지에 대해서 조세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복무 기간동안의 군인전 경작 과 군량 수송등을  위해 군인을 도와주는 양호를 지급하였다. 따라서  의무 군인 의 경우 16세에서 59세까지  군역을 지는 기간이라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군복무 를 하는 기간에 한해서만  군인전을 지급하였고 나머지 기간에는 일반농민과 마 찬가지로 조. 용. 조의 3세를 비롯한 각종 국역을 부담하였다
 군인전의 지급 액수는 지급 시기와 병종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전시 과에 규정된 전업  군인의 경우 대체로 20결에서 25결 내외를  지급받았다. 그런 데 고려 후기 공민왕때에  ‘예전에 국가에서 토지 17결을 1족정으로 삼아 군인 1정에게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전시과 규정과는 다른 계통의 자료로 바로 이것이 의무 군인에게 지급한 군인전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즉 전업 군인 이 아닌 의무 군인에게  17결을 1족정으로 하는 군인전을 지급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의무 군인들은 대부분 17결, 즉 1족정의 토지를 지급받지 못하였다. 족 정과 반정이라는 구분이 바로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대부분의 군인전은 족 정인 17결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에 미치지 못하는 7,8결 정도의 토지를 반정이라 불렀다.
 1결의 면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약 1,500평  정도로 보는 견해 에 따른다면 반정을 받은 대부분의 의무 군인은 약 1만평 정도의 토지를 군인전 으로 받은 셈이다.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 신안식(건국 대 강사)
 1198년 정월 노비 만적은  미조이, 연복, 성복, 소삼, 효삼 등과 더불어 개경의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노비들을 불러 모아 놓고 항쟁을 모의하였다.
 국가에서 경인년,  계사년 이후로 높은  벼슬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수와 정승이 어찌 종자가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들은 어찌 육체를 괴롭게 하면서도 채찍 밑에 곤욕을 당할 수 있느냐.
 그의 제의는 모두 그렇게 여길 만큼  설득력이 있었다. 무인정변으로부터 이에 저항한 김보당의 거사를 진압할 때까지 정국을 주도한 자들 중에 천한 노예출신 이 많았다는 주장은노비들도 신분상승할 수 있다는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 다. 만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힘을 모아 최고 집정자인 최충헌 등을 제거하 고, 각기 그 주인을  죽인 다음 노비문서를 불살라 버리면, 자신들이 공경장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비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자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 라 공경장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고 포기해 버리기에 는 시대 여건이 너무나 유동적이었다.
 
 노비신분의 굴레
 노비는 남자 노와 여자 비를 합하여 부르는  말이며, 소속에 따라 개인 소유권 사노비와 국가 공공기관 소유의 공노비로 구별된다.
 사노비에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가 있었다.  이들은 신분을 세습하거나 양인이 가난하여 몸을 팔거나, 전쟁포로, 그리고 권세가가 불법적으로 양인을 노비로 만 드는 경우 등으로
 사노비가 되었다. 솔거노비는 주인 호적에 올라가 있었고, 주인집에 살면서 나무 하고 취사하는 등 집안의 잡역을 담당하였다.  외거노비는 그의 거주지에 별도의 호적이 있었고, 주인과 떨어져 살면서 주로  농사에 종사하면서 생활하다가 주인 의 필요에 따라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들은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솔거노비는 주인의 매매, 증여, 상속, 탈취 등으로 인하여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그만큼  제한적이었다. 외거노 비는 주인과 떨어져 살아 주인의  간섭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 에 솔거노비보다는 현실적으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노비는 노비끼리 결혼하였다.  양인과의 결혼은 원칙적으로는 금지 되었지만 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 자식은  ‘일척즉천’의 원칙에 따라 부모 가운데 한쪽이라도 노비이면 노비가  되었고, 그 소유권은 ‘천자수모 법’에 따라 어머니의 주인에게  또는 어머니가 양인인 경우에는 아버지의 주인 에게 귀속되었다. 동시에  이들은 주인의 사유재산으로서 재물과  같은 존재였으 며, 죽임 이외에 주인의 횡포에 따른 어떤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였다. 주인이 반역죄와 같은 중대한 범죄에 관련될  때 고발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 노비는 주인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공노비는 궁궐과 관청 등 국가의 공공기관에  예속되었다. 전쟁 포로나 반역한 사람, 적에게 투항하거나 이적 행위를 한 사람들은 처형되거나 공노비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의 가족이나 사노비는 몰수되어  공노비가 되었다. 이들 중에 는 해당 관청의  잡역을 담당하고 그 대가로 생활하는 공역노비가  있었고, 따로 농사를 지으면서 규정에 따라 공납을 부담하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이들은 결혼 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다. 외거노비가  재산을 소유하거나 결혼을 할 때 는 공역노비보다 유리하였다. 이들은 60세가 되면 역에서 면제되었다.
 고려시대의 노비들은 위와 같은  신분적인 규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혜택 으로부터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다. 일찍이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에서 노 비와 같은 천류들은 그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양인이 되지 못하 게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무리 큰  공을 세우더라도 노비는 상금을  받는 것 외에는 관리가 될 수 없도록 제도로  만들었다.이것이 고려국가의 신분정책의 하 나였다. 물론 최씨무인집권기와  원 간섭기 등 사회 모순이 중첩된  시기에는 노 비가 중책을 맡은 경우도 있었지만 극히  예외적이었다. 그러나 신분상승의 기회 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분상승을 꿈꾸던 시대
 어느 시대든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있었다. 열심히 노 력하여 권력과 부를  얻거나, 사회체제를 변혁하는 경우이다. 고려시대에도 이러 한 사례들을 찾을 수 있다. 명종 때 노비  평량이라는 자가 출세한 것이 앞의 예 이고, 공주 명학소의 사람들과 다른 노비들의 항쟁이 뒤의 예이다.
 평량은 원래 평장사 김영관의 노비였는데, 견주(경기도 남양주)에 살면서 농사 에 힘써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권세가들에게 뇌물을 주어 노비 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고 산원동정이란 벼슬까지 얻게 되었다. 그의  아내도 소 감 왕원지의 노비였다. 무인정변 이후 문신  지배층들이 몰락하면서 왕원지의 집 안도 가난해졌는데, 그는 가족을 이끌고 노비의 남편인 평량에게 의탁하러 왔다.
 그러자 평량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개경으로 돌려 보냈다. 그리고  바로 뒤 이어 처남들을 보내  도중에서 죽여 버렸다. 아내의 주인이 없어지면  영원히 양 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뒤 그의 아들은  벼슬을 얻고 관리의 딸에게 장가도 들었다. 그러나  뒤에 왕원지의 가족을 죽인 사실이 드러나자, 평 량은 귀양을 가게 되었고 그의 아들들도 관직에서 쫓겨났다.
 공주 명학소의  사람들은 소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 때문에  봉기하였다. 소에 사는 사람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들을 전문적으로 생산해야 했기 때 문에 일반 군현의 주민들보다 역이 무거웠다.  또한 탐욕을 부리던 관리들로부터 도 많은 침탈을 받았다.  특히 무인집권기에는 더욱 심하였다. 이들이 항쟁을 일 으킨 때에는 평안도 지역에서  일어나 조위총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로 관군을 동원해야 했는데,  중앙 정부는 군사 동원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기 위 해 개경 이남 지역을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명학소의 사람들이 지금의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함락시키자, 중앙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올려 주어 불만을 누그러뜨리고자 하였다. 명학소  사람들은 이 조치를 받아들여  봉기를 중단하였 지만, 정부의 조치는 곧  속임수로 판명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다시 봉기하여 왕 경까지 점령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주모자인  망이, 망소이 등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고려시대 노비의 항쟁은 대략 10건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발생 시기는 주 로 무인집권기 이후이고, 발생 지역은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절반이 수도 개경에서 일어났다. 항쟁에 가담한  노비는 대부분 공역노비와 솔거 노비였다. 그것은 이들이  외거노비보다 주인이나 국가로부터 많은  수탈과 차별 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쟁의  동기도 신분적 제약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항쟁의 결과는 대부분 실패하여  참살되거나 강물에 빠뜨려져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무인정변 이후  정치적 격변과 향촌사회의 저항에 따른 사회적 혼란 및 대몽전쟁기의  경제적 궁핍, 그리고 몽고와 강화한 뒤  외세의 간섭이라 는 새로운 상황  등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났다. 따라서 노비들은  자신들의 신분 적인 차별을 극복하고 새로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항쟁하였으며, 때에 따 라서는 기존 지배체제에  저항하려는 세력들과 연합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노비의 항쟁이 수도 개경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것이 주목된다.
 개경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곳의 노비들은  다른 지방의 노비들 보다 사회의식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다.  그 점은 신분제  자체를 부정했던 1198년의 사노비 만적의 봉기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한 사회의식은 항쟁이 실패 해도 그 영향을 계속해서 남기고 있었다. 1232년(고종19) 몽고 군대를 피해서 중 앙 정부가 수도를  강화도로 천도하자 어사대에 속한 노비 이통이  봉기한 경우, 그리고 1271년(원종12년)  굴욕적인 대몽강화에 반발하여 삼별초의  항쟁에 동조 하려 한 노비 숭겸, 공덕의 경우 등에서 그러한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노비해방의 기치를 든 만적의 야망
 노비 만적은 이러한 시대 흐름 속에서  항쟁을 도모하였다. 만적은 노비신분에 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공경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 니다. 기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양인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권력을 잡겠다는 것이었다.
 만적이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무인정변 이 후 대대적인 문신 살육, 잦은 권력쟁탈로 인한 집권 무인세력의 빈번한 교체, 향 촌사회의 지속적인 저항 등  격변했던 사회적 상황에 따른 기존권위의 상실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최충헌의 정변과 그 이후  정변을 합리화하는 과정에서 더욱더 그러한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집권 무인세력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의민의 신분문제가 관심을 끈다.
 이의민은 무인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활약하여 크게  출세했던 인물이다. 그 과 정에서 견제를 받기도 하였지만, 그의 신분이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유 독 <고려사>  열전에서는 그의 신분이 노비로  되어 있다. 그의  아버지 이선은 소금가 체를 파는  일을 생업으로 하였고, 어머니는 경상북도 영일에  있었던 옥 령사의 노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의민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천인이었 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천인이면서도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키가 8척이고 완력 이 남보다  특출하다는 것과 무술을 좋아했던  의종이 배려해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이의민의  신분이 노비였는지 아니면 최충헌이  꾸며낸 사실이었는지 는 확인할 수 없지만, 노비신분으로 집권자가  되었다면 최충헌이 정변을 합리화 하는 데 매우 유용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적의  구호에서도 보듯이 이의민의 출세는  이 시기의 노비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노비의 아들이 권력의  최고 정점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노비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채찍 밑에서  뼈가 으스러지 도록 부림을 당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씨정권은 60여 년  동안이나 유지되었지만, 최충헌정권 초기는  아직 권력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무인정권 안에서도 권력쟁탈은 계속되었고  다른 세력 의 도전으로 인하여 언제 권력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권력쟁탈의 성 패는 집권자 한 명의 영욕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를 따랐 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권력자들의 노비들은 유사시에는 사병이  되기도 하였다. 명종  때 무인정권에서 벌어졌던  여러 번의 정변에서는 국가 공병이 동원되어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권력자들의 노비들도 실제로 행동대원으로 동원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노 비들은 처참한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결국 만적 등의 항쟁은 노비라는  신분 때문에 오는 당연한 불만 외에도,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오는  죽음의 공포와 육체적 수탈에서 비롯되는 분노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한편 만적의 항쟁에서는 그에 참여한 노비의  숫자가 상당히 많았고, 모의단계 에서 노비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려고 했던 사실이 주목된다.  만적은 동조하는 자들에게 누런 빛깔의 종이에 ‘정’자의 표식을  주었는데, 준비된 종이가 수천 장에 달하였다고 한다. 거사 당일의 행동방법에 대해서도 만적은, 흥국사에 모여 일제히 북을 치고 소리치면서  대궐의 뜰로 몰려가면 환관들과 관노들이 반드시 호응할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대궐의 환관들이  호응할 것이라는 장담이 사 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환관은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합세할 것이라는 것은  항쟁세력을 결집 시키는 데에  매우 고무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관노들은 주로  대궐이나 관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국가의 공공기관을 장악하거나  관리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유리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만적  자신과 다른 노비들은  최충헌과 자신들의 주인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러한  계획은 수도 개경의  모든 정치기구를 장악하고 권력가들을 단숨에 제거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만적의 지도력이  출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항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을 일으키기로 약속한 날에 모인 사람이 수백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적은 인원으로는  정변을 성공시 킬 수 없다고 염려하여 거사  날을 다시 잡아 일을 뒤로 미룬 것이 일차적인 화 근이었다. 만적은 “신중하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하니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 고 당부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사고는 내부에서 생겼다. 율학박사 한충유의 노비인 순정이라는 자가 주인에게 모의 사실을  고발하였다. 한충유는 이를 다시 최충헌에게 알렸다. 최청헌은  만적을 비롯하여 100여 명의 노비들을  잡아 강물 에 빠뜨려 죽였다. 그  나머지 동조한 수많은 노비들을 모두 죽일  수 없었기 때 문에 불문에 부쳤다고 한다. 반면 한충유는 합문지후로 승진되었고, 고발자 순정 에게는 백금 80냥을 주고 노비에서 해방되는 상이 주어졌다.

  재평가되어야 할 노비항쟁
 지난 역사 속에서 고통받은 자들에 대한  평가는 어떠하였는가. 역사의 소용돌 이 속에서 혁명에 성공한 자들은  그에 따른 영광스러운 권력과 부귀를 얻을 수 있었고 역사의 창조자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그에  반해 그들에게 도전하는 자들 에게는 ‘반란’이라는 이름  아래 그 실상을 왜곡한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 속 에서 사라져 간 선구자와 추종자들은 역사의 흐름 밖에서 잊혀진 망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세사회의  모순과 압박을 단숨에 뛰어 넘으려고 했던  많은 이 들의 외침은 역사의 흐름 속에 면면히 살아  있었다. 우리들은 역사 속에서 만적 을 생각할 때 노비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뛰어넘으려 했다는 점 에서 높이  평가한다. 왕에서부터 가장 아래까지  사람의 높고 낮음이 분명하고, 그것이 진리이던 시대에 미천한  지위의 한낱 노비가 신분제를 근본적으로 부정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고려왕조 500년 동안  우리는 만적 외에 그러한 인물을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조선시대의 임꺽정에 대한  평가도 마찬 가지가 아닌가 한다.
 만적의 항쟁은 그들이 지향한 이상이 원대하고,  세력의 조직화에 노력을 기울 였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저항보다도 격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비록 실패하였지만 성패를 떠나 신분제 사회를 철폐하려 했던 노력은 높이 평가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궁궐 기왓장에 서린 백성의 한숨 박종진(숙명여대 교수)
 공사장이 눈물바다를 이룬 사연은?
 1167년(의종21) 3월 어느날. 개경의 중미정 공사장은 때아닌 눈물 바다를 이루 었다. 사연은 이러했다. 중미정을  지을 때 부역나온 사람들은 식량을 스스로 조 달하는 것이 관례였다.  한 사람은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식량을  마련하지 못하 였기에, 다른 사람들이 밥  한술씩 나누어 주어서 그것을 먹고 일을  할 수 있었 다. 하루는 그 아내가 음식을 마련하여 왔다. “친한 분들을 불러서 함께 드시지 요.” “가난한데 이 음식을 어떻게 마련했소.  다른 남자와 사통하고 얻었소, 아 니면 남의 물건을 훔쳤소.”
 “얼굴이 못생겼으니 누구와 사통하겠으며 성격이 옹졸하니 어찌 도둑질을 하 겠소. 다만 머리를 잘라서 팔았을 뿐이에요.”
 아내는 짧아진  머리를 보여주었다. 남편은  설움이 복받쳐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고, 주위 사람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고려사>에 실린 내용이다. 의종은 즉위 초 왕권강화책을 추진하였지만, 그것 이 좌절되자 말년에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친한 신하들과 어울려 자주 놀러다녔 다. 중미정은 그러한 의종  말년의 분위기 속에서 지어졌다. 중미정 공사에 동원 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또 그들은 왜 고픈 배를 움켜쥐고 일을 했을까?
 이들은 일반 백성이었고 요역에 징발되어 국가의  일을 하였다. 이처럼 국가의 일에 동원되어 일하는 것을 요역이라고 한다.  국가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은 일반 백성들로부터 징발하는 단순 노동력뿐  아니라, 군역. 향리역. 기인역. 공장역 등 의 직역도 있었다. 그렇지만 직역은 역의 대가로  토지 등을 받는다는 점에서 아 무런 대가가 없는 요역과는 성격이 달랐다.
 그러면 백성들은 요역으로 어떤 일을  하였을까? 대표적인 것이 토목공사이다.
 여기에는 궁궐. 관청. 절 등  주요 건축물을 짓고 수리하는 일, 성을 쌓는 일, 왕 릉을 조성하는  일, 저수지를 만드는 일이  포함되었다. 또한 백성들은 세금으로 거둔 곡식 등을  운반하는 일에도 항상 동원되었다. 그 밖에  토지개간이나 국공 유지의 경작 등 농사활동에도 징발되었다. 또한  왕이나 사신의 행차를 맞이하는 일 또한 중요한 요역의 하나였다.
 요역 징발은 중앙 정부에서 주도하는 것과 지방 군현에서 주도하는 것으로 나 눌 수 있다. 중앙 정부에서 주도하는 요역으로는 토목공사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공사에는 군인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성  쌓기를 제외하고는 주로  공사 현장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징발하였다. 반면에  세금으로 거둔 곡식  등을 운반하는 일은 지방 군현에서  주도하는 요역의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 밖에  지방 군현에 서는 수령이나 향리들이 임의로 징발하는 일도  많았는데, 국가에서는 이러한 역 을 잡역이나 급하지 않은 역이라 하여 금지하였다.  수령의 임무 중 “부역을 균 등히 해야한다”는 규정은 이와 관련이 있다.
 
  우리만 왜 힘들게 일하지?
 요역 징발의  대상은 원칙적으로  16세에서59세가지의 양인 남자였다.  따라서 노비와 호적에 등록되지 않았던 양수척은 징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양인 층을 요역으로 징발하지는 않았다. 관직에 있는  사람을 비롯하여 군인. 향리. 기 인등 직역을 하는  사람은 요역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효자. 의부. 절부 와 부모를 시중드는  장정과 중환자는 규휼의 명분 아내 역을  면제하였으며, 승 려도 징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이들을  징발하였을까? 고려 전기의 경우 사람 수의 많 고 적음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이 등급에 따라서 요역을  차등 징발한 셈이 다. 이는 조선  초기 토지 면적을 토대로  징발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초 (경국대전)에는 토지 8결당 사람1명을 징발하여 6일동안  부리는 것으로 되어 있 다. 징발 기준이 사람 수에서 토지 면적으로 바뀐 것은 중요한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에 주목하여  고려사회를 인신적인 지배에 기반한  고대사회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사람 수에  따라 요역을 징발하였다고 하여 그 사회를  고대사회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중세사회에서도 인구에 대한  파악과 지배는 여전히 중요하 였기 때문이다.
 이제 구체적인 노동조건을 살펴보자. 우선 요역  징발은 농번기를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지금 확인할 수  있는 주요 노동력 징발이 농한기라 할  수 있는 음 력6, 7, 8월과  12, 1,2, 3월에 집중되어  있으며, 노역을 중지하는 시점도  농사가 시작되는 3, 4월에 집중되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니다. 고려시대의 요역 징발기간 에 대하여는 중국 당나라의 규정이나 조선 초기의 기록을 토대로 1년에 20일 정 도였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규정이 무시되기도 하였으며, 대규 모 토목공사인 경우는 농번기가 되어도  일을 끝내지 않았고 심지어 몇 년 동안 계속 일을 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책임자들이 과잉 충성하여 밤낮으로  일을 시 키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물론 사람을 규정 이상으로 초과 징발하였을 경우 다른  세금을 감면하였지만, 이것으로 부당 한 징발이 과연 보상되었을까.
 노동조건 역시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이었다. 가장  중요한 식량의 경우 앞 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대개는 징발된 사람들이  스스로 준비하였다. 왜냐하면 부 역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일일이  식량을 지급하는 일은 국가의 일반 재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종때 대안사를 지었는데, 이 때 징발된 사람들은 밤낮으로 일을 하였고, 이들에게 음식을 나르기  위한 아내와 자식들의 발걸음이 봄부터 여름까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 가족까지도 식량  조달 때문 에 노동력을  빼앗겨 농사를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징발된 사람들이 항상 음식을 스스로 조달한 것은 아니었다.  구휼의 차원에서 특별히 사람들에게 음식을 지급한 예가  있다. 또 원종 때  일본 정벌을 위해 전함을 건조하였는데, 이 때 징발된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제공하였다.
 식량 외에도 의복과  각종 도구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심지어  군인들도 개 인 장비와 군복을 스스로  준비했던 사실은 요역노동에 징발된 백성들의 부담을 짐작하게 한다.  이런 상태에서 변변한 잠자리를  기대하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주로 공사장 부근의 군현에서 사람을 징발한 것은 물자를 스스로 조달해야 하는 원칙 때문이었다. 이렇듯 노동의 조건은 매우 열악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커다란 고통 속에서 일을 하여도 굶주리는  동료를 위해 부족한 밥을 나누어 주는 인정 은 가난한 백성 사이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백성의 피땀으로 세워진 궁궐과 절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궁궐과 절이다.  기둥 하나 기왓장  하나 하나 모두 백성의 힘으로 만들었으며,  거기에는 그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정종 이 서경으로 서울을  옮기기로 하고 사람을 징발하여 원망이 많았는데,  그가 세 상을 떠나자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기뻐서 날뛰었다고 한다.  힘들도 고통스 러운 요역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심정은 기뻐서 날뛰고도 남았으리라.
 이렇듯 백성들의 노력과  원망으로 궁궐은 지어졌으며, 국가  사업으로 창건한 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국가주도로 궁궐과 정을  짓는 과정을 살펴보자. 국가 차원의 토목공사가 결정되면 왕은 그 일의  책임자인 동역관을 임명하였다. 동역 관에는 내시. 환관 등  왕 측근인사나 재상의 반열에 드는 고관들이 임명되었다.
 왕은 동역관에게 사람을  징발하고 일을 추진하는 권한을  위임하였다. 동역관은 일의 규모등을  고려하여 계획을 세우고  계획에 따라 사람을  징발하였다. 일의 규모와 공사의  위치에 따라서 징발계획을  세우는데, 이 때  군현단위로 작성한 호적을 기초자료로 썼다. 일의 성격에 따라서 군인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일반 적으로는 막일꾼이라 할 수 있는 일반 사람과 전문 기술자라 할 수 있는 공장을 징발하였다. 1029년(현종20)개경의 나성을  축조할 때에는 막일꾼238,939명과공장 8,450명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공사를 하는 부근의 군현에서  징발하였다. 현종이 중광사와 나 성을 축조할 때에는 개경사람을 징발하였으며, 인종이  서경의 신궁을 건설할 때 에는 서경사람을 징발하였고, 충예왕이 개경의 신궁을  건설할 때에는 근처 군현 에서 사람을 징발하였다.  개경 부근의 백성들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은 요역 에 시달렸고, 이에 따라  요역을 감면하라는 명령도 자주 내려졌다. 특히 교주도 는 좋은 목재가 많아서 큰 공사가 있을 때마다 벌목이나 나무운반 같은 힘든 역 을 지곤 하였다. 또  개경과 서경을 잇는 길 주변의 군현은  왕이나 사신의 행차 가 잦은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역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렇듯 요역은 모든 군현의 백성들이 똑같이 부담한 것은 아니었다.
 동역관은 해당 군현의 수령과  향리의 도움을 받아서 정해진 군현에서 사람을 징발하였다. 결국 각  군현에 할당된 사람을 징발하고 동원하는 일은  수령과 향 리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 국가차원의 공사라도 규모가 작은 경우  해당 군현 의 수령이나 향리층이  감독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명종 때 국가에서  군대를 파 견하여 배를 만들 때 전주의  하급 관리인 진대유와 향리인 이택민이 함께 역을 감독하였다.
 한편 징발된 사람들이  일하러 나오지 않으면 엄벌에 처하였다. 1097년(숙종2) 에는 빠진 날  수에 따라 1일에 태40, 4일에50, 7일에  장60, 10일에80, 13일에90, 19일에100, 23일에도1년이라는 가혹한  벌이 정해졌다. 향촌에서 촌장이 과역 대 상자를 빠뜨렸을 때에도 엄하게 다스렸다. 이러한  것은 노동력을 지배하려는 국 가의 강한 의지를 잘 보여 준다.
 
 삯노동이 필요했던 까닭은?
 요역노동은 일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부역노동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반면에 삯노동이란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다. 고대나  중세사회에서도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삯  노동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절을 지을 때 일이  없이 노는 사람을 고용한 사례는 고려 전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고려 후기에 와서 더 욱 일반화되었다. 따라서 요역제도의 변화와 관련하여  주모되는 것은 공적인 일 에서의 삯 노동이다. 국가의 공적인 토목공사에서  고용노동이 일반화 되는 것은 중세 노동력  지배정책의 붕괴현상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변화로 요역노동의 운영이  어려워지는 조선  후기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도 공적인 역사에서 고용노동이 존재하였을까. 있었다면 그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고려후기에 들어서면서 지배층들에게  토지가 집중되고 호적제도가 제대로 운 영되지 못하면서 민호의  유망이 심화되었다. 이 때문에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 노동력을 제대로 징발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부족한 노동력을  품종 등 으로 보충하기도 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역부를 고용하기도 하였다. 품종은 구가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품관 등의 지배층으로부터 그들이 보유한 노동력을 징발하는 일종의  임시세이다. 충렬왕 6년 궁실 수리를  위하여 관료로 부터 품종을 징발하였는데, 노비가 없는 양반은  녹봉지급증서인 녹패를 팔아 사 람을 고용하여 부역 나간 사례가 있다. 이것은  양반 개인 차원에서 사람을 고용 한 예이기는 하지만,  이를 통하여 고려 후기에 삯노동의 여건이  어느정도 성숙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청을 짓는  데에 사람들이 고용된 사례도  있다. 133년(충숙왕후2)궁중 안에 있는 6개 관청의 청사를 개축하면서 재원이 부족하자 개인 집에서 돈을 빌려 재 목과 기와를 샀으며,  관에 일할 사람을 청했지만 얻지 못하자  사적으로 고용하 였다. 또 1390년(공양왕2)도평의사사의 청사를 새로 지울 때에도 필요한 모든 노 동력을 고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호적제의 문란  등으로 요역징발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따라서 이것을 일반화시켜 고려 후기에  요역제 자 체가 변화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국가의 공적인 역사는  주로 일반 백성들의 노동력을 징발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한편 국가의  역사에서 삯노동을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고용할 인부와 인부를 살 재정을  확보하여야한다. 특히 재정은  역의 징발대상자가 노동력  대신 내는 현물세에  의하여 충당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예가 이른바 ‘역가 ’이다. 명종 때  수령과 향리들이 백성으로부터 역가를 받고 공물  조달의 역을 면제해 준 사실이 있다.   이는 불법적인 것이어서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았지만, 요역 대신 역가를 받는  관행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관청에 예 속된 기인이 도망가자 관청에서  해당 주군으로부터 기인의 역가를 받은 사례가 있으며, 이러한 것은 품종에게도 적용되었다.
 요역노동은 일의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 외에도 부정기적인 경우가 많아서 농업 등의 생업을  어렵게 하였다. 도한 징발기준도 분명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 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역의 징발이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 가 일에 따라서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일에 나가지  않으면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요역이란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쓰라린  고통이요 무 거운 짐이었다.
 요역노동은 국가운영에 필요한 현물과 노동력을 직접 거두어서 쓴다는 고려시 대 경제운영의 원칙에 입각해 있다. 이것은  당시의 경제수준에 근거한 것이었지 만, 그 부담이 컸기  대문에 계속 백성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따라서 국가에서도 호구 파악을 철저히 한다든지, 수령이나 향리들의 중간 수탈을 방지한다든지, 농 번기에는 요역징발을 금지한다든지, 징발기준을  사람 수에서 소유토지의 면적으 로 바꾼다든지, 다른 부세를 감면하는 등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통하여 요역 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국가에서 노동력이  필요할 때마 다 노동력 자체를 징발하는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대책은 마련할 수 없었다.
 
 남성 부럽지 않은 고려 여성 이정란(고려대 박사과정)
 ‘첩 두자’는 상소에 팔 걷어부친 여자들
 고려가 일부일처의 사회였는가  아니면 일부다처의 사회였는가는 아직 확실하 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법적으로는 일부일처였다가, 고려말이 되면 일부다처제 였던 몽고의 영향으로 일부 관인층 사이에서 일부다처의 경향이 나타났다.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시기의 해프닝으로 ‘박유사 건’이 주목된다. 원  간섭기에 박유라는 재상은 평소에 늘 주위  사람들에게 주 장하기를 ‘고려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으므로 여자의 머리가 희어지도록 결 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면서, 조정에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우리 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지금 신분의 고하를 물론하고 처를 하나 두는 데 그치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자들까지도 감히 첩을 두려고 생 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인원수의 제한 이 없이 장가를 드는데 이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모두 북쪽으로 몰려가게 될 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처와 첩을 두게 하되  그 관품에 따라서 그 수효를 줄여서 서인에  이르면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첩을 얻도록 법 제를 만든다면, 원성은  줄어들고 인구는 번성될 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하는 도 리도 됩니다.
 이 상소문의 내용이 알려지자  부녀자들이 모두 박유를 원망하며 앞으로 변화 할지 모를 상황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마침 연등회를 보기 위해 박유가  왕을 모시고 가는 것을 본  한 노파가 “첩을 두자고 건의한 거렁뱅이 늙은이다”라고 외쳤고,  이에 주위의 여인네들이 모두  그에게 손가락 질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시 재상들 중에  자신의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었 기 때문에 박유의 건의는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 기록은 고려가 당시까지  일부일처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 니라 이후에 일부다처의  경향이 유행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당시 원나라 와의 오랜 전쟁으로 실제 남자의 수가 여자의 수에 비해 훨씬 적어 결혼하지 못 하는 여자들이 생겨났고,  또한 일부다처의 사회였던 몽고의  영향으로 고려말에 일부 관인층 사이에 일부다처의 경향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시집살이 않은 여성, 처가살이하는 남성
 고려시대에는 남녀가 혼인한 뒤 어느 쪽에서 거주했을까? 당연히 남자 집에서 살았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고려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고려는 주로 서류부 가혼이 일반적이었다. 즉 결혼식을  처갓집에서 하고, 결혼 후에도 일정 기간 사 위가 처가살이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겉보리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하지 않는다”라거나  “뒷간과 처갓집을 멀수록  좋다”거나, “출가외인”이란 말은 모두 조선시대에 나온 말이다. 왜냐하면  고려의 경우는 처가살이가 일반적 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위가 처가살이 자체를  어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가 살이를 계속하여 자신의 손자까지 처가에서 보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왕자도 외가에서 자라는 경우가 있었다. 인종의 어머니는 유명한 이자겸의 딸로, 인종은 어렸을 때 외가에서  자랐다. 비록 인종의 아버지인 예종이 이자겸의  집에서 처 가살이를 하지 않았더라도 인종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서 자란 것이다. 유명한 관리의 묘지명을 보면 그들  중 상당수가 외가에서 자라 외할아버지나 외삼촌의 은혜가 크다는  기록도 흔히 나오고  있다. 처가살이가 고려시대  일반적인 결혼 생활의 한 가지 유형이었던 만큼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자들이  시집살이를 강요당했던  조선시대에 비하면 고려의  여성들이 친정에서 결혼  생활을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대단한 특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비록 시집살이를 하였더라도  남편이 사망하여 과부가 되었을 겨우 계속해 서 시집살이를 해야만 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의 경우에는 과부들 중 상당수 가 친정에 되돌아가서 생활을 하였다.
 
 아들 딸 차별없이 균등 상속, 균등 의무
 고려시대 재산상속은  자녀간의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 부모의 유언이  없을 경우 재산은 자녀간에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당시  재산의 균분은 관습적인 것이 어서 누구나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부모가 죽은 후 형제자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기를 꺼렸던 이지저는 당시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다음의 사례는 자녀간 균분상속의 관행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손변이 경상도의 안찰사가 되었는데, 그 고을에  남동생과 누이가 재산 문제로 송사를 벌이고 있었다. 남동생은  “한 부모에서 태어났는데, 어찌 누이 혼자 재 산을 갖고,  동생은 그 몫이 없단  말입니까”라고 하였고, 누이는 “아버지께서 임종하실 때 전 재산을  나에게 주고 네가 가질 것으로는 검은 옷  1벌, 검은 관 1개, 신발  1켤레, 종이 한 장뿐이었으니,  어찌 이를 어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송사가  여러 해 동안 해결되지  않았는데, 손변이 부임해 와서  이 송사를 듣고 이르기를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균등한데 어찌 장성하여 결혼한 딸 에게는 후하고, 어미  없는 어린 아들에게는 박하겠는가? 어린아이가  의지할 자 는 누이였으니 만일 누이와  균등하게 재산을 물려주면 동생을 사랑함이 덜하여 잘 양육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이 성장하게  되면 물 려준 옷과 관을 갖추어 입고서 상속의 몫을 찾기 위해 탄원서를 제출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종이와 붓 등을 유산으로 남겨  준 것이다”라고 하니, 누이와 남동생 이 서로 부여잡고 울었다.
 이 사례를 통해서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자녀간의 균분상속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비록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균등하지 못한 유산상속을  했더라도 이것은 아버지 본심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판결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녀간에 균분상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그에 따른 의무도 균 등하였음을 의미한다. 재산상속에 따른 자녀의 의무는  부모 살아서는 부모 봉양 을 잘 하는 것이고, 부모 죽어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를 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 생전에 부모에 대한 봉양은 조선  후기 이후에는 전적으로 장남의 몫 이었던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딸도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부 모가 딸과 사위와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부모 봉양에 있어 딸의 역할이 상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호적에서 아들·며느 리와 동거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딸·사위와 동거하는 경우가  상당수에 달했다 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부모 죽어서는 부모에 대한 제사가 바로 재산상속에 따른 또 하나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중기  이래로 조상에 대한 제사는 장자의 책임이었고, 이런 책 임을 맡은 장자는 그  의무에 상응하여 재산상속에 있어서도 봉사조라는 명목으 로 적어도 20퍼센트를 더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제사는 장자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의무이자  권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행은  그 이후로도 계속되어, 1990년에  민법이 개정될 때까지는  호주는 재산상속분에서  5할을 더 가산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고려나 조선 전기에는  제사가 장남만 의 몫은 아니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조상에 대한 제사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돌아가며 맡았는데, 이를 윤행이라 하였다. 즉 재산균분에 따라 제사도 자녀간에 균등하게 돌아가며 이루어졌던 것이다.

  아내 재산 따로, 남편 재산 따로
 고려시대에는 여성에게 균등한 재산상속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상속받은 몫에 대한  여성의 재산권 행사가  인정되고 보호되었다. 호구단자  등에 기록된 노비의 기록을 보면, 노비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점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는 여성이 가지고 온  노비의 소유권이 결혼하여 남자  집에 산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즉 여자가 결혼할  때 데리고 간 노비는  결혼했다고 하여 남편에 귀속되지 않고  부인에게 그대로 소유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부인이 재 혼할 경우나, 또는  후손이 없을 경우에 부인쪽의 노비는 다시  친정으로 귀속됨 으로써 노비의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방지했던 것이다. 이는  결혼한 여성이 자신 명의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  나라가 법적 으로 부부 별산제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부인 명의의 재산에 대해 세 금을 더욱 높게 매김으로써 여성의 재산권 행사에  제한을 주는 것에 비하면, 고 려시대 여성의 재산권 행사는 보다 안정적으로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혼뿐만 아니라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조선시대에 여성의 재혼이 금지되고, 수절을 강요당한 것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고려시대에는 이혼율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송나라 사신 의 고려 견문기인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인들은 쉽게 결혼하고 쉽게 헤어 져 그 예법을 알지 못하니 가소로울 뿐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이혼이나 재 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시대상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이혼을 요구하는  쪽은 여성측보다는 남성측이 훨씬  많았다고 할 수 있 다. 남편에 의해 이혼이  쉽게 요구되는 사례를 잘 보여 주는  것이 권수평의 경 우이다. 당시 견룡이란 관직은 비록 지위는 낮지만  권귀에게 총애를 얻을 수 있 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원하였다. 권수평은 이  관직에 보임되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사양했다.  그 때에 친구가 이르기를  “이것은 영광스런 것이다. 대개 부인을 바꿔 부를  구하는데, 그대가 만약 새장가를 간다면 부잣집  중에서 누가 딸을 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여기서 당시  부를 핑계로 이혼하고 새장가를 가는 경우가 흔히 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달리 이혼이 남성측 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충숙왕의 다섯 번째  부인인 수 빈권씨는 원래  전형이란 사람에게 시집갔으나,  전씨 집안이 좋지  않다고 하여 이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왕명에 의탁하여 이혼을 하고 그후에 왕비가 되었다. 이 경우는 매우 특수한 예이지만, 어쨌든 여 성에 의해 이혼이 요구되었던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이혼은  남편과 부인 어느 한  편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한 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금지 되었다. 이미 설명한 수비권씨의 경우도 남편의  집안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는 이혼을 할 수 없어, 왕명에 의해  강압적으로 해서야 이혼이 이루어졌던 것이 다. 또한 법적으로도 부모의  양해가 없거나 또 이유 없이 처를  버리는 자는 관 직에서 파직되고 유배당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처럼 “칠거지악”이란 아주 애 매한 조건으로 부인을 버릴 수는 없었다. 특히  가문을 중시했던 조선과 달리 애 (아들)을 못 낳는 것을  이유로 부인을 버리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고려시대에는 아들선호사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 었기 때문이다. 열전이나  묘지명의 기록 중 “무자”라고 하여 자식이  없는 경 우가 허다하였다는 것이 비로 이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혼 이후에  또는 과부로서 재혼은 법적으로 가능했는가? 고려시대 에 법적으로 재혼이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에 의해 청원된 다음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산기 이상의 처로 외명부의 사람이 된 자는  재가를 허용하지 말고, 판사 이하 에서 6품 이상 관리의  처는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재가를  허용하지 말며, 어 긴 자는 실절한 죄로  처하십시오. 또한 산기 이상 관리의 첩 및  6품 이상의 처 와 첩이 스스로 수절하기를 원하는 자는 문려에 정표하여 상을 주십시오.
 이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마직막  왕의 재위 기간까지도 여성의 재혼이 계속 이 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록은 일반 여성에  대한 재혼 금지규 정이 아니고, 산기 이상 관리의 처로 외명부에  속한 여성의 경우 재혼을 허용하 지 말고, 6품 이상 관리의 처인 경우도  3년간만 재혼을 허용하지 말자는 것이었 다. 그것도 청원에 불과한 것이어서  실제 시행 여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고려시대에는 여성의 재혼을 법적으로 제한한 적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에 여성의 재혼은 흔히 이루어지고 있어서 왕의 부인중에도 재혼녀가 있었다. 이미 앞에서 본  충숙왕비인 수비권씨의 경우도 그 예이다. 충렬왕의 세 번째 왕비인 숙창원비도  역시 과부였는데, 왕에게 재혼하였다. 또한 충선왕비인 순비허씨는 원래  평양후 현에게 시집가서  3남4녀를 낳았는데, 남편이  죽자 그 후 충선왕의 비가 되었으며, 그 자식들은 모두  왕자와 공주의 예로써 대우를 받 았다고 한다.
 당시 여성의 재혼이 흔하였음을 보여주는 용어로  의자라는 것이 있다. 의자란 전 남편의 자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이런 의자에게도 음서의 혜택 이 주어지고 있었다. 의자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으며, 이들이 음서의 혜택을 누 릴 수 있는 대상에까지 끼었다는 사실은  의자가 일반적인 존재였음을 암시하며, 따라서 여성의 재혼이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도 호주가 되었던 사회
 고려시대는 “양측적  친속사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친족의  범위가 조선시대에 부계만을 강조하였던 것과는  달리 모계도 역시 거의 같은 비중으로 중시하고 있던 사회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친족범위에  대한 민법 규정은 1990년 에 와서야 비로소 개정되어 부계와 모계 혈족  모두 8촌 이내로 되었다. 이 민법 의 개정 이전에는 조선 후기 부계중심의 종법제도의  영향으로 부계 8촌, 모계 4 촌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이제야 비로소 또 하나의 전통을 계승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양측적  친속사회였던 고려에서는 그만큼 친속 내에서 외 가나 처가의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기에 처속이나 외가의 친족 내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오복제와 음서제이다.  오복제는 상례에 상복을 입는 친족의 범위와 상복의  종류를 정한 법이다. 아버지의 상에는 가장  높은 단계의 상복인 참최 3년복을  입고 어머니 상에는 자최 3년복을 입으며,  조부모 상에는 그보다 낮은 단계의  상복을 입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웃나라였던  중국에 비 해 고려시대에 시행되 있던 오복제는 상대적으로 처족이나 외가에 대해 큰 비중 을 두고 있었다.  즉 중국에서는 외할아버지 상에 5개월 상복을  입은 것에 비해 고려의 경우는 1년  상복을 입고 있으며, 중국에서 상복을 입지  않았던 처의 형 제에 대해서 고려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것은 그만큼 고려시대에는 처족이나 외족이 친족  내에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따라서 그만큼 친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 관리등용방식은 과거제도 이외에  음서제도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음서제도에도 여성의 지위가 반영되어 있었다. 당시  음직이 수여되는 범위는 해 당 관리의 아들.손자.사위 등에서, 협5녀나 심지어 협22녀에까지 이르고 있다. 협 5녀나 협22녀라는 것은 가족의 계보에 끼어  있는 여성의 숫자를 의미한다. 이것 을 그림으로 그리면 옆과 같다.
 옆의 그림에서와  같이 음직은 남성에게 주어지는  것이므로 음직을 주고받는 처음과 끝은 남성일지라도 그 사이에 1명에서 5명의 여성이 끼어 있는 집안에까 지 음서의 혜택을  주는 것이 바로 협5녀의  규정이다. 이렇듯 어머니에서 딸로, 비록 중간에 몇 명의 아들이  끼어 있을지라도 정해진 숫자만큼 여성이 있는 집 안에까지 음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으므로,  고려시대의 족보는 조선시대에 남 계만을 기록했던 것과는 달리  여성 쪽도 끝까지 밝혀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만 약 여성의 계보를 기록하여 놓지  않는다면 음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 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시대 족보가 음서의 혜택을  누리려는 목 적만으로 여성의 계보를 기록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적 통 념상으로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에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호적에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고려 시대 호적을 보면,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 비록 장성한 아들이  있더라도 어머니 가 호주가 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호적에 기록된 형제  자매의 서열 순서 는 무조건 아들을  우선 순위로 기록하였던 조선시기와 달리 출생  순서였다. 즉 누이와 남동생이  있는 경우 호적의  기록은 누이와 남동생  순서로 이루어졌다.
 또한 묘지명 등의 기록을 보면 낳은 자녀의 수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무조건 ‘ 몇녀 몇남’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문제인 듯 싶지만, 당 시 여성의 지위를 단편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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